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소티스처럼 산다는 것 (3)
아벨 폰 세턴 멘데즈, 아벨 대공작.
그를 본 것은 두 사람 모두 어렸을 때가 마지막이었다. 아벨이 소티스와 또래라는 것, 그리고 그가 과묵하다는 것 외에 소티스가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벨은 언제나 소티스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녀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지만, 특별히 드러내고 싫어하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소티스는 마음이 편했다. 그 앞에서는 크게 흠 잡힐 행동만 하지 않으면 됐으니까. 아니, 어쩌면 무얼 잘못하든 썩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소티스는 자신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침착하게 나왔음에 안도했다.
“내일 황성 바깥으로 나가신다고요.”
“……네. 하지만 폐하께서 오전에 제 안건을 보류하겠다고 하셔서…….”
아벨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래서 안 나가실 겁니까?”
“……나갈 거예요. 그러고 싶어요.”
“그럼 나가십시오.”
“…….”
소티스는 금방이라도 창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아벨을 살피고 싶었지만,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해서 꾹 참았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는 것이 느껴졌다. 왜 이 사람이 여기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의도, 호의도 없는 그 말이 이상할 정도로 든든하게 느껴져서.
한동안 그녀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소름이 오스스 돋은 팔을 반대편 손으로 가볍게 문질렀다.
“한동안 숙부님께서 북부를 책임지시기로 했습니다. 저는 황성에 머무르면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고요.”
소티스는 그가 연회에 오래 참석하지 않고, 황실 소속 의사를 불러 달라 요청했던 사실을 떠올리고 얼른 대답했다.
“……어깨에 부상을 입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일 처리가 꼼꼼하시다더니 진실이군요. 어쨌든 황실에서 몇 달은 꼬박 빈둥거리다 오라는 숙부님과 숙모님의 전언이 있었으니, 그사이 서류 업무 정도는 처리할 만도 하겠습니다.”
완곡하게 돌려 말했으나 속뜻은 명백했다. 소티스에게 떠넘겨졌던 국무를 아벨이 대신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호칭은 대공작이나, 그 역시 황실의 일원이었다. 이혼한 황후보다야 황제의 남동생이 황실의 일을 돕는 쪽이 황실의 체면에는 더 나은 일이라, 아벨이 나서기만 한다면 에드먼드도 막을 명분이 없을 것이다.
소티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벨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러죠. 그럼.”
절그럭대는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정말로 용건이 끝나서 가려는 모양이었다. 소티스가 황급히 그를 불렀다.
“저, 저기, 대공 전하.”
“예.”
“왜…….”
그가 이쪽으로 다시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리자 소티스의 심장이 아까보다도 더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불안함이 목을 틀어막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결국 목소리를 살짝 떨고 말았다.
“왜, 저를…… 도와주시는 건가요?”
두렵다. 황실의 이들 중 두렵지 않은 이들이 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 두려움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아벨은 그중 미지의 공포에 속했다.
숨 막힐 것 같은 침묵이 잠시 지나고, 아벨이 침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북부에는 가난한 사람이 많습니다.”
소티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기에는 부적절한 감이 있는 답변이었다.
“하루에도 몇 명씩 죽고 다치는 일은 예사입니다. 죽는 이유도 너무 많아서 차마 다 셀 수가 없습니다.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무너진 건물에 깔려 죽고…….”
아벨은 북부에서 가장 번영한 웰트 대공령의 사람들조차도 겨울철마다 그렇게 고생할 정도라면, 낙후된 다른 지역은 어떻겠냐며 덧붙였다.
“그 거대한 자연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혹독한데, 최근에는 영혼에 관련된 문제가 발발하면서 멘데즈가 술렁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관련된 보고서를 아무리 올려도 황실에서는 묵묵부답이니…….”
소티스는 이제 아벨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러자 사정을 알지 못해 밀려왔던 두려움이 조금은 걷혀 나가며,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황실의 귀족들은 그저 종이로만 전해 듣는 어느 지방의 이야기가 아벨과 대공령에는 현실일 것이다. 그간 이어졌던 황실의 미온한 대처에 무척이나 지쳤으리라. 황제가 오래도록 황권에 필요 없는 일이라 여겨 미뤄 두었던 일이 소티스에게 내려오도록, 사람들은 한 자락의 희망조차 쥐지 못한 채 말라 죽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 외에도…… 나는, 당신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물음이었다. 말하고 나니 무안함이 몰려들었다. 새삼 대면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아벨은 새삼스럽다는 듯이 혀를 짧게 차며 말했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요.”
“…….”
“경합이 아닌 내정을 통해 황태자비가 되었다는 사실에 남들처럼 색안경을 쓰고 본 적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이후 공녀가 황태자비, 황후로서 모자람이 없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아는구나.
아는 사람이 있구나.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아무도 관심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소티스는 제 손으로 입을 꾹 틀어막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성마른 감사 인사가 튀어나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내 호의가 당신에게 득이 되지 않음을 알아서입니다. 나는 형님에 비해 권력이 불안정했고, 황위에 대한 분란을 피하기 위해 내 세력을 일부러라도 만들지 않고 북부로 나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런 내가 당신에게 우호적이라고 하면, 추문에 휩싸이거나 불쾌한 반역죄 따위를 뒤집어쓰고도 남을 것 같았거든요.”
아벨은 그게 당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였다고 덧붙였다. 그는 조금 미안한 것처럼 말해서, 소티스는 창가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듣고 보니 그렇네요. 고맙습니다.”
“고마울 게 무어 있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무뚝뚝했으나 이제는 차갑게 들리지 않았다.
“아까 말했다시피 최소한의 일만 했을 뿐입니다. 결국 당신은 일방적으로 폐위되었고, 나라는 엉망진창이 되었죠. 황위에 욕심이 넘치기에 멘데즈를 잘 돌볼 줄 알았습니다만…….”
“…….”
“그렇다고 황위를 빼앗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이번에도 나는 최소한의 일만을 하다가 내 둥지로 떠날 셈입니다. 그래도…….”
“……대공.”
“내 형이 한 일은 옳은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번 이혼도, 그 전의 모든 행동도.”
고개를 푹 숙인 소티스에게 정중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미안합니다. 이 사과가 그 어떤 슬픔도 덜어 줄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
괜찮다고 하고 싶었다.
당신의 형이 저지른 잘못은 당신의 죄가 아니니, 당신이 사과할 이유 따위는 없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에드먼드와 달리 이렇게 도와주러 오지 않았냐고, 자신을 나쁘게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줄곧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괜찮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마다 숨이 턱턱 막히며 코끝이 매워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이 울컥 차올라 소티스는 숨을 헐떡였다.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조금도 괜찮을 수가 없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너무 슬퍼서, 다 저며진 가슴이 형체도 남은 것 같지 않아서.
그녀의 아픔과 어떤 관련도 없던 그에게조차 괜찮다고 말하지 못했다.
“……알겠어요.”
하지만 소티스는 울지 않았다.
괜찮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 아픔에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것 또한 아니었다.
이겨 내고, 나아가고, 그리하여 정말로 자유로워질 수만 있다면.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의 존재가 소티스 메리골드에게 풀 한 포기만큼도, 먼지만큼도 의미가 없어지는 날을 맞이한다면.
“하지만 제가 황국을 위해 움직이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 것입니다. 비록 에드먼드 폐하를 마음에 두고 받아들인 황후 자리였지만, 저는 제 감정과 선택이 가져온 책임을 알아요.”
“그게 여기까지라는 것이군요.”
“이상한가요?”
“뭐가 이상하겠습니까.”
아벨이 허탈하게 웃었다.
“이미 지나칠 정도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까지 헌신적인 사랑이 있나, 문득 의심할 만큼.”
“…….”
“내가 황후궁에 왔던 것은 비밀에 부치겠습니다. 그 편이 당신에게도 편하겠지요.”
“예.”
“어쨌든 마음 편히 떠나십시오. 그럼, 조금이라도 쉬십시오. 아실지 모르겠지만, 황성 밖에서 지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그는 짤막하게 인사한 뒤 황후궁을 떠났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이의 존재에 소티스는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을 갈무리하느라 바빴다.
“……고맙습니다.”
누구도 듣지 않을 말이지만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소티스는 두 손을 꼭 모아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불안감은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언젠가는,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날도 올까.
***
“소티스 님. 이제 잠자리에 드시겠어요?”
“……아뇨.”
무슨 생각인지 소티스는 아벨과 대화한 뒤로 더욱 바빴다. 짐을 다시 한번 단단히 확인하고, 보석함을 열어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집어넣었다. 드레스에 붙어 있는 작은 장식마저도 야무지게 모으던 사람이 불편한 신발을 모두 내다 버리기까지 했다.
그러던 소티스의 시선이 자신의 왼손을 향했다.
결혼반지.
그녀의 지난 삶을 증명하는 유일한 단어였던, 에드먼드와의 결혼반지는 함께 나눠 낀 지난 세월이 무색하게도 소티스만 끼고 다니던 물건이기도 했다.
“그, 그것도 파시려고요?”
시녀가 놀라서 물었다. 멘데즈의 황제를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반지였으니, 이걸 민가에 내다 판다면 분명히 소문이 돌 것이다.
불안해하던 시녀는 소티스가 고개를 젓는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하지만 이건 가져가지 않을 거예요.”
이제는 그 반지가 족쇄처럼 느껴지는 것을 보니, 정말로 에드먼드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구나.
소티스는 그 사실이 홀가분하면서도 섭섭해서 한참 동안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내게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하게 된 물건이니까요.”
소티스는 그것을, 텅 빈 보석함의 가장 구석에 밀어 넣었다.
그건 이제 한동안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는 물건이 될 것이다. 방의 가장 구석에 처박혀, 일 년에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아 천천히 낡아 가는 물건이 될 것이다.
소티스는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간신히 기억할 것이다. 그런 물건이 있었지.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반지를 보아야만 그때의 감정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게 되리라.
그때는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웃겠지. 마치, 그때의 슬픔과 아픔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그녀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몇 번이고 비틀거리다가 넘어지겠지만,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곁에는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가 없을 것이다.
소티스는 그 사실이 처음으로 슬프거나 아프지 않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