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5/16)

외전 01. 라이어(Liar)

다섯 공작 가문에게 반려라는 자리는 깃발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 대에는 본인이 정권을 제 마음대로 주무르겠다는 의미를 내포한 깃발을 결혼과 출산이라는 형태로 꽂는 것이다.

저번 대에 그 깃발을 꽂지 못했던 하이넨은 륀느 공작이 딸아이를 낳지 못한 걸 빌미 삼아서 어린 딸을 황궁에 밀어 넣었다.

그렇게 샬롯과 라이문트는 만났다.

보통 드래곤의 진실을 알게 되면 겁먹고 임신하길 두려워할 수 있었다. 때문에 반려로 내정되었다고 하여 모든 것을 말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샬롯은 마치 진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첫 만남부터 라이문트를 경멸했다. 남들과 함께 있을 때는 아닌 척했지만 둘만 남으면 그 감정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라이문트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강하게 적의를 보이는 샬롯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무심하게 넘어갔다.

어차피 샬롯 또한 다섯 공작가 중 하나였다. 제거해야 하는 대상이니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와 다섯 공작의 의지에 따라 순종적으로 샬롯을 사랑하는 척했고, 그건 샬롯 또한 마찬가지였다.

미묘한 관계의 연속이었다.

라이문트가 무심코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그들은 매번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었다.

“샬…….”

“저는 단 한 번도 폐하께 제 이름을 허락한 적이 없어요.”

“그럼 무어라 불러야 하지?”

“굳이 불러야 할 일이 온다면…….”

라이문트의 딱딱한 물음에 샬롯은 잠깐 고민했다.

그러다가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냉소적인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샤샤.”

“…….”

“샤샤가 좋겠네요. 제 이름이 아닌 것 같아서 마음에 들어요.”

“샤샤라면 애칭 아닌가?”

라이문트는 샬롯이 자신을 싫어하는 걸 뻔히 아는데 애칭을 허락한다는 것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아 물어보았다.

샬롯은 여전히 비웃음을 걸며 라이문트를 보았다. 경멸하는 눈빛 또한 여전했다.

“보통 제 이름의 애칭이라 하면 ‘로티’죠. ‘샤샤’가 아니라.”

라이문트는 샬롯이 하고자 하는 말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언뜻 애칭처럼 보이는 이름은 허상이었다.

샬롯이 완벽히 그어 놓은 선을 보며 라이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샬롯이든, 로티든, 샤샤든 상관없었다.

라이문트는 그저 서로 마음 나눌 일 없는 이 관계가 편했다.

* * *

“따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어느 날 샬롯이 말했다.

둘이서 조용히 티타임을 가지고 있던 중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렇군.”

라이문트는 무심히 대꾸했다.

샬롯은 그런 라이문트의 반응에 실망하지 않았다. 애초에 뭘 기대하고 한 말도 아니었다.

“곧 그 사람과 도망칠까 하고 생각하고 있어요.”

“내게 그 얘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지?”

“저를 막지 않으실 거잖아요.”

샬롯의 말대로 라이문트는 막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를 저지할 이유도, 의지도 없었다. 그리고 사랑의 도피를 한대도 하이넨 공작이 금방 잡아 오리라고 확신했다.

라이문트는 그녀의 행동이 앞으로의 계획에 어떠한 변수가 될지 머릿속으로 셈했을 뿐이었다.

딱 봐도 제게 관심이 없는 남자를 지켜보던 샬롯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고백했을 때처럼 툭 하고 말을 던졌다.

“최초로 반려가 되지 못한 숙부는 자살했어요. 사람들은 그가 사랑받지 못해서 끝내 체념하고 죽었다고 해요.”

새삼스러울 정도로 유명한 얘기였다.

그 일로 인해 라이문트가 태어나게 되었으니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그게 정말 사랑이었을까요?”

그 누구도 제기하지 않았던 의문이 샬롯의 입을 통해 나왔다.

“저는 매일 말라 가던 그를 기억해요. 난리도 아니었죠. 하루도 빠짐없이 호통을 듣고, 손가락질당하고, 단지 반려가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삶을 철저히 부정당했어요. 그런데 어찌 목매달아 죽지 않을 수 있겠어요.”

샬롯이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오늘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말했다.

숙부가 죽기 전까지 계속 일어난 그 일을 샬롯 또한 어릴 적에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미쳐 가는 건 숙부뿐만이 아니었죠. 어머니 또한 권력에 눈이 멀어 버렸어요. 그건 아마 출신 성분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 클 거예요. 역사를 새로 쓰게 된 이후 초대 하이넨이 검사라고 알려지게 되었지만 실제 하이넨은 엘릭시아의 재료가 될 인간을 죽이던 도살자일 뿐이잖아요.”

샬롯은 붉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꼬면서 남들이 들으면 경악할 만한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이어서 했다.

“하이넨의 머리 색이 대대로 빨간 이유는 희생된 자들의 피가 묻었기 때문이겠죠.”

“엘릭시아에 대해 알고 있군.”

“미친 숙부와 제법 친하게 지냈거든요. 남들은 헛소리라며 듣지 않으려고 했지만, 제게는 재미있는 얘기였죠.”

라이문트는 어째서 샬롯이 첫 만남부터 줄곧 자신을 증오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저는 폐하가 싫어요.”

“…….”

“어째서 제 인생이 당신과의 사랑으로 완성돼야 하는 거죠?”

라이문트는 혐오로 가득 찬 샬롯의 녹색 눈동자를 보며 그녀를 조력자로 삼으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적의 적은 아군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샬롯이 도망칠 거라고 했던 걸 기억해 내고서는 입을 다물었다.

* * *

언젠가 도망칠 거라고 했던 샬롯은 계절이 몇 번이나 지나도 제 자리를 지켰다.

사랑 때문에 나고 자랐던 보금자리를 떠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그쯤 륀느 공작이 샬롯의 목숨을 은밀히 노렸다.

무작정 바깥에 나간다고 하여 얻는 것은 자유보다 위협이 더 컸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샬롯의 행동을 납득한 라이문트는 방관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얗게 질린 샬롯이 말했다.

“그 사람이 죽었어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히 지칭하지 않았으나 라이문트는 곧바로 알아챘다.

샬롯이 사랑한다던 사람이었다.

“시체를 찾지 못해서 장례식조차 치르지 못했어요.”

“…….”

“어머니의 짓이에요. 저와 그 사람의 관계를 눈치챘으니 분명 어머니의 짓이겠죠.”

라이문트는 분노를 곱씹던 샬롯과 눈이 마주쳤다. 샬롯의 눈동자에는 증오가 가득했다.

이런 얘기를 할 상대가 결국 라이문트뿐이라는 것에 대한 분노도 있었다.

그 눈과 마주친 순간 라이문트는 지난번에 내리지 못한 결정을 내렸다.

샬롯을 제 편으로 삼아서 이용하는 것이다.

샬롯에게 진실을 털어놓는 건 쉬웠다. 애초에 그를 미워하던 상대였으니 어렵지 않을 리 없었다.

샬롯은 탐탁지 않으면서도 끝내 라이문트에게 협조했다. 라이문트가 싫었지만 제 연인을 죽인 어머니는 더 싫었기 때문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곧 륀느 공작이 크게 움직이겠죠. 베일에 싸여 있던 륀느 공녀 또한 모습을 드러내겠네요.”

“륀느의 개라고 하더군.”

라이문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일부러 천출을 입양했다고 하는데 보나 마나 뻔하지.”

하급 귀족도 있건만 굳이 변방의 고아원까지 가서 아이를 입양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륀느 공작은 적당히 쓰다 버릴 체스 말이 필요한 것이었다.

철저하게 자기 입맛대로 꾸밀 수 있고,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완벽하게 순종할 체스 말.

“그거야 두고 봐야 아는 일이죠. 그녀 또한 저희와 별반 다르지 않잖아요.”

제 목숨을 노리는 륀느가 하이넨만큼 미울 텐데 샬롯은 륀느 공녀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한풀 꺾인 태도를 취했다.

당시 라이문트는 그런 샬롯을 이해하지 못했다.

* * *

“저를 죽여 주세요.”

샬롯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눈 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정오였다.

“폐하의 계획에서 저는 언젠가 죽어야 하잖아요. 그 시일이 앞당겨진 것뿐이에요.”

“왜 그러는 거지?”

샬롯은 이상할 정도로 침착했다.

그리고 제게 저런 미소를 지어 줄 리 없었기에 라이문트는 가장 먼저 그녀를 의심했다.

“죽었던 그 사람이 제 방에 있었어요. 시체가 말하고, 움직이고 있는데 뒤편에 서 있던 어머니가 태연하게 말하더라고요. 그토록 잊을 수 없다면 이것과 정신적인 사랑만 하라고.”

“…….”

“그 꼴을 보고 나니 제정신으로 있지 못할 것 같아서 자살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사실 그 사람이 죽고 난 이후로 몇 번이나 그랬죠.”

샬롯이 손목을 보였다.

옷자락에 감춰져 있던 흉터가 드러났다. 그것은 어제오늘만으로 생긴 흉터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검을 들고 살았어요. 그런 제가 손목 하나 자르지 못하는 꼴이 우습죠.”

샬롯은 냉소적으로 제 처지를 비관했다.

“제가 죽으면 어머니는 저와 닮을 사람을 찾을 거예요. 어쩌면 제 시체를 이용할 수도 있겠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테니까요.”

공작 가문은 정통성과 피의 고귀함에 집착했다. 그들의 권력을 공고히 유지시킬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샬롯은 제 어머니가 저와 닮은꼴을 이용하여 자신이 죽지 않았다고 외칠 미래를 예상했다.

더불어 시체를 이용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엘릭시아를 나누는 과정에서 가주가 참여한다는 건 중간에 빼돌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빼돌린 엘릭시아로 황족과 성애를 나누는 사람을 몰래 바꿔치기할 수 있었다.

드래곤의 반려, 드래곤의 심장, 하나밖에 낳을 수 없는 아이.

이 모든 과정이 대중을 속이기 위해 만들어진 겉치레이자 통과 의례였다.

“폐하의 손으로 저를 죽여 주세요. 어머니가 이 육신마저 쓰지 못하게 짓밟는 거예요.”

라이문트는 머뭇거렸다.

지금 여기서 샬롯을 죽여도 계획에 지장이 없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걸 눈치챈 샬롯이 재빠르게 말했다.

“폭주하여 저를 죽였다고 하세요. 폐하께서는 항상 드래곤의 모습을 억누르고 다녔으니 어느 날 갑자기 폭주했다고 하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겠죠. 그리고 너무 사랑하는 제가 죽어서 제정신이 아니라고 그들을 속이는 거예요.”

샬롯은 이것이 제 상황과 비슷하다고 여겼다.

연인을 죽인 자는 어머니였지만, 자신의 우유부단함이 연인을 죽음으로 몰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죄책감과 무력함.

연인이 죽은 이후 샬롯은 미쳐 가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얻을 이득은 무엇이지?”

“똑똑한 사람이 하는 행동에는 일일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광증을 앓는 이의 행동은 무의미하다고 여기게 되죠. 그러니 어머니와 다른 공작들의 감시를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을 거예요. 선황께서 사랑이라는 변명을 댔듯이 폐하께서는 그저 미쳤다는 변명을 대면 돼요.”

“…….”

“미친 척하는 건 쉬울 거예요. 저를 봐서 알잖아요. 사람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샬롯은 자신의 죽음이 어머니에게 복수하는 길이 되리라는 걸 알았다.

그렇기에 필사적으로 자신을 죽이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말했다.

라이문트에게 감정으로 호소하기보다는 득이 될 점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잘 먹힌다는 걸 알고 있는 그녀였다.

잠깐 고민하던 라이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샬롯은 드래곤으로 변하는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아무리 상황이 절망적이어도 꺾이지 않는,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이 좋아요. 제가 그러지 못했거든요.”

차라리 연인과 도망쳐야 했을까? 아니면 연인이 죽자마자 그 뒤를 바로 따라갔어야 했을까?

무슨 질문을 던지든 샬롯은 자신이 용기가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대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폐하께서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으시죠?”

이 죽음 또한 마찬가지였다.

살고자 하는 용기가 없어서 죽음이라는 도피처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마저도 제 손으로 해내지 못하고 타인의 손을 빌리고 있었다.

그토록 혐오하던 남자에게.

샬롯은 삶이 아닌 죽음이 드래곤으로 인해 완성되었다.

“살려…….”

드래곤의 손이 샬롯의 목덜미를 거칠게 잡고 졸랐다. 노도처럼 덮치는 고통에 샬롯은 발버둥 쳤다.

그녀의 맥박이 점점 희미해졌다.

“살려 줘…….”

“…….”

“……죽고 싶지 않…….”

샬롯은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숨이 멎은 그녀를 내려다보던 라이문트는 제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던 얼굴만 남겨 두었다.

라이문트가 샬롯에게 베푼 최초이자 최후의 자비였다.

머지않은 미래에 하이넨 공작이 그 머리를 사용하게 되리라고 생각지 못했지만, 사실 그 또한 라이문트에게 딱히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그렇게 모든 일이 제 계획대로 될 줄 알았다.

라이문트는 생각했다.

샬롯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고.

오히려 샬롯이 좋아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

라이문트는 진심으로 슈리엘을 사랑했다.

그녀가 올곧게 자신을 사랑해 줬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한계를 이겨 내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이 부시도록 찬란해서.

희망을 잃지 않고 끝내 시련을 극복해 내는 그녀를 사랑했던 것이다.

네게 미움받을 용기가 있었다면 우리 사이가 달라졌을까?

그도 아니라면 조금만 더 일찍 너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몇 번이고 반복한 후회는 단두대에 선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슈리엘.

그리고 샤샤.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그 이름은 어느 날부터 너를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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