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26)화 (27/121)

제26화. 마법사의 마음 (4)

“안 돼.”

에드먼드가 딱 잘라 말하는 순간, 소티스의 마음속에 조그맣게 피어나 있던 어떤 희망이나 기대감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아직 부탁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딱히 무리한 부탁도 아니었다. 이혼을 수락했을 때와 비슷하게, 그저 못 이긴 척 수락하면 그에게도 충분히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에드먼드는 그 특유의 냉랭한 표정으로 거절했다. 심지어 이야기를 듣지도 않았다.

“……폐하, 저는 아직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어요.”

“무슨 말을 할지 훤히 아는데 그걸 굳이 들어야 하나?”

치맛자락을 꼭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소티스는 낙담한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폐하께도 나쁠 것 없는 제안입니다.”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지.”

계속 어깃장을 놓는 모습에 소티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누군가는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상대적으로 황성을 쉽게 오갈 수 있는 처지인 제가 해내는 게 나아요.”

“정말로 멘데즈를 위한 것이 맞나?”

비아냥거리는 듯한 에드먼드의 말에 소티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생각해 봐. 황제와 황비가 포기한 문제를 나서서 해결하는 전 황후. 이혼한 뒤에도 국무를 다스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누구에게도 손을 쉽게 빌려주지 않는 베아툼의 영혼 마법사까지 끌어들인다고? 거기다가 두 사람의 사이가 각별하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

“황실을 우스갯거리로 만들기에 딱 좋은 환경이 아닌가?”

소티스의 얼굴은 창백해졌다가 이내 붉게 달아올랐다. 마른 어깨가 수치심으로 바르르 떨렸다.

“왜 꼭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가능성에 대해 말할 뿐이다.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레먼 님과 저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그녀가 주먹을 꽉 쥐고 외쳤다.

“오로지 선의로만 머물러 주시는 분입니다. 베아툼에서 힘을 보태 준다는 것은 국제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폐하께서도 아시잖아요?”

“……글쎄.”

에드먼드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덧붙였다.

“레먼 페리윙클을 뺀다면 내 마음이 변할 수도 있겠지.”

소티스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세 알아차렸다.

에드먼드는 레먼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게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레먼을 뒤에서 몰래 조사했으며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 분명했다.

약속했으면서. 레먼 페리윙클을 쫓아내지 않겠다고.

“…….”

다음 순간, 소티스는 놀랍게도 자신이 낙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번만큼은 정말로 에드먼드에게 무언가 기대하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그의 변덕에 레먼이 공연히 곤란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싫은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을 조용히 읊조렸다.

“……폐하는 정말로, 저와 한 약속 같은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시는군요.”

무어라 더 설명하려던 에드먼드는 멈칫했다. 소티스의 고요한 힐난이 그의 가슴을 툭 때리고 지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에드먼드도 그 사실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소티스에게 불성실했다. 그도 사람이니 죄책감을 느낀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무뎌진 지 오래였다.

그러니 이 파동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했다.

“……폐하.”

소티스는 치미는 설움을 삼키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골랐다.

큰 걸 바라며 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제게 모욕적일 수도 있는 상황을 기꺼이 감내하고 있기도 했다. 물론 제게 지워진 책임을 한꺼번에 내던질 자신이 없어서기도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에드먼드는 조금도 손해 보는 것 없이 제 뜻대로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레먼을 곁에 두도록 허락해 달라는 건 에드먼드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니었던가? 타국과 잘 교류하지 않는 베아툼의 마법사와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명성도 손에 넣을 수 있으며, 처리하기 껄끄러운 일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다. 그는 다소 악의적으로 말했지만, 설령 레먼과 소티스가 마음이 맞는 사이가 된다고 하더라도 이미 이혼했으니 황실의 격을 떨어뜨릴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 약속 하나조차 들어주지 못해서 또 레먼조차 내쫓으려고 하다니.

이 황성에 자신의 아군이라고는, 황후궁에 찾아오는 몇 안 되는 이들과 시녀들이 전부이건만.

“폐하께서 저를 힘들게 하냐고 물으셨지요.”

에드먼드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래.”

“맞아요.”

소티스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을 억지로 참은 탓에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폐하께서 저를 힘들게 해요.”

기어이 참지 못한 투명한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소티스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조차 슬픈지 눈을 내리깔고 눈물을 참으려고 했지만, 치미는 슬픔을 다 참을 재간이 없어 결국 양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저는 폐하를 미워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에드먼드는 속이 더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부당한 일이라며, 어떻게든 손해를 입게 만들겠다며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고 짜증을 부렸다면 좀 나았을까?

그러나 소티스는 그런 면에서는 도저히 에드먼드의 마음처럼 굴어 주는 이가 아니었다.

“원망은 양날의 검이라, 상대를 향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마음을 가진 자신도 함께 할퀴지요. 저는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도 가슴이 아프고 힘들지만…….”

“…….”

“이내 털어 내고 수긍할 것입니다. 오랜 시간 그랬던 것처럼요. 저는 폐하를 위해 화를 내지도 않을 거고, 폐하를 위해 불행해지지도 않을 거예요.”

에드먼드는 울지 말라며 다그치고 싶은 마음을 꾹 삼켰다.

“레먼 님은 이 일에 무척이나 적극적이세요. 지금도 고통받고 있을 멘데즈 황국의 사람들을 걱정하고 계시지요. 사적인 감정에 휘둘려 더 큰 것을 보지 못하는 폐하와는 달라요.”

“레먼 페리윙클은 그대가 아는 것과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어!”

소티스는 황제를 가만히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그런다고 한들 제게는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폐하. 폐하는 언제나 저를 냉대하시고, 제 생각과 계획이 품은 백 가지의 가능성보다 한 가지의 위험성에 주목하시지요.”

“그래서 나보다 그 외국의 마탑주가 낫다?”

“설령 폐하의 말씀처럼 제 생각과는 다른 분이라고 하셔도, 제가 쓰러져 있었을 때 병문안을 오신 분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지요.”

“나는…….”

“그 시간에 핀 전하와 결혼식 준비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셨고요.”

“…….”

“폐하. 저희는 부부로서 오랜 시간을 함께 걸었으나, 이는 폐하의 뒤를 제가 숨 가쁘게 좇은 것뿐이에요. 그러나 이제 더는 그럴 생각이 없으니, 언젠가 폐하를 등지고 다른 곳으로 떠날 것입니다. 적어도 핀 전하께서 무사히 아기님을 낳으실 때까지만이라도 무의미한 분쟁을 피하는 것이 좋겠어요.”

드물게 확고한 말을 꺼내던 소티스는 숨을 살짝 골랐다.

“저희는 이제 완전히 다른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물론 전혀 그러지 않으시겠지만, 제가 떠난다 하여 아쉬워하거나 붙잡으실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런다면 분명히 소티스는 속절없이 흔들리고 말겠지. 에드먼드의 곁으로 다시 돌아가지는 않을 테지만, 마음은 몇 번이고 구렁텅이에 처박혀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그건 싫었다.

소티스는 더는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에게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이미 받은 것으로도 충분하여 넘칠 지경이었다.

이제는 그 오래된 늪에서 나올 때도 되었다.

“변하지 마세요.”

슬픔은 파도처럼 밀려와 소티스를 가득 메우고, 이내 일사불란하게 빠져나가 버렸다. 결국 남은 것은 두 발로 꿋꿋하게 버티고 선 그녀 자신뿐이었다.

소티스는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변하신대도, 저는 폐하를 연민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대로 해.”

에드먼드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가슴께를 지끈거리게 하던 답답함이 심해지자 짜증이 울컥 치밀었다.

분명히 레먼 페리윙클을 빠른 시일 내에 돌아가게 할 테니 협조하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아니, 협조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가 대마법사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먹이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 말이 목구멍에서 걸린 채로 도무지 나오지 못해서 더욱 짜증스러웠다.

왜 마지막 순간 마음이 약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제 아무것도 아닌 여자인데. 이혼까지 완벽히 해낸, 아이도 갖지 못할 메리골드 공녀에 불과한 그 흐릿한 여인이.

왜 유독 조금씩 더 선명해지는 것 같은지. 왜 점점 더 커지는 것만 같은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때, 창문 쪽에서 온화한 목소리가 들렸다.

“레먼 님?”

“죄송합니다. 아까 소티스 님께서 바깥바람이 쐬고 싶다고 하셔서 창을 열어 두었던 탓에 두 분의 대화가 들렸습니다. 저 때문에 은인께서 공연한 일을 겪으신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네요.”

“……허어.”

잘못한 것 없는 이를 타박했다는 뜻을 넌지시 담아 말하는 레먼의 목소리는 따뜻하면서도 어딘가 뾰족한 곳이 있었다.

그는 긴 머리카락을 넘기며 소티스에게 친절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이내 에드먼드에게 시선이 닿았을 때는 단단하고 서늘한 무표정이 되었다.

“무지는 불안이 되기 쉽지만, 저는 제 이름과 명예에 맹세코 멘데즈에 해를 입힐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가만히 두시지요. 일이 생긴다면 그때 내쫓아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기이할 정도로 맑게 반짝이는 호박색 눈동자를 바라보던 에드먼드가 건조하게 대꾸했다.

“그대가 대마법사의 조건을 충족했을지도 모른다던 가설이 있던데.”

“폐하!”

소티스가 놀라서 비명을 내지르듯이 말했다.

“일국의 황제로서 마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지. 그렇지 않나?”

황후궁에 언제 봄이 찾아들었냐는 듯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레먼은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에드먼드를 바라보았다.

이럴 때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다.

“글쎄요.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로군요. 제 고국에서도 듣지 못한 소문을 멘데즈에서 듣다니, 참 새롭고 신기한 기분입니다.”

레먼의 얼굴에 사람 좋은 미소가 떠올랐다.

“낭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지 않겠습니까? 부족한 저를 두고 그런 말이 돈다니, 제 스승님께서 무척 재밌어하시겠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사자가 그렇게 딱 잘라 말하니 더는 말할 수가 없었다.

에드먼드는 어떤 대꾸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들이 돌아가 달라고 부탁하기 전에 제 발로 황후궁을 떠나고 싶었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는데 웃음소리가 들렸다. 소티스가 소리 내어 웃을 줄도 알았던가. 그렇게 웃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삼킨 자갈이 가슴께에 내내 걸려 있다가, 발밑에 쌓여 걸음을 더욱 무겁게 만드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