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6)화 (7/121)

제6화. 황후 소티스 (6)

레먼은 소티스의 앞에서 두 번 정도 눈물을 보였다.

첫 번째는 보름에 걸쳐 소티스의 이야기를 전부 다 들었을 때였고, 두 번째는 그녀가 자신을 기억한다고 말했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 저는 영안이 막 발현되었을 무렵이라, 폐하의 얼굴을 기억하지는 못했습니다. 앞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으니 당연하지요. 하지만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알았습니다. 제 영혼에 깊이 새겨진 그 온도를, 저는 죽는 날까지 감히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저는 당신에게 그저 브로치 하나를 주었을 뿐이랍니다, 레먼.]

“소티스 폐하. 그건 단순한 브로치가 아니었어요. 그건 제게 희망이 되었고, 곤경에 빠진 저를 구해 냈지요. 그때 제가 길거리를 전전하다가 운 나쁘게 병에 걸리거나, 굶어 죽기라도 했다면 지금 이렇게 폐하를 뵈러 올 수 있었을까요?”

소티스는 창가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레먼의 호박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비인간적으로 반짝이는 그 눈동자는 평범한 사람의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 따뜻하고 온화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다시 만나서 좋네요.]

“저는 좋으면서도 슬픕니다.”

레먼의 눈동자가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그간 황후 폐하께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의 고초를 겪으셨단 사실에 가슴이 너무 아파요.”

[그렇게 말해 주니 저는 괜찮아요.]

“폐하께서 잘못하신 것이 대체 무어란 말입니까. 왜 에드먼드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께만 그렇게 무정하고 지독하십니까?”

[글쎄요…….]

에드먼드가 황제가 된 뒤로 몇 년의 시간이 더 흘렀다.

소티스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여전히 에드먼드는 소티스에게만 차가웠다.

***

“이 즉위식이 끝나면 그대는 그렇게 바라던 황후가 되겠군. 그간 인내심을 발휘한 보람이 있어 뿌듯하겠습니다.”

에드먼드의 비아냥거림에도 소티스는 꿋꿋하게 앞을 보았다.

“그렇게 보이세요?”

“그럼 아닌가? 그대는 절대로 정답을 알려 주지 않는군. 이유가 있나?”

“제 대답에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니라고 항변한들 의미가 있을까. 그렇지 않은 이유나, 얼마나 진심인지를 들먹이며 그녀의 주장을 피력한다고 해도 에드먼드는 듣지 않을 것이다. 소티스의 노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고 비웃는 이에게 진심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에드먼드를 처음 만난 뒤로 몇 년이 흘렀다. 소티스는 여전히 미련할 정도로 그 남자를 사랑했지만, 적어도 자신의 진심을 언제 숨겨야 할지는 알게 되었다.

“마음은 바라지 않겠다고 했지. 그 각오는 아직도 유효합니까?”

소티스가 결국 찡그리듯이 웃으며 에드먼드를 올려다보았다.

“유효하지 않더라도, 제 뜻대로 해 주시지는 않을 거잖아요.”

“잘 알고 있군. 그러니 피차 감정 상할 일은 만들지 맙시다. 그대에게 최소한의 예우는 갖출 테니.”

“최소한의 예우.”

그때 그 표현을 비웃지 못한 것이 소티스가 태어나서 가장 후회하는 일 중 하나였다.

소티스는 그 어떤 결점도 잡히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그녀는 공적인 자리를 제외한 어떤 곳에서도 화려한 드레스를 입지 않았다. 황제의 위세를 빌려 으스댄다는 말이라도 돌까 싶어 과하게 화려한 장신구를 차는 일이 없었고, 사적으로 무언가를 하거나 여행을 가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결혼 뒤 5년.

후사가 없다는 것을 제외하고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에게 단점이란 없었다.

“이러다가 정말 황비라도 들어서면 어쩌려고 이럽니까!”

메리골드 공작이 매번 황후궁에 찾아와 그녀를 닦달할 때도 그녀는 쓰게 웃기만 했다.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가 소티스에게 ‘예우를 지키겠다’고 했던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는 공적인 자리에서도 소티스를 쉽게 모욕했다. 황제가 되기 전부터 다른 영애들과 어울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즉위한 뒤로는 정부를 몇 명씩 거느리고 다니며 소티스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이가 생기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아이가 생길 정도로 에드먼드가 소티스를 찾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그래도 제가 황후인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아버지. 메리골드 공작 가문도 무사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부디 어떻게든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황후 폐하. 폐하 때문에 죄 없는 메리골드 공작가의 이들이 다 몰락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은근하게 힐난하는 말투였다. 그게 어떻게 내 잘못이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꾹 참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황후 자리에 오른 것도 소티스의 선택이었으니, 그녀 때문에 가문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일만큼은 막아야 했다.

다행인 점이 있다면, 에드먼드의 바람기는 오래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 여자 저 여자를 건너다녔지만 인내심이 없어 금세 싫증을 냈다. 마치 소티스가 불쾌하기를 바라고 정부들을 들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차피 멘데즈 황가는 대대로 정부 두엇씩 들였다고 했다. 소티스는 역대 황제들의 기록을 살펴본 적이 있었기에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 심지어 에드먼드는 황태자 시절부터 했던 일이었으니, 익숙한 고통을 꾹꾹 참아 낼 뿐이었다.

그러나 기어이 에드먼드는 황비를 들이기로 했다.

“소티스 폐하, 제발!”

메리골드 공작은 불처럼 화를 내며 그녀를 흔들었다. 그때쯤 되자 소티스도 비명을 지르듯이 대답했다.

“제가 대체 뭘 더 할 수 있었나요, 아버지!”

그 상황에 뭘 할 수 있었을까.

소티스는 그때마저도 최선을 다했다. 삶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

에드먼드와 함께 남부로 떠날 일이 있어 지나가던 길에, 웬 술집이 소란스럽기에 들어갔더니 젊은 여자 한 명이 인신매매단에 끌려간다고 했다.

그걸 지나치지 못한 소티스는 처음으로 에드먼드 앞에 나섰다. 그 여자를 자신의 시녀로 들일 테니, 인신매매단이 제시한 금액의 두 배에 팔라고 하면서.

웃돈까지 들여 여자를 사고 보니 그녀가 말하기를, 자신이 변경백의 서녀라고 했다. 남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로즈우드 후작의 숨겨진 딸이라고.

에드먼드는 애처가로 유명한 로즈우드 후작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헛소리라며 벌컥 성을 냈다. 그러나 소티스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사람을 얼마든지 써도 좋으니 로즈우드 후작가에 대한 진실을 알아보세요. 황후의 직인을 찍을 테니 필요하다면 사용하도록 해요.”

황후가 된 뒤 처음으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는 일이었다. 에드먼드는 로즈우드 후작가의 외동딸인 그녀의 오랜 친구를 욕되게 하는 일이라며 펄펄 뛰었지만, 소티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명예에 불과한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과 죽음의 문제였다. 인신매매단에 팔려 간 여자들은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를 일 아닌가.

결국 소티스는 그 여인이 정말로 변경백의 숨은 딸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렸고, 그 여자가 황성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런 미래까지 내다본 것은 아니겠지만, 황후 덕에 꽤 괜찮은 여자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 정열적인 붉은 머리카락의 피니에 로즈우드는 에드먼드의 정부가 되었다.

황제는 그의 삶을 스쳐 간 수많은 정부와는 다르다며 핀을 추켜세웠다. 이름조차도 마다하고 애칭인 ‘핀’으로 부를 정도였다. 그럴 때마다 소티스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재가 날렸으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가 자초한 일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 정도의 일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핀이 아니더라도 에드먼드는 정부를 들였을 것이다. 그중 괜찮은 여자를 언제고 황비로 올렸겠지. 소티스를 끌어내릴 수만 있다면 백 번이고 그랬을 사람이었다.

“게다가 변경백의 딸이라면 가문으로 흠을 잡힐 일도 없겠지. 빠른 시일 내 핀을 황비로 들일까 합니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팠으나 소티스는 여전히 핀을 구한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메리골드 공작은 소티스가 불씨를 황성으로 들여와 쫓겨날 일만을 만들었다며 화를 냈지만, 그녀는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숱한 여자 중 한 명이 앉았을 자리에 그냥 핀이 앉았을 뿐이다.

그 여자가 ‘피니에 로즈우드’라는 이름을 얻지 못했다면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비참하게 죽었을 것이다.

단지 에드먼드가 소티스를 못마땅히 여겨 일어난 일이었다. 핀을 탓하는 것은 옳지 못했다.

“원하는 대로 하세요.”

소티스는 가시를 삼키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화끈화끈하고 답답해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본능적으로 에드먼드가 거느렸던 숱한 여자들과 핀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알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가슴이 더 죄어들기만 할 뿐이었다.

5년. 그녀를 싫어하는 에드먼드가 그 정도면 제법 인내심을 발휘한 셈이다.

소티스는 시간이 원망스러웠다. 왜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갈까.

피니에 로즈우드의 황비 책봉식이 하루하루 다가올 때마다 소티스는 자신이 모래처럼, 먼지처럼, 민들레 꽃씨처럼 흩어져 날아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라졌으면 좋겠어.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 생각은 언제나 그림자처럼 소티스를 따라다녔다.

***

[…….]

그건 어떤 예고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고요하게 잠든 황후가 이튿날부터 일어나지 않았다.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지병도 없던 여인은 어떤 전조도 없이 그저 끝없는 잠을 자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은 짙은 상처를 끌어안은 채 아주 깊은 곳까지 가라앉았고…….

영혼이 된 소티스는 하루하루 시들어 가는 자신의 육신만을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울지 마세요.]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사람들은 그녀가 일어나지 않자 불안해하거나, 자신을 돌아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자 이내 자신이 하려던 일을 거침없이 해내기도 했다.

누구도 그녀의 영혼을 보지 못했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당신이 우니 제 마음이 아파요, 레먼.]

한 마법사가, 아니, 한 마법사만이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폐하께 잔인한 사람들이 너무 밉습니다. 제게는 은인이신 분이 이토록 슬퍼하시기까지, 그 슬픔을 아무도 맞들지 않았다는 게 통탄스럽습니다.”

한 마법사가 그녀의 슬픔을 알아보고 눈물을 흘렸다.

[본래 모든 감정은 홀로 짊어져야 한답니다. 삶의 무게는 누가 대신 들어 줄 수도, 덜어 줄 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폐하께서 이렇게 한 달 동안 쓰러져 계시는데도 황비 책봉식이 진행되고 있다고요?”

[며칠 남지 않았네요. 두 분의 사이가 무척 좋으시다지요. 수다스러운 시녀들이 방을 정리할 때 떠드는 내용이 들려서 무심코 전해 들었답니다.]

“폐하께서는…….”

보름 정도 그녀를 살피러 방을 오가느라 소티스와 조금 친해진 레먼은, 자연스레 그녀의 머리맡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은 채였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물었다.

“그 두 사람이 밉지도 않습니까. 에드먼드 폐하와 핀 님 말입니다.”

[에드먼드 폐하께서 핀 님께 빠져 계신 일이요?]

“소티스 폐하가 계신 것을 알면서도 에드먼드 폐하의 곁에 머무는 핀 님도 어지간하십니다.”

소티스의 방을 오가는 사이에 레먼도 멘데즈 황실의 이야기를 적당히 주워들은 바가 있었다.

에드먼드와 정부 핀이 곧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 에드먼드가 핀이 없으면 곧 죽을 것처럼 군다는 것. 그리고 핀이 에드먼드의 사랑을 등에 업고 득의양양해했다는 사실까지도.

메리골드 공작은 피니에 로즈우드가 미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잠든 소티스의 손을 잡고 일어나서 그 얄미운 핀을 어떻게든 해 달라며 하소연하기도 했다.

공작은 소티스가 쓰러진 이후로 그간 제가 저지른 잘못을 돌아보며 후회하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위신을 챙기는 것이 더 중요한 남자였다.

[밉지 않다면 거짓말일 거예요.]

소티스는 창가에 앉은 채 무릎을 모아 안고 몸을 웅크렸다. 그녀는 레먼과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더욱 투명해진 상태였다. 연보랏빛의 작은 나비들이 그녀의 머리와 어깨, 손에 매달리듯이 위태롭게 붙어 있었다.

[질투하나 봐요. 맞아요. 저는 참 속이 좁죠. 저는 핀 님이 부러워요. 저는 에드먼드 폐하께 한 번도 그런 시선을 받아 본 적이 없었는데…….]

그토록 사랑스럽다는 듯 볼 줄도 아는 남자였다. 열정적으로 사랑의 말을 속삭이고, 여인의 손을 잡으며 환하게 웃고, 귀에 대고 무어라 은근하게 속삭이기도 했다.

그녀의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소티스는 비참함으로, 질투로, 슬픔으로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어쩌면 핀이 로즈우드 후작가의 서녀가 아니었더라도 둘은 사랑했겠지. 핀의 붉은 머리카락처럼 정열적으로. 세상에 둘 말고 어떤 것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부러워요. 아무것도 없어도 매력적이라는 건 어떤 걸까. 누군가 온 힘을 다해 사랑해 준다는 건 무슨 느낌일까. 그런 건 공부한다고, 상상한다고, 공감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저는 도저히 모르겠어요. 그래서 더 부러운가 봐요. 저는…….]

그 말을 듣던 레먼의 뺨을 타고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호박색 눈동자에 어룽어룽 맺혔던 눈물은 다시 반대편 뺨을 적시고, 턱까지 흘러 처마에 맺힌 빗방울처럼 위태롭게 반짝이다가 툭 떨어져 내렸다.

“소티스 폐하도 사랑받을 수 있어요.”

[…….]

“그렇게 애쓰시지 않아도, 노력하시지 않아도 그냥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나타날 거예요.”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꼭 그런 날이 올 것처럼 들려요.]

“정말 올 거예요. 제가 증명해 보일게요. 그러니까…… 우선은 다시 눈을 뜨시는 것만 생각하세요. 이대로 사라지지 마세요. 제가…….”

레먼은 충동적으로, 그리고 간절하게 말했다.

“방법을 찾겠습니다. 그러니까 폐하께서는 부디, 온 힘을 다해서 그곳에 계셔 주세요.”

소티스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녀의 코끝에 앉아 있던 보랏빛 나비가 천천히 날갯짓했다.

그녀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희미한 미소에서, 레먼은 자신이 약간의 시간을 벌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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