소설리스트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35)화 (36/121)

제35화. 세계 밖의 세계(4)

소티스는 빈민가의 사람들이 가져온 약차를 보고 울 것처럼 웃었다.

“행복해요.”

그녀의 짧은 말에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뿌듯함, 고마움과 행복감이 가득했다. 발그레해진 뺨은 꼭 열이 아니라 기쁨으로 상기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제가 직접 사람들을 도운 거잖아요. 제 진심이 어떤 장벽에도 가로막히지 않고 고스란히 전해진 것도, 그리고 그 마음에 어떤 응답이 돌아온 것도 처음이에요. 모든 게 너무나도 신기하고 기뻐요.”

그녀는 쓰디쓴 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셨다.

“진작 성 밖으로 나와 볼 걸 그랬어요. 왜 그렇게 얌전히 지내기만 했는지…….”

소티스는 물병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마법사님이 아니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겠지요. 당신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들뜬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았다.

그녀는 그를 만난 일이 제 삶에 몇 차례 찾아오지 않는 행운이며, 직접 무언가를 해내는 요 며칠은 힘들면서도 뿌듯한 경험이라고 거듭 말했다.

작게 이어지는 그 말은 꼭 잊힌 언어의 노랫말처럼 들렸다. 레먼은 소티스의 머리맡에 앉아 그녀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넘기며, 그녀가 무어라 말할 때마다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소티스가 잠들었을 때, 그는 여인의 얼굴을 아주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소티스 메리골드, 태양 같은 여인. 그는 감히 흉내 내지도 못할 만큼 찬란한 영혼으로 세상을 굽어살피는 여인.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레먼은 문득 에드먼드가 야속하고 원망스러워졌다. 만일 자신이 그였더라면, 이토록 훌륭한 여인의 곁에 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을 것이다. 그녀의 조언은 무엇이든 경청하고,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다 선물하고 싶어 안달이 났겠지.

“……아.”

평화롭게 잠든 소티스를 내려다보던 레먼은 짧게 탄식했다.

처음에는 그저 찾은 것만으로도 기뻤다. 은인을 다시 만날 날만을 오래도록 기다렸고, 보은할 수만 있다면 더 빌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곁을 지키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인데…….

레먼 페리윙클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소티스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희미한 숨소리마저도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입술이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레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얼른 일어나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친 짓이다. 미친 게 틀림없다. 아무리 좋아한들, 잠든 사람을 상대로 어떻게.

그는 소티스의 모습을 힐끔 바라보다가 방을 나섰다. 도망치듯이 옆으로 향한 그는 문에 등을 대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알고 싶지 않았던, 자신에게마저도 숨기고 싶었던 어떤 욕심을 들켜 버린 것 같았다. 창피해서 얼굴이 터질 것 같다. 레먼은 연신 마른세수를 하며 숨을 가다듬었다.

“소티스 님.”

그가 소티스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탄식에 가까운 어조였다.

“소티스 님.”

그 이름을 부를 때면, 어떤 감정이 풍선처럼 부풀어 그의 안을 꽉 메우는 듯했다. 뭉클하면서도 벅차오르는 이 기분을, 무어라 표현해야 좋을까.

“저는 왜…… 시간이 지날수록 당신이 좋아지기만 할까요?”

영문도 모르고 커진 이 사랑은 하루가 다르게 대책 없이 자라기만 해서, 레먼은 이따금 두려워졌다.

그는 그녀를 얼마나 사랑할 수 있을까. 이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야말로 속절없이 사랑하고 있었다.

***

사람들의 말대로였다. 이튿날이 되자 소티스의 열은 말끔히 내렸다. 목덜미에 올라왔던 홍반도 가라앉자, 소티스는 다시 빈민가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빵을 나눠 줄까 해요. 제가 직접 가져다주는 거죠. 눈도장도 찍고, 말도 조금씩 붙이고요.”

느리게나마 사람들의 호감을 얻고 있으니, 이제는 개인적으로 말을 붙이며 그들의 고민을 듣고 해결하자는 뜻이었다. 가난이나 기근, 역병에서부터 시작해 영혼에 관련된 문제까지 조심스레 접근하기 위함이었다.

“좋은 생각이에요. 대신 위험할 수 있으니…….”

소티스가 그의 속내를 들여다본 듯,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함께 다녀 주시겠어요? 분명 든든할 거예요.”

“기꺼이요.”

그렇게 두 사람은 며칠간 음식을 나눠 주겠다는 명목으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티스가 그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다가 쓰러졌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사람들은 이전처럼 그녀에게 비아냥대거나 적대시하지 않았다. 이따금 그녀에게 정말 다 나은 것은 맞냐며 걱정하기도 할 정도였다.

“뭐가 그리 궁금해서 그 허약한 몸으로 이 누추한 곳을 다니신답니까. 정말로 큰 병에 걸리면 어쩌시려고요.”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까? 잠시 고민하던 소티스는 적당히 둘러 말하기로 했다.

“더 넓은 세상에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거죠.”

딱히 거짓말도 아닌 셈이었다. 한때나마 황후였던 사람으로서 멘데즈를 돌보는 일의 연장선이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을 시키는 게 아니라 직접 살피며 견문을 넓히고 싶었다. 그런 식으로 무력함을 떨쳐 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매진하며 삶을 실감하고 싶기도 했다.

그녀의 대답이 모호했는지 문 앞에 서 있던 여자는 고개를 기울였다.

“예?”

“저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답니다. 좁고 안락한 세상에서만 살아온 셈이죠.”

어린아이를 업고 있던 여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럼 그냥 그렇게 사셔도 되잖아요?”

소티스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건 착각 속에서 이어 가는 삶이나 마찬가지예요. 부족한 것이 없으니 부족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어야죠. 그런다고 자신이 가난해지는 게 아니라면 더더욱 그래야 해요. 게다가 귀족들은 대개 영지를 관리하고, 국무에 참여하잖아요. 그럼 자신이 다스릴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말하다 보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소티스는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다. 정치며 경제, 사회, 역사 같은 것을 열심히도 익혔으나 막상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고통받는지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그 해가 흉년이면 사람들이 무엇이 부족해 죽는지도 몰랐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고되게 흘러가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따금 황국을 순회한답시고 에드먼드의 뒤를 따라가기는 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일에 직접 참견하지도 못했다. 레먼에게 물건을 주고 핀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사람들과 분리되어 살아갔던 것이다.

황후라면, 한 나라를 다스릴 이의 하나뿐인 짝이자 나라를 이끄는 동반자였다면 그래서는 안 됐는데.

“그건 제 의무예요.”

아이를 업은 여자는 두 명의 온화한 이방인을 바라보았다.

“의무…….”

빈민가의 사람들은 귀족을 싫어했다. 차라리 눈에 보이지라도 않았더라면 그 미움이 덜했을지도 모르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은 수도 근방을 오가는 귀족들을 하루가 멀다 하고 보았다. 그들의 화려함과 여유로움은 사람들의 궁핍함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고, 그 선명한 대비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쉽게 비틀렸다.

귀족들은 언제나 똑같았다. 제 잇속을 챙기기 급급해서 타인을 이용하기 일쑤였고, 빈민가의 이들을 비천하고 더러운 것처럼 취급했다. 이따금 식량을 나누어 줄 때도 있었으나, 그 눈길에는 조롱과 멸시가 가득했다.

그러나 소티스는 달랐다.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이 여인은 단호하면서도 간절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선악에 대해 무지한 그들조차도 그것이 찬란한 선이라는 것을 모를 수 없을 만큼, 소티스의 물색 눈동자는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진심을 다해 사람들을 살폈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호감을 공짜로 얻어 내려 하지 않았고 치열하게 노력했다. 비록 이 척박한 빈민가의 생활에 서툴렀을지언정, 포기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이상한가요?”

이런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녀는 독특했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좋은 의미로.

“신기하지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저희네 인생이야, 언제나 그렇듯 별 볼 일 없답니다. 이곳의 사람들은 쉽게 죽고 쉽게 사라지지요. 성 증축 사업에 끌려가듯이 차출되었다가 시체도 찾지 못한 제 남편처럼요.”

아기가 울기 시작하자, 여자는 몸을 가볍게 흔들며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그리워할 시간조차 없었어요. 슬픔이 배고픔을 몰아내 주지는 않거든요. 아이에게 먹일 것을 찾기 위해 온갖 심부름을 하고, 쓰레기통을 뒤지고…….”

소티스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빵과 치즈, 그리고 아이가 마실 우유를 건넸다. 여자는 그것을 받아 들며 쓰게 웃었다.

“그런데 얼마 전 아가씨께서 나눠 주신 빵을 먹고 잠든 날, 남편이 꿈에 나왔지 뭐예요? 피투성이가 된 꼴로 무슨 말이든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우느라 무어라 말했는지도 거의 듣지 못했어요. 불운의 전조라고 하더라도, 꼭 보고 싶었거든요.”

무언가 이상한 점을 깨달은 레먼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불운의 전조라고요?”

“예. 이곳에서만 도는 소문일지도 모르겠는데, 죽은 사람이 꿈에 나타나면 꼭 좋지 않은 일에 휩싸인다고 해서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쁜 일이 언제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은 삶이잖아요. 힘들게 살다 떠난 사람을 탓하는 건 비겁한 일일지도…….”

죽은 사람, 그리고 나쁜 일.

소티스와 레먼이 진지하게 눈빛을 교환했다. 레먼은 제 몫으로 남겨 두었던 비스킷을 여인에게 더 건네며 조심스레 물었다.

“실례지만, 그 ‘나쁜 일’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