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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11)화 (12/121)

제11화. 고백 (1)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피니에 로즈우드를 향해 숱한 찬사가 쏟아졌다.

“세상에! 너무 아름다워요, 핀 님!”

“새하얀 꽃잎으로 감싼 불꽃 같아요…….”

“이번 결혼식만 마치고 나시면 피니에 전하라고 불러야겠네요.”

“제가 모신 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우세요. 청초하고 순결한 옷도 잘 어울리실 줄 알았어요.”

재잘거리는 하녀들의 말 속에 끼어든 단어에 핀은 고개를 기울였다.

“순결?”

“그야…… 웨딩드레스의 흰색은 순결을 상징하잖아요. 그래서 연회용 드레스도 흰색으로 준비해 보았는데, 아차.”

하녀는 옆에 세워 두었던 딱 붙는 흰 드레스를 들어 보이다가 눈썹을 모았다.

“핀 님, 혹시 월경 중은 아니시죠? 신경 쓰이신다면 다른 옷으로 가져올까요?”

불편할 정도로 치렁치렁한 소매를 만지작거리던 핀은 새침한 무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선택지는 흰 드레스와 붉은 드레스뿐이었는데, 연회복으로 준비한 붉은 드레스는 가슴이 지나치게 파인 데다 뱀의 비늘처럼 과하게 반들거리는 레이스가 촌스러웠다.

이런 옷을 입고 나가면 황제를 유혹한 정부라는 고정관념에 더 힘을 실어 줄 뿐이었다. 밋밋하더라도 흰 드레스가 훨씬 나았다.

“그러고 보니 몇 달은 안 했네.”

하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피니에 로즈우드가 성에 들어온 지 몇 달이 지났건만, 하녀들 중 누구도 그녀가 월경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여인들은 저들끼리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러고 보니 핀은 거의 밤마다 황제와 함께 지냈는데…….

……설마.

피니에는 제 주변에 피어오르는 의혹 같은 호기심을 말끔히 무시하고 긴 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렸다.

***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와 피니에 로즈우드의 결혼식은 전례 없이 화려하게 치러졌다.

널찍한 융단에는 온실에서 곱게 키워 낸 장미 꽃잎을 아낌없이 뿌렸고, 금과 보석으로 장식한 제단은 사치스러울 정도로 반짝였다. 핀의 새하얀 드레스에는 진주 가루를 뿌리고 은실로 수를 놓았는데, 그녀가 걸을 때마다 겹겹이 받쳐 입은 속치마가 요정의 날개처럼 팔락이며 빛을 흩뿌렸다.

사람들은 황후보다도 화사하게 차려입은 여인을 보고 수군거렸지만, 이 결혼식을 주도한 사람이 다름 아닌 황제라는 사실을 알고 감히 반기를 들지 못했다.

“그래도 너무 사치스러운 것 아닐까요…….”

“맞아요. 남부 지역에서부터 시작된 흉년이 점점 수도 쪽으로 올라와 분위기가 엉망이라던데.”

“그뿐이겠어요? 북부의 상황도 엉망이라더라고요. 웰트 대공령 말이에요. 그쪽조차도…….”

몰래몰래 새어 나오던 불만은 에드먼드가 핀에게 보석으로 엮은 꽃다발을 건네주었을 때를 기점으로 더욱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황국의 큰 행사다 보니 결혼식에는 귀족뿐만 아니라 대형 상단의 상단주들, 평민 출신의 기자들도 모여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황후의 결혼식에서 소티스가 선보였던 수수한 드레스를 상기하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누군 빵 한 덩이가 귀해서 굶어 죽는 판국에…….”

“그래. 빈민가에는 전염병까지 돈다지요.”

“꽤 되었습니다. 장례를 치르기는커녕 묻을 땅도 부족하다더이다.”

눈치 빠른 핀은 그들의 대화를 낱낱이 주워들었다.

피니에 로즈우드는 오늘부로 황비가 되었다. 그뿐일까? 시간은 그녀의 편이었다. 이 자리에서 조금만 견디면 에드먼드는 소티스가 미워서라도 황후 자리를 핀에게 넘겨줄 것이다. 소티스는 에드먼드의 마음을 가지지 못했지만, 핀은 그것을 손에 쥐고 있었으므로.

문제는 그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가 제법 똑똑한 여자라는 점이었다. 그녀는 황후로서 썩 괜찮은 사람이었다. 유능하고 온화했으며 현명하기까지 했다.

핀을 서슴없이 구하면서도 한 번도 대적하지 않던 소티스의 유약함은 자비와 친절이라는 이름으로 국민에게 가 닿았다. 그녀는 멘데즈 황국의 크고 작은 문제를 돌보았고, 황제가 직접 관리하지 않는 국민의 불만들을 살펴 해결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사람들은 소티스가 진정으로 아프고 힘든 사람을 도와주는 황후라고 믿었다. 귀족들도 그녀가 정략결혼으로 그 자리를 차지했다며 은근하게 깔보았으나 소티스의 행적만큼은 비웃지 못했다.

황후 자리를 가져오는 것이야 쉬웠다. 그러나 그 명성을 가져오는 것은 어려웠다.

“핀. 왜 혼자 떨어져 있지?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지 않고.”

벽에 붙어 선 채 사람들을 살피던 핀의 허리를 큼직한 팔이 감아 안았다. 익숙한 손길이었다.

에드먼드는 기분이 좋은 듯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음식을 좀 가져다줄까.”

“예, 폐하. 폐하께서 주시는 것은 뭐든지 좋아요.”

에드먼드가 작은 접시 위에 그녀가 평소에 자주 즐겨 먹는 생선 요리를 가져왔다.

“안색이 창백한데, 핀. 힘들면 이르게 들어가도 좋아.”

“괜찮아요. 인생에 다시 찾아오지 않는 날이니, 지금을 만끽하고 싶어요.”

핀은 황제에게서 접시를 받아 들었다. 레몬을 통째로 갈아 만든 소스를 끼얹은 생선은 먹음직스러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건 그녀가 이 황성에 와서 처음으로 먹은 음식이기도 했다. 매번 딱딱한 빵과 굳은 치즈로 끼니를 꾸역꾸역 때우던 그녀 앞에 처음으로 차려진 만찬은 평생 꾸었던 그 어떤 꿈보다 화려하고 대단했다.

에드먼드는 포크로 접시 위의 음식을 작게 잘라 그녀의 입 앞에 내밀었다. 오늘만큼은 그녀를 위해 뭐든지 해 주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더없이 다정한 손짓 앞에서 살짝 웃던 핀은 이내 몸을 살짝 숙였다.

“……우욱.”

사람들의 이목이 순식간에 핀에게로 쏠렸다.

“핀?”

평소라면 금세 한 접시를 다 먹어 치웠을 생선이 오늘따라 비리고 불쾌하게 느껴졌다. 핀은 고개를 아예 돌려 버렸다. 에드먼드의 시선이 따가울 정도로 날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죄송해요, 폐하. 속이 좋지 않아서…….”

에드먼드는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을 재빨리 불러 접시를 치우고는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당장 의사를 부르지. 들어가서 쉬도록 해. 병이라도 난 것은 아닌가 염려스럽군. 마무리는 내가 할 테니, 응?”

“괜찮아요. 조금만 더 있다가, 정말 못 견디면…….”

말을 마치지 못하고 핀이 다시 헛구역질을 했다. 삼삼오오 모여 떠들던 사람들이 침묵하더니, 무언가 예감한 듯 저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들과 비슷한 생각을 한 에드먼드 또한 잠시 핀을 지켜보더니, 그녀의 하녀를 불러 넌지시 물었다.

“……핀이 근래 몇 달간 월경을 한 적이 있던가?”

황제가 이런 것을 직접 물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하녀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외, 외람된 말씀이오나, 폐하…… 성에 들어오고 나서는 한 번도 하지 않으셨어요.”

에드먼드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듣다가, 이내 조금 기쁜 기색으로 핀의 손을 찾아 쥐었다.

“핀. 피니에. 혹시 아이를 가진 것은 아닌가?”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설마요…….”

“가능성은 있지. 그대는 성에 들어온 이후 계속 나와 함께 지냈고, 우리 둘 다 아이를 가지기에 좋은 나이 아닌가. 자세한 건 의사를 만나야 알겠지만, 제법 기대가 되는군.”

에드먼드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사람들을 시켜 라즈베리를 바른 새 구이나 후추를 넣어 익힌 수제 햄, 작은 물고기를 튀긴 음식, 무화과 잼을 올린 파이와 새콤달콤한 맛이 나는 발효 주스 따위를 부지런히 가져다주었다. 하나같이 핀이 평소에 잘 먹던 것들이었다.

핀은 몇 가지는 의욕적으로 받아먹었지만, 조금이라도 비린내가 나는 것은 삼키지 못하고 곧장 뱉어 냈다.

창백해지는 그녀의 얼굴과는 달리 황제의 얼굴에서는 점점 빛이 났다.

“아무래도 새 황비님께 좋은 소식이 찾아오려나 봅니다.”

눈치 빠른 귀족들이 환하게 웃는 낯으로 다가왔다.

“그러게요. 이보다 더한 경사가 있겠습니까? 한동안 황실에 아기님 소식이 없어 적적했는데, 폐하께서는 무척 기쁘시겠습니다.”

에드먼드는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손을 내저었지만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핀에게 아이가 생기는 순간을 어찌나 기다렸던가. 그녀가 아들을 낳아 주기만 한다면, 황자를 핑계로 소티스를 완전히 내칠 수 있었다. 그럼 비밀이니 뭐니 하는 것으로 기세등등하게 굴던 메리골드 공작을 쫓아낼 정당성도 확보할 수 있겠지.

에드먼드는 마음 같아서는 핀을 와락 끌어안고 이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소티스가 잘한 일이 딱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이 여자를 구해 자신의 앞에 놓아 준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값비싸고 불편해 보이는 웨딩드레스나 쏟아지는 시선만 아니었더라면 벌써 핀을 안아 들고 한 바퀴 돌았을 것이다.

그러나 핀은 에드먼드만큼 기뻐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대였다. 그녀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아래로 내리깔린 녹색 눈동자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게 기쁜 소식인가요.”

“황비 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기님을 품으실지도 모르는데 기쁘지 않다니요.”

“왜 그러지? 핀.”

“아기가 생겨 봤자…….”

핀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미천한 정부 출신의 자식이라고 손가락질이나 당할 거예요. 황후 출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꼬리표가 평생토록 제 아이에게 따라붙겠지요. 제게 날아드는 손가락질이야 저 혼자 감내하면 그만이라지만, 죄 없는 아기가 당할 수모를 생각하면 마음 놓고 기뻐할 자신이 없어요.”

그녀는 울렁거리는 속을 잠재우느라 잠시 침묵했다. 연회장에는 어느새 싸늘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경쾌한 춤곡을 연주하고 있던 악단조차도 제 악기를 내려놓은 채 피니에 로즈우드의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는 것을 알아차린 핀은 다시 구역감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시선 앞에서 그녀는 자연스레 팔려 갈 뻔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두려운 기억에 자연히 몸이 떨리고 눈물이 고였다.

“그, 그렇잖아요. 황국의 안주인은 영혼이 분리되어 깨어나지도 않을 텐데…….”

핀의 폭탄 선언에 주변이 싸늘해지다 못해 얼어붙을 정도로 고요해졌다.

“그게 무슨 말이지, 핀?”

핀은 군중 속에서 유독 낯빛이 하얗게 질려 초조해하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레먼 페리윙클과 마리아네스 로즈우드. 소티스가 벼랑 끝으로 떨어지지 않게 잡고 있는 두 명의 우군.

핀은 두 명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로 말했다.

“소티스 황후 폐하가 일어나시지 않는 게, 영혼이 분리되었기 때문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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