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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25)화 (26/121)

제25화. 마법사의 마음 (3)

이 세상의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남자.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가 시간을 들여 레먼 페리윙클을 조사했을 때 처음으로 느낀 감상이었다.

남부 베아툼 왕국은 군사력도, 경제력도 멘데즈에 비할 바가 못 되었으나 마법사의 전력은 가히 대륙 최고라고 부를 만했다. 타국에 배타적인 성향 탓에 마법사를 초빙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그중에서도 레먼은 누구와도 교류한 적 없는 미지의 마법사였다.

“폐하, 저는 솔직히…… 소티스 님께서 레먼 님을 어떻게 초청하셨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개 공녀가 사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이도 아니거니와, 타국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던 베아툼의 마법사가 움직인 것도 심상치 않은 일입니다.”

로즈우드 후작이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남부 국경과 인접한 영지를 가진 그로서도 베아툼에 대해 조사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폐하…….”

후작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사뭇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레먼 페리윙클은 대외적으로 대마법사의 수제자이자 페리윙클 마탑의 주인이라고만 알려져 있습니다만…….”

“말하도록.”

“……실은 그 자신도 오래전부터 이미 대마법사의 조건을 갖춘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돌고 있습니다.”

에드먼드의 표정이 심각해지다 못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 추측이 진실이라면, 이는 단순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베아툼의 마법사 한 명이 정예 부대만큼의 역할을 해낸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일반 마법사도 그런 마당에, 베아툼 내부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던 대마법사는 오죽할까.

지나치게 강한 힘은 위험한 곳에 쓰일 가능성이 있어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왕국 내에서 관리한다. 그래서 십 년 전, 레먼 페리윙클의 스승도 대마법사로 각성하자마자 고국으로 돌아갔던 적이 있었다.

“좀 더 자세히 조사해 보도록.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

“명을 받들겠습니니다, 폐하. 지금 레먼 님은 소티스 님의 개인적인 귀빈으로 오셨다고 하지만, 복잡한 일을 피하고 싶으시다면 원만하게 돌려보내시는 쪽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알겠으니 돌아가 보도록.”

에드먼드는 여러모로 골치가 아팠다.

레먼 페리윙클은 소티스 메리골드의 개인적인 손님이었다. 물론 자신은 황제였고, 권력의 힘을 빌려 내친다면 쫓아내지 못할 것은 없었다. 이유도 만들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이미 소티스와 약속했다. 레먼을 쫓아낸다면 소티스는 자신이 이번에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소티스의 성격상, 에드먼드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펄펄 뛰거나 메리골드 공작을 통해 진실을 폭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로 마음먹었다면 이미 오래전 에드먼드와 지저분한 치정 싸움을 했으리라. 그런 면에서 소티스는 현명하고 평화로운 성정을 타고났다.

“약속을 처음 어기는 것도 아닌데…….”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에드먼드도 알고 있었다. 소티스도 이제 제게 새삼스레 무언가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게 괜스레 답답하고 찜찜하게 느껴지는지는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대체 왜.

에드먼드가 깨뜨리고 짓밟은 숱한 약속 중 하나일 뿐인데.

“그래도 이번에는 도저히 안 돼, 소티스.”

에드먼드는 홀로 중얼거리며 들여다보고 있던 책을 덮었다. 글자가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레먼 페리윙클은 영혼과 생명을 관장하는 페리윙클 마탑의 주인이었다. 보고된 바에 따르면 그는 길을 잃은 망자의 영혼을 갈무리해서 신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대제사장이나 마법사가 아닌 대마법사라면, 그 영혼을 ‘관리’하거나 혹은 함께 소통하고, 나아가 ‘이용할’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즉, 강대한 힘을 써서 삶과 죽음을 조절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망자와 대화를 하거나, 망자를 이용할 수 있는 자가 메리골드 공작의 딸과 가깝게 지내고 있다. 에드먼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 소식이 최대한 그에게 유감스럽게 들리지 않도록 느끼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어야지.”

에드먼드는 미지근했던 선황제 부부와는 달랐다. 자신의 출생이 약점처럼 잡혀 있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싫었고, 시간을 들여서라도 발칙한 공작가를 뿌리 뽑고 싶었다. 태어날 아이의 황위 계승권을 위해서라도.

만일 메리골드 공작가를 완전히 파내기 위해 공작을 죽여야 한다면 그럴 수도 있었다. 후대를 위해 잡음을 미연에 제거하고자 함이었다. 실은 선황제가 했어야 하는 일인지도 몰랐다. 그때는 그저 정보상이어서 공작가를 제거하기 쉬웠을 텐데, 지금은 셰릴과 결혼한 상단주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기반을 다져 버린 탓에 그때보다 부담이 더했다.

이 상황에서 레먼 페리윙클이 끼어들어 메리골드 공작가에 손을 보태 주기라도 한다면.

“…….”

황제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늘 이런 식이다. 소티스 메리골드와 관련된 일은 하나같이 미지근하고 답답하게 흘러갔다. 명쾌할 만큼 효율적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 번씩 망설이게 된다.

그래. 차라리 직접 보고 말하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에드먼드는 지체할 것 없이 벌떡 일어났다. 황후궁에 들렀다가 일을 마무리하고, 핀에게 갈 참이었다. 핀은 국무에 참여하지 않아 하루의 대부분을 서쪽 별궁에서 보냈는데, 아이를 가지고 나서 부쩍 울적해하는 듯했다.

뭐든지 혼자 해내려고 하는 소티스보다는 틈을 주는 핀이 낫지. 에드먼드는 그런 식으로 자신이 아는 여자들을 쉽게 비교하며 황후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골치 아픈 일을 빨리 해결한 뒤 편안해지고 싶었다.

***

“폐하를 뵙습니다. 여긴 어떻게 오셨다고 말씀드릴까요?”

시녀들은 예의 바르게 인사하면서도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저들끼리 몰래 불편한 시선을 교환하기까지 했다.

에드먼드는 불쾌한 기색을 보이려다가 그만두었다. 하나씩 흠잡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국무에 관련된 중요한 일이라고 이르도록.”

시녀들은 서둘러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아까보다 더욱 곤혹스러운 얼굴로 나와 허리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폐하. 소티스 님께서 손님이 계시니 잠시 기다려 주시기를 청하셨습니다.”

에드먼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음성으로 물었다.

“국무와 관련된 용건이라고 하였을 텐데.”

“……소티스 님께서도 현재 국무에 관련된 논의 중이라 하셨습니다.”

그 말에 황제는 황후궁을 먼저 찾았다던 ‘손님’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레먼 페리윙클.

두 사람은 아마도 멘데즈 황국의 곳곳에 일어나고 있다던, 영혼과 관련된 기이한 사건이나 각종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논의하고 있을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 문제는 더는 소티스의 책임은 아니었으나, 이혼하기 전부터 신경 쓰던 일이었던 만큼 여전히 도맡아 진행하고 있는 듯했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나쁜 선택은 아니었으나, 조력자로 선택한 이가 하필이면 레먼이라는 것에 에드먼드는 골치가 아팠다.

어쩌면, 거슬리는 건지도.

“두 사람이 제법 가까운 모양이지?”

에드먼드의 질문에 시녀가 의아해하면서도 곧 공손하게 대답했다.

“소티스 님께서 쓰러지셨을 때부터, 레먼 님께서 자주 오셨습니다. 혹여 영혼이 상한 것은 아닌지 살뜰히 살펴 주셨고요.”

시녀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그제야 에드먼드는 자신이 한 달간 소티스를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두 사람은 그럴 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적어도 그 자신에게는 그랬다. 사랑해 마지않는 연인도 아니었고, 정치적으로 애매하게 꼬여 있기도 했다.

어차피 기대조차도 하지 않았을 테지. 늘 그랬던 것처럼.

알면서도 심사가 꼬인 에드먼드는 인상을 구겼다.

“내가 눈치가 없었군.”

마치 두 사람이 밀회라도 한다는 듯한 말투였다.

시녀는 억울함을 토로하고 싶은 것을 꾹 삼켰다. 그러고는 속으로 이럴 거면 차라리 에드먼드가 황후궁에 아예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와서 소티스를 힘들게 하느니, 늘 그랬던 것처럼 무관심한 쪽이 나을 것 같았던 탓이었다.

게다가 소티스와 레먼의 사이를 타박하는 듯한 그 말투는 대체 뭐란 말인가. 설령 두 사람이 좋은 감정으로 만난다고 한들, 그게 에드먼드와 무슨 상관이라고!

이혼 서류는 오래전 통과했고, 소티스는 법적으로 메리골드 공녀였다. 아니, 설령 ‘메리골드 공녀’가 아니라 ‘멘데즈의 황후’였어도 두 사람의 만남은 대단히 비난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에드먼드가 그간 들였다 내친 정부를 모으기만 해도 이 조그만 황후궁이 북적거릴 텐데, 이국의 마법사 한 명이 다 뭐란 말인가.

“폐하.”

그때, 소티스가 응접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인사드리는 것이 늦어 죄송합니다. 안에 손님이 와 계시니, 괜찮으시다면 다른 곳으로 모셔도 될지요.”

“됐다. 앉아서 오래 이야기할 만한 일도 아니니.”

“그럼…….”

그를 이대로 세워 두는 것이 무안했는지 소티스가 복도 너머를 손짓했다.

“정원으로 잠시 모실게요. 마침 드리려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긴 치맛자락을 밟지 않기 위해 살짝 들어 올리고는 종종걸음으로 앞서 나갔다. 소티스가 발을 옮길 때마다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하늘하늘하게 흔들렸다.

입은 옷은 물론이고 머리카락도, 혈색도, 목소리조차도 옅고 투명했다. 참 흐릿한 이였다. 모난 곳은 없었지만 특별한 구석도 없었다. 원색적이고 강렬한 것에 금세 시선을 사로잡히는 에드먼드에게는 그리 대단하게 느껴진 적도 없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소티스 메리골드는 언제나 이곳에 있었다. 에드먼드는 문득, 어떤 예고도 없이 그 사실을 실감했다. 소티스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곳에 있었다. 황태자비 자리를 약속받고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도 이곳에서 지냈고, 약혼하고 결혼한 이후에도 그랬으며, 에드먼드의 독단적인 선택으로 이혼한 뒤에도 줄곧 이곳에 있었다.

황성 동쪽의 작은 건물이 황후궁이 되었다가 그 이름조차도 유명무실해질 때까지, 소티스는 누군가 성의 없이 파묻은 식물처럼 이곳에서 피고 지는 일을 반복했다.

“일전에도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멘데즈 황국 내에서 영혼에 관련된 문제들이 일어나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해요. 마법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누군가 급사하거나 단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경우 영혼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군요. 망자들을 직접 보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 같아요.”

정원에 선 소티스는 드물게 밝은 얼굴로 에드먼드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앞에서는 늘 주눅 들어 있던 것조차도 잊고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에드먼드는 설명할 수 없는 갑갑함을 느꼈다. 무어라 생각하기도 전에, 그의 입에서 뾰족한 말이 튀어 나갔다.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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