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24)화 (25/121)

제24화. 마법사의 마음 (2)

“아까 했던 이야기 말인데요.”

“행복한 추억 말인가요?”

한숨 자고 났더니 열이 내려 한결 편하다면서, 소티스는 침대 헤드에 상체를 가볍게 기댄 채 앉았다.

“소티스 님께는 그런 게 있나요?”

“음…….”

돌아오는 침묵이 길었다. 소티스는 눈을 내리깐 채 기억을 잠시 헤아리다가, 이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많지 않다고 하면, 제가 너무 초라해질까요?”

“……그게 어디 소티스 님의 잘못이겠습니까. 제가 괜한 질문을 했나요?”

그러고 보니, 소티스가 황후로 내정된 건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라고 했다. 황태자비로 책봉되기 전에는 그에 맞는 교육을 시켰을 테고, 이 혼사를 통해 정치적인 입지를 다질 생각이었던 메리골드 공작은 소티스를 무척 혹독하고 엄격하게 가르쳤을 것이다. 금전적인 문제는 셰릴을 결혼시키는 것으로 해결했으니, 남은 몫은 소티스가 해내야 했던 탓이었다.

경제학이나 정치, 외교학, 법학, 마법 이론은 물론이고 불편한 구두를 신고도 온종일 꼿꼿하게 서는 연습, 드레스를 입고 차를 우아하게 마시는 연습, 승마, 춤, 화술…….

그 모든 것을 익히는 데만 해도 하루가 부족해서, 소티스의 유년기는 그녀가 무언가를 만끽할 새도 없이 지나가 버렸다.

“아니에요.”

그녀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메리골드 공작 가문의 저택이 황성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을 시절…… 그러니까, 지금은 거처를 옮겨서 별장으로도 잘 쓰지 않는 곳이 있어요. 여기서 마차를 세 시간은 타고 가야 나오는 곳인데요……. 뒷마당에 피는 좁쌀처럼 흰 꽃이 예뻤어요. 잠깐 숨을 돌리면서 그 꽃을 들여다보는 게 제 낙이었어요. 황성에 온 뒤로는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잡초에서 핀 꽃이다 보니 아무도 일부러 기르지는 않는 모양이에요.”

레먼은 충동적으로 대답했다.

“……제가 그곳에 다녀와도 될까요? 꽃을 보신다면 기분이 더 좋아지실 수도 있잖아요.”

“이름도 모르는 사소한 꽃을요? 짧은 기쁨을 위한다기에는 너무 수고로운 일이에요.”

“그 짧은 기쁨이, 작은 기억이 때때로 사람이 무너지는 것을 막아 주기도 하지요. 소티스 님을 위해 움직일 수 있다면, 고생이랄 게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행복한 추억이 하나 더 생겼네요.”

소티스가 이불 위에 가지런히 올린 제 손끼리 깍지를 끼며 조용히 말했다.

“제 지난 삶이 불행한 순간으로만 가득했던 것 또한 아니었답니다. 그러나 행복하고 평온한 것을 골라서 꺼내도, 저는 그때의 기쁨을 그대로 다시 느낄 수는 없을 거예요. 그 순간들은 시간이 지나 과거로 밀려났으니, 기쁨보다는 그리움을 더욱 크게 느끼겠지요. 현재가 제게 힘겹다면 더더욱요.”

불행한 순간, 과거의 소중한 행복을 꺼내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을 보며 버틴다는 걸까. 사람의 마음은 강철과 같지 않아서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견뎌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레먼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과거는 그리움이라는 이유로 사람을 붙잡나요?”

“종종 그래요. 행복한 과거는 사람을 돌아보게 하지요, 레먼. 사람들은 자신이 일군 것에 정신이 팔려 앞으로 나아갈 길이 더욱 많이 남았다는 사실을 잊곤 해요.”

“그렇다면 소티스 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잠시 침묵하던 소티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마법사님. 저는 바다가 보고 싶어요.”

“…….”

레먼은 바닷가에 선 소티스를 상상했다.

성글게 짠 밀짚모자가 어깨까지 닿을 듯 내려오고, 느슨하게 땋은 보랏빛 머리카락은 바람이 부는 대로 나부끼겠지. 한 손으로는 모자를 짚고, 한 손으로는 휘날리는 치마를 감아쥐거나 신발을 손에 든 채 맨발로 모래사장을 걷는 모습이 자연히 떠올랐다.

바닷바람에서 짠 냄새가 나요, 하며 웃을까. 아니면 발끝에 부서진 조개껍질이 닿아 따끔한 게 신기하다고 할까.

소티스의 이야기가 레먼을 다음 상상으로 부드럽게 데려갔다.

“숲을 등진 작은 마을의 축제에서, 큰 통에 담긴 맥주를 사람들과 나눠 마시고 싶어요. 볼에 빨갛게 열이 오를 정도로 모닥불에 가까이 앉아 고구마를 구워 먹고 싶어요. 친한 사람들과 서슴없이 떠들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다투고 화해하고 싶어요. 내일 우물에 다녀올 당번을 정하자며 주사위 놀이를 하면서요.”

그즈음의 소티스는 어떤 고민을 하며 살까. 내일은 이불 빨래를 해야 할 텐데 비가 오지는 않을까, 며칠 뒤에는 산에 버섯을 따러 갈까. 그런 고민들일지도 모른다. 아주 사소하고 포근해서, 몇 가지 예시를 드는 것으로도 저도 모르게 웃고 마는 그런 것들.

“사실 저는 황후가 되고 싶었으면서, 황후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저는 에드먼드 폐하를 사랑했기 때문에 이 자리를 원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저를 슬프게만 한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알면서도 쉽게 감정을 내려놓지는 못했지만요. 결국 저는 지금까지도 황후궁에 머무르고 있지만…….”

“…….”

“언젠가 저는 누군가를 오롯이 바라보고, 궁금해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며 살아갈 거예요. 그 사람과 서로 같은 무게의 감정을 주고받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알았어요. 그곳에는 폐하의 자리가 없고, 설령 있다고 해도 폐하께서는 들어오실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언젠가는 이 마음을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생각보다도 더 슬퍼서,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게 편하게 느껴질 정도였지만요.”

하지만 그런데도 소티스는 결국 이겨 냈다. 휘청거리면서도 다시 일어섰고, 결국 자신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느리지만 올곧았다. 레먼은 그게 사람의 영혼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티스 님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소망이군요.”

레먼이 감탄하며 말했다.

“앞을 바라보는 일이, 당신을 끝없이 강하게 하는군요. 그래서…… 깊은 슬픔이 아무리 발목을 잡아도, 끝없이 반짝일 수 있는 거예요.”

“그렇게 거창하게 말할 일인가요. 저는 그저 정략결혼을 했고, 그 자리를 제대로 떨치지 못했어요. 그래서 남이 하지 않겠다는 일을 도맡으며 떠나고 싶다고 말하는 여인인걸요.”

“하지만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시지요.”

“…….”

“저는 소티스 님 같은 사람은 처음 봅니다.”

민들레 홀씨처럼 정처 없이 방황하면서도 기어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감히 어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귀중한 마음이었다.

“……그래도, 갑자기 떠나시지는 마세요.”

더럭 불안해진 그가 말했다.

“그러니까, 황후 폐하이실 때 저를 부르셨잖습니까. 지금은……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개인적인 손님으로 청해서라도 저를 이곳에 머무르게 하셨지만……. 만일 소티스 님께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신 뒤 황성을 떠나신다면, 바깥에서 만날 명분이 제게는 없으니까요.”

소티스는 그런 레먼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참 신기한 일이다. 채 서른은 되지 못한, 올해로 스물여덟 살이 된 저보다도 조금 어린 듯한 이 남자는 이럴 때면 꼭 소년처럼 보였다. 이런 시선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잘 몰랐으나, 이제는 그의 눈동자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의 온기를 바라는 눈이었다. 제 곁을 청하는 시선이었다.

돌아갈 곳이 없거나 마음 붙일 곳이 없는 이가 아니었다. 그는 베아툼 왕국에서도 알아주는 마법사였으며, 마탑의 주인이었다. 베아툼에 관련된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지만, 사회적인 지위가 대단하다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제 모든 것을 뒤로 미뤄서까지 제 곁에 머무르는 이유가 궁금했다. 단지 제 행복만을 위해 이름도 모르는 꽃 몇 송이를 기꺼이 가져다주겠다는 그 친절이 너무도 생경했다.

그래서 소티스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레먼이 저를 위해 꽃을 가져다주겠다고 했을 때의 마음이 지금의 자신과 무척 닮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로.

“마법사님께서는 왜 그리 저를 좋아하세요?”

레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고백, 은 못 들은 걸로 해 주시기로…….”

“그, 그건 그런데…….”

그가 허둥거리자 소티스의 뺨도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죄송해요. 그냥, 궁금해서…….”

“……이유가 있었더라면 그건 논리나 이론이었겠지요. 소티스 님께서는 왜 에드먼드 폐하가 좋으셨습니까?”

“그거야…….”

생각해 보면 그랬다. 소티스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레먼을 오롯이 이해했다.

사랑에 빠지는 데는 이유가 없구나. 제가 별 이유 없이 에드먼드를 좋아했던 것처럼. 그래서 그 사랑이 그토록 닳고 식을 때까지 이곳에서 끝없이 견딜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 더는 그를 사랑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미워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러지 않을 숱한 이유 속에서도 구태여 사랑했던 것에 뾰족한 이유가 없던 것처럼.

소티스가 그렇게 에드먼드를 사랑했던 것처럼, 레먼도 그저 소티스를 그렇게 사랑했을 뿐이었다. 단순히 오래전에 베푼 은혜가 고마워서는 아니었다. 그 감정조차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소티스는 사람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신기했다.

태어나 누구도 자신을 이유 없이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황후궁의 시녀들과 마리아네스는 친절했지만, 우정과 사랑은 같을 수 없었으니까.

쓸모가 없어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구나.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나면 참 좋을 텐데.”

소티스의 작은 속삭임에 레먼이 숨을 삼켰다.

그는 당장이라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애원하고 싶었다. 충동이라도 좋고, 동정이라도 좋고, 그저 호기심이어도 좋으니 자신을 바라봐 달라고. 당신을 평생 아프게만 했던 그 무정한 사람과 나는 다를 거라고. 당신이 지을 몇 초의 미소를 위해 마차로 여섯 시간은 달려 들꽃 몇 송이를 꺾어 올 수 있다고.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겨우 잠잠해지는 그녀의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흔들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평화와 안식이라는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보고 가슴이 이토록 아팠던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창가에 앉았던 그 반투명한 여인을 처음 보는 순간 세상이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그녀가 오래전 자신을 구명한 은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신에게 감사하다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른 이도 아닌 당신이 내 은인이어서 좋다고 고백하고 싶을 정도로.

오랜 기다림을 앞둔 일방적인 감정이라도 좋았다.

소티스 메리골드는 가장 따뜻한 볕에 피어난 작은 봄꽃 같아서,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좋았다.

태어나 그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이런 마음이 있는 줄도 몰랐다. 영혼을 뒤흔들 만한 사랑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던 레먼 페리윙클에게 소티스는 전례 없이 놀라운 존재였다.

물론 당사자인 그녀는 그 사실을 조금도 실감하지 못할 테지만.

“당신의 뜻을 존중할 겁니다.”

“…….”

“조금 더 주무세요, 소티스 님. 시간이 늦었으니 더 머무르는 것은 결례인 듯하고, 저는 내일 다시 올 테니까요. 그래도 될까요?”

“……너무 이르게 오시면 제가 자는 모습을 보고만 계셔야 할지도 몰라요.”

“저는 그것도 좋지만, 숙녀의 모습을 함부로 보는 건 안 될 일이니 정오 즈음에 올게요.”

소티스가 레먼의 붉어진 뺨을 모른 척하며 웃어 주었다.

“좋은 꿈 꿔요, 레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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