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7)화 (8/121)

제7화. 붉은 머리 핀 (1)

피니에 로즈우드는 불꽃을 빚어 만든 듯한 미인이었다.

그녀는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였고, 그의 삶을 스쳐 간 여느 여자와는 확연히 달랐다.

“핀, 나는 언제나 그대 같은 여자를 꿈꿨어. 당신을 볼 때면 내 가슴은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워져. 나는 이게 진짜 사랑이라고 믿어.”

핀은 그럴 때마다 황제에게 당당히 요구했다.

“폐하. 저는 말뿐인 사랑은 믿지 않아요. 그런 건 저를 일 초도 보호해 줄 수 없어요. 제가 이 황성에 머물 자격을 주시고, 폐하의 마음을 가장 귀한 물건에 담아 제게 보여 주세요.”

에드먼드는 핀의 붉은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대는 남은 평생 같은 드레스를 두 번 입을 필요가 없다. 황금으로 조각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매일 새 보석을 고르며 시간을 보내도 좋아. 중앙 정원에 그대가 좋아하는 꽃과 새를 모두 모으고, 주말이면 그대의 아름다움을 뽐낼 연회를 열어 주겠다.”

핀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제가 값진 드레스를 입으면 귀부인들은 저를 부유한 창부라 할 것입니다. 제 보석과 저를 위해 준비된 정원을 보고 시녀들은 폐하의 변덕이 화려하기도 하다며 저를 비웃겠지요. 연회장에서는 저를 로즈우드의 서녀이자 변경백의 수치라 수군거리는 이로 빼곡하게 찰 거고요. 폐하, 저를 정말로 사랑하신다면 제게 그 모든 것을 빛바래지 않게 할 힘을 주셔야 해요.”

“안 그래도 생각해 둔 바가 있어. 그대의 존재를 숨기고 싶어 했던 후작이 황후 때문에 치부를 드러낸 셈이라며 펄펄 뛰더군. 그대를 서녀로 인정하는 대신 황실과 혼약을 맺어 달라 청했으니, 나 또한 그것을 무시할 생각이 없어. 오히려 로즈우드 정도면 그대를 황비 자리에 올리기에 괜찮은 이름이라 잘되었지. 그대에게 황비 자리를 내어 주는 건 물론이고, 황자나 황녀를 낳아 준다면 황후 자리도 아끼지 않을 테니 누구도 감히 그대를 모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핀은 그의 품에 안기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짐짓 애교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이미 소티스 폐하가 계신데요.”

“그 뻣뻣하고 우울한 여자 말이지.”

에드먼드는 불쾌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끌어내리는 건 시간 문제야, 핀. 제아무리 메리골드라도 딸에게 이만큼 큰 하자가 있다면 협박을 더 하진 못할 테지. 국민이 사랑하는 황후, 그 이름이 얼마나 가겠어.”

“……하자?”

“그래. 심약한 데다 안으려 할 때면 어찌나 형편없이 떨어 대던지. 부부인 주제에 겁탈당하는 것처럼 굴 때면 피곤해서 전부 그만두고 싶을 지경이라고. 어렵게 가졌던 아이마저도 별안간 유산하더니 앓아눕는 게 황후는 무슨 황후라고……. 게다가 그대가 황비가 된다는 소식에 쓰러져서 한 달간 병상을 차지하고 있지 않나.”

황제는 혀를 차며 이어 말했다.

“기회를 놓치지 말아, 핀. 내 아이를 얼른 가지고 그 자리를 그대가 가져가는 게 옳아. 자리에만 누워 있는 황후와는 이혼해야지. 다시 공작저로 돌려보낼 것이다. 마음에도 없는 결혼은 그만두고 자유롭게 살도록 놓아주는 게 소티스에게도 나은 선택이겠지.”

“자유…….”

핀은 에드먼드에게 바짝 안기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게 좋겠어요, 폐하. 기왕이면 저를 황후로 삼아 주세요.”

***

피니에 로즈우드는 레먼 페리윙클을 보았다.

그 남자는 보름쯤 전부터 핀이 자주 거니는 중앙 정원에 나타났다. 그는 그곳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부지런히 갔다. 하루에 한 번, 태양이 환히 뜰 때 가서 한두 시간이 지나면 다시 같은 길을 되짚어 돌아오곤 하는 것이었다.

베아툼의 마법사가 다니는 그 길은 귀빈들이 머무르는 건물에서 황후궁이 있는 곳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그는 기쁜 얼굴로 가서 슬픈 얼굴로 돌아올 때가 많았다. 때때로 울면서 돌아올 때도 있었다. 우울한 얼굴로 땅을 내려다보며 발을 끄는 그 남자는 꼭 세상의 시름을 제 등에 홀로 짊어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레먼은 가끔 정원에서 꽃을 꺾어 가기도 했다. 지나가는 하인에게 이곳의 꽃을 조금만 가져가도 되는지 조심스럽게 묻더니,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이며 혹시 황후께서 특별히 아끼거나 좋아하던 것은 없는지 물었다. 잘 모르겠다는 하인의 말에 표정이 사뭇 심각해지더니 수많은 꽃 사이를 거닐며 아주 신중하게 고르기도 했다.

소티스가 레먼과 아는 사이였나? 핀은 그를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레먼 페리윙클은 베아툼 왕국의 마법사로, 영혼과 생명을 관장하는 페리윙클 마탑의 주인이었다. 비록 베아툼이 소국에 불과할지라도 그의 명성은 가히 그 나라의 국왕만큼 대단했기에, 콧대 높은 멘데즈 황실에서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소티스는 다른 사람들과 큰 인연을 맺는 법이 없이 매사 조용하고 소극적인 여자였다. 친구라고는 로즈우드 후작가의 외동딸―이라고는 알려졌으나 핀의 등장으로 뜻하지 않게 구설수에 오른─ 마리아네스 로즈우드뿐이라고 했다.

핀은 레먼의 행적에 호기심이 들어 황후궁으로 향했다. 그가 왜 자꾸 소티스의 처소를 들락거리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핀 님…….”

“저희가 메리골드 공작님께 혼쭐이 난다고요. 제발 도와주세요.”

“매번 이렇게 찾아오시니 저희가 정말 곤란합니다.”

핀은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시녀들에게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닷새 뒤 황비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니? 이 무례를 폐하께 말씀드리기 전에 어서 비켜.”

시녀는 거의 울먹거리듯이 대답했다.

“그럼 차라리 닷새 뒤에 오세요, 핀 님. 그때는 공작님께서 아무리 펄펄 뛰셔도 황비 전하의 명령을 감히 거스를 수 없었다고 말씀드리면 되니까요…….”

소티스를 가장 오래 모신 시녀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저희는 핀 님께서 왜 자주 이곳에 오시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확인하시려 하지 않으셔도 황후 폐하께서는 나날이 시들어 가고 계신걸요. 핀 님께서는 예정대로 황비 전하가 되실 거고요.”

시녀들의 말을 흘려듣던 핀은 고개를 기울였다. 시녀들의 푸념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울린 탓이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온 소리라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황후의 방에 들어간 레먼의 목소리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핀은 더 고집을 부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어차피 소티스의 시녀들이 자신을 안으로 들일 거라는 희망은 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서 핀은 황후궁을 빙 돌아 작은 정원 쪽으로 향했다.

소티스의 침실 창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국화를 좋아하신다고요? 아직 필 계절이 아닌데…… 혹시 온실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면 물어보겠습니다. 그래도 이 꽃도 예쁘지 않나요? 베아툼에서는 봄이면 자주…….”

두런두런 떠드는 듯한 목소리에 핀은 깜짝 놀라 단풍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레먼은 그 뒤로 몇 마디인가 더 하다가 의자를 끄는 소리를 냈다. 마치 소티스의 곁에 앉으려는 것처럼 들렸다.

의식이 없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건 썩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핀은 뒷목의 솜털이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 본능적으로 그게 단순한 혼잣말이나 넋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 버린 탓이었다.

레먼 페리윙클은 ‘대화’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누군가의 말에 대답하는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소티스는 한 달 내내 의식이 없는 상태였고, 그녀가 잠깐이라도 깨어났다면 그 사실을 에드먼드가 모를 리 없었다.

핀은 문득 레먼이 영안을 가졌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베아툼의 마법사는 영혼을 보고, 망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했다.

그런 그가 소티스와 대화했다는 건…….

핀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킨 뒤 재빨리 황후궁을 벗어났다. 그러고는 중앙 정원을 서성거리며 레먼이 그곳을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녀의 예상대로 마법사가 보였다. 조금 우울한 표정의 그는 평소처럼 조금 느리게 걷고 있었다.

핀은 얼른 그의 앞을 막아섰다.

“…….”

뾰족한 양가죽 구두가 시야에 들어오자 레먼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호박색 눈동자가 핀을 무감정하게 응시했다.

“안녕하세요.”

짧은 인사와 함께 레먼이 옆으로 물러났다. 핀은 같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먼저 지나가시겠습니까?”

레먼은 핀을 쳐다보지도 않고 물러났다. 온화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이었으나 조금도 웃지 않으니 어딘가 엄숙하면서도 서늘한 느낌이 묻어났다.

핀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레먼이 점잖게 응수했다.

“저는 매력적이거나 흥미로운 남자가 못 됩니다.”

핀이 황제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다른 귀빈들이나 귀족들을 상대로 가벼운 만남을 이어 간다던 소문을 짚는 말이었다.

그녀는 삐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무척 흥미로운데요. 여느 남자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 핀을 힐끔 바라보는 레먼에게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황후와 대화를 나누시더군요.”

“…….”

마법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그는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그냥 넋두리였을 뿐입니다. 제가 황후 폐하의 상태를 살피느라 그곳에 드나든다는 것은 메리골드 공작께서도 아시는 일입니다.”

“제가 넋두리와 대화를 구분하지도 못할 만큼 멍청해 보였나요?”

핀이 붉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를 도전적으로 바라보았다.

뻔히 다 들킨 것을 숨기려는 그의 태도를 노골적으로 비웃자, 레먼은 핀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언제든 들킬 것을 예상하기도 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지 않은가. 누군가 이대로 소티스를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거든 레먼이 제 입으로 진실을 밝힐 예정이었다.

레먼은 제 갈색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리며 일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잠시 육신을 나와 계신 소티스 폐하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폐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가 저뿐이니까, 말 상대가 되어 드리기로 한 셈이지요.”

“이 사실을 에드먼드 폐하께 알리셨나요?”

“알려야 하는 일입니까?”

레먼이 차갑게 웃었다.

“폐하께서는 소티스 폐하께 관심이 있으시기는 합니까?”

“적어도 황후 폐하의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었다는 소식 정도는 들으실 자격이 있지요. 그건 곧 그 사람이 죽었거나, 죽어 간다는 뜻이 아닌가요?”

마법사가 짜증을 꾹꾹 눌러 참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례가 많지 않아 확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영혼이 소멸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폐하의 영혼을 육신에 돌려보내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보고드린 뒤에 방법을 찾으셔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그 이후의 일은 에드먼드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이 사실을 황후 폐하의 흠인 양 떠들며 폐하의 격을 깎아내릴 사람들의 반응은 염두에 두시지 않는 겁니까. 이혼 사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시간을 끌면 이혼이 안 될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핀의 말에는 명백한 조롱과 동정이 담겨 있었다. 레먼은 화를 벌컥 내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아 냈다.

“소티스 폐하께 며칠만 시간을 더 주세요.”

“차라리 빨리 자유로워지는 게 낫다고 봐요.”

“자유라고요.”

그는 기분 나쁜 농담을 들었다는 듯 몸서리쳤다. 그러고는 핀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적대적인 말투로 속삭였다.

“그걸 ‘자유’라고 말해도 좋을까요? 소티스 폐하께 자유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핀 님과 에드먼드 폐하는 아닐 것입니다.”

“…….”

“시일이 지나면 제가 알아서 말씀드릴 것입니다. 적어도 소티스 폐하의 영혼이 안정될 때까지는, 제발.”

호박색 눈동자가 비인간적으로 반짝이며 핀을 쏘아보고 있었다.

“황비 책봉식에 온 신경을 쓰시며,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사랑받는 현실에 푹 빠져 계셨으면 해요.”

사랑받는 현실.

핀은 제게서 재빨리 멀어지는 레먼의 뒷모습을 보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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