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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17)화 (18/121)

제17화. 떠날 마음, 남을 마음 (4)

소티스는 레먼의 질문에 대해 한참 동안 생각했다.

언제든 찾아올 이혼은 사형 선고였을까? 소티스는 그 이름에서 ‘멘데즈’를 잃는 순간, 어떤 가치도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일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뇨. 끝이 아닐 거예요. 그건 그저 이혼일 뿐이니까요.”

“…….”

“저는…….”

그녀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소티스의 물빛 눈동자에 레먼의 얼굴이 담겼다. 선이 가늘고 고운 생김새의 그 남자는 소티스와 눈이 마주치자 다정하게도 웃어 보였다. 마치 어떤 대답을 해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황비가 되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니, 황비가 되지 않는 쪽이 제게 더 나을 거예요.”

“그렇겠군요.”

“……폐하께서 제게 매몰차게 대하셨던 일을 후회하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왜 황후가 되고 나서도 슬펐는지, 왜 사라지고 싶어 했는지, 황비로도 남지 않으려 하는 데 어떤 이유가 있는지…… 제가 느낀 것의 극히 일부라도, 이해하셨으면 좋겠어요.”

레먼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요? 소티스 님.”

“저는, 제 삶을 살 거예요.”

“…….”

“제 몸은 너무 약해요. 그러니까…… 우선 건강해져야 해요. 황후궁 밖의 생활을 상상할 수 있을 만큼요.”

소티스는 태어나서 수도 바깥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다. 너른 지평선은 물론이고 수평선도 본 적 없었다. 유독 몸이 약하기도 했지만, 그럴 여유조차 없이 서재에 틀어박혀 활자를 머릿속에 집어넣는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무, 물론 꼭 어딜 가고 싶다는 건 아니에요. 제가 어딜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지금은 황후궁 바깥의 모든 세상이 두렵기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이 황성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아요. 그런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지났는걸요.”

“이곳에서 당신은 행복할 수 없군요.”

레먼은 이해했다는 듯, 그러나 슬프다는 듯 읊조렸다.

“그럼 소티스 님께서는 정말로 행복해질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나고 싶으신가요?”

“언젠가는요.”

그의 단정한 낯에 의문이 어렸다.

“그게 지금은 아닌 건가요? 소티스 님.”

“아, 그게…….”

이혼하기로 했으니 그대로 궁에서 내쳐진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평소 에드먼드가 소티스에게 가졌던 감정을 생각하면, 옷가지 몇 벌을 겨우 챙기게 해 당장 쫓아 버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소티스는 에드먼드와 거래를 했고, 한동안 황성에 머무르며 멘데즈의 국무를 도와야 했다. 피니에가 무사히 아기를 낳고 황후가 되어, 소티스의 빈 자리가 한 뼘도 남지 않게 될 때까지.

잠시 어물거리던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황후 업무를 당분간 돕기로 했답니다.”

레먼이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전처럼 그녀를 불렀다.

“소티스 폐하!”

“…….”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실언을.”

“내일부터는 꼭 조심해 주세요, 마법사님.”

소티스는 언제나 그랬듯 타인의 결점을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그녀는 멋쩍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에게 너그럽게 말했다.

“훌훌 털고 떠나면 그걸로 편하겠지요. 그러나 저는 제 뒤에 남겨진 것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레먼, 저는 좋으나 싫으나 한 나라의 황후였답니다.”

“…….”

“책임이란 그런 거예요.”

그 말은 레먼을 이해시키려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고, 그녀 자신을 다독이려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레먼은 쓴 숨을 삼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책임. 알량하고 얄미운 단어다. 그녀가 그 자리에서 얼마나 오래도록 고통받았던가.

혜택은커녕 한 줌의 달콤한 칭찬조차 없었던 의무 따위.

“……소티스 님다운 선택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조금 편안해진 표정을 짓는 소티스와 달리 레먼의 얼굴은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그녀가 별안간 이혼을 선언하고 황후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멘데즈 황국은 발칵 뒤집힐 것이다. 유능하고 현명한 황후가 처리했던 그 모든 일을, 이제 막 황비가 된 피니에 로즈우드가 잘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전례 없는 흉년과 기근, 전염병, 국경 지역의 불온한 움직임과 황국 곳곳에서 일어나는 기묘한 사건들로 평민들의 삶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을 위해 움직일 수 있는 가장 큰 말인 소티스가 자리를 벗어난다면, 멘데즈의 미래는 수렁에 빠진 듯 캄캄할 것이다.

그걸 외면할 수 없었던 거겠지.

소티스 메리골드는 다정한 사람이다. 그녀의 온기는 누구든 무심코 비켜 가는 일이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쉽게 상처받으면서도, 그 온기에 자신조차 구원받았던 일이 있었으므로 레먼은 그런 그녀의 선택을 감히 타박할 수 없었다.

“소티스 님.”

레먼은 조금 먹먹해진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차라리 소티스가 이혼한 김에 다 털고 떠나겠다고 하면, 베아툼 왕국으로 초대할 생각이었다. 그녀가 황국 내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며 페리윙클 마탑의 주인을 귀빈으로 모셨던 것처럼, 그 또한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서라도 소티스를 데려갈 참이었다.

자유가 무엇인지, 그게 얼마나 영혼을 진정으로 강하게 하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레먼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소티스에게 또 한 가지의 행복을 알려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제넘게 자신했건만.

책임.

그녀를 슬프게 하고, 동시에 그녀를 강하게 하는 그것.

“…….”

소티스는 대답 대신 살짝 웃었다. 레먼은 그녀의 이름 외에 그 어떤 것도 입술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는데, 그녀는 이미 그의 속을 전부 간파해 버린 듯했다.

그녀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레먼, 당신의 감정은…….”

순간 그는 애원하듯이 대답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진심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깨달은 까닭이었다.

그의 귀 끝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제, 제…… 고, 고백은, 없었던, 것으로 해 주세요…… 그러니까…….”

상대는 이제 막 이혼을 앞둔 황국의 안주인이었다. 마음에 감히 담아 두는 것만으로도 불경한 짓이었다.

아니, 사실 세간의 이목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황제는 황태자였을 때부터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정부를 거느리지 않았던가.

그러나 소티스는 달랐다. 단 한 번도 누군가를 곁에 두지 않았던 그녀를 추문으로 모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령 그녀가 더는 황후가 아니게 되더라도. 그저 누군가를 대신하여 업무를 보다가, 제 빈자리를 서서히 메운 뒤 그녀의 오랜 소원대로 사라져 버리게 된다고 하더라도.

다행히도 레먼이 오래 말을 더듬을 필요는 없었다. 소티스가 차분하게 그의 말을 맺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할게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구는 그녀의 태도에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차분함과 현명함이 묻어났다.

“대신 부탁이 있어요, 레먼.”

무엇인지 듣지도 않았는데도 그가 대답했다.

“들어 드리고 싶습니다.”

“……무슨 내용인지 듣기는 하셔야지요.”

“하지만 소티스 님께서는 사람을 곤란하게 할 만한 부탁은 잘 하지 않으시는걸요.”

“곤란할지도 몰라요.”

소티스가 재빨리 덧붙였다.

“저는 당신이 멘데즈에 조금 더 머물러 주셨으면 좋겠어요. 마법사님. 황후의 직인은 내일부로 휴지 조각이 되겠지만, 에드먼드 폐하께 말씀드려 그대를 귀빈으로 대우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비록 격식을 갖추어 요청할 수는 없으나, 제가 황후 대리로 업무를 처리하는 동안 영혼에 관련된 문제를 도와주었으면 해요.”

“친서에 적어 두셨던 그것 말이지요.”

“맞습니다. 국가 간의 거래가 아닌 개인 간의 부탁이니 융숭한 대접이나 대단한 보상은 약속할 수 없겠지만…….”

“저는 그런 것을 바라고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레먼이 몸을 천천히 일으켜 소티스의 앞에 반듯하게 섰다. 워낙에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의 소유자라 본래 모습보다 덩치가 작아 보이던 그는 몸을 꼿꼿하게 펴자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족히 더 컸다.

“멘데즈 황국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혼에 관련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힘을 보태겠습니다. 그에 더해, 소티스 님의 영혼을 곁에서 살필 수 있다면 무척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내 영혼을요?”

“한 차례 분리된 적이 있어서 무척 불안한 상태일 거예요. 육신과 영혼을 연결하고 있는 끈이 무척 약해져 있어요. 그걸 조금 더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제게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 기회를 통해 저는 더 훌륭한 마법사로 성장할 수 있게 되겠지요. 다만…….”

레먼은 조금 어두운 낯빛으로 말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하더라도, 황후로서의 본분을 다해 주셨던 노고가…….”

그의 말뜻을 알아챈 그녀가 살짝 웃고 말았다.

나라를 위해, 에드먼드의 안위와 황실의 명예를 위해 노력했던 것을 알아주는 이가 얼마나 있던가. 야멸찬 대우에 누구보다도 익숙한 본인은 이제 와 바라는 것도 없을진대, 고작해야 한 달도 보지 않았던 이가 그 노고를 세상이 알아주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다.

“저는 옳은 일을 할 뿐이니 괜찮답니다. 우선…… 몸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군요.”

대화를 나누는 내내 서 있었더니 몸이 쇳덩이처럼 무겁게만 느껴졌다. 차를 마시고 나왔는데도 입술은 바싹바싹 말랐고, 귀에서는 듣기 싫은 이명이 울렸다. 소티스는 한숨을 쉬며 나무에 살짝 기댔다.

레먼은 금방이라도 그녀의 어깨를 감싸 제게 기대게 하고 싶은 듯했지만, 소티스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어 안절부절못하기만 했다.

“……내일 마리아네스 님께서 수소문해 오신 기력술사를 만나 보시는 건 어떤가요? 그들은 영혼이 아니라 몸의 흐름을 다루는 마법사로, 도움을 받으신다면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큰 지병 없이 그저 몸이 약한 것인데도요?”

“그와 별개로 최근 영혼이 오래도록 분리되어 있었으니까요. 영혼은 몸의 균형을 잡아 주는 구심점입니다. 그러니 분명히 흐름이 막히거나 변한 곳이 있을 거예요.”

“살뜰하시네요.”

소티스는 상냥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차는 잘 마셨어요, 레먼. 덕분에 놀란 마음이 금세 진정되었답니다. 그리고…… 이렇게 배려해 주신 모든 것이 고맙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저, 이건…….”

레먼이 품에서 작은 종이봉투 하나를 건넸다.

“제가 직접 기르고 배합한 약초차입니다. 소량이나마 제 마력이 담겨 있지요. 지친 영혼을 달래는 데 효과가 좋아서, 따뜻한 물에 잠시 우려 드시면 깊이 주무실 수 있을 거예요. 낮에 드시면 졸릴 수 있으니, 꼭 잠드시기 한 시간 전에 드십시오.”

“마력을 담았다니…… 귀한 물건이 아닌가요?”

마법사는 부드럽게, 그러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소티스 님께 찾아올 고요한 밤보다 귀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 틀림없는 진심에는 소티스가 겪어 본 적도 없는 다정함이 담겨 있어서, 그녀는 결국 그 물건을 소중히 받아 품 안에 넣었다.

“기억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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