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황후 소티스 (4)
진주와 백합을 엮어 만든 화관과 거품처럼 부드럽고 풍성한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로 치장한 날에도 소티스의 마음은 여전히 서글프고 답답했다.
사람들은 미래를 점치는 것처럼 엄격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결혼식은 축복과 기쁨 대신 엄중하면서도 기이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황태자비는 나를 이런 식으로 가져도 괜찮습니까?”
단상 앞에 나란히 선 에드먼드는 소티스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겉으로는 마치 그녀를 염려하는 듯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눈빛은 냉혹했고, 말투에서는 약간의 경멸마저 묻어났다.
소티스는 앞을 바르게 바라본 채로 대답했다.
“저는 전하를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 평생을 들여, 제가 무슨 짓을 해도 에드먼드 황태자 전하께서 제 남자가 되어 주시지는 않겠지요.”
“잘 알고 있군.”
“저는 가질 수 없는 것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답니다, 전하. 그러니 저를 억지로 사랑해 주실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소티스가 아닌 누구도 이 자리에 서지 못한다. 소티스만큼 이 자리에 부합하는 인물은 많지 않다. 그녀는 현명하고 똑똑하며, 자신에게 허락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아도 존중은 해 주세요. 제 자리에 맞는 대우를 해 주세요. 전하께서 저를 그리 좋아하시지 않으셔도, 나라를 위해서는 그렇게 하시는 게 옳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라.”
“최고의 선택일 수는 없어도 악수가 되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그건 제 몫일 테니까요.”
소티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부케를 만지작거렸다.
“저를 좋아하시지 않는 걸 알아요. 그래도 사사로운 감정으로 무를 수 없는 혼약이라면, 이게 가장 낫습니다.”
흔들림 없는 대답은 마치 오래도록 준비한 것처럼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에드먼드는 솔직히 놀랐다. 황제에게 듣기로는 메리골드 공작이 잡은 황실의 치부가 상당히 치명적인 것이라 하였다. 심지어 그 치부가 무엇인지는 에드먼드조차 몰랐다. 그저 황제가 된 뒤에 알려 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사실 소티스가 아무리 제멋대로 나와도, 비아냥댈 수는 있을지언정 함부로 혼약을 깨뜨릴 수는 없다고 했다. 황실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그녀를 황후로 두어야 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소티스는 최소가 아닌 최선을 입에 올린다. 사랑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예우를 갖춰 달라고 말한다.
현실을 냉철할 만큼 꿰뚫고 있으나 냉소하지도, 이 상황을 이용하지도, 비아냥대지도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맞는 최선의 인물이 되기 위해 저 홀로 노력할 뿐.
그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대는 현명하군요.”
아니에요, 전하.
소티스는 속으로 대답하며 눈을 가만히 내리깔았다.
‘저는 현명하지 않아요, 전하.’
제가 정말 현명했으면,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을 거예요.
서릿발처럼 차고 심연처럼 검은 그 눈동자를 보고도 내가 더 잘해야겠다며 다짐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제게 그랬던 것처럼 당신을 미워해 버렸을 거예요.
사랑은 어렵지만 미움이 쉬운 우리 사이에서, 구태여 발을 동동거리며 당신에게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 여자가 되려고 애쓰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럼 적어도 이렇게까지 비참할 일은 없었겠지요.
소티스는 그저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부와 명예는 그녀에게 그렇게 가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황후가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고, 공작 가문의 위신을 세우는 데도 썩 관심 없었다.
“그렇게 느끼신다니 다행입니다.”
사실은 나라를 위한 맹세가 아니라 사랑의 속삭임을 주고받고 싶었다. 차갑고 경멸 어린 무표정이 아니라 조금 더 따뜻한, 그게 아니더라도 이보다는 조금 더 신뢰가 담긴 미소를 보고 싶었다.
사람들이 자신이 못하는 일이 아닌 잘하는 일에 집중해 주길 바랐다. 힐난하는 게 아니라 응원해 주기를 바랐다.
수백 수천 명의 사랑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한 명이면 되었다. 거센 바람에 넘어졌을 때,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라도…….
왜 그 모든 게 자신에게는 과분하고, 비현실적이고, 분수에 맞지 않은 것일까.
“그대가 분수를 아는 황후로 남기를 바라오.”
에드먼드의 말에 소티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끝없이 치미는 설움을 참는 것만으로도 힘겨워서, 그의 말에 어떤 대답도 돌려줄 수 없었다.
***
“그래서 에드먼드 폐하가 정부들을 양팔에 끼고 거느리는 꼴을 그저 두고만 보셨다고요?”
소티스는 입가를 소매로 가리고 작게 웃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얼른 달려들어 그분들의 머리채라도 잡아 끌어낼까요? 그랬더라면 제 육신은 이렇게 황후궁에 편히 누워 있는 게 아니라 차가운 지하 감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졌을 거랍니다.]
“당연히 그러셨어야지요. 베아툼 왕국에서는 결혼한 이가 부정을 저지르면 가진 것을 모두 빼앗고 날달걀과 무른 토마토를 던지며 모욕합니다. 정부라니요? 저는 멘데즈의 귀족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제 이야기를 느리게 말해 주다 숨을 고르던 소티스는 레먼의 대답에 눈을 반짝였다.
[귀족에게도 그렇게 하나요? 공개적으로 모욕하다니, 너무 과한 처사 같은데…….]
“베아툼에는 귀족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습니다. 국민들을 대표하는 몇몇 이들이 왕실의 일을 도우며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 갈지 의논하지요. 그러니 누구도 나라를 다스릴 수 있고, 잘못을 저지르면 쉽게 끌려 나옵니다. ……과하다니요.”
침대가 있는 쪽으로 의자를 조금 더 당겨 앉은 레먼이 정중하면서도 어딘가 불만스러운 음성으로 덧붙였다.
“그간 속을 끓이던 상대를 생각하면 조금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부정에 시달리던 이들의 마음은 매일 불로 달구어 두드리는 쇠붙이처럼 끓고, 얼어붙은 호수 한중간에 갑작스레 빠지는 것처럼 지독하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 죄를 다 갚으려면 달걀을 천 개씩 던져도 한참 모자랍니다.”
늘 침착하던 레먼이 열을 내자 소티스가 결국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를 만류하며 손을 느리게 젓자 소티스의 손길에 반응하는 보랏빛 나비들이 다가와 그녀의 손끝에, 어깨에, 그리고 무릎 위에 사뿐사뿐 내려앉았다.
[그분께서는 황태자 시절부터 정부들을 두셨지만, 그래도 그로 인해 제가 곤란해질 만한 상황은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황비 이야기를 꺼내시지도 않으셨고, 다른 분을 이용하여 메리골드 공작가를 정치적으로 압박하지도 않으셨지요. 후계자는 반드시 저를 통해 낳으시겠다고 약속도 하셨답니다.]
레먼은 여전히 꽁한 시선으로 소티스를 바라보았다.
소티스의 희고 맑은 얼굴에는 미소가 무척 잘 어울렸지만, 그녀는 내내 한 번도 편히 웃지 못했다. 쓰게 웃거나, 체념한 듯 웃거나, 피로하게 웃거나, 그도 아니라면 죄스럽다는 듯이 웃고는 했다.
대체 소티스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다고.
[물론 이제는 시간문제에 불과하지만요.]
그 말은 곧 황제가 정부들을 들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소티스를 곤란하게 할 것이며, 후궁을 들이고, 메리골드 공작가에게 정치적으로 앙갚음을 하겠지. 어쩌면 결혼 후에도 내내 아이를 가지지 않은 소티스를 대신할 다른 여자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황제는 황후에게 그 어떤 약속도 지키지 않았고, 황후는 황제에게 했던 그 모든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숨이 턱 막힐 만큼 불공평한 관계였다.
“폐하.”
[괜찮아요. 저는 혼자 참는 것에 익숙하답니다. 잘 해낸다고는, 농담으로도 말하지 못하겠지만…….]
그녀가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려 습관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도 당신과 이야기를 하니 조금 나아요, 레먼.]
“도움이 되었다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한 번에 다 이야기하기에는 길답니다. 말하다 보면 지치기도 하고…….]
레먼은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그리고 간절하게 물었다.
“제가 폐하를 또 살피러 와도 괜찮을까요?”
[그래 주시겠어요?]
“허락만 하신다면, 폐하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려주시길 청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한 것은 처음이라, 두서없겠지만…….]
소티스의 얼굴에 유약하면서도 다정한, 유리잔처럼 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하지요. 종종 들러 주세요. 마법사님, 당신은 어쩐지…… 처음 보는데도 낯익은 기분이 들어요. 꼭 어딘가에서 만난 적이 있는 것처럼요. 아, 그러니까. 그게…… 반갑고 편안하다는 뜻입니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려던 레먼은 충동적으로 말했다.
“저는 폐하를 뵌 적이 있어요. 황성 바깥에서요.”
소티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는 황성 밖으로 사사로이 외출한 적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레먼은 고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폐하께서 황후가 아닌 황태자비셨을 때의 일이었어요. 사람들은 폐하를 폐하라 부르지 않고, 소티스 님이라고 불렀지요. 혹은 소티스 황태자비 전하라고 부르거나요. 결혼식을 하신 뒤 얼마 되지 않은 한여름의 일이었어요.”
[…….]
마법사는 망설이면서도 이내 천천히 이어 말했다.
“처음으로 도착해서 본 멘데즈 황국은 마침 열린 여름 축제로 떠들썩했어요. 비가 한동안 내리지 않아 밤이 깊어도 땅은 뜨거웠고, 사람들은 새로 즉위한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 기대하며 떠들썩했어요.”
[그런 때가 있었지요. 그래도…….]
“저는 그곳에서 당신을 뵈었습니다.”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소티스는 여전히 레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고개를 기울인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착각했을지도 몰라요, 레먼.]
“착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단언했다.
레먼은 이내 두 사람이 만난 일이 그만의 추억이라는 것을 깨닫고 조금 의기소침해졌으나, 이내 작은 희망을 지닌 채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가 아는, 그가 기억하는, 그리고 세상이 말하는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는 현명하면서도 똑똑한 이였다. 그녀는 살뜰했으며 기억력이 좋아 무슨 일이든 꼼꼼하게 처리한다고 했다.
그러니 조금만 노력한다면, 레먼 페리윙클을 다시 기억해 줄지도 몰랐다.
“폐하. 다음에 만나러 오기 전까지 저를 기억해 주세요.”
[저희가 어떤 대화를 했는지, 제게 단서라도 알려 주고 가셔야지요.]
“음…….”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그녀를 다시 만난다면 무슨 말이든 하려고 연습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말해 보아도 궁색해 보였다. 뭐든 사족처럼 느껴지고 어색하기만 해서, 숱한 문장을 고르고 쳐 낸 레먼에게 남은 문장은…….
“당신께서 저를 구해 주셨어요.”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
활짝 열린 창 너머에서 바람이 흘러들어 와 여인의 숄처럼 얇은 커튼을, 그림처럼 잠든 황후의 라벤더빛 머리카락을, 그리고 길게 내려 묶은 마법사의 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지나갔다.
[생각해 볼게요.]
소티스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요. 후일에 답을 들으러 다시 오시겠어요?]
레먼이 그녀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모두 폐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