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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14)화 (15/121)

제14화. 떠날 마음, 남을 마음 (1)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는 약 한 달 만에 눈을 떴다.

가늘게 뜨인 눈꺼풀 사이로 스며드는 볕은 따가울 만큼 희고 밝았다. 창을 살짝 열어 둔 탓에 머리카락이 흩날려 뺨을 간질였고,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은 포근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너무 오래 지나 깜박 잊고 있었던, 익숙하면서도 생경한 감각들.

“……황후 전하.”

레먼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건지, 침실 앞을 초조하게 오가던 시녀들이 얼른 들어왔다. 소티스를 부축하고, 미지근한 물을 가져다주고, 헝클어진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바지런히 빗어 내려가는 시녀들의 표정은 기쁜 나머지 꼭 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마법사님이 기적을 일으켜 주신 걸까요…….”

“베아툼의 영혼 마법사 중에서 가장 대단하신 분이라지요? 마침 멘데즈 황국에 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폐하께서 모신 거였죠, 분명?”

소티스는 눈을 깜박이며 시녀들의 목소리를 듣다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물을 마시고,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는 것만으로도 약해진 몸은 피로감을 호소해 왔다.

신기하게도, 그 모든 것을 예측하지 못했음에도 소티스 본인이 한 행동이 스스로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멘데즈 황국 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렀던 사람이 하필이면 그녀의 은혜를 입은 적 있었던 레먼이었고, 그만이 소티스의 영혼을 제자리로 인도할 수 있었다.

“아차, 죄송해요. 힘드실 텐데…… 조금 쉬시겠어요? 저희는 점심을 가져올 테니까요.”

시녀들은 한 달 만에 황후의 식사를 준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살짝 들뜬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소티스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새처럼 재재거리며 침실을 나섰다.

소티스는 몸이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일어나 보았다.

슬픔에 눈을 감았을 때는 이대로가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될 뻔했다. 한 달간 그녀는 자신이 시들어 가고 있음을 느꼈고, 점점 희미해지는 영혼을 바라보며 소멸을 실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침은 찾아왔고, 그녀는 삶의 품으로 돌아왔다.

“…….”

소티스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 어디도 가지 않고 이곳에 머물러 있었건만 왜 그리 새롭게 느껴지는 건지.

시녀들이 부지런히 움직여 머리맡에 가져다 둔 꽃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고, 바람은 코끝을 서늘하게 식혔으며 피부에는 부드러운 천의 촉감이 스며들었다.

발이 끌리는 소리, 손가락에 와 닿는 단단한 감각, 귀에 내려앉는 새의 지저귐.

그 모든 생생한 감각이 소티스에게 자신이 다시 살아났음을 조곤조곤 일러 주고 있었다.

“……레먼.”

까끌까끌한 목 안으로 익숙한 단어가 새어 나왔다. 늘 아무렇게나 흩날리던 투명한 목소리는 다른, 조금 갈라진 듯하면서도 단단한 목소리였다.

정말로 말을 하게 된다면, 가장 먼저 부르고 싶은 이름이었다.

“소티스 폐하.”

몇 번이고 그렇게 불러 주었던 그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부를 때마다 얼마나 대답하고 싶었는지, 그는 알까. 그 올곧은 목소리가 어찌나 외로워 보였는지 알고 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 사람은, 레먼 페리윙클이 처음이어서.

소티스는 새하얀 원피스로 갈아입고 방을 천천히 거닐었다. 처음에는 몸이 제멋대로 휘청거려서 탁자나 옷장을 짚고 걸어야만 했지만, 그래도 조금 걷다 보니 물 흐르듯 부드럽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목을 가다듬고 몇 마디를 연습해 보기도 했다. 누가 들어와 제게 말을 걸었을 때, 쉬거나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뒤,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는 지금의 상황을 차분하게 정리해 보기로 했다.

우선, 자신은 이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에드먼드는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기어이 내치고 말 것이다. 아이를 갖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약해서, 영혼이 불안정해서, 혹은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

언제고 반드시 찾아왔을 일에 대책 없이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소티스는 불안하게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래. 중요한 건 이혼보다 그 이후의 일이다.

멘데즈 황실의 이혼은 전례가 거의 없었다. 지나치게 부도덕하거나 외가를 등에 업고 반역을 꾀했던 황후만이 그 자리에서 끌려 내려왔고, 그런 식으로 폐위된 황후들은 대개 비참한 마지막을 맞이했다. 다소 온건한 이혼이더라도, 폐황후는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 저택에서 죽는 날까지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관례였다. 황후였던 시절 행사했던 정치적, 사교적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소티스는 그런 식으로 삶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새장의 위치가 바뀔 뿐이었으며,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유배된 것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랬더라면 차라리 영혼이 분리되었을 때 사라지는 게 나았을 것이다.

‘내쳐질 때 내쳐지더라도, 비참하게 내몰리고 싶지는 않은데…….’

다행히도 제가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쫓겨날 것 같지는 않았다.

친부 메리골드 공작의 수중에는 아직 멘데즈 황실의 치부가 잡혀 있다. 물론 그것은 현 황제 에드먼드와 선황제 부부에 관련된 것으로, 새로이 태어날 에드먼드의 아이와는 무관할 수도 있었다. 그렇더라도 약간의 시간은 벌어 줄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피니에 로즈우드는 국무에 서투르다. 글을 읽고 쓸 줄은 안다지만 정치적인 감각은 전혀 없었고, 아기를 가졌으니 황후로서의 업무를 볼 시간 역시 마땅치 않을 것이다.

에드먼드는 자신을 바로 내쫓는 대신 황후의 업무를 처리할 대리인으로 둘 가능성이 높았다. 비록 그 처사에 배려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을 정리할 기회가 되리라.

“…….”

소티스는 제 가슴께에 조심스레 손을 얹어 보았다. 조금 느린 듯한 맥동이 전해져 왔다. 이 심장이 빨리 뛸 때는, 에드먼드 앞에서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사랑인지, 미련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는 이 마음을 그만 놓아줄 때가 되었다.

그 오랜 사랑은 늘 소티스를 아프게 했고, 앞으로도 아프게만 할 테니까.

“……좋아, 하나씩 해 보자.”

소티스는 크게 심호흡하며 허리를 폈다.

자신이 없는 건 여전했다. 사라져 버리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마법사의 말은 옳았다. 영혼이 분리되기까지 했던 제가 사라지지 않고 한 달씩이나 견뎠던 것은, 사라지고 싶다는 마음만큼이나 이대로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딱 한 번만. 조금만 더 노력해 볼 수 있다면, 행복하거나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게 얼마나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을까, 별안간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시녀들의 목소리인 듯했다.

점심 식사를 하기에는 시간이 조금 이른데. 소티스는 바깥의 상황이 궁금해져서 천천히 일어나 보았다. 지금이라면 목소리도 평소처럼 잘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문가에 다가간 소티스가 문을 열기도 전에, 그 너머에서 누군가 불쑥 들이닥쳤다.

“폐하! 소티스 폐하께서는 아직 준비가 안 되셨…….”

에드먼드였다. 그는 소티스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황후궁으로 급히 온 듯했다.

조금도 반갑거나 기뻐 보이지 않았다. 새카만 눈동자에는 아쉽고 곤란한 기색이 어려 있었고, 얼굴에는 차갑고 단단한 무표정만이 가득했다.

“……폐하.”

몇 마디 연습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소티스의 목소리는 초라하게 갈라졌다. 그녀는 침울해져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쿵, 쿵, 쿵.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설레고 기뻐서는 아니었다. 두렵고 불안했다. 그의 표정이, 말이, 행동이 전부 상처가 되어 마음을 할퀴고 지나갈 것 같았다.

“용케도 일어났군.”

에드먼드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무척 유감스럽다는 태도였다.

“애석하게도 한발 늦었습니다, 황후. 오전에 그대의 폐위 여부를 두고 귀족 회의를 했거든.”

소티스는 숨을 조금 고른 뒤 작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내일 오전, 우리의 이혼을 공언할 거요. 그대의 몸 상태도 좋지 않고 영혼도 불안정한 데다, 후사를 이을 능력이 없다는 것이 이혼 사유요.”

“……그것뿐인가요?”

에드먼드의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아니, 충분하지 않다.

그 사실을 소티스도 알고, 에드먼드도 모르지 않았다. 정말로 충분했다면 그가 일부러 이곳까지 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황족의 이혼은 단순한 변심으로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후사를 이을 수 없다면 황비나 정부를 들이면 되었다. 소티스는 몸이 약했으나 황성 내에서 업무를 처리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영혼이 불안정해 오래도록 자리를 비웠으나 이제 정신을 차리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는 황후로 손색없는 인품이었다.

“충분했다면 폐하께서는 저를 찾아오지 않고, 사람을 통해 서류를 보내셨을 것입니다.”

에드먼드는 긍정하는 대신 혀를 찼다. 소티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겼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이 이혼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협조하기를 바라고 왔을 것이다. 설득되지 않는다면 위협이라도 할까. 그의 마음을 가늠해 보던 소티스는 작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언제 오실까, 황후궁에 오시기는 할까. 그런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는데.”

“…….”

“이혼하자 말하러 오시는군요.”

그녀가 쓰러진 지 한 달. 에드먼드는 단 한 번도 황후궁을 찾지 않았다. 병문안은커녕 사람을 시켜 물건 하나 보낸 적이 없었다. 소티스를 마치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다가, 그녀를 찾아오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생기니 온 것이었다.

소티스는 그의 무정함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몇 년간 겪어 익숙해졌다고 믿었던 냉대가 유독 차게 느껴진 건, 어쩌면 자신이 타인의 온기와 배려를 알아 버려서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떤 이유도 없이 그저 보고 싶어서, 걱정되어서, 적적할까 싶어 오던 이가 있었으므로.

에드먼드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서로의 명예를 위해 피차 피곤한 일은 피하고 싶은데, 황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얌전히 쫓겨나 달라는 말인가요?”

“그렇지 않더라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으니 힘을 빼지 말라는 뜻이지. 이미 나는 마음을 정했고, 그대를 위해 자비를 베푸는 것도 지금뿐이오.”

황제가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내 명예에 먹칠하지 않고 얌전히 물러난다면, 그대의 부족함을 만천하에 드러내지는 않을 겁니다. 그저 우리의 마음이 예전과 같지 않았다, 그대가 자유롭게 살며 몸과 마음을 돌보기를 희망했다, 그 정도로만 발표하겠지. 그럼 적어도 평민들이 그대를 우습게 여기지는 않을 테고.”

소티스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에드먼드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의 노골적인 감정이 전해지고 있었다.

불쾌함.

그녀는 잠시간 고민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황제의 뜻에 따라야 할까, 아니면 사실을 꼬집어 말해야 할까.

평소의 소티스는 언제나 에드먼드의 뜻에 따랐다. 멘데즈의 공익에 크게 위배하지 않는 한은 항상 그녀 자신보다도 그를 먼저 생각했고,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 없이 순종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래된 설움과 서운함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서 도저히 그의 손을 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의 뜻대로 이혼하게 되더라도, 이제는 모든 것을 그에게 맞추어 주고 싶지 않았다.

소티스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이혼은 폐하의 독단이시군요.”

“…….”

“제가 폐위되는 것을 귀족들도, 그리고 평민들도 바라지 않고요. 폐하께서 사유라고 꺼내신 것들도 이혼 사유라기에는 합당치 않은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주변에서도 황비를 들인 것으로 충분하다고들 하셨겠지요.”

“…….”

“폐하. 저는 언제나 폐하의 뜻에 따랐어요. 폐하께 감히 사랑을 구걸하지 않았고, 숱한 정부와 황비를 보면서도 폐하를 탓하지 않았으며, 제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저를 그저 이곳에 두시기만 했어도, 알아서 조용히 살았을 것입니다. 크게 기대하지 않으니 크게 실망하는 일도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소티스의 물빛 눈동자가 에드먼드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내 그녀가 용기를 담아 물었다.

“……제가 왜 그렇게 싫으세요,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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