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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12)화 (13/121)

제12화. 고백 (2)

“황후의 영혼이 분리되었다니…….”

사람들의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들은 연이어 터지는 충격적인 소식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했다.

그중 가장 먼저 입을 뗀 것은 마리아네스 로즈우드였다. 고동색 머리카락을 군데군데 장미꽃잎처럼 땋아 내린 그녀는 미간을 구기며 소리쳤다.

“입이 지나치게 가벼우시군요!”

핀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 사실을 언제까지 함구하실 생각이셨나요, 마리아네스 님.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답니다.”

핀의 낯빛은 여전히 창백하고 눈가에는 눈물이 조금 고여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치 양심을 어기지 못해 진실을 어렵사리 꺼내는 사람처럼 보였다.

“제가 정말로 아기를 가진 게 맞다면, 이 사실을 고백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조금 더 나은 상황에서 말했어야 했는데…… 조금 경솔하기는 했지만요…….”

핀이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물러나자 에드먼드가 대번에 그 앞을 막듯이 나섰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마리아네스 로즈우드, 그대는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지. 또…….”

에드먼드의 검은 눈동자가 마법사에게 향했다.

“레먼 페리윙클이라 했던가.”

“예, 폐하.”

“그대는 영혼을 다루는 마법사라 하였지.”

“그렇습니다. 베아툼의 한 마탑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황후의 영혼이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그대가 먼저 알았겠군. 그대는 황후의 귀빈 자격으로 입국하였으니까.”

레먼이 대답을 고르는 사이, 마리아네스가 항변하듯이 말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으면 깨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걸 멋대로 엿들은 핀 님이…….”

“피니에 로즈우드는 멘데즈 황국의 유일한 황비다.”

에드먼드가 마리아네스의 말을 차갑게 잘랐다.

“그것도 고작 몇 시간 전에 나와 결혼식을 치르고 황비 자격을 얻었지. 내 앞에서 핀을 정부 취급한다면 두 번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황제 폐하.”

“시간이 있으면 깨어날 수 있다고 하였지. 마탑주는 이를 보장할 수 있나?”

“…….”

레먼은 에드먼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황제는 수려하면서도 서늘해 보이는 인상의 소유자였다. 어떤 의미로는 인간미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레먼은 호박색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보장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곤란하게 되었군. 황국의 미래를 운에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라.”

“황국의 미래, 라고요.”

마리아네스가 빈정거리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지금, 소티스 폐하에게 그 탓을 돌리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한 달이면 오래 기다렸다. 더 기다릴 필요가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할 때도 되었지. 단순히 몸이 아파 쓰러진 게 아닌 데다, 영혼이 분리되기까지 했다면 불운의 상징이 아닌가.”

“불운…….”

레먼이 기막히다는 듯 그 단어를 곱씹고 있을 때, 마리아네스가 핀에게 소리쳤다.

“이게 다 전하 때문이 아닙니까! 쓸데없는 말을 하지만 않으셨어도!”

“로즈우드! 아이를 가졌을지도 모르는 이에게 무슨 짓이지?”

마리아네스는 화를 매섭게 내는 에드먼드를 낯선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황성을 집처럼 드나들었다. 피아노를 좋아했던 황태자에게 연주를 들려주면서 자연스레 친해지기도 했다. 에드먼드는 제게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고 똑똑하게 말하는 마리아네스를 마음에 들어 했고, 마리아네스는 제 연주의 가치를 아는 에드먼드의 안목을 좋아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이는 에드먼드가 소티스를 미워하면서 틀어졌다. 마리아네스는 소티스의 하나뿐인 친구가 되면서, 착하고 다정한 소티스를 자꾸만 오해하고 미워하는 에드먼드를 싫어하게 되었다.

“화를 내실 줄도 아셨네요, 폐하.”

마리아네스가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소티스 폐하께서 그간 숱하게도 멸시당하실 때는 한 번도 화를 안 내셔서, 폐하께서는 여인을 위해 화를 낼 줄 모르시는 줄로만 알았어요.”

에드먼드는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에게 엄벌을 내리지 않는 이유는, 내 황비와 같은 가문의 사람이자 황후의 유일한 친구이기 때문임을 기억하도록.”

마리아네스는 조금도 고맙지 않은 말투로 에드먼드의 말에 대답했다.

“예. 감사합니다, 폐하.”

“…….”

“마법사님. 저와 함께 가시죠.”

“……예.”

누가 말리기도 전에 레먼의 팔을 쥔 마리아네스는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사람들은 두서없이 쏟아진 새로운 사실들을 갈무리하기 바빠서 두 사람에게 길을 터 주기만 할 뿐이었다.

마리아네스는 높은 구두를 신고도 거침없이 걸어갔다. 오히려 그녀의 빠른 걸음을 당해 내지 못한 레먼이 어정쩡하게 붙들려 따라갈 정도였다.

“저, 저기, 마리아네스 님, 조금만 천천히…….”

“이제 어떻게 해요?”

본궁을 완전히 벗어나 황후궁으로 가는 길목까지 다다른 마리아네스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마법사님. 이제 정말 어떻게 해요? 진실이 알려졌으니 황제는 분명히…… 소티스 폐하를 폐위시키려 하실 거예요. 그 모습은 어떻게 봐요, 저. 속상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어떻게든 침착하려던 레먼의 얼굴도 함께 일그러졌다. 정신없이 달음박질치느라 조금 헝클어진 그의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느릿느릿 나부꼈다.

“……슬퍼하시겠죠, 황후 폐하께서요.”

“그럴 줄 알았다며 웃어 주실 것 같아서 더 속상해요.”

“…….”

“그래요, 차라리…….”

마리아네스가 레먼의 어깨를 덥석 쥐었다.

“그래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이혼이잖아요. 그럼, 저희가 소티스 폐하께 더 나은 삶을 찾아 주면 되지 않겠어요?”

“……더 나은 삶?”

“폐하를 좋아하시잖아요.”

어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말에 레먼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뺨은 물론이고 목덜미와 귀, 그리고 이마까지 열이 올라 발긋발긋해졌다.

“그, 그, 그게, 티가, ……티가 많이 나나요?”

“네, 뭐.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 수준이죠?”

“그런…….”

레먼의 낯빛을 들여다보던 마리아네스가 찡그리듯이 웃었다.

“농담이에요. 제가 눈치가 좋은 편이거든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침착하셨던 것 같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보는 눈은 조금 있으시네요. 폐하께선 정말 좋은 분이시니까요.”

“…….”

“이혼 후에 저희 소티스 폐하와 함께하시는 건 어떠세요?”

“그건…….”

그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폐하의 뜻이 가장 중요하지요.”

“그렇네요……. 그래도 기회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폐하를 아껴 주실 자신이 있다면, 제가 조금쯤 도와드릴 수도 있어요.”

“아직 황후 폐하신데…… 이런 말은 불경하지 않을까요?”

레먼의 조심스러운 말에 마리아네스가 코웃음쳤다.

“불경하긴요. 에드먼드 폐하가 거느린 정부를 생각하면 한참 모자라요. 폐하께서도 그걸로 흠을 잡으실 수는 없을 거예요. 보세요, 황후가 쓰러져 있는데 거들떠도 보지 않고 정부의 온몸에 보석을 둘둘 감아서 보란 듯이 세상에 내보이시잖아요.”

듣고 보니 그랬다. 정략결혼이라는 이유로 에드먼드는 황태자 시절부터 숱한 여자를 거쳤다고 했다. 그게 소티스의 처지를 우습게 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어렸을 때부터 바람기가 대단했는지는 구분할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레먼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어쨌든 소티스 폐하께서 눈을 뜨시는 게 중요합니다. 안 그래도 제가 밤새도록 관련된 고서적을 찾아보다가 가능성이 조금 있어 보이는 이론을 발견했는데요.”

“그게 뭔데요?”

“일단, 이론적으로…… 인간의 영혼은 죽으면 나비의 형태가 됩니다.”

레먼은 복잡한 영혼 마법을 최대한 쉽게 설명하기 위해 진땀을 흘렸다.

“나비, 라고요.”

“예. 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빚은 생명체이자 영혼의 원형 같은 존재가 바로 나비입니다. 나비는 곧 영혼을 의미해요. 원형으로 돌아간 영혼은 자신이 향해야 할 길을 볼 수 있고, 그 길을 잃어버린 경우 저와 같은 영혼 마법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요.”

“그럼 소티스 폐하도 지금 나비의 형태로 방 안을 날아다니고 계신 건가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소티스 폐하께서는 지금…… 반투명한 모습으로 계십니다.”

“왜요?”

“저도 그런 모습은 처음 봅니다.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에요.”

마법사는 신중한 말투로 이어 말했다.

“아마도 영혼이 되기 직전, 망설이셨던 것 같습니다. 사라지고 싶어서 영혼이 되기를 바라셨지만…… 실은, 사라지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조금은 있었던 거지요.”

“…….”

마리아네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제멋대로 비어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기 위함이었다.

소티스를 좋아하고 아끼는 만큼 그 상황을 견디기 어려웠다. 가슴을 조각조각 저미는 듯한 아픔이었다.

자신은 그녀를 아낀다는 이유만으로도 이토록 아픈데, 본인은 오죽했을까.

“완전히 길을 잃은 영혼은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아마도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사라지시겠지요. 신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영원한 죽음을 맞이해 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 그럼 어떻게 해요, 마법사님. 방법을 찾아 주세요, 마법사님의 말씀대로라면 폐하가 너무 가엾잖아요.”

“불완전한 영혼을 응축하여 인도할 방법을 찾아보고는 있습니다. 기록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사장된 고대어로 쓰여 있어서 제가 잘 복구해 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시도할 가치는 있어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요.”

“시간…….”

마리아네스는 울적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새 황비가 정말로 임신했을까요?”

“의사가 확인해 주시겠지요.”

“정말로 아기가 생긴 거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시간이 더 부족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해내 봐야죠, 어떻게든.”

눈물을 억지로 참아 낸 마리아네스의 눈가가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려다가,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볍게 화장했던 것을 떠올리며 팔을 내렸다.

“……레먼 님은 폐하가 왜 좋아요?”

“왜냐고 물어보셔도…….”

처음 소티스를 만난 날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그 기억은 너무나도 선명해서 마치 어제 겪은 일 같았다.

막 영안이 발현되었을 때라 시야가 흐릿한 것은 물론이고, 두통에 눈물까지 저절로 고일 정도였다. 그녀가 주었던 브로치의 모양도, 그녀의 얼굴도 흐릿했다.

그러나 소티스가 망설임 없이 건넸던 선의는 조금도 흐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플 만큼 또렷했다.

그때 보았던 그 환한 풍경을 기억한다. 바람이 불자 날리던 후드. 연보랏빛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던 그녀의 머리카락. 흐릿한 시야 안에서 머리를 빗어 넘기고 후드를 쓰는 소티스의 몸짓이 꼭 나비의 날갯짓 같았다.

인사조차 하지 않고 사라진 그녀였지만, 그 자취는 레먼의 안에서 도저히 사라지는 일이 없어서.

그래서.

“……대답할 수가 없어요.”

레먼은 가슴께에 손을 올리며 눈을 감고 웃었다.

“그냥 그렇게 됐습니다.”

이유가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닌 논리였겠지.

레먼 페리윙클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소티스를 사랑했고, 그 이유는 그조차도 몰랐다. 그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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