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세계 밖의 세계(2)
소티스는 눈을 뜨자마자 옆방으로 향했다.
레먼 페리윙클은 언제나 소티스의 든든한 아군이었고, 황성 밖으로 나온 지금은 더욱 그랬다. 그녀가 진심으로 믿고 의지할 이라고는 그뿐이었으니, 자연히 레먼의 존재가 크게 느껴졌다.
그러나 레먼은 방에 없었다. 제대로 닫히지 않아 끽끽거리는 문 너머에서는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소티스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레먼이 없다니? 그렇다면 그녀는 혼자 남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무작정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재빨리 나가 여관 근처를 둘러보기도 했다. 발을 옮기는 내내 소티스의 얼굴에는 망연한 표정만이 가득했다.
근방을 몇 바퀴나 돌았다. 그래도 레먼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우중충한 빈민가의 정경만이 그녀를 압도할 뿐이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자 소티스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새삼스럽게도, 이곳에서 그녀가 얼마나 무력한지 실감했다.
“어쩌지…….”
그때,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소티스는 깜짝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소티스 님, 진정하세요. 저예요!”
레먼은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그녀를 돌려세웠다.
“레먼?”
그가 허리를 굽히고 눈을 맞추자, 소티스의 시야가 레먼으로 가득 찼다. 그러자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이 울컥 치밀었다.
“왜 위험하게 혼자 나와 계세요.”
“그, 그게, 당신이 없어서…….”
레먼이 찡그리듯 웃었다.
“잠시 물건을 팔러 나갔을 뿐이에요. 전 언제나 소티스 님께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반드시?”
“반드시.”
두 사람은 바깥에 나온 김에 주변을 조금 둘러보았다.
이곳은 세계 밖의 세계였다. 소티스 메리골드가 살았던 작고 부유하고 따뜻한 세계와 완전히 다른 곳. 거리는 잿빛이었고, 쥐와 벌레가 끓었으며 사람들의 표정은 한없이 어두웠다.
빈민가의 존재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책, 그리고 몇 장의 서류로만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평생 풀어낼 과제거나, 자신의 현명함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모든 것이 누군가에게는 지독할 정도로 생생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소티스는 처음으로 자신의 ‘현명함’이 얼마나 이론적이고, 비현실적이며 위선적인지 깨달았다. 그러자 당혹감과 부끄러움이 목덜미와 뺨을 홧홧하게 달구었다.
“슬슬 아침부터 챙기시는 게 좋겠습니다. 여관 주인에게 말해 두었어요.”
레먼은 그녀를 여관 일 층의 식당으로 안내했다. 묽은 귀리 죽과 퍽퍽한 호밀 빵, 염소 치즈 한 덩이가 그녀의 앞에 놓였다. 차마 요리라고도 할 수 없는 모양새였지만, 이조차도 그가 웃돈을 얹어 가까스로 구한 음식이었다.
소티스는 빵을 억지로 입에 욱여넣었다. 그러나 허기에도 불구하고 몇 입 먹지 못하고 팔을 내렸다. 모래라도 씹은 것처럼 입 안이 온통 까끌까끌해서 도무지 삼킬 자신이 없었다.
그런 소티스의 모습을 곁눈질로 힐끔대던 여관 주인이 빈정거렸다.
“좋으시겠어, 가려 먹을 처지라.”
상대적으로 호화로운 음식들을 보고 빈민들이 키득거렸다.
“곱게 자란 아가씨들이 다 그렇지.”
“고귀하신 귀족들께서 여기는 웬일이람? 굶어 본 적도 없으실 텐데.”
“나야 모르지. 이색 체험?”
발끈한 레먼이 그들의 무례함을 꾸짖으려 하자, 소티스가 손을 뻗어 저지했다.
“괜찮습니다. 나서지 마세요.”
“하지만…….”
아무리 황당한 이유로 폐위되었다 한들, 소티스는 일국의 황후였다.
그러나 그녀의 의견은 달랐다. 소티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누군지도 말하지 마세요, 레먼.”
“……알겠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소티스는 황성 밖으로 나간 일이 거의 없어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지위를 내세우지 않고 그 사람들의 삶을 보살피고 싶었다. 이들에게 어떤 명예와 직위, 가문의 유명세는 나쁜 농담만도 못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안 탓이었다.
“귀하신 분이기라도 하신 모양이오. 왜, 우릴 불경죄로 벌하기라도 할 거요?”
소티스는 두 손을 모아 쥐고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
“그 고달픈 삶보다 더한 불이익이 얼마나 있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귀족들이 그대들의 가난을 돌보거나 덜어 준 것이 없으니, 이 불신은 제가 받아야 할 응당한 대우겠지요.”
그녀는 탁자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아이에게 남은 빵을 쥐여 주었다.
“먹던 것이라 미안하구나.”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빵을 베어 물었다.
“쓰레기통에 들어 있던 것도 먹어 봤는걸요. 열흘 동안 먹었던 음식 중에서 가장 좋은 거예요.”
그 말을 듣자 소티스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레먼에게 눈짓했다.
“가야 할 곳이 있어요, 레먼. 지금 당장.”
***
소티스 메리골드가 빈민가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보석을 팔아 번 돈으로 빵을 사는 것이었다. 수레에 가득 실어 몇 번은 날라야 할 정도로 많이.
알고 있다. 그건 그저 빵이었다. 몇 덩어리 정도야 삼켜 버리고 나면 부스러기만 남고 마는, 단순한 음식.
빵 몇 덩어리와 동전 몇 닢으로는 누구의 삶도 구할 수 없다. 잠깐의 기쁨을 줄 수는 있겠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들의 연명에 도움이 될 뿐, 근본적으로 삶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
소티스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선택은 변하지 않았다.
“무슨 작당을 하나 했더니, 먹을 것으로 꾀어낼 생각을 하고 있었군.”
“마구간에 짚단을 쌓는다고 등에 올라탈 수 있겠냐고!”
“누가 알아? 쥐약이라도 타서 이참에 천것들을 싹 처리하려는 속셈인지도 모르지!”
두 사람은 여관 앞에 긴 탁자를 두고 먹을 것을 잔뜩 쌓아 두었으나 사람들은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이따금 비아냥거리는 말, 가래침을 뱉는 소리, 그리고 킬킬거리는 비웃음이 날아들기도 했다.
그건 단순한 불신을 넘어선, 적의와 분노에 가까웠다. 낙후된 지방의 평민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귀족들의 사치를 오래도록 보았던 사람들이고, 비교에서 비롯된 원망은 그들의 영혼을 좀먹었다.
소티스는 몸을 꼿꼿하게 편 채로 서서, 그 따가운 시선을 모두 받아 냈다.
냉대 같은 건 지긋지긋하게 받아서 익숙해졌을 줄 알았는데.
“쥐약 같은 건 안 들었어요.”
그녀는 자신의 말이 그들에게 어떤 신뢰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티스의 손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빵을 쥐었다. 그녀는 침묵 속에서 빵을 씹어 삼켰다.
“…….”
사람들은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다가 주춤주춤 다가왔다. 화도 내지 않고 보란 듯이 빵을 먹는 그녀를 보자 의심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었다.
의도가 어찌 되었든 음식은 무상으로 제공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긴 굶주림에 지쳐 있었다. 사람들은 금세 모여들어 빵을 챙겼다. 더러운 옷 주머니에 두어 개씩 욱여넣고, 얼른 제 입에 하나를 밀어 넣기도 했다.
“이런 빵 몇 덩이로 우리의 마음을 살 수 있을 것 같소?”
노인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뇨.”
소티스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마치 그 대답을 이미 내다본 사람처럼.
“이건 그저 빵이에요, 어르신.”
그녀는 빵 하나를 더 건네며 말했다.
“이런 것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죠. 저는 철없는 귀족 가문의 아가씨였지만, 그 정도를 모를 만큼 어리석지 않습니다. 지금 어르신께서 이 빵을 먹어도, 내일 이맘때가 되면 다시 굶주림에 시달리고 말 거예요.”
“그래. 바로 그거요.”
“빵을 아무리 가득 채워 나른다고 한들 지긋지긋한 가난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부조리한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닐 거예요.”
소티스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어쩌면 이 빵은, 그저 제 양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일지도 모르죠.”
빈민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짓을 하는 건가?”
“그래야 했으니까요. 그 외에 당장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
“지금 제가 이 빵을 어르신께 드리지 않았다면, 내일은 더 배가 고프셨겠죠.”
그녀의 뜻을 이해한 레먼이 덧붙였다.
“세상은 오늘 당장, 내일쯤, 혹은 모레쯤 갑자기 바뀔 수는 없습니다. 바뀔지언정, 누구도 그것을 장담할 수 없겠지요.”
“그런데 오늘 당장 굶을 수는 없잖아요.”
소티스는 진심을 담아 덧붙였다.
“그건 제게 무척 슬픈 일일 테니까요.”
빵을 가져가던 사람들이 멈칫했다. 그들은 푹 꺼진 눈으로 소티스와 레먼을 바라보았다.
그들 중 누구도 소티스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의심의 시선으로 힐끔거릴 뿐, 그녀가 마련한 일시적인 방편이 하잘것없다고 말하지 못했다.
산처럼 쌓여 있던 음식이 사라지고, 낡은 여관 앞에 모인 사람들도 먹을 것을 챙겨 떠났다. 우중충한 빈민가는 언제 웅성댔냐는 듯 조용해졌다.
“…….”
누구도 그녀의 호의에 고마움을 제대로 표시하지 않았다. 빈민들은 고개를 숙이면서도 불안하고 미심쩍은 시선으로 소티스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빵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사람들은 오늘만큼은 굶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고, 그래서 환히 웃을 수 있었다.
정작 소티스는 오후가 늦도록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않아 낯빛이 창백했다. 레먼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레먼은 입을 벙긋거리다가, 한숨을 쉬고, 이내 망설이다가 결국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언젠가는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했기에, 오래도록 담아 두었던 말이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소티스 님, 당신의 사랑은…….”
태양처럼 따뜻해서,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을 것 같은 당신의 온기는.
“……파괴적이에요.”
소티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제가 잘못됐나요?”
레먼은 잠시 후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했는지 물어보시는 거라면, 아닙니다. 전혀 잘못되지 않았어요. 오히려 훌륭합니다. 이럴 수 있나 싶을 만큼. 하지만…….”
“…….”
마법사의 호박색 눈동자가 슬프게 빛났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그렇지 않아요, 소티스 님. 당신의 사랑은 당신을 태우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