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2. 이름 없는 괴물
“아가야, 내가 올 때까지 손가락을 꼽고 있으렴.”
다 무너져 가는 신전 앞에 소녀를 앉힌 여자가 말했다.
소녀는 여자의 말을 따라서 손을 펼쳤다. 그리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 세는 거다.”
소녀가 배운 숫자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다. 때문에 소녀는 계속 “하나.”를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순차적으로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소녀를 짧게 쳐다보던 여자, 그러니까 소녀의 어머니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소녀는 어머니가 돌아올 거라는 믿음을 안고 몇 번이나 손가락을 접었다가 폈다.
하나를 열 번 외쳐서 두 손 모두 주먹 쥐게 되었다. 그럴 때면 곧바로 손을 펼쳐서 다시 하나를 세었다.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가 폈을까.
날이 추웠다.
손끝은 빨갰고, 얼음장처럼 얼어붙어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들오들 떨면서도 소녀는 하나를 세는 걸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추위는 한낱 인간이 맨몸으로 이겨 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해가 지자 추위는 더 거세졌고, 몇 번이나 까무룩 잠들었다가 일어난 소녀는 동이 틀 때쯤에 꽁꽁 얼어붙은 몸을 일으켜서 신전으로 들어갔다.
안은 바깥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일단 실내라는 공간이 주는 안정감이 있었다.
돌아온 엄마가 자신이 사라진 줄 알고 찾고 있으면 어쩌지.
그러한 고민을 하던 소녀는 제단 아래서 무릎을 끌어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뼈에 사무치는 추위가 떠나지 않았다. 날숨을 내쉴 때마다 뽀얀 김이 흩어지고 있었다. 더는 손가락이 움직여지지 않아서 속으로 ‘하나’를 중얼거렸다.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해야 했다.
“간만에 날 찾아온 손님이 한낱 아이라니.”
몇 번이나 하나를 속으로 외치던 소녀의 귓가에 문득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소녀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던 공간에 한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누구세요?”
“그러한 물음을 듣게 된 것도 오랜만이군. 누군가는 나를 악마라고 불렀지. 그 이전에는 신이라고 불렸고, 믿음이 시작되지 않았던 과거에는 적당히 불멸자라고 불렸던 것 같군. ……하지만 이런 얘기는 아직 어린 네가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구나. 원하는 대로 생각해. 그것이 나의 정의가 될 테니.”
남자가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살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구나. 그러니 나를 깨운 것이겠지.”
천장 틈새로 들어온 여명을 맞은 남자의 붉은 눈동자가 선명히 빛났다.
“날 깨운 소녀여, 네가 원하는 걸 말해 봐. 소원을 이뤄 줄 테니. 대신 대가를 치러야겠지.”
“대가요?”
“그래. 가령 네 목숨이라거나…….”
허리를 숙인 남자가 얼굴을 맞붙였다.
“네 목숨이 아깝다면 피도 나쁘지 않겠지.”
단숨에 좁혀진 거리에도 소녀는 남자를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소원.
소녀는 너무나 막연하게만 느껴지는 그 단어를 곱씹었다. 대가는 둘째 치고, 소원이 없었다.
정적이 이어졌다. 계속될 것만 같은 정적을 일깨운 건 오랫동안 공백 상태였던 소녀의 배였다.
꼬르륵.
“배가 고파요.”
남자는 지루하다는 듯이 소녀를 쳐다봤다.
“네 이름이 무엇이지?”
“아가요.”
“아가?”
“엄마는 저를 아가라고 불렀어요.”
아가는 이름이 아니었다.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진 것도, 아는 것도 없는 이 작은 인간이 자신을 깨우고 본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저 살고자 하는 욕망 하나로 소녀는 이곳에 있었다.
남자의 한숨 소리에 움찔한 소녀의 머리 위로 금화가 비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길을 따라서 쭉 내려가면 마을이 있을 거야. 그곳에서 무엇이든 먹도록 해. 특별히 대가는 받지 않도록 하지.”
이름조차 없으니 계약도 할 수 없었다. 남자는 이대로 소녀와 헤어지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을 선택했다.
소녀는 바닥에 떨어진 금화를 주웠다. 그것을 입에 갖다 대더니 깨물었다. 보통 금인지 확인하기 위해 깨물어 본다고 알고 있던 남자는 그 행동을 무심히 넘겼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먹는 것인 줄 알고 아예 입에 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남자는 소녀의 손에 있는 금화를 낚아챘다.
“그건 먹는 것이 아니야.”
소녀의 손바닥 위에 다시 금화를 얹어 주며 말했다.
“마을에서 사람을 만나면 그것과 먹을 것을 바꾸도록 해.”
“저는 여기서 기다리던 중이었어요.”
“널 찾는 사람이 오면 붙잡아 두도록 하지.”
남자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그러나 순진하게 그의 말을 믿은 소녀는 금화를 챙기더니 신전을 떠났다.
소녀가 되돌아온 건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주머니를 가득 채우다 못해 손아귀에 잔뜩 쥐고 있었던 금화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배가 부른 것도 아니었다.
꼬르륵 소리가 또다시 신전을 울렸다.
남자는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온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제가 반짝이는 걸 훔쳤다면서 뺏어 갔어요. 도둑이라면서요.”
단순히 금전을 뺏어 가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소녀의 얼굴에 새로이 생긴 상처가 있었다. 그들이 폭력을 행사한 것이었다.
“고통스러워하는군.”
“아프지 않아요.”
“거짓말이 서툴구나.”
남자는 소녀의 메마른 눈가를 매만졌다.
보통 이만큼 고통스러우면 인간은 눈물부터 보이고는 했다.
툭 하고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소녀이니 눈물을 흘리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건조했다.
“어째서 울지 않지?”
“저는 훔치지 않았어요.”
소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잘못한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 그렇지.”
남자는 빠르게 소녀의 차림새를 훑어봤다.
거지로 오해한다고 하여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금화를 잔뜩 들고 있으니 어디서 돈을 훔쳤다고 생각하고 매질한 모양이었다.
오랫동안 인간을 보지 않았던 남자의 무심한 행동에 대한 결과였다.
이러한 결과를 의도하고 금화를 쥐여 준 것은 아니었다.
인간은 감당할 수 없는 힘을 가지게 되면 빼앗기게 되었다.
새삼 그 사실을 상기하게 된 남자는 소녀를 다시 마을로 보내기보다는 적당히 먹을 것을 챙겨 주기로 했다.
“인간은 무엇을 먹더라.”
잠깐의 고민 끝에 산열매를 가득 따서 건네주었다.
소녀의 덩치가 워낙 작아서 산열매 양이 조금 많아 보이긴 했지만, 허기가 졌던 소녀는 그것을 게 눈 감추듯이 먹어 치웠다.
“배도 채웠으니 이제 이곳을 떠나도록 해. 나와 엮여 봤자 안 그래도 짧은 네 인생에서 좋을 것 없으니까.”
“엄마가 이곳으로 돌아온다고 했어요. 기다려야 해요.”
그렇게 말한 소녀는 재빠르게 바깥으로 나갔다.
누가 봐도 소녀는 버림받았다.
어떤 어미가 제 자식을 이 겨울날 바깥에 홀로 내버려 두겠는가.
이곳은 인간들에게 잊혀진 장소였다. 드래곤의 등장과 함께 인간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남아 버린 악마를 믿는 사람도, 아는 사람도 남지 않았다.
소녀의 어미가 이곳에 아이를 버린 것은 아마 마지막 양심일 것이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꼴을 하고 있긴 했지만 신전처럼은 보이긴 하니 만약 진실로 신이 있다면, 이 아이를 지켜 주겠거니 하는 그런 양심.
그러나 그것은 하찮은 자기 위로밖에 되지 않았다. 아이를 버렸다는 사실은 변치 않았으니.
그런 어미를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뒷모습이 미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남자는 진실을 얘기해 주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단념하는 것이 소녀의 남은 인생에 좋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소녀는 추위 속에서도 몇 시간이나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하나를 반복해서 중얼거리면서.
멀찍이 서서 언제쯤 소녀가 안으로 들어올지 지켜보고만 있던 남자가 소녀에게 다가갔다.
“어째서 하나만 말하는 거지?”
“하나예요.”
엄지를 접으며 소녀가 대답했다.
남자는 소녀가 나머지 숫자를 모른다는 걸 알아챘다.
소녀의 검지를 잡았다.
차가웠다.
겨울을 닮은 그것을 접어 주었다.
“이러면 둘이야. 하나가 아니라.”
“둘.”
소녀는 하나뿐만 아니라 둘을 알게 되었다.
이제 하나와 둘을 중얼거리면서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무슨 의미가 있는 행동인가?”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세고 있으라고 했어요.”
“돌아올 때까지?”
“네.”
돌아오지 않을 거면서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남기고 떠난 것이었다.
남자는 소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삐쩍 마르고, 상처투성이인 얼굴이었다. 뺨은 빨갛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입가에는 산열매 즙이 묻어 있었다.
“바깥에서 기다리다가 영원히 네 어미를 만나지 못할 것 같군. 들어가 있어. 만약 널 닮았다면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 테니 내가 말해 주지.”
남자는 소녀의 입가를 훔쳐 주고는 손을 내밀었다.
먹을 것을 주었기 때문인지 소녀는 쉽게 남자를 믿었다. 내밀어진 손을 잡고 일어난 소녀가 앞장서는 남자를 따라 걸어갔다.
하지만 잔뜩 굳어 버린 몸은 몇 걸음 가지 않아서 휘청거리게 되었다.
넘어지기 직전이었다.
분명 소녀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던 남자가 어느새 다가와 소녀를 잡아 주더니 번쩍 안아 들었다.
남자는 말없이 소녀를 안고 들어갔다.
반짝이는 두 눈만 아니었다면 시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차가운 소녀를 내려놓은 남자는 불을 피웠다.
소녀는 근처에 앉아서 몸을 데웠다. 그러다가 지쳤는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남자는 불편한 자세로 자고 있는 소녀를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소녀의 몸이 무너지고, 남자의 무릎에 머리를 베게 되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항상 적막하던 공간을 울렸다.
남자는 불빛을 받아서 붉은빛이 도는 소녀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봤다.
소녀의 어미는 돌아오지 않을 거고, 소녀는 어미가 돌아올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었다.
소녀의 살고자 하는 욕망이 꺼지지 않는 이상 남자에게 이 존재는 굉장히 신경 쓰이고, 귀찮았다.
그냥 죽여 버릴까.
남자는 소녀에게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소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맥박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남자를 아는 인간은 모두 죽었다. 그 뒤로 그를 찾아오는 인간도 없었다.
본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니 인간들이 말하는 죽음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이니 남자는 제 처지를 비관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하지만 삶을 알리는 간헐적인 박동을 인식하고 있자니 조금은 색다른 기분이었다.
남자는 소녀의 목을 쥐고 있던 손을 놓고 뺨을 감쌌다. 그가 손을 치웠을 때는 소녀의 상처가 깔끔이 사라져 있었다.
부모도, 이름도 없는 나약한 소녀는 제 처지와 썩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굳이 제 손으로 죽일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이 모든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인간은 금방 죽었다.
* * *
그날 이후로 소녀는 기다렸고, 남자는 그런 소녀를 지켜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고, 그들이 있는 곳을 방문하는 이는 없었다.
그동안 남자는 소녀에게 ‘셋’을 가르쳐 주었다.
이제 ‘하나, 둘, 셋.’이라고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꼽고 있는 소녀에게 물어보았다.
“어째서 엄마가 돌아오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지 않는 거지?”
“돌아온다고 약속했어요.”
소녀는 어미가 돌아오리라고 믿고 있었기에 소원을 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지난 시간 동안 소녀와 남자는 함께 있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러나 소녀의 어미가 어머니로서 제대로 된 역할은 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키웠다기보다는 방치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거다. 이름을 지어 주기 귀찮았던 건지 ‘아가’라고 불렀던 것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소녀의 어미가 어떤 사람이든, 그녀는 소녀에게 있어 유일한 보호자였으며 온 세상이었다.
그러니 절박하게 붙잡고 있는 것이다.
남자는 더 이상 소원을 빌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소녀의 곁을 지켜 주었다.
소녀의 매 끼니를 챙겨 주는 것은 남자의 일과가 되었다.
첫 만남 때처럼 산열매를 따서 주었다. 그렇지만 사람이 산열매만 먹으며 살 수 있을 리 없었다. 날이 다르게 허약해지는 소녀를 바라보던 남자는 어느 날 짐승을 잡았다.
인간이 짐승을 사냥해서 먹는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잡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인간의 음식을 먹지 않는 남자가 요리를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일단 할 수 있는 대로 불을 이용해 봤지만, 새까맣게 태워서 먹을 수 없는 형체로 변해 버렸다. 멋모르고 탄 고기를 먹으려는 소녀를 저지한 남자는 금화를 주며 마을에 내려가서 먹고 싶은 걸 먹고 오라고 했다.
이번에는 저번처럼 많은 양의 금화를 주지 않았다.
한 개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온 소녀는 이번에도 금화는 잃어버리고, 상처만 얻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누가 그랬지?”
소녀의 메마른 눈가를 어루만지며 물어보는 목소리가 사나웠다.
눈빛 또한 평소와 달랐다.
우물쭈물 망설이던 소녀는 제 한마디가 지닐 언어의 무게를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굳게 입을 다문 소녀를 보며 남자는 따져 묻지 않았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후로 며칠 지나지 않아서 또다시 짐승을 까맣게 태운 남자는 소녀에게 금화를 주었다. 마을로 내려가서 끼니를 해결하라는 남자의 말에 소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걸음을 옮겼다.
소녀가 마을에 도착하고, 마을 사람들은 소녀를 보자마자 욕설을 퍼부으며 돌멩이를 던졌다.
그들이 소녀를 싫어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폐허나 마찬가지인 수상한 신전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긴 세월 동안 야금야금 영토를 확장하던 제국은 최근 본격적으로 칼을 빼 들고 정복 전쟁을 하기 시작했다.
이 나라는 아직 제국에 완전히 흡수돼 있지 않았지만 잦은 마물의 공격으로 인해 피해를 많이 입었다.
드래곤의 가호를 받고 마물의 피해에서 벗어난 제국을 자연스럽게 동경했고, 드래곤에 대한 믿음이 싹틀 수밖에 없었다.
괜히 다른 신앙을 믿었다가는 마물이 자신들에게 해코지를 할까 봐 기피하는 분위기였는데 딱 봐도 수상한 소녀가 이교에 의탁하는 듯했으니 적대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건만 소녀에 대한 비난이 거세졌다.
제게 쏟아지는 비난을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가던 중 누군가 소녀의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렸다. 처참하게 쓰러진 소녀는 손에 꼭 쥐고 있던 금화를 놓치고 말았다.
그것을 줍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런 소녀를 놀리듯이 소녀의 다리를 건 소년이 잽싸게 금화를 주워 갔다.
멀찍이 서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는 소녀가 체념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상황을 이겨 내기에는 소녀는 너무 작고 무력했다.
하지만 소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몸을 웅크린 채로 돌팔매질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은 금화를 빼앗은 소년에게 고정돼 있었다.
당장이라도 다시 되찾아 낼 듯이.
소녀가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나던 중이었다. 날아온 돌멩이가 소녀의 이마를 정확히 가격했다.
휘청거리던 소녀는 쓰러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필사적으로 금화를 훔친 소년을 눈으로 좇았다.
지난 두 번의 경험으로 되찾을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시도라도 해 봐야 했다.
처음으로 누군가 자신에게 준 물건이었다. 그런데 번번이 잃어버리기만 하고 있었다.
저번에 은발 남자가 누가 그런 것이냐고 물은 이유는 기껏 물건을 맡겨 놨더니 아무것도 얻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금화라도 되돌려주고 싶었다.
소녀는 절뚝거리며 앞으로 갔다. 그런데 순간 눈앞에 낯익은 형체가 들이차더니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소녀는 고개를 들었다.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는 은색 머리칼이 눈에 띄었다.
남자였다.
동시에 피비린내가 짙게 풍겼다.
낄낄대던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고통으로 가득 찬 비명으로 변모했다.
사람들이 남자의 손에 죽어 가고 있었다.
“그만해요.”
“어째서?”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소녀가 남자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남자는 소녀가 몸을 흠칫 떨 정도로 냉정한 어조로 되물었다.
“네가 뭔데 내게 명령하는 거지?”
소녀는 남자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소녀는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멈추고 싶다면 대가를 바쳐. 내게 소원을 비는 거지.”
“…….”
“대가는 네 영혼인 거야.”
허리를 숙인 남자는 소녀와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남자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한 소녀가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나 있는 거예요?”
“화를 낸 적 없어.”
“하지만 화가 나지 않는데 사람을 그냥 죽였을 리 없잖아요.”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대갚음해 준 것뿐이야. 내 것을 뺏어 갔잖아. 그러니 나 또한 빼앗는 거지.”
남자가 소녀에게 금화를 주긴 했지만 원래 남자의 것이었다.
소녀는 남자가 금화를 빼앗긴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금화라면 돌려받으면 돼요. 하지만 목숨은 빼앗기면 돌려받을 수 없잖아요.”
“…….”
“돌려받을 수 없는 건 빼앗지 말아 주세요.”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소녀를 쳐다봤다.
빼앗긴 건 금화만이 아니었다.
“그러면 너는?”
남자는 소녀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피가 나고 있었다.
그만큼 상처가 깊어서 건드리면 아플 텐데 소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 보면 소녀는 큰 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되도록 제 존재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소녀의 이마에 흐르는 피를 훔쳐 준 남자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사람을 죽이는 행동에 흥미가 나지 않았다. 더불어 대가를 받은 것도 아닌데 함부로 인간을 죽이면 악마 또한 타격을 입었다.
힘이 예전만 못하니 인간을 몇 명 죽였다고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남자는 이대로 마법을 써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금화를 주운 소녀가 그런 남자의 뒤를 따라왔다.
남자의 걸음걸이가 느려졌다.
* * *
그날 이후로 소녀에게 인간이 만든 음식을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면 멀리 떨어진 마을로 갔다.
소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는 소녀와 동행했다.
소녀는 욕망이 강해서 남자를 볼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며 남들에게 모습을 보이는 건 힘이 아주 많이 드는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주 가끔 필요할 때마다 모습을 보인 남자는 소녀의 맞은편에 앉아서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식당에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들은 한 마을이 마물에게 습격받아서 모두 처참하게 죽었다는 얘기를 잠자코 들어야 했다.
소녀는 계속 남자에게 신세를 지게 되는 것 같아서 눈치가 보였다. 남자는 먹지 않고, 본인만 음식을 먹으니 더욱 그러했다.
홀로 요리를 해 보려고 노력해 봤지만 배운 것이 없었던 소녀가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 수 있을 리 없었다.
소녀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불을 다루다가 크게 다칠 뻔했다.
그 후로 남자는 소녀를 불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 더불어 마을에 내려가서 남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빈도가 잦아졌다.
요리를 배우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소녀와 남자는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냉기밖에 없었던 공간에는 요리를 하느라 훈기가 돌기 시작했고, 잔해밖에 없던 내부에는 소녀의 물건이 늘어났다.
그리고 소녀가 열을 셀 줄 알게 되었을 때쯤이었다.
소녀는 더 이상 엄마를 기다리지 않았다.
소녀의 세계는 점점 더 넓어졌고, 남자는 소녀에게 손가락으로 셀 수 없는 열 이상을 알려 주었다.
아는 것이 많아지자 소녀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바로 남자의 이름이었다.
어느 날, 소녀는 남자의 이름을 물었다. 남자는 제단 위에 새겨진 문양을 가리키며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라고 했다.
“저건 부를 수 없는 거잖아요.”
“나를 부를 타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 그런 식으로 내 이름은 오래전에 잊혀졌어.”
남자의 말을 듣고 나서 소녀는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않고 골몰하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났을까.
소녀가 불쑥 말을 꺼냈다.
“요한 어때요?”
“요한?”
“이름 말이에요.”
“…….”
“더 이상 그쪽을 부를 사람이 없다고 했지만, 제가 있잖아요. 제가 부르고 싶어요.”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지는 소녀의 눈꼬리를 보며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
부드러운 울림을 남기는 그 이름을 중얼거리며 요한은 환히 웃는 소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유독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와서 날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소녀는 뒷산에 만개한 꽃을 구경하는 걸 좋아했다.
꼭 꽃을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요한은 소녀가 왜 저렇게 꽃구경을 좋아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말갛게 웃는 소녀의 얼굴만은 보기 좋았기 때문에 그곳으로 자주 소녀를 데려다주었다.
“요한은 그토록 오랫동안 살았으니 삶이 지루하지 않아요?”
오늘도 어김없이 뒷산에 온 소녀는 남자와 나란히 누워서 따사로운 햇살을 맞은 채 물었다.
남자는 지루하다는 걸 몰랐다.
인간처럼 쉽게 권태를 느꼈다면 이미 오래전에 미쳐 버렸을 것이다.
“저는 요한을 기다리는 순간이 제일 지루해요. 그런데 같이 있으면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거 있죠.”
소녀는 생각했다.
요한처럼 평생 지루하지 않은 채로 살고 싶다고.
요한이 없는 순간은 이제 상상할 수도 없었다.
“요한은 짝이 없죠? 그럼 제가 신부가 될게요.”
“……뭐?”
“제과점의 엠마 언니가 그랬어요. 결혼은 평생 같이 있고 싶은 사람과 하는 것이라고요. 저한테 요한은 평생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이에요.”
“너는 아직 어려.”
“요한한테는 뭐든 다 어리잖아요.”
“너는 인간을 기준으로 삼아도 어리지.”
요한은 소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져 주며 말했다.
“만약 네가 어른이 돼서도 그 마음이 변치 않는다면 받아 주도록 하지.”
“변치 않을 거예요.”
벌떡 일어난 소녀가 꽃 한 송이를 꺾었다. 그것으로 반지를 만들어서 요한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소녀를 따라서 몸을 일으켰던 요한은 손가락에 끼워진 꽃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어울려요.”
“무엇이?”
“웃고 있는 얼굴 말이에요.”
본인이 웃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던 요한은 입꼬리를 매만졌다.
소녀의 말대로 웃고 있었다.
소녀가 이름을 주었을 때 지었던 표정을 따라 하고 있는 듯했다.
소녀와 남자는 마주 보며 웃었다.
* * *
제국은 차례대로 그동안 정복하지 못했던 국가를 제패해 갔다. 그리고 승기를 거머쥐자마자 제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종교 박해에 몰두했다.
그들의 군주인 드래곤을 믿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불순하다 싶으면 고통스럽게 죽이는 것이다.
남자는 이 거대한 흐름을 막을 수 없었다.
소녀의 존재가 남자에게 힘이 되어 주었지만, 그만큼 힘을 쓰기도 했다.
만약 이대로 소녀와 함께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지킬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는 인간을 조금 죽였다고 힘이 빠졌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의 나약함을 실감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킬 것이 생기자 달라졌다.
힘을 모을 시간.
요한에게는 그것이 필요했다.
“잠시 날 잊고 살아가는 거야.”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소원을 이루고 싶다면 내 이름을 불러 줘.”
요한.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눈물범벅이 된 소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요한은 마음이 약해졌다.
그러나 이대로 소녀를 붙잡았다가는 끝내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할 것이었다.
소녀를 죽여서 아무런 고통 없이 영원히 제 곁에 두거나 자신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할 소녀를 지켜보거나.
남자가 소녀를 지키기 위해 맞서 싸워야 할 상대는 예전에 그가 죽였던 마을 사람들과 같지 않았다.
그보다 더 거대했다.
남은 힘을 모두 쓴다고 해도 완벽히 처리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요한은 소녀의 눈물을 훔쳐 주었다.
차라리 다음을 기약하며 잠시 자신을 잊고 살아가게 하는 것이 나았다.
이제 소녀 없이 살았던 지난 영겁의 시간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으니.
“나의 소녀여.”
소녀의 뺨을 감싸 쥐고서는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소녀가 배를 곯거나 춥지 않게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
살포시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면서 소녀의 눈이 감겼다.
다가올 미래를 알지 못한 채 요한은 소녀의 작은 몸뚱이를 끌어안았다.
-<나를 구원하소서>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