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3)화 (4/121)

제3화. 황후 소티스 (3)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는 황후가 되기 위해 태어난 아이였다.

메리골드 공작 부부는 소티스가 태어났을 때 날 듯이 기뻐했는데, 바로 이 아이야말로 가세가 기울어 몰락해 가는 공작 가문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잘 선택해야 해요. 우리가 이름뿐인 귀족으로 목숨을 부지하다가 역사 속의 먼지로 사라져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앞으로 놓을 한 수가 정말 중요하단 말입니다, 부인. 이 가문을 위해서 뭐든지 해야만 해요.”

그 시절, 유서 깊은 공작 가문이었던 메리골드 가문은 흥망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 길은 사실 내리막길에 더 가까웠다.

메리골드 공작가에는 대대로 이어지는 영지도, 그럴싸한 군사력도 없었다. 가문의 일원이 황실에 나가 정치를 돕는 것으로 그 명망을 겨우 이어 오던 집안이었다. 그러나 몇 대쯤 지나도 괜찮은 인재가 나오지 않았고, 역사는 오래되었으나 쓸모없는 가문 정도로 취급된 것이 근 10년이 넘은 일이었다.

이대로라면 가장 하잘것없는 방식으로 세상에서 잊히리라.

공작은 귀족이 되겠다는 목적 하나만으로 공작가의 외동딸이었던 부인과 결혼하여 메리골드 가문의 일원이 된 이였다. 그러니 이렇게 다시 평민 신세로, 아니, 평민만도 못한 신세로 돌아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도 공작은 평민 시절 정보상으로 이름을 제법 날리던 이였다. 그의 손에는 웬만한 고위 귀족들의 치부와, 더 나아가 현 황제의 치부마저도 쥐어져 있었다.

손아귀에 있는 패를 십분 활용한다면, 가문의 부흥을 꿈꾸지 못할 것도 없었다. 밑져야 본전이겠지. 메리골드 공작은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했다.

“겁도 없이 나와 황후의 치부를 이유로 들어 나를 협박하는 것인가?”

“협박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이는 거래일 뿐이지요.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폐하. 앞으로 태어날 저희 아이를 황실의 일원으로 받아 주십시오.”

당시 황제에게는 아들뿐이었기에, 공작가에서도 아들을 낳는다면 혼약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메리골드 공작가에 장남이 태어난 것을 알게 된다면 황후는 절대로 둘째를 낳지 않으려고 하겠지.

메리골드 공작 부부는 가까스로 가진 아이가 딸이기를 세상의 모든 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그 딸만이 두 사람의 앞날을 바꿀 유일한 열쇠였으니까.

그리고 신은 공작 부부의 손을 들어 주었다.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는 공작 가문을 위해 황가에 팔려 갈 아이였다.

***

태어날 때부터 약혼자가 있다는 건 이상하면서도 낭만적인 일이었다.

소티스는 훌륭한 황태자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자신과 결혼할 이는 장차 멘데즈 황국을 다스릴 하나뿐인 황제가 될 것이며, 자신이 바로 이 나라의 안주인이 될 거라고.

“네가 우리 가문의 미래를 통째로 바꾸었단다. 넌 정말 대단한 아이야.”

그럴 때마다 소티스는 말하고 싶었다. 어머님, 저는 그냥 태어났을 뿐인걸요. 아버님, 저는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구하는 사람인가요? 하지만 그렇다기에 어머님과 아버님의 눈길은 차가운걸요.

그러나 그렇게 물으면 필시 주제넘은 질문이라며 호되게 꾸짖으시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소티스는 침묵했다. 공작 부부는 그녀에게 친절한 것 같으면서도 따스하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바라는 것이 엄격하리만큼 확고히 정해져 있었으며, 그 틀 밖으로 발끝 하나라도 내미는 순간 무시무시하고 싸늘한 시선으로 소티스를 바라보곤 했다.

‘나를 훌륭한 어른으로 키우기 위해서겠지.’

소티스는 그 한 문장으로 공작 부부의 모든 행동과 말을 이해했다. 사랑에는 여러 형태가 있으며, 공작 부부가 소티스를 위해 마련한 사랑도 그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서운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소티스는 꾹 참았다. 참을 만하다는 게 다행인 일이었다. 적어도 소티스는 굶지 않아도 괜찮았다. 게다가 초라한 옷을 입거나 바깥을 나다니며 심부름감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세상에는 그런 아이들이 수도 없이 많다고 했다.

남의 불행으로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는 건 비겁한 일이지만, 소티스는 그렇게나마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기로 했다.

훌륭한 사람이 되면 부모님도 다정해지시겠지.

언젠가는 충분하다며 안아 주시겠지.

소티스는 밤마다 늘 그 소망을 품에 안고 잠들었다.

***

약속된 황태자비 자리가 어떤 의미인지 알았던 때가 언제였더라.

아마도 황성에서 저를 보며 수군거리는 시녀들의 말을 몰래 들었던 날이었을 거라고 소티스는 추측했다.

“저분이 황태자비가 되실 분이라지…….”

“아버지가 정보상이었다며? 소문으로는 메리골드 공작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은 귀족이 없다나 봐.”

“어머. 그럼 약점을 잡아서 딸을 황실에 판 거야? 그래서 황후 후보도 뽑지 않는 거고?”

“쉿! 영애가 듣겠어!”

처음에는 이따금 저를 향하던 사람들의 냉담한 시선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 몰라 불안하고 찜찜하던 것이, 그 이유를 알게 된 순간 눈 녹듯 스르르 사라졌다.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가문의 미래를 바꾼 아이라며, 메리골드의 희망이라며 추켜세웠구나.

그래서 훌륭한 어른으로 자라라고 했구나.

본래 황태자비는 가장 자질이 뛰어난 귀족 가문 영애를 추려 후보 다섯 명을 뽑고, 황후가 그중 세 명을 다시 뽑은 뒤 황태자가 가장 좋아하는 마지막 한 명을 골라 정한다고 하였다.

그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소티스가 황태자비로 결정되었으니, 뭇 귀족 영애들이 그녀를 싫어하고 시종과 시녀들이 흠잡는 것이 당연했다.

자격이 있었으나 명예는 없는 자리.

소티스가 올라서야 하는 곳은 바로 그런 위치였다.

“언니, 황태자비가 되기 싫으면 나한테 얼른 양보해. 아버지가 매일 나더러 가문도 잇지 못하는 딸은 쓸모가 없다고 하신단 말이야. 언니가 황태자비로 정해지는 바람에 나까지 영애들의 미움을 샀어. 어차피 그럴 거라면, 황후라도 될래. 그러니까 마음에도 없으면 이리 내란 말이야. 아들이 아니라고 한숨을 푹푹 쉬며 날 쳐다보는 아버님의 얼굴도 이젠 지긋지긋해!”

소티스가 고민하거나 우울함을 느낄 때마다 여동생 셰릴은 벼락같이 화를 내곤 했다. 자신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는 게 소티스의 잘못인 것처럼 외칠 때마다 그녀는 항변하고 싶었다.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내가 그런 게 아닌데…….

하지만 내가 없었다면 황태자비가 되는 건 내가 아니라 셰릴, 너였겠지.

셰릴의 말은 어쩌면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티스는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을 황태자비로 만들겠다는 메리골드 공작의 의지는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고, 셰릴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결혼이라는 이름 아래 언제 어디로 팔려 갈지 모르는 운명에 떨거나 소티스에게 짜증을 내는 일이 전부일 테니까.

이 정도를 들어 주는 것은 앞으로 셰릴이 겪을 노고와 비교하자면 아무것도 아니다.

소티스는 그래서 셰릴이 무어라 악다구니를 쏟아 낼 때면, 씁쓸하게 웃는 얼굴로 잠자코 들어 주곤 했다.

“정상적으로 황태자비를 뽑았다면 메리골드 공작은 명함도 못 내밀었을 거예요.”

“당연하죠. 그 또래에 쟁쟁한 영애들이 어디 한둘인가요? 변경백의 외동딸이나 트리셔 백작 가문의 막내딸도 있죠. 로샤나크 자작 가문은 또 어떻고요? 다들 어마어마한 미인인 데다가 능력도 출중하다고요.”

황성에도, 저택 안에도 소티스의 흠을 잡기 위해 눈이 벌게진 사람들만 있었다. 소티스가 작은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저런 인물이 어떻게 황태자비가 되겠냐며 신난 얼굴로 떠들어 댔고, 무안 주기 위해 그녀를 속이거나 은근히 모욕적인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너만 믿는다, 소티스.”

“……예, 아버님. 메리골드 가문의 명성에 절대로 누를 끼치지 않을게요.”

여기서 끌어내려진다면 그때는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세상 모두가 저를 비웃을 것이고, 제가 얼마나 부족하고 가당찮은 존재였는지 떠들고 싶어 안달을 내겠지.

소티스는 온 힘을 다해 반듯하게 자랐다.

소티스는 똑똑해야 하고 현명해야 했으며 누구도 흠잡을 수 없을 만큼 반듯해야만 했다. 그건 마치 외나무다리를 비틀거리며 홀로 걷는 일과 같았지만, 소티스는 발아래 펼쳐진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추락하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물고 견뎌 냈다.

다행히도 그녀는 명석하고 현명했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으나 웬만한 것은 또래의 누구보다 빠르게 배웠고 행동이 신중했으며 기품이 배어 있었다. 고운 외모에 다정한 성격으로 누구와도 갈등을 빚지 않았고, 종종 황실 안팎의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공을 세우기까지 했다.

황실에서도 이미 약속된 혼약을 무를 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고,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소티스를 황태자비로 만들었다.

“열흘 뒤 황태자비 즉위식이 있을 것입니다. 약혼식이라고 생각하셔도 되겠군요. 소티스 님, 궁금하신 것은 없습니까?”

“저…….”

소티스는 한참 고민하다가 어렵게 대답했다.

“에드먼드 전하를 한 번만이라도 먼저 뵙고 싶어요.”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졌던 혼약인데도 황태자는 한 번도 소티스를 보러 오지 않았다. 소티스가 알현을 청할 때도 늘 수업이 있어서, 연회에 참석하느라, 사냥을 떠나서 바쁘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장차 황제가 될 분이시니 바쁠 수밖에 없지, 이해하면서도 얼굴도 모르는 이와 약혼식을 올리는 것이 외로웠다.

더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황태자는 약혼식 열흘 전, 소티스의 알현을 허락했다.

“소티스 메리골드입니다. 황태자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그때 소티스의 피로함과 외로움은 극에 달해 있었다. 필사적으로 애썼으나 누구도 그녀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았다. 잘한 것은 당연한 일로 취급되고, 못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중죄인 것처럼 타박하는 현실이 너무 외롭고 서글퍼 매일매일 모든 것을 그만두고 도망치는 삶을 꿈꾸었다.

그러나 자유를 꿈꾸면서도 한 번도 나가 보지 못한 새장 밖의 삶이 너무도 두려워 실제로 그렇게 해내지도 못했다.

이 고단함에도 끝이 있을까. 이 외로움에서도 나갈 방법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어 황태자를 보았을 때였다.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다.”

그 얼굴을 보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표백되며 단 하나의 생각만이 떠올랐었다.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꿋꿋이 견뎌 이곳까지 와서 정말 잘됐다고. 정말 장하다고. 누구도 알아주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게 절망과 슬픔만은 아닐 거라고.

첫눈에 반한다는 게 그런 것일까.

황금색 머리카락은 태양을 녹여 가닥가닥 빚어낸 것 같았고, 새카만 검은 눈동자는 별도 달도 뜨지 않은 밤하늘 같았다. 날카로울 정도로 또렷하게 떨어지는 이목구비와 차가우면서도 단단한 분위기.

아무도 쉽게 얕볼 수 없고, 누구도 함부로 꺾을 수 없을 것 같은 이는 마치 황제가 되기 위해 만들어진 사람처럼 보였다.

“……멘데즈 황국을 위해 최선을 다할게요.”

에드먼드의 마음이 저와 다르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타인의 눈동자에 깃든 감정을 마냥 모르기에는 그녀는 너무 철이 빨리 들었다.

황태자와 처음 눈이 마주칠 때부터 알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얼마나 차가운지, 그가 얼마나 엄격하게 자신의 흠을 찾고 있었는지도. 그리고 소티스에게서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어떤 결점을 발견하지 못해 내심 아쉬워했다는 사실마저도.

그래도 괜찮았다. 에드먼드는 결국 소티스를 거절하지 못했으니까. 예정했던 대로 약혼식은 진행될 것이며, 에드먼드는 소티스를 황태자비로 맞이할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혼약이었으니 싫어할 만도 했다.

소티스는 그를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내가 잘하면 괜찮겠지.

황실을 위해, 황국을 위해 똑똑하고 현명한 여인이 되어 이 나라를 고요히 떠받치고 돌본다면 에드먼드도 자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

가치 있는 자신을 언젠가는 따뜻하게 바라봐 줄 날도 오겠지.

안일할 정도로 다정한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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