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소티스처럼 산다는 것 (2)
소티스 메리골드는 이상한 여자였다. 에드먼드는 소티스를 볼 때마다 줄곧 그 생각을 했다.
사람이 그럴 수 있나? 왜? 어떻게?
“소티스를 보고 배우거라.”
선황후는 에드먼드에게 한탄조로 그렇게 말하곤 했다.
“너는 왜 그리 늦는 것이냐. 남들보다 한참은 앞서 나가도 부족할 판국에. 정말로 황제가 되고 싶다면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에드. 이해할 수 없다면 보고 외우거라. 소티스의 말과 행동을 보고 모방이라도 하란 말이다!”
그러나 에드먼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소티스처럼 산다는 것은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그러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녀가 인격적으로 훌륭하다는 데는 동의했다. 적어도 소티스는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고, 상대를 위해 물러나거나 배려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마음에 둔 것을 열렬히 사랑했으며 무엇도 아끼거나 속이는 일 없이 충실하고 성실했다.
하지만 소티스의 그 너른 사랑에 ‘소티스 메리골드’는 없었다. 그녀의 사랑은 태양과 같았다. 빛이 닿는 모든 것을 따뜻하게 하지만, 정작 자신은 남김없이 전소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도, 아낌도 없이 일방적으로 타인에게 헌신하는 이가 정말로 행복할 수 있을까?
그건 에드먼드가 보았던 어떤 것과도 본질이 다른 사랑이었다. 보기엔 위대하고 훌륭할지 모르나, 에드먼드는 그녀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사랑받을 줄 모르는 이가 사랑하는 일을 배운 것은 기적이었으나, 그 기적은 너무도 잔인할 정도로 빛나고만 있었다.
“폐하. 어디 가십니까?”
“오늘은 별궁에서 잘 것이다. 혼자 걷고 싶으니 따라오지 말도록.”
“……예, 알겠습니다.”
에드먼드는 심란해진 속을 애써 달래며 서쪽 별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티스를 그냥 쫓아냈어야 했나.”
이혼하고 나면 그 얼굴을 볼 때마다 속이 꼬이는 게 덜할 것 같더니, 더하면 더했지 나아지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소티스를 사랑이라도 하나?
“아니, 그건 아니지.”
에드먼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사랑은 제가 핀에게 주었던 것 아닌가. 붉고, 뜨겁고, 저 홀로 살아 넘실거리는 듯한 그 마음이야말로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사랑이었다.
소티스에 대한 에드먼드의 감정은 사랑보다는 본능적인 거북함에 더 가까웠다. 그녀가 황후로서 올바르게 행동할 때, 그리고 훌륭한 여자답게 행동할 때. 그리고 제 사소한 변덕이나 어깃장 같은 건 한숨조차 쉬지 않고 견뎌 낼 때마다 그 감정은 더욱 심해졌다.
그래. 차라리 보내 버리자. 마법사랑 눈이 맞든, 황성 바깥에서 무슨 기구한 일을 겪든 에드먼드가 알 바 아니었다. 그들은 이혼했고, 소티스는 아이도 낳지 못한 채 제 자리에서 쫓겨난 메리골드 공녀일 뿐이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폐하?”
어느새 별궁에 도착한 에드먼드는 핀을 끌어안고 있었다. 몸이 좋지 않으니 잠만 잤으면 좋겠다는 말에 그녀를 끌어안은 채 붉은 머리카락에 이마를 대고 문지르던 그가 대답했다.
“소티스가 내일 나간다더군. 영혼에 관련된 문제를 해결한다고, 마법사랑.”
“들었어요. 안건을 보류하셨다면서요? 황후궁 밖으로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면서요.”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별궁 밖으로 나가지도 않는 그녀가 그런 소식은 어떻게 아는 거지?
에드먼드는 놀란 표정으로 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녹색 눈동자가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아무리 제가 정부 출신 황비라 은근하게 괄시받는 처지라지만, 그 정도의 말을 전해 줄 사람은 있는걸요.”
“그래도 그대답지 않아, 핀.”
“저다운 게 뭔가요?”
핀이 까르르 웃으며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아기를 가졌다는 이유로 별궁에 가만히 머무르며 폐하만 기다리는 게 저다운 일인가요? 저는 그렇게 답답한 건 싫어요, 폐하. 그런 건 소티스 님이나 버틸 수 있는 일이에요. 세상 누구도 소티스 님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잖아요?”
“그래, 지겹도록 알지.”
“그래서 왜 마음에 안 드세요? 시키지도 않은 국무를 알아서 해결하시는 건, 돈을 줘서도 살 수 없는 호의일 텐데도요.”
“……글쎄. 그냥…….”
에드먼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낯설어서. 한평생,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변하는 게 이상하더군.”
“아쉬우세요?”
“……당연한 일이지 않나?”
사람이라면 진작 멀어졌어야 했다. 자신이 숱한 정부를 들이며 소티스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미워하고 원망했어야 했다. 더군다나 소티스는 자신을 좋아했다고 했다. 그랬다면 더욱 그랬어야 하지 않을까.
이혼한 이후에도 그저 곁에 잠시 둘 뿐 황비로 책봉할 생각은 없었다. 소티스도 그걸 바라지는 않았다. 설마 죽기 전까지 홀로 살지는 않겠지. 꼭 레먼 페리윙클과 엮이지 않더라도 언젠가 저처럼 재혼할지도 모른다.
알고 있는데.
그게 정말,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도 모자라 진작 일어났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
아는데도 대체 왜 이렇게 찜찜한 건지.
“여기까지 오셔서 다른 여자를 생각하실 줄은 몰랐어요.”
핀의 속삭임에 에드먼드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럴 리가. 내게는 그대뿐이야.”
“그렇다고 하시기에는 다른 정부들을 다 정리하지는 않으셨던걸요.”
“…….”
그녀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었던 에드먼드의 새카만 눈이 가늘어졌다.
에드먼드는 핀에게 국무를 맡길 생각이 없었다. 황후로 만든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똑똑하게 굴면 오히려 귀찮다. 웬만한 것은 자신이 보고받는 쪽으로 하고, 정치적으로 힘이 없는 일만 핀에게 걸러서 줄 생각이었다. 나라를 돌보는 일은 귀족들에게 적당히 내맡기고, 자신은 황권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골라서 관리할 요량이기도 했다.
그런데 피니에 로즈우드가 황비가 된 지 한 달쯤 되자마자 황실의 정보를 꿰고 있다. 물론 직접적으로 참견하려 든 적은 없었으나, 별궁에 가만히 앉아서도 내밀한 소식을 속속들이 전해 듣는다는 것은 에드먼드에게 썩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시녀들도 없는데 하녀들이 그런 쓸 만한 정보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에드먼드의 마음속에 의심이 고개를 슬쩍 들었다.
귀족 회의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줄 만한 이는 귀족뿐이다. 그렇다면 귀족들이 찾아왔었다는 말일까.
“그건 그렇지. 정부들은 내게 적당히 협조하는 대가로 돈이나 보석을 받았어. 곧장 끊으면 너무 인정이 없으니, 금전적인 보상은 당분간 유지할 계획이었고. 돈을 몇 달쯤 더 준다고 해서 국고가 갑자기 바닥나는 건 아니니까. 인정을 베푼 거지.”
“인정…….”
핀은 소티스에게 매사 비정했던 에드먼드를 떠올리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럴 필요 없지 않나요?”
“…….”
“어차피 계약을 종료하는 것뿐이잖아요. 정부에 무슨 의미가 있지요? 나라는 자리 잡을 때까지 소티스 님이 관리하시고, 후사는 제가 이어 드릴 텐데.”
그녀는 제법 차가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제가 황성에 들어온 이후로 저 외의 여인을 찾지 않으셔서 놔두었던 거예요. 하지만 저를 총애하셔서 황비까지 올려 주셨다면 정리해 주세요, 폐하. 밤마다 함께하지 못하는 건 넉넉히 일 년만 견뎌 주시면 되잖아요.”
“음…….”
“정부 출신의 황비를 두고 다른 정부들을 찾아가시는 폐하를 보면 사람들이 무어라 하겠어요. 저는 폐하뿐인데, 그럼 이곳에서 내내 외롭기만 해요?”
“황성에 부족한 것은 없는데, 외로울까.”
“무슨 말씀을 하세요? 당연히 외롭죠.”
그녀가 에드먼드를 밀어내더니 딱 잘라 말했다.
“그렇다고 제가 폐하처럼 정부를 들이면 황실의 꼴이 어떻게 되겠어요?”
일종의 협박에 가까웠다.
에드먼드는 무어라 하려다 그만두었다. 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마음 둘 곳 없어서 이 여자 저 여자를 오갔을 뿐, 핀을 만난 뒤에는 다른 정부들을 굳이 찾을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핀이 정말로─물론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다른 남자들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제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임신한 새 황비였다. 황자를 낳는다면 그날로 황후가 될 여인이기도 했다.
에드먼드는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며 핀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그래. 그렇게 하지. 그래도 정리하는 데는 시일이 걸릴 테니 조금만 기다리도록 해.”
“좋아요.”
그녀의 머리를 쓸어 주던 에드먼드는 문득 생각했다.
핀은 외롭다고 했다. 저밖에 없는 그녀가 별궁에 온종일 있기만 하는 건 외롭다고. 먹을 것이든 걸칠 것이든 황성에 부족할 것이라고는 없지만, 마음은 그렇게 단순히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면서.
에드먼드도 그게 어떤 외로움인지 알고 있었다. 이 번쩍거리는 곳에 홀로 내던져진 듯한 기분이 싫어서 더욱 강박적으로 여인들을 찾았던 때가 있었다. 누군가와 살을 부대끼고 함께 잠들면 따뜻하니까. 그러면 적어도 그 외로움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
처음으로 든 생각이 있었다. 이게 처음이라는 사실조차도 너무나도 새삼스럽고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의 생각이었다.
소티스 메리골드도 외로웠을까?
***
그날 밤, 황후궁에는 그동안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던 손님이 들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보고를 받은 소티스조차도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을 정도였으니, 시녀들의 얼굴은 백지장보다 더욱 희게 질렸을 정도였다.
“그, 그게…….”
“아벨…… 폰 세턴 멘데즈…… 전하께서…….”
“……젊은 대공작이 오셨다고.”
찻잔을 쥐고 있던 소티스의 손이 잘게 떨렸다.
아벨 폰 세턴 멘데즈. 에드먼드의 하나뿐인 남동생이자 멘데즈 황실의 유일한 적자였다. 에드먼드가 황태자가 된 이후, 자신은 형의 황위를 위협하지 않겠다며 공언하고 숙부를 따라 북부로 올라가 대공작 작위를 이르게 물려받은 일이 있었다.
영지에서 거의 내려오는 일이 없다고 했던 그가 별안간 황성으로 내려온 것까지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의 환영회를 꾸리고 만찬에 초대할 귀족들의 명단을 정리한 것이 소티스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벨이 소티스를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그것도 낮이 아닌 밤에, 기별도 없이 황후궁으로 불쑥.
한 번도 독대한 적 없는 이의 등장에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들어오시라고…….”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소티스는 멈칫했다.
“……아니, 정원으로 모시도록 해요. 창을 열고, 그 너머로 대답할 테니 양해를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리고요.”
“소티스 님?”
그녀는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혔다.
사람들은 여전히 소티스의 흠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다들 피니에 로즈우드가 다음 황후가 될 거라 확신하는 상황에, 소티스는 이미 이혼당한 여인일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허울뿐인 명예조차 남지 않았으니, 사소한 흠조차도 타격이 클 것이다.
그런데 찾아온 이가 하필이면 전남편의 남동생이다. 시간이 야심하니 궁 안에 들였다간 나쁜 오해를 부르기 십상이었다.
문제가 될 만한 일은 피하는 게 좋다. 소티스는 사뭇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일개 공녀로, 사정이 복잡하여 다른 사내를 궁 안에 들이지 않는 것이 옳다고 잘 설명해 주세요. 불편하시다면 제가 날이 밝거든 찾아뵐 거라 정중히 말씀드리세요.”
시녀는 아리송해하면서도 소티스의 선택에 따랐다. 이내 문밖에서 무어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리더니, 철컥거리는 소리가 멀어졌다.
“그렇게 하시겠답니다.”
소티스는 크게 숨을 마시며 허리를 폈다.
궁금증과 불안함이 뒤섞여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