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황후의 부재 (3)
시간은 느린 듯하면서도 빠르게 흘러갔다.
소티스 메리골드를 염려하는 모든 이들이 입을 모아 제발 무리하지 말라고 했지만, 속 편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소티스 니이이이임.”
투정 부릴 때면 꼭 말끝을 늘이는 마리아네스의 목소리에 서류 더미에 거의 고개를 파묻고 있다시피 했던 소티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만요. 한 곡만 더 쳐 주실래요, 마리아네스?”
“그렇게 말씀하신 게 약 일곱 번째랍니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고요! 저와 산책 가시기로 했잖아요! 그리고…….”
마리아네스가 볼을 부풀리며 따져 들었다.
“분명히! 베아툼의 마법사님께서! 소티스 님이 절대, 절대, 절대로! 무리하시는 일이 없도록! 돌봐 달라고! 그렇게나 부탁을 하셨는데!”
“그게…….”
“소티스 님께서는! 걱정하는 저희 마음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누, 누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했나요? 저는 그저…….”
“심지어 지금 처리하시는 일은, 피니에 로즈우드의 황비궁을 꾸미는 일과 아기님을 위한…….”
소티스가 벌떡 일어나며 마리아네스의 불만 어린 목소리를 싹둑 잘랐다.
“산책 가요!”
소티스는 눈으로라도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며 보고서를 조금 챙겼지만, 마리아네스는 그녀를 야무지게 노려보며 손에 들린 것을 모두 빼앗아다가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그녀에게 팔짱을 꼈다.
“공작님은 그 이후로 더 야단을 치진 않으셨죠?”
“……한 번 더 오시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잠잠하셨어요. 우선 건강을 회복하는 일에 집중하고, 황후 업무를 최대한 많이 처리하면서 황비 책봉식을 기다리라고 하셨어요.”
건강을 회복하길 바라는 것도 소티스를 염려하여 꺼낸 말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공작은 소티스가 에드먼드의 아이를 한 명이라도 낳기를 바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에드먼드는 아무리 소티스가 미워도 황비 자리에 앉힐 것이고, 태어난 아기는 메리골드 공작가와 멘데즈 황실이 끊어지지 않도록 이어 주는 다리 역할을 해낼 테니까.
게다가 상상도 못 했던 베아툼 왕실과 연줄이 생기지 않았나. 그게 아니더라도 마법사와 인연이 맺어질 수도 있었다.
메리골드 공작은 이 어정쩡한 상황이 죽기보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은 버텨 내는 수밖에 없었다.
소티스도 시한폭탄 같은 공작에게 맞서고 싶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그의 비위를 맞추려 노력했다. 그가 가져오는 서류는 침실에 끌고 들어가는 일이 있더라도 전부 다 해냈다. 아무리 입맛에 쓴 약이더라도 가져다주는 것은 되도록 삼켰고, 끼니를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챙기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행동은 멘데즈 황실이 그 이상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막는 마지막 장벽이 되어 주었다. 황비와의 결혼 이후 국무를 완전히 등한시하는 에드먼드와,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끝없이 나태해지는 피니에는 멘데즈 황국이 어떻게 돌아가든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굴었던 탓이었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마리아네스.”
“…….”
마리아네스는 정말로 삐친 듯 소티스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가 몸을 살짝 숙여 마리아네스의 쪽을 바라보았지만, 고동색 머리카락의 여인은 고개를 홱 돌려 소티스의 눈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마리아네스.”
“…….”
“마리아네스?”
“…….”
“마리.”
마리아네스가 속상해 죽겠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랑 마법사님이 소티스 님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모르시죠?”
“알아요.”
“알면 이러실 수가 없어요. 소티스 님은 정말, 이럴 때마다 야속해요.”
“…….”
“알아요. 이렇게라도 해야 소티스 님의 입장이 더 난처해지지 않는다는 것을요. 레먼 님이 둘러대셔서 공작님이 참고 있다는 거라는 것도, 이 정도로 바쁘지 않으면 친황비파 귀족들이 소티스 님을 몰아내기 위해 온갖 작당을 할 거라는 사실도…… 그리고…….”
마리아네스는 우울하게 덧붙였다.
“변경을 지키는 일에 지친 제 아버지가 이참에 외척이 되어 보겠다며 소티스 님을 적대할 기회를 노릴 거라는 현실도요.”
“…….”
“아버지들은 원래 이렇게 다 딸의 마음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것처럼 구나요?”
“글쎄요…….”
“왜 미안함은 전부 제 몫인지 모르겠어요. 저는 소티스 님이 너무 좋은데, 소티스 님이 저를 미워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돌을 삼키는 기분이에요. 저는 로즈우드 후작가의 딸이라는 사실이 한평생 행복했는데, 요즘은 이 이름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요.”
마리아네스가 울먹거리자 소티스는 당황하며 긴 소매로 친구의 눈가를 문질러 주었다.
“저는 괜찮아요.”
“소티스 님이 괜찮다고 말씀해 주신 게 이걸로 천 번은 되어요. 소티스 님께 정말로 안 괜찮은 문제는 뭔가요? 몹쓸 에드먼드 폐하께서 소티스 님을 함부로 대할 때도…….”
“정말로 괜찮으니까 그렇지요. 그리고 절대 그 말은 본궁에서 하시면 안 돼요. 알겠죠?”
“…….”
고양이처럼 뾰족하게 올라간 눈매가 샐쭉하니 접혔다. 마음에 들지 않아 죽겠지만, 소티스의 얼굴을 봐서라도 참아 주겠다는 태도였다.
소티스는 다정하게 웃으며 마리아네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부당한 자리를 차지했다며 비난하는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던가요? 마음에도 없는 황후를 두어야 한다며 냉대하실 일이 사라져서, 그건 조금 편하긴 하더군요.”
“하아…….”
마리아네스가 또 무어라 따질 것만 같아서 소티스가 얼른 덧붙였다.
“……저, 저는 일을 좋아하니까요. 보람차기도 하고…… 쉬는 건 한 달 동안…….”
“소티!”
“미안해, 마리…….”
애써 웃는 얼굴에 차마 더 잔소리도 퍼붓지 못한 채 마리아네스는 한숨만 연이어 푹푹 내쉬어 댔다.
어렸을 때부터 남에게 모진 소리도 못 하고 짐이란 짐은 다 떠맡더니, 마음에도 없는 결혼 생활을 견디는 것으로도 모자라 영혼까지 분리되었다는 소식에 마음이 다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자리를 밀어내고 아기까지 생겼다며 떡하니 한몫을 차지한 여자는 제 아버지의 서녀였다.
피니에 로즈우드의 존재를 내내 부정하기만 하던 아버지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마차 바퀴가 닳도록 수도를 드나들며 회의에 얼굴을 비치고, 어머니는 로즈우드의 이름이 수치스럽다면서 밤낮으로 가슴을 퍽퍽 쳤다.
설상가상으로 새 황비 핀은 나태한 데다 돈을 쓰는 일에만 관심이 많고, 황제는 핀을 만난 이후로 국무를 집어 던지기까지 했다. 그 짐을 또다시 소티스가 모조리 떠안고 끙끙거리고 있는 셈이었다.
바보 같은 소티스.
미련한 소티스.
그래도 그 다정함이 숱한 사람들을 구해 냈다는 사실을 알아서, 마리아네스는 차마 그러지 말라고도 하지 못했다.
“저, 어머니의 생신이 가까워지고 있어서 다음 주에는 로즈우드 영지로 잠시 내려갔다 와야 해요.”
“그렇군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요즘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으니 외진 길로는 들지 말고, 하녀들도 충분히 대동하셔야 해요. 로즈우드 후작 부인께 제 선물도 함께 전해 주신다면 좋겠어요.”
제 상황만으로도 머리가 터지도록 복잡한 심경일 텐데, 당연한 것처럼 마리아네스의 안위를 염려한다.
녹색 눈을 깜박이던 마리아네스가 살짝 웃었다.
“그럴게요. 그러니까, 저는 다음 주부터 소티스 님을 한동안 못 만나요. 자주 만나 주실 거죠?”
그 말은, 일은 적당히 하고 놀아 달라는 뜻이었다.
소티스가 “당연히 그럴게요.” 하며 웃어 주려던 때였다.
“저, 소티스 님.”
황후궁에 들어선 낯선 하녀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그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검은색 긴 치마 위에 희고 깨끗한 앞치마를 받쳐 입은 것이, 잔일을 도와주는 하녀인 듯했다.
“송구하오나, 피니에 전하께서 소티스 님께 별궁으로 와 달라 청하셨습니다.”
마리아네스의 눈꼬리가 다시 뾰족해졌다.
“지금 뭐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꼭 모시고 오라셔서…….”
황비가 되었으니 전담 시녀가 생겼을 텐데, 보낸 것은 이불을 빨고 세숫물을 받아 오는 일이나 할 법한 하녀였다.
아무리 소티스가 폐위되고 황후궁에 머무르고 있다지만, 이건 명백히 그녀를 무시하는 처사였다. 그 사실을 아는 하녀도 제 목이 언제 떨어질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며 고개를 연신 숙였다.
핀은 황성에 들어온 이후로 한 번도 소티스를 부르거나 만나고 싶다고 하지 않았다. 몇 번인가 황후궁을 기웃거린 적은 있었지만, 그 의중을 알 수 없는 데다가 크게 고집을 부리지도 않고 돌아갔기에 그저 동태를 살피러 온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래요.”
소티스가 내내 마리아네스와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을 풀어내자 마리아네스가 기가 막히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정말 가시려고요? 아니죠?”
“거절할 이유가 없답니다, 마리아네스.”
애석하게도 소티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황후가 아니었고, 피니에 로즈우드는 황비였다. 예법을 지켰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당한 이유조차 없이 불응하는 것도 모양새가 나빴다.
아마도 핀은 이런 식으로 소티스의 격을 깎아내리고 싶었겠지. 그저 하녀를 부려서 쉽게 불러낼 수 있는, 하잘것없는 폐황후로 치부하기 위해서. 하녀의 뒤를 따라 서쪽 별궁으로 가는 소티스의 모습을 숱한 이들이 보고 수군댈 테니까.
“내일 아침에 듣고 싶은 피아노곡이 있어요.”
“……제가, 소티스 님을 위해서…….”
심술을 부리려던 마리아네스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일 해가 뜨자마자 황후궁에 올 거예요, 소티스 님.”
“고마워요.”
“속으로 서른까지 셀 테니까 얼른 다녀오세요. 서른을 거꾸로 다 셌는데도 소티스 님이 제 옆에 계시면, 확 데리고 도망쳐 버릴 거예요.”
소티스는 살짝 웃으며 하녀에게 눈짓했다.
실로 오랜만에 황후궁을 나섰다. 익숙하면서도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 어느덧 저물어 가는 태양이 그녀의 머리 위를 따라 서쪽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건물 사이로 오늘의 마지막 볕이 붉게 부서지면, 느리게 움직이는 그녀의 걸음 밑으로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기울어졌다.
이내 소티스 메리골드는 꽃 한 포기 피지 않은 작은 별궁에 들어섰다. 생기라고는 없이, 물감을 두껍게 덧대 발라 그린 그림처럼 버석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핀 전하. 소티스 님께서 오셨습니다.”
닫힌 문 너머에서, 그 별궁의 정경만큼이나 건조한 목소리가 울렸다.
“들어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