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5)화 (6/121)

제5화. 황후 소티스 (5)

소티스는 영리하고 현명해서, 기어코 레먼을 떠올리고 말았다.

창가에 앉아 가물가물한 눈을 감으며 생각에 빠진 소티스는 마치 꿈을 꾸듯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건 마법사의 말대로 멘데즈에 활활 끓는 듯한 여름이 왔을 때의 일이었다. 비가 도통 오지 않아 예년보다 땅이 뜨거웠고, 흉작을 예상하며 내내 슬퍼하던 사람들이 모처럼의 국혼에 기뻐하고 반가워하던 시절이었다.

5년보다는 더 지나고, 10년은 되지 않았던 그때.

풋내기 황태자비였던 소티스는 무척 열정적이었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무엇이든 해내고 싶었고, 황태자 에드먼드가 이 결혼이 그와 황국을 위해 최선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고 싶었다.

“황태자 전하. 즉위하시기 전에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접 돌아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황후가 되면 황제와 함께 이 나라를 함께 떠받치게 된다. 어떤 분야에서는 참정권을 가지기도 했고, 황제보다 더욱 입김이 센 부분도 있었다.

물론 소티스는 에드먼드가 선택한 여인이 아니었기에 역대 황후들보다는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녀 자체가 자기주장이 썩 강한 성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황국 내의 일에 일일이 나서는 편도 아니었다.

그래도 소티스는 멘데즈 황국을 위해 한 번쯤은 나서고 싶었다. 그를 위해 정말로 치열하게 공부했다.

황실만 벗어나면 그들이 알고 겪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부유한 이와 가난한 이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극명했고, 안전의 사각지대에서는 죄 없는 사람들이 줄줄이 죽어 나갔다. 흉년과 기근, 전염병 따위가 사람들의 삶을 할퀼 때마다 황국의 곳곳에서 비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비록 소티스는 그들의 삶을 그저 학습으로만 전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슬픔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회의에 참석할 필요가 없으니, 결혼을 기념하는 의미로 황국을 돌아보며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소티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보고서마저 완벽하게 준비한 상태였다. 황국 순회 때 갈 만한 장소와 중점적으로 보아야 할 것, 각 지역의 오래된 문제나 근황 같은 것을 정리하느라 며칠간 꼬박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러나 에드먼드는 소티스가 가져온 보고서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녀를 차갑게 비웃었다.

“그렇게도 사람들 앞에서 황태자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습니까?”

“…….”

그 말에는 뾰족하게 가시가 돋아 있었고, 수십 개의 가시는 기대감에 가득했던 소티스의 마음을 무참하게 찔렀다.

“내가 허락한다면 이제 황금으로 된 귀걸이와 새 드레스를 주문하러 가겠군. 그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 줘야 할 테니까.”

명백한 모욕 앞에서 소티스는 고개를 숙이며 꿋꿋하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기운을 차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에드먼드는 소티스가 모국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모른다. 아니,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티스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소티스를 비웃거나, 그녀의 노력을 깎아내리거나, 때로는 그녀의 선택을 과시처럼 취급하며 모욕할 수도 없게 될 테니까.

소티스는 그길로 에드먼드의 집무실을 나와 아버지를 찾아갔다. 그저 자리만 보존해도 되는데 무엇 하러 이런 짓을 하냐는 잔소리 속에서 밤새도록 준비한 보고서를 내밀었다.

“회의하실 때 이 안건을 올려 주세요, 아버지. 분명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을 위한 일이에요.”

메리골드 공작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하면서도 결국 소티스의 뜻대로 했다. 소티스가 준비한 서류의 내용이 탄탄하고 황태자 부부가 민심을 진정시킬 수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메리골드 공작이 소티스의 서류를 공개하자 황제는 황태자비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참들 노력한다며 비웃기만 했다.

“소티스 님, 이런 일을 굳이 하시지 않으셔도 소티스 님께서는 이 나라의 황태자비십니다. 그러니 긁어 부스럼인 일은 하지 마시고, 제발.”

메리골드 공작은 소티스를 붙들며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게, 여러 사람을 돕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그냥…… 죽은 듯이 가만히 계세요.”

소티스가 슬픈 표정을 짓자 메리골드 공작은 아차,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공작은 자신이 썩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라며 제 언행을 손쉽게 정당화했다.

소티스는 가슴이 답답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죽은 듯이 가만히 있으라고.

한 번이라도 좋으니, 기회를 주면 안 되는 일이었을까.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어서 인형처럼 얌전히 자리나 지키라고 말하는 걸까.

왜.

“황태자비 전하. 잠깐 밖에 나가 보시겠어요?”

결국 그녀의 뜻대로 황국 순회는 나갔지만, 소티스의 답답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막사에 앉은 그녀가 주저앉아 가슴을 두드리고 있자 그 모습을 슬프게 바라보던 시녀가 다가와 얇은 외투를 내밀었다.

“……사적인 외출을 하면, 분명히 황태자 전하께서 혼내실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혼내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연회에 나가셨는걸요. 소티스 님께는 아무 관심도 없으세요.”

시녀가 거의 울먹거리듯이 이어 말했다.

“바깥에 축제가 한창이에요, 소티스 님. 소티스 님이 오셨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얼마나 기운을 내고 있는지 몰라요. 멀리 가시지 말고, 요 앞에서 조금만요. 네? 자정까지 돌아오시면 그때까지는 제가 어떻게든 둘러댈 테니까요.”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는 게 두려워요.”

소티스의 말에 시녀가 주먹을 꼭 쥐더니 자신의 짐 가방에서 옷 몇 벌을 꺼냈다.

“……제 옷을 입고 가세요, 소티스 님! 이 옷을 입으시고, 위에 얇은 후드가 달린 망토를 입으시면 사람들이 잘 알아보지 못할 거예요. 머리카락은 하나로 땋으셔서 뒤로 숨기시고요.”

“정말 그렇게 해도 될까요?”

여전히 소티스가 망설이자 시녀는 아예 옷을 소티스에게 안겨 주었다.

“당연하죠! 이때가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요, 황태자비 전하. 저는 전하를 모신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전하를 무척 존경하고 좋아해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시녀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해 주셨고, 또…….”

시녀는 소티스의 몸을 옥죄고 있던 불편한 코르셋의 끈을 풀어 주고 편하면서도 소박한 옷을 입혀 주며 종알거렸다.

“소티스 님께서는 똑똑하고 다정하세요. 저는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아요. 그러니까 전하의 노력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상처받지 마세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의 소티스에게 웃어 보이던 시녀는, 얼른 후드를 씌워 얼굴을 가려 주었다.

“아이, 참. 소티스 님.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니에요. 얼른요!”

그렇게 소티스는 처음으로 바깥세상을 바라보았다.

공작가 저택이나 황성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마을과 광장. 뜨거운 한여름 밤은 축제로 떠들썩했고,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철이 들고 나서는 한 번도 입어 보지 못했던 코르셋 없는 원피스는 발목 근처에서 아무렇게나 나부꼈고, 낮은 신발은 너무 편해서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았다. 후드 안으로는 후덥지근한 느낌이 들었지만, 찐득찐득한 공기를 식히는 시원한 바람이 불 때면 소티스는 저도 모르게 환하게 웃고 말았다.

난생처음 느끼는 자유로움이었다.

이런 거구나. 사람들은 이런 곳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었구나.

“저…… 괜찮으세요?”

그렇게 몇 시간을 정신없이 돌아다니기만 하던 소티스는 뒷골목에서 한 남자를 발견했다. 그 남자는 소티스처럼 얼굴을 거의 다 가리는 후드를 쓰고 있었는데, 겹겹이 쌓아 둔 폐상자에 힘없이 기대앉아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는 무척이나 지쳐 보였고 의기소침해 보였는데, 이따금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꾹꾹 문지르는 것을 보니 눈이 무척 아픈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한 소티스가 조심스레 다가갔다.

“뭔가……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여행자님.”

힘들고 어려운 제 국민을 그저 지나치지 못했던 황태자비는 곤란한 표정으로 그를 이리저리 살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시장에서 산 음료수를 내밀기도 했다.

“이거라도 드시겠어요? 날씨가 많이 더운데.”

“감사합니다…….”

남자는 흐릿한 눈을 비비며 소티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레먼 페리윙클이었다. 종적을 감춘 스승이 멘데즈 황국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대책 없이 이곳까지 와서 찾기 시작했다가 이곳까지 흘러왔었다.

때마침 영안이 개방되면서 지독한 안통에 시달렸던 레먼은 눈앞의 여인이 귀족들이나 쓸 법한 고상한 말투를 구사한다는 것, 그리고 목소리가 무척 다정하고 따뜻하다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구분할 수 없었다.

레먼은 목을 급히 축였다.

“저는 여행자는 아닙니다. 굳이 따지자면 떠돌이와 비슷하지요. 스승님을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이쪽으로는 오시지 않은 듯합니다. 당나귀를 사든, 짐마차를 얻어 타든 해서 수도 쪽으로 가려고 했습니다만…… 돈주머니를 도둑맞았지 뭡니까. 이래서는 수도는커녕 오늘 잘 곳조차 마땅치 않습니다. 정말 초라하지요.”

절망만이 가득한 그의 음성에 소티스는 가슴이 아팠다.

물론 그녀는 당나귀를 타 본 적도, 짐마차를 구하느라 전전긍긍해 본 적도 없었다. 돈주머니를 직접 들고 다닌 적도 없으며 평생 먹고 자는 것으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부유한 그녀에게는 남의 일이나 마찬가지였으나, 그가 가진 절망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소티스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마음을 배우기 위해 오래도록 노력한 덕분이었다.

“잠시만요.”

소티스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호한 손길로 제 얇은 망토를 고정하던 브로치를 떼어 레먼에게 건넸다.

황금으로 빚은 잎사귀 안에 들어간 에메랄드가 반짝이고 있었다.

어렴풋이 보기만 해도 무척이나 값진 물건이었다. 레먼은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브로치를 떨어뜨릴 뻔했다.

“여행 경비로 부족할까요? 그래도 오늘 저녁 잘 곳이 없어 고민하시지는 않을 거예요.”

“이, 이, 이걸 왜 제게……?”

“그건…….”

당신도 언젠가는 제가 돌봐야 할 제 황국민일 테니까요. 그렇게 대답하지 못한 소티스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녀가 황태자비라는 사실을 알려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너무 비싼 물건입니다. 저, 아가씨……. 방금 처음 만난 사이인 제게 이렇게까지 도움을 주실 필요는 없어요. 저는 음료수를 얻어 마신 것만으로도 아가씨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괜찮아요. 이게 당신에게 도움이 된다면 저는 무척 기쁠 거예요. 혹시 제게 너무 큰 도움을 얻었다고 생각하신다면…….”

소티스는 곰곰이 생각해 본 뒤 대답했다.

“제게 도움을 받은 만큼, 언젠가 힘들고 슬픈 사람들을 본다면 지나치지 말고 도와주세요. 좋은 마음을 받고 좋은 마음을 돌려준다면, 세상은 분명 더 나아질 거예요.”

그건 소티스가 바라는 멘데즈 황국의 미래이기도 했다. 메리골드 공작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만류하고, 에드먼드 황태자는 비현실적인 이상론이라며 비웃었던 그 미래.

하지만 소티스는 그들이 무어라 말하든 자신의 이상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시도조차 해 보지 않고 냉소해 봐야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그녀는 무엇이든 해낼 것이다. 손이 닿는 곳에서부터 시작한다면, 단 하나를 바꾸는 데 그치더라도 변화는 일어나리라 믿었다.

“……저, 저는,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바람이 불자 브로치가 고정하지 못한 후드가 날려 소티스의 얼굴이 드러났다. 땋아 두었던 머리는 또 언제 풀렸는지, 보랏빛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리자 소티스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빨갛게 물들었다.

혹시 알아봤으면 어쩌지.

가진 자의 오만이라며 내 선의를 비웃을까. 동정하냐며 벌컥 화를 내면 어쩌지.

정말로 이 사람이 곤경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는데.

소티스는 그 남자를 두고 황급히 도망쳐 돌아왔다. 막사에 도착할 때까지 어찌나 급히 달렸던지, 그녀는 무사히 도착하고 난 뒤에도 한동안 헉헉거리며 숨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

[당신이었구나.]

소티스는 눈을 떴다.

콩닥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이름도, 출신도 모르는 남자가 무사하기만을 걱정하던 여인은 여전히 앞에 그림처럼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소티스의 영혼이 적막 속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게 당신이었어.]

이제는 기억한다.

레먼 페리윙클, 구한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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