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16)화 (17/121)

제16화. 떠날 마음, 남을 마음 (3)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가 그 방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는 뻣뻣하게 굳은 채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이내 아주 오랜만에 ‘소티스 메리골드’로 돌아온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잘한 거겠지.”

뒤늦게 몸이 벌벌 떨려 왔다. 희미했던 떨림은 점차 강해져서, 이내 무릎마저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소티스는 의자에 얼른 몸을 내리며 빠르게 호흡했다.

“잘한 거야.”

그녀는 자신에게 재빨리 속삭였다. 갈라진 목소리가 귓속을 기분 나쁘게 파고드는 듯했다. 소티스는 양팔로 자신의 어깨를 감싼 채 웅크렸다.

처음으로 에드먼드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그를 좋아했다고. 그래서 최선을 다했다고.

그러나 당신은 그러지 않았다고.

나는 당신을 좋아했지만, 당신은 나를 싫어하지 않았냐고.

“…….”

이혼하게 됐다.

모든 것은 언제나 그렇듯 에드먼드의 뜻대로 되었다. 그는 소티스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소티스가 황태자비였을 때부터 정부를 두며 제멋대로 살았다. 그녀를 은근하게 모욕하거나 힐난하는 일도 잦았다. 소티스가 올린 안건이 귀족 회의에서 좋은 반응을 얻을 때면 더욱 신경질적으로 굴었고, 이 황성에서 황후궁을 도려내 버리고 싶은 것처럼 대했다.

에드먼드는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이 소티스의 탓인 것처럼 말했지만, 실상 정말 아기를 갖고 싶지 않아 했던 것은 그였다.

“당신을 닮은 아이라니.”

에드먼드의 그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소티스의 가슴에 꽂혔던 것을, 그는 알고 있을까.

깡마른 소티스를 보고, 마치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리던 것이 평생토록 기억에 상처로 남았다는 사실을 그는 모를 것이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마음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괜찮다. 그래서 괜찮았다.

소티스는 그때부터 조금씩 이혼을 준비했다. 그 거대한 슬픔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버텼다. 그게 버거운 순간에는 사라지고 싶었지만, 그녀는 망설이던 시간 동안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에드먼드는 자신의 전부가 아니다. 그러니 에드먼드가 제 삶에서 걸어 나간다고 하더라도, 소티스는 두 발로 오롯이 서야 했다. 지금은 아득할 정도로 불가능하게 느껴지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 공허는 곧 자유의 이름을 빌려 삶을 찾아오리라.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을 때, 소티스는 문 앞을 배회하는 작은 인기척을 느꼈다. 천천히 일어나 문을 열어 보니, 가장 어린 시녀 한 명이 찻잔을 들고 불안한 표정으로 소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 할 말이 있나요?”

“……아.”

어린 시녀는 얼른 정신을 차리더니 탁자 위에 찻잔을 놓고, 그 위에 맑은 호박색 차를 따랐다.

“마음을 다스리고 진정하는 데 좋은 차랍니다, 폐하. 조금 식기는 했지만, 드시기에 편할 거예요.”

“고마워요.”

소티스는 찻잔에 일렁이는 제 얼굴을 내려다보며 차분하게 덧붙였다.

“폐하가 다녀가신 것을 다들 보아서 알겠지만, 나는 이제 황후가 아닙니다. 이혼이 결정되었으니, 나를 소티스 님이라 부르도록 해요.”

“하지만…….”

“폐황후가 되고 나서도 여러분이 나를 그대로 부른다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나의 몫이 될 것입니다. 내가 곤란하기를 바라나요?”

“아, 아뇨!”

“내키지 않더라도 지금부터 연습하세요.”

황망히 손을 내젓던 어린 시녀는 정말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네, 소티스 님.” 하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이 차는 이 꽃잎을 한 송이 띄우고, 조금 기다린 뒤에 마시면 향이 좋다고 했어요. 폐하께서 다녀가신 이후니까…… 소티스 님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찻잔 위에 연보랏빛 꽃잎이 둥실둥실 떠오른 모습이 제법 깜찍해 보여서, 소티스는 저도 모르게 살짝 웃고 말았다.

“고마워요.”

조심스레 머금은 차에서는 은은하면서도 낯선 향기가 났다. 평소 차 마시는 것을 좋아하던 그녀에게도 새롭고 신선한 맛이었다. 이국에서 새로 들어온 것일까.

소티스는 따뜻한 차로 속을 달래며 찻잔 안을 자유로이 유영하는 보랏빛 꽃잎을 바라보았다. 찻물에 젖어 반투명해진 꽃잎이 일렁이는 것을 보니 자연히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손바닥보다도 더 작아진 그녀의 영혼을 조심스레 감싸 안던 호박색 눈동자의 남자.

그 유약한 나비를 다루던 손길은 너무도 다정하고 따뜻해서, 그를 볼 때면 어쩐지 가슴이 아리곤 했다.

레먼 페리윙클.

소티스의 삶을 스쳤던 그 어떤 사람보다도 따뜻한 영혼을 가진 사람.

그를 닮은 차를 마시니 어느새 떨림은 완전히 잦아들었다. 에드먼드가 헤집고 간 속도 차분하게 가라앉았고, 울렁거리던 속과 불안하게 뛰던 심장도 평소처럼 평온해졌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던 몸이 풀어지자 팔다리가 저릴 정도였다.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아까 차를 가져왔던 어린 시녀가 다시 들어왔다.

“……소티스 님, 차는 다 드셨나요?”

“무슨 일이지요?”

“그게…… 밖에 손님이 와 계세요.”

소티스의 얼굴에 조금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마법사님이 오셨는데, 차를 다 드시면 오셨다는 사실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만나실 수 있는지, 소티스 님의 의중을 먼저 여쭈셨어요. 괜찮으시다면 뵙고…… 아니면 오늘은 그냥 돌아가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녀는 살짝 입을 벌렸다. 몇 마디의 말이 소리 없이 벙긋거리다가 사라졌다.

레먼이 와 있었다. 심지어 기다리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이 왔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게 했다. 왜?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레먼은 황후궁에 오기 위해 본궁을 지나쳐야 했을 것이고, 그곳에서 이쪽으로 향하는 에드먼드를 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쑥덕거리는 귀족들에게서 이혼 소식을 전해 들었을지도 모른다.

에드먼드가 찾아왔으니 적잖이 놀랐을 거라 여겨 걱정했겠지. 그러니 자신마저 불쑥 들이닥치면 안 될 거라 생각했을 터다. 궁리 끝에 차를 선물해 소티스의 마음을 먼저 달랜 것이었다.

지극히 레먼다운 선택이었다.

“어디에서 기다리신다던가요?”

“아. 아마…….”

곧장 나가려는 소티스의 어깨에 시녀가 재빨리 숄을 둘러 주었다. 다갈색 털실을 촘촘히 꿰어 만든 직물은 그녀의 마른 몸을 따뜻하게 감쌌다.

소티스는 부지런히 밖으로 나섰다. 영혼일 때는 그토록 손쉽게 넘어 다녔던 창문을 그대로 넘어갈 수가 없어서, 방을 나서고 작은 저택의 대문을 넘어 나아가야만 했다.

어느새 봄이 성큼 다가왔다. 볕이 데운 바람 몇 줌이 소티스의 머리카락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들었고, 어설프게 돋아나기 시작한 잡초들이 일제히 누웠다가 부스스 일어나는 일을 반복했다.

“…….”

레먼은 황후궁의 작은 정원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드나무에 비스듬히 기댄 마법사는 허벅지 위에 낡은 책 한 권을 올려 둔 채 고단한 눈꺼풀을 감고 있었다.

소티스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던 바람이 레먼에게 다가가 그의 가지런한 속눈썹을 흔들었다.

이윽고 레먼 페리윙클이 눈을 떴다.

소티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건만, 그는 마치 그녀의 부름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호박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소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아주 느린 걸음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동안, 레먼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잠자코 기다렸다.

길고 부드러운 침묵이 두 사람의 사이를 촘촘히 메웠다.

“아직도 폐하를 사랑하세요?”

그 목소리에 묻어나는 희미한 원망은 그녀에게 무정하기만 했던 에드먼드에게 향하는 감정이었다.

소티스는 대답 대신 살짝 웃고 말았다.

“모르겠어요.”

그저 둘러대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모르겠다.

사랑이 뭘까. 제가 에드먼드에게 품었던 마음을, 그래서 여태껏 가져왔던 마음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불러도 좋은 것일까.

알고 있다. 사실 그건 사랑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랬던 시절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 오래전에 지쳐 식어 버린 마음에는 온기라고는 없었다. 그저 어떤 끈기만이 남아 미련처럼 질질 끌려 왔을 뿐이었다.

아니면 그건 그저 습관에 불과했는지도 몰랐다. 태어나서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습관적으로 에드먼드를 사랑하거나, 혹은 그러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소티스가 고요히 물었다.

“본래 사랑은 그렇게 뜨겁던가요?”

에드먼드가 핀을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라면, 자신은 그를 그렇게 뜨겁게 바라본 적이 없었으니 그 마음은 사랑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에드먼드는 자신을 따스하게 바라본 적이 없었으니, 그 또한 당연하게도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초라하다.

이 나이가 되도록 사랑이 무엇인지 가늠조차 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도 하잘것없어 보여서, 소티스는 울적한 기분을 삼키기 위해 입술을 씹었다.

레먼은 그녀를 어색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황급히 화제를 틀었다.

“……직접 뵈니 더욱 좋습니다. 소티스 님께서 계신 곳만 비가 갠 것처럼 환해 보여요. 지난 새벽에 잠시 비가 내렸거든요.”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걸요, 레먼.”

“아니에요.”

레먼의 호박색 눈동자가 다정하게 휘었다.

“소티스 님께서는 그곳에 계셨지요.”

“…….”

“제가 드린 차를 마시고, 저를 만나러 나와 주셨지요. 사실 그러지 않아도 괜찮았을 것입니다. 차를 드시지 않는다고 해도 저는 소티스 님을 기꺼이 염려했을 것이고, 피곤하고 심란하여 정원으로 나오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제 마음껏 이곳에서 소티스 님을 기다리다가 돌아갔겠지요.”

레먼이 건네는 모든 낱말에는 그만이 자아낼 수 있는 온기가 담겨 있었다. 그건 무엇과도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포근하고 따뜻했다. 오래도록 지쳐 있었던 그녀에게는 마치 꿈처럼 느껴질 정도의 다정함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저, 이혼해요.”

소티스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레먼은 호들갑을 떠는 대신 차분하게 소티스를 올려다보았다.

“저는 내일 아침 폐위될 거예요. 사람들은 폐황후가 드디어 제자리로 돌아갔다고 고소해하겠지요.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에 오래도 앉아 버텼다고 할 거예요. 사람들은 저를 비난하면서 즐거워하고, 제 슬픔을 여흥으로 삼을 테니까요.”

내내 눌러 참았던 무언가 울컥 치미는 기분이 들었다. 새삼스러울 정도로 잊고 있었던 감정이었다.

“아버지와 여동생을 우습게 만들 수는 없고, 제게도, 체면이라는 게 있으니…… 태어날 아기를 위해 이혼을 합의하고, 후일 제 몸이 나아지거든 황비 책봉식을, 진행한다고 하지만…….”

“…….”

“알아요. 저는 영원히 황비가 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이대로 끝이에요.”

에드먼드가 죽어도 소티스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소티스는 절대로 황비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입술이 하얗게 되도록 계속 깨물었다. 겨우 진정해 두었던 감정이 둑의 끝까지 아슬아슬하게 차오르는 듯했다. 누군가 손끝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버릴 것 같았다.

참는 것이라면 이골이 나 있었다. 메리골드 공작의 집착이나 셰릴의 원망, 에드먼드의 냉대나 귀부인들의 멸시에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뭐든지 누르고 삼키는 것은 소티스의 몇 가지 특기 중 하나였다.

그런데도.

왜 이제 와 그것들이 속절없이 출렁거리는 건지.

“소티스 님.”

그리고, 레먼 페리윙클이 그런 그녀를 불렀다.

“정말로 그게 끝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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