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15)화 (16/121)

제15화. 떠날 마음, 남을 마음 (2)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는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를 보았다.

멘데즈 황국의 하나뿐인 황후이자, 메리골드 공작의 딸.

에드먼드는 그녀를 볼 때면 복잡하고 불쾌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일렁이는 물빛 눈동자도, 어떻게 비아냥거려도 흔들리지 않는 평온함도, 차분하고 우아한 태도와 현명한 말솜씨마저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과거를 떠올렸다.

“저는 소티스가 싫어요, 폐하. 왜 꼭 소티스가 황후가 되어야만 하나요?”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본래 황제는 좋은 것만 할 수는 없어, 에드먼드. 메리골드 공작의 조건이, 그 딸을 황후로 만드는 것이었다. 둘째인 셰릴보다는 소티스가 똑똑해. 어차피 선택지가 많지 않다면 체면이라도 차리는 것이 낫지 않으냐.”

에드먼드는 모든 게 불만스러웠으나 셰릴 메리골드보다는 소티스 메리골드가 낫다는 선황제의 의견에 동의했다. 적어도 소티스의 눈동자에는 명백한 욕망 같은 건 없었으니까.

그러나 사람은 겉만 보고는 모르는 일이지.

소티스가 황후로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에드먼드에게는 양날의 검과 같았다. 그 자리에 합당한 여인을 두었다는 것은 그의 품위를 지켜 주었지만, 치부를 쥐고 있는 이가 쫓겨날 일 없이 그의 곁에 뿌리를 내린다는 사실은 찜찜함을 선사했던 탓이다.

소티스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할까. 그녀는 자신을 얼마나 오래도록 사랑할 수 있을까.

에드먼드는 언제나 잠잠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그 감정을 가늠해 보려 애썼다. 첫눈에 반하거나 동경하는 것은 잠깐이다. 오히려 그런 감정이야말로 위험했다. 어떤 마음도 영원하지는 않고, 한때 뜨겁게 끓었던 것이야말로 식었을 때 그 뾰족한 단면을 드러내기 마련이었으므로.

“……제가 왜 그렇게 싫으세요, 폐하?”

그는 그 질문에 곧장 대답하지 못한 채 침묵을 지켰다.

소티스를 볼 때면 자존심이 상했다. 그녀가 훌륭해지면 훌륭해질수록, 그녀를 밀어내는 자신의 선택이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느껴졌다. 에드먼드가 그녀를 밀어내고 냉대할 때마다 소티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조차도 감내하겠다는 듯이 굴었다.

마치 침묵으로 저를 질타하는 것만 같았다.

“그대를…….”

차라리 소티스가 황후감으로 부족했다면 조금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비겁한 생각임을 알면서도 에드먼드는 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가 제 치부를 알듯이, 저 또한 그녀의 치부를 알고 있었더라면.

그러나 소티스에게는 정략결혼으로 정해진 황후라는 점 외의 단점이 없었다. 귀족들은 그녀를 은근하게 비웃었으나 그녀가 내미는 정책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 평민들은 귀족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수고 진심으로 그들을 위하는 황후를 좋아했다.

“좋아할 이유가 없으니까.”

지금까지는 소티스가 에드먼드의 뜻에 엇나가는 일 없이, 순종적인 황후로 남아 주었지만…… 그렇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황비를 들인 일에 앙심을 품거나, 그녀를 홀대하던 일에 반감을 가진다면?

통제할 수 없는, 똑똑한 황후. 에드먼드는 그녀가 걷잡을 수 없이 성장하기 전에 내치고 싶었다. 비정하게 도려내서라도.

“새삼스럽다는 듯이 쳐다볼 필요가 있습니까. 그대의 아버지가 감히 황실을 상대로 협박하지만 않았더라면 우리가 결혼할 일도 없을 것이고, 내 심기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이 정도면 후사도 없는 그대를 오래도 견디지 않았소?”

“…….”

“황비가 아이를 가졌소. 황실의 첫아기요. 그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저 황비 자리에 두지는 않았겠지.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릴 때입니다.”

“제자리…….”

어떤 애정도, 배려도 느낄 수 없는 낱말을 주워듣던 소티스는 에드먼드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 비정한 얼굴을 기억 속에 아로새기며 소티스는 생각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괜찮구나.’

에드먼드의 뾰족한 말이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놀랍도록 예상대로여서일지도 모른다. 하긴, 에드먼드는 언제나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그랬다.

푹 자고 일어나서 개운해진 덕인지도 모른다. 몸이 가벼워지면 마음도 가벼워지곤 하니까.

소티스는 무어라 더 말하려던 에드먼드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그럼 저는 폐위된 뒤 어떻게 되나요?”

에드먼드는 아까보다 조금 더 길게 침묵했다.

지금이 아니면 소티스와 이혼할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다소 무리하게 몰아붙이고 있는 것도 맞았다.

그러나 이혼은 생각보다 복잡한 일이었다. 설령 이혼한다 해도, 이후의 일도 그리 녹록지 않을 것이다.

피니에 로즈우드는 후작가의 이름을 물려받기는 했지만, 서녀였으니 사교계에서의 입지가 애매하다. 국무에 뛰어들 수도 없었으니 소티스의 도움이 불가피했다.

찝찝한 사연을 치워 내고 생각한다면, 소티스는 객관적으로 좋은 황후였다. 그런 그녀를 모질게 쫓아낸다면 국민들의 원성을 사는 것은 물론이며 메리골드 공작이 보복성 폭로를 할 수도 있었다.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에드먼드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소티스가 조용히 말했다.

“폐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들어 보도록 하지.”

“이혼을 받아들이는 대신 제게 두 가지를 약속해 주세요.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는 내일, 폐하께서 이혼을 공언하실 때 그것이 합의된 일임을 함께 밝히겠습니다. 또한, 제 아버지가 앙심을 품고 황실의 격을 낮추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에드먼드가 반색하며 대답했다.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수용하겠습니다, 황후.”

소티스는 생각보다 차분한 자신의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어쩌면 이 순간을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숱하게 떠올렸던 나쁜 상상 속의 마지막을 장식하던 것, 이혼.

그래서 오히려 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 최악의 순간을 몇 번이고 연습했으므로.

“제게 시간을 주세요.”

소티스가 말했다.

“제가 하루아침에 폐위되어 황성에서 쫓겨난다면,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반발이 가장 클 것입니다. 장차 태어날 아기를 위해 제가 물러났다는 식으로 제 입장을 배려해 주세요. 이혼한 뒤 황비로 새로이 책봉하겠지만, 제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아 책봉식을 뒤로 미룬다고 하시면 나을 것입니다.”

“……그래. 그 편이 공작을 설득하기에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그동안 저를 이곳에서 지낼 수 있게 허락하신다면, 핀 전하의 황후 업무를 곁에서 돕겠습니다.”

그건 소티스의 여동생인 셰릴 메리골드를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언니가 제대로 된 절차도 없이 황후가 되었다는 이유로 사교계의 은근한 웃음거리가 되었던 셰릴을 더는 초라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소티스의 마음이 담겨 있기도 했다.

메리골드 공작가의 체면을 조금은 차려 주어야 공작도 잠잠할 것이고, 셰릴도 비참하지 않겠지. 소티스는 셰릴에게 더 원망받고 싶지 않았다.

“좋습니다.”

좋다 못해 반가울 정도였다. 어차피 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은 이였다. 본인이 협조하기까지 하는데 나쁘게 쫓아낼 이유가 있을까. 게다가 먼저 업무를 도와주겠다는 말까지 나왔으니,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조차 사라졌다.

“두 번째는 무엇이오?”

“남부 베아툼 왕국의 마법사, 레먼 페리윙클을 제 사적인 손님으로 인정해 주세요. 그는 제가 국무를 처리하기 위해 부른 귀빈입니다. 비록 제가 황후가 아니게 되면 그 자격은 사라지겠지만, 부디 그를 이전과 같이 대접해 주시고 먼저 쫓아내는 일이 없게 해 주세요.”

황제는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누가 보면 내가 그를 적대하기라도 하는 줄 알겠군. 비록 소국이나 베아툼의 영혼 마법사가 대단하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가 터무니없는 짓만 하지 않는다면, 내 쪽에서 먼저 수를 쓰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시오.”

레먼 페리윙클.

에드먼드는 결혼식에서 보았던 그 남자를 떠올렸다. 길게 내려 묶은 갈색 머리카락에 이질적인 영안이 도드라졌던 이였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제법 다정하고 사려 깊은 성정을 타고난 모양이지만, 연회장에서 보았을 때는 제법 냉정하고 차가운 인상도 지니고 있었다.

소티스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챈 이겠지. 영혼과 소통할 수 있다고 하던데, 어쩌면 소티스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살며 누구도 가까이 두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에드먼드는 고개를 기울이며 소티스를 내려다보았다.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까.”

소티스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혹시 제가 핀 전하 대신 황후 업무를 처리하게 될 때면, 황비에 준하는 권한을 부여해 주시겠어요?”

소박하게마저 느껴지는 요청에 에드먼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국무에 한해서는 그럴 거요. 다만 사교계에서는 그대의 입장이 애매할 텐데…….”

소티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괜찮습니다. 사교계에서의 제 입지는 언제나 비슷했으니, 새삼스레 더 나빠질 것도 없어요. 폐하께서 앞으로 제게 언성을 높이거나 공적인 자리에서 저를 욕되게 하지만 않으신다면, 저는 더 힘들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은 마치 에드먼드가 소티스를 괴롭게 하는 사람인 양 들렸다.

“……내가 황후를 힘들게 합니까?”

소티스의 물빛 눈동자가 에드먼드를 가만히 응시했다. 긍정도, 부정도 없는 침묵이건만 그 앞에 선 황제는 자신이 조금 움츠러드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런 식이다.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는 보는 사람이 거북스러울 정도로 곧았다. 그토록 차게 대하는데도, 단 한 번도 에드먼드에게 언성을 높이지 않는 그녀는 저보다도 훨씬 더 어른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녀의 앞에 설 때면 에드먼드는 자신이 꼭 철부지라도 된 것 같았다.

“아니라고는 하지 않는군.”

“저는 언제나 폐하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소티스가 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지요.”

“…….”

“이미 지나간 일을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폐하께서는 제게 이혼을 요구하신 것이고, 저 또한 폐하께 더는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떨지 말자. 소티스는 자신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떨지 마, 소티스. 괜찮아.

“폐하의 뒷모습만 바라보는 일을 그만둘 거예요, 저도.”

오래된 사랑의 끝을 고하는 목소리는 별수 없이 떨려 왔지만, 생각보다 형편없지는 않았다.

“……그렇군. 그렇다면 모쪼록 내일 잘 부탁하지, 황후. 아니…….”

“…….”

“이제는 황후가 아니군, 소티스.”

제게 황후로서의 대접조차 그만둔 에드먼드에게 소티스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슬플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후련하네요. 이혼이 정해졌으니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는 폐하를 좋아했었거든요.”

그 말에 그가 조금 당황해서 물었다.

“……나를 좋아했다고?”

“그럼, 제가 왜 지금껏 이 자리에서 폐하를 견뎠다고 생각하세요?”

“글쎄…… 하지만, 나를 좋아할 이유가 없지 않나?”

소티스는 그 말에, 따뜻하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싫어할 이유 또한 없었지요.”

“…….”

“폐하께서 저를 ‘메리골드’로 보고 계셨던 동안, 저는 폐하를 ‘에드먼드’로 보고 있었으니까요.”

“……소티스.”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폐하.”

소티스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이제 그만 나가 달라는 뜻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