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마법사의 마음 (1)
성급한 꽃망울이 긴 겨우내 숨겨 두었던 작은 이파리를 선보이는 계절이 왔다.
소티스 메리골드는 제 앞으로 끝없이 들이닥치는 일을 처리하다가 기어이 몸살을 앓고 말았다. 본래도 그리 건강하지 않았던 몸이 한 달이나 영혼을 잃고 누워 있었고, 어렵사리 깨어난 이후로 휴식보다 업무에 더 몰두했던 결과였다.
“머리맡에 두고 가는 약은 아침저녁으로 드십시오. 의사에게 보여 확인하였으니 다른 약과 함께 드셔도 괜찮습니다.”
“……네.”
“차에 넣고 끓일 약재는 시녀들에게 전달해 두었습니다. 열이 다 내리시거든 한번 들를 테니 그때 다시 상태를 보여 주시지요.”
“알겠어요.”
먹먹한 기분에 제 이마를 꼭 누르던 소티스가 힘없이 대꾸했다. 눈치 빠른 시녀들이 기력술사들을 몰아냈다.
“소티스 님께서 좀 쉬시게 두세요. 저희가 어련히 챙기려고요?”
“그래요.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들이 챙겨 주는 것만 해도 한두 개가 아닌데, 기력술사까지…….”
시녀들이 투덜거리기 시작하자 황후궁으로 뛰어 들어온 마리아네스가 헉헉거리며 말했다.
“소티스 님!”
어찌나 급하게 왔는지 양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맥없이 누워 있던 소티스조차도 마리아네스의 얼굴을 보고 조금 놀라서 몸을 일으킬 정도였다.
“왜 아직도 있어요? 분명히 곧 출발하신다고…….”
“마차 시간을 조금 늦췄어요.”
“그 말은 오늘 아침에도 했는걸요…….”
“더 미뤘어요!”
마리아네스는 얼른 다가와 소티스의 손등을 만져 보고, 이마를 손수건으로 쓸어 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열이 아직도 안 내렸네요. 제가 모셔 온 기력술사들은 대륙 제일의 실력자들이에요. 그러니까 번거로우셔도 약을 꼭 드시고, 상태도 자주 보여 주셔야 해요.”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그렇게까지 할 일이에요! 기력술사들이 그러시기를, 다시 일어나신 뒤로 몸의 흐름이 변했다고 했어요. 마법사님께 여쭤보니 영혼이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워서 그럴 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제가 그 말을 듣고 얼마나 불안했는지 아세요? 이렇게 또 무리해서 아프시고…….”
종알거리던 마리아네스의 얼굴이 살짝 펴졌다.
“그래도 괜찮아요. 곧 마법사님이 오실 테니까요! 제가 자리를 비워도 마법사님께서 소티스 님을 살뜰하게 챙겨 주시겠지요?”
말하는 것마다 놀랄 것들뿐인데, 마지막 말은 정말로 그랬다. 소티스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가 눈앞이 돌아서 이마를 짚었다.
“말……하셨어요?”
“당연하죠. 제가 그랬는걸요. 한 번만 더 무리하시면 마법사님께 다 이를 거라고요.”
물론 그랬다. 정확히는 그 말을 세 번쯤 했다.
매번 피곤해하는 소티스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마리아네스에게 힘없이 웃어 보일 때면, 마리아네스는 “웃지 마세요! 제가 소티스 님의 웃는 모습에 약하다는 걸 아시면서도 일부러 그러시는 거죠!”라고 외치곤 했다.
“다녀오시면 약을 빠짐없이 잘 챙기셨는지, 산책도 하셨는지, 그리고 식사도 잘 하셨는지 제가 다 물어볼 거예요. 벌써 시녀도 매수했으니까 그렇게 아세요.”
시녀가 거들었다.
“맞아요. 그게 바로 저예요, 소티스 님. 제가 마리아네스 님께 소티스 님의 근황을 전해 드리기로 했답니다.”
이후로도 마리아네스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아무래도 억지를 부려서 마차를 잡아 둔 모양인지, 초조한 시선으로 밖을 힐끗거리면서도 마리아네스는 꼭 제 할 말을 다 하고 갔다.
어찌나 열성적으로 말을 쏟아붓던지 귀가 따끔따끔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말에는 전부 저를 향한 올곧은 걱정과 애정이 담겨 있다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소티스는 괜찮으니까 얼른 가 보라며 손사래를 치면서도 결국 웃어 버리고 만다.
너를 위해서였어. 정말로 저를 위해 그리 말해 준 이가 얼마나 있었던가. 그런 사탕발림 속에서 황후궁의 이들과 마리아네스만큼은 진심으로 소티스를 생각해 주곤 했다.
“아무리 웃으셔도, 절대 그냥 안 넘어갈 거예요. 그렇게 웃으시면 제가 또 약해질 줄 아시는데, 음, 그건 맞지만, 그래도 이번엔 소용없어요!”
“네, 마리.”
“시녀들을 달달 볶는 한이 있더라도 꼭……!”
“알겠어요. 정말 괜찮아요.”
“……금방 다녀올게요, 소티스 님.”
“오래 걸려도 괜찮으니까 조심히 다녀오세요.”
시녀들은 마리아네스가 소티스에게 투정 부리는 것을 알면서도 웃는 낯으로 그저 두었다. 마리아네스는 잔소리하며 걱정을 덜고, 소티스는 자신을 염려해 주는 진심에 기뻐한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마리아네스가 왔을 때처럼 황급히 돌아가자, 시녀들은 미지근한 차를 내어 온 뒤 소티스의 머리 위에 차가운 물수건을 올렸다.
“조금만 주무시고 계세요. 저녁은 부드러운 수프로 준비해 올게요. 혹시 땀이 많이 나서 옷을 갈아입으셔야 한다면 옆에 있는 종을 흔들어 주시고요.”
“응.”
밀물처럼 밀려들었던 소리가 썰물처럼 일제히 빠져나갔다.
황후궁의 침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대야에 띄워 둔 얼음만이 간헐적으로 저들끼리 몸을 부대끼는 소리만이 났다. 달그락거리는 그 소리는 속삭임에 가까워서, 가만히 누워 있는 소티스에게만 들리는 것 같았다.
옅게 잠들었던 것 같다. 혹은 잠들어 가고 있었던 걸까.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그저 귓가에 내려앉는 소리를 주워 삼키고 있었다.
그 사이로 가볍고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났다.
“…….”
처음에는 물수건을 다시 올리러 온 시녀인가 싶었다. 그러나 이불을 끌어 올리는 손이 크고 따뜻해서, 소티스는 잠결에 살짝 웃고 말았다.
“레먼.”
아마도 마리아네스가 불렀을 때부터 황후궁 근처에 있었겠지만, 소티스를 쉬게 두고 싶어서 가만히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걱정이 되어서 잠시 들어왔을 테고.
“눈 감고 계세요. 정 불편하시다면 제가 돌아앉아 있을게요.”
레먼의 낮은 목소리에 소티스가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돌아앉아 계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말하다가 잠들어도 이해해 주실 수 있다면, 곁에 있어 주세요.”
“…….”
마법사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영혼에 관련된 일만 해결하시면, 자리를 털고 떠나실 거라 하셨지요.”
“네.”
“공작님께서 황비 책봉식을 받아야 한다고 우기시지 않을까요?”
“그러지 않아도 괜찮을 이유를 남겨 두면, 저번처럼 불같이 화내시지는 않을 거예요. 그동안 제가 아버지 대신 해결한 일이나, 공작가 자산을 관리하는 데 따라왔던 크고 작은 잡음을 처리한 사례도 많으니까요. 그 정도면, 아버지께서 쥐고 계신 비밀들로도 충분히 그 자리를 버텨 내실 수 있을 거예요.”
“…….”
“아버지는 저와 달리 힘겨루기를 잘하시거든요.”
그게 옳은 일인가요, 당신은 괜찮은가요, 같은 질문은 건네지 못했다.
이 말을 하기까지도 무던히 노력했을 것이다. 모든 책임을 끌어안고 씨름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하나씩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소티스에게는 치열하고 힘겨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레먼은 그녀의 선택을, 그녀의 속도를, 그녀의 마음을 존중하기로 했다.
“소티스 님.”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자유로워지신다면, 어디로 떠나고 싶으세요?”
소티스의 마른 입술이 벙긋거리다가 대답했다.
“……베아툼.”
잠에 취한 그 말은 본디 어떤 문장이었으나 몇 개의 단어가 그의 귀에 닿기 전 사라져 버린 모양이었다.
그중에 남은 단 하나의 낱말은 레먼을 동요시키기에 충분했다.
실바람처럼 희미한 그녀의 목소리에 레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목덜미에서부터 홧홧하게 오른 열감은 뺨, 콧잔등, 이마, 그리고 귀 끝까지 빨갛게 물들였다.
남부의 작은 왕국, 베아툼. 레먼의 고국.
멘데즈처럼 오랜 역사를 가지거나 대단히 넓지는 않아도, 그가 느끼기에 베아툼은 크게 부족한 것 없이 무난하고 아늑한 곳이었다. 사시사철 날이 맑고 땅이 비옥했으며, 반도 형태로 땅을 감싸는 청록빛 바다가 아름다웠다.
산산이 부서지는 볕을 머금고 푸르게 요동치는 그 바다를, 맑고 찬란하며 아득한 그 수평선을 소티스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그걸 보는 소티스의 곁에 함께 있고 싶었다.
황후와 황후의 귀빈이 아니라, 폐황후와 그의 손님이 아니라…….
“……그런 곳은 따뜻하겠죠? 그러니까, 남부 말이에요. 요즘은 외국도 생각하고 있어요. 국경을 건너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요…….”
“……아.”
레먼은 겸연쩍은 미소를 짓고 말았다.
베아툼에 가고 싶다는 게 아니라, 베아툼처럼 따뜻한 남부가 좋다는 뜻이었다. 홀로 무슨 상상을 한 건지, 그녀는 어떤 타박도 않았건만 절로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베아툼의 봄은 정말 따뜻해요, 소티스 님. 특히 제가 있는 페리윙클 마탑의 주변에 큰 꽃밭이 펼쳐져 있는데, 봄철이면 그곳으로 근처의 나비가 모여들어 무척 아름답답니다. 이곳에서는 볼 수 없는 꽃도 굉장히 많아요.”
소티스의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자 레먼의 목소리 또한 작아졌다.
“덩굴 위에서 피는 작은 보랏빛 들꽃을 보면, 소티스 님께서 무척 좋아하실지도 몰라요. 색이 무척 곱거든요. 그 꽃 이름이…….”
“…….”
레먼은 말을 끝맺는 대신 살짝 웃어 보였다. 소티스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자고 있던 까닭이었다.
***
소티스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레먼은 잠시 바깥에 다녀왔다. 본궁까지 가서 정원 관리인을 만나 물었더니, 다행히도 그가 아는 꽃이 최근에 들어왔다며 몇 송이 되지 않는 양을 조그만 종이에 감싸서 주었다.
그는 날 듯 가뿐한 걸음으로 황후궁까지 돌아와 그것을 소티스의 머리맡에 내려놓았다.
“마법사님.”
그러자 마치 그의 부름을 들은 것처럼, 소티스가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속이 다 비칠 듯 환하고 맑으면서도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물빛 눈동자. 슬프지만 다정해 보이는 얼굴에 비치는 곧은 미소.
그녀의 얼굴에 온 정신이 다 팔려 버린 레먼에게 소티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이 꽃의 이름이 무엇인가요?”
레먼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페리윙클.”
“…….”
“꽃말은, ‘행복한 추억’이에요.”
사실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내가 당신의, 페리윙클이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