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붉은 머리 핀 (3)
피니에 로즈우드의 황비 책봉식까지는 고작 이틀만이 남았다.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는 여전히 영혼 상태로 잠든 육신 근처를 부유하고 있었다. 그녀는 부쩍 울적해 보였다. 제 영혼이 분리되고 말았으며 그 상태로 대화했다는 사실을 하필 핀에게 들켰다고 레먼으로부터 전해 들은 까닭이었다.
레먼은 그녀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어떤 말을 건네도 궁색한 것만 같아서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조금 더 주의했어야 했어요.”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답니다, 레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소티스는 창가에 앉은 채 제 곁으로 부드럽게 날아오는 나비들을 바라보았다.
[핀 님이 아셨으니 모든 것은 시간문제겠어요. 황제 폐하께서 무어라 하실지 모르겠군요. 어떤 반응이든 두려워요. 저를 얼마나 비웃으실까요? 어쩌면 황비 책봉식이 아니라 황후 책봉식을 준비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절호의 기회를 잡아서 기뻐하실지도 몰라요.]
중얼거리는 소티스는 점점 희미해져서, 그녀의 곁을 날아다니는 나비보다도 더욱 흐려 보였다. 레먼은 겁이 더럭 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지만, 혹여라도 불쾌해할까 싶어 닿을 법한 거리까지는 차마 가지도 못하고 간절하게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두지 않을 것입니다. 황실에도 절차라는 게 있을 테지요. 아침에 황성을 한 바퀴 둘러보았는데, 생각보다 평온했습니다. 적어도 소문이 퍼진 것 같지는 않았어요.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시간요?]
소티스가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폐황후가 되기까지의 말미인가요? 이제 끝났어요, 레먼. 당신이 제게 보여 준 호의는 분명 기쁘고 감동적이었지만, 저는 제 육신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했잖아요. 돌아간다 한들 하고 싶은 것도 없어요.]
“소티스 폐하…….”
레먼은 습관적으로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어쩌면 소티스는 이미 오래전 사라졌어야 하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녀가 그저 운이 좋아 사람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을 뿐, 이미 죽었어야 하는 영혼이라면? 그녀의 의지대로 그녀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 버린 거라면……. 그저 은혜를 갚고 싶다는 이유로 시간을 더 달라고 청하는 제 마음은 그녀에게 족쇄에 불과한지도 몰랐다.
그 사실을 깨닫자 그는 감히 어떤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소티스의 현실은 잔인하고 무정하여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만 했고, 레먼에게는 그녀를 구할 힘이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삶은 생명의 의무라고 주장하는 것이 어떤 가치를 지닐까? 그녀를 괴롭게만 하는 삶은 정말로 축복일까? 그녀의 미래에는 기대할 만한 무엇이 정말로 남아 있기는 한 걸까?
레먼이 침울해진 채로 고개를 푹 숙이자 소티스는 눈썹 끝을 내려 살짝 웃어 보였다.
[마법사님.]
“……네, 폐하.”
[마법사님은 왜 저를 위해 이토록 애를 쓰시나요?]
레먼은 아주 이상한 질문을 받은 것처럼 고개를 들어 소티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소티스는 음, 하고 말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제가 당신의 은인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입장마저 곤란해지는 건 좋지 않아요. 당신은 제 요청 때문에 베아툼 왕국에서 온 사절단이셨지요. 그 사실만으로도 황제 폐하께서는 당신을 마땅치 않게 여길지도 몰라요. 저는 당신마저도 곤혹스러워질까 걱정입니다.]
소티스가 어깨를 살짝 웅크리고 고개를 기울이자,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부드럽게 흘렀다.
[당신이 저를 적당히 모른 척한다고 하여도 저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레먼이 곧장 반박했다.
“외면해도 상관없는 일이라고 모두 고개를 돌리면, 세상은 끝나지 않는 겨울 속에 갇힌 것처럼 차디찰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세상을 제게 보여 주신 건 폐하셨어요.”
그는 잠든 소티스가 아닌 영혼 소티스의 쪽으로 의자를 끌어 앉더니, 급히 화제를 돌렸다.
“폐하. 폐하께서 저를 구해 주신 뒤, 제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소티스는 반사적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멘데즈에는 스승님을 찾으러 오셨다고 하셨지요, 레먼. 브로치를 팔아서 며칠 정도는 괜찮았겠지만…… 그분을 잘 찾아서 돌아가셨나요?]
“말도 마세요. 이튿날 떠돌이 보석상에게 브로치를 팔고 남은 돈으로 당나귀 한 마리를 사서 짐을 싣는데, 술에 잔뜩 취한 스승님이 골목길에서 비틀비틀 걸어 나오시지 뭡니까? 알고 보니 이곳저곳 떠돌아다니시다가, 이 근방에서 아주 눈부신 영혼을 보았다면서 겸사겸사 축제 구경까지 하셨답니다.”
[눈부신 영혼요?]
“예. 제 스승님께서는 산 이의 영혼을 살필 수 있는 눈을 타고나셨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선하고 찬란한지, 얼마나 많은 기만과 죄악으로 검게 물들었는지 보실 수 있지요.”
소티스는 어느새 레먼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런 영혼이 멘데즈에 있단 말입니까?]
“이튿날 그 마을을 떠난 것을 보니 주민은 아닌 모양입니다. 당시 새로 식을 올린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께서 순회를 돈다는 소문까지 함께 퍼지며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거든요. 떠난 이가 남긴 흔적을 쫓으려면 그럴 수는 있었지만…… 당시 베아툼에도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어 급히 스승님께서 귀환하셔야 할 때였습니다. 그러니 아쉽게도 누군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오래 헤매지는 않아 다행입니다. 귀빈으로 온 것도 아니었으니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레먼이 빙그레 웃었다.
“스승님과 합류한 이후로는 경제적으로 걱정할 일이 없어, 저는 폐하께서 주신 브로치를 다시 사러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떠돌이 보석상이 자리를 옮겨 버렸으니, 그 또한 오리무중이 되어 버렸습니다. 급기야 저는 스승님께 양해를 구하고 은인의 브로치를 찾아 떠나기 시작했지요.”
[……그걸 되찾으러 갔다고요? 왜요?]
“저를 구해 주시기 위해 베푸신 마음을 헐값에 판 것이 자꾸만 떠올라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브로치를 가지고 있어야 물건의 주인을 찾는다는 명목이 생기지요. 그래야 은인을 찾아뵙고 그 은혜를 갚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소티스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레먼을 바라보았다.
그저 빵 한 덩어리로 바꾸었어도 괜찮았다. 그게 배고픈 그를 구할 수만 있다면, 소티스는 조금도 아쉽거나 서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이렇게까지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태어나 자신이 내린 선택을 이렇게 가치 있게 취급한 이가 있던가?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간질거려 살짝 웃고 말았다.
레먼의 목소리는 다정하면서도 나지막해서 듣기 좋았고, 과거를 되짚는 내내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어 자꾸만 그가 무엇을 보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묻고 싶어졌다.
소티스는 몸을 앞으로 살짝 숙이며 기대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찾았나요?]
“번거로운 여정은 생략하고 말씀드리자면, 찾았습니다. 제가 아주 소중히 보관하는 물건 중 하나지요. 마탑에 두기는 했습니다만…… 언젠가 보여 드릴 일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발 빠른 떠돌이 보석상을 잡느라 제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듣는다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추격전 같은 거라도 한 모양이에요.]
큰 소리를 내는 일이 거의 없는 레먼 페리윙클이 누군가를 붙잡기 위해 허겁지겁 뛰며 고함을 지르는 모습은 도무지 상상할 만한 장면이 아니었다.
소티스의 물빛 눈동자에 호기심이 가득 차오르자 레먼은 제법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말도 마십시오, 폐하. 열흘도 넘게 고생한 끝에 어느 마을에 보석상이 다녀갔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부리나케 가던 길이었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한 당나귀가 지쳐 아예 스승님께 맡겨 두고, 저는 정신없이 옥수수밭을 가로질러 달려갔지요…… 그런데.”
별안간 레먼의 표정이 무척이나 심각해졌다.
“땅이 쿵쿵거리더니 뒤에서 무언가 쫓아오지 뭡니까?”
[……쫓아와요? 뭐가요?]
그가 곧장 대답하지 않자 소티스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일부러 뜸을 들이는 그가 야속하게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대체 뭐가 쫓아온 걸까? 그의 신원을 수상하게 여긴 지방 경비대? 허락 없이 옥수수밭에 들어가 작물을 망친다는 이유로 화가 잔뜩 난 주민들?
소티스가 조마조마한 얼굴로 레먼을 바라보자, 자못 진지했던 레먼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번졌다.
“멧돼지가 쫓아왔습니다!”
[어머나.]
“몇 년씩 가물어 야산에 먹을 것이 없어지자 멧돼지가 사람들이 사는 곳까지 내려온 거지 뭡니까? 뒤에서 그 멧돼지가 쫓아오는데, 그렇다고 눈앞에 있는 보석상을 두고 다른 곳으로 도망칠 수도 없고…….”
이미 다 지난 일이건만 소티스는 심각하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난리도 아니었답니다. 제가 고함을 지르며 보석상을 쫓아가자, 그 꼴을 본 보석상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서는 미친 듯이 달려가는데…… 생각해 보세요. 외지인 두 사람에 짐승 한 마리가 그렇게 옥수수밭을 정신없이 질주하는 꼴을…… 마을 사람들이 어찌나 웃던지. 아찔하고 황당한 경험이었습니다.”
레먼은 웃음을 터뜨리며 덧붙였다.
“그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이 옥수수를 좀 나눠 주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상인도 붙잡아 웃돈을 얹고 브로치를 다시 사기도 했지요. 비록 옥수수밭에서 넘어지고 굴러 온몸이 엉망진창이라 스승님께 혼이 났지만,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며 레먼은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 어떤 흔들림 없는 기쁨과 존경이 그의 얼굴에 가득했다.
레먼은 소티스에게 이야기를 자세히 전했다. 마치 그 당시의 그가 무엇을 보고 느꼈으며 어떤 마음이었는지 낱낱이 전달해 주고 싶은 사람 같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별안간 그가 쫓겼을 때의 상황을 재연하기도 했는데, 다급한 상황을 표현하는데도 일부러 우스꽝스럽게 말하며 웃는 통에 소티스는 덩달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함께 웃게 하는 힘이 있었다.
“옥수수를 세 바구니나 주는 바람에, 글쎄요. 하나씩 먹으면서 껍질을 이렇게 흘리고 갔지 뭡니까. 옥수수 대를 이렇게 뒤로 던지면서요.”
그 말은 그저 소티스가 감탄하기를 바라는 거짓말이었다. 흉년과 가뭄으로 온 땅이 메말라 산짐승마저도 사람 사는 곳에 내려와 헤매는 마당에, 어떤 마을 주민이 외지인에게 옥수수를 세 바구니씩이나 줄까.
소티스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동시에 레먼이 일부러 허풍스럽게 표현해 자신이 웃길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적당히 속은 척 따라 웃던 소티스가 말했다.
[고마워요, 레먼. 덕분에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레먼의 얼굴에서 장난스러운 표정이 천천히 사라져 갔다. 한껏 끌어 올렸던 입꼬리가 조금 가라앉고 나면, 그는 꼭 울 것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나빠질 수는 없을 거예요, 소티스 폐하. 폐하께서는 잘못한 것이 없으니, 모든 것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것입니다.”
[…….]
“저는 외국인의 신분이니, 이 나라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우선 폐하의 주변에서, 폐하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골라 사정을 설명하는 게 좋겠어요.”
레먼은 그녀를 위로하듯이 덧붙였다.
“폐하께서는 황태자비 시절부터 국민을 위한 안정 사업을 꾸준히 도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멘데즈의 환경이 불안정해지며 기근과 역병이 돌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많이 죽었지요. 제때 장례를 치르지 못한 이들과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자꾸만 환영처럼 나타나 산 사람을 괴롭히거나 악몽을 씌우는 일이 많다고도 하셨고요.”
[그렇습니다. 어쩌면 황국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무언가가 있지는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베아툼에는 영혼을 다루는 마법사가 있으니, 도움을 청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레먼이 빙그레 웃으며 제 가슴팍에 손을 얹어 보였다.
“제가 그 일의 적임자라 이곳에 왔습니다. 폐하, 제가 이곳의 영혼들과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협력해 주세요. 그러려면 우리에게는 조력자가 필요하고, 폐하께서는 마음을 다스리신 뒤 일어나셔야 합니다.”
소티스는 불안한 음성으로 물었다.
[……제가 그래도 되는 걸까요?]
레먼이 확신하듯이 말했다.
“폐하가 아닌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