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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22)화 (23/121)

제22화. 황후의 부재 (5)

피니에 로즈우드는 소티스 메리골드를 오래도록 생각했다.

그녀를 쉽게 비웃던 이들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다정함의 소유자, 소티스.

혹자는 그녀더러 미련하다고 했다. 답답하고 꽉 막힌 게 가엾다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하지는 못했다. 그녀의 친절은 함부로 비웃을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 인품이 비현실적으로 대단하다는 것을, 쉽게 입에 올릴 수는 있을지언정 절대로 쉽게 따라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태양…….”

“핀?”

“……아.”

핀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오늘은 오시지 않는 줄로만 알았는데요, 폐하.”

“그대가 보고 싶어서.”

거짓말. 핀은 샐쭉하게 웃었다.

“소티스는 왜 불렀지?”

황제의 질문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깨어나셨다기에 얼굴을 좀 볼까 하고요. 팔다리가 차고 저려서 좀 주물러 달라고 했더니, 그걸 또 해 주시더군요.”

“자존심도 없군. 하긴, 황후는 항상 그랬어.”

핀의 머리맡에 앉아 붉은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던 에드먼드는 그녀의 다리를 느릿하게 주물렀다. 손은 뜨거웠으나 가까이 다가온 몸에서 술 냄새가 풍겨서, 핀은 썩 좋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이참에 그 자리가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 알았겠죠. 적어도 제가 없는 자리에서 비난하거나 터무니없는 짓을 계획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았어요.”

“그럴 위인이었다면 진작 공작처럼 황실의 치부를 들먹거리며 날 귀찮게 굴었겠지.”

“그러니까요.”

핀이 팔다리를 푹신한 이불 속에 숨기며 덧붙였다.

“폐황후는 쓸데없을 정도로 정이 많고 소심해서 제 부탁 하나 거절하지 못해요, 폐하. 그러니 저와 폐하를 위협하지도 않는 이를 쫓아내시겠다고 하면 제가 얼마나 우스워지겠어요?”

“……내가 황후궁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제가 소티스 님을 불렀다는 것을 알고 계셨으니까요. 필시 황후궁의 시녀들이 말했을 테지요. 그리고 폐하께 꽃향기가 나요.”

에드먼드가 침묵하자 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아버지나 동생만큼의 용기도 없어 내내 황후궁에서 일만 하던 여자라면서요. 한 달간 앓아누웠을 정도면 조금만 내버려 두어도 알아서 지쳐 떨어져 나갈 거예요. 구태여 쫓아내시려 할 때마다 사람들이 저를 욕한답니다.”

“세간의 평판 같은 건 썩 신경 쓰지 않는 줄로만 알았더니.”

황비가 그를 살짝 흘기며 제 배를 문질렀다.

“저야 어차피 쫓겨나지만 않으면 상관없다지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는 그렇지 않잖아요. 폐하, 약속대로 제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면 탄신 연회와 황후 책봉식을 함께 진행해 주실 거죠?”

“물론이지.”

에드먼드가 환히 웃었다.

“무엇도 아끼는 일 없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연회를 꾸며 주리다. 내 황비.”

에드먼드는 팔다리가 저리다고 했던 말이 신경 쓰였는지 더 주물러 주려고 했지만, 핀은 피곤해서 쉬고 싶다는 말로 에둘러 거절했다.

손은 따뜻하건만 손길은 투박하여 오히려 몸이 욱신거리기만 했다. 이런 데서는 세심함이라고는 없는 이였다. 그래도 아기가 생겼다는 말에 쩔쩔매는 모습은 보기에 썩 나쁘지 않았다.

에드먼드가 별궁을 떠나자 핀은 두툼한 이불 사이에 파묻히다시피 몸을 웅크렸다.

기나긴 겨울은 물러났건만 왜 이렇게 춥고 허한 건지. 이제는 먹을 것이 없어 굶을 이유도, 걸칠 것이 모자라거나 빼앗길 일도 없었다. 심지어 잘 곳이 없어 차디찬 맨땅에 옹송그린 채로 밤을 보낼 필요가 없는데도.

오롯이 제 선택으로 오게 된 이곳이, 얼음을 깎아 만든 것처럼 차게 느껴져서.

“알고 있니?”

심연에 묻어 두었던 목소리 하나가 정적을 타고 슬금슬금 기어 올라와 핀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혼돈은 불행을 낳고, 불행은 자라서 다시 혼돈이 된단다.”

핀은 오래전 들었던 말을 곱씹으며 뒤척거렸다. 사지가 불편하고 속이 제멋대로 울렁거렸다.

“그럼 그 혼돈은 다시 불행을 낳고, 불행은 혼돈이 될 때까지 자라나고, 다시…….”

그건 각인처럼 핀의 영혼에 파고든 말이었다.

“불행은 인류의 시작부터 함께했지. 아니, 그것은 그저 세상에 만연한 법칙 중 하나야. 짐승이 새끼를 낳고, 자식이 어미를 닮고, 황위가 혈족을 타고 전해지듯 불행은 대물림된다.”

“……싫어.”

핀은 자신의 삶을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녔던 불행을 기억했다. 언제부터인가 그것과 저를 분리하는 일조차도 피로하게 느껴져서, 이젠 저 자체가 불행인 듯했다.

그런 그녀의 존재가 세상에 밝혀지자 혼란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피니에 로즈우드를 멸시하거나, 욕망하거나, 혹은 이용하려 했다.

그러지 않는 이는 한 명뿐이었다.

소티스.

말도 안 될 만큼 차분한 여인. 바다처럼 깊은 그녀의 영혼은 거센 바람에 잠시간 요동치는 듯했으나, 절대로 그 속내를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자신이 화내고 무너지기만을 기다리는 비열한 이들에게, 담담한 침묵과 조그만 동정만을 돌려주는 이.

“불행은 사람을 삼키고 자라며, 사람에게 퇴치당하지.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유혹에 약하고 그들은 어둠을 두려워하니, 제 손으로 불행을 끊어 낼 수 있는 이는 없단다.”

핀이 다시 중얼거렸다.

“당신이 틀렸어요.”

“사람은 태양 같아야 한단다. 생각해 보렴. 누가 태양이 될 수 있겠니?”

핀이 어깨를 웅크리며 속삭였다.

“이 황성에 태양이 살아요, 어머니.”

여명이 떠오르는 동쪽에 태양을 닮은 여인이 있어요. 바다도 감히 말릴 수 있을 만큼 뜨거운 볕을 가진 사람이 있어요. 핀은 그렇게 읊조렸다.

일식이 지나간들 태양이 빛을 잃을 리가 없다. 소티스는 어디서든 따뜻하고 찬란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 하나만은 제게 주세요, 폐하.”

저를 위해서. 아무것도 없었던 저를 위해서.

핀은 그렇게 말하며 잠들었다.

***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는 언제부터인가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함에 시달렸다.

그게 정확히 어느 날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그도 잘 몰랐다. 그저 원인을 알 수 없는, 체증이나 멀미감 같은 것이 가슴께를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을 뿐이었다. 이상하게도 상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나빠졌고, 뾰족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 불가능했다.

분명한 건 소티스를 볼 때나, 심지어는 그녀를 떠올리기만 해도 답답함이 심해졌다는 것이었다.

“……도움 안 되는 여자 같으니.”

에드먼드는 혀를 타며 소티스를 탓해 보았지만, 기분은 조금도 후련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짜증이 더 솟구쳤다. 그는 기어이 씩씩대고 말았다.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소티스. 소티스. 소티스.

이혼을 하면 그 지긋지긋한 이름에서 자유로워질 줄로 알았건만, 반대였다. 생각보다 손쉽게 이혼까지 진행했는데도 그의 마음은 이상한 방향으로 향했다. 그는 온종일 소티스를 떠올렸다.

“제가 왜 그렇게 싫으세요, 폐하?”

사람을 그렇게, 심술이나 부리는 인간으로 취급하고.

“이혼이 정해졌으니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는 폐하를 좋아했거든요.”

막상 자신은 사랑을 고백하다니.

그녀는 그 진흙탕 같은 입장 속에서 기어이 무너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놓고 그더러 그런 데서도 빠져 죽느냐고 힐난하는 것 같았다.

서로를 싫어할 이유 같은 건 차고 넘쳤다. 소티스가 에드먼드를 싫어할 이유는 백 개도 넘었다. 그중 절반은 에드먼드가 직접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그녀를 못 견딜 것처럼 굴었던 에드먼드는 소티스에게 했던 약속 중 어떤 것도 지키지 않았고, 소티스가 나가떨어지기를 기도하며 더욱 모질게 굴어 댔으니까.

그러나 소티스는 거기서 그를 싫어하지 않을, 그를 견뎌 낼, 혹은 그에게 적어도 예의를 표할 수 있는 하나의 이유를 찾아냈다.

눈앞에서 그녀가 말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너와 다르다고.

한때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명색이 황태자비인데, 생일을 그저 넘어갈 수는 없지요.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 보세요, 황태자비. 폐하께는 내가 말해 드리겠습니다.”

당시 소티스가 에드먼드에게 요구할 만한 것은 많았다. 황성에서 그녀의 입지가 우스워지지 않도록 화려한 연회를 준비해 달라고 할 수 있었다. 황실에서 대대로 이어지는, 그녀의 눈동자와 꼭 닮은 물빛 보석으로 만든 왕관을 머리에 씌워 달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하루라도 사이좋은 척을 해 달라고 하거나, 지난 며칠간 그녀에게 했던 폭언을 사과해 달라고 하거나…….

“제 이름을 한 번만 불러 주세요, 폐하.”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던 소티스는, 그것만으로도 정말로 괜찮다는 듯이 말갛게 웃어서.

그래서 에드먼드는 그녀를 붙들고 흔들며 묻고 싶었다.

사람이 그럴 수 있나?

보통은 적의에 이만큼 시달리면 피해 다니기 마련이다. 뜨거운 것에 손을 대면 화들짝 놀라 물러나는 이치와 비슷했다. 호의를 주었는데도 상대가 그 값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그런 수고를 두 번은 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었다. 때로는 상대가 그랬던 것보다도 몇 곱절은 더 상대를 미워해 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소티스는 그런 것 따위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언젠가는 한 번쯤, 저를 꼭 불러 주세요. 진심을 담아서.”

부르지 못했다.

차마 그녀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그녀가 소원을 이루었다는 듯이 환하게 웃어 버릴 것 같아서. 그러면, 마음속에 쌓아 두었던 무언가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 버릴 듯해서.

그 이름을 기어이 부른 것이, 이혼이 협의된 날이었다는 사실을 에드먼드는 몰랐다.

“그대는 정말로 도움이 안 되는 여자야.”

거짓말이었다. 사실 소티스 덕에 멘데즈 황실이 휘청거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나마 똑똑하고 현명한 그녀가 황후가 되어서, 메리골드 공작은 황실의 치부를 가지고 으스대는 일을 조금이나마 잊었다.

그녀가 작정하고 뻗댔더라면, 그 하나쯤은 어떻게든 휘어잡고자 마음먹었다면 에드먼드는 지금쯤 훨씬 더 골머리를 앓고 있었을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지 않은 건 순전히 소티스의 너그러움과 다정함 덕분이라는 것도.

차라리 쫓아내면 나아질까. 패악을 떨어서 쫓아내면, 그때는 발끈해서라도 속에 숨겨 두었던 진심을 꺼낼까.

아니면 언젠가 당신은 반드시 이랬을 거라며 또 그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일까.

“웃지 마.”

울 것 같은 눈으로 웃지 마.

“웃지 마, 소티스.”

꿈에 자꾸 나타나지도 마.

그렇게 연기처럼 사라지지 말고, 차라리 나를 미워해. 유치한 자식이라고 몰래 흉을 보고, 앙갚음하고, 그도 아니라면 기가 막히고 끔찍하다는 시선으로 경멸하기라도 해.

“폐하.”

멘데즈의 피도 물려받지 못한 제게 아무렇지도 않게, 진심을 담아 폐하라고 부를 때마다 그는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마치 그가 가짜라는 것을 모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모르고 싶은 것처럼. 아니, 알아도 변하는 것은 없다는 듯이.

“나는 태어나서 그대 같은 사람은 만난 적이 없어.”

에드먼드가 머리를 감싸 쥔 채 중얼거렸다.

속이 투명하게 비치기에, 조그만 호수인 줄 알고 빠져 보았더니 바다만큼 깊더라.

“……시종장은 들도록.”

“예, 폐하.”

에드먼드는 까닭 모르게 답답한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시종장에게 명령했다.

“폐황후가 친하게 지내는 이에 대해 조사해 봐.”

“……베아툼의 마법사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레먼 페리윙클. 최근 각별히 지낸다지. 빠른 시일 내로 알아보도록.”

“……소티스 폐하께, 큼, 죄송합니다. 소티스 님께 큰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시종장은 조금 놀랍다는 듯 에드먼드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별안간 쓰러져 한 달간 일어나지 못했을 때도 찾아가기는커녕 꽃 한 송이 보내지 않던 이였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그녀를 신경 쓴다고.

에드먼드는 이런 말을 했다는 것조차 자존심이 상하는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더 묻지 말고 얼른 물러가라!”

이유를 말해 줄 마음이 생겼다고 해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시종장은 알겠다며 고개를 숙인 뒤 황망히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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