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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28)화 (29/121)

제28화. 소티스처럼 산다는 것 (1)

“마법사님을 좋아하세요?”

마리아네스 로즈우드의 질문에 소티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정원에 두고 키우는 팬지도 그녀의 뺨보다는 덜 붉을 것 같았다.

그녀가 어물거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마리아네스가 짓궂게 덧붙였다.

“마법사님은 소티스 님을 좋아하시던걸요.”

“……다른 데선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마리아네스. 사람들이 들을까 두려워요.”

“들으면 또 어때요? 뭐 잘못된 거라도 있나요? 솔직히 소티스 님 같은 분을 싫어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게 훨씬 더 자연스러워요. 에드먼드 폐하 같은 분을 오래도록 보셔서 실감이 안 나실지 모르겠지만, 레먼 님 같은 반응이 지극히 평범한 거라고요.”

마리아네스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어차피 이혼한 마당에 소티스 님이 다른 남자 좀 만나는 게 무슨 흠이랍니까? 이혼을 안 했어도 마찬가지고요.”

“뭘 기대하시는 건지 모르지는 않지만, 그건 아니에요.”

소티스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공연한 빌미를 주어서 황실이 우스갯거리가 되도록 두는 것도 싫고, 레먼 님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도 않아요.”

“왜 소티스 님이 조심하셔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요…….”

“제가 조심하는 게 제일 쉬워서 그래요. 게다가 이젠 누굴 좋아하는 일에 너무 지쳐 버렸어요.”

소티스는 에드먼드를 좋아하는 내내 천천히 말라서 기어코 황폐해졌던 자신의 마음을 떠올렸다. 그건 사랑이라기에는 그저 끈기나 성실함, 혹은 일방적인 의리처럼 이어져 오던 감정에 더 가까웠다.

평생 해 본 사랑이라고는 그것뿐이었으니 소티스는 다른 방식의 사랑을 몰랐고, 다른 사람을 만나 다른 마음을 주고받을 자신조차 없었다.

사랑 같은 건 지겨워. 소티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금의 자신에게 필요한 건 그런 변덕스럽고 열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하지만 레먼 님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아요.”

마리아네스가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소티스는 애써 모른 척하며 이어 말했다.

“적어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겠어요. 됨됨이도 괜찮다고 느꼈고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됨됨이까지 알아차릴 정도로 친해지신 거예요?”

“뭐…… 비슷해요. 영혼 상태일 때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거든요.”

“치사해요! 황후가 되신 뒤로는 제게도 개인적인 이야기는 아껴 말해 주셨으면서!”

“제, 제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게 아니라…….”

소티스가 둘러대듯이 말하며 살짝 웃었다.

레먼 페리윙클은 좋은 사람이었다. 단지 그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에드먼드의 추측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레먼은 대마법사가 될 조건을 갖추고 있으나, 그 사실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을 것이다.

뚜렷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확신할 수 있었다. 일종의 직감이었다. 소티스에게 그런 식으로 찾아오는 확신은 틀리는 법이 거의 없었다. 레먼의 눈빛이, 그의 태도가 소티스에게 말해 주고 있는 듯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그의 진짜 능력은 베일 너머에 감춰져 있음을.

그러나 괜찮았다. 그것은 그를 음험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든든해 보이게 만들었다. 레먼 페리윙클을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녀가 불안해할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그 강한 힘을 악용하지 않을 테니까. 그럴 사람이었다면, 오로지 선의로 멘데즈에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좋은 사람이에요. 적어도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나아지게 할 거라는 걸 믿어요.”

“그건 제가 소티스 님께 하고 싶은 말이에요.”

마리아네스가 눈썹 끝을 살짝 내리며 말했다.

“어떻게 그러세요? 볼 때마다 이게 꿈인가, 싶을 정도예요. 저라면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혼당한 뒤 절대로 여기 머무르면서 남은 일 따위 못 했을걸요. 아니, 애당초 소티스 님처럼 오래도록 견디지도 못했을 거예요. 뭐든 붙잡고 미워하지 않고서는 울분이 풀리지 않았을 거라고요.”

“……그래도…… 좋은 마음에는, 언젠간 좋은 마음이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요. 어쩌면 이것도 제 나름의, 울분을 푸는 방식일지도 몰라요. 할 수 있는 일을 힘껏 해낸 뒤에는 정말로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절 위해서 살 거예요.”

소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말했다.

“이것도 제 만족을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요. 저는 기대돼요. 이 조그만 황후궁에 앉아 글자로만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진짜 세상을 만나고 부딪치며 크고 작은 문제를 돌볼 기회를 얻었다는 게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이 또한 제가 나아질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마리아네스가 소티스에게 와락 달려들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레먼 님한테 가지 마시고 저랑 살아요!”

“왜, 왜 이러세요, 마리아네스. 약혼자도 있으시잖아요!”

“마음에 안 들어요. 전 눈이 높다고요! 아버지도, 참! 서녀가 황비가 되었으면 됐지 저까지 마저 결혼시키려고 드신다니까요! 으으, 싫어요! 전 자유로운 예술가로 삶을 마감하고 싶어요!”

“아하하. 어쨌든 저는 꼭 황성 밖으로 나갈 거예요.”

“그러려면…….”

조잘조잘 잘도 떠들던 두 여자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해지며 상대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려면 에드먼드의 허락을 받아야 할 텐데.

대체 그 남자는, 그 무정한 황제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건지.

***

소티스 메리골드가 레먼 페리윙클을 좋아하면 어떻게 하지?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는 자신이 그 고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인지 조금도 알지 못한 채, 한 가지 의문을 퍽 오래도록 붙잡고 있었다.

“폐하. 소티스 님의 거처를 강제하시는 일은 황실의 흠이 될 수 있습니다. 사사로이 외출하시는 것도 아니고…… 귀빈과 함께 국내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이지 않습니까.”

소티스는 언제나 그가 싫다고 어깃장을 놓으면 그게 얼마나 부당한 것이든 웬만큼 수긍했다. 고개를 수그린 채 “알겠어요, 폐하.” 하고 돌아가는 것이 그녀가 보이는 반응의 전부였건만.

소티스 메리골드가 변했다.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귀족 회의에 보고서를 올릴 줄은.”

제 아버지의 손을 빌리는 건 웬만하면 안 하려던 이였다.

낯설게 느껴질 정도의 변화였다. 에드먼드는 고심하는 얼굴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차마 그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반려할 수는 없어서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만, 실은 그 안건이 올라왔다는 사실부터가 못마땅했다.

시종장의 말이 옳았다. 그녀를 가둘 명분도 없었다. 득보다는 실이 가득한 일이었으며, 그녀가 적당히 황성 안팎을 오가도록 해야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핀이 미뤄 둔 국무를 소티스가 처리하는 게 에드먼드에게도 유리하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싫은 건지. 뭐가 그토록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속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폐하. 소티스 님께서 오셨습니다.”

에드먼드는 눈을 몇 차례 껌뻑거렸다. 뭘 잘못 들었나?

“……뭐?”

“소티스 메리골드 님께서 폐하를 뵙고자 하십니다.”

소티스가 황제의 침실까지 왔다. 해가 진 지 두 시간도 넘었다. 새삼스럽다 못해 이상할 정도의 방문이었다.

에드먼드는 대답 대신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한달음에 문을 열자 그 너머에는, 시종의 말 그대로 소티스가 가만히 서서 에드먼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

그건, 언제가 보았던 장면을 불러일으켰다.

소티스는 희고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새벽빛 같은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땋아 작은 꽃으로 장식했다. 남은 꽃은 조그맣게 엮어 쥐고 있었는데, 황후궁의 정원에 그 꽃이 피어 있던 것을 얼핏 본 듯도 했다.

“여긴 왜 왔지?”

그녀는 습관적으로 발끝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제가 내일 황성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해 주세요.”

에드먼드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레먼 페리윙클은?”

“동행해야 해요. 제가 혼자 나가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그렇다면 의미 없는 외출을 위해 굳이 보고서까지 올릴 필요는 없었겠군. 그대 덕에 많은 이들이 시간을 허비한 셈이 아닌가?”

소티스는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사적인 감정으로 공적인 일을 그르치지 마세요, 폐하. 멘데즈 황국은 혼란스럽고,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절실해요. 폐하께는 그저 기분의 문제겠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생과 사를 결정하는 일이 됩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국민을 신경 썼지?”

그녀가 눈을 내리깔며 웃었다. 그 질문을 들은 것 자체가 무척이나 슬프고 속상하다는 태도였다.

“처음부터요.”

“…….”

“언제나요, 폐하. 제가 황태자비가 되려면 그에 걸맞은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요.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은 저의 의무였고, 저를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폐하께서는 평생토록 믿지 않으셨으나, 저는 줄곧 그랬답니다.”

“…….”

“지난번에는 도망쳤지요,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서.”

에드먼드는 그제야 소티스의 흰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싶었더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가 제 침실에 찾아왔을 때 입었던 옷이었다. 오밤중에 황제의 침실에 찾아올 일도, 그럴 용기도 없는 여인이라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음을 증명했던 유일한 날.

그날 에드먼드는 핀과 몸을 섞고 있었고, 소티스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뻔히 알면서도 듣고 싶지 않았다. 들어 주지도 않을 테니, 만나 봤자 어떤 의미도 없을 거라고 여겼다.

어차피 그는 핀을 황비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그런 마당에 소티스가 사절단 앞에 황후로서 얼굴을 내비치겠다는 사실이 핀을 견제하는 행위처럼 느껴져서 우스웠다.

그때는 적당히 비웃기만 해도 글썽거리며 도망치더니.

“변했군.”

에드먼드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소티스가 작게 웃었다.

“맞아요, 폐하. 저는 변했어요. 더 변할 거고요.”

“왜 갑자기 그렇게 됐지?”

“글쎄요…… 계기가 중요한가요?”

소티스의 맑은 물빛 눈동자가 에드먼드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게 무엇이든 폐하 덕분도, 폐하 때문도 아니니 염려하지 마세요. 저는 황실을 돕고, 더는 제가 필요하지 않을 때 사라져 드릴 거예요. 폐하의 인생에서, 완벽하게. 폐하께서 오래도록 바라셨던 그대로요.”

에드먼드는 입을 달싹이다가 눈썹을 모았다.

자신이 미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충동적으로 그 말을 부정하고 싶었을 리가 없다.

기분 나쁠 정도로 부조리하게 요동치는 그의 속내 같은 건 모르겠다는 듯 소티스가 말을 이었다.

“저희는 함께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일부러 변하지 않았어요. 그래야 폐하의 곁에 머무를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변했다. 자신의 선택으로.

“이제 제가 변해서 폐하의 곁을 떠나면 저희는 본래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 테니…….”

소티스의 목소리는 점차 작아져서, 작아져서, 그리하여 결국 바람이 속삭이는 소리처럼 들렸다.

“폐하는 변하지 마세요.”

실낱같은 바람이 불어와 에드먼드를 괴롭게 했다. 그는 왜 괴로운지도 몰랐다. 여러해살이풀처럼, 나무처럼 항상 그 자리에 심겨 있던 그녀가 갑작스레 자리를 박차고 나서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언제나 밉살맞은 나무를 파내야만 한다고 생각했지, 그 나무가 직접 걸어 나갈 줄은 몰랐기에.

그토록 오래도록 바랐던 결과였음에도 얼떨떨하고 이상했다.

“사랑이라도 하는 건가?”

그 남자를. 그 마법사를.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그 인간 같지도 않은 눈을 한 남자를. 대마법사일지도 모르는 진실을 숨기고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무것도 아닌 척 웃는 음험한 이를.

세상 무엇도 몰라서 미련할 만큼 제 뒤를 좇기만 하던 그녀가 이제 와서 다른 사랑이라도 한다는 건지.

소티스는 아니라고 하려고 했다. 며칠 전 에드먼드와 나누었던 대화처럼, 그런 감정으로 황실을 우스갯거리로 만들 이유가 없으며 모든 것이 멘데즈 황국을 위해서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불쑥 튀어나온 그의 충동이 불똥처럼 옮겨붙기라도 한 건지.

소티스는 처음으로 그녀답지 않게 즉답했다.

“그렇다고 하면 믿으실래요?”

“무슨…….”

“제가 앞으로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면, 에드먼드 폐하는 절대 아닐 거예요. 그러나 레먼 님이 되지 않을 이유는 없지요.”

쿵.

그 말을 한 순간, 소티스는 자신의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건 무언가 실수를 했을 때 느끼는 낭패감도, 에드먼드의 화난 얼굴을 볼 때마다 겪는 불안감도, 자신의 처지에 새삼스레 느끼는 비참함도 아니었다.

설마, 아니겠지.

“……어쨌든 저는 내일 나갈 거예요, 폐하. 폐하께서 막으신다면 이번에는 아버지의 이름마저도 빌려 쓸 거예요. 메리골드 공작님께서는 제가 이번 일로 공을 인정받으면 황비 책봉식이 더 빨라질 거라고 믿고 계시거든요. 저는 공작가의 힘을 빌려 쓰는 것을 정말로, 정말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

소티스가 조용히,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고 차갑게 말했다.

“저는 변했으니까요.”

“…….”

“앞으로 폐하께서는 그동안 알던 ‘소티스’보다, 모르는 ‘소티스’를 더 많이 보시게 될 거예요.”

소티스는 에드먼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고개를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에드먼드는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빠르게 멀어지는 그 모습이…….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마치 어디론가 나아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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