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고백 (3)
폭풍 전의 고요 같은 며칠이 지났다.
마리아네스는 검고 흰 건반들이 가지런히 늘어선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울적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애써 웃으며 피아노를 연주했고, 레먼은 잠든 황후의 머리맡에 앉아 고대어로 쓰인 낡은 책을 번역했다. 그는 이따금 창가에서 들려오는 소티스의 말을 친구에게 전해 주기도 했다.
[……새 황비 전하께서 임신하셨다고요.]
레먼은 책을 덮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내내 밤새도록 책을 읽고 기록을 뒤적거린 탓에 그의 얼굴에는 피로가 덕지덕지 엉겨 있었다.
“예, 폐하. 새로 들어온 의사의 말로는 임신 초기랍니다. 두 달도 되지 않으셨을 거라고요.”
[그렇군요.]
“황성에도 의사가 많을 텐데, 왜 하필 새로 온 의사를 황비 전하께 붙인답니까?”
마리아네스가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자 소티스가 가만히 웃어 보였다.
[황성에는 남자 의사뿐이었답니다. 부인들의 진료를 보기에는 조금 어려웠지요. 이참에 황비에게 호의적인 의사를 하나 뽑아 둘 생각인가 봐요.]
소티스가 임신했다면 에드먼드는 그녀를 그렇게 섬세하게 배려해 주었을까?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답을 아는 의문이었다. 에드먼드는 자신을 위해 그럴 이가 아니다. 오히려 정말 제 아이가 맞냐며 모욕적인 질문을 던지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핀 전하께서 임신하셨다는데도 이곳은 조용하군요. 제 영혼이 분리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셨다면서요?]
“아.”
소티스를 황후 자리에 앉혀 둘 이유가 없는데 왜 들이닥치지 않는지 궁금하다는 뜻이었다.
건반 몇 개를 누르던 마리아네스의 손길이 멎었다.
“결혼 기념으로 여행을 떠나셨거든요. 오늘 해 질 무렵에 돌아오신다고 들었어요, 폐하.”
[……폐하께서 기뻐하시던가요?]
레먼을 통해 질문을 전해 들은 마리아네스는 곤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적당히 대답할까요, 아니면 솔직히 대답할까요?”
[솔직히 대답해 주세요.]
“입꼬리가 귀에 걸리셨더라고요.”
소티스는 자신의 납작한 배를 바라보았다. 초라하다 못해 반투명해져 버린 육신 뒤로, 그녀가 틈틈이 가꾸었던 정원의 풍경이 어른어른 비쳤다.
몸이 너무 약해 아기가 잘 들어서지 않는 체질이라고 했다. 어렸을 때 총명해져야 한다며 메리골드 공작이 독한 약을 이것저것 먹였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다고 했지만, 후환이 두려웠던 의사는 어디에도 그 사실을 말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
사실 몸이 약하지 않더라도 에드먼드의 아이를 가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에드먼드는 소티스를 찾지 않았고, 소티스도 에드먼드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의무감으로 저를 안아야 할 때의 황제는 정말로 불쾌한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마주할 때면 숨이 저절로 막히고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 왔다.
차라리 아기가 없는 게 나았지. 황후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는 힐난은 받을지언정 태어난 아기까지 아프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소티스는 핀이 끝없이 부러웠다.
누구도 감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매혹적인 미인. 불현듯 나타나 황제의 마음을 불길처럼 사로잡고,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로 화려한 결혼을 하고, 황제의 사랑을 듬뿍 받는 황비가 된 것으로도 모자라 황성에 들어온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아기까지 가졌다.
황제는 핀을 사랑하고, 핀이 낳은 아기도 진심으로 사랑할 것이다. 황자나 황녀가 태어난다면 멘데즈 황국을 기꺼이 물려주겠노라 선포하겠지.
소티스는 점점 밀려나서 작아지고 말 것이다. 아니, 내쫓길 것이다. 이제는 어떤 쓸모도 없는 짐짝처럼.
친부가 목숨줄처럼 붙들고 있는 황실의 치부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새로이 태어난 아이의 잘못이 아닐 테니 약점을 잡고 흔드는 것도 이제는 끝이었다.
무엇에도 기대할 수 없는 채로, 살얼음을 걷는 듯한 며칠이었다.
“폐하. 차라리 이참에…….”
마리아네스는 벌떡 일어났지만, 황후의 머리맡에 앉아 있던 레먼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마리아네스를 말렸다.
소티스를 누구보다도 오래 지켜보았던 마리아네스는, 에드먼드가 결코 좋은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착하고 다정한 소티스에게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이였다. 마리아네스는 차라리 레먼이 소티스의 마음을 빼앗아 가기만을 기대했고, 도와줄 용의도 얼마든지 있었다.
레먼 페리윙클은 다정한 사람이었다. 남부의 베아툼 왕국은 그 규모가 크지 않지만, 그래도 땅이 비옥하며 정세가 안정되어 지내기에 좋은 곳이었다. 황족은 아니지만 페리윙클 마탑의 주인이니 터무니없는 짓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평생을 모자람 없이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레먼은 소티스의 마음을 흔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소티스가 에드먼드에게 여전히 사랑을, 혹은 미련을 가지고 있음을 아는데도 그랬다.
소티스는 위태로운 상태였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그녀를 어떤 방식으로든 뒤흔들어 혼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모습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버릴까 두려웠다.
이 사랑이 그녀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지탱해 주는 힘이 되기를 바랐다.
[있잖아요.]
창가에 걸터앉은 소티스가 머리를 빗으며 천천히 말했다.
[두 분, 이제는 황후궁에 오지 마세요.]
“……폐하.”
[제 적적함을 달래려 노력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시고, 이쪽으로는 오지 않는 게 좋겠어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저는 폐황후가 될 거예요. 빠르면 오늘 저녁, 아니면 내일 아침이라도 당장. 에드먼드 폐하는 저를 끌어내릴 수 있는 위치에 계시고, 그럴 생각이 가득하시지요. 멘데즈의 새로운 핏줄을 위해서라도 저를 치워 내야 한다고 믿고 계실 거예요. 그런 황제 폐하를 누가 막을 수 있을까요? 유령이 되어 버린 제가? 아니면 타국의 귀빈인 마법사님이? 아니면 작위가 없는 마리아네스가요?]
레먼은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며 시선을 내렸다. 황후의 육신은 여전히 고요하게, 그림처럼 잠들어 있었다. 평화로이 눈을 감은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저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두 분께서 공연한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점점 초라해지는 제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지 않아요. 그나마 제가 온전할 때, 괜찮았을 때의 기억만 갖고 계셨으면 좋겠어요.]
소티스의 말을 전해 들은 마리아네스는 제 가슴을 콩콩 두드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제가 피아노가 아니라 검술을 배웠어야 했을까요, 폐하? 어차피 외동딸이었으니 제가 직접 후작 가문을 물려받겠노라고, 소후작이 되게 해 달라고 할 걸 그랬어요. 그랬더라면 제 발언에 어떤 정치적인 힘이…….”
소티스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요, 마리아네스.]
“…….”
[마법사님. 마법사님께서도…….]
레먼은 소티스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녀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만 돌아가 주세요.]
소티스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정말로 이렇게 이별하게 되는 걸까. 그러고 싶지 않은데,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싶지도 않았다.
마법사는 애원하듯이 창가를 바라보았다. 긴 머리카락을 느슨히 땋아 아래로 늘어뜨린 여인은 발끝을 까딱거리다가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대로 소티스가 닿지 않는 곳까지 날아가 버릴 것 같아서,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그래서 레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이대로 시간이 멈추기만을 소망했다.
***
레먼 페리윙클은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의 부탁을 끝내 들어주지 못했다.
며칠 뒤, 황성으로 돌아온 에드먼드가 황비의 임신 소식을 세상에 알리고 황후로 책봉하겠다는 전언을 남긴 것이었다. 물론 자세한 것은 대귀족 회의를 통해 결정되겠지만, 황제가 뜻을 확고하게 밝혔으니 다음 회의에는 소티스의 황후 폐위가 안건으로 올라올 것이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레먼은 한달음에 황후궁까지 달려갔다.
‘……폐하.’
그녀에게 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발이 멋대로 움직였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레먼의 걸음이 멈춘 곳은 소티스가 눈물을 터뜨렸던 그 정원이었다. 그녀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홀로 두고 싶지는 않아서.
소티스는 그의 예상대로 그곳에 있었다. 레먼보다 한발 앞서 자신의 운명을 전해 들은 듯, 체념한 미소를 지으며 꽃밭의 한중간에 서 있을 뿐이었다.
급히 달려온 탓에 숨을 살짝 몰아쉬던 레먼이 말했다.
“가지 마세요…….”
레먼이 간절하게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폐하의 영혼을 나비로 이끌어서 인도할 방법도 알아냈어요. 정말로 거의 다 왔어요.”
[마법사님. 당신의 힘은 위대하지만, 제 현실을 바꾸지는 못해요.]
“그래도 어떻게든 해 볼게요. 폐하, 저는, 폐하가 필요해요……. 저를 이곳으로 부른 것도 폐하셨지요.”
그가 고집을 부리듯 말하자 소티스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를 좋아하시는 마음은 알지만, 그걸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놀랄 틈도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지는 않았다. 소티스는 한평생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마리아네스도 안 것을 소티스가 모를 리 없었다. 게다가 그녀를 향한 감정이지 않았던가.
“그 마음으로는 폐하를 이곳에 묶어 두기 부족한가요?”
[…….]
“그렇다면, 저를 불쌍하게라도 여겨 주세요. 저를 좋아해 주실 필요는 없어요. 그게 과분하다는 것도 압니다. 보답을 바라고 당신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혼자 가져갈 감정을 품은 저를 가엾이 봐 주셔서라도…… 조금만 더 머물러 주세요. 조금만요.”
[……레먼.]
“망설이셨잖아요.”
소티스가 천천히 주저앉자 가까이 다가간 레먼이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하시면서도 마음 한쪽으로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셨잖아요. 망설일 이유가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고.”
[……그걸, 어떻게 아세요?]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쯤 폐하는 어디에도 계시지 않았을 테니까요.”
[…….]
“부디 제가 그 이유가 되게 허락해 주세요. 아니, 당장 그럴 이유가 되지 않아도 좋아요. 제게 시간을 조금만 주세요.”
[저는 폐위될 거에요.]
“소티스 폐하께서 소티스 님이 되신다고 해도, 제 은인이시라는 점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황비 전하처럼 아름답거나 매력적이지 않아요.]
“제게는 누구보다 아름답고 현명하신 분입니다.”
[저는 어떤 쓸모도 없어요.]
“그저 여기 계신 모습만 보아도 제 마음은 넘칠 만큼 좋습니다.”
소티스가 고개를 들어 레먼을 빤히 바라보았다. 슬픔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에 애써 지은 미소가 떠올랐다.
레먼은 양손을 들어 소티스의 뺨을 조심스레 감쌌다. 실체가 없어 허공을 부드럽게 받친 모양새였다.
“베아툼은 고대어로 ‘행복’을 의미한답니다, 폐하. 베아툼의 영혼 마법사는 그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 자신이 만나는 모든 영혼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맹세하지요. 가장 오래된 마법사이자 신의 대리인의 앞에서요.”
행복.
소티스는 그의 말을 입 안으로 가만히 되뇌어 보았다. 저와는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졌던 단어가 그 남자의 입술 위에 내려앉는 순간, 어쩐지 자신도 언젠가는 행복해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가 당신의 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레먼 페리윙클의 호박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났다. 오래된 영혼을 굳혀 만든 보석처럼 반짝이는 시선이 그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듯했다.
소티스는 눈을 감고, 형체 없는 손을 레먼의 손등 위에 가만히 포개듯이 올려 보았다. 기이한 온기가 그녀를 감싸, 그 높고 아득한 허공에서 땅으로 천천히 끌어 내리는 듯했다.
이내 그녀의 영혼은 점점 흐려지고, 작아지고, 연약해져서 마침내 한 마리의 연보랏빛 나비가 되고 말았다. 고단한 날개를 접은 나비는 양손을 조심스레 모은 레먼의 손에 몸을 누였다.
레먼은 나비를 아주 조심스럽게 옮겼다. 혹여라도 그녀의 영혼이 상할까 염려되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가장 오래된 신의 종이, 당신의 뜻에 따라 영혼을 옳은 길로 인도합니다.”
속삭임 같은 기도와 함께 레먼의 손에서 부드러운 주홍색 빛이 새어 나왔다. 촛불처럼 일렁이는 빛이 눈송이처럼 동그랗게 뭉치더니 잠든 나비와 소티스의 육신을 연결하듯이 줄지어 섰다.
아주 잠시간 숨을 멈추었던 소티스의 육신에 온기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사라지지 마세요, 폐하.”
레먼이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당신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