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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0)화 (1/121)

Prologue.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는 어떤 남자를 아주 오래도록, 그리고 무척 열심히 사랑했다.

그녀가 보기에 그 남자는 신이 공들여 깎아 만든 조각상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한낮의 햇빛을 모아 실로 자아낸 듯 화사한 금색 머리카락은 언제나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검은 눈동자는 저물지 않는 밤처럼 깊고 짙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무심하고 무감한 표정조차도 권위적이고 단호해 보였다.

소티스는 자신의 남편이자 멘데즈 황국의 황제가 될 남자,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를 보고 생각했다.

저 남자가 환하게 웃어 준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그녀의 사랑은 그 남자가 미소 짓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왜 그렇게 빤히 봅니까?”

그러나 그 남자는 녹지 않는 설산의 봉우리처럼 차갑기만 했다.

“그렇게 쳐다볼 것 없습니다. 이곳은 메리골드 공작저가 아니거든. 그대가 그렇게 눈총을 준다고 해도 그대 마음대로 될 수 있는 곳이 아니오.”

소티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에드먼드는 언제나 백 마디의 힐난과 천 마디의 투정을 들은 사람처럼 지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그렇게 우아하게 앉아 있기만 해도 다 이룰 것 아니오? 경합도 없이 황후 자리를 거머쥐었으니, 세상에 그대가 못 가질 것이 있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소티스는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리다가, 이내 꾹 다물며 눈을 내리깔았다.

있어요.

당신이 한 번만이라도 제게 환히 웃어 주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한 번이라도 제 이름을 따뜻하게 부르고, 지겨워 죽겠다는 듯 바라보는 게 아니라 반갑고 기꺼워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소티스는 하고 싶던 어떤 말조차도 꺼내지 못한 채, 조그맣게 대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내일 북동부의 세톤느 왕국에서 사절단이 도착한다고 해요, 폐하. 사절 대표로는 세톤느 제4 왕자가 올 테고, 멘데즈에는 처음으로 오는 것이니 예년보다 훨씬 더 신경을 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에드먼드가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멘데즈는 세톤느를 오랜 친우처럼 대했소. 환대에 고맙다는 친서를 받으면 받았지, 부족하다고는 느낀 적이 없는데 뜬금없이 왜 그런 말을 합니까?”

“듣기로는 세톤느 제4 왕자가 혼처를 찾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멘데즈 황국과 혼약을 통해 국가 간의 우애를 다지고자 한다고 해요.”

소티스는 담담하게 대답하며 에드먼드의 검은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황후의 말은 한 치의 틀림 없는 사실이었다. 정보를 대하는 데 능숙한 그녀의 아버지, 메리골드 공작이 확신하는 정보였다.

광산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제4 왕자는 발밑에 수없이 많은 돈과 보석을 거느리고 있었다. 메리골드 공작은 그 부유함을 혼약을 통해 끌어오지 못했음을 원통하게 여길 정도였다. 공작에게 딸이라고는 둘뿐이었는데, 첫째인 소티스는 황후로 만들었으며 둘째는 멘데즈에서 가장 큰 상단의 상단주와 결혼시켰기 때문이었다.

“멘데즈 황실의 친인척이 될 수도 있는 이의 앞에서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어색하다는 것을 부러 보여 주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일은…….”

아쉬운 말을 할 때마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손끝이 저린 기분이 들었다. 소티스는 숨을 짧게 삼키고는 얼른 말해 버렸다.

“……사절단을 맞이하는 자리에 저를 데려가 주세요, 폐하.”

다분히 용기를 담은 제안이었으나, 실은 이렇게 간청하듯 말하는 것조차도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황제는 황후와 동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두 사람의 마음이 어떻든 그들은 황국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였고, 황후는 단순히 황제의 부인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나라의 대소사를 함께 돌보는 황실의 안주인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를 정당한 사유 없이 배제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처사임과 동시에 황실의 일원이 결혼 생활에 불성실하다는 오명을 씌우기에 좋은 태도였다.

그러나 에드먼드는 썩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거절했다.

“싫습니다.”

“……폐하. 이건 사적인 감정으로 결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소티스의 물빛 눈동자가 에드먼드를 간절하게 올려다보았으나 황제는 코웃음조차 치지 않았다.

“세톤느의 왕자들은 내 오랜 친우이기도 합니다. 어차피 내가 그대에게 한 조각의 마음도 없고, 그대도 내가 아니라 그 부귀와 명성을 위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지. 그러니 관객도 없는 연극을 할 이유가 있겠소? 누굴 위해서? 그대의 허영심?”

단어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가시처럼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황후는 몸도 약하지 않습니까. 며칠 전에는 별일도 없이 황후궁에서 쓰러졌다지. 그러니 내일은 무리하지 말고 푹 쉬시오.”

소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길을 지나가는 귀족들이 중앙 본궁에 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러는 대화를 들었는지 부채로 입을 가리고 키득거리기도 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녀는 어디로든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폐하의 뜻대로 하십시오.”

더는 무안을 당하고 싶지 않았던 소티스는 에드먼드를 설득하는 일을 포기했다.

그래, 그런 식이었다.

아름답지만 차갑고, 권위적이면서도 잔인한 그 남자는 언제나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일이 없었다.

그건 지긋지긋할 정도의 냉대였다. 쌀쌀맞은 무표정은 물론이고, 애를 쓰는 일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것으로도 모자라 걸핏하면 남들 앞에서 무안을 주곤 했다. 마치 이래도 화를 내지 않겠냐며 소티스를 시험하듯이.

그대는 자존심도 없습니까? 그렇게 묻는 듯한 시선 앞에서 소티스는 한없이 작아지기만 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은 나를 한순간도 좋아해 주지 않는구나.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는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를 사랑했다.

그리고 에드먼드 레 세턴 멘데즈는, 소티스 메리골드 멘데즈를 미워했다.

***

그날따라 낮의 일이 자꾸만 어른거리며 아쉽게 느껴져 의아했는데, 호되게 앓으려던 전조였던 듯했다.

그것도 모르고 소티스는 해가 질 무렵부터 줄곧 분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톤느의 사절단을 맞이하러 가는 자리에는 동행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황성에 손님을 맞이하고 대접하는 일은 황후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고, 다른 이도 아닌 왕족의 방문에는 다른 때보다도 몇 곱절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친밀한 모습을 자랑하거나 황후라는 자리를 과시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소티스는 제게 그런 사치가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을 지겹도록 잘 알고 있었다.

다정할 필요는 없지만, 격식에 맞게 행동해 달라고 부탁해야지. 에드먼드는 적어도 황실의 체면을 지킬 줄은 아는 사람이니까. 그녀는 그런 말로 자신을 다독이며 시녀들에게 희고 수수한 드레스를 꺼내 오라 일렀다.

새벽빛만큼 푸르면서도 붉은 기운이 함께 도는 머리카락은 느슨하게 땋았고, 부분 부분에 생화를 장식했다. 남은 꽃은 단정히 엮어 작은 꽃다발을 만들기도 했다.

채비를 마친 소티스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황후궁을 나섰다.

어쩌면 기대했을지도 몰랐다. 오늘은 다른 날과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고. 황제의 처소에, 그것도 깊은 밤에 먼저 찾아가는 것은 처음이니까.

크게 반가워하지 않아도 좋으니 한 번쯤은 놀라워했으면, 이 정성이나마 갸륵하게 여겨 준다면. 그래서 내일 동행하는 것 정도는 마지못해서라도 수락해 준다면…….

“소티스 폐하?”

침실 근처에 다다른 소티스를 발견한 시종은 눈을 크게 떴다. 얼굴에 나타난 것은 반가움이나 놀람보다는 당혹스러움, 그리고 곤란함에 더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소티스는 몇 초 안에 깨닫고 말았다.

“폐하…….”

“그렇게 불러도 오늘 그대를 놔줄 생각 같은 건 없어.”

“놓아 달라고 한 적도 없는걸요. 엉망진창으로 만드셔도 되니까, 얼른…….”

닫힌 문 너머로도 여실히 들릴 만큼 높은 교성에 소티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내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물색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

목전까지 차오른 비참함이 소티스의 숨통을 콱 틀어막았다. 자신을 여기까지 오게 한 모든 선택이 미워졌다. 소티스는 주먹을 꼭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왔다고 폐하께 말씀드리지 말아…….”

습관적인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타인의 앞에 서기만 해도 작아지는 기분에서 비롯된 나쁜 습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랜 시간 고치지 못한 그녀의 말투였다.

그러나 그녀가 무어라 더 말하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렸다. 상의를 입지도 않아 가슴팍이 훤히 드러난 에드먼드가 소티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긴 왜 왔지?”

“…….”

“미리 온 김에 잘되었소. 내일 사절단을 만나러 가는 자리에는 핀과 동행할 테니 그대는 되도록 황후궁 밖으로 나서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온종일, 나가지 말고 황후궁에만 있으라고요.”

“어렵습니까?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그대는 어차피 그곳에서 온종일 있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에드먼드는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려 웃어 보였다. 제 말이 소티스에게 모욕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소티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화를 내거나 논리적으로 따지지도 못했다. 그녀의 영혼에 ‘용기’라는 단어가 종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얕게 떨다가, 고개를 돌려 그 자리를 도망치듯이 벗어났을 뿐이었다.

종종걸음으로 걷던 소티스는 이내 정원에 다다랐다.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뛰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길러 엮은 작은 꽃다발은 어디에 내팽개쳤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처음 입은 새하얀 원피스는 너무 밋밋하고 유치해 보였다. 길게 늘어뜨려 땋은 머리가 다 무슨 의미란 말인가. 어차피 누가 다정스레 쓰다듬어 준 적도 없던 것을.

소티스는 에드먼드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밤새도록 탐할 그 여자가 누군지도 알았다.

그 여자는 다름 아닌, 소티스가 구해서 황성으로 데려온 여자였다.

에드먼드는 그 여자를 사랑할까. 그 여자가 황후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까. 그래서 정략결혼이라는 이유로 그 자리에 버티고 앉은 소티스가 미울까.

소티스는 비참함을 꾸역꾸역 삼켰다. 그러나 이내 다 참아 내지 못한 감정이 방울방울 맺혀 뺨을 타고 흘렀다.

내가 사라지면 모두가 행복할까.

나만 사라지면 괜찮을까.

그렇다면 그냥…….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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