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소티스처럼 산다는 것 (4)
“부탁이 있어요.”
소티스가 활기를 찾을 수만 있다면 시녀들은 당장 날아가서 별이라도 따 올 수 있다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세요, 소티스 님.”
“저희가 뭐든 해 볼게요.”
“맞아요!”
“……고마워요. 그럼 로젤린 양, 당신은 해가 뜨기 전 귀빈들이 계시는 숙소로 가서, 마리아네스가 모셔 온 기력술사를 만나 주세요. 웬만하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지금 가는 게 좋겠어요.”
소티스는 짐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황태자비 시절 때 메리골드 공작이 주었던 진주 목걸이를 건넸다.
“이걸로 값을 치르세요. 그분이 직접 오실 필요는 없어요. 쇠한 기력을 되찾고 몸을 따뜻하게 하는 약을 한 재 지어 달라고 하고요.”
“약을요? 짓는 데 시간이 걸릴 텐데요, 소티스 님.”
“제가 먹을 게 아니에요. 완성하시거든 피니에 로즈우드 전하께 드리라고 하세요.”
시녀들은 놀라서 펄쩍 뛰었다. 저도 모르게 습관적인 말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폐하! 그게 무슨…… 아, 아니, 소티스 님…….”
“몸이 따뜻해야 건강한 아기님을 낳을 수 있어요. 핀 전하께서 황후 자리에 안정적으로 오르셔야 아버지께서도 희망을 버릴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핀 전하는…….”
핀 전하는 소티스 님의 은혜를 원수로 갚은 사람이잖아요. 시녀들은 그 말을 꿀꺽 삼켰다. 소티스가 단호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미셸 양, 이 짐을 마차에 미리 실어 주시고 혹시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레먼 님이 도착하시거든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전해 주세요. 제가 도착하자마자 바로 떠날 수 있도록 준비를 완벽하게 마쳐 주시고요.”
“소티스 님께서는 어디 가시나요?”
“저는 잠시 별궁에 다녀올 거예요.”
“……서쪽 별궁에요?”
***
“소, 소티스 님. 이렇게 이른 시간에 어떻게…….”
“전하를 뵈러 왔습니다.”
침실을 지키던 하녀는 심란한 얼굴로 소티스를 바라보았다.
시녀 한 명 대동하지 않고 온 폐황후가 물러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청하고 있었다. 소심하고 유약하기로 황성에서 따라올 이가 없다던 여인의 얼굴에는 문득문득 불안하고 두려운 표정이 떠올랐으나, 그러면서도 기어코 물러나지 않았다.
반드시 전해야 할 말이 있다는 듯한 태도에 하녀는 망설였다.
“저, 핀 전하를 깨워 보기는 할 테지만…… 에드먼드 폐하께서 나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겨우 잠이 드셨을 거예요. 만남을 거절하실 수도 있어요.”
“시간이 별로 없어요. 해가 완전히 뜨면 떠나야 하니, 꼭 뵙고 싶다고 전해 주세요.”
“……그게, 아무리 그러셔도…….”
강압적으로 구는 것도 아니건만 공연히 초조해진다. 하녀는 연신 손을 꼼지락거리며 핀을 깨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소티스는 하녀들 사이에서도 대하기 어려운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시녀도 아닌 한낱 하녀에게 존댓말을 쓰는 귀족은 황성을 다 뒤져도 소티스 한 명뿐일 것이다.
내심 존경하는 그녀의 말을 웬만해서는 들어주고 싶었지만, 아이를 가져 부쩍 신경질적인 핀이 일어날지는 의문이었다.
“……해 보기는 할게요, 잠시…….”
그때 달칵, 하고 하녀의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세요.”
문 너머에 서 있던 핀이 소티스에게 말했다. 핀의 얼굴에는 잠기운이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
에드먼드가 떠난 이후로 잠들지 않은 걸까. 소티스는 창백해 보이는 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황비의 침실로 들어섰다.
“앉으시겠어요?”
“괜찮아요, 전하. 너무 이른 시간에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러 왔을 뿐이에요.”
소티스는 의자나 침대에 앉는 대신 동쪽으로 난 창가에 살짝 기대 섰다.
어둠에 잠긴 방은 곳곳이 흐트러져 있었다. 탁자 위에는 찻잔이 두 개 놓여 있기도 했다. 에드먼드가 다녀갔다는 뜻이리라.
황제는 그런 식으로 소티스의 방에 오래 머무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방은 언제나 정갈하기만 했다. 이제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은 별수 없었다.
그러나 이 낯선 울렁거림도 곧 괜찮아지겠지. 소티스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핀이 여상히 대꾸했다.
“아기는 잘 있답니다.”
“아뇨, 아기님 말고 전하께서 잘 지내시는지 여쭈었어요.”
“그게 궁금하신가요?”
소티스는 선선히 웃으며 답했다.
“그럼요.”
“…….”
“저는 아침이 되면 황성을 떠날 것입니다. 돌아오는 데 꼬박 보름은 더 걸리겠지요. 그 이후에 잠시 들어온다 하더라도, 다시 바깥을 오가는 일이 많아질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에는.”
이런 말을 살면서 할 줄은 몰랐는데. 소티스는 짧게 숨을 삼켰다가, 이내 부드럽게 이어 말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날도 있겠지요.”
“…….”
“아기님을 낳으신 뒤에, 큰일이 없다면 핀 전하께서 황후 폐하가 되시겠지요. 아시다시피 황후가 된다는 것은, 황제 폐하와 함께 나라를 돌보는 일입니다. 저도 어느 정도는 돕겠지만, 모쪼록 이 나라가 무너지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소티스 님께서 황성을 떠나신다면요?”
“당분간은 아벨 대공 전하께서 함께 도우실 것입니다.”
“아벨 대공작…….”
핀은 잠시 고민하더니 물었다.
“멘데즈 황국을 신경 쓰는 것은, 에드먼드 폐하를 사랑했기 때문인가요?”
“비슷하지요.”
소티스는 순순히 인정하며 웃었다.
“처음에는 제가 훌륭한 황후가 된다면 인정받을 것 같았어요. 쓸모 있는 황후를 내치는 것만큼 정치적으로 나쁜 선택은 없을 테니까요. 어쩌면 불순한 의도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느새 저는 진심으로 이 나라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시작은 에드먼드 폐하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라고 했더라도요.”
사랑의 연장선에 닿아 있던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별개의 마음이 되었다. 에드먼드를 사랑하게 되지 않는다고 해서, 나라가 엉망이 되어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소티스는 멘데즈에서 나고 자란 이였다. 비록 두 발로 곳곳을 걸어 본 적은 없지만, 소티스는 멘데즈를 사랑했다.
“이해를 바라지는 않아요. 다만 제가 주었던 모든 사랑이 초라한 결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소티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평생 내쫓길 일 없는 편안한 삶을 사시는 대신, 나라를 돌봐 주시는 거예요.”
“생각해 볼게요.”
핀은 무감정한 목소리로 대답하더니, 녹색 눈으로 소티스를 훑었다.
“몸은 좀 어떠시죠?”
“괜찮습니다. 염려해 주신 덕분에요.”
“제가 소티스 님을 염려한 것처럼 보이시나요?”
소티스가 맑게 웃었다.
“……네.”
짧은 침묵이 흘렀다.
핀은 웃음인지, 한숨인지, 혀를 차는 것인지 모를 모호한 소리를 흘렸다.
소티스 메리골드. 지위도, 명예도 없는 여자. 누구도 강제하지 않은 의무만을 허리가 휘도록 등에 진 미련한 연약한 여자. 사방으로 휘청거리면서도 끝끝내 부러지지는 않는 사람.
핀은 어깨가 훤히 드러나도록 내려간 가운을 끌어 올렸다. 붉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려 웃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핀이 차가운 손을 뻗어 책상 서랍을 뒤적였다. 곧 양피지 두루마리 두 개가 핀으로부터 소티스에게 전해졌다.
“황제 폐하의 외출 허가서와, 유사시에 쓸 수 있는 백지 서류입니다. 황제의 인장이 찍혀 있지요.”
소티스는 놀란 얼굴로 종이를 펼쳐 보았다.
핀의 말은 사실이었다. 고작 몇 시간 전에 찍어 선명한 황제의 인장이 양피지의 우측 하단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소티스 님께서 황후궁에 계속 버티고 계시면, 메리골드 공작이 자꾸만 황비로 도로 책봉해 달라며 우기실 테니까요.”
핀이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이렇게 바깥을 오가시다가 아예 떠나신다고 하셨죠.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이 정도의 도움은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요.”
냉랭한 말은 거의 빈정거리는 것에 가까웠으나, 소티스는 환하게 웃으며 핀의 손을 답삭 쥐었다.
“……고마워요, 정말로. 전하. 정말 고맙습니다.”
“…….”
아벨이 뒷수습을 해 준다고 해도 황제가 직접 허락하는 것이 모양새가 훨씬 더 좋았다. 소티스의 얼굴에 서려 있던 옅은 그늘이 완벽하게 사라져서, 그녀의 미소는 티끌 한 점 없이 맑고 해사하게 반짝였다.
“그렇게 고마워하실 것 없어요. 어차피 저를 위해…….”
“상관없어요.”
소티스는 예전보다 더 차갑게 느껴지는 핀의 손등을 제 손바닥으로 감싸고 온기를 전해 주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황후 자리를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세요. 저는 그 자리를 이제 바라지 않으니까요. 전하께서 그 자리에 앉으신다면 저로서도 축하할 일이지요.”
“…….”
“기력술사에게 몸이 따뜻해지는 약을 부탁하였으니 꼬박꼬박 챙겨 드세요. 어쩐지 날이 갈수록 핀 전하께서 텅 비어 가는 느낌이 들어 염려됩니다. 아기님의 건강도 좋지만 전하의 건강도 생각하세요.”
“제게 잘해 주지 마세요.”
핀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아시잖아요? 소티스 님. 저는 제게 다정하게 대해 주신다고, 그 은혜를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해 갚는 여자가 아니에요. 저는 곱게 자란 여자도 아니고, 당신처럼 마음이 곱지도 않지요. 이렇게 잘해 주셔도 아무 소용 없어요.”
“어쩔 수 없어요.”
소티스가 눈썹 끝을 내리며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당신에게 잘해 주지 않는 방법을 몰라요. 부끄럽게도 저는 누구에게도 그래 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말하는 소티스의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창밖으로 비쳐 오는 여명 때문이었다.
긴 어둠을 물러나게 하는 태양이 창가에 떠오르고 있었다.
“멘데즈를 잘 부탁드려요, 핀 전하.”
핀은 시선을 내려 소티스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왼쪽 약지에는 허무할 만큼 화려한 결혼반지 대신, 희미한 반지 자국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
“별궁에 다녀오셨다면서요.”
소티스가 핀과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황후궁 정원에서 기다리던 레먼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한숨도 못 주무시고요.”
“핀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었거든요. 그것 때문에 출발이 지체되는 건 싫어서 미리 다녀왔어요.”
소티스는 레먼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시선은 따뜻했으나 눈썹이 미세하게 모여 있었다.
내 행동이 못마땅한 걸까. 소티스는 고개를 가만히 기울였다.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쉬운 행동은 아닌 것 같았다. 저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여자를 굳이, 이른 시간부터 만나러 갈 만한 이는 많지 않을 테니까.
물론 소티스에게 핀은 그렇게 단순하게 정의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이상한가요?”
레먼은 잠시 고민한 뒤에 말했다.
“걱정되었을 뿐이에요.”
에드먼드와 핀이 소티스에게 한 행동들을 생각하면 레먼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미움과 원망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제 일이 아닌데도, 그저 마음에 둔 사람이 당했다는 것만으로도 그토록 분하고 얄미웠다.
그러나 그저 제삼자의 감정일 뿐이다. 그 마음을 표출할 권리는 레먼에게 없었다. 그러니 그는 잠자코 소티스의 결정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녀가 선택했다면, 그래서 후회가 없다면.
레먼은 미세하게 구겨져 있던 표정을 폈다.
“준비가 끝났으니 마차에 타시겠어요?”
소티스는 머뭇거리며 왼손을 내밀었다. 평소보다 홀가분하고 가볍게 느껴지는 손이 레먼의 장갑 낀 손바닥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진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