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황후의 부재 (1)
이튿날, 약속대로 소티스는 본궁으로 가 에드먼드와의 이혼이 합의되었음을 알렸다.
황실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인재라 믿어 의심치 않던 소티스의 충격적인 행보에 메리골드 공작은 가엾어 보일 정도로 부들부들 떨어 댔다. 귀족들은 목소리를 낮추는 것조차도 잊고 저들끼리 바쁘게 의견을 교환했다.
그 사이에서 에드먼드와 핀, 소티스, 그리고 레먼과 마리아네스만이 침착했다.
“어떻게 제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폐하!”
분개한 메리골드 공작은 황후궁으로 그녀를 반쯤 끌고 가다시피 했다. 처음 보는 공작의 모습에 얼떨떨한 얼굴로 따라가던 소티스는, 이내 뺨에 와 닿는 통증에 눈을 크게 떴다.
“가문을 우습게 여겨도 정도가 있지요!”
공작이 뺨을 때렸다. 짝, 날카롭게 울리는 소리마저도 주워 들을 새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황제가 저런 짓을 하는 것도 기가 차다 못해 쓰러질 꼴이건만, 어떻게 소티스 폐하마저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아버지.”
“이러라고 온갖 의사와 마법사를 불러다가 폐하를 깨우려 애쓴 줄로만 아십니까?”
메리골드 공작의 기세에 떠밀린 소티스는 불이 붙은 듯 화끈거리는 뺨을 조심스레 매만져 보았다. 차게 식어 창백해진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꼭 심장을 호되게 얻어맞은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제멋대로 달음박질치는 심장이 아플 만큼 요동치고 있었다.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맞은 적은 없었는데. 그야, 한평생 공작의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착하고 모범적인 딸이었으니까.
“……저를 되살리고 싶으신 게 아니었군요.”
한 달간, 창가에 앉아서 발이 닳도록 황후궁을 들락거리는 공작의 얼굴을 보았다. 간절하다 못해 애절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모습에 살짝 기대하기도 했었다.
기대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그 얄미운 마음이 도저히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사실, 알고 있었다. 정말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면, 공작의 얼굴을 그렇게 유심히 바라보지 않았을 것이다. 제 마른 손을 부여잡은 아버지가 혹여 미안하다고 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해하며 기다리지도 않았겠지.
그랬더라면, 지금 이렇게 아프지는 않았을 텐데.
“공작님께서는, 공작님의 위세가 침몰하는 것이 두려우셨을 뿐이죠.”
“메리골드의 이름을 빌려 사는 것이 어찌 저뿐이겠습니까! 폐하. 이게 저 홀로 잘 살자고 하는 짓입니까? 대답해 보세요.”
소티스는 헐떡이듯이 대답했다.
“이혼하고 나서…… 제 몸이 나아지거든 황비 책봉식을 준비하겠다고, 아까 사람들 앞에서 말씀드렸잖아요. 폐하께서도 메리골드 공작가를 모자람 없이 대우하겠다고…….”
“일곱 살 난 어린애도 그 새빨간 거짓말에는 안 속겠습니다, 폐하! 황제가 제 약속을 안 지킨 것이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요! 그 뻔한 헛소리에 또! 또 속으시려고요!”
공작의 일갈에 그녀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긴, 에드먼드는 그간 소티스에게 했던 어떤 약속도 지킨 적이 없었다. 지금도 마음이 변하면 국무 같은 건 알아서 해 보겠다며 당장 황후궁을 비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는 건, 그녀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의 체면을 위해서였을 뿐이다. 이미 이혼을 강행한 마당에 원성을 더 사는 일 없이 최대한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어떻게든 좀 해 보십시오, 폐하.”
“저는 이제 황후가 아닙니다. 이름을 불러 주세요.”
“그래, 소티스.”
공작은 소티스의 어깨를 우악스레 붙들었다.
“황후가 아니면 황비라도, 아니, 정부라도 되렴. 황제의 정원에 발가벗고 들어서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환심을 사 보란 말이다. 응? 황후가 되고 싶다고 분명히 그랬잖니. 네가 아니면 셰릴을 시킬 수도 있었어. 그런데도 네가 했다는 건…….”
“…….”
숨이 턱 막혔다. 공작의 입에서 쏟아지는 모멸적인 말이 바늘처럼 날아들어 그녀를 마구잡이로 찔러 대고 있었다.
“너는 착한 딸이잖니. 그러니까 가문을 위해서…….”
“……제가, 메리골드 공작 가문의 사람이라서…….”
소티스가 울먹거리듯이 말했다.
“그래서 폐하는 저를, 싫어하셨어요. 아시잖아요. 황실의 치부를 볼모로 잡아 황후 자리를 꿰찼다고…… 생각해요. 에드먼드 폐하는 저를 한 번도 따뜻하게 바라본 적이 없어요, 아버지…….”
“…….”
“저는, 이제…… 폐하의 냉대가 지겨워요. 사람들의 힐난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애를 쓰는 것도 싫어요.”
“그래서 마음을 살 자신이 없어 황비조차 되기 싫다, 이 말이냐!”
메리골드 공작이 분통을 터뜨렸다.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소티스가 비명을 지르듯이 대꾸했다.
“사람의 마음은 약점처럼 마음대로 휘어잡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아버지!”
“그래?”
그녀의 어깨를 쥔 공작의 손아귀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손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지고 핏줄이 시퍼렇게 도드라졌다.
소티스는 아릴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눈을 내리깔았다. 너무 두려워서 숨을 쉬는 것조차도 힘겨울 정도였다.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그럼 평소처럼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기라도 해! 황실의 치부를 알려 줄 테니 그걸로 황제를 잡고 있으란 말이다!”
“치부…….”
“그래.”
공작의 물색 눈동자가 위험스럽게 번들거렸다. 탐욕을 숨기지 않는 그 눈이 소티스는 너무도 두렵고 끔찍했다. 제가 그 눈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는 사실조차 질 나쁜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선황제 부부의 치부. 공작이 장녀를 황후로 만들었던 비결.
듣고 싶지 않으면서도 듣고 싶었던 판도라의 상자를 공작이 아무렇지도 않게 열었다.
뱀의 속삭임 같은 소리가 그녀의 귀를 찔러 댔다.
“잘 들어라.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는 선황제의 친아들이 아니다. 황후가 밖에서 데려온 아이야.”
소티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희게 질렸다.
“그, ……게, 무슨……. 아버지. 제발. 그런 말씀은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멸문 사유가 될 수도…….”
“에드먼드가 내 목을 치더라도 그것이 헛소문이라고 반박하지는 못할 테지. 그 증거가 전부 내 수중에 있으니까! 생각해 보거라. 그 금색 머리카락, 그리고 새카만 눈. 생김새며 오만방자한 성격까지! 무엇 하나 선황제를 닮은 것이 있었느냐?”
공작의 말은 무서울 정도로 진실이었다. 에드먼드는 선황후를 빼다 박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선황후를 목숨만큼 소중히 여겼다던 선황제와는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숨도 못 쉬는 소티스의 어깨를 흔들며 공작이 이어 말했다.
“에드먼드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남동생 아벨과 달리 자신이 멘데즈의 핏줄을 물려받지 못했다는 것을! 그러니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숨겨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던 거지. 어떠냐. 내가 알고 있는 비밀의 무게에 비하면 너를 황후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은 너무나도 소박한 값이었어!”
“…….”
본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비밀을 가진 자의 딸. 소티스는 가슴이 끓는 통증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얼마나 저를 미워했을까. 얼마나 저를, 제 아버지를 갈기갈기 찢어 눈앞에서 없애 버리고 싶었을까. 그토록 황제가 되고 싶어 했는데, 자신을 끌어내릴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이들이 곁에 앉아 있으니 어찌나 답답하고 원통했을까.
그 무정함조차도 이제는 이해가 될 것만 같았다. 소티스는 걷잡을 길 없이 가슴이 아팠다.
“너를 위해 가문의 가장 중요한 비밀을 내어 주었건만.”
공작의 이기심은 소티스를 위한 그럴듯한 부정으로 손쉽게도 탈바꿈했다. 소티스는 대꾸할 기력도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사라지고 싶다.
그 충동에서 돌아온 지 고작 열흘도 지나지 않았건만, 그녀는 가루처럼 흩어지고 바람처럼 투명해지고 싶었다.
“그런데도 너는, 그저 그 심약한 성질머리 하나를 이기지 못하고 황제의 냉대가 싫다느니, 사람들의 멸시가 지겹다느니…….”
사라졌으면 좋겠어.
“네 동생 셰릴을 좀 보고 배우거라! 부잣집에 시집을 가고도 남편을 한 손에 휘어잡으며 살건만. 너는 황비 책봉식 날짜도 잡아 두지 않고서 매사 그 허약한 몸뚱이 탓을 하질 않느냐. 에드먼드의 마음을 살 수 없다면, 당장 이 패를 들고 가서 그의 귓가에 속삭이기라도 하란 말이다. 황비로 책봉해 주지 않으면 당장 이 증거를 길거리에 뿌려 버리겠다고!”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아버지…….”
소티스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하염없이 흐른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고장 난 인형처럼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공작에게 흔들리기만 하는 소티스는, 그 어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같은 말만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라지고 싶어. 사라지고 싶어. 사라지고 싶어.
내가 처음부터 없었다면 괜찮았을까.
셰릴은 황후라도 되었으니 체면을 차렸다며 좋아할 것이고, 탐욕적인 동생은 아버지가 일러 준 에드먼드의 약점을 십분 활용하리라. 강단 있는 셰릴은 저처럼 사라지고 싶어 하지도 않았겠지. 아니, 어쩌면 에드먼드가 모른 척 셰릴을 사랑해 줄지도 모른다. 제가 소심하게 굴 때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앞에 고개를 조아릴 때마다 에드먼드는 그게 더 끔찍하다는 듯이 굴었으니까.
흡족하게 행동하는 딸을 보며 메리골드 공작은 행복했겠지. 나날이 하늘을 찌를 듯 올라서는 공작가의 위상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저만 없었다면 완벽했을 그 그림이 눈앞에 선히 보이는 것만 같다.
“소티스. 짜증 나게 울지만 말고 대책을……!”
공작이 소티스를 움켜쥐고 거세게 흔드는 순간, 소티스의 눈앞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속절없이 흔들리던 그녀의 몸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