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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1)화 (2/121)

제1화. 황후 소티스 (1)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는 어떤 꿈을 꾸고 있었다.

뜻 모를 장면들은 너무도 환하게 반짝여서 처음에는 어떤 환상이나 착각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녀는 후덥지근한 여름의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었다. 채 식지 않은 땅에서는 뜨끈한 지열이 올라왔고,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때면 어디선가 날아온 한 줄기의 바람이 그것을 부드럽게 훔쳐 갔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오가는 광장 곳곳에는 반짝이는 작은 등이 걸려 있었고, 주홍색 불빛이 지상으로 내려온 별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사람들은 한여름 밤의 축제를 누리기 위해 모여들었고, 그 틈바구니에 존재하던 소티스는 그들의 활기에 취한 것처럼 살짝 비틀거렸다.

그건 기억이었을까, 아니면 소망이었을까. 기억이라면 너무 오래전의 것이고, 소망이라면 너무도 막연한 장면이었다.

소티스는 홀린 듯 걸어갔다. 머리카락과 치맛자락이 나부낄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게 왜 이상한지, 어떻게 이상한지 그녀조차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다른 이도 아닌 본인에게 일어나는 일인데도. 제가 보고, 듣고, 겪고, 느끼는 모든 일임에도.

그리고 소티스는 보았다.

그건 한 남자였다. 아니, 한 눈동자였다. 다시 남자였다. 그리고 다시 눈동자였다. 그녀는 그 남자의 얼굴을 먼저 보았는지, 눈을 먼저 보았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기이할 만큼 반짝이는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소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어나 그런 눈을 본 일이 없었다. 기이할 정도로 반짝이는 눈은 사람의 눈동자라기보다는 오랜 시간 동안 깎고 빚어 만든 귀한 보석처럼 보였다.

마치 사람의 것이 아닌 듯한 눈은 자신을 기묘하게 빨아들이는 듯하여, 소티스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당신은 누군가요? 그녀는 그렇게 묻고 싶었다. 당신은 왜 저를 보고 있나요?

분명히 당신을 처음 보는데, 왜 저는 당신에게서 익숙한 느낌을 받는 건가요?

그러나 그 남자에게 말을 건네려던 순간, 주변이 바뀌었다.

그곳은 해가 뜨고 지는 것이 훤히 보일 만큼 너른 벌판이었다. 하늘은 온화한 주홍빛으로 가득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웃자란 풀들이 한쪽으로 넘어지며 파도처럼 출렁였다.

소티스는 먼발치에 보이는 높직한 탑을 올려다보려 고개를 들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

그건 정말로 이상한 감각이었다. 긴 머리카락도, 손발도 없이 허공에 부유하는 감각이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등 뒤에 달린 얇은 것이 연약하게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나비가 되어 있었다. 연보랏빛의 부드러운 날개가 연신 날갯짓하며 소티스를 허공에 띄우고 있었다.

꿈이라서 그런 걸까. 원래 꿈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법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 모든 게, 독특하면서도 멋진 경험처럼 느껴졌다. 자유로운 기분에 살짝 미소 지을 수도 있는 만큼.

그렇게 허공을 얼마나 떠다녔을까?

그리고 누군가 소티스를 불렀다. 담담하면서도 정중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날아들었다.

“이리 오세요.”

소티스는 그 목소리에 자연스레 이끌리는 자신을 느꼈다. 왜였을까. 그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다정해서,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곳에는 그녀가 그토록 오래도록 사랑하여 외면하지 못했던 무심함도, 무감함도, 권위와 단호함도, 고귀함이나 냉철함도 없었다.

그저 다정하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포근하여…….

일몰하는 태양을, 그 찰나의 따스함을 온몸으로 만끽하는 기분이었다.

그건 정말로 무엇이었을까. 소티스는 긴 꿈 안에서 생각했다.

그건 어느새 잊어버린 과거였을까? 미래였을까? 아니라면 자신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간절한 욕망이었을까?

그 모든 것을 또렷하게 구분하기 전, 소티스는 까마득한 무의식 안으로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다.

깊은, 정말로 깊은 잠이었다.

***

“어떤 징조가 있었냐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지요…….”

나이 지긋한 남자는 말끝을 흐리며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눈가를 툭툭 두드리는 손길은 마치 눈물을 닦으려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저 습관적인 행동이었을 뿐 실제로 눈물이 묻어나지는 않았다.

그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던 청년이 물었다.

“그렇게 된 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메리골드 공작님. 그러니까…… 황후께서 쓰러진 것 말입니다.”

“한 달쯤 되었습니다. 처음 사흘은 정신을 못 차렸지요. 이게 꿈인가 싶었습니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머리에 내리꽂히는 게 이런 기분일까요. 그러다 일주일이 되었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메리골드 공작은 과거를 떠올리며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다시 손수건으로 자신의 마른 얼굴을 훔쳤다. 청년은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공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공작의 넋두리가 이어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잠든 딸아이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데,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른답니다. 어떤 원인도 없이 그저 이렇게 천천히 시들어 가고 있다는 겁니다. 뒤늦게 뭐든 알아보려 하는데…… 아이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지 뭡니까.”

“황후께서 평소 앓으셨던 지병은요?”

“평소 몸이 약했으나 지병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사실 이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있었는데 몰랐을지도요……. 이미 황국 내에서 내로라하는 의사들은 한 번씩 불러 봤습니다만, 다들 모르겠다며 고개만 저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참고하지요.”

“마법사님께서는 저희 멘데즈 황국에 귀빈으로 오셨다고 했지요. 여독을 다 풀지도 못하셨을 텐데, 이렇게 간청드려서 죄송할 뿐입니다. 부디 잠시만이라도 상태를 살펴 주신다면 이 은혜는 평생 기억하겠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공작이 청년을 인도하듯이 황궁의 긴 복도를 따라 앞서 나갔다. 시종들은 이국적인 외모와 흔치 않은 금색 눈동자를 가진 청년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다가도, 공작이 누군가를 대동하고 이곳을 거니는 것에 익숙했는지 이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제 일을 하러 떠났다.

마법사는 자신을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간절하게 대하는 공작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멘데즈 황성에 들어온 지 고작 이틀. 먼 거리를 달려온 탓에 해묵은 피로가 어깨를 누르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할 만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멘데즈 황국의 하나뿐인 황후이자 메리골드 공작의 맏딸,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라면 청년도 듣고 본 적이 있는 여인이었다.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땋아 내린, 단정하고 온화한 미인.

그녀는 현 황제가 황태자였을 시절부터 혼약으로 묶인 관계였으며 똑똑하고 자비로워 뭇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고 했다. 단점이라고는 몸이 약해서 후사를 잇기 어려웠다는 점과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었을까.

마법사는 북궁의 가장 안쪽 방 앞에서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사이 메리골드 공작은 문을 몇 차례 정중하게 두드리더니 “들어가겠습니다, 황후 폐하.” 하고 인사를 남겼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아니, 어쩌면 혹시라도 대답이 돌아오기만을 바라며 그렇게 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공작의 주름진 손이 문고리를 조심스레 열어 돌렸다.

“…….”

새하얀 침대에는 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시녀들이 한 차례 다녀간 모양인지 곱게 빗어 땋아 내린 라벤더색 머리카락에는 작은 꽃이 꽂혀 있었고, 몸 위에 단정하게 포개진 손에는 하얀 장미 몇 송이가 쥐어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평온한 무표정이 떠올라 있었는데, 꿈이라도 꾸는 건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어 더욱 슬퍼 보이는 느낌이 묻어났다.

“이쪽입니다, 레먼 님.”

마법사, 레먼 페리윙클의 시선이 잠든 황후에게 잠시 머물렀다. 너무나도 고요하고 잠잠해 보여서, 마치 손님이 온 것을 미처 모르고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 인사하면 일어날 것 같은데.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긴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부드럽게 빗어 내리고, 몇 송이의 장미꽃이 덧없이 시드는 것이 아깝다며 시녀를 불러다 예쁜 화병을 가져오라 부탁할 것만 같았다.

그림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하고, 살아 있다기에는 지독하게 고요한 여인.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

여기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있는 것 같지 않은 기이한 존재.

레먼은 그 여인을 바라보다가 문득 느껴지는 바람에 고개를 돌렸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미풍이 저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레먼 님?”

본궁이 있는 남쪽으로 난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초봄의 쌀쌀한 바람이 그 너머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환한 금빛으로 반짝이는 햇살이 반투명한 커튼에 촘촘히 스며들듯이 내리쬐고, 연한 보랏빛 머리카락을 반쯤 투과하여 레먼의 뺨과 머리카락으로 사뿐사뿐 내려앉았다.

연한 보랏빛 머리카락.

희고 온화한 얼굴.

그리고, 손에 쥔 몇 송이의 새하얀 장미꽃.

한 여인이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방금까지 레먼이 가만히 서서 내려다보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레먼은 창가에 걸터앉은 소티스를 충격받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수줍은 듯, 무안한 듯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고 있었다.

짧은 침묵 후에 소티스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마법사님.]

마법사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본능적으로 차오른 먹먹한 감정을 애써 갈무리하며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하여 황후의 영혼이 그에게 가만히, 그리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제 모습이 보이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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