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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8)화 (9/121)

제8화. 붉은 머리 핀 (2)

꽃 한 포기 없는 별궁의 작은 마당은 정원이라기보다는 잘 그린 그림 같았다.

서쪽으로 난 테라스의 난간에 기댄 핀은 긴 머리를 부드럽게 늘어뜨린 채 일몰을 바라보고 있었다. 핀의 붉은 머리카락에도, 붉은 속눈썹과 맑은 녹색 눈동자에도, 담요가 감싸지 못해 드러난 둥글고 흰 어깨와 발끝에도 산산이 부서진 일몰의 빛이 내려앉았다.

해 질 무렵의 서쪽 별궁은 유독 밝았다. 하루 중 이곳이 가장 찬란하고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이어서, 핀은 언제나 이 시간에는 테라스에 나가서 산등성이로 제 몸을 숨기는 태양을 응시하곤 했다. 이후로 펼쳐질 오래된 밤 같은 것은 까마득히 잊었다는 듯이.

황제의 정부들이 종종 머무른다던 이곳에서 무엇이든 키워 보려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로즈우드 후작 영애라고 불러도 되겠군요. 곧 황비가 되신다지요, 핀 님. 축하드립니다.”

처음에는 별궁에 들어온 선물용 꽃다발을 풀어 그 꽃을 화병에 꽂아 두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생화는 닷새도 가지 않아 이르게 볼품없이 말라서 버려야만 했다.

그녀가 화병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본 황제가 작은 꽃 화분을 사다 주었다. 핀은 그것을 창가에 두고 돌보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것은 별안간 시들고 말았다. 꽃나무 또한 벌레가 들었고, 사람의 손길이 조금만 닿지 않아도 금세 보기 나쁜 모습이 되거나 순식간에 죽어 버리곤 했다.

게다가 핀은 금세 꽃과 나무에 흥미를 잃었다. 보고 있는 순간은 예뻤으나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지루했다. 말을 하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것을 언제까지 바라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비울 곳이었다. 굳이 뭘 심고 돌보는 것조차도 사치일 것이다. 황비가 되기 전까지만 머무를 곳이니 아무렴 어떨까. 그렇게 생각하며 핀은 꽃 선물을 모두 거절했다.

“이번 꽃이 시들기 전에는 일어나 주셨으면 좋겠는데…….”

“어머나, 그게 가능하겠어? 차라리 베아툼에서 선인장을 들이는 게 나을걸. 그곳에서만 나는 작은 선인장이 있는데, 꽃이 한번 피면 다른 꽃보다 훨씬 더 오래 산대.”

“황후 폐하께서 좋아하실까? 베아툼 왕국을 궁금해하시는 것 같기는 했어.”

시녀들이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은 핀은 황후궁을 빠져나오기 전, 정원을 잠시 둘러보았다.

소박한 황후궁의 정원은 생명력이 넘쳐나고 있었다. 황후 소티스의 유일한 취미가 화초 가꾸기였다던가. 그녀가 쓰러진 이후로도 시녀들은 소티스가 돌보던 것들을 이어서 길렀던 모양인지, 정원은 소담하면서도 싱그러운 느낌이 물씬 묻어났다.

화려하게 가꾼 중앙 정원과는 다르면서도 생생한 느낌이 신기했다. 핀은 그 광경을 조금 더 보고 싶었지만, 그녀가 떠나지 않고 황후궁 근처를 서성거리면 시녀들이 무척이나 불안하고 불쾌한 기색을 보였기 때문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그런 것도 재주가 따로 있는 거겠지.”

황후에게는 있고, 제게는 없는 것. 그건 아무리 귀한 것으로 가득 채운들 자신이 머무르는 별궁에 생기가 돌지 않는 이유와 같은 것이리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래도 결국 자신은 황비가 될 것이고, 소티스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으니까.

핀은 테라스 근처에 두었던 작은 상자에서 담배를 꺼냈다. 둘둘 말린 긴 막대의 끝에 불을 붙이고 매캐한 연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그러나 세 모금도 마시기 전에 어깨 너머로 손이 뻗어져 나와 그녀의 담배를 빼앗아 갔다.

“당분간 이건 조심하지.”

에드먼드는 못마땅한 얼굴로 핀의 담배를 빼앗았다.

“아이를 가질 몸이잖아.”

짓밟히는 담배를 보던 핀이 입을 뾰족하게 내밀며 대꾸했다.

“폐하께서도 애연가시잖아요?”

“끊은 지 조금 되었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수는 없으니까.”

핀의 눈초리가 여전히 매서운 것을 본 에드먼드가 그녀의 눈가를 달래듯이 쓸었다.

“첫아이가 건강해야지. 사람들에게 흠 잡힐 거리는 주지 않는 것이 좋아. 그대는 나를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황후 폐하와 후사를 준비하실 때도 그러셨나요?”

에드먼드는 소티스를 거론하자 인상을 찡그리다가도, 담요를 살짝 끌어 올려 핀의 어깨를 덮어 주었다.

아직은 바람이 찼고, 침대에서 바로 나온 핀은 담요 아래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그랬었지. 무용한 짓이었지만.”

썩 좋아하는 주제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핀은 질문을 이어 갔다.

“왜요?”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그녀의 성정을 알았기에 에드먼드는 제법 인내심을 발휘했다.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여자를 안는 건 취향이 아니어서. 누가 억지로 하기라도 한 양 울음을 터뜨리는 여자를 굳이 달래기까지 해야 하나? 심지어 즉위 후 첫날밤을 치르고는 도망치듯이 나가서 아침까지 침대로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시녀들이 말하기를 정원 구석에 처박혀서 울고 있었다더군.”

“…….”

“심지어 이후로 몇 번인가는 합방을 거절하더군. 모욕당한 기분이었다. 그 이후로는 내가 황후를 찾지 않았고…… 이젠 그럴 필요도 없어졌군. 마음이 아주 편해.”

에드먼드는 진심으로 불쾌한 것처럼 말했으나, 핀은 곧장 맞장구치지 않았다.

“소티스 폐하도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아셨을 텐데요.”

“그렇겠지. 어린애도 아니고, 황후가 어떤 자리인지 모르지는 않았을 테지. 그러니 더욱 답답하다는 거야. 우리 사이에 하나하나 어르고 달래야 하나? 차라리 잘됐어. 한 번은 하혈하고 쓰러졌다더군. 그 몇 번 되지 않은 기회조차 유산으로 날리는 여자 따위.”

에드먼드와 소티스의 결합이 마음에도 없던 정략결혼이라는 사실을 황성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핀 또한 황성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위 귀족들을 통해 소티스의 아버지인 메리골드 공작이 황실의 비밀을 빌미로 두 사람의 혼약을 주선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 사실이 에드먼드에게는 치욕이었을 것이다. 소티스를 팔아 가문의 위신을 세운 메리골드 공작도, 그 위치를 이용하여 황후 자리를 차지한 소티스도 싫었겠지.

소티스는 그녀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에드먼드의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면, 더욱 기반을 견고히 다지기 위해 반드시 아이가 필요했다. 황녀여도 괜찮고, 황자라면 더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소티스는 합방을 거부했다.

어쩌면 에드먼드가 말한 게 전부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핀은 거기까지 따져 묻지 않았다. 제게 썩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에드먼드가 매일같이 찾는 것은 그녀가 아닌 자신이었으며, 에드먼드의 첫 번째 아이가 자신에게 생기는 것이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핀은 애교스럽게 웃으며 에드먼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얇은 담요 안으로 부드럽고 따뜻한 살갗의 감촉이 전해지자, 황제는 낮게 웃으며 그녀를 당겨 안았다.

“베아툼의 마법사가 정원을 걸어가는 것을 보았어요, 폐하. 왜 외국인이 황성에 있나요?”

에드먼드는 굳이 핀에게 정치 이야기를 설명해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질문을 무시해서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최대한 간단하게 대답했다.

“황후가 부른 귀빈이야. 도착하기 전에 쓰러졌으니 어영부영 이곳에 머물게 되었는데…… 내 권한만으로 돌려보내기 조금 애매한 관계라서.”

“귀빈?”

“그래. 최근 기근과 전염병으로 국민들의 피해가 상당한데, 시체를 제때 처리하지 못한 일부 지역에서 죽은 이들의 환영이 나타난다는 괴담이 돌고 있거든.”

“아아.”

영혼이나 마법에 관련된 자문을 구하기 위해 베아툼에 친서를 보냈고, 그래서 온 사람이 레먼 페리윙클인 거구나. 핀은 헛웃음을 살짝 지었다.

상황이 절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영혼에 관련된 일을 해결하기 위해 부른 마법사가 황후의 영혼과 대화하고 있다니.

이 사실을 언제 말해야 효과적일까.

핀이 상황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녀의 머리 위에서 에드먼드가 다정하게 달래는 목소리가 울렸다.

“마법사를 청한 서류에 황후의 직인이 찍혀 있어서 당장 돌려보내지 못할 뿐이야. 황후가 폐위되거나 그쪽에서 돌아간다고 하면 말릴 생각이 없어. 조만간이겠지. 혹시 그 마법사가 그대에게 실수라도 하던가?”

“전혀요. 그냥 궁금해서 여쭌 것입니다.”

“혹 눈에 거슬리는 게 있거든 이야기하고. 그런 사소한 일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 좋아, 핀. 그대는 정치 같은 귀찮은 일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 좋은 것만 보아도 모자랄 테니.”

정치가 귀찮은 일인가? 핀은 곁눈질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가 다 저물어 바깥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핀이 하는 일은 이곳에서 에드먼드가 보낸 온갖 선물을 확인하고, 그와 입을 맞추거나 한자리에서 잠들고, 가볍게 산책하거나 귀족들과 담소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마치 부유한 고양이 같은 삶이었다. 그저 주인의 손길만 기다리고, 주인의 사랑만이 자신을 가장 풍족하게 하는 삶.

“폐하께 여인은 무엇인가요?”

에드먼드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적어도 내게 황후는 되지 못했고, 그대는 된 것이지.”

그 짧은 말에는 소티스에 대한 멸시가 가득했다.

핀은 그의 품을 스르르 빠져나왔다.

“잠시 정원에 산책을 다녀올게요.”

“같이 가지.”

“곧 집무실에 잠시 들른다고 하셨잖아요? 서류를 다 해결하신 뒤에 오셔도 늦지 않아요, 폐하. 별궁에 매일같이 오시는 건 기쁜 일이지만, 일을 미루신다면 사람들이 저를 비난할 거예요.”

“음.”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에드먼드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핀을 놓아주었다.

핀이 옷을 걸치고 중앙 정원을 거닐 무렵, 세상은 이미 어두워져 달빛만이 그림자처럼 그녀의 뒤를 가만히 따르고 있었다. 타오르던 불길 같던 붉은 머리카락은 핏빛으로 어두워지고, 발끝에 매여 있던 그림자는 바닥으로 느리게 스며들어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때도 그랬지.

세상은 너무 어둡고 보이는 것은 한 줌뿐인 연약한 달빛이라, 그 달빛조차 저문다면 그저 눈을 감는 것과 뜨는 것이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

몇 년 전, 어딘지도 모르는 술집까지 흘러간 핀은 낯설고 탐욕스러운 시선에 둘러싸여 팔려 갈 날만을 앞두고 있었다.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몰랐다. 어디로 팔려 갈지, 누구에게 팔려 갈지, 살아남을지, 죽을지 그녀조차도 알 수 없었다.

사실 무엇도 기대되지 않았다. 핀에게는 귀족의 정부도, 싸구려 술집에 매여 사는 창부도, 연고 없는 싸늘한 시신도 별반 다를 것 없는 처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신세를 바꾼 것은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였다.

“제가 이 여자를 사겠습니다.”

그때 소티스의 눈동자에 깃든 것은 명백한 동정이었다. 남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핀을 구해 낸 셈이었다.

그렇게 구한 여자가 제 자리를 위협하는 것을 알았어도, 소티스는 그때 핀을 구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소티스가 가엾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핀의 마음에도 남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은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건 자신의 안위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는 핀도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누구도, 무엇도 약속하지 않는 세상에서 피니에 로즈우드는 무엇이든 홀로 지켜 내야 했다. 소티스의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어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해서 그녀의 상황을 봐줘야 할 이유가 핀에게는 없는 셈이었다.

이 정도로 사라지고 싶다니. 마음이 너무 약한 게 아닌가. 핀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어요, 소티스 폐하. 에드먼드 폐하께서는 저를 사랑하시잖아요.”

핀은 사랑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만이 제게 자격을 줄 것이다.

황비가 아니라 황후가 되어야 했다. 자신이 낳은 자식이 다음 대 황제가 된다면 완벽할 것이다.

그곳이 까마득할 정도로 높은 설산이라고 해도, 핀은 기꺼이 오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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