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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19)화 (20/121)

제19화. 황후의 부재 (2)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낮고 다정했던 음성에는 평소의 따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차갑고 단단한 노성에 소티스는 물론 메리골드 공작까지 움찔하며 물러났다.

깜짝 놀랄 만한 악력으로 손목이 붙잡혀 버린 공작은 소티스를 밀치듯이 놓았다. 힘이 빠진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가자 단단한 팔이 움직여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마, 마법사님, 황후궁에는 어쩐 일로…….”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물었습니다!”

레먼의 호박색 눈동자가 분노로 타올랐다. 평소의 차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단호하고 서늘하여, 꼭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황국 내에서 내로라하는 의사를 부르다 못해, 멘데즈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저를 황후궁으로 데려오시지 않았습니까. 꼭 그만큼 폐하를 아끼시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 애틋함에 마음이 움직여 황후 폐하를 살피고 깨어나신 뒤로도 영혼을 기꺼이 돌봤건만, 이 무슨 난폭한 언행이란 말입니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소티스가 더듬거렸다.

“레, 레먼, 저는…….”

“소티스 님께서는 무엇도 잘못하지 않으셨으니 그저 계시지요.”

“…….”

“소티스 님의 영혼은 현재 무척 불안정한 상태로, 영혼과 몸이 완전히 융합되지 않았습니다. 베아툼 왕실에서는 이 문제를 단순한 사건이 아닌, 영혼 마법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사건으로 보며 제게 심도 깊이 연구해 보라 명령하셨습니다. 일이 어찌 진행되느냐에 따라 소티스 님을 왕국의 귀빈으로 초청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마탑주인 제가 소티스 님을 직접 초청할지도 모를 일이지요.”

소티스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황망히 굴던 것도 잊고 눈을 깜빡였다.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남부의 왕국, 베아툼. 그곳에 줄을 대는 것은 뭇 귀족들의 동경이었다. 훌륭한 마법사들을 뒷배로 둘 수만 있다면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왕족도 아닌 레먼 페리윙클을 이 황실 내에서도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 메리골드 공작도 입을 벌린 채 레먼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엄청난 기회가 눈앞에서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공작께서 영애를 이렇게도 함부로 대하시는 것을 제가 베아툼 국왕 전하께 보고하기라도 한다면…….”

“아, 아니, 아닙, 아닙니다!”

메리골드 공작이 허겁지겁 소리쳤다.

“제, 제가 너무 놀라서 잠시 실언을 했습니다. 그렇고말고요. 소티스, 미안하다. 아비가 너무 놀라 경황이 없었던 것을 용서하겠니……. 나는, 그저 네가 너무 걱정되어서…….”

소티스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가 내던지듯이 건넸던 숱한 언어가 발치에 산처럼 쌓인 듯했다.

이내 그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괜…… 찮아요.”

레먼은 그녀가 비틀거리지 않도록 어깨를 힘주어 감싸더니, 철통처럼 단단한 음성으로 말했다.

“소티스 님의 영혼이 불안해 보이니, 공작께서는 잠시 마음을 가다듬으시고 추후 다시 오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황후궁의 주인도 아닌 이가 내리는 명백한 축객령이었건만, 메리골드 공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주억거리다가 멀어졌다.

상대는 페리윙클 마탑의 주인이다. 베아툼에서 가장 명망 높은 마탑으로, ‘영혼 인도자’라 불리는 대마법사의 하나뿐인 수제자. 베아툼의 왕조차도 레먼 페리윙클의 앞에서는 말을 아끼고, 보석을 가득 실은 마차로도 그의 지식을 전부 구할 수는 없다.

게다가 그 영안. 사람의 영혼을 직접 살필 수 있는 영안의 존귀함을 설명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였다.

공작이 황후궁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소티스는 그 자리에 뿌리라도 내린 양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사실 그대로 쓰러지지 않는 것만 해도 사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몸도, 마음도 모두 소티스의 통제를 벗어난 것 같다. 온몸의 수분을 쥐어짤 것처럼 눈물이 흘렀고, 한 번 한 번의 호흡이 버거웠다. 하얗게 표백된 머리에서는 어떤 생각도 온전히 떠오르지 않았고, 입을 열면 작게 몰아쉬는 숨소리 외 어떤 것도 나오지 못했다.

“소티스 님.”

그녀의 옆에 붙어 있던 레먼의 팔이 느슨해졌다. 그는 소티스의 앞으로 재빨리 돌아오더니, 허리를 굽혀 그녀의 물빛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소티스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허리를 앞으로 숙이자 레먼은 재빨리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받쳐 올렸다.

“많이 놀라셨죠. 사전에 말씀조차 드리지 않고 이렇게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함부로 손을 댄 것도 정말 죄송해요. 지금도, 소티스 님께서 원하지 않으신다면 당장 떼어 내겠지만, 너무 불안해 보이셔서…….”

“…….”

그동안 보았던 그 남자가 맞구나. 아까의 대화는 마치 착각이었다는 듯 그의 말과 행동은 다정하고 조심스럽기만 했다.

“소티스 님.”

“…….”

“괜찮아요. 천천히 숨부터 쉬어 보세요. 네?”

“……헉.”

어렵게 담은 시야에 그의 얼굴이 자꾸만 제멋대로 번졌다. 소티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마른 몸은 몇 번이고 무너질 뻔했지만, 그때마다 레먼이 그녀의 어깨를 힘주어 받쳐 주었다.

속절없이 떨리던 몸과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기다리기만 했다. 한 시간이 지나든, 열 시간이 지나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이내 그녀가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셨어요? 마법사님.”

“공작님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서 뒤따라왔습니다.”

“제 아버지를, 지켜보셨다고요.”

“일전에 말씀하셨잖습니까. 공작님께서는 소티스 님께서 사라지시고 나면, 정치적으로 유명무실해질지도 모를 것을 가장 두려워하신다고요. 그러지 않기를 바라고는 있었지만…… 이혼 선언을 하셨을 때 표정이 변한 것을 보고…….”

“……아.”

그걸 기억하고 있었구나. 소티스는 피 맺힌 입술을 말아서 숨기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나저나, 그…… 베아툼의 연구라는 것은.”

메리골드 공작을 주춤하게 한, 베아툼 왕실에 대한 언급은 평소의 레먼이라면 결코 입에 올릴 것 같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는 자신을 소개해야 할 때가 아니고서는 자신이 일군 것을 자랑하지 않는 이였고, 특히나 베아툼 왕실이 얽힌 일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발언할 사람이었다.

레먼이 멋쩍게 대답했다.

“거짓말이었습니다.”

어찌나 놀랐는지 눈물이 뚝 그쳤다. 소티스가 놀라서 말했다.

“거짓말이라니요?”

“……소티스 님께 손찌검한 것을 보고 화가 나서 되는 대로 둘러댔습니다. 고서적을 뒤적거리는 것만 해도 하루 스물네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는데, 제가 어느 세월에 베아툼에 보고를 올렸겠어요.”

“…….”

“그, 그렇다고 아주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닙니다. 생자의 영혼이 분리되었다가 다시 돌아간 사실을 알면 학계는 발칵 뒤집힐 것입니다. 제가 그에 관련된 연구를 하겠다고 하면 베아툼에서는 만사를 제치고 저를 지원해 주겠지요. 소티스 님을 베아툼의 귀빈으로 청하는 것도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레먼은 소티스가 제대로 선 것을 확인하고 손을 천천히 거두어들였다.

“그건 저를 위한 일이지, 소티스 님을 위한 일이 아니잖습니까. 당신의 비극을 한낱 연구거리로 삼고 싶지 않아요.”

“그건…….”

“저는 소티스 님의 편이라고 했잖아요.”

레먼은 멋쩍게 웃으며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소티스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 손수건이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까지 느껴져서, 그걸로 뺨을 문질러 닦으면서도 그녀는 내내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위기나, 슬픔이나, 문제에 굴하지 않고. 모든 순간에, 그 어떤 이유 없이도…… 저만큼은, 당신을 울게 하지 않을게요.”

그 말이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남자. 우직하게 느껴질 정도의 다정한 마음.

“봄이라고 해도 아직 바람이 차요, 소티스 님. 안으로 들어가시는 게 좋겠어요.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부축이라도…….”

“풋, 아하하.”

레먼의 손수건을 반으로 접어 눈가를 말끔하게 닦던 소티스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핬다.

누가 믿을까? 이 남자가 방금 메리골드 공작을 상대로 불같이 화를 내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언제 그랬냐는 듯 안절부절못하며 소티스의 눈치만을 살피는 이 사람이, 베아툼의 손꼽히는 인재이자 미래를 촉망받는 대마법사 유망주라는 사실을.

“소티스 님……?”

“저는 괜찮아요.”

또렷해진 시야에 레먼 페리윙클의 얼굴이 처음으로 온전히 담겼다. 축 처진 눈썹은 슬퍼 보였고, 잘게 흔들리는 호박색 눈동자는 초조하고 불안한 것처럼 느껴졌다.

“방금까지는 정말로, 확 사라져 버리고 싶었지만…….”

소티스가 또박또박 말했다.

“괜찮아졌어요, 당신 덕분에.”

당신이 나를 삶으로 이끌었던 그때처럼.

“그렇군요.”

비가 개인 것처럼 환해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레먼이 조금 안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로 잘되었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기까지 했다.

“다음에 또, 공작님이 그런 식으로 소티스 님을 위협하시거든…….”

“위협하시거든?”

차마 매일 이곳을 지키게 해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물거리던 레먼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게 이르세요.”

그러자 소티스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 울었냐는 듯 맑은 웃음소리였다. 이렇게 웃는 건 처음 본 것 같았다. 흠 없이 동그랗고 맑게 반짝이는 구슬을 와르르 쏟아 내는 것처럼 부드러운 소리였다.

뺨을 맞아 한쪽이 부어올랐는데도 소티스의 얼굴은 여전히 환하고 예뻤다. 곱고 여리지 않은 곳이 없어 감히 손을 대는 것조차도 미안할 정도였다.

초여름 저물녘처럼 푸른 눈동자가 레먼을 담을 때면, 그의 심장은 통제를 벗어난 것처럼 제멋대로 뛰었다. 멘데즈에 초청된 것이 말도 안 되는 행운처럼 느껴질 정도였고, 영안을 얻어 마법사가 된 것조차 그녀를 만나기 위해 안배된 기막힌 운명이라고 믿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녀의 호흡 한 자락, 낱말 하나가 주옥처럼 소중하건만.

“같이 들어가요.”

솜사탕처럼 달다 못해 물에 넣으면 그대로 형체도 없이 녹아 버릴 것 같은 제안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몇 마디 인사로만 끝내는 것이 겸연쩍어 그래요. 지난번에 주셨던 차가 남았으니 함께 마셔요. 시녀들에게 다과를 조금 내어 오라 이를게요. 저는 마법사님을 대접하며 시간을 보내서 좋고, 당신은 저를 걱정하는 마음을 덜 수 있어서 좋지 않겠어요?”

“제가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 물어보신 거지요?”

“글쎄요.”

소티스가 레먼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하얀 치맛자락이 파도처럼 출렁이고,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흩날렸다.

“들어오시겠어요?”

레먼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요청에 응답했다.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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