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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34)화 (35/121)

제34화. 세계 밖의 세계(3)

“소티스 님의 사랑은 위대해요.”

레먼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사람이 이기적으로 구는 것은 쉽지만, 이타적으로 사는 것은 어려우니까요. 악이 손쉽고 선이 어려운 것처럼, 소티스 님께서 베푸시는 친절은 언제나 순수하고 대단합니다. 그러나…….”

소티스는 침묵 속에서 그의 말을 기다렸다.

“소티스 님의 친절에는, 당신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요. 오히려 당신을 지워서라도 당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이를 생각하고 챙깁니다. 저는 그런 헌신이 소티스 님을 갉아먹게 될까 두려워요.”

태양 같은 사랑은 세상을 환히 비추겠지만, 실은 자신을 남김없이 태우는 사랑이었다.

모든 사랑이 보답받는 것은 아니다. 좋은 마음에 좋은 마음만이 돌아온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했다.

레먼은 그저 누군가를 위해 끊임없이 양보하고 희생하다가 전소하고 말 그녀의 미래를 막고 싶었다.

“자신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어야만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뇨. 이미 흠잡을 곳 없이 진실된 사랑이에요. 저는 그저 당신이 오래도록, 그리고 안정적으로 사랑하는 다른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려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소티스는 그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진심으로 염려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웃었다.

“알겠어요. 하지만…… 제게는 어려운 일이에요.”

레먼이 슬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압니다. 여태껏 그러시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지내셨으니까요.”

소티스는 레먼을 따라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무리해서 서 있던 탓인지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그녀가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잠시 쉬자,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소티스의 곁을 가만히 지켰다.

“당신이 한 말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요. 그래도, 저는 내일 이곳의 사람들에게 빵을 나눠 줄 거예요. 설령 그들 중 누구도 제게 고맙다고 하지 않더라도, 그게 저를 피곤하게만 만드는 일이 되더라도요.”

그녀의 물빛 눈동자가 단호하게 반짝였다.

“죽음이나 영혼에 관련된 문제는 무척 예민한 종류예요.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인 제가 무턱대고 헤집고 다닐 수는 없어요. 일단 이곳 사람들의 호감을 조금이라도 사고 싶어요.”

“좋은 생각이에요. 소티스 님의 선택에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레먼이 빙그레 웃었다. 그는 정말로 그녀의 호의가 자랑스럽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그 또한 나란히 계단을 올랐다. 두 사람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여관 주인에게 눈짓해, 음식을 올려 달라고 부탁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소티스가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잘 쉬고 잘 먹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고 싶은 거죠?”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야, 레먼이 제게 무언가 요구할 때는 대개 저를 위한 일일 때가 많으니까요.”

그의 얼굴에 무안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의 예상이 정확했던 탓이었다. 자잘한 준비 같은 것은 제게 맡기고, 조금이라도 좋으니 푹 쉬어 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노력할게요.”

방 안으로 들어선 소티스가 문틈 새로 고개를 살짝 내밀며 말했다.

“진심이에요. 제가 곧게 서야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까 저는 쓰러지지도, 포기하지도 않을 거예요.”

“…….”

“왜 그렇게 빤히 봐요? 제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요?”

“아뇨, 그냥…….”

레먼은 먹먹해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이 모든 다정함이, 찬란한 노력이 빛을 발하는 날이 올까. 세상이 그녀를 알아주는 날이 올까.

아마 소티스는 그런 날을 기다리지도 않을 것이다. 베푸는 것만으로도 만족한 그녀는 보답을 바라지 않았다며 맑게 웃고 말겠지.

그녀를 볼 때면 존경스러웠고 마음이 아팠다.

레먼은 찡그리듯이 웃어 보였다. 마치 태양을 정면으로 본 사람처럼.

“내일 아침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푹 쉬세요.”

***

빈민가에서의 며칠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절대로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삶이었는데, 소티스는 놀랍게도 천천히 적응해 갔다. 그녀는 값싼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도 부지런히 돌아다녔고, 묽은 귀리 죽을 눈 감고 억지로 삼키는 한이 있더라도 한 그릇씩 비웠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해야 할 일은 줄어들지 않았다. 배곯는 빈민은 수없이 많았고, 소문을 들은 수도 바깥의 난민들마저 몰려왔다.

빵과 치즈는 아무리 가져와도 부족했고, 사람들은 여전히 레먼과 소티스의 의도를 의심했다. 그래도 첫날처럼 날을 세우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녀가 저들을 굶기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믿었고, 매일 같은 시간에 모여 그녀가 웃으며 건네는 빵을 받아 들었다.

문제는 소티스의 몸이 강행군을 견디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봐요! 거기, 갈색 머리, 당신 말이오!”

마차에서 짐을 내리던 레먼은 사람들의 비명에 물건들을 내던지다시피 버려두고 소티스에게 뛰어갔다. 사람들이 동동거리며 바닥에 쓰러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키십시오!”

재빨리 달려간 레먼이 소티스를 안아 올렸다. 창백한 낯에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옷 너머로도 열감이 전해질 만큼 몸이 뜨거웠다. 언제부터 열이 이렇게 끓고 있었을까. 앓는 소리를 조금도 하지 않아서 까맣게 몰랐다.

그래도 알았어야지. 미리 살폈어야지. 레먼은 무심했던 저를 속으로 조용히 타박했다.

혹여 그녀가 깨지기라도 할세라 조심스레 고쳐 안은 그가 모여든 이들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빛을 띤 호박색 눈동자를 본 이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우, 우린 아무 짓도 안 했다고.”

“그래. 저 여자가 갑자기 쓰러진 거야!”

레먼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의사를 부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한쪽 뺨에 큰 화상 흉터가 있는 남자가 차갑게 대꾸했다.

“가난뱅이만 사는 동네에 의사가 어디 있소? 대충 싸구려 약초 몇 개 끓여 먹고 신에게 살려 달라 비는 게 전부지.”

“…….”

“불만이면 그 아가씨를 데리고 살던 곳으로 돌아가시오.”

저를 골탕 먹이려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레먼은 그들을 잠시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여관으로 소티스를 옮겼다.

일단 침대에 그녀를 누인 뒤 누구든 불러야 했다. 새삼 자신이 친분 있는 귀족 하나 없는,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황성에 연락을 넣어야 할까? 아니면 메리골드 공작가? ……로즈우드 후작가의 별장이 수도 근처에도 있을까?

“……안 돼요.”

힘없는 손길 하나가 이불 밖으로 빠져나와 그의 옷깃을 가만히 쥐었다.

“조금만 쉬면 나아요. 괜찮…….”

“안 괜찮습니다.”

레먼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괜찮지 않아요, 소티스 님. 열이 얼마나 나는지 아십니까? 당장 황성으로 돌아갑시다.”

“그렇게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을지도 몰라요. 제가 성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되는 수많은 이유에 제 약한 몸이 더해지겠죠.”

소티스는 울먹거리듯이 대답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당신이 고집을 부리면, 제가 결국 당신의 뜻대로 한다는 것을 알고 그러시는 거죠?”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힘없이 대답했다.

“미안해요.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요.”

“아무도 소티스 님의 노고를 알지 못해도요?”

“제가 알잖아요. 그리고 당신이 알잖아요. 누구도 제 이름을 기억해 주지 않겠지만…… 그래도, 제가 저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레먼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마 거절할 수 없을 만큼 간절했다. 이혼한 뒤로 내내 고초만 겪다가 겨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빵을 나눠 줄 때의 소티스는 생기로 가득했다. 그 모습을 지켜 주고 싶었다.

“그럼, 제가 간호하겠습니다.”

소티스는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열 때문에 얼굴이 발갛게 물든 채였다.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 말고, 고맙다고 말해 줘요.”

“……고마워요.”

짧은 말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레먼은 어느 때보다도 기쁘게 웃어서, 마치 세상을 다 가진 사람 같았다.

***

레먼 페리윙클은 밤새도록 소티스 메리골드를 간호했다.

끓는 열을 내리기 위해 연신 젖은 수건으로 이마와 목덜미를 닦고, 미지근한 물을 억지로라도 몇 모금씩 마시게 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목덜미에 홍반이 생긴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레먼은 소티스가 빈민가에서 이따금 유행하던 전염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약이 있어야 할 텐데…….”

이 열병은 잘 옮는 편에 비해 위험한 병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티스의 몸은 약했고, 의사를 부르거나 약을 사 오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레먼은 식은땀을 아까보다 훨씬 더 많이 흘리는 소티스를 초조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더 위험해질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정말 이대로 견뎌도 괜찮을까. 그녀는 목이 부었는지 묽은 죽도 삼키지 못했고, 두어 시간 전부터는 연신 잠들었다가 깨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소티스 님, 잠시만 혼자 계시겠어요? 수도의 의사라도 조금 수소문해 달라고 했는데…… 도착한 소식이 있는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얼음을 좀 구할 수 있을지도요.”

그녀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먼은 재빨리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러나 세 걸음도 가기 전, 계단을 걸어 올라온 사람들에 의해 앞이 가로막혔다.

“이봐요.”

퉁명스러운 얼굴의 사내가 그에게 길쭉한 통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야산에서 구할 수 있는 약초 뿌리요. 열을 내리는 데 효과가 좋지.”

“이 근방에는 의사도, 약도 귀하니 이런 식으로 견뎌 내는 수밖에 없었거든. 그 열병은 몸이 약한 노인들이나 아이들이 많이 걸렸는데, 그럴 때마다 이 뿌리를 넣고 끓인 물을 마시면 하루 안에 열을 떨어뜨릴 수 있었다고.”

레먼은 떨리는 손으로 통을 열어 보았다. 다 식지 않은 약차에서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고 있었다.

“물론 써서 맛이 없을 거요. 어디 입에 단 약이 있겠냐마는.”

“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레먼은 물통을 껴안은 채 고개를 연신 숙였다.

그저 마른 뿌리를 달여 만든 차였지만, 소티스의 호의에 돌아온 사람들의 진심이라고 생각하니 황금보다도 귀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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