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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27)화 (28/121)

제27화. 마법사의 마음 (5)

“저…… 방금 괜찮았나요?”

어딘가 분해 보이던 에드먼드가 나간 이후, 레먼이 멋쩍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응접실에서 정원으로 난 창을 올려다보던 소티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특유의 따뜻한 미소를 지은 레먼을 응시했다.

이내 그녀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아하하. 그게 걱정이신 건가요? 무척 근사했어요. 폐하 덕에 마법사님의 새로운 면모도 보았네요. 조금 신기하고 부러웠어요. 저는 에드먼드 폐하의 앞에 서면 습관적으로 긴장하거든요.”

“그게…… 소티스 님의 입장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자세로 대하면 저를 귀빈으로 대우하시는 소티스 님의 명예에도 누를 끼치게 되니까요.”

“아…….”

“혹시 저 때문에 곤란해지신다면 꼭 말씀해 주세요. 일단, 그보다는…….”

레먼은 천진하게 웃으며 소티스에게 어서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다.

“마저 계획을 짭시다. 황성 바깥으로 나가시는 것이 처음이라고 했으니, 만반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안내해 줄 만한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만…… 마리아네스 님께 부탁하는 건, 역시 좀 그렇겠죠?”

그녀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먼드가 오기 전까지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멘데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었다. 레먼은 아무래도 사건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고, 소티스는 황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나는 원인 불명의 사건을 몇 가지 일러 주며 해결해 보자고 했다.

이 조그맣고 따뜻한 황후궁을 나가는 건 상상조차도 해 본 적 없는 일이라, 소티스는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둘이 마주 보고 앉아 차가 식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눌 때는, 꼭 봄 소풍을 가기로 약속한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들뜨기도 했다.

그러나 응접실로 들어선 소티스의 마음은 에드먼드가 찾아오기 전보다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내내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걱정이 고개를 불쑥 들이밀고 제 존재감을 자랑했던 까닭이었다.

레먼이 곤란해지면 어쩌지.

에드먼드는 레먼을 마뜩잖게 여기고 있는 듯했다. 베아툼의 마법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경우 따라오는 이점에 대해서 모를 이가 아닌데도 그랬다. 그 불합리한 감정의 바닥에는 분명 소티스에 대한 감정이 있을 것이다. 에드먼드는 예전부터 소티스가 뭘 하든 싫어했고, 이번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국민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황후 소티스가 아닌, 공녀 소티스로서 해낼 일이었다.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황실의 역할을 대신하니 그 명예를 가로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혹시라도 메리골드 공작이 황제에게 등을 돌리기라도 한다면 정치적으로도 골치 아파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소티스는 이 모든 복잡한 사정에 레먼이 얽히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그저 선의로 머무르며 사람들을 위해 협력하는 이였다. 그는 에드먼드에게 ‘은인이 제 덕에 공연한 고초를 겪고 있다’고 했지만, 소티스는 반대로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의 도덕적인 만족감을 위해 그의 호의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죄책감을 실감한 소티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레먼, 저는…….”

맞은편에 앉은 소티스가 불편한 기색으로 무릎 위에 얹은 손을 쥐었다 펴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자 그가 마치 그녀의 속내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웃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제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알고 계세요?”

“소티스 님께서는 다정하시니, 필시 소티스 님보다 저를 더 걱정하고 계시겠지요. 아닌가요?”

“…….”

“그래서 괜찮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저는 무엇이라도 좋으니 당신을 돕고 싶고, 그 호의를 소티스 님께서 거절하시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그래도…….”

“베아툼의 마법사는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한 힘에는 그에 맞는 의무와 책임이 따르지요. 저는 영혼을 들여다보고 인도할 수 있는 힘을 처음으로 손에 넣었을 때, 세상의 모든 영혼을 바른길로 이끄는 데 평생을 쏟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니 이는 소티스 님을 돕는 일임과 동시에, 저를 명예롭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저 일을 돕는 것에만 그칠 뿐 보상으로 드릴 만한 것이 없답니다. 메리골드 공작가는 부유하지만 제 몫은 없거든요. 동생 셰릴이 결혼을 통해 벌어 온 자산이 대부분이라서요. 게다가 아시다시피 멘데즈의 황후는 오래도록 명예보다는 불명예의 상징으로 쓰였으니까요.”

그가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돈을 바랐다면 마탑에 머무르며 마법을 연구하거나 여행자 행세를 하고 돌아다니지 않았을 겁니다. 대신 사절단의 형태로 외국을 오가며 문제를 해결하는 대가로 금품을 요구하였겠지요.”

소티스가 소리 없이 입을 달싹이자 레먼이 빙그레 웃었다.

“타인의 존경을 바랐다면 저는 제 존재를 숨기지 않았겠지요. 그 모든 것이 어렵고 새삼스러워서 그러지 않았던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레먼, 긍지만이 당신을 움직이게 하나요?”

“그렇습니다. 저는 오로지 제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입니다. 그러니 누구보다도 자유롭지요. 그런 제가 저만을 위해 움직이지 않게 된다면, 그건 분명히 제 마음만큼 강렬한 타인의 진심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

소티스에게서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다던, 그저 그의 뜻과 명예를 위해서 움직인다던 레먼은 티 한 점 없는 미소를 건네 왔다.

청명하게 반짝이는 호박색 눈동자를 보던 소티스는 자신의 마음속에 돌처럼 단단히 굳어 있던 죄책감이 녹아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긴 겨울이 지나 볕을 쬔 얼음덩어리가 녹듯, 그것은 흔적도 없이 허물어졌다.

이런 사람도 있구나.

내게서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는, 그저 내 진심만을 아는 사람이.

“이런저런 준비가 좀 필요할 테니 바로 떠나는 것은 어렵겠지요. 정식으로 이혼하셨으니 모든 행동을 에드먼드 폐하께 보고하셔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소티스 님께서도 피곤한 일은 만들고 싶지 않으실 테니…… 한 번쯤은 황제 폐하를 뵙고 잘 말씀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언제가 좋을까요?”

“열흘 정도면 괜찮겠지요? 그 정도면 서로 준비하기엔 충분하겠어요.”

“좋아요.”

어느새 걱정이 사라진 소티스는 물빛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그 열흘을 알차게 보낼 수 있을지, 어떤 일을 더 면밀히 조사하고 에드먼드를 설득할지 벌써 고민하기 시작했다.

레먼은 밝아진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소티스 님.”

소티스가 다분히 충격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건이요?”

마치 방금 겨우 쥔 사탕을 빼앗긴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저보다 나이가 몇 살은 더 많고, 항상 침착하고 성숙했던 그녀가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레먼은 웃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으며 자못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반드시 들어주셔야 해요.”

“노, 노력해 볼게요. 뭔가요?”

“소티스 님께서 지금보다 더 건강해지시는 것입니다.”

의외의 말에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황성 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황후궁의 시녀를 다 데려갈 수도 없어요. 때에 따라서는 메리골드 공녀라는 사실을 숨겨야 할 때도 있을 테니,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짐짓 엄격하게 들릴 정도였다. 소티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예전보다는 영혼이 훨씬 덜 불안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닙니다. 게다가 마리아네스 님이 모셔 오신 기력술사들이 말했던, 몸의 새로운 ‘흐름’이라는 것도 신경이 쓰입니다. 어쩌면 몸과 영혼의 융합이 불완전하다는 말일 수도 있어요. 그러니 열흘 동안 건강을 챙기시는 데 주의를 기울이셔야 해요.”

건강하셔야 합니다.

그 말에 온기가 깃든 것이 이상하고 신기해서 소티스는 잠시간 레먼을 빤히 바라보았다.

소티스 메리골드에게, 그리고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에게 ‘건강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았다. 이유야 너무도 다양하고 타당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그녀가 아기라도 가지지 못하게 된다면 멘데즈 황국의 후사를 낳을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 소식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메리골드 공작이 펄펄 뛰는 날에는, 소티스를 돌보던 의사들이 단체로 곤란해질 테니까.

그래서 많은 이들이 입이 닳도록 소티스에게 건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의 연약함이 마치 그녀의 불찰이자 불성실 때문인 것처럼 말할 때마다 소티스는 끝없이 작아졌다. 그 매서운 잔소리가 정말로 그녀를 위한 말들은 아닌 것 같아서 더욱 답답하고 서글프기만 했다.

그러나 레먼은 달랐다. 그는 오로지 소티스의 안위와 행복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온기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그녀를 향한 순수한 염려만이 가득했다.

그의 마음은 태양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소티스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결의에 찬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럴게요.”

레먼이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정말 가능하시겠어요?”

“……당연하죠!”

***

그 이후로 소티스 메리골드는 누구보다도 치열한 나날을 보냈다.

우선 식사량을 부쩍 늘렸고, 음식을 먹고 나서는 황후궁을 거닐거나 서서 책을 읽기도 했다. 시녀들에게 간단한 요리를 배우거나 찢어진 옷을 꿰매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잘 쓰지 않는 손수건을 꿰매 나비 모양의 수를 놓은 것을 본 마리아네스는 감탄하며 연보랏빛 손수건을 이리저리 들어 보였다.

“와. 손재주가 좋으시네요, 소티스 님. 하긴,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누가 시중드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셨죠?”

“아무래도 번거로우니까요. 혼자 할 수 있는 건 하고 싶었어요. 음식은 조금 어렵지만…… 그래도 점점 솜씨가 느는 게 보이니까 뿌듯하던걸요. 좋은 일로 나가는 건 아니어도 모처럼 황성 밖에 가 보는 거니까, 직접 도시락을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도시락?”

“……이상한가요?”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이상하거나 나쁜 일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잘되었다. 마리아네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한 번도 황성 밖으로 제대로 나가 본 적이 없는 소티스가 바깥 세상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의욕에 찬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녀의 세상이 넓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마리아네스는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다렸다. 친구라는 이름으로는 미처 할 수 없었던 것을 누군가 서슴없이 해낼 수만 있다면.

하지만 소티스는 예상보다도 훨씬 더 즐거워 보였다. 어쩌면 그건 동행인이 레먼이어서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필이면 그 남자라서.

그렇다면…….

“소티스 님.”

마리아네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법사님을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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