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황후의 부재 (4)
해 질 무렵의 사막 같은 여인이었다.
피니에 로즈우드에 대한 소티스의 첫 감상이었다. 실오라기조차 걸치지 않은 차림으로도 부끄러울 여력조차 없어, 어떤 표정도 없이 황폐하게 세상을 내려다보던 여인. 어둠에서 태어난 듯, 빛을 쬐지 못해 시들어 버린 듯 광택이 없던 녹색 눈동자를 볼 때면 소티스는 그 황량함이 가엾고 아팠다.
황제가 국무를 내팽개치면서도 싸고도는 정부 출신의 황비가 한낱 하녀를 시켜 일국의 황후였던 사람을 불렀다. 충분히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한데, 폐황후는 어떤 말도 없이 하녀의 뒤를 따라 황비의 앞에 섰다.
아기를 가졌다던 황비는 조금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덤덤한 시선으로, 소티스를 탐색하듯이 올려다볼 뿐이었다.
“괜찮습니다.”
핀이 말했다. 그녀가 몸을 조금 고쳐 앉자 목이며 팔목에 걸려 있던 화려한 금속 장신구들이 서로 부딪치며 잘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제가 괜찮은지 염려하는 시선으로 보시기에.”
소티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를 왜 부르셨나요, 전하.”
“소티스 님의 손이 따뜻했던 게 생각이 나서요.”
소티스의 몸은 기운이 약해진 데다 살이 빠져 따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크게 긴장하지 않는다면 따뜻할지도 모르겠으나, 숱한 사람들을 제치고 황후궁에서 휴식하는 그녀를 부를 만큼은 아니었다.
게다가 에드먼드가 있지 않나. 소티스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핀의 안색을 살폈다. 에드먼드의 몸은 사시사철 뜨거웠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 온기마저도 소티스가 에드먼드를 좋아했던 숱한 이유 중 하나였으므로.
“아기를 가졌더니 몸에 기운이 없고 걷는 것이 힘들어요. 밤이면 팔다리가 저리고요.”
그 말에 그렇군요, 하고 돌아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소티스는 저를 이곳까지 데려왔던 하녀에게 따뜻한 수건과 차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오늘은 폐하께서 별궁에 오시지 않은 모양입니다.”
“연회가 있다고 하시더군요. 오늘은 취하도록 마시고, 내일 즈음 오신댔어요.”
핀이 뾰로통하게 말했다. 에드먼드가 걸음을 하루라도 거르는 것이 싫은 모양이었다. 애틋하구나. 그렇게 생각하던 소티스는 쓸쓸하게 웃으며 따뜻하게 적신 수건을 받았다.
“그쪽에 누워 보세요.”
사실 외면하려면 그럴 수도 있었다. 시답잖은 이유로 불렀느냐며 벌컥 성을 내고 돌아서도, 기껏해야 에드먼드만 좀 펄펄 뛰고 말 것이다.
그러나 소티스는 홀로 앉아 있는 핀을 두고 돌아설 수 없었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랬다. 그 눈동자가 여전히, 어딘가 조금쯤 쓸쓸해 보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런 황량함을 외면할 수 없는 성정을 타고났더란다.
누군가는 미련하다 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답답하다 할 것이다. 그래도 소티스는 매정한 것보다 미련한 것이 좋았고, 야멸찬 것보다 답답한 것이 좋았다. 오래된 냉대에 마음을 다쳤던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핀의 심술이야 한두 번이면 그칠 것이다. 밀려난 소티스가 더는 핀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이런 장난 같은 짓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지. 혹시 모른다. 이런 황당한 요구를 들어주었다는 사실에 에드먼드가 저를 조금쯤 덜 미워할지도.
핀은 조금 의외라는 듯 소티스를 바라보며 침대에 길게 누웠다. 그녀조차도 소티스가 어떤 말도 없이 자신을 돌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의사는 자주 드나드나요? 몸이 따뜻해지는 약을 좀 지어 먹으면 좋겠는데.”
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언뜻 만졌을 때 사람의 손이 맞긴 한 건지 의심할 정도였다. 소티스는 자신이 쥐고 있던 수건을 핀의 손등에 대고 가볍게 눌렀다.
“가끔 와요.”
“초기에는 유산 위험이 크니 조심하셔야 해요. 전하께서도 그리 건강하시지 않을 테니 더욱 신경을 써야지요. 폐하께 잘 말씀드려 보세요.”
“제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어떻게 아시죠?”
소티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젖은 수건을 살짝 들어 보였다.
손등에는 다 지워지지 못한 흉터가 가득했다. 어떤 것은 불에 데여 났고, 어떤 것은 날카로운 것에 찔리거나 베인 듯했다. 또 어떤 것은 거친 것을 오래도 쥐어 쓸린 자국이었고, 손끝과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가득했다.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지나온 삶을 볼 수 있다고 했다. 항상 곱디고운 귀족들의 손만 보았던 소티스는 추상적으로만 느껴졌던 책 속의 어떤 글귀를 오롯이 이해했다.
“이토록 고생했는데 몸이 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요.”
“…….”
“이걸 좀 쥐고 계세요. 식으면 하녀를 부르시고요. 다리가 저리다고 하셨던가요.”
소티스는 정말로 핀의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핀의 얼굴에도 황당하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화를 낼 줄 알았다. 아무리 그녀라도 황후 자리에서 쫓겨나고, 제 몫이 아닌 일을 하고, 하녀를 따라 황비를 만나고, 게다가 그 황비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수발을 들어 달라 청하면 짜증을 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외면하거나 비참해하는 것이 일반적일 텐데.
그런데 어째서 덤덤할 수 있을까.
왜 그녀는 이조차도 인내할 수 있을까.
소티스 메리골드의 마음은 어디까지, 그리고 언제까지 너그러워질까.
“저는 전하의 마음대로 움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핀의 의중을 읽은 듯 소티스가 잔잔하게 말했다. 다리를 쓸고 서랍에서 꺼낸 크림을 발라 주는 손길이 살뜰하기까지 했다.
핀이 멍하니 수건을 들고만 있자 소티스는 그것을 다른 팔에 옮겨서 대어 주었다.
“에드먼드 폐하께서는 오래전부터 공연한 일로 저를 보란 듯이 모욕하고 화를 벌컥벌컥 내시곤 했지요. 다투고 싶어서 그러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싸우셨나요?”
“아뇨. 응하지 않았습니다. 황제의 흠은 그저 시간이 흐르면 잊힐 단점이 될 것이고, 제 실수는 곧 치부가 되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갈 테니까요.”
소티스가 침착하게 덧붙였다.
“저는 폐하를 좋아했지만, 폐하가 바라는 것을 다 이루어 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런 면에서는 부덕한 황후겠네요. 저도 제 살길을 도모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
“저는 그런 폐하를 십 년도 더 보았습니다. 전하께서 이런 일로 저를 부르신다고 하여도.”
소티스가 눈을 접어 살짝 웃어 보였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답니다.”
“…….”
“다만 몇 가지 절차를 뛰어넘고 황비가 되셨던 일로 책잡히기 쉬운 시기이니, 핀 전하께서는 모쪼록 황실의 품위를 위해 조심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뼈가 담긴 충고였으나 어조가 다정하여 그저 친밀한 사이에 건네는 걱정처럼 들릴 정도였다.
핀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폐하를 좋아하셨다고요.”
“그렇지 않고서야 왜 제가 이 자리에서 견뎠겠어요.”
“……과거형이시네요.”
“그만두기로 했거든요.”
황비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의 새 여자를 위해 인내하시는 건가요?”
“한마디 말만으로 정의할 수 있는 관계가 있나요?”
소티스가 현명한 어조로 되물었다.
“두 사람은 쉽게도 잊은 모양이지만, 당신은 제가 구한 사람이랍니다. 로즈우드 후작가의 서녀였다는 사실조차도 제가 사람을 써서 밝혀낸 사실이지요. 그 사실을 당신이 뼛속 깊이 기억하며 평생의 은혜로 여겨 주기를 바라서 한 일은 아닙니다. 그건 그저 제가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내린 선택으로, 당신이 모자람 없이 사는 모습을 보고 만족하는 것으로 그칠 일이지요.”
“…….”
“그런 사람이 아이를 가졌다는데, 그게 저를 홀대한 남자와 가진 아기라고 해서 걱정하지 않을 필요가 있나요?”
“……보통은 그래요.”
핀이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보통은 그래요, 소티스 님. 보통 자길 그토록 차갑게 모욕한 남자를 ‘좋아했다’고 표현하지 않아요. 그저 그런 놈을 사랑했으니 내가 잠시 미쳤었다며 분통을 터뜨리겠지요. 베풀었던 은혜도 모르는 여자가 길바닥에 나앉지 않기 위해 당신의 자리를 빼앗고 그 무정한 남자의 아기를 가졌다고 하면, 보통은 아무 이유가 없어도 화를 벌컥 내요. 아기? 그 핏덩이가 태어난다고 한들 반가울 수가 있겠어요? 덜컥 유산되기만을 바라겠지요.”
“전하.”
소티스는 며칠간 차분하게 정리했던 말을 꺼냈다.
“저는 그 수렁에 걸어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
“저는 제게 좋은 것만 기억할 것입니다. 제가 당신을 구했고, 당신은 더는 굶지 않죠. 저는 명예도 온기도 없던 자리에서 벗어났고요.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제 책임이라는 미명하에 맡은 일을 하고 있지만, 이는 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한 시간일 뿐입니다. 저는 모든 것이 미련할 만큼 느려, 아직도 에드먼드 폐하를 마음 깊이 미워하지는 못하지만…….”
“소티스 님.”
“사랑이 과거로 밀려난 것을 보니, 저도 머지않아 자유로워질 수 있겠지요. 이 순간만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어요. 저 혼자서는 그곳에서 나올 수가 없었는데, 전하께서 등을 떠밀어 주신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
“그러니 황제의 약점을 잡은 황후라는 사실도, 은혜를 원수로 돌려받은 미련한 여자라는 것도 두 분께만 의미 있는 이야기겠지요.”
소티스가 핀의 손에서 수건을 가져와 머리맡의 작은 탁자에 내려놓았다.
“다만 평생 신경 써 돌보았던 제 고국이 몰락하거나 우스갯소리가 되는 것은 마음이 아프니, 저는 두 분께서 자리를 잡으시는 동안만 뒷일을 도울 것입니다. 그리고 떠날 거고요. 그게 아기님이 태어난 이후가 될지, 그 전이 될지는 저도 모를 일입니다. 사람은 미래를 완벽히 가늠할 수 없으니까요, 전하.”
“그렇군요.”
“임신을 축하드립니다, 황비 전하. 저는 이제 황후 자리에 미련이 없어졌으니, 차라리 전하께서 황후가 되시는 것도 좋겠어요. 그러면 적어도…….”
핀을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린 그녀가 진심으로 웃어 보였다.
“같은 여인으로서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아팠던, 그런 일은 두 번 겪지 않으셔도 될 테니까요.”
“저를 동정하시나요?”
핀의 날카로운 물음에 소티스가 너그럽게 대답했다.
“네, 전하.”
“…….”
“부디 불쾌해하지는 마세요. 그래도 그 덕에 목숨을 구하셨잖아요.”
“알아요.”
핀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그 정도로 염치가 없진 않아요.”
“…….”
“돌아가실 때는 중앙 정원을 가로지르지 마시고, 북쪽 호수를 따라 돌아가세요.”
좁고 어두운 길이라 밤에는 사람이 잘 가지 않는 길목이었다. 왜 굳이 그런 길로 가라는 것인지 소티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핀의 단호한 표정에서, 황폐한 눈동자 사이로 일렁이는 어떤 의지 때문에 소티스는 싫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저 이끌리듯이 “네.”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돌아가는 길에도 무심코 정원을 가로지르려던 소티스는 핀의 말을 떠올리고 호수를 따라 빙 돌아갔다. 그림자도 잘 보이지 않는 길이 어두웠다. 공연히 무서워 발을 동동거린 탓에, 황후궁으로 돌아왔을 때는 숨을 가볍게 몰아쉬고 있을 정도였다.
“세상에, 소티스 님!”
안절부절못하던 시녀들은 소티스를 보자마자 허겁지겁 다가와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마치 그녀가 큰 봉변이라도 이겨 내고 온 사람인 것처럼 구는 태도가 이상했다.
“……왜 그러지요?”
“오, 오다가 에드먼드 폐하를 만나지 못하셨어요?”
“연회에서 술을 드신다던데……. 이곳에 오기라도 했나요?”
“말도 마세요. 웬 술을 그렇게도 드셨는지 거나하게 취하셔서는, 메리골드 공작가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면서 어찌나 노성을 터뜨리시던지…… 소티스 님께서 이곳에 계시지 않다 그러니 눈을 시퍼렇게 뜨시고는 돌아가시는데, 오시는 길에 마주치시기라도 할까 심장이 다 쪼그라들었습니다!”
“그래요? 저는 북쪽으로 돌아와서 폐하를 보지 못했는데…….”
“어쩌다 그런 으스스한 길로 돌아오셨대요?”
시녀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자 소티스야말로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핀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소티스와 황제가 마주치지 않도록 돌아가라고 했던 것일까?
평생을 들여서도 이해하지 못했던 게 에드먼드의 속마음이건만, 피니에 로즈우드는 그보다 더 곱절은 어려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