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 - 11화 (12/16)

Chapter 8. (2)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자 쉬지 않고 달리던 마차가 멈췄다. 야영하기 위함이었다.

준비를 단단히 해 놨기 때문에 지난번처럼 힘들지 않고 편할 것이라 생각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먼저 내려서 내게 에스코트를 해 준 요한은 자연스럽게 크로셀과 파이몬에게 야영 준비를 시켰다.

악마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두 눈만 깜빡이던 나는 요한에게 다가갔다.

“저는 뭘 하면 될까요?”

“쉬고 있어. 할 일이 있으면 저 녀석들 시키면 되니까.”

“하지만…….”

“네가 스스로 얻은 힘이잖아. 저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건 네 힘을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나와 손깍지를 낀 그가 도장을 찍듯이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안 그래도 이동 중에 무리했으니 잠깐 쉬어 둬. 한숨 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준비가 끝나면 내가 깨우러 갈게.”

이동 중 무리를 했다는 그의 말에 살짝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어쩔 수 없이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처음에는 그의 말대로 잠깐 잠을 잘까 했다. 피곤하긴 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 몸을 뒤척이다가 결국 마차 밖으로 나갔다.

그새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고,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나는 홀로 요리를 하고 있는 요한의 옆에 앉았다.

“간단한 일이라도 있다면 도와드릴게요. 크로셀과 파이몬으로도 충분하다고 했지만 정작 제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요. 지금 여섯 개의 손 중 두 개가 놀고 있어요.”

두 손을 흔들었다.

내 말을 듣고선 낮게 웃은 요한은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 손 두 개는 나머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지. 조금 더 놀고 있어도 돼.”

“그럼 옆에서 구경할게요. 심심해요.”

“그래, 그러도록 해.”

그의 허락이 떨어졌다.

나는 능숙한 움직임을 지켜봤다.

“그런데 야영하는 것치고는 메뉴가 호화롭네요.”

“못 먹인다고 한 소리 들어서 신경 썼는데 티가 나나 봐.”

“……당신이 잘못한 건 없어요.”

프리실라 일행이 했던 말을 아직까지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딱히 그나 크로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부정했다.

“내 잘못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여유가 생긴 만큼 널 잔뜩 살찌울 계획이니 그렇게 알아.”

뒷말은 농담 같았다. 웃어넘기고 있는데 순찰을 갔다 온 크로셀과 파이몬이 합류했다.

“큰길을 벗어나니까 마물이 많더라. 주변에 마물 사냥꾼은 없고, 마물만 좀 처리하고 왔어.”

“수고하셨어요.”

“딱히. 별일도 아닌걸.”

어깨를 으쓱인 크로셀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크로셀과 달리 자리에 앉지 않은 파이몬은 완성되어 가는 음식을 보더니 한마디 던졌다.

“아니, 악마가 인간이나 먹을 법한 음식은 왜 만들고 있는 거야? 만들 줄 안다는 것부터 이상한데?”

요한은 경악한 파이몬을 힐끔 보더니 무시했다.

크로셀 또한 잠깐 파이몬에게 눈길을 주었을 뿐, 나서서 얘기를 할 눈치는 아니었다.

너무 대놓고 무시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무거운 침묵을 느끼며 내가 입을 열었다.

“저 때문이에요.”

“음? 네가 왜?”

“제가 어릴 적부터 요리에는 서툴러서 요한이 도맡아 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래서 능숙해 보이는 거예요.”

무언가를 못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살짝 부끄러웠다.

애매하게 말을 흐리고서는 고개를 숙이자 요한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제 쪽으로 당겼다.

“그땐 못하는 게 당연하지.”

“사실 지금도 좀 형편없는 것 같아요.”

“전혀 그렇지 않던데. 네가 해 주는 건데 형편없을 리가.”

카페에서 일했을 때 그가 내 음식을 맛있게 잘 먹었던 걸 떠올리면 그런가 싶다가도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떠올리면 영 아니다 싶었다.

“제 요리 실력이 괜찮다면서 어째서 아무것도 못 만지게 한 거예요?”

“당장은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 주는 것이 내게 더한 기쁨이 되니까.”

빙긋이 웃은 요한은 말을 덧붙였다.

“잔뜩 살찌워야지.”

“농담 아니었어요?”

“난 살면서 농담한 적 없어.”

“거짓말.”

괜히 진지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다고 하잖아. 넋 놓고 서 있지 말고 앉아.”

우리를 지켜보던 크로셀이 멀뚱히 서 있던 파이몬의 다리를 툭툭 쳤다. 조리되고 있는 음식과 요한을 번갈아 보던 파이몬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음식이 완성되고, 나는 각자의 그릇에다 음식을 덜어 주었다. 그런데 파이몬이 뚱한 표정으로 음식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 먹지 않았다.

“파이몬은 안 드세요?”

“나는 먹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데 너희는 먹을 필요도 없으면서 왜 먹고 있는 거야?”

파이몬이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요한과 크로셀을 번갈아 보았다.

나에게 이들과 식사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순간 당황하게 되었다.

악마는 인간의 음식을 먹지 않는다. 먹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굳이 불필요한 행동을 하는 그들의 모습이 파이몬에겐 기이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괜스레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것도 저 때문이라서…….”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쓸쓸해하지 않도록 일부러 어울려 준다는 건 일찍이 눈치채고 있었다. 말로 설명하려니 쑥스러워지는 터라 애매하게 말을 흐리자 크로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냥 닥치고 먹어. 뚫린 입으로 먹으면 될 걸 뭘 그리 말이 많아!”

버럭 소리 지른 크로셀이 파이몬의 입에 억지로 빵을 욱여넣었다. 입 안 가득 빵을 물게 된 파이몬은 신경질적으로 뱉어 내려다가 요한과 눈이 마주쳤다.

움찔한 파이몬은 빵을 빠르게 우물거리다가 꿀꺽 삼키고서는 외쳤다.

“아니, 이상하잖아!”

“전혀 이상하지 않으니까 의문 갖지 마!”

강압적으로 외친 크로셀이 이번에는 뜨거운 수프를 파이몬의 입에 콸콸 넣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수프는 척 보기에도 입을 델 정도로 뜨거웠다.

크로셀의 과격한 응징을 보고 있자니 파이몬에 대한 걱정이 앞서다가 이내 불필요한 걱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악마는 저 정도 고통에 끄떡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래도 고통스러워 보이는 건 마찬가지라서 크로셀을 말리려고 했다.

수프를 한 접시 비운 크로셀은 이제 손에 집히는 대로 파이몬의 입에 음식을 집어넣고 있었다.

몸싸움이 더 거칠어지기 전에 말리려 하였는데 그 전에 요한이 한마디 했다.

“너희 다 먹으라고 만든 게 아닌데.”

슬쩍 고개를 돌려서 그의 얼굴을 보니 불만스러운 듯,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고 있었다.

“아니, 그게…….”

요한의 나지막한 경고를 듣고 당황한 크로셀이 그대로 멈췄다.

자신이 너무 과하게 행동했다는 걸 깨달은 건지 그릇까지 파이몬의 입에 넣으려는 걸 그만두고 얌전히 앉았다. 덕분에 파이몬은 고문과도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두 악마 모두 힐끔힐끔 내 눈치를 보았다.

왜 그러나 싶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먹을 음식을 자신들이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내가 수프를 한 입 먹기 위해 스푼을 들자 두 쌍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날 주목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서 그들을 바라보니 언제 날 쳐다봤냐는 듯이 딴청을 부리면서 제 몫의 음식을 먹었다.

방금 전의 소란을 의식했는지 새 모이처럼 깨작깨작 먹었다.

이러다가는 크로셀과 파이몬이 식사하는 척만 하다 이 시간을 보낼 것 같았다.

내겐 그들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물론 중요했지만 억지로 먹는 흉내를 내게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파이몬과 크로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맛있어요?”

“으, 응? 응.”

내가 다가서자 바짝 굳은 파이몬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같이 먹어서 더 맛있는 거니까 제 눈치 보지 말아요. 저 때문에 억지로 먹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은걸요.”

나는 파이몬과 크로셀을 번갈아 보았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먹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먹고 싶지 않으면 굳이 먹는 시늉을 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들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하니까.”

말을 끝마치자마자 나는 고개를 돌려서 살짝 요한의 눈치를 봤다. 그리고 엄청난 비밀을 털어놓듯이 목소리를 낮춰서 그들에게 속삭였다.

“요한이 한마디 했지만 사실 음식은 풍족하니 신경 쓰지 말아요. 그리고 저는 대충 익힌 고기도 잘 먹어요.”

“아니, 나는 얘가 굳이 말을 꺼내서 널 난처하게 하니까…….”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고 있던 크로셀이 다급하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제게 맞춰 줘서 감사해요.”

크로셀에게 고마운 마음이 컸다.

내 마음을 알고 중간에 나서서 파이몬을 저지시킨 것뿐만 아니라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얼굴로 근처에 있던 닭 다리 구이를 들었다.

“혹시 닭 다리 구이 드실 분 있으세요? 중간에 살짝 훔쳐 먹어 봤는데 맛있더라고요.”

잠깐 고민하던 파이몬이 살며시 손을 들었다.

그러자 크로셀은 손을 들어서 의사를 밝힌 파이몬과 달리 내 손에 있던 고기를 그냥 낚아채 갔다.

“나는 네가 고마워할 일을 한 적 없어.”

“네, 그것도 알고 있어요.”

“알기는 무슨!”

구시렁거린 크로셀은 빠르게 고기를 먹어 치웠다.

동행하는 악마가 한 마리 더 늘었을 뿐인데 복작복작한 분위기가 났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삶에서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때가 아닐까 싶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서 식사를 계속했다.

음식 양은 많았지만 인원이 네 명이나 되다 보니 금세 해치울 수 있었다.

그렇게 짧은 식사 시간이 끝나고, 태양은 금방 기울어서 밤이 찾아왔다.

크로셀은 능력을 사용하여 설거지를 했다. 파이몬은 주변에 마물이 많았던 것이 마음에 걸린다면서 마물 사냥을 하러 떠났다.

“아, 맞아. 근처에 개울이 있더라. 마법으로 씻는 것보다 직접 씻는 걸 더 좋아하잖아. 이왕 시간도 남는데 다녀와.”

설거지를 하던 크로셀이 내게 말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갈아입을 옷과 타월 그리고 비누를 챙기자 요한이 자연스럽게 내 곁으로 다가왔다.

씻는 도중만큼 무방비한 상태는 없었다. 혹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그는 나와 동행했다.

우리는 크로셀이 말한 방향으로 갔다.

얼마 가지 않아서 물소리가 났다.

속도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자 달빛을 받아서 반짝이는 개울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요한은 근처에 있는 나무 뒤에 기대어 섰다.

내가 서 있는 방향에서 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옷을 벗고,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투명한 물에 맨발을 담갔다.

겨우 발목까지 잠겼을 뿐인데 물이 차가운 터라 오스스 몸을 떨게 되었다.

나는 팔을 한번 쓸어내리고서는 천천히 개울로 들어갔다. 그리고 더는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 때쯤, 고단한 하루를 보낸 몸을 씻기 시작했다.

허리를 숙였다. 어느새 길게 자란 머리칼이 물길을 따라서 흩어졌다.

밤은 고요했다.

풀벌레가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정적은 모든 것을 지워 내서 마치 나 홀로 있는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근처에 요한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몸을 씻겨 내고서는 개울에서 나왔다. 걸을 때마다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들렸다.

정적을 일깨우는 유일한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지 않으셨어요?”

“전혀.”

“아. 긴 세월 동안 지루함을 느낀 적이 없다고 하셨죠.”

생각해 보니 내가 어릴 때 비슷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옛 기억을 떠올리며 물기를 닦아 냈다.

긴 세월을 살아도 단 한 번도 지루한 적 없다던 그의 말을 듣고 그때의 나는 어떤 대답을 했었던가. 뭔가 중요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워낙 어릴 적 일이어서 그런지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을 되찾았다고 하여 그 모든 대화를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눈을 내리깔며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으니 익히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대답이 들렸다.

“아니, 느끼게 되었어.”

나는 몸을 닦던 것을 멈추고 그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거대한 나무에 가려져서 그의 뒷모습조차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만은 바로 옆에서 속삭이듯이 또렷했다.

“널 그렇게 떠나보낸 이후 처음으로. 그리고 다섯 번이나 맞이한 너의 죽음을 목도한 이후 지루함 그 이상의 고독을 느꼈지.”

“…….”

“전자는 미래를 기약할 수 있으니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었지만, 후자는 아니었어.”

대충 옷을 꿰어 입고서 그에게 다가갔다. 다소 빠른 걸음으로 나아간 나는 나무 한 그루가 그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을 때 멈춰 섰다.

부드러운 흙과 풀이 발바닥을 감싸고 있었다. 그제야 신발 신는 걸 깜빡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신발을 다시 신기 위해 돌아가지 않았다.

살며시 나무에 손을 대자 투박한 나무껍질의 감촉이 느껴졌다. 꺼칠한 그것이 살갗에 닿았다.

밤은 고요했다. 이토록 가까이 있는데도 서로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한 걸음 더 나아갔을 뿐인데 나무에 가려져 있던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고개를 들어서 올곧게 서 있는 그의 옆얼굴을 보았다.

짙은 어둠이 드리운 얼굴은 무심했다. 그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일순 숨이 막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공허한 눈동자에 생기가 돌더니 그린 듯한 미소를 지은 그가 날 끌어안았다.

“처음 네가 죽었을 때, 소원을 이뤄 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매 순간이 미치기 직전이었어. 아니, 어쩌면 이미 미쳐 있었는지도 몰라.”

그는 내 머리칼을 한 움큼 쥐어 들었다.

제대로 말리지 않아서 물기에 젖어 있었다.

살짝 눈을 내리깐 그는 그것에 입을 맞췄다.

“너만 보면 다른 생각은 들지 않으니까.”

“……요한.”

“나를 부른 사람도 너이고, 나를 선택해 준 사람도 너인걸.”

나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로 인해 지난 감정을 반추하게 된 그의 목소리에는 옅은 불안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도록 마주 안았다.

느릿하게 그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네, 제가 당신을 선택했어요.”

이전처럼 상황이 나를 내몰아서 선택을 강요받은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순수한 나의 마음으로 그의 손을 잡고, 동행하고 있었다.

“육신이 허락하는 날까지 저는 당신과 함께할 거고,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조금의 거짓도 담기지 않은 진심 어린 말이었다. 그와 함께하리라는 말은 진리를 꺼내듯 스스럼없었다.

“수도에서의 일이 끝나고 나면 너와 어디로 갈지 생각해 봤어.”

“얘기해 주세요. 듣고 싶어요.”

샬롯의 죽음이 사실인지 확인한 이후 어디로 가야 할지 정확한 목적지를 정해 두지 않은 상태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알겠다고 할 생각이었다.

나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나와 결혼하자.”

“네, 그러도록……. 네?”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였다.

자연스럽게 긍정하던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뒤늦게 반문했다.

요한은 그런 날 보며 미소 지었다.

“나의 신부가 되어 주겠다고 했었잖아.”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 방금 전에 떠올리려고 했던 기억이 불쑥 튀어 올랐다.

어릴 적 나는 그에게 삶이 지루하지 않은지 물었고, 그는 지루하지 않다고 했다.

나는 그런 그를 신기해하며 동경했다. 그 시절, 그가 없는 삶은 지루함과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결혼이란 평생 같이 있고 싶은 사람과 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나는 그때 그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고, 그의 신부가 되는 것이 내 바람을 이뤄 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순진하게 청혼을 했었다.

아니라고 하기에는 불쑥 떠오른 지난 기억이 너무 선명하여 나는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껴야 했다.

“나만큼 자라고 나서도 그 마음이 변치 않았다면 신부로 들이겠다고 약조했는데…….”

요한은 내 몸을 단단히 받치며 나를 안아 들었다.

단숨에 눈높이가 높아졌다.

처음으로 그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혹시 마음이 변한 건가?”

그의 은색 머리칼이 달빛을 받아서 교교하게 반짝였다.

나를 올려다보는 붉은 눈동자는 기대와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옛 기억과 비교하여 더 다양한 감정을 담고 있는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네, 변했어요.”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그의 이마에 닿았다.

“그때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게 된걸요.”

나는 활짝 웃었다. 그런 나를 잠깐 멍하니 쳐다보던 요한이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을 비추는 달빛만큼 희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는 나를 내려놓더니 와락 끌어안아서 입을 맞추었다. 성마르게 이어지는 입맞춤에 호응했다.

어쩐지 평소의 입맞춤과는 달리 간지럽고, 따듯한 기분이었다.

“식을 올릴 장소는 네가 원하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말해. 폐허가 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노릇이니.”

입술을 뗀 그가 말했다. 그리고 “네가 있다면 나는 어디든 좋아.”라고 이어 말하는 그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식을 올려서 그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중요한 거였다.

장소가 어디든 그가 곁에 있다는 것으로 나는 충분했다.

“성인이 된 너를 위해 옷을 준비해 놨지만 이번 기회에 새 옷도 잔뜩 사는 것이 좋겠지.”

그가 나를 폐허가 된 신전으로 데려갔을 때 갈아입을 옷을 주었던 적이 있었다.

낡고, 오래되고, 녹슨 것이 가득한 카타콤에서 새것처럼 멀쩡했던 옷가지.

처음부터 나를 위한 것이었다.

“모든 걸 새로이 시작하자.”

“…….”

“네 말대로 지난 시간과 죄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걸 이겨 내고 함께할 수는 있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했던 지난 시간을 차근차근 떠올려봤다.

“당신과 지낼 때,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뒷산에 만개했던 꽃이 참 예뻤어요.”

만개한 꽃이 잔뜩 있는 들판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흩날리는 꽃잎이 뺨을 간질이던 그곳은, 어릴 적 내가 알던 풍경 중 유일하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제는 다 짓밟혔겠죠.”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신전처럼.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조금 안타깝네요.”

“그 꽃이 보고 싶은 건가?”

“꽃이 보고 싶다기보다는…….”

나는 지금 이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골랐다.

“다시 한번 당신과 같은 풍경을 보고 싶은 것 같아요. 저희만의 추억이니까요.”

살포시 미소 지었다.

“그렇지만 이전과 같지 않을 테니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음, 그렇다면 어디로 갈까요.”

“그래, 알겠어.”

무엇을 알겠다는 건지 묻기 직전이었다. 고개를 숙인 그가 입을 맞추었다.

가볍게 맞닿은 입술로 언어는 짓이겨졌다. 키스를 한 그는 조심스럽게 내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덜 닦았네.”

그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서 몸을 제대로 닦지 못한 채로 옷을 입었다.

머리칼도 엉망이니 그의 손끝에 물기가 묻어 있으리라는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그가 나를 놓아주고서는 가볍게 팔목을 잡아서 이끌었다.

걱정과 염려가 담긴 손길 아래에서 머리칼이 말려졌다.

물소리가 들렸다.

고요함이 우리 사이를 스며들었다.

그런 우리가 크로셀과 파이몬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 건 늦은 시각이었다.

어두운 밤이 지나, 새벽이 찾아오고 다시 출발하기 시작한 마차는 순탄하게 수도로 향했다.

* * *

수도로 향하던 마차는 저녁이 되어 한 마을에 도착했다.

우리는 마차를 맡아 줄 수 있는 여관에 묵기로 했다. 후드를 꾹 눌러쓰고 여관에 들어가자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우리를 반겼다.

얼굴을 숨기고 있는 내가 수상쩍게 보일 만도 한데 유동 인구가 많은, 제법 규모 있는 마을이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자신의 일행과 먹고, 마시고, 오늘 하루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다. 우리는 방을 잡고, 식사를 하기 위해 그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끼어들었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네 사람이 먹을 만한 음식을 주문하자 곧이어 그것이 음료와 함께 나왔다.

기다리는 동안 목이 말랐다.

나는 먼저 음식을 먹지 않고 술잔을 들었다. 자연스럽게 술을 한 모금 마시자 옆에서 요한이 내게 걱정을 담아 말했다.

“너무 많이 마시지 마.”

“이 정도는 끄떡없어요.”

고작 한 잔이었다. 내가 괜찮다는 의미에서 미소를 짓자 크로셀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정말 그럴까.”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크로셀이 말했다.

요한은 내가 취해 있을 때 별일이 없었다고 했지만 크로셀의 반응을 보니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때는 내가 생각해도 과음을 한 축이었다. 다들 함께 마시는 분위기다 보니 절제하지 못했다는 걸 인정했다.

“인간이 술을 마실 수도 있는 거지. 인간은 먹고 마시는 존재잖아.”

내가 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파이몬이 무심하게 말을 얹었다.

그는 내가 술을 마시는 걸 말리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한 잔만 마실게요. 이 정도로 취하지 않아요. 제 걱정은 하지 말고 어서 드세요.”

파이몬이 빵 한 덩이를 집어서 입에 넣었다. 음식을 섭취하는 악마를 이해하지 못하던 그는 어느새 거리낌 없이 빵에 손을 대고 있었다.

어쩌면 크로셀에게 또다시 음식 고문을 당하기 싫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나 또한 허기진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음식을 먹어 치우면서 소소하게 담소를 나누었다.

다른 테이블보다 조용한 축에 속했다. 그 때문인지 건너편 테이블의 대화가 지나치게 잘 들렸다.

딱히 듣고 싶지 않아도 제일 근처에 있는 테이블이고, 목청이 워낙 큰 탓인지 어느새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요즘 큰길에도 마물이 활보하는 데다 괴멸당한 마을까지 있다며.”

“그래, 그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마물 사냥꾼도 손쓰지 못해서 시체만 쌓인다지.”

“녀석들도 참. 마물을 처리하는 것이 업인 주제에 도리어 당하기만 하다니.”

힐끔 건너편 테이블을 보았다.

곱슬머리의 중년 남성이 쯧쯧 혀를 차고 있었다.

“마물 사냥꾼들이 일을 제대로 안 하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집 밖에 나가는 것조차 두려워하게 된 거잖아. 뭐 하는 거야, 진짜.”

마물의 정체를 알고 있기 때문일까. 투덜거리는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뭔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크로셀을 불렀다.

“크로셀.”

“응?”

“여기까지 오는 길에 마물이 많다고 했죠.”

“어, 응. 많은 편이더라.”

크로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껏 마물의 존재는 일반인에게 큰 위협이 되긴 했지만 한 마을을 괴멸시킨 적은 없었다.

마물 사냥꾼 덕이었다.

사람을 위협할 만한 적당한 공포.

공작 가문은 사람들이 자신들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그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물이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늘어났다는 건 단순히 마물이 번식했다는 의미가 아닌 누군가 의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였다.

“특히 공작령 근처가 마물로 인해 불모지가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받았잖아. 드래곤의 가호가 없었다면 공작령마저 난리가 났겠지. 이 나라에 망조가 든 게 분명해.”

“망조는 무슨. 폐하께서 멀쩡히 살아 계신데. 어떻게든 해 주실 거야.”

“그거야 그렇지만……. 요즘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 각박하잖아.”

“이게 다 가짜 반려를 황제에게 바쳐서 그런 거래.”

“가짜 반려를?”

가짜 반려라는 단어에 나도 모르게 온몸이 뻣뻣해졌다.

나와 관련된 이야기는 바깥으로 누설되지 않도록 철저히 입막음 당했을 텐데 이런 곳에서 가짜 반려 얘기를 듣게 되다니.

관련된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돌아다니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떤 목적으로 얘기가 퍼지기 시작했는지 또한.

말을 꺼낸 곱슬머리의 중년 남성은 누군가 들을까 싶어서 목소리를 낮췄다.

“륀느와 하이넨이 가짜 반려를 황제 폐하께 바쳐서 노여움을 샀다는 얘기가 있어. 그래서 마물이 날뛰게 됐다는 거니까 시간만 지나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

“아니, 그래도…….”

“아니긴 뭐가 아니야. 설마 그 얘기 못 들었어?”

“그 얘기라니?”

“호수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기적의 소녀 말이야.”

“아, 그거.”

수염이 난 남자는 곧바로 이야기를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적의 소녀.

릴리.

언니를 살려야 한다며 절박하게 나를 붙잡던 메리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얘기를 듣고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폐하께서는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권능을 부리시는데 나라를 내버려 두실 리가 없잖아. 분명 우리에게도 기적을 보이실 거야.”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릴리를 살린 것이 오로지 황제의 권능이라는 얘기를 듣게 된 크로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크로셀의 앳된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저들끼리 웃고 떠들고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하던 얘기를 멈추고 크로셀을 쳐다봤다.

분노로 얼굴을 붉힌 크로셀은 씩씩거리면서 황제에 대해 얘기하던 사람들을 노려봤다.

갑자기 생면부지의 소년에게 적대적인 시선을 받게 된 그들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이 실내를 맴돌았다.

“크로셀.”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크로셀을 불렀다.

“앉아요.”

“하지만……!”

“보는 눈이 많아요.”

크로셀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간절한 시선과 마주하게 된 나는 단호하게 소년의 말을 끊어 냈다.

“여기서 진실을 외쳐 봤자 아무도 귀 기울여서 들어주지 않아요. 아마 알고 싶지도 않을 거예요.”

“…….”

“저들에게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거든요.”

릴리를 살린 건 황제의 권능이 아니었다.

크로셀의 죄책감과 나의 개입으로 릴리는 다시 삶을 살게 되었다.

황제는 아마 기적의 소녀에 대한 소문이 돌기 전까지 릴리라는 소녀가 존재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으리라.

릴리는 한낱 평민일 뿐이고, 지난 다섯 번의 삶 중 단 한 번도 살아난 적이 없으니까.

내가 마물 사냥꾼이라고 속이며 접근했으니 그 공이 황제에게 돌아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나 또한 크로셀처럼 화를 낼 수 있다면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것이 소용없는 일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와서 모든 진실을 설명해 준다고 한들 이단으로 몰릴 뿐, 그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을 거였다.

“크로셀,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하다고 하세요.”

“내가 왜……! 아니, 알겠어.”

입술을 삐쭉 내밀던 크로셀은 내가 저의 편이 아니기 때문에 사죄를 요구한 것이 아님을 깨달은 듯했다.

볼멘소리로 “죄송합니다.”라고 중얼거린 크로셀이 털썩 주저앉았다. 저들끼리 눈치를 보던 사람들은 어린아이의 장난이었다고 생각한 건지 금세 원래 분위기로 돌아왔다.

다들 즐겁게 떠드는 와중에 우리가 있는 테이블만 비이상적인 침묵이 목을 졸랐다.

그 침묵을 깬 건 요한이었다.

“전형적인 선동과 날조로군.”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그가 한마디 툭 던졌다.

나는 술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도 뻔뻔하게 이용하고 있네요. 너무 그 남자다워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미친 척도 하던 남자였다.

무구한 소녀를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하는데 거리낌이 있을 리 없었다.

“릴리는 괜찮을까요? 저 때문에 나쁜 일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황족과 관련된 순간부터 인생이 순탄하게 굴러가지 않는 건 익히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나는 말끝을 흐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좋지 못한 생각만 계속 떠올랐다.

“그게 왜 너 때문이야. 따지고 보면 나 때문이지.”

“아뇨, 제가 크로셀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그 남자는 릴리를 영원히 몰랐을 거예요.”

“대신 죽은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아닌 상태로 있었겠지. 이 이상 자책하지 마! 계약자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는, 되지도 않은 욕심을 낸 내 잘못이라니까?!”

버럭 소리를 지른 크로셀은 빵 한 덩이를 집어서 내 입에 욱여넣었다. 얼떨결에 커다란 빵 한 덩어리를 입에 물게 된 나는 어찌하지 못하고 크로셀을 쳐다봤다.

“일단 딴생각하지 말고 먹어. 인간은 먹고, 숨 쉬면서 살아가는 존재잖아.”

반박하고 싶은데 빵이 너무 커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말하기 위해 우물거리다가 빵을 의식한 걸 눈치챈 크로셀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땅 파고 있는 것보다 뭐라도 먹는 게 훨씬 생산적이야. 먹어, 먹어.”

저번에는 파이몬에게 고문하듯이 먹이더니 이번에는 나였다.

크로셀은 제 앞에 있는 음식을 내 앞으로 밀어 주는 것도 모자라서 음식을 추가로 주문했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일단 먹고 봐. 배가 부르면 좀 더 유연하게 사고할 수 있을 거야.”

크로셀이 메뉴판을 들고 씨름하고 있는 동안 파이몬이 다정하게 말했다. 나는 입 안에 있는 빵을 꿀꺽 삼키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걱정을 한다고 하여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 이용 가치가 남아 있는 이상 함부로 대하지 못하겠지.”

내 어깨에 손을 올려서 제 쪽으로 끌어당긴 요한이 말했다. 그는 나를 위로하듯, 다독여 주었다.

“선전용으로 쓰고 있으니 네가 걱정하는 만큼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

“그 애가 복종하고 순종하며 침묵만 한다면 말이야.”

뒷말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륀느로서 살았던 내 모습과 시체처럼 창백하던 릴리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꼭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은 것만 같았다.

반복하던 운명이 바뀌어도 결국 제자리걸음이라는 얘기를.

우리의 관계도, 상황도 바뀌었는데 불길함을 떨칠 수 없었다.

“뭐 해? 안 먹고?”

주문을 마친 크로셀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날 쳐다봤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문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진지한 얼굴로 있다가 갑자기 웃으니 크로셀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또 크로셀이 억지로 음식을 물릴 것 같아서 조용히 포크를 들었다.

그렇게 불안과 위안 속에서 식사를 마치고,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1층은 식당과 주점을 하고 2층은 숙박업을 하는 전형적인 여관이었다. 아직 밤이 깊지 않은 터라 와글거리는 1층과 달리 2층 복도는 한산했다.

2인실을 두 개 잡았기 때문에 크로셀과 파이몬이 먼저 들어가고, 나와 요한이 옆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멈칫하더니 문 앞에 선 채로 말했다.

“잠시 바깥을 둘러보고 올게.”

“마물 때문에요?”

“음, 그것도 있고.”

요한은 애매하게 대꾸하고서는 빙그레 웃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어.”

날 끌어당긴 그는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마에 닿는 촉감은 익숙한 종류의 것이었다.

나는 그대로 떠나려는 요한의 옷깃을 붙잡았다.

무의식중에 일어난 행동이었다.

그가 나를 돌아보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릴 적처럼 기억을 지워서 오랫동안 헤어지자는 것도 아닌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내가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렸음을 깨닫고 부끄러워졌다.

“아니, 아니에요. 아무것도.”

잡았던 옷깃을 살며시 놓았다.

입꼬리를 올려서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날 쳐다보던 요한은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걱정하지 마. 금방 돌아올 테니.”

“네, 알고 있어요.”

더 이상 그를 붙잡지 않고 보냈다.

홀로 남은 방 한가운데에서 덩그러니 서 있다가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곧바로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괜히 이불을 목 끝까지 올려서 몸을 뒤척이고 있으니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소리가 들린 건 문이 아닌 창문이었다.

창문을 두드리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채고는 열자, 예상했던 대로 요한이 있었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너와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어.”

나는 그에게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고 싶은 건지 묻지 않았다.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나를 안아 든 그가 높게 날았다. 그의 품에 안겨서 날고 있자니 얼마 가지 않아서 달빛 아래에 소복하게 핀 흰 꽃을 볼 수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서 지면을 밟은 그가 날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여기는…….”

“같은 풍경은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비슷한 풍경 속에서 함께 있을 수는 있잖아.”

잠깐 나갔다 온다고 한 이유가 이곳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던가. 나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이런 곳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꽃향기가 났거든.”

“후각이 좋으시네요.”

“네가 바랐으니까.”

불현듯 바람이 불었다.

그의 말대로 꽃향기가 났다.

코끝에 번지는 그 향을 맡으며 흩날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하얀 꽃이 아름다웠다. 비록 어릴 적 기억과 완전히 같은 풍경은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똑같은 풍경을 보고자 말을 꺼낸 것이 아니었다.

어느덧 자라 버린 나처럼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었으니.

“감사해요. 제게 이 순간을 선물해 주셔서.”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울 수 없었다. 미소를 지은 채로 몸을 돌려서 그를 쳐다봤다.

오도카니 서 있던 그는 잠깐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예쁘다.”

그는 여전히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아닌 이 풍경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착각할 수 없었다.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나는…….”

내게 다가온 그가 손을 뻗었다.

머리칼을 훔치고 지나간 그의 손가락 위에는 꽃잎이 얹어져 있었다.

하얀 꽃잎이 희게 빛났다.

“널 만나기 위해 영겁을 살았나 봐.”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인 요한이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평소와 같이 농밀한 키스는 아니었지만 긴 여운을 남겼다.

날 만나기 위해 영원과도 같은 삶을 살아온 것 같다는 그의 고백이 각인된 것처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살포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어쩌면 그런 그를 만나기 위해 태어난 것일지도 몰랐다.

“그동안 저는 작은 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그게 제 세상의 전부였죠.”

왼손을 들었다.

내가 스스로 새긴 문양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하지만 당신을 만나고 나서 알을 깨고 나온 것 같아요.”

그가 내민 손을 잡고 나서 많은 것이 변했다. 나는 내게 강요된 하나뿐인 길과 허울뿐인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슈리엘.

내게 부여된 이름은 공작의 명령에 복종하는, 본인의 의지 없이 아름답기만 한 작품이었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 이름의 의미를 알고 나서도 두렵지 않았다.

여러 번의 실패를 거듭하면서 나는 내 이름의 의미를 새로 쓰고 있으니.

“앞으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일이 제 삶에 허락된 거겠죠.”

나는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정확히는 문양이 새겨진 곳이었다.

“그렇다고 믿고 있어요.”

나는 한참 동안 손등을 내려다봤다. 막상 입 밖으로 말을 내뱉고 나니 기분이 새로웠다.

내가 새긴 문양에 가려진 드래곤의 표식을 떠올려도 크게 두렵거나 하지 않았다. 아마 날 지탱해 주는 이들이 있기 때문일 거다.

그 생각을 하느라 주변이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오랜 침묵 끝에 요한의 목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들었다.

“나 또한…….”

말을 잇지 못한 그가 갑자기 마른세수를 하듯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 또한 그러리라고 믿고 있어.”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로 중얼거린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미세한 차이였지만 나는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얼굴은 왜 가리시는 거예요?”

나는 그가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면서 장난을 치듯이 말을 걸었다.

살짝 허리를 숙여서 아래에서 가려진 얼굴을 보려고 했다. 그가 느릿하게 손을 치워서 날 빤히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생각보다 더 다채로운 감정을 지닌 얼굴이었다.

그 얼굴과 마주하고 있자니 어쩐지 낯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지금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어떤 가식도, 꾸밈도 없었다.

이토록 선연한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처럼 그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가며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고 보니 아델린과 조슈아는 잘 있을까요? 상황이 예기치 않게 꼬여 버렸는데 아델린도 지금쯤 제 안위를 걱정하고 있겠죠.”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서 날 걱정하고 있을 아델린을 떠올렸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그녀 또한 그녀 나름대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듯했다.

눈치를 보다가 언제 한번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델린의 곁에는 조슈아가 있었고, 조슈아는 글라샬라볼라스와 계약했으니 연락을 취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떠올린 김에 바로 연락하지 않은 이유는 아델린이 나와 손을 잡았다고 하여 그 남자와 아예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델린은 진실을 알고 있을까.

아무래도 젠틸라와 관련된 소문을 조금 더 알아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누군가를 의심해야 하는 건 뼈아픈 일이지만, 공작 가문은 결국 황족과 깊게 연관돼 있어서 자연스럽게 조심스러운 반응을 취하게 되었다.

“카임은 잘 지내고 있겠죠. 마가렛 할머님께서는 카임을 직접 보고 나서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까요.”

그들을 떠올리며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토록 카임을 보고 싶어 하셨으니 몹시 기뻐했겠죠.”

“아마 그렇겠지.”

“그들이 평생 행복을 안고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는 동화를 믿지 않지만, 좋아해요. 노력한 것 이상의 보상을 받으면서 누구도 불행하지 않잖아요.”

동화는 환상이었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기에 매력적이며 찬란하게 빛나는 이야기.

“게다가 꽉 닫힌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데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와 함께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리에 앉게 되었다.

내가 작게 하품을 했다.

요한이 제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눕게 되니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었다. 탁 트인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동안 앞만 보고 묵묵히 나아가느라 하늘을 제대로 올려다보지 않은 지 꽤 오래됐다는 걸 깨달았다.

“죄투성이가 되어도 단념하지 않고 살아 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요즘 자주 들어요.”

사람은 수많은 죄를 짊어지며 살아간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많은 흉터를 인정하며 나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죽으면 그 이후가 없지만, 살아 있으면 희망을 좇을 수 있잖아요.”

이 모든 것이 살아 있기에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고통도, 절망도, 행복도, 기쁨도.

언젠가 내 삶은 지옥과 마찬가지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낙원에 도달했노라 단언할 수 있었다.

지옥과 낙원.

정반대되는 단어를 살아 숨 쉬고 있기에 쓸 수 있었다.

질식될 것처럼 꽃향기가 짙게 풍겼다. 나는 천천히 호흡했다.

차가운 밤공기와 뒤섞인 향기는 서늘하게 나를 적셨다.

그의 온기에 기대어 내 머리칼을 쓸어 주는 손길을 느꼈다.

평온했다. 나는 그의 다리에 가볍게 뺨을 비볐다.

졸음이 몰려왔다.

“원한다면 네게 이 세상을 선물해 줄게.”

두 눈을 느릿하게 끔뻑였다.

여기서 자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데 하루의 긴장이 풀린 건지 육체는 정신의 제어를 벗어나고 있었다.

나는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멀어지는 그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았다.

“대신 네가 보여 주는 것만 보고, 네 사랑만 먹고, 너만을 갈망하며 살 테니 너도 그렇게 살아 줬으면 좋겠어.”

“……네? 죄송해요. 제대로 듣지 못했어요.”

“아니야, 아무것도.”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한 것 같은데 고개를 젓는 그를 보니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얀 꽃잎처럼 반짝이는 그의 은색 머리칼과 까만 밤하늘을 수놓은 별 무리.

내가 살면서 본,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 * *

마물은 들끓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다.

절망 속에서 사람들은 더욱 드래곤을 믿고, 의지했다.

자신을 구원해 주리라 믿는 사람들의 열망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나는 그것이 그 남자가 원하는 바이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 계속될 것이란 걸 알았다.

반복되는 절망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는 사람들이 거짓된 희망을 좇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만들어진 세계에서 의도된 시련을 내려 주어 단 하나의 절대적인 존재를 믿게 했다. 그 끝이 결국 관습을 깨는 길이니 누군가는 필요한 희생이라고 할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진실을 알고 나니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마물을 처리하다 보니 일정은 자연스럽게 지체되었고, 수도에 도착한 건 새벽녘이었다.

새벽안개가 시야를 희뿌옇게 지워 냈다.

아직 빛이 스미지 못한 도시는 어두웠다.

나는 하얀 백합 한 다발을 품에 안고 묘지에 들어섰다.

예배당 뒤뜰, 고위 귀족만이 묻힐 수 있는 터에는 묘지기가 지키고 있었지만 경비를 뚫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앞장서서 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훑어보며 걸었다. 고위 귀족들의 이름이 차례대로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가 한 이름을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샬롯 하이넨.

비석에 선명히 새겨진 그 이름은 오랫동안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그것이었다.

한쪽 무릎을 꿇어서 품에 안고 있는 꽃을 내려놓았다.

그녀가 살아 돌아온 이후에도 무덤은 치우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공기가 폐부에 들이찼다.

나는 비석에 깊이 새겨진 이름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더듬어 보았다.

만약 땅속에 묻혀 있는 샬롯이 진짜라면 지금 샬롯의 행세를 하는 이는 누구일까.

여기까지 오면서 끊임없이 내게 물었던 질문이었다.

륀느는 마법을 이용하여 눈속임을 했지만, 내가 봤던 샬롯은 그 눈속임조차 없었다.

“진실을 알고 싶다고 했지?”

내 옆으로 다가온 요한이 물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감당하지 못할 진실이라고 해도 이겨 낼 자신이 있는 건가?”

“진실은 항상 제가 감당하기에 벅찬 무게를 지니고 있었어요. 하지만 뭐든지 대가가 필요한 거잖아요.”

비록 내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거짓이 안온함을 준다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환상에 기대어 살아갈 수 없었다.

“저는 그것을 이겨 낼 각오로 여기까지 왔어요.”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요한이 고갯짓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크로셀과 파이몬이 무덤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무덤을 파헤쳤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두 눈으로 직접 봐야 납득할 수 있을 거야. 인간으로 살아온 네가 말로만 듣는다면 부정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녀를 만나고 싶어 했잖아.”

요한의 목소리는 지독히도 덤덤했다. 일말의 자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만나고자 했던 건 아니에요.”

“감당할 수 있다고 한 건 너야.”

“…….”

“그리고 진짜 그녀와 마주하길 바랐잖아. 그렇다면 이 방법밖에 없어.”

방금 전과 달리 그의 목소리에는 애잔함이 묻어 나왔다.

“나를 믿지?”

“……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크로셀과 파이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크로셀과 파이몬은 샬롯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던 건가요?”

“아니, 몰랐어. 그런데 여기 오니까 누가 무덤에 장난을 친 건 알겠더라.”

크로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어서 파이몬이 말을 덧붙였다.

“장난을 치면 흔적이 남는 법이지.”

장난이라니.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호문쿨루스와 관련된 얘기를 했을 때 네가 보였던 반응을 생각하면 저 녀석 말대로 직접 보는 편이 나을 거야.”

내가 구긴 인상을 펴지 못하고 있자 크로셀이 덤덤히 말했다.

“망자의 안식처를 건드려서 거부감이 드는 건 이해하는데 말로 설명하면 아예 못 들은 것처럼 외면하고 싶어질걸.”

대체 무엇이 묻혀 있길래 다들 이런 반응을 하는 것일까.

무덤을 파헤쳐서 관을 꺼내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굳게 닫혀 있던 관의 덮개가 열렸다.

막상 진실 앞에 서니 잠깐의 망설임이 있었다.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우뚝 서 있었다.

예배당의 삼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묵직한 울림을 남기는 세 번의 종소리는 여명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희미한 푸른빛을 맞이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오랫동안 매장돼 있던 관을 내려다봤다.

그곳에는 목 없는 시체가 있었다.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샬롯.

그녀의 시체는 누군가 목을 잘라 낸 듯이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째서…….”

관 속의 유골을 바라보았다.

두 눈을 깜빡인대도 변치 않은 진실이 망막에 아로새겨졌다.

“어째서 머리만 없는 거죠?”

“재료로 썼을 테니까.”

“재료라니요?”

내가 반문하자 요한이 이어서 말했다.

“악마는 다양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모두 인간의 바람과 맞닿아 있어.”

“…….”

“죽은 자를 살리는 건 오랫동안 인간들이 바라 왔던 소망이야. 하지만 알다시피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어.”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내가 이제껏 누누이 들었던 진리였다.

“대신 그 시체를 이용하여 살아 있는 인간을 흉내 낼 수 있지. 마치 마리오네트처럼 육신만 타인의 의지로 움직이는 거야.”

“그 말은…….”

“그래, 네가 본 건 아름답게 치장한 시체겠지.”

샬롯은 건강상의 이유로 자주 바깥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난 삶 동안 그녀를 직접 본 적은 손에 꼽았다. 그중 운명을 수긍하지 못하고 결국 그녀의 뺨을 때렸던 다섯 번째 삶을 떠올렸다.

차갑고, 창백한 뺨이었다.

느릿하게 돌아간 고개를 되돌리며 날 내려다보던 눈동자는 무기질적인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나의 비참함을 비웃기 위해 그런 식으로 쳐다봤던 것이 아니었던 것인가.

멍하니 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거북한 감정이 기저에서부터 올라왔다.

관 속의 유골을 직접 마주했을 때보다 더욱 격렬한 감정이었다.

노도 같은 감정에 휩쓸려 가만히 있자니 옆에서 크로셀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머리만 가져갔네. 이상한 놈이야. 몸뚱이를 전부 쓰면 되지 왜 굳이 머리만…….”

“얼굴만 멀쩡했거든요.”

생각보다 더 덤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황궁으로 들어가기 전 륀느 공작과 나눴던 대화와 젠틸라 공작이 내게 털어놓았던 진실을 되새김질했다.

“그 남자가 찢어발겨서 머리 빼고는 멀쩡한 부분이 남지 않았을 거예요.”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그림자는 영혼 없는 껍데기일 뿐이었다. 그것도 죽은 자를 능욕하며 만들어진.

진실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처참하고 암울했다.

“드디어 나타났군.”

“예? 그게 무슨…….”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요한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따라서 눈길을 돌리니 멀리서 검은 모자를 눌러쓴 기다란 붉은 머리칼의 여성이 다가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진실은 영면하게 두어야 하는 법.”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 얼굴을 보지 않았음에도 본능적으로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너의 야만스러운 호기심이 나를 불렀구나.”

“……샬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동시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감춰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진실에는 항상 대가가 필요하지.”

맞은편에 있는 상대는 의심할 것 없이 샬롯이었다.

내 기억 속처럼 무기질적인 눈빛을 한 그녀가 날 쳐다봤다.

“진실을 목도한 자여, 너의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라.”

그렇게 말한 그녀가 검을 뽑아 들고는 내게 달려들었다.

나를 향한 살의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으나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억지로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상처를 입었을지도 몰랐다. 몸이 뒤로 넘어가는 것과 동시에 시간이 느릿하게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발아래에서 내가 들고 온 꽃이 처참히 짓밟히고, 날카로운 검날이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명백히 날 죽이려는 의도로 검을 휘두른 샬롯은 건조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 공격을 위해 검을 다잡았다.

“썩은 내가 지독하게도 풍기는군.”

나를 끌어당긴 요한이 인상을 사납게 구기며 일갈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혐오가 배어 있었다.

“관을 연 자를 직접 처단하도록 손을 썼다는 건 일찍이 눈치챘지만, 실제로 보니 더 끔찍한 몰골이야.”

“그래 봤자 인간이고, 시체일 뿐이잖아. 아니, 시체를 엮은 것이니 인간보다 형편없을지도.”

요한은 서슴없이 샬롯을 비난했고, 어느새 창을 든 파이몬은 당장이라도 그것으로 샬롯의 심장을 꿰뚫을 것처럼 굴며 요한의 말을 맞받아쳤다.

크로셀 또한 조용히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샬롯을 번갈아 보았다.

“제가…….”

나는 요한의 품에서 벗어났다.

“제가 혼자 싸우게 해 주세요.”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손끝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처음 검을 들게 된 계기는 그녀 때문이었어요.”

륀느 공작은 하이넨을 경멸하는 만큼 검술을 비천하게 여겼다. 처음 내가 검을 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렇게까지 샬롯을 따라 할 필요가 없다며 비웃기까지 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내 노력을 알아봐 주리라고 믿었던 그 남자는 끝내 날 죽였다.

누군가는 날 알아봐 주길 바랐지만, 결국 타인의 경멸만을 안고 그 삶은 끝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다시 찾아온 삶의 기회에서 많은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이것이 그동안 뒷모습만 쫓았던 그녀의 실체라면 제 손으로 이 인연을 끊고 싶어요.”

일방적인 악연이었다.

이제 그 끝을 맞이할 때가 되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요한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나설 거야.”

“비록 그녀가 살아 있을 때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지만 저는 그 누구보다 그녀를 잘 알아요.”

나는 샬롯이라는 한 사람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겉모습만큼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동등할지언정 굴복하지 않아요.”

붉게 타오르는 검을 들고서는 샬롯에게 다가갔다.

검이 부딪쳤다. 날카로운 굉음이 귓전을 때렸다. 내 빈틈을 노리는 그녀의 검술은 사나웠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직접 부딪쳐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샬롯이었다. 그토록 내가 뛰어넘으려고 애썼던 그녀.

빈껍데기일 뿐인 그녀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깊게 파고드는 검을 맞받아쳤다. 언뜻 보면 비등한 실력이었다.

눈앞에 있는 그녀는 죽기 전의 샬롯의 실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녀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했으니.

그러나 나는 오로지 그녀의 등만을 쫓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를 뛰어넘기 위해, 그녀를 따라잡는 사람만 되지 않기 위해, 나 홀로서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미 그녀의 검술을 숱하게 따라 해 보았기에 검을 피하면서도 거세게 밀어붙일 수 있었다.

내가 쉴 틈 없이 맹렬하게 공격하자 샬롯은 점점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빈틈을 노려서 발을 걸었다. 중심을 잃은 샬롯이 뒤로 넘어졌다.

보통 인간이라면 뒤로 넘어졌을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손을 짚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최소한의 자기 보호조차 하지 않았다.

넘어진 그녀의 위에 올라서서 그대로 칼을 내리꽂았다.

그녀의 귀 옆에.

그리고 공허하게 나를 올려다보는 녹색 눈동자와 마주했다.

나의 승리였다.

“살려…….”

그녀는 오로지 날 죽이기 위해 이 자리에 있었다.

그녀를 베지 않는 이상 계속 날 공격할 것이란 걸 알았다.

그렇지만 차마 이 이상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샬롯이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

“살려 줘…….”

“…….”

“……죽고 싶지 않…….”

그녀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커다란 손이 샬롯의 얼굴을 덮었다.

꿈틀거리던 샬롯은 그 후로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요한이 있었다.

“귀 기울여서 들을 필요 없는 헛된 말이야.”

“……하지만 분명 살려 달라고 했어요.”

“이미 죽었어. 불리한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도록 입력한 것이겠지. 네 목숨을 취하기 위해.”

일말의 동정심도 찾아볼 수 없는 냉정한 발언이었다.

그는 의미 없는 말이라고 했지만 죽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마지막 말이 계속 귀에 맴돌았다.

멀찍이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크로셀과 파이몬이 다가왔다.

그들은 샬롯을 꼼꼼히 살폈다.

“몸 하나에 머리를 붙인 게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몇 개를 기워 붙인 거야.”

“하나, 둘, 셋…….”

크로셀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고 파이몬은 두 팔과 두 다리 그리고 몸뚱이를 차례대로 가리켰다.

“다섯 개네.”

“다섯 개요?”

“응, 다섯 명의 시체를 조각내서 이어붙인 거야. 그냥 봐서는 잘 모르겠지만 미미하게 기운이 느껴져.”

문득 샬롯이 죽은 이후로 일어났던 연쇄 살인 사건이 떠올랐다.

그때 알려진 피해자 또한 다섯이었다.

내가 알기로 샬롯이 돌아올 시기가 되었을 때는 더 이상 살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어째서 샬롯이 돌아오는데 약 일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는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젠틸라 공작은 악마를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실현했다. 하이넨 공작이라고 해서 그 힘을 이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한때 내 앞에서 오열했던 하이넨 공작은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으로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자식을 아끼는 부모라면 이런 짓을 하는 데 동의하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제 것이라고 굳게 믿었지만 샬롯의 죽음과 동시에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는 것에 혈안이 돼 있었던 것이다.

젠틸라 공작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개인적인 욕망에 이끌려 악마의 힘을 빌린 것뿐이다.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던 눈물은 가지지 못한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기인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역겨웠다.

“두 개 정도면 신체가 맞지 않아서 그렇겠지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인데 다섯 개는……. 아마 재미를 위해 일부러 한 걸 거야.”

“으, 취향 한번 알 만하네. 이래서 악마들이란.”

파이몬이 무겁게 말했고, 뒤이어 크로셀은 본인이 악마인 걸 잊은 듯이 학을 뗐다.

내가 그런 크로셀을 빤히 쳐다보자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소년이 깜짝 놀라며 빽 하고 외쳤다.

“악마라고 해서 다 괴팍한 취미를 갖고 있는 건 아니야!”

“알아요.”

내가 만난 악마들은 인간과 살짝 개념이 다르긴 했지만 이토록 무자비하지 않았다.

선한 인간이 있다면 악한 인간이 있듯, 악마 또한 인간을 좋아하는 악마가 있다면 인간을 한낱 장난감 취급하는 악마가 있는 것일 거다.

나는 처참히 짓밟힌 백합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꽃은 누구도 위로해 주고 있지 않았다.

“백합을 다시 구해 주실 수 있을까요?”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지고, 탁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다.

“부탁드릴게요.”

나는 요한을 쳐다봤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금방 돌아올게.”

“네.”

내가 혼자 있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챈 그는 조용히 크로셀과 파이몬을 데리고 떠났다.

나는 샬롯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어서 부릅뜬 눈을 감겨 주었다.

한때 녹음처럼 청명하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샬롯.”

그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커다란 돌멩이가 심장을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네가 죽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만났더라면 우리는 좋은 인연이 될 수 있었을까?”

“…….”

“우리는 외모도, 성격도, 취향도 달라. 하지만 그런 세상에서 만났다면 친구 사이가 되었으리라는 예감이 들어.”

비록 나는 너라는 사람을 완전히 알지 못하지만 왠지 그랬을 것 같다.

“널 미워해서 미안해. 네게 다 가졌다고 해서 미안해. 너는 나를 알지 못하겠지만, 나는 네게 너무 많은 죄를 지었어.”

이렇게 용서를 빈다고 하여 속죄받을 수 있으리라고 자만하지 않았다. 당연히 해야 할 사과이기 때문에 하는 것뿐이었다.

모두가 떠난 무덤은 고요했다.

내가 입술을 다물자 숨소리조차 커다랗게 울렸다.

그렇기에 타인의 기척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 지난 것 같지 않은데 발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벌써 온 걸까.

지나치게 빠르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헛숨을 들이켰다.

희미한 빛 속에서도 찬란히 반짝이는 머리칼은 금색이었다.

“아.”

그 남자였다.

나는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어쩌면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점점 가까워지는 그는 여전했다.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 별반 다를 것 없는 그는 어느덧 내 앞에 서서 푸른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봤다.

“결국 진짜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되었구나.”

꼼짝할 수 없었다. 그토록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던 그가 바로 앞에 있는데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하이넨 공작의 욕심이 만든 산물이지. 더 이상 쓰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버렸군.”

샬롯을 볼 때마다 다정하던 눈빛은 마치 생면부지 타인을 보듯이 무심했다. 덤덤히 진실을 고하는 그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알고 계셨나요? 샬롯이 어떤 상태인지.”

“그래, 알고 있었지.”

“처음부터?”

남자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본인 손으로 죽였으니 알고 있었겠죠. 숨이 멎는 순간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요.”

“륀느가 그 얘기를 했을 리는 없고, 전 젠틸라 공작이 쓸데없이 입을 놀린 모양이군.”

“쓸데없다니요. 폐하께서는 그 작은 진실조차 제게 알려 주지 않았잖아요.”

“네가 굳이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어째서요?”

“너와는 상관없으니까. 그리고 네게는 좋은 이야기만 하고 싶었다.”

“좋은 이야기요? 좋은 이야기는 무엇이고, 나쁜 이야기는 또 무엇인데요! 폐하께서는 그냥 제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싶었을 뿐이잖아요.”

언성이 높아졌다.

망자의 침묵만 떠돌던 묘지에 나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한때 샬롯을 시기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이제는 당신의 손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죽었을 그녀가 불쌍해요.”

나는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볼썽사납게 넘어질 수 없었기에 이를 악물고 서서 그를 바라봤다.

“내게 죽여 달라고 부탁한 건 그녀였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차분하고 평온한 목소리로 고백했다.

“이 세상의 진실을 일찍이 깨달은 그녀는 권력에 눈이 먼 제 어미를 증오했지. 그래서 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제 어미인 하이넨에게 복수하기 위해 죽음을 자청했다.”

“…….”

“첫 만남부터 줄곧 사랑이라고는 없는 조력자일 뿐이었다. 게다가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진짜 그녀는 날 혐오했었지.”

“…….”

“드디어 진정한 영면을 맞이하게 되었구나.”

그는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샬롯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삶의 끝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날 쳐다본 것도 아닌데 서늘한 기운이 짐승의 발톱처럼 사납게 내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폐하께는 충분히 바꿀 기회가 있었어요. 샬롯의 시체가 능욕당하는 것에 동조할 것이 아니라 다가올 불행을 막았더라면……!”

“이 일로 하이넨이 자멸할 것이란 건 자명한 일이다. 그만큼 내게 좋은 기회가 주어졌는데 어째서 막아야 하지?”

그는 날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모든 진실을 알고 나서 조금이나마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 생각보다 더 철저히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

도움이 되는 것과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그의 삶에서 타인이란 그런 식으로 완벽히 분리되어 있기에 모든 걸 알면서 방관하고, 제 계획을 위해 이용한 것이었다.

“그토록 널 찾아다녔는데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따라오길 잘한 것 같구나.”

그가 내게 다가왔다.

날 잡으려는 것처럼 손을 뻗었다.

“오랜만이구나.”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내게 내밀어진 손을 쳐 냈다.

짝 하는 소리가 났다.

거부당한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폐하를 떠나고 알게 되었어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든 걸 기억하면서 절 속였다는 것이나 폐하께서 말한 사명이 무엇인지 말이에요.”

“…….”

“웃기지 않아요? 함께 있을 때보다 멀어져 있는 동안 당신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게 된 거예요.”

그가 준비한 저택에 갇혀서 그곳을 나의 세상으로 삼았다면 절대 알지 못했을 이야기였다.

지금껏 했던 것처럼 그는 꾸준히 날 속이려 들었을 테니.

“모든 걸 알면서 제게 상처만 준 폐하의 손을 잡아 주리라고 믿은 건가요?”

남자는 절박하게 외치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한때 나의 하늘이었던 푸른 눈동자는 회한에 젖어 있는 듯했다.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운을 띄웠다.

낮고 진중한 목소리였다.

“너는 륀느의 개일 뿐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 삶에서 네가 지난 시간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륀느 공작이 손을 썼다고 생각했지.”

“…….”

“륀느가 내 계획을 알고 있다면 너는 쓸모없는 패였다. 그래서 죽였다.”

나를 죽였음을 순순히 인정하는 그의 목소리는 지독히도 냉정했다.

“하지만 아니었지. 세 번째 삶에서도, 네 번째 삶에서도 그리고 다섯 번째 삶에서도. 모두가 바뀌지 않는데 우리 둘만이 같은 시간을 살아간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

“세 번째 삶에서는 널 의심했고, 네 번째 삶에서는 널 부정했으며 다섯 번째 삶에서 널 사랑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지.”

“…….”

“사랑. 내가 그토록 하찮게 여겼던 사랑이라는 걸 네게 느낀 거다.”

나를 사랑한다고 덤덤히 고백하는 그를 보며 나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공포스러울 뿐이었다.

“너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거짓말쟁이.”

나는 뒷걸음질 쳤다.

서슴없이 그를 비난하는데도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올곧게 날 쳐다봤다.

“다섯 번째 삶에서 저를 사랑했다고 하셨죠.”

한마디, 한마디 게워 내는 것이 힘들었다.

말을 할 때마다 토사물이 올라올 것 같았다.

“저를 고문하라고 명령을 내리셨잖아요. 그런데도 사랑인가요?”

“결국 엘릭시아가 너의 것이 될 테니 상관없다고 여겼다. 몸소 겪어 봤지 않느냐. 엘릭시아의 기적을.”

인공적인 생명체를 만드는 것도 모자라 시간을 되돌릴 힘을 갖고 있는 엘릭시아. 그것이 내린 기적이라면 직접 겪어 봤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짓뭉개졌던 나를 멀쩡히 살렸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몸의 상처를 없앨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가 짊어질 아픔을 외면했다는 말이 아닌가.

“제가 느낄 고통은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손까지 벌벌 떨고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러면 조금이나마 괜찮아질까 싶어서.

손톱이 뽑히고, 혀가 잘리고, 두 눈이 뽑히고, 채찍질 당했던 기억이 무너진 둑처럼 머릿속에 밀려들었다.

“제가 느낄 고통은 전혀 생각하지 않으신 건가요?”

“내가 아는 너라면 극복할 수 있을 테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 내가 널 사랑한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데 그것으로 된 것 아니냐.”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숨 쉬는 것이 힘들었다.

“하이넨은 너를 징벌하길 원했고, 나는 이 연극을 끝내기 위해 맞춰 주는 척해야 했지. 내가 너를 감쌌다면 그들은 날 의심했을 거다.”

“…….”

“일을 복잡하게 만들 바에 네가 죽었다고 속여서 중간에 빼돌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지. 비록 그 전에 네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지만.”

한숨을 내쉰 남자는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너는 항상 내 계획에 변수였다.”

내가 그의 계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고 탓하는 듯한 어조였다.

나는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쥐어짜 내야만 했다.

“어째서……. 어째서 직접 말해 주지 않으셨어요? 저희에게는 시간이 많았잖아요. 그중 단 한 번이라도 제게 얘기해 줬다면 적어도 이해할 수 있었을 거예요.”

우리에게는 수많은 시간이 있었다.

이번 삶만 하더라도 그러했다.

그러나 긴 시간 동안 그는 내게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모든 진실은 타인의 입을 통해 들어야 했고, 그 과정은 내가 직접 부딪치고 맞서 싸우며 쟁취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는 내가 얼마나 우매하게 살았는지 스스로 깨우쳐야만 했다.

“만약 조금 더 일찍 너의 진심을, 나의 마음을 인정했다면 쉽게 고백할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네 번이나 널 죽이면서까지 나는 이 사명을 이뤄 내고자 했는데 당장 내 손에는 아무것도 없더구나.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갔으니까.”

시간을 되돌리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 말은 지난 삶의 노력이 모두 무효가 된다는 뜻도 되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망가져 버린 너를 보고 있자니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가족의 사랑을, 연인의 사랑을 바랐지만 그 모든 것이 신기루일 뿐이라는 걸 깨닫고 단념한 것이 이번 여섯 번째 삶이었다.

나는 이번 삶에서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때 나를 밀어내는 그를 이겨 내지 못하고 넘어졌었다. 몸이 망가졌기 때문에 버티지 못한 것이었다.

그날, 그가 흘렸던 눈물은 날 위한 것이었을까.

“……결국 끝까지 숨길 생각이셨군요.”

그가 망설였다고 하여 내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지난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을 뿐인데 너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더냐. 그 얼굴을 보고 어찌 내 입으로 진실을 말할 수 있겠느냐. 지금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있구나.”

내 뺨을 훔쳐 주려는 듯, 손을 뻗으려던 그가 멈칫했다.

“변명 같은 얘기를 늘어놓아서 당장 네게 미움을 받을 바에 차라리 내가 만들고자 하는 미래를 보고 나면 나를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네게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

“너는 끝까지 내 품에서 벗어나려고만 하더구나.”

그는 내게 미움받을 용기가 없었던 거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 두려워서 거짓으로 꽁꽁 감싸려고 했었다.

“이제야 알았어요.”

우리는 기나긴 시간을 함께했지만 단 한 번도 서로가 진심이었던 적이 없었다.

내가 진심으로 부딪쳤을 때는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었고, 그가 진심으로 날 대하려 했을 때는 내게 희망이 남지 않았다.

그렇게 너무나 긴 시간이 흘러서 나는 처음으로 그의 진심을 듣게 되었다.

“폐하께서는 저를 사랑하셨군요.”

나는 항상 그의 사랑을 의심했다.

처음부터 거짓으로 엮인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폐하를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은 저밖에 없잖아요.”

가장 높은 곳에 군림하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없었다.

신앙은 공포에서 온다.

이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숭배하고 있지만 기저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그것을 진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유일한 반려라고 알려진 샬롯마저 그를 혐오했다.

이 세상에서 오로지 나만이 그를 사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저는 더 이상 폐하를 사랑하지 않아요.”

나는 입꼬리를 올리려고 노력했다.

언젠가 요한이 내게 예쁘다고 했던, 행복으로 기인한 미소를 짓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제게 절망만을 안겨 줬던 당신과 달리 희망을 알려 준 남자예요.”

요한을 만난 이후 살면서 처음으로 행복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서 인연을 맺고, 부딪치고, 인정하고, 헤어지고.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그토록 동경했던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륀느로 살았을 때처럼 철저히 고립된 채로 한 가지 길을 강요당하지 않았다.

거대한 괴물이 뒤를 쫓는 듯한 두려움 또한 느끼지 않으며 눈앞에 있는 상대가 언젠가 내 목을 조를 거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더는 두렵지 않아요.”

“…….”

“그러니 각자의 길을 가도록 해요. 폐하를 방해하지 않을 테니 저를 잊고…….”

“너는 속고 있는 거다.”

남자는 다소 성급하게 내 말을 끊었다.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속고 있지 않아요. 오히려 저를 줄곧 속였던 사람은 폐하셨잖아요.”

“널 위한 것이었지.”

“아뇨, 폐하께서는 그저 비난받는 것이 두려워서 도망친 것뿐이에요. 저를 위한다는 구실을 내세우면서요.”

남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정곡을 찌르자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슬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네가 악마를 권속으로 삼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정말 그들을 믿느냐?”

“네, 믿어요.”

믿는다는 말이 스스럼없이 나왔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던 남자는 한숨처럼 한 단어를 내뱉었다.

“슈리엘.”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샤샤. 항상 그렇게 부르던 그가 진짜 내 이름을 불러 주었다.

나는 돌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처음으로 제 이름을 불러 주셨네요.”

“내가 너무 늦게 네 이름을 알게 되었구나. 하지만 이제 상관없다.”

“상관없다니요?”

그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슈리엘.”

그 목소리로 날 부르는 것이 너무 낯설어서 당황하는 사이 남자의 손이 내 뒤통수를 감쌌다.

몸이 밀착됐다. 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항했다.

하지만 날 단단히 안은 그는 밀려나지 않았다.

“내가 네게 보여 주고자 했던 그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가 오면 너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게 되겠지. 그러니 잠시 모두 잊고 살아가는 거다.”

그가 버둥거리는 날 붙잡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 곁에서.”

“그게 무슨…….”

온몸에 힘이 빠졌다.

나의 반항은 무의미한 것이 되었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은 무너져 내렸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어리석었구나.”

벗어나야 해.

도망쳐야 해.

“돌아가자,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요한.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그의 이름이 입 안을 맴돌다가 허공에 흩어졌다.

어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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