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붉은 머리 핀 (4)
사실 소티스는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무척 의기소침해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게 나빠지기만 하는 것 같았다. 레먼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어서,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부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티스는 자신을 갉아먹는 이 마음으로 레먼마저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국경을 넘어온 이였다. 비록 이름뿐이라지만, 황후로서도 옳은 행동은 아니었다.
“메리골드 공작님께 이 사실을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레먼의 제안에 소티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도…… 저를 이곳까지 데려오신 분이기도 합니다. 제가 황후 폐하의 명령으로 입국한 사실을 모르셔서, 이국의 귀빈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더군요. 감사 인사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릅니다.”
레먼이 본 메리골드 공작은 적어도 딸이 다시 일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처럼 간절해 보였다. 부성애란 그런 걸까? 고아였던 레먼은 잘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소티스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아버지는 제가 사라지고 나서 정치적 위세를 잃고, 유명무실해지는 신세가 두려우신 거예요. 어쩌면 조금쯤 후회를 하셨을지도 모르겠지만…… 글쎄요.]
레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소티스의 말을 함부로 반박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는 공작을 평생 보았으니, 소티스의 말이 옳다고 믿은 것이었다.
“만일 폐하의 영혼이 육신에서 분리된 상태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전해 들으신다면 어떻게 하실까요?”
[공작 가문의 위상이 더 떨어지기 전에 저를 단호히 끊어 내시거나, 이혼 이후의 대책을 강구하시겠지요. 아마 그 대책은 지금도 조금씩 알아보시는 중일 거예요.]
창가에 앉은 소티스는 몸을 웅크렸다. 그녀의 물빛 눈동자가 눈꺼풀 안으로 스며들고,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떨어지며 그녀의 슬픔을 대변했다.
[어쩌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저는 별로 기대하고 싶지 않아요.]
실망과 배신의 슬픔을 견디기에는 아직 너무나도 유약한 상태였다. 그는 이해한다는 듯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도박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따로 신뢰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교류하셨던 분이라도요.”
다행히도 소티스는 미리 염두에 둔 이가 있었는지 곧장 대답했다.
[황성에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유일한 친구가 있어요. 마리아네스 로즈우드랍니다.]
“로즈우드라면, 로즈우드 후작가의 그…….”
[……맞아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변경백의 외동딸로 알려진, 로즈우드 후작가의 적녀입니다.]
로즈우드의 적녀인 마리아네스는 소티스의 하나뿐인 아군이고, 서녀인 피니에 로즈우드는 그녀의 자리를 위협하는 적군이라니.
인연이 이렇게도 이어지는구나. 레먼은 탄식하듯이 말했다.
“제가 마리아네스 님께 소티스 폐하의 상태를 대신 말씀드려도 될까요?”
고개를 든 소티스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조금 쓸쓸하고 창피해 보였다.
[내일 편한 시간에 두 분께서 함께 제 방으로 와 주신다면 고맙겠어요.]
***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여인이 제 손을 꼭 맞잡은 채 묻자 마법사가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꿈이 아닙니다, 마리아네스 님.”
마리아네스 로즈우드는 당황한 듯 자신의 뺨을 엄지와 검지로 쭉 잡아당겨 보았다. 아야야,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고운 눈썹을 찡그렸다가도 이내 얼른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 다가가 머리맡에 살짝 엎드리기도 했다.
“소티스 폐하.”
그녀의 진한 갈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소티스의 손등을 간질였다.
“정말 마법사님의 말이 맞아요? 폐하께서는 그러니까…… 이 몸을 떠나고 싶어 하셨어요? 정말로…….”
마리아네스의 녹색 눈동자가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아픈 것, 슬픈 것, 서운한 것을 잘 말하지 않는 이 오랜 친구는 언제나 이렇게 웃기만 했더란다. 초상화 속에서나 볼 것 같은 처연하고 침착한 미소는 이따금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아팠다.
얼마나 속상하고 힘들었으면 영혼이 육신을 떠난다는 선택을 했을까. 얼마나 사라지고 싶었으면, 한 달도 넘게 눈을 감은 채 다시는 뜨지 않으려고 했을까.
마리아네스는 소티스의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가닥가닥 넘겨 주며 속삭였다.
“그럼 폐하는 지금 어디 계세요?”
잠든 소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대답을 알려 준 이는 레먼이었다. 금빛 눈동자의 남자는 슬프게 웃으며 창가를 눈짓했다.
그곳에는 소티스의 영혼이 창틀에 가볍게 걸터앉은 채 마리아네스와 레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마리아네스가 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제 친구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서글퍼하는 마리아네스를 본 소티스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미안해요, 마리아네스.]
그 말을 분명 듣지 못했을 텐데, 마리아네스는 창가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는 괜찮아요, 소티스 폐하. 폐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
소티스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는 괜찮아요. 제가 이렇게 된 데는 당신의 잘못이 조금도 없어요, 마리아네스. 그러니까 그런 표정은 짓지 말아요.]
레먼이 소티스의 말을 그대로 옮겨 주자 마리아네스의 얼굴에는 언뜻 차가운 미소가 감돌았다.
“하지만 제 아버지의 책임이기도 하지요. 저는 그분의 이름을 물려받았고요.”
“……피니에 로즈우드 님 때문이지요?”
“네, 맞아요. 아버지께서 저와 제 어머니를 사랑하셨던 건 맞아요. 로즈우드 후작은 애처가로도 이름이 높았지요. 아버지는 핀 님을 인정하는 것이 그 명성을 무너뜨리는 행위라고 믿으셨어요.”
마리아네스는 단호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그러니 부정을 저지르고도 모른 척하셨던 거지요. 아버지께서는 저와 제 어머니를 위해서라고 하셨지만, 실은 그렇지 않아요. 처음부터 핀 님을 인정하시고 후작가에 들이셨다면 됐을 일이에요. 그렇다면 제 처지가 우스워질 일도, 어머니께서 충격으로 쓰러질 이유도, 핀 님께서 변방 술집까지 팔려 나갈 필요도 없었을 거예요.”
마리아네스는 제 아버지가 정말로 부끄럽고, 하나뿐인 외동딸이라며 저를 사랑했던 모습에 배신감을 느껴서 귀 끝과 목덜미까지 붉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 정말로 시급한 건 그게 아니죠. 당장 내일이 핀 님의 황비 책봉식이자 두 분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니까요. 소티스 폐하, 제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소티스는 레먼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렇다고 하십니다, 마리아네스 님.”
“직접 그렇다고 하시지는 않으시고 고개만 살짝 끄덕이셨겠죠, 뭐.”
마리아네스의 얼굴에 새초롬한 미소가 떠올랐다.
“당장 도와드릴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아요. 하지만 단서를 모으거나, 소문을 알아보는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거예요. 영혼에 관련된 건 베아툼에서 온 마법사님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은 없으실 테고…… 기력이 쇠하여 소티스 폐하의 영혼이 몸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을 테니까, 저는 멘데즈의 실력 있는 기력술사들을 수소문할게요.”
[고마워요.]
소티스의 감사 인사를 듣지 못한 마리아네스는 찡그리듯이 웃어 보였다.
“……이상한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요, 폐하. 핀 님을……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 주세요.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는다는 건 저로서도 용납하기 힘들지만, 저희는 평생 이해하지 못할 아픔이 핀 님께는 있을 거예요.”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레먼이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핀 님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로즈우드 후작가의 서녀라는 것도 인정받지 못하고 외딴곳까지 팔려 가는 처지가 되었지만, 소티스 폐하는 그런 핀 님을 구해 주신 분입니다. 어느 누가 은인의 자리를 빼앗는단 말입니까?”
레먼은 핀을 죽는 날까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짐승도 제 은인은 알아보는 법이라 하였는데, 이는 은인에게 이빨을 드러내는 법이지 않았나.
[괜찮습니다.]
소티스는 우울하게 웃어 보였다.
[이해하고 있어요.]
“……폐하.”
[그저 공교롭게도, 상대가 핀 님이 되었을 뿐입니다. 피니에 로즈우드 님이 아니었어도, 누구든 저를 밀어냈을 것입니다. 에드먼드 폐하께서는 그러고도 남으실 분이시지요. 언제든 저를 이곳에서 끌어내리고 싶었을 뿐일 테니까요. 차라리 더 절실한 사람이 앉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소티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모르겠네요. 마음이 너무 복잡해요. 제가 어떤 결정도 속 시원히 내리지 못하는 것을, 두 분께서는 부디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모든 것이 두려워요. 그러니까…….]
그녀는 비참하고 슬픈 음성으로 말을 맺었다.
[이만 혼자 있고 싶습니다.]
***
그날따라 달은 밝았고, 바람은 따뜻했다.
레먼 페리윙클은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해 황후궁으로 향했다. 다소 충동적인 행동이었으니, 복도에 서서 까마득한 시간을 헤아리고 있을 시녀들을 깨우기는 조금 곤란했다.
그래서 레먼은 그저 뒷문 쪽으로 가서, 평소 소티스가 가꾸었다던 작은 정원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운이 좋다면 열린 창 너머로 반듯하게 누운 소티스의 모습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저 잘 있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족했다.
“……폐하.”
그러나 레먼은 그곳에서 소티스를 만났다.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는 바깥으로 몸을 반쯤 돌린 채 창가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는데, 옅은 색의 머리카락이 레먼이 있는 쪽으로 가닥가닥 흩날리고 있었다.
무릎을 모아 안은 소티스는 그 위에 뺨을 살짝 대고 앉아 있다가, 레먼을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 잤나요? 레먼.]
“잠이 오지 않아서, 폐하께서 잘 계신지 보려고 했어요.”
[설마 그 짧은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있으려고요. 저는 괜찮답니다.]
소티스는 능숙하게 괜찮다는 말을 입에 올렸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레먼은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누군가 뾰족한 것으로 제 마음을 사정없이 찌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 달이었다. 영혼 상태로 부유하며 저물지 않는 하루를 견딘 것이. 음식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거나 누군가와 담소를 나눌 새도 없이 그저 앉아 있기만 했다. 누구도 그녀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그녀 또한 누구도 부를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뜨건만, 그녀의 하루는 불멸하듯이 이어졌다. 그 고단함은 누구도 감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폐하의 고단함을, 제가 죽는 날까지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슬픕니다.”
소티스가 살짝 웃었다.
[제 슬픔을 이토록 맞들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마법사님이 처음이랍니다.]
“맞들 뿐이겠습니까. 은인의 아픔을 대신 짊어질 수만 있다면, 저는 모든 것을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견딜 것입니다.”
그녀는 레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티스의 얼굴에서 엷은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그녀의 눈꼬리가 내려가더니, 물색 눈동자에서 투명한 눈물이 어룽져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뺨을 타고 턱에 맺혀 흐르는 것이 숨 가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기약도 없이 내리는 소나기처럼.
[모든 게 힘들어요, 레먼.]
평생 도구처럼 쓰이면서 무엇을 해도 인정받지 못하던 삶.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외면받고 내몰리는 처지. 자신이 구한 이가 제 몫의 사랑을 가져가는 모습을 보며 느껴야 했을 쓸쓸함. 고단한 한 달 속에서, 자신을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던 황제에게 느꼈을 야속함과 서글픔까지.
그 모든 감정이 소티스를 더욱 좁고, 외롭고, 어두운 곳으로 내모는 것만 같았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이 선택을…… 잘했다며, 대견하다며, 용감했다며…… 칭찬할 날이 올까요. 모르겠어요, 저는…….]
레먼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숨조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슬픔을 그저 보고만 있는 것으로도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처럼 목놓아 우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 레먼은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소티스의 우는 모습을 본 사람은, 어쩌면 자신뿐일지도 모른다고.
그 눈물도, 그 슬픔도, 그 목소리조차도 레먼만이 보고, 겪고, 들을 수 있었다.
“…….”
레먼은 주먹을 꽉 쥔 채 발밑에 으스러진 잡초 몇 포기만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시야가 흐려지더니, 뜨거운 눈물 몇 방울이 떨어졌다. 달빛이 어찌나 쏟아지는지 목덜미가 따가운 것만 같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제 처지가, 끝없이 나빠지기만 하는 소티스의 입장이,
그리고 이런 순간 깨달아 버리고 마는 마음이.
“저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어쩌면 아주 오래전,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을지도 몰라요. 당신이 제게 온기를 건네주었을 때, 웃어 주었을 때 제 안에 스며들었던 작은 씨앗이 당신을 다시 만난 순간 피어났어요.
그러나 레먼은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사랑이라는 알량한 감정이 소티스의 삶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르지 않았으니.
감히 그 감정을 그녀에게 건넬 수는 없었다. 그래서 더욱 슬퍼졌다.
레먼은 힘겹게 입을 열어 몇 마디를 겨우 내뱉었다.
“폐하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폐하의 편이 될게요.”
[…….]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위기나, 슬픔이나, 문제에 굴하지 않고. 모든 순간에. 그 어떤 이유 없이도…….”
레먼은 고해하듯이, 맹세하듯이, 그리고 기도하듯이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저만큼은, 당신을 울게 하지 않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