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1)
남자의 품에 안겨서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뒤로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다급한 크로셀의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아, 주인님아. 정신 좀 차려 봐. 아무래도 우리 잘못 나온 거 같아.”
“빠져나오는 데 급급해서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나오긴 했지.”
“그런데 이건 좀 많이 잘못된 거 아니야?”
크로셀과 남자의 대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한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우기 이전에 짭조름한 냄새가 났다. 누군가 찬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하늘과 물이 맞닿아 있었다.
땅이 아닌 넓고 깊은 물과.
나는 항상 그림으로만 보던 바다가 실제로 눈앞에 펼쳐졌다는 걸 깨닫고 멍하니 있다가 큰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장, 진짜로 그림에서 사람이 나왔다니까요! 일단 너무 당황스러워서 당장 선장한테 달려왔는데 다시 그림 속으로 들어갔으면 어쩌지. 아, 아직 있네요.”
“술 마셨냐? 그림 속에서 사람이 나왔다니. 헛소리도 작작 해야 믿지.”
여자 둘이었다. 하소연을 하던 여자는 젊은 축에 속했고, 신랄하게 대꾸하는 여자는 그보다 나이가 있었으며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터라 그들을 쳐다보고 있자니 모자를 쓰고 있는 쪽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사람이 아니잖아.”
그녀는 차례대로 나와 악마들을 훑어보았다.
“악마 셋에 인간 하나. 아니, 인간은 맞는 건가?”
여자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하자 그녀의 어깨 위로 인어의 형체를 한 물 덩어리가 나타나서 대꾸했다.
몸체는 반투명했지만 눈 색만은 선명했다. 붉은색이었다.
나는 곧바로 그것이 악마라는 걸 알아챘다.
“인간은 인간인데 현자의 돌을 갖고 있어.”
“그렇다면 황제와 관련이 있겠군. 예전에 반려가 살아 돌아왔니 뭐니 하면서 주위에서 떠들던 기억이 있는데, 그 반려인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고귀하신 몸이 어째서 그림 속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육지에 도착하자마자 제국군에게 넘기면 되겠어. 돈을 제법 많이 주겠지.”
“저는 반려가 아니에요.”
이곳은 바다 위였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들이 소유한 배 위.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꼼짝없이 팔려 갈 신세가 될 듯해 빠르게 대답했다.
“현자의 돌을 갖고 있는데 반려가 아니라고?”
전혀 믿지 않는 듯한 어조로 말한 여자가 갑자기 검을 꺼냈다. 그리고 내게 휘둘렀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미처 내가 반응하기 전에 빙벽이 생기고, 은발 남자가 내 앞에 서서 검을 막아 주었다.
“아직 서로 인사도 안 한 것 같은데 무기부터 들이대다니. 진도가 참 빠르군.”
검을 맞댄 남자가 사납게 일갈했다.
“남의 배에 멋대로 승선한 주제에 주절주절 말이 많은 악마라니. 골치 아프게 됐어.”
처음부터 날 해칠 목적으로 공격한 것은 아니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여자가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뭐, 일단 반려가 아니라는 말은 믿어 주지.”
여자는 손목을 매만지며 이어서 말했다.
“반려라면 결국 황족의 후계를 잉태하는 그릇밖에 더 되던가. 그런 존재가 악마와 친근하게 다닐 일은 있을 수 없으니까 말이야.”
현자의 돌과 드래곤의 심장이 동일 명칭이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계약자인 듯한데, 내가 악마와 친하니 이번 한 번은 눈 감아 주겠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묘하다 못해 귀찮은 일에 휘말린 기분이 들지만 일단은 환영해 주지. 그보다 아직 쓰러져 있는 악마는 괜찮은가?”
나는 뒤를 돌아봤다. 9번째 악마는 아직 정신을 잃은 채로 누워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그 상태로 있어서 그렇지, 곧 정신을 차릴 거야.”
남자의 말을 듣고선 안도의 한숨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봤다. 주변에는 이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유추할 수 있는 아무런 지표도 없었다.
그저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
말 그대로 망망대해였다.
“……죄송한데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내가 묻자마자 여자는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 * *
자신을 ‘프리실라’라고 소개한 여자는 이 배의 선장이자 예상대로 계약자였다.
이미 짐작했던 탓인지 그녀가 계약자라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으나 이 배가 해적선이라는 얘기는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그녀는 내 반응을 보고서는 그냥 먹고 사는 일을 찾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고 호탕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요즘 소탕한 배마다 장인이 그린 그림만 잔뜩 싣고 있는 탓에 헛물만 들이켜고 있어서 현재 항구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보는 앞에서 시원스럽게 바다로 그림을 버렸다.
악마를 믿는 이 배에서 이런 그림은 불길할 뿐만 아니라 돈도 안 된다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악마와 관련이 없었다면 이 배에서 추방당하거나 노역자가 되었지 않았을까 싶었다.
악마와 엮이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 배에 타게 될 일은 없었겠지만.
어쨌든 일이 잘 풀려서 호의를 입게 되었다.
무려 선장의 가호 아래, 빈 객실을 하나 얻어서 9번째 악마를 눕혀 놓을 수 있었다.
“설마 깨어나는 데 몇 년이 걸리는 건 아니겠죠?”
언뜻 보기에 9번째 악마는 죽은 것 같았다.
그들의 시간 감각이 조금 이상하다는 걸 이전 경험을 통해 깨달은 내가 불길함을 담아서 묻자 남자는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정도는 아니야. 원한다면 당장 깨워 줄 수 있어.”
“지금 당장이요?”
“그래, 충격 요법만큼 제대로 된 방법은 또 없으니까.”
“무력을 쓴다는 말이네요.”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지.”
그래도 너무 과격한 건 아닐까.
내가 고민하고 있자 자신을 42번째 악마라고 소개한 물 덩어리가 끼어들었다.
“너 정말 네 마리를 권속으로 삼은 거야?”
“네? 네.”
악마는 내가 신기한지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가까이 다가왔다.
“나머지는 어디 있어?”
내게 치근대는 악마가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나는 착실히 대답해 주었다.
“한 마리는 먹혔고, 한 마리는 쉬고 있는 중인데요.”
“먹혔다고?”
“네, 저분이 먹었어요.”
내 허락만 떨어진다면 9번째를 주먹으로 내리칠 준비를 하고 있는 남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목당한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우와, 신기하다. 네가 현자의 돌을 갖고 있어서 가능한 일인가 봐. 보통은 한 마리만 권속으로 삼으려고 해도 미쳐 버리기 십상이거든.”
“아, 그런가요?”
“응, 그래서 그런데 한번 이 자리에 모두 부르면 안 돼? 사실 나 외에 악마를 보는 건 처음이라 다른 악마는 어떻게 생겼는지 너무 궁금해.”
이 악마는 자신의 호기심이 충족되기 전까지 내게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까 말했듯이 하나는 먹히고, 하나는 쉬고 있어서 불가능해요.”
“주인인 네가 충분한 힘을 갖고 있으니 부르면 둘 다 당장 나타날 텐데?”
“잡아먹혔는데요? 죽은 거 아니에요?”
“죽었다니? 먹힌다고 소멸할 수 있었다면 이미 예전에 멸종했을 거야.”
잡아먹히는 장면을 직접 두 눈으로 본 터라 카임이 죽었다고 단정 짓고 있었다.
그런데 살아 있다니.
나는 남자를 바라봤다.
“다 알면서 입 다물고 있었던 거예요?”
내 시선이 닿자 남자는 9번째를 향하던 주먹을 슬쩍 치웠다.
“제가 비난했을 때 왜 얌전히 있었어요?”
“실제로 내가 힘을 다 흡수했으니까. 무리해서 불러냈다가는 쓰러졌을 거야.”
카임이 살아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 무리해서 불러냈을 거다.
하겐티 때만 해도 그랬다. 당시에는 신뢰라는 것이 덜 쌓여서 일부러 그의 앞에서 하겐티를 부르고 쓰러졌지 않았던가.
“그리고 제아무리 내게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한들 상심한 너를 달랠 방법은 없으니 차라리 내가 비난받는 편이 나았지.”
“먹지 않았으면 됐잖아요.”
“그땐 널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눈이 멀어서 힘을 얻기에 급급했으니까.”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내 앞에 서 있지만 그때는 육신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어서 고양이의 육체를 빌려야 했다.
새삼 그때를 떠올리니 그도, 나도 여유가 없었구나 싶었다.
“처음부터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널 위해서라고 했지만 결국 독선적인 방법이었으니까. 비난하고 싶으면 비난해.”
남자는 모든 것이 다 제 잘못이라고 덤덤히 고하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살아 있는 것부터 확인할게요.”
카임, 하겐티.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예전에는 하겐티를 불렀을 뿐인데 기절하고 말았으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별다른 무리 없이 익히 알고 있는 두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임은 내 기억과 똑같았고, 하겐티는 마물이었던 때와 달리 작은 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악마가 두 마리 늘었을 뿐인데 원래부터 많은 인원을 수용했던 탓인지 객실이 좁게 느껴졌다.
“우와, 오랜만이야. 안 본 사이에 동족이 많아졌네. 너는 강해져 있고.”
카임이 큰 소리를 냈다.
“이게 다 몇이야.”
크로셀은 넋을 놓았고,
“정신없군.”
남자는 이 분위기가 영 익숙하지 않은 건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외에 물 덩어리는 굉장히 좋아하고 있었고, 하겐티는 별말 없이 조용히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9번째도 깨워 주실래요?”
“그래.”
결국 9번째 악마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내가 요청하자 남자는 일말의 자비 없이 9번째를 때렸다.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악마는 한 대 맞자마자 번쩍 눈을 떴다.
“결국 다 모였네요.”
남자가 말했던 72마리를 모두 모은 건 아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악마만 해도 수가 제법 되었다.
악마들이 잔뜩 모여 있으니 내가 원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더 정확히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친목 도모도 좋지만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어요.”
붉은 눈동자가 단번에 내게로 몰렸다. 나는 9번째 악마를 보며 말했다.
“모든 일이 갑작스럽겠지만, 저 또한 시간에 쫓기는 입장이라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길게 설명할 것 없이 바로 용건부터 꺼냈다.
“당신들이 현자의 돌이라고 부르는 걸 부수고 싶어요. 당신이라면 할 수 있다고 들어서 부탁드리는 거예요.”
“뭐?”
내 말이 끝나자마자 9번째가 아닌 물 덩어리 쪽에서 반응이 나왔다.
그것은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너 지금 현자의 돌을 부수고 싶다고 쟤한테 부탁한 거야?”
“네, 어쩌면 가능하다고 해서요.”
“그 소리 한 게 누구야?”
멍하니 서 있던 크로셀이 슬쩍 손을 들었다. 물 덩어리는 쯧쯧 혀를 찼다.
“이래서 오랫동안 봉인돼 있거나 인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들이 어설픈 지식을 뽐내면 이 꼴 난다니까. 쟤한테 부탁하면 죽여 달라는 말밖에 더 돼?”
잔뜩 혼이 난 크로셀은 무어라 반박하려다가 말았고, 물 덩어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인간인 네가 현자의 돌을 없애고 싶다고 했지? 그걸 체내에 없앨 수 있는 방법은 딱 두 가지야.”
“무엇인가요?”
“죽어서 다른 인간한테 넘겨주거나.”
이 얘기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나는 그 뒤에 이어질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원래 목적대로 호문쿨루스를 잉태하거나.”
“……호문쿨루스라니요?”
호문쿨루스.
처음 듣는 단어였다.
내가 의문을 표하자 그것이 단호하게 정의를 내렸다.
“인간이 금기를 어기고 만든 인공적인 생명체. 호문쿨루스. 너희 인간들이 믿는, 만들어진 신 말이야.”
“잠시, 잠시만요. 만들어진 신이라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요.”
혼란스러웠다. 인간이 신을 만들어 내다니.
그것이 진정 신이 맞는지 논하기 이전에 이율배반적인 일이 아닌가.
“네가 알고 있는 이 제국의 신화에 대해 말해 봐.”
다른 악마들은 이 모든 걸 알고 있었는지 나와 달리 차분했다.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내가 알고 있는 신화에 대해 털어놓았다.
“아주 오래전, 이 세상에 악마가 들끓어서 인간들은 절망에 빠졌고 하늘에서 드래곤이 내려와서 다섯 사도와 함께 악마를 무찔렀어요.”
“그래서?”
“그래서…… 드래곤은 왕이 되었고, 다섯 사도에게 작위를 주었죠. 그리고 사도들의 후손에게 돌아가며 반려 자리를 주겠다고 약조했어요.”
당혹스러운 와중에 최대한 구체적으로 건국 신화를 얘기하려고 노력했다.
내 얘기를 들은 물 덩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너희들이 알고 있는 신화는 그렇지. 그런데 그 얘기에는 본질적으로 진실과 다른 점이 있어.”
“다른 점이요?”
“그 다섯 사도라고 불리는 자들이 드래곤에게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직접 드래곤을 만들어 냈다는 거야. 창조한 거지.”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원래라면 불가능하지만 기적적으로 현자의 돌을 만들어 내서 가능하게 되었어.”
“하지만 그는 신인걸요. 인간이 신을 만들어 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내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진실은 부정하고픈 마음부터 들게 되었다.
“애초에 신이라는 게 무엇인데?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 아니면 인외 존재? 아니, 너희가 믿고 숭상하는 그것이 바로 신이야.”
물 덩어리는 냉정하게 말했다.
“인간은 저보다 강한 존재를 신격화하기 좋아해. 멋대로 숭배하다가 배반당했다며 믿음을 저버리지.”
“…….”
“멀리 갈 것 없이 우리만 봐도 그렇잖아. 절대다수가 드래곤이라는 신을 믿게 되니 우리는 악마라고 명명되고 있어. 우리 입장에서 보면 드래곤이야말로 거짓된 신인데 말이야.”
물 덩어리는 쓰게 웃었다.
“너희가 신이라고 믿으며 드래곤이라고 부르는 그 황제는 다섯 사도의 꼭두각시일 뿐이야. 그들의 욕심으로 철저하게 계획되어 탄생한 생명체지.”
“하지만…….”
대충 휘갈겨 쓴 글씨처럼 발음이 형편없이 꼬이고 있었다.
나는 몇 차례 헛숨만 내뱉으며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인위적인 존재라고 하셨는데 드래곤은 인간이 잉태해요. 그러니 인조적인 존재라는 말은 틀린 거 아닌가요?”
“맞아, 인간이 잉태하지. 그런데 그 방법이 이상하다고 의심한 적 없어?”
“그거야 인간이 아니니 당연한 일이잖아요.”
대답을 하면서도 흠칫하게 되었다.
인간이 아니다.
인간 외의 존재가 신이나 드래곤밖에 없는 것도 아닌데 어릴 적부터 학습한 고정 관념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단 한 명의 반려. 굉장히 로맨틱한 얘기로 포장하던데 그건 그냥 드래곤이 불완전한 존재니까 현자의 돌이 없으면 생식을 못 하는 것뿐이야. 신이나 드래곤 같은 단어로 교묘히 당위성을 부여한 거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려고 하니까.”
내가 부정하리라는 걸 예상했는지 물 덩어리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황제가 왜 하필 다섯 공작 가문하고만 교배해야 하는 걸까. 그들이 고귀한 피라서? 아니, 그건 그냥 자신들의 계급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일 뿐이야.”
실제로 반려를 차출한 가문은 한시적으로 황제와 비등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껏 그 모든 권력 구조가 타당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초대 공작들의 설계라는 얘기를 들으니 뒤늦게 불합리한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공적인 생명체를 만들어 내고, 그 생명체와 인간의 교배까지 가능하게 하는 엘릭시아.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힘.
나는 문득 그 남자가 지워져 버린 다섯 번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떠올렸다.
“그렇다면 그 남자에게 엘릭시아가 있었기 때문에 지난 다섯 번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었던 거네요.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부터…….”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뒷말은 혼잣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깜짝 놀라서 은발 남자를 바라봤다.
“뭐라고요?”
“그 망할 드래곤은 처음부터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어. 궁극적으로 시간을 되돌린 건 내가 아니라 엘릭시아의 힘이니까.”
벌어진 입술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시작은 항상 똑같았어요. 바뀌는 건 저밖에 없었는데 처음부터 기억하고 있었다니요. 지금 농담한 거죠?”
말하는 도중 헛웃음이 섞였다.
나는 다급히 입술을 틀어막았다.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농담이 아니야. 드래곤은 줄곧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어. 돌아가는 시간대를 지정한 것도, 시간을 되돌리는 대가를 크게 지불한 것도 그 녀석이니까.”
엉망진창이 된 머릿속을 정리하기 벅찼다. 내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으니 물 덩어리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미미하게 균열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 그게 현자의 돌로 시간을 되돌려서 난 균열이구나. 용케 처음부터 눈치채고 이용했네.”
“내 계약자가 삶의 끝에서 나를 불러 준 덕분이지. 죽기 전에 날 불러 주지 않았다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우리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을 거야.”
“하긴, 악마는 인간의 부름에 응답하고 그 욕망을 먹어서 강해지는 존재니까. 그래도 운이 좋았네. 마침 호문쿨루스가 엘릭시아로 시간을 되돌린 덕에 크게 힘들이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거잖아.”
“그렇지.”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 자체적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 만큼 절대적인 힘이 있었다면 대가가 무엇이 되었든 네 기억을 지우기 전으로 돌아갔을 거야. 하지만 그만한 힘은 내게 남아 있지 않았지. 고작 드래곤이 지정해 놓은 시간으로 돌아가는 게 다였어.”
남자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지난 삶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모두.
“처음부터 알았다고요?”
“그래.”
“처음부터?”
내가 멍하니 중얼거리고 있자니 남자가 날 끌어안아 주었다.
나는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겼다.
“이럴까 봐 진실을 밝히는 건 최대한 미루고 싶었는데 더는 미룰 수 없는 일이겠지.”
직접 날 베어서 여러 차례 목숨을 앗아 가고, 고문까지 하면서 죽이려고 했던 그 남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나처럼 다 알고 있었던 그 남자가.
나한테 사랑을 속삭였다.
자신의 사명이 끝나면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며.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한 거예요? 아니, 제가 체력을 잃었듯이 시간을 되돌린 대가로 미쳐 버렸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저를 샬롯이라고 생각하고 대한 게 아닐까요?”
나는 남자를 절박하게 붙잡았다.
“그런 거죠? 그래서 그런 거겠죠?”
철저하게 기만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절망스러워서.
내가 머리를 붉게 물들였을 때 그 남자가 속삭인 사랑마저 가증스러웠다.
“보통 대가로 정신적인 걸 지불하던가? 인간이야 시간을 역행하면서 육체에 부담을 짊어질 수 있지만 호문쿨루스는 현자의 돌로 만들어진 존재라서 육체도, 정신적도 타격이 없을 것 같은데.”
물 덩어리가 의문을 표하자 이제껏 조용히 있던 하겐티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내 주인의 시간을 역행해 주었다는 저 악마만 하더라도 정신이 멀쩡해 보이니 타격이 있을 것 같진 않네.”
“내 눈에는 딱히 안 멀쩡해 보이던데…….”
제법 긴 시간 동안 동행했던 크로셀이 볼멘소리로 부정했지만 가볍게 무시당했다. 대신 9번째 악마가 말했다.
“눈 뜨자마자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지만, 대충 얘기를 들어 보니 무려 시간을 역행했다며. 그렇다면 다른 큰 대가를 지불했을 거야.”
악마들이 머리를 맞대고 한마디씩 의견을 던졌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가 말했다.
“이전 호문쿨루스가 여성체였어.”
“우와, 그게 가능해?”
카임은 감탄하고, 물 덩어리를 제외한 나머지 악마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호문쿨루스는 인간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고 만든 존재이기 때문에 여성이 태어나는 건 돌연변이인 수준인데.”
9번째가 옅게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전대 황제가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토록 놀랍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이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대 황제가 여성인 게 그렇게 경악스러워할 만한 일인가요?”
“내가 예전에 말했잖아. 악마는 남성밖에 없다고. 여성 호문쿨루스가 나올 수 없는 이유는 그때 했던 설명이랑 비슷해.”
무언가 실마리를 잡은 듯, 팔짱을 낀 채로 생각에 잠겨 있던 크로셀이 대답해 주었다.
여성 호문쿨루스의 존재가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는지 악마들이 쑥덕대는 사이 물 덩어리가 고개를 들어서 남자를 바라봤다.
“호문쿨루스가 돌아갈 시간대를 미리 정해 놨다고 했지. 굳이 그 시간대였어야 했던 이유가 있을 거야. 너는 그 모든 균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니 호문쿨루스의 목적도, 역행에 대한 대가도 알고 있는 거지?”
내 머리칼을 가만가만 쓸어 주던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끼리 떠들던 악마들이 입을 다물고 남자를 쳐다봤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난 다섯 번의 삶은 나 역시 기억하고 있었지만 모두 단명했다.
지금부터 이어질 얘기는 내가 죽고 난 이후 살아간 자들만이 알 수 있는 이야기였다.
“예전에 너는 드래곤의 사명이 궁금하지 않다고 했지. 하지만 이제는 알아야 해. 결국 그 사명을 이루지 못해서 다섯 번이나 시간을 되돌린 거니까.”
“그 모든 것이 관련이 있다면 들을 준비가 돼 있어요. 알려 주세요.”
당사자에게 얘기를 들었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끝내 침묵을 고수하며 내게 등을 보였던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영영 진실을 알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더는 피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남자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서는 말했다.
“드래곤의 목적은 자신을 만들고 조종한 다섯 공작을 모두 처리하고, 불완전한 인간인 호문쿨루스가 아닌 완전한 인간처럼 살아가는 거야.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아닌 진정한 왕으로 군림하는 거지.”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잠깐 침묵이 맴돌았다. 그 정적을 일깨운 건 9번째 악마였다.
“호문쿨루스가 그런 사고를 하는 게 가능한가?”
“그러니까. 애초에 다섯 사도가 호문쿨루스를 만들어 낸 이유는 자신들을 대신해서 모든 책임을 떠맡을, 말 잘 듣는 인형이 필요했던 거잖아.”
“인간 외의 두려움을 자아내는 존재. 신격화하기에 걸맞아.”
크로셀은 흥분하여 속사포처럼 말했고, 그 뒤로 하겐티가 거들었다. 또다시 저들끼리 토론을 벌이려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직전이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물 덩어리가 큰 소리가 나도록 손뼉을 쳤다.
“전대 황제가 여성이었고, 듣기로는 사도의 후손이 아닌 평범한 인간과 교합해서 현재의 드래곤을 낳았다고 했어.”
“세상에, 정말?”
카임이 두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다.
그런 카임을 힐끗 본 물 덩어리는 “넌 인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전혀 관심을 안 두고 있구나.”라고 중얼거리고서는 이어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호문쿨루스가 사명이라고 부르는 계획은 전대부터 준비한 것 같아. 혼자서 모든 걸 깨달았을 리 없으니까. 내 말 맞지?”
물 덩어리가 학구열에 불타는 학생처럼 남자에게 물었다.
물 덩어리의 열렬한 시선을 받은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사자가 아니라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렇겠지.”
“아, 그러면 혹시 시간을 역행한 대가로 그 완벽에 가까운 여성 호문쿨루스를 지불한 거야?”
“전대 드래곤 또한 결국 한패이니 그럴 거라고 추측하고 있어.”
“확실히.”
남자와 물 덩어리의 대화를 듣던 카임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비해 다른 악마들은 대화 내용을 완전히 이해한 듯 보였다.
“요즘 행보가 수상쩍다 했더니 이제야 아귀가 맞네! 본인이 호문쿨루스인 걸 밝히지 않으면서 영광을 함께 누려 온 사도들의 후손을 몰락시키려고 하니 골치 아프겠지! 이용당한 역사가 몇백 년인데!”
활짝 웃은 물 덩어리가 “맞아, 그거야!”라고 외치며 손뼉을 여러 번 쳤다.
“저가 태어난 의의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니.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인간적인 사고방식이잖아. 인간과 살면서 그 사고방식마저 학습한 걸까?”
물 덩어리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정신없이 주위를 날아다녔다. 그 모습이 퍽 정신 사나웠는지 크로셀이 짜증 어린 얼굴로 물 덩어리를 잡았다.
“가만히 좀 있어.”
“넌 이 상황이 재미있지 않아?”
“딱히. 녀석들이 내 계약자한테 한 짓만 생각하면 짜증만 나.”
크로셀은 제 성격 같아서 물 덩어리를 바닥에 던져 버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위기감을 느낀 건지 잠깐 가만히 있던 물 덩어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계약자라는 사실을 들킨 거야?”
“어.”
“저런, 마물이 된 계약자는 찾았어?”
“찾았어.”
크로셀이 힐끔 나를 쳐다봤다.
그들의 대화를 따라잡기 급급했던 나는 일순 머릿속이 멍해졌다.
계약자가 마물이 되다니?
마물은 그냥 마물이 아니었던가.
“호문쿨루스를 하나 더 만들고 싶은 건지 아직까지도 인간으로 실험을 하더라. 인간의 욕심은 참 한계가 없는 것 같아.”
“말씀하시는 도중 끼어들어서 죄송하지만 이해가 안 돼서요. 크로셀의 계약자가 마물이 되었다니요. 마물한테 물리기라도 한 건가요?”
결국 참다못한 내가 끼어들었다.
대화의 흐름으로 봐서는 단순히 마물에게 물려서 마물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닌 듯했지만 그 외의 다른 추측이 불가능했다.
“마물한테 물렸다고 마물이 되지 않아. 아니, 그보다 너는 대체 마물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마물은 마물이죠. 인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인간이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듯이.”
마물은 마물이었다.
자라지도 않고, 검은 피가 흐르며 국가에서 지급한 특수한 단안경으로 핵의 위치를 파악해야 제대로 죽일 수 있는 일반적이지 않은 생명체.
내게 있어 그 존재는 당연했기 때문에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대답하자 물 덩어리가 말했다.
“마물은 현자의 돌과 호문쿨루스를 만드는 과정에서 실패하여 생긴 실패작이야. 현자의 돌의 원료가 인간이라서 건수만 잡으면 무고한 사람을 이단이라고 몰아가며 실험체로 쓰잖아. 그 과정에서 저 악마의 계약자 또한 희생당한 모양이고.”
“……마물이 인간이라고요? 그동안 마물 사냥꾼이 죽였던 게 인간이라는 거예요?”
나는 내 손으로 죽였던 마물을 떠올렸다.
귓전을 때리는 짐승의 울부짖음과 손을 흠뻑 적시던 검은 피가 방금 전 일처럼 생생했다.
“근본은 인간이지만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지. 그러니 네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맞아, 마물을 만들어 낸 건 다섯 사도들이니까. 그걸 보면 누가 악마인지 모르겠어.”
남자는 부드럽게 나를 달랬고, 물 덩어리는 동조했다.
그러고 보면 한나는 내게 마물의 핵이 보인다고 했었다.
그 탓에 내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그때 남자는 그들이 엘릭시아를 마물의 핵이라고 착각하여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근본은 비슷하니 둘 다 특별한 방법을 써야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이겠지.’
다섯 공작들이 은밀히 공유하는 엘릭시아의 비밀이 이런 것이었단 말인가.
수많은 인간들을 희생시켜 인공적인 신을 만들고, 그 신을 조종하며 인간 위에 군림하는 것이. 그것도 모자라서 또 다른 신을 만들어 내고자 현재까지도 수많은 목숨이 희생당하고 있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죠? 목적은 달성했잖아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믿고, 숭상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끝난 거 아닌가요?”
지금 우리가 믿는 황제가 수많은 희생 위에 우뚝 선 존재라면 더 이상의 희생은 불필요했다.
모두 다섯 공작이 원하는 대로 되었으니.
“같은 인간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 목숨을 하찮게 여길 수 있죠? 심지어 마물이라고 부르면서 증오하게 만들고. 왜 그렇게까지…….”
“신앙은 공포에서 오니까.”
내가 다소 경황없이 중얼거리자 남자가 덤덤히 말했다.
“처리할 수 없는 미지의 적이 있어. 그런데 드래곤을 믿으면 그 적으로부터 지켜 준다고 하니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겠지.”
“…….”
“그 과정에서 몇 명이 희생당하든 상관없을 거야. 대의를 위한 소의 희생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치들이니.”
결국 내가 믿어 왔던 그 모든 것은 개인의 욕심으로 만들어진 산물일 뿐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에 입을 다물고 있자니 하겐티가 살며시 앞발을 들었다.
“인간으로만 실험한 거 아니야. 나도 당했어.”
“실패만 거듭하다 보니 방법을 잠깐 바꾼 것이겠지. 천사가 되었던 저 악마처럼.”
남자는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하겐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크로셀의 계약자와 하겐티는 엘릭시아를 만드는 실험을 당하여 마물이 되었고, 9번째 악마는 완벽한 천사를 만들고자 하는 젠틸라 공작의 욕심에 이용당한 거네요. 그리고 카임은…….”
내가 카임을 쳐다보자 다들 카임을 바라봤다.
“응? 나?”
시선이 몰리자 고개를 갸웃거린 카임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난 별일 없었는데.”
그렇게 말한 카임은 말갛게 웃었다.
“아, 아니지. 최근 계약자가 만든 빵이 엄청 맛있었어. 제빵사였거든. 살아 있었다면 너희에게 한 바구니씩 선물해 줬을 텐데 그게 참 아쉽네.”
카임의 목소리는 기운이 넘쳤지만 듣고 있자니 왠지 힘 빠졌다. 이런 나를 눈치챈 건지 남자는 살짝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악마라고 해서 전부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야. 희생당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걸 모르고 살아가는 다른 인간이 있듯이.”
나만 하더라도 그 후자에 속한 사람이었다.
원래라면 카임처럼 별다른 역경 없이 살아온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져야 했다. 하지만 주위 악마들이 모두 안 좋은 일을 당한 탓인지 카임의 삶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카임이라도 별다른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차였다.
오늘 참 다양한 얘기를 듣는다며 웃고 있던 카임이 말했다.
“그런데 너희의 얘기를 듣고 있으니까 호문쿨루스를 응원해 주고 싶다. 결국 소수의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고 싶어서 이렇게 된 건데 그걸 끊어 내겠다는 거잖아.”
기나긴 세월 동안 견고하게 쌓아 올린 역사였다.
황제가 결과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성이 어찌 되었든 절대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은 역사의 마침표를 찍겠다고 하니 긍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우리를 믿지 않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편협하게 하나의 신념만을 강요해서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하게 만드는 상황이 너무 안타깝잖아.”
악마들이 하나둘씩 카임의 의견에 동조했다.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한마디씩 하는 악마들을 지켜보던 나는 남자를 살짝 밀어냈다.
“저, 잠시 나갔다 올게요.”
“어딜 가려고?”
“그냥 바깥바람을 쐬고 싶어서요.”
나는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변명을 꺼냈다.
갑자기 바깥바람을 쐬고 싶다는 내가 이상해 보일 수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 외에 다른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히 남자는 더 묻지 않고 날 보내 주었고, 문을 여니 크로셀이 뒤늦게 나를 따라오려고 했다.
물 덩어리가 그런 크로셀을 막았다.
“내버려 둬.”
“하지만…….”
“굳게 믿어 왔던 진리가 부정당했잖아. 이 세상이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혼란스러울 만도 하겠지.”
문을 닫기 전, 물 덩어리의 속삭임을 듣고서는 갑판 위로 나왔다.
시간이 늦은 탓인지 이곳까지 오는 동안 사람은 한두 명 정도 마주쳤을 뿐이었다.
날이 어두웠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이 궂은 날씨가 하늘을 더욱 어두컴컴하게 만들었다.
나는 하늘을 따라서 언뜻 까맣게 느껴지는 바다를 내려다봤다.
처음 보는 바다가 신기하다기보다는 갑갑한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이대로 바닷속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기분으로 가만히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내 어깨에 겉옷을 걸쳐 주었다.
기척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자 남자가 서 있었다.
“바람이 차.”
그렇게 말한 남자는 내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다정한 손길은 차게 식은 뺨을 덥혀 주었다.
나는 그 손길을 느끼며 눈을 내리깔았다.
“예전에 그 사람이 폭주한 적 있어요.”
내가 바깥으로 나온 건 물 덩어리 말대로 혼란스럽기 때문도 있었지만, 홀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념에 잠기자마자 황제가 내게 엘릭시아를 주었던 그날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지워져 버린 시간을 모두 기억한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 어쩌면 폭주한 그날 깨달은 것이 아닐까 하고 짐작했었죠.”
그 남자의 폭주는 지난 삶 동안 단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때 깨달은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네요.”
내가 믿었던 그 모든 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샬롯이 죽은 이후로 남자가 미쳤다는 그 사실조차 진실이 아닐지도 몰랐다.
“다 알면서 외면하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었던 거예요. 이럴 거면 어째서 제게 엘릭시아를 줬던 걸까요. 아니, 샬롯은 사랑했던 게 맞았을까요?”
진실은 나를 꾸준히 의심하고 질문하게 만들었다.
분명 시작은 샬롯을 사랑한 그 남자가 미쳐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나니 시작마저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과연 사랑이었을까.”
“…….”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무덤을 파내서 살려 냈어야지. 살려 낼 수 없다면 그 시체라도 끌어안고 살거나.”
남자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냉소적인 미소였다.
“나라면 다른 사람을 붙잡고 사랑을 속삭이는, 그런 추한 짓은 하지 않을 거야.”
“…….”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 하나인데. 그 불변의 진리를 잊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남자는 바닷바람에 잔뜩 헝클어진 내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그의 속삭임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샬롯이라는 그 여자와 너를 이용해서 일부러 분열을 만들려는 그 계획은 이해한다만, 사랑. 그것이 사랑이냐고 묻는다면 그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지.”
샬롯의 죽음은 륀느와 하이넨의 분열을 가속화시키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시작을 만들어 낸 사람은 다름 아닌 황제였다.
그 남자의 목적은 다섯 공작의 몰락이니 모든 것이 의도적이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사랑뿐만 아니라 광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마저 다 거짓일 가능성이 높네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 남자와 나 사이에 진실은 있었던 것일까.
애당초 만남부터가 거짓투성이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네게 엘릭시아를 주어서 더 이상 시간을 되돌리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그쪽도 절박하게 사명을 이루고자 할 테지.”
“…….”
“하지만 그 녀석의 사명이 무엇이 되었든 네가 신경 쓸 것 없어. 너는 오로지 네 삶에 충실하면 되는 거야.”
그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하고, 바라는 게 있으면 이뤄 내면서 행복하게.”
간절함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행복하게’라는 마지막 말이 깊은 울림을 남겼다.
나는 여운을 곱씹으며 붉은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직시했다.
그러고 보면 이 관계는 엘릭시아를 갖고 있는 내가 맞이할 비극을 막기 위해 시작되었다.
“당신은 엘릭시아를 파괴하는 방법 따위는 애초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죠? 그러면서 제게 악마를 찾으라고 한 거예요?”
물 덩어리가 말했다.
임신을 하거나 죽거나.
방법은 그 두 가지밖에 없다고. 얘기를 들은 남자는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아니, 이제 상관없겠죠. 당신과 계약했는데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계약에 따라서 72마리나 되는 악마를 찾게 될 테니까요.”
“굳이 그럴 필요 없어.”
“그럴 필요 없다니요?”
“네가 내게 이름을 주었잖아. 대가는 그것으로 되었어. 다른 악마에 대한 얘기는 처음부터 네가 내 제안을 거절할 걸 예상하고 꺼낸 말이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째서…….”
“네가 죽지 않길 바랐으니까.”
“…….”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면 너는 체념하며 그 녀석한테 돌아가겠다고 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겠지.”
항상 침착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미세한 차이였지만 나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끝이 훤히 보이는데 어떻게 내가 너한테 그럴 수 있을까. 내 입으로 진실을 내뱉는 건 널 절벽으로 미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어.”
계속되는 절망 속에서 벼랑 끝에 내몰렸던 나는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내가 잡은 이 손이 결국 나를 더한 비극으로 내몬다고 해도 지금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하며.
“너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상처를 짊어지고 있었지. 나는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걸 네게 주고 싶었지만, 내가 어떤 말을 했어도 너는 끊임없이 내 사랑을 의심했을 거야.”
당시 나는 타인을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도 의심하게 되는 삶을 살았으니 남자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억지로 계약했다 한들 나와 함께한 과거마저 의심했을 테지.”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무 대가 없이 얻은 힘은 보통 감당하지 못하지. 만약 내가 강제로 힘을 쥐여 줬다면 너는 일찍이 망가져 버렸을 거야.”
“옛날이나 지금이나 저희는 한 가지 선택만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그때도, 지금도 계속 원치 않은 선택만을 하고 있네.”
남자가 쓰게 웃었다.
내가 어릴 적에 그가 내 기억을 지운 것도, 우리가 원치 않은 이별을 한 것도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이제 와서 알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그의 선택이 불가항력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살짝 목소리를 낮춘 그가 운을 띄웠다.
중요한 얘기를 할 것 같아서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왜 내 이름 안 불러 줘?”
슬쩍 내 손을 잡은 남자가 제 뺨에 내 손을 갖다 댔다. “손이 차갑네.”라고 중얼거린 그는 애교를 부리듯이 뺨에 비볐다.
“이제 다 기억하잖아.”
“……네, 그렇죠.”
그와 계약하는 순간 지워졌던 기억을 모두 되찾았다.
그동안 부자연스럽게 뻥 뚫린 채로 살았고, 억지로 기억해 내려고 하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어찌하지 못했던 나의 과거였다.
“갑자기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된 탓에 여러모로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 어요.”
내 손을 제 뺨에 댄 채로 날 내려다보는 얼굴을 보게 되니 나도 모르게 혀가 꼬여서 반 박자 늦게 말을 끝맺을 수 있었다.
살갗과 살갗이 닿는 감촉은 처음이 아닌데도 그에게 잡힌 손을 의식하게 되었다.
내게 꽂힌 기대 어린 눈빛을 느끼며 또 혀가 꼬이지 않도록 최대한 덤덤하게 말했다.
“제가 조금 더 어렸다면 당신을 많이 원망했을 거예요.”
폐허가 된 신전에 버려진 아이.
가진 것이라고는 작은 몸뚱이밖에 없었던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소녀와 신념을 잃고 잊혀진 채로 살아가던 그.
서로 불러 줄 이름조차 없었던 우리는 가장 밑바닥에서 만났다.
“그런데 모든 걸 알고 나니 원망보다는 반가움이 크네요.”
나라가 패전한 후 제국민에 의해 기존의 신앙은 철저하게 짓밟고, 탄압되었다.
이교도로 낙인찍히면 화형을 당한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그와 함께해 온 내가 뒤늦게 그의 존재를 부정하고 새로운 신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이를 깨닫고 당시 나를 지킬 힘이 없었던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내 기억을 지웠다.
자신을 잊으면 적어도 살아갈 수 있을 테고, 살아 있어야 미래를 기약할 수 있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다면 나는 끔찍하게 죽거나 실험체가 되었을 것이다. 크로셀의 계약자가 맞이한 결말처럼.
“네가 있던 곳이 황궁이 아니었더라면 조금 더 일찍 찾아갈 수 있었을 텐데. 미안해. 나의 나약함으로 너무 늦게 널 찾아가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결국 지키셨잖아요. 그걸로 됐어요.”
기억을 잃고 살았던 때도 그는 언제나 내 부름에 대답해 주었다. 그것으로 되었다.
내가 미소 짓자 남자는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내 이름을 불러 줘.”
“……요한.”
나는 머뭇거리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랜 시간 살아와서 이름마저 지워져 버린 그에게 직접 지어 준 이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만이 알고, 부를 수 있는 이름이기도 했다.
“다시 한번 불러 줘.”
“요한.”
“정말…….”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괜히 뺨이 달아올랐다.
그런 내 얼굴을 보며 남자는 살짝 헛숨을 들이키며 느릿하게 말했다.
“이 순간만을 기다리며 살아왔던 것 같아.”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눈꼬리를 휜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나는 가까워지는 그 얼굴을 피하지 않고 살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입술이 닿기 직전이었다.
숨결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멈춰서 누군가 들으라는 듯이 일부러 살짝 소리 높여 외쳤다.
“이제 그만 나오지 그래?”
불쾌함을 담은 그의 외침과 동시에 타인의 기척이 느껴졌다.
하나가 아니었다.
남자가 몸을 뒤로 빼자 황급히 모습을 드러낸 악마들이 보였다.
“우리가 지켜보는 거 알면서 둘이서 그 짓을 한 거야?”
“상식이 있다면 알아서 비켜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악마한테 상식이 없다는 걸 깜빡했군.”
크로셀이 경악하자 체념한 듯,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남자를 보며 물 덩어리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돼서 나왔는데 생각보다 분위기가 괜찮네.”
“너희가 없었다면 더 괜찮았을 거야.”
“삶이 원래 생각처럼 되지 않지.”
“멋대로 훔쳐본 것들이 할 만한 소리는 아니지 않던가.”
“분위기만 좋으면 됐지!”
남자가 사납게 일갈하자 물 덩어리는 일부러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넘어가려고 했다. 물 덩어리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남자는 성큼 그쪽으로 다가갔다.
불길함을 느낀 물 덩어리가 빠르게 날며 도망가고, 나머지 악마들이 내게 다가왔다.
“기분은 좀 괜찮아?”
“네, 덕분에요.”
카임이 걱정을 가득 담아서 질문했다. 나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내 대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다들 표정이 나아지지 않았다.
특히 크로셀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나 또한 크로셀에게 하고픈 말이 많았지만 일단은 삼켜 두었다.
대신 내 옆에 선 하겐티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마지막으로 가고 싶은 곳이 생겼어요.”
“어디?”
끝내 물 덩어리를 잡은 남자가 곧바로 반응했다.
내가 스스로 가고픈 곳이 생겼다는 것이 기쁜지 매우 반색하고 있었다.
말만 하면 바로 데려다줄 것 같은 말투였다.
“무덤이요.”
무덤이라는 말에 남자는 단번에 인상을 찡그렸다. 나는 그런 남자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샬롯의 무덤.”
* * *
“너 검이 왜 그래?”
항구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으로 소지품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부러진 검을 발견한 카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조금 강한 상대를 만났어요.”
카임과 나의 대화를 듣던 9번째 악마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메그한테 고쳐 달라고 부탁할까? 네가 강해져서 권속인 나도 메그한테 모습을 보일 수 있게 되었거든. 원한다면 말만 해.”
“아뇨,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러면 나중에라도 필요하면 말해. 그런데 나 메그한테 갔다 와도 돼?”
걱정이 되는지 카임이 안절부절못했다.
내가 만났던 그녀를 떠올리면 카임의 걱정은 충분히 이해가 됐다.
“네, 가셔도 돼요. 제가 부르기 전까지 굳이 안 오셔도 되니 편하게 가세요.”
“정말?”
자신이 너무 기뻐하는 티를 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카임이 “아니, 네 곁에 있는 게 싫다는 뜻은 아니고.”라며 변명했다.
카임이 하고자 하는 말은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나는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혹시 메그한테 할 말이 있어? 내가 전해 줄게.”
짧은 인연이었지만 그만큼 강렬한 만남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와의 시간을 떠올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가렛 할머님께서 말씀하셨죠.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남은 자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른다고요.”
이제까지 나는 죽은 자였다.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다름없었고, 너무나 일찍 죽음을 맞이해서 뒷얘기를 알지 못했다.
“그동안 제가 몰랐던 걸 알아보려고 해요. 더는 미련이 남지 않도록.”
“…….”
“일이 끝나면 직접 찾아가도록 할게요. 그러니 그때가 돼도 회한이 많아 보이는지 알려 주셔야 해요.”
“응, 그 말 꼭 전해 줄게.”
카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불러 줘서 고마워. 함께 있어서 즐거웠어.”
“저도요.”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 나는 불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으니까.”
방긋 웃은 카임은 단숨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흩어지는 재를 보고 있자니 하겐티가 슬쩍 내게 다가왔다.
“나도 돌아가 보도록 하지. 좀 더 쉬고 싶어.”
“네, 그러도록 하세요.”
긴 시간 동안 마물로 살아서 그런지 하겐티는 휴식을 바라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내 힘을 자주 쓰던데…….”
나는 절로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수중에 돈이 없어서 유독 하겐티의 능력을 자주 쓰고 있었다.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야. 앞으로도 많이 써.”
격려하듯이 앞발로 나를 톡톡 건드린 하겐티가 사라졌다.
악마 두 마리가 사라지고, 힐끔힐끔 크로셀의 눈치만 보고 있자니 9번째 악마가 다가왔다.
“그 검, 나 때문이지?”
“아, 아. 네. 하지만 신경 쓸 것 없어요. 이제 마력으로 검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돼서 필요 없다고 한 거예요.”
괜히 9번째 악마가 죄책감을 갖지 않도록 나는 마력으로 직접 검을 만들어 보였다.
붉은빛을 띠는 검을 허공에 한 번 휘두르고서는 없애 버렸지만 9번째 악마는 여전히 착잡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실험을 당한 것도, 저를 공격한 것도 모두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잖아요. 그러니 제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
9번째가 내게 미안해할 것은 없었다. 그를 구하는 과정에서 비록 검이 부러졌지만, 어느 정도 감수한 일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더 큰 희생 없이 검만 부러져서 다행이다 싶었다.
“원래 엘릭시아를 없애기 위해 당신을 구한 거였어요. 그런데 아예 방법이 없다고 하니 어쩔 수 없네요.”
죽거나 임신하거나.
예전의 내가 이 얘기를 들었다면 절망에 빠져 있었을 거다.
도망치고, 또 도망친대도 거미줄처럼 얽혀서 끝내 내 목을 조르는 운명은 죽음을 맞이해야만 진정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마저도 혼만이 자유로운 것이지 육신은 이 세상에 남아, 그 남자의 곁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몸에 박힌 엘릭시아를 수거해야 했으니.
결국 나는 그 남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구나. 한낱 인간이 정해진 운명에서 해방되기 위해 노력해 봤자 무의미한 것이구나.
그렇게 현실을 체념하며 도망쳤던 길을 스스로 역행하여 그 남자의 품에 안겨졌을 거다.
륀느 공작이 내게 부여한 이름을 따라서 인형처럼, 그렇게.
그러나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단념하지 않았다. 단념할 수 없었다.
내 곁을 굳건히 지켜 주는 이들이 있는데 어찌 포기라는 말을 섣불리 입에 담을 수 있을까.
“이렇게 된 김에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삶을 살아가세요. 굳이 죄책감 때문에 절 따르지 않아도 돼요.”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살아갈 것이고, 그렇다고 그 남자에게 붙잡히지 않을 거였다.
나를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그가 그토록 이루고자 했던 사명을, 그가 그려 낸 미래를 멀리서 지켜보고 싶었다.
당신은 당신의 행복을, 나는 나의 행복을 좇는 것이다.
“너의 권속이 될게. 죄책감으로 하는 말이 아니야.”
자진해서 권속이 되겠다고 할 줄 몰랐기 때문에 내가 당황해하자 9번째 악마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네가 날 구해 줬잖아. 넌 충분히 내 주인이 될 자격이 있어. 그리고 약소하지만 나의 힘을 구해 준 보답이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9번째 악마, 종말의 집행자 ‘파이몬’. 나의 주인이 될 자여. 너의 진정한 이름을 알려다오.]
[슈리엘.]
[슈리엘, 나의 주인이시여. 종말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최후의 굴복을 맹세하리라.]
파이몬이 내 오른쪽 손등에 입을 맞추자 익숙한 통증과 함께 문양이 떠올랐다.
나는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왼쪽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드래곤의 표식이 내가 새긴 요한의 상징과 겹쳐 보였다.
앞으로 내가 짊어져야 할 상흔이었다.
내가 한참을 손등만 내려다보고 있으니 파이몬은 자신 또한 좀 더 휴식이 필요한 것 같다며,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라는 말을 남기고서는 사라졌다.
그렇게 크로셀과 한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로 상선으로 위장한 해적선이 항구에 정박했다.
* * *
당장 비가 내려도 이상할 것 없는 날씨였다.
비가 내리기 전에 짐을 내려놓기 위해 다들 분주하게 움직였다.
나는 곧바로 그들과 작별을 고하려다가 날이 개고 나서 이동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언제나 그렇듯, 비는 내 발목을 붙잡았다.
비가 그칠 때까지 이 근처에서 지내다가 가겠다는 말을 하자 물 덩어리는 매우 기뻐하며 자기들과 같은 여관을 쓰자고 했다. 하루 종일 남자를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봤으면서 아직 묻고 싶은 게 잔뜩 남아 있는 듯했다.
물론 남자는 질색했지만, 프리실라가 잠깐이라도 좋으니 자신의 악마를 제발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괜히 여관을 찾으러 다닐 고생을 덜 수 있을 것 같아서 프리실라의 제안을 승낙했다.
여관은 깔끔했고, 가격 또한 적당했다. 우리는 방을 두 개를 잡았다. 남자와 크로셀이 묵을 방과 내가 묵을 방. 몇 없는 소지품을 정리하고서는 나는 남자와 크로셀을 찾아갔다.
정확히는 크로셀을.
“크로셀.”
물 덩어리는 언제나처럼 학구열이 높은 모습으로 남자를 괴롭히고 있었고, 크로셀은 그런 그들을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크로셀을 부르자 다들 하던 말을 멈추고 날 쳐다봤다.
“잠깐 얘기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어? 나? 으, 응.”
“그렇다면 우리가 자리를 비켜 줘야겠군.”
내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눈치챈 건지 물 덩어리를 한 손으로 잡은 남자가 내 방에 있겠다며 나갔다.
가장 시끄럽게 떠들던 물 덩어리가 사라지니 방은 몹시 조용했다.
그러고 보면 함께 다닐 때 가장 말이 많은 악마는 크로셀이었는데 요 며칠 새 가장 조용한 악마가 되었다. 나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당시 크로셀이 모두를 지키려고 했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게 있어 마물은 마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크로셀은 정말 모두를 지키려고 했다.
“함부로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해서 죄송해요. 저 때문에…….”
나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까치발을 든 크로셀이 내 이마에 딱밤을 놨기 때문이었다.
“내가 말했지. 넌 내가 아는 인간 중 가장 뻔뻔한 인간이라고. 네가 너답지 않게 구니까 나도 나답지 않게 널 따라서 축 처져 있었더니 이게 무슨 꼴이야.”
“하지만…….”
호수 밑 마물을 해치운 직후 크로셀의 계약자로 추정되는 사람의 기억을 엿보게 된 것이나 크로셀이 계약의 대가로 마물의 핵을 요구한 것 등.
그동안 사소하게 지나쳤던 점들이 계속 떠올랐다.
“네가 나한테 미안해할 것 없어. 어떤 식으로든 매듭지어야 할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내 계약자도 내가 구질구질하게 구는 걸 바라지 않았을 거야.”
팔짱을 낀 크로셀은 고개를 살짝 들어서 오만한 자세로 날 바라봤다.
“너의 권속이 된 건 내 선택이야. 어떤 강제도 없는, 오롯한 나의 선택.”
“…….”
“널 내 계약자를 죽인 살인자라고 여겼으면 네 권속이 되겠다고 말했겠어? 날 그런 생각 없는 머저리로 만들지 마!”
말하다가 흥분했는지 크로셀은 목청이 높아지고, 말이 빨라졌다.
“널 따라다니면서 한 번도 내 선택을 후회한 적 없어. 아, 한 번 후회한 적 있긴 하다.”
“언제요?”
“너 혼자 젠 어쩌고 하는 공작의 성에 갔을 때. 오랫동안 소식 하나 없어서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그러니까 앞으로 너 혼자 행동하지 마.”
젠틸라 공작 성에서 오랫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던 것이 크로셀에게 제법 충격으로 남은 듯했다. 나는 웃으면서 크로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크로셀은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면서도 내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런 크로셀과 다소 가벼운 분위기에서 잡담을 나눈 나는 방을 나갔다.
내가 곧바로 남자에게 갈 것이라고 생각한 건지, 크로셀은 시끄러운 물 덩어리를 단단히 붙잡아 놓으라고 했다.
“잠깐 밖에 나갔다 온 뒤에 그러도록 할게요.”
“나가게?”
“네, 아직도 뱃멀미를 하는지 속이 안 좋아서 찬바람을 쐴까 해서요.”
“같이 갈까?”
“아뇨, 금방 갔다 올 거예요. 크로셀도 피곤할 텐데 여기 계세요. 만약 필요하면 그때 부를게요.”
“그래, 그러도록 해.”
미심쩍다는 듯이 날 바라보던 크로셀은 빠르게 단념했다. 필요하면 부르겠다는 말을 덧붙였기 때문인 듯했다.
나는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마침 여관에 들어오는 프리실라와 마주쳤다.
“내 악마가 귀찮게 굴었지?”
“아뇨, 귀찮지 않았어요.”
“악마 주제에 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깨우치고 싶은 것처럼 군다니까. 호기심이 아주 바다 같아.”
프리실라는 넌더리가 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귀찮아서 너한테 떠맡긴 것도 있는데 눈치챘는지 모르겠군.”
눈치채지 못하기에는 너무 의도가 노골적이었다.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자 프리실라는 “남은 시간 동안 잘 부탁하지.”라고 했다.
그 뻔뻔함이 나쁘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딜 가는 중이었나?”
“잠시 산책을 할까 싶어서요.”
“혼자서?”
“네.”
“네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악마들은……. 하긴, 사람이 살면서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지.”
힐끔 내 얼굴을 본 프리실라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비가 올 텐데 나갈 거면 이거나 들고 가. 어차피 나는 이제부터 한숨 푹 잘 예정이라 필요 없거든.”
“감사합니다.”
프리실라가 건성으로 우산을 건네주었다.
“날도 안 좋은데 너무 멀리 가다가 길 헤매지 말고.”
말투는 무심했지만 어린아이를 물가에 내놓는 것 같은 걱정이 느껴졌다. 나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잠깐 근처만 돌아다니다가 올 거라고 했다.
혹 시비 터는 놈이 있다면 인상착의를 기억해 뒀다가 말해 달라는 프리실라에게 알겠다고 대답하고서는 그녀가 준 우산을 챙기고서는 바깥으로 나갔다.
하늘이 잿빛으로 어두컴컴했지만 주위는 시끌벅적했다.
나는 느릿하게 앞으로 걸어가며 사람들 속에 섞여 들어갔다.
모든 진실을 알고 나니 평소라면 무심히 넘어갔을 풍경마저 달리 보였다.
당신이 보는 세상은 이러했을까.
삶의 끝에서 당신이 내게 가치 없는 것이라고 한 이유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의 목적이 다섯 공작의 몰락이었다면 륀느 공작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내가 체스 말처럼 보였을 것이다.
돌이켜 보니 우리는 완벽히 다른 방향을 보며 나아가고 있었구나 싶었다.
그러니 서로를 보고 있는 순간마저 닿지 못한 것일 거다.
크게 숨을 들이쉬자 찬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깨진 유리 조각을 한 움큼 삼킨 기분이었다.
그 남자와의 추억을 하나둘씩 정리하며 하염없이 걷고 있자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곧바로 프리실라에게 받은 우산을 펼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황급히 실내로 들어갔고, 거리는 금세 한산해졌다.
나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얼마나 오래 걸은 건지 돌아가는 길은 멀었다.
한참을 걸으니 여관이 보였다.
건물 앞에 익숙한 형체가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은색 머리칼을 확인하니 느릿하던 걸음이 빨라졌다.
중간에 물웅덩이를 밟은 건지 신발이 차갑게 젖어 가는 것을 느꼈지만 개의치 않고 달렸다.
“왜 비를 맞고 있으세요.”
남자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다.
우산조차 쓰지 않고 서 있던 남자가 날 바라봤다.
얼마나 오랫동안 비를 맞은 건지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또한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은 꼭 눈물 같았다.
“슈리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슈리엘.”
“네, 여기 있어요.”
내 존재를 확인하듯, 그는 여러 번 이름을 되뇌었다.
그 애달픈 속삭임이 불규칙한 빗소리에 섞였다.
“……네가 사라졌다는 걸 깨닫고 쫓아가려다가 스스로의 의지로 날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
남자는 손을 뻗어서 맹인처럼 더듬더듬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나는 그 차갑고 창백한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옅은 떨림이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어.”
“…….”
“모든 진실을 알고도 네가 그 녀석을 선택하면 나는…….”
말을 끝맺지 못한 남자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내게 이름을 선물해 준 사람도, 미소를 가르쳐 준 사람도, 삶의 의미를 알려 준 사람도 너인데. 네가 없는 영겁의 시간을 상상하니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어졌어.”
“…….”
“웃기지 않아? 그토록 오랜 시간을 홀로 살았는데 너 하나가 없다고 내게 남은 무한한 시간이 두려워진 거야.”
남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평소에 보여 주던 여유로운 미소가 아니었다.
분명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데 일그러진 얼굴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너는 나의 영원이니까.”
그는 내 뺨을 어루만지던 손을 떨구었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힘없이 떨어지는 손만큼이나 애처로웠다.
“날 떠나지 마.”
그에게서 떠나려고 아무 말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간 것이 아니었다.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그리 긴 외출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더불어 요한 앞에서 그 남자를 생각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샬롯의 무덤에 가고 싶다고 말한 이후 아무렇지 않은 척한 것뿐이지, 실제로는 나의 요구가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아직 그 남자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겠구나.
“내가 더 소중하게 대해 줄게. 너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 지켜 줄 테니 제발……, 제발. 날 혼자 두지 마.”
은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처참히 무너지는 그를 보았다.
요한.
내가 지어 준 그의 이름이 빗소리에 파묻혔다.
이름 없는 것에게 이름을 지어 준다는 건 뜻깊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신중하게 선택해야 했다.
이름은 곧 삶이었으니.
어릴 적 나는 무지했으며 순수했다.
그래서 단순히 그를 부르고자 하는 욕망으로 그에게 이름을 선사했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 준 순간부터 우리는 뿌리 깊게 이어지게 되었다.
아마 그때의 남자는 그것이 두려워서 내게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던 것 같다. 이름을 지어 준다는 행위에 어떤 책임이 뒤따르는지 알고 있었을 테니까.
“울지 말아요.”
“울지 않아. 나는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걸.”
손을 뻗어서 그의 눈 밑에 새겨진 눈물 점을 매만져 주었다.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고 했지만, 그는 울고 있었다.
“떠나지 않아요.”
손길이 닿자 흠칫 몸을 떤 남자가 나를 쳐다봤다.
나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어떻게 당신을 배반하고 떠날 수 있겠어요.”
까치발을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비 냄새가 났다.
나보다 훨씬 차가운 살갗이 온기를 앗아 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언젠가 그가 했던 것처럼 입술과 입술이 부딪쳤다.
서로 입을 맞댄 적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남자는 마치 처음인 것처럼 놀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웃음이 나와서 소리를 죽이고 작게 웃자 남자가 나를 끌어안았다. 단번에 강한 힘이 나를 압박했다. 나는 우산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비가 내렸다.
찬비는 우리 사이에 스며들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쏟아지는 빗방울을 맞았다.
나를 흠뻑 적시는 비는 차가웠지만, 다급하게 내 안을 파고드는 혀는 뜨거웠다.
그와 나 사이가 빈틈없이 채워졌다.
여유라고는 없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해서 헐떡거렸다.
입술이 떼어졌다.
나를 내려다보던 그는 도장을 찍듯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날 놓아주었다. 나는 뒤늦게 우산을 줍고서는 그에게 씌워 줬지만 우리 둘 다 젖어 있었다.
우산을 쓰는 것이 무의미해져서 그것을 접고, 남자와 여관으로 들어갔다.
“기껏 우산을 들고 왔는데 소용없게 됐네요. 저희 둘 다 씻어야겠어요.”
어두컴컴한 복도를 거닐었다.
다들 프리실라처럼 곯아떨어졌거나 방에서 쉬고 있는지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
어둠은 많은 것을 가려 준다.
나는 살며시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같이 씻으실래요?”
“…….”
“혼자 두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약속을 지키고 싶어요.”
힐끔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나 그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제대로 확인하기 전에 그가 나를 안아 들었다.
“아.”
본능적으로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리려고 하자 눈두덩에 입술이 닿았다. 그는 비에 젖은 얼굴을 살짝살짝 핥아 주었다.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런 나를 품에 안은 남자는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 * *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내가 깜짝 놀라서 흠칫 몸을 떨자 요한이 그런 날 안아 주었다.
“없는 척해. 넌 지금 자고 있는 거야.”
과연 그 변명이 먹힐까.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자니 곧이어 문 너머로 크로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 이 방에 있는 거 다 알아.”
“저런.”
쯧, 하고 짧게 혀를 찬 요한은 날 풀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단단히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밖에 크로셀이 있어요.”
“조금만, 조금만 더.”
요한은 느른하게 중얼거리며 내 머리칼에 입술을 맞추었다.
그의 창백한 손에 내 머리칼이 감겼다.
“저녁 먹으래. 지금 다들 모여서 먹고 마시고 있어. 완전 축제 분위기인데 너희만 없어서 언제 오냐고 난리야.”
문 너머에 크로셀이 있었다.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입맞춤을 맞으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가야 해요.”
“가지 말자.”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요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크로셀이 외쳤다.
“옆에서 가지 말라고 부추기는 그 녀석은 모르겠는데 너는 꼭 오라고 하더라. 어지간히도 네가 마음에 들었나 봐.”
프리실라 일행에게 꽤 시달린 건지 크로셀의 말투에서 고단함이 묻어났다.
“네가 안 오면 내 머리통을 깨 버릴 것 같은 분위기였어.”
“프리실라가요?”
“그 여자 하나뿐만이 아니야. 네가 직접 그들과 마주쳐 봤어야 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작게 소리 내어 웃고서는 대답했다.
“주인 된 도리로서 크로셀의 머리통을 지켜 줄게요.”
“본인이 내 주인인 걸 잊지 않아서 참 다행이네.”
아쉬운지 계속 입을 맞추는 요한을 겨우 떼어 내고 침대에서 벗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기다리는 크로셀을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져서 다소 정신없이 옷을 갈아입었던 것 같다.
나답지 않게 옷을 거꾸로 입을 뻔했다.
그걸 보고서는 낮게 웃은 그가 옷 갈아입는 걸 도와주었다.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크로셀이 방금 자다 깬 거냐면서 뚱하니 나를 쳐다봤다.
“몇 시간 전에 쟤가 너 없다고 아주 지랄을 떨더니 결국 둘 다 밖에 나갔다 왔나 봐. 넌 우산 안 챙기고 간 거였어? 씻었는지 같은 냄새가 나네.”
같은 냄새가 난다는 말에 나는 황급히 손등을 코끝에 갖다 댔다.
날이 어두워서 정확한 시간은 가늠할 수 없었으나 씻은 지 제법 시간이 지났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 탓에 내게 어떤 냄새가 나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런데 쟤는 악마라서 씻을 필요가 없는데 왜 같은 냄새가 나는 거지?”
크로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너 어디 아파? 얼굴이 새빨개. 혹시 그 잠깐 나갔다 왔다고 감기 걸린 거야? 이래서 인간은 너무 나약하다니까.”
감기가 아니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허둥지둥거리고 있자니 뒤에서 요한이 나를 꼭 안아 주었다.
“헛소리 말고 고개 돌려.”
“아, 또 난리야.”
크로셀은 눈빛으로 욕을 하면서도 착실히 고개를 돌렸다.
입으로 투덜거리고 있긴 했지만 반항하지 않았다.
“내 주인의 건강을 걱정해 주고 있는 거잖아! 그런데 나만 이상한 악마 취급이지.”
“이상한 악마 취급한 적 없어요.”
“그 녀석한테 안겨 있는 채로 그렇게 말해 봤자 진정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뾰로통하게 대꾸한 크로셀이 앞장서서 나아갔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뒷모습으로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크로셀의 화가 금방 풀리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괜히 껄끄러운 감정을 남기고 싶지 않은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크로셀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요한이 내 뺨에 제 손등을 갖다 댔다.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봤다.
“아직 빨개.”
그의 손이 뺨을 차갑게 식혀 주었다.
나는 또다시 얼굴이 달아오를 것 같아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결국 크로셀을 달래지 못한 채로 1층에서 먹고, 마시며 떠들고 있는 프리실라 일행과 합석했다.
그들은 악마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듣기로는 물 덩어리의 능력이 바다와 관련이 있어서 도움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계약자인 내게 호의적이었고, 지나가다가 마주치면 서로 인사 정도는 나누는 사이였다.
살갑게 나를 맞이한 그들은 내게 냄새 얘기를 하지 않았다. 악마가 유독 후각이 좋은 것 같았다.
눈치챈 사람이 없는 듯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요한이 이런저런 음식을 주문했다.
그리고 음식이 나오자 그것을 내 앞에 잔뜩 갖다 놨다.
프리실라 일행이 이미 먹고 있던 음식도 있었고, 굳이 내 앞에만 갖다 두는 것이 이상하여 슬쩍 그릇을 밀어내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외쳤다.
“아니, 뭘 좀 먹고 다니긴 하는 거야?”
“네?”
“팔 좀 봐. 뼈밖에 안 남아서 앙상하잖아.”
얼굴이 익숙한 여자였다.
그녀의 외침에 다들 떠들던 것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한마디씩 던졌다.
“여행한다고 했지 않아? 이 험한 세상을 이런 몸으로 어떻게 돌아다녀.”
“툭 치면 쓰러지겠다.”
나는 슬쩍 팔을 들어서 확인해 봤다.
그들이 너무 과장되게 표현해서 그렇지 지극히 일반적인 팔이었다. 그러다가 내 팔과 그녀들의 팔을 비교해 보니 과장하여 표현할 만도 한 것 같아서 반박하지 못했다.
애초에 뱃사람과 일반인을 비교해서는 안 됐다.
“아니, 악마면 인간부터 제대로 먹이고 다녀야지.”
“맞아, 맞아.”
비난의 화살은 악마들에게로 향했다.
여기저기서 비난이 쏟아졌다.
이러다가 요한과 크로셀이 고의적으로 인간을 굶긴 부도덕한 악마로 불리게 될 것 같았다.
나는 다급하게 나섰다.
“저는 굉장히 잘 먹고 다녀요.”
“잘 먹었다고 세뇌당한 거 아니야?”
“그러니까. 잘 먹고 다닌 것치고는 썩 좋아 보이지 않는데.”
“같이 다니는 악마들이 잘못했네. 악마가 인간부터 챙겨야지. 인간이 악마를 챙겨?”
“평소에 잘 먹이지 않으니까 지금 피골만 남아 있는 거 아니야. 게다가 우리 배식이 얼마나 부실했어. 요 며칠 새 제대로 못 먹고 다녔으니 더 하지.”
“뭐? 내가 만든 음식에 불만이 있다는 거야?”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영양적인 측면에서 하는 말이지.”
프리실라 일행은 인원이 많다 보니 한마디씩 던지기만 해도 끝이 없었다.
이야기가 점점 원래 취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런 그들의 언쟁을 구경했다.
요한은 자신이 비난을 당하든 말든 딱히 관심이 없는 건지 내 앞 접시에 음식을 두었다.
크로셀은 주스만 마셨다. 실제로는 연장자이지만 외양만 따지면 제일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크로셀이 마실 수 있는 음료의 종류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저대로 둬도 괜찮을까요.”
“본인들 일이니 알아서 해결하겠지. 그보다 왜 안 먹는 거지? 입맛에 맞는 게 없다면 내가 직접 요리한다고 할까?”
“네? 네? 아니에요.”
번뜩 정신을 차리고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프리실라 일행이 앞에서 떠들든 말든 내가 음식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불만인지 애꿎은 음식을 노려보고 있었다.
“천천히 먹을게요.”
“식기 전에 먹는 것이 좋을 거야. 식으면 맛이 없어지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양옆에 앉은 악마들만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이질감을 느끼며 파국으로 치닫는 프리실라 일행을 지켜보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리 없었다.
그 와중에 또 앞 접시에 음식이 계속 쌓여 가고 있었다.
나는 더는 챙겨 주지 않아도 된다며 요한을 말리고서는 술잔을 홀짝였다.
목이 탔기 때문이었다.
크로셀은 분명 축제 분위기라고 했는데 이걸 축제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싶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이목이 집중되었다.
“다들 주접 좀 떨지 마.”
테이블에 술잔을 내려친 프리실라가 읊조렸다. 언성을 높이던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그녀를 쳐다봤다.
험악하던 분위기가 단숨에 종식되었다.
“너희들이 계속 떠드니까 리엘이 아무것도 못 먹고 있잖아.”
“뭐? 아무것도 못 먹고 있다고?”
“아니, 왜 안 먹고 있어. 앞 접시 좀 봐. 가득가득 있는데 하나도 안 줄었네.”
“그건 제 의지가 아닌데요…….”
내가 작게 항변했지만 누구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들이 떠드는 와중에 앞 접시에 놓인 음식을 먹었어도 똑같았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옆에 앉아 있는 요한이 내가 먹은 만큼 또 접시를 채웠을 테니까.
“내가 어릴 때는 저거 열 접시는 먹었어.”
“넌 그때 고래도 씹어 먹었잖아.”
“고래 고기 참 맛있지. 여기서 고래 고기를 팔았으면 참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없으니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먹어 봐. 고기가 기름진 게 맛있어.”
“기름진 요리에는 술을 빼놓을 수 없지. 이거랑 같이 마셔.”
“넌 그냥 술이 좋은 거잖아.”
대화의 흐름을 종잡을 수 없었다. 나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말소리를 흘려듣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
그러던 중 얼떨결에 내게 주어진 음식과 술잔을 받아 들었다.
그녀들의 반짝이는 눈동자와 마주하자니 도저히 그냥 테이블에 내려놓을 수 없었다.
포크를 들어서 생선 요리를 먹고, 술을 마셨다.
내가 꿀꺽 삼키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그녀들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그 얼굴을 보게 되니 나까지 즐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다시 포크를 들어서 앞에 놓인 음식을 조금씩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음식은 전혀 줄어들 기색이 보이지 않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들이 내게 음식을 권하는 건 다양한 걸 먹어 보라는 의미이지 굳이 다 먹으라고 압박을 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웃고, 떠들고, 술에 취해 풀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섞여 있는 이 순간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불안도, 긴장도, 의심도 없었다.
“왜 그러지?”
“그냥, 맛있어서요.”
나는 웃으면서 술잔을 들었다.
“그러다가 취하겠어.”
“괜찮아요. 취할 정도로 마셔 본 적 없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나는 요한의 걱정을 가볍게 넘겼다.
살면서 취해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많은 술을 마실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몇 잔째일지 모를 술을 마셨다.
분위기에 취해서 스스로를 과신했던 것이다.
* * *
슈리엘이 웃었다.
요한은 그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시선을 느끼지 못한 건지 슈리엘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근처에 있던 여성과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슈리엘의 발음이 살짝 샜다. 본인의 발음이 새는 줄도 모르고 주절주절 말하던 슈리엘은 또다시 술을 입에 댔다.
발음뿐만 아니라 술까지 흘러내렸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술을 바라보던 요한은 손으로 그것을 닦아 주었다.
그 손길이 간지러웠는지 작게 소리 내어 웃은 슈리엘은 음식을 먹기 위해 포크를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포크를 쥘 수 없었다.
“얘 좀 위험한 거 아니야?”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크로셀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슈리엘은 오랫동안 바다에서 생활하여 알코올에 이골이 난 프리실라 일행과 달랐다. 서로 그걸 감안하지 못하고 술잔을 건네주면 주는 족족 받아 마셨으니 제정신일 리 없었다.
포크를 쥐기 위해 노력하는 슈리엘을 지켜보던 요한 또한 크로셀의 말에 공감했다.
이제 슬슬 슈리엘을 일으키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손쓰기 전에 슈리엘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외쳤다.
“오늘 먹은 음식값, 제가 다 낼게요!”
공짜 술.
이 얼마나 매혹적인 단어란 말이던가. 너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은 환호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 “무리하는 거 아니야?” 하고 물었다.
술을 한두 잔 마신 것도 아니어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제법 큰돈이 되리라는 걸 아는 사람이 한 말이었다.
슈리엘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제가 가진 건 돈밖에 없는걸요.”
그렇게 말한 슈리엘은 주머니를 뒤졌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금속을 찾기 위함이었다.
금속은 곧 황금이었다.
그리고 황금은 곧 돈이었다.
시야에 금속이 들어오지 않아서 울상을 짓던 슈리엘은 이내 아까 만지작거리던 포크를 찾았다.
포크를 황금으로 바꾼다.
그 일념 하나로 제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요한이 슈리엘의 손을 낚아챘다.
“그 능력은 여기서 쓰지 마.”
“왜요?”
두 눈을 크게 뜬 슈리엘이 요한을 밀어냈다.
“쓰고 싶어요. 돈이 필요한걸요.”
“네 능력을 보고 나서도 널 순수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인간은 몇 되지 않을걸.”
쓰게 웃은 요한은 능력을 쓰기 위해 뻗은 슈리엘의 손에 손깍지를 꼈다.
완벽하게 저지당한 슈리엘은 고개를 숙이고서 잠깐 멍하니 생각을 하더니 크로셀을 불렀다.
“저, 돈이 없어요. 그런데 돈을 만들어 낼 수도 없어요. 만들지 말래요.”
크로셀은 한숨을 내쉬었다.
취해도 단단히 취했구나.
취한 것과 별개로 일단 제 주인이 벌여 놓은 일은 수습해 놔야 할 것 같아서 크로셀은 주머니를 뒤졌다.
“돈이 얼마나 남았더라.”
악마가 돈을 쓸 일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얼마를 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 허둥지둥거리고 있자니 프리실라 앞에 돈 주머니가 던져졌다.
요한이었다.
그는 슈리엘을 번쩍 안아 들고서는 말했다.
“내 계약자가 취한 것 같으니 먼저 일어나 보도록 하지.”
“우리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건 그냥 들고 가지?”
돈주머니에 손도 대지 않은 프리실라가 말했다.
다들 공짜 술을 좋아했지만 여행자의 지갑 사정은 다 엇비슷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호기로운 슈리엘의 외침에 호응하느라 다들 열광적으로 반응했지만,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슈리엘과 나이가 비슷한 딸을 가진 이도 여럿 있었다.
한편으로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 또한 돈이 궁한 처지가 아니라서 주었던 걸 굳이 돌려받을 필요성을 못 느끼겠군.”
버둥거리는 슈리엘을 달래며 요한이 이어 말했다.
“악마가 주는 돈이 기분 나쁘면 덕분에 내 계약자의 웃는 얼굴을 봤으니 그 대가라고 쳐.”
“다들 못 먹고 자란 시절이 길어서 남한테 음식 권유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것뿐이야.”
이 이상 거절해 봤자 불필요한 언쟁만 오고갈 뿐이었다.
프리실라는 돈주머니를 받았다.
그걸 확인한 요한은 2층으로 올라갔다.
슈리엘이 없다면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었던 크로셀이 그런 그의 뒤를 따랐다.
“웬일이야? 내 주인이 준 돈 쓰기 싫어했잖아.”
“내 돈이야.”
“너 돈 갖고 있었어?”
“오래 살게 되면 필요하지 않아도 갖게 돼 있지.”
“그러게. 너 되게 오래 살았잖아. 돈이 제법 많다는 건데 왜 우리 둘이 있을 때 돈 없는 척한 거야?”
젠틸라 공작령에 있을 때 슈리엘이 떠난 후로 여관비를 내는 건 크로셀의 몫이었다. 어차피 돈은 쓰라고 있는 것이었고, 크로셀에게 돈만큼 무의미한 건 없었다.
때문에 당시에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는데 얘기를 듣고 보니 이상하여 언급하게 되었다.
“그녀가 준 물건을 네가 갖고 있었던 것이 싫었으니까.”
“뭐?”
“뺏을까 하고 고민한 적도 있었지. 하지만 물질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직접 주어서 의미 있는 것이니 다 써 버리도록 내버려 두었는데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모양이군.”
“와, 주인님아. 너 지금 얘 하는 소리 들었어? 얘가 이런 악마야.”
크로셀은 질색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요한의 품에 안긴 슈리엘은 멀뚱히 크로셀을 쳐다봤다.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한 기색이었다.
어쩐지 속내를 곧이곧대로 털어놓나 싶었더니 제 주인이 이런 상태인 걸 알고서 말한 것이었다.
크로셀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오늘 밤은 혼자 놀고 있어.”
“또 둘이 있을 거야?”
“상태가 이러니 옆에서 지켜봐야지.”
“그래, 그러도록 해. 눈치 없이 끼어들지 않을게. 대신 내 주인한테 이상한 짓 하면 안 된다.”
“그럴 리가.”
“가끔 보면 네가 제일 위험한 것 같아.”
요한은 의심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크로셀을 가볍게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런 요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크로셀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서는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 어디 가요?”
“방에.”
“어느 방이요?”
“우리 둘만 있는 방.”
슈리엘은 요한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래.”
슈리엘을 안은 팔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며 방에 들어가서 슈리엘을 침대에 눕혀 주었다.
슈리엘은 정자세로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돌연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제 귀에 대고 소리치는 것 같아요. 머리가 아파요.”
슈리엘의 칭얼거림이 이어졌다.
그 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요한은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아프지 않게 해 줄게.”
“아프지 않게요?”
“그래.”
슈리엘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어떤 반항 없이 자신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는 그 얼굴을 내려다보던 요한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슈리엘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경건한 입맞춤이었다.
청량함이 퍼지면서 깨질 듯이 아픈 머리가 개운해졌다.
그러나 아직 취기가 가신 것은 아니었다.
슈리엘은 제 이마에 닿았던 입술이 미끄러져서 눈두덩에, 콧대에, 뺨에 차례대로 닿는 것을 느꼈다.
부드럽고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슈리엘이 키득키득 웃는 소리와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한데 울렸다.
요한은 그 울림을 느끼며 종착지에 도착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슈리엘의 입술이었다.
요한은 노크를 하듯이 입술을 밀착시켰다.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그것이 반복되자 슈리엘은 허락하듯이 다물고 있던 입술을 벌렸다.
그 틈새로 뜨거운 혀가 들어갔다.
입천장을 긁는 낯선 감각에 슈리엘은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단번에 잡아먹혀 입 밖으로 새어 나올 수 없었다.
소리도, 온기도, 타액도, 감각마저도.
모두 요한과 나누게 되었다.
슈리엘은 요한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러고서는 끌어안았다.
서로가 빈틈없이 맞닿고, 혀가 얽혀 들었다. 두 사람은 하나가 된 것처럼 뒤엉켰다.
“요한.”
“응.”
“요한.”
“응.”
오랜 입맞춤 끝에 입술이 떨어지자 슈리엘은 여러 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때마다 꼬박꼬박 들리는 대답이 좋았다.
빙긋 미소를 지은 슈리엘은 작게 속삭였다.
“불안해하지 말아요.”
취기 탓에 발음은 여전히 정확하지 않았으나 내용만큼은 솔직했다. 슈리엘은 같이 비를 맞고 있었을 때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털어놓았다.
“무덤에 가고 싶다고 한 건 단지 그녀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예요.”
손을 뻗어서 요한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러운 은빛 머리칼이 흩어졌다.
“그녀가 진짜 죽었다고 해도 제가 속죄받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래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요.”
이제껏 항상 샬롯의 그림자만 밟아 왔다.
그녀를 따라 해야 했으며, 그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친 노력은 모두 헛수고가 되었다.
그녀가 죽어 있을 때도, 살아 있다고 알려졌을 때도 비참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쩌면 그녀 또한 자신처럼 한낱 체스 말 같은 삶을 살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정확히 알고 싶어졌다.
그녀의 죽음이 사실인지.
“그 남자와 관련된 부탁을 하는 건 이제 마지막일 거예요. 끝나고 나면 어디로 갈까요.”
미래는 더 이상 서리가 낀 불투명한 창문 같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미래를 그릴 수 있었다.
“당신의 의견을 따르도록 할게요. 저는 어딜 가든 상관없어요.”
“…….”
“당신만 제 곁에 있다면.”
“……나 또한 마찬가지야. 이제부터 고민해 봐야겠군.”
자신만 있다면 된다는 슈리엘의 고백을 듣고서 요한은 반 박자 느리게 대답하게 되었다.
“저 돈 많아요.”
“그래, 알아.”
프리실라 일행 앞에서도 자신의 재력을 자랑하더니 이번에도였다.
뜬금없는 슈리엘의 발언에 요한은 목 안으로 웃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듣고서 더는 웃을 수 없었다.
“처음으로 가져 봐요. 이렇게 많은 걸 살면서 가져 본 적이 없어요.”
“…….”
“제 것을 가지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잃어버릴까 봐 불안해요. 언제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제가 지켜 낼 수 있을까요?”
“사라지지 않아. 오롯한 너의 것이니까.”
요한은 힘을 주어 슈리엘을 끌어안았다.
“지켜 낼 수 없다 해도 내가 지킬 테니 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요한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는지 슈리엘은 “답답해요.”라고 중얼거리면서 뒤척였다.
요한이 살짝 힘을 풀자 배시시 웃고서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댔다.
“요한.”
“응.”
“빗소리가 들려요.”
요한의 가슴에 귀를 갖다 댄 슈리엘이 속삭였다.
“비가 많이 내리고 있어요.”
그 말을 하고서 슈리엘은 졸린 지 끔벅끔벅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다가 이내 졸음을 참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곧이어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네가 내 곁에 있는 이상 그치지 않을 거야.”
요한은 제 품에 안긴 그녀의 간헐적인 약동을 느끼며 누구도 듣지 못할 대답을 했다.
그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잠자코 슈리엘을 내려다보던 요한은 어둠 속에 파묻힌 얼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제 가슴에 빠듯하게 들이찬 온기와 같은 종류의 온기가 느껴졌다.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지난 다섯 번 동안 자신을 부를 때마다 차갑게 식어 가고 있던 육체가 아니었다.
스스로 말하고 움직이는 그녀가 제 품에 안겨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여 잘못 건드리면 깨질 것만 같았다.
“슈리엘.”
몇 번이나 불러도 모자란 이름이었다.
소리 내어 부르지 않는 순간마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너는 아마 영영 모를 테지.”
“…….”
“널 만난 이후로 내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는 걸.”
그는 까마득한 시간을 살았지만 단 한 번도 시간이 흐르는 걸 느낀 적 없었다.
본디 불멸자로 태어나, 인간과는 시간 감각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내가 들었다면 절대 믿지 못할 기적 같은 일이지.”
그의 삶에 있어 슈리엘과 함께 한 순간은 찰나와 마찬가지였다.
인간으로 치면 정말 눈 깜빡하는 찰나의 순간.
그 한순간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인간처럼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미소를 짓고,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차라리 모르고 있었던 과거가 나을지도 몰랐다.
그땐 무언가를 잃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여겨지지 않았으니.
대표적인 예로 그는 카타콤에 널브러진 해골을 보더라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태양이 뜨면 지게 돼 있다.
그처럼 영원한 영광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찬란한 영광이라도 끝내 최후를 맞이하는 걸 아는데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할 리 없었다.
그러나 무려 다섯 번이나 슈리엘의 죽음을 목도한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꼈다.
그 절망감은 다신 느끼고 싶지 않은 종류의 것이었고, 그때 깨달았다.
이 사랑은 그가 사멸하게 되는 순간까지 영원할 것이란 것을.
요한은 슈리엘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와 비교하면 여전히 작고, 연약했지만 더 이상 약하지 않았다.
끝내 스스로 일어서려고 했던 그 처절한 몸부림을 기억하고 있는데 어찌 약하다고 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자신을 신이라고 믿고 숭상했지만 그에게 신은 이 작은 인간일지도 몰랐다.
눈부신 광명을 알려 주고, 시련과 고난을 내려 주어 절망을 맛보게 하였으니.
신 외에 달리 부를 표현이 없었다.
“좋은 꿈 꾸렴.”
그는 슈리엘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나의 소녀여.”
비는 그치지 않고 사흘 밤낮으로 내렸다.
그동안 슈리엘과 요한은 서로를 떠나지 않으며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
* * *
“얼마 만에 보는 파란 하늘인지.”
길게 하품을 한 프리실라가 말했다.
그녀는 피곤한 기색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정말 떠나는 건가?”
“네, 비도 그쳤으니 가야죠.”
“땅이 아직 무를 텐데.”
“이동하는 데 큰 무리는 없으니 시간을 지체하지 않으려고요.”
내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프리실라는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여행가의 도착지야 다 엇비슷하니 묻지 않겠지만, 개인적으로 궁금하니 하나 묻지. 혹시 또 그림으로 이동하는 건가?”
“아뇨, 그런 기행은 더 이상 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무사히 육지까지 데려다 주셔서 감사해요.”
“특별 손님이 생겨서 우리도 즐거웠지. 특히 이 녀석이 제일 즐거웠고.”
프리실라가 물 덩어리를 가리켰다. 지목당한 그것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너무 오래 살아서 이름조차 없다고 알려진 존재와 대화를 나눈 것은 물론이고 호문쿨루스의 목적까지 알아냈어! 너무 좋아!”
“악마여서 다행이지 인간이었으면 제명에 못 살았어. 이런 녀석과 엮인 나도 제명에 못 살 것 같지만.”
정신 사납게 날아다니는 물 덩어리를 보며 프리실라는 쯧쯧 혀를 찼다.
“원래 인간은 이 세상에 짧게 머물렀다가 가는 존재야. 너무 낙담하지 마.”
“네가 날 낙담하게 만들어.”
물 덩어리의 악의 없이 순수한 조언은 프리실라에게는 썩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닌지 가볍게 받아친 프리실라는 날 바라보았다.
“다른 녀석들이 깨기 전에 어서 가 보도록 해. 다들 널 보면 또 먹이려 들지 모르니까. 심지어 비가 내리는 동안 모습 한 번 비추지 않았으니 지금쯤 꿈속에서 단단히 벼르고 있겠지.”
프리실라는 힐끔 여관 건물을 올려다봤다.
그녀는 내가 과한 관심을 피하기 위해 한동안 그들 앞에 나서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진실은 그것이 아니었지만 썩 나쁘지 않은 착각이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사흘간의 일을 프리실라 앞에서 곧이곧대로 말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녀가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앞으로 만날 일이 있겠나 싶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니 다음에 또 인연이 닿으면 좋겠군.”
“저도요.”
“그때도 이 녀석을 부탁하지. 참 한결같이 시끄러운 악마니까 심심할 겨를이 없을 거야.”
물 덩어리를 톡톡 건드리며 프리실라가 말했다.
항상 말로는 물 덩어리가 귀찮고 시끄러운 존재라고 하지만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배웅해 주고 싶은데 아직 피곤이 덜 풀려서 이만 또 자러 가 봐야겠어.”
“이렇게 직접 나와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한걸요. 오히려 제가 너무 이른 시간에 나가서 귀찮게 한 건 아닐까 걱정하던 참이었어요.”
“귀찮기는. 다 내 몸 상태가 문제지.”
뻐근한지 프리실라가 뒷목을 주물렀다.
근처에서 알짱대던 물 덩어리가 그런 프리실라에게 한 소리 했다.
“사흘 동안 술만 마시니까 그렇지. 어제도 밤새도록 마셨잖아.”
“나도 늙긴 늙었나 봐. 예전에는 끄떡없었는데.”
“인간의 육체는 소모적이야. 소중히 다뤄.”
“그래, 그래.”
프리실라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그들을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물 덩어리가 퍼뜩 생각났다는 듯이 내게 달려들었다.
“아, 참. 나도 네 권속이 되고 싶은데 할 수 있을까?”
“네? 어째서요?”
“또 언제 만날지 모르잖아. 그러니 확실한 관계를 맺고 싶어.”
“솔직하지 못하기는. 실제 목적인 저쪽에 있을 테지.”
물 덩어리는 미래의 만남을 기약하기 위해 나의 권속이 되고 싶다고 했지만, 그 속뜻을 곧바로 눈치챈 프리실라가 알 만하다는 듯이 요한을 가리켰다.
속마음을 들킨 물 덩어리는 바로 제 진심을 시인했다.
“물어볼 게 잔뜩 남았는데 비 오는 동안 질문을 하나도 못 해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악마가 오래 산다고는 하지만 그 긴 세월 동안 악마가 둘 이상 모이는 건 흔치 않단 말이야. 그러니까 권속이 되게 해 줘라. 응?”
“목적이 그렇다면 굳이 제 권속이 될 필요는 없잖아요.”
목적이 내가 아닌 요한이라면 요한의 권속이 되면 끝나는 일이었다.
내가 반박하자 물 덩어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궁금한 게 많기는 하지만 내 평생을 바칠 만큼은 아니야. 나도 이성이라는 게 있어.”
아무래도 요한의 권속이 되는 건 나의 권속이 되는 것보다 더 부담스러운 일인 듯했다.
물 덩어리는 이어서 “그리고 쟤는 귀찮은 일을 많이 시킬 것 같단 말이야.”라고 투덜거렸다.
“의도가 불순한데 괜찮을까요?”
“자진해서 네 힘이 되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지. 그리고 귀찮게 굴면 내가 알아서 쳐낼 테니 걱정할 것 없어.”
물 덩어리를 귀찮게 여길 줄 알았는데 요한은 생각보다 더 덤덤하게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 기뻐한 물 덩어리는 내가 마음을 바꿀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성급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42번째 악마, 대해의 사자 ‘베파르’. 나의 주인이 될 자여. 너의 진정한 이름을 알려 줘.]
[슈리엘.]
[슈리엘, 나의 주인이시여. 바다의 이름으로 영겁을 맹세하리라.]
베파르가 내 오른쪽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익숙한 통증과 함께 양 손등에 문양이 떠올랐다.
꼭 자신을 불러 달라고 외치는 베파르와 그런 베파르에게 시끄러워서 골이 울린다고 타박하는 프리실라한테 인사를 하고서는 여관을 떠났다.
“무작정 이곳을 떠나기보다는 대충 준비를 해야겠죠.”
내가 현재 있는 곳은 샬롯의 무덤으로부터 거리가 제법 되었다.
하루 이틀 이동해서 도착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먼저 비어 버린 돈주머니부터 다시 채우고 이동 중 필요할 만한 걸 빠르게 구매할 생각이었다.
하나둘씩 계획을 짜고 있자니 가만히 있던 크로셀이 내게 말을 걸었다.
“너 무슨 무덤에 가고 싶다고 했지 않아? 무덤이 어디 있는데?”
“수도요.”
샬롯의 무덤은 수도에 있었다.
그녀의 장례식이 다섯 공작만 참관했다고 하여 그녀가 묻힌 장소까지 비밀인 것은 아니었다.
“수도? 드래곤이 사는 거기?”
“네.”
두 눈을 크게 뜬 크로셀은 살짝 난처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수도라면 조금 위험한 거 아니야? 아니, 네가 강하니까 이제는 괜찮으려나.”
“위험하다니요?”
수도에 조각상이 많았던가.
수도 또한 아름다운 도시이긴 했지만 젠틸라 공작령에 비하면 거리에 미술품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수도에는 드래곤을 믿는 인간들밖에 없어서 보통 그 땅을 밟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고통을 느끼거든.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괜찮을 것 같다. 네가 권속으로 삼은 악마가 벌써 몇 마리야.”
“……그런 거예요?”
“응? 이것도 몰랐던 거야?”
내가 권속으로 삼은 악마의 수를 일일이 손가락으로 꼽고 있던 크로셀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땅을 밟는 것만으로도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인 터라 나는 요한을 돌아봤다.
“저를 찾아온 적 있잖아요.”
자신을 모험가라고 소개했던 그는 제법 오랫동안 수도에 머물렀다.
내가 만든 음식을 먹으며 힘을 보충했다고 했을 때는 막연히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니.
크로셀의 얘기만 들어 봐도 단순히 아픈 정도가 아닐 듯했다.
“네가 날 불렀으니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오히려 깜짝 놀란 건 크로셀이었다.
“너 혹시 수도에 갔었던 거야?”
“예전에.”
“앞뒤 가리지 않고 천사가 득실대는 방에 들어갔을 때도 느낀 거지만 너 참 대단하다.”
크로셀은 요한을 보며 징글징글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또 그들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게 된 건가 싶어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눈을 내리깔고 바닥을 보고 있자니 익숙한 손길이 뺨에 닿았다.
요한이었다.
그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봤다.
“고민할 것 없어. 이제 그 땅을 밟아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강하니까.”
“정말요?”
“정말.”
“하지만 그때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잖아요.”
당시 나는 그의 얼굴을 정확히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아픈 내색을 보인 적 없다는 건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내겐 고통마저 기쁨이 돼. 그러니 나 때문에 망설일 것 없어.”
그는 내 입꼬리를 매만졌다.
자신 때문에 축 처져 있을 것 없다는 의미였다.
억지 미소라도 지어 줘야 할 것 같은데 내가 그들에게 너무 많은 짐을 떠맡기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내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있자 크로셀이 나섰다.
“악마를 여섯 마리나 권속으로 삼은 건 평생 너 하나뿐일 거야. 그만큼 거대한 힘이 있는데 너의 영향을 받는 우리가 드래곤의 땅을 밟았다고 고통 속에 몸부림칠 리 없지. 아마 가뿐하게 뛰어다닐걸?”
“……알겠어요. 대신 조금이라도 아프면 곧장 말하는 거예요.”
나는 그들에게 거듭 확인을 거쳤다. 고개를 끄덕인 크로셀은 멋쩍은 듯이 뺨을 긁었다.
“인간에게 걱정받는 악마라니. 나도 오래 살긴 오래 살았나 보다.”
“사멸할 때가 되었나 보지.”
“그런가.”
보통 인간에게 죽으라는 말은 저주에 가까웠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살았기 때문인지 크로셀은 요한의 말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평범한 인간인 내 입장에서 보면 해괴한 그들의 대화를 듣고서는 하겐티의 힘을 빌려서 여비를 잔뜩 챙긴 후 지도와 나침반을 구입했다.
더불어 이동 중 먹을 간단한 음식과 여벌의 옷 또한 구입하는 등, 비가 오는 동안 하지 못했던 떠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동 수단에 대해 고민했다.
“이 거리를 무작정 걸어갈 수 없으니 역시 말을 사는 게 낫겠죠.”
“여정이 길어질 예정이라면 마차 또한 나쁘지 않겠지. 어차피 이제 인간들이 닦아 놓은 길로 갈 예정 아닌가?”
“네, 마물 사냥꾼을 피해야 하니까요. 제레미아에게 명령을 철회하라고 말해 놓긴 했지만, 사냥꾼의 입장에서 저는 마물의 핵이 보이는 인간이니 수상해 보일 거예요.”
최대한 사람이 많은 길로 이동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날 잡으라는 공작 가문의 명령이 없더라도 마물 사냥꾼의 입장에서 보면 나라는 존재는 사냥해야 하는 대상일 뿐이니.
“그렇다면 네 편의를 위해 마차로 이동하는 것이 나을 것 같군.”
돈은 많았기 때문에 마차를 구입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문제는 마차를 누가 끄냐는 것이었다.
“거리가 거리다 보니 마부를 따로 구하기가 힘들 것 같은데 혹시 마차를 끌 줄 아세요?”
“못 할 것도 없지.”
“그렇다면 오늘 하루 동안 제가 옆에서 보고 배울게요.”
마차로 쉬지 않고 간다고 해도 어림잡아서 한 달은 걸릴 텐데 한 사람에게 모든 걸 떠맡길 수 없었다.
내가 돕겠다고 나서자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네 편의를 위한 선택인데 그럴 수 없지.”
“하지만…….”
내가 반박하기 전에 크로셀이 끼어들었다.
“왜 나한테는 안 물어봐?”
“크로셀한테 맡기기에는 아무래도 좀 그렇잖아요.”
무엇이 문제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크로셀을 바라보았다.
옅은 푸른 머리칼을 한, 많이 쳐 봐야 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소년이 서 있었다.
크로셀이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 모습을 보게 되면 도저히 혼자서 마차를 끌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크로셀에게 부탁할 바에 차라리 내가 마차 끄는 법을 빠르게 습득하여 혼자 떠맡고 마는 게 나았다.
“크로셀의 외양이 십 년만 더 늙었어도 흔쾌히 제안했을 거예요.”
“외모 때문이었어? 그러면 말하지! 외모는 바꾸면 되는…… 아, 아니다.”
얘기를 하던 크로셀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너는 내 주인이 편히 있었으면 좋겠고, 내 주인은 분담하길 원하는 거지?”
“네, 그렇죠.”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어.”
크로셀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처음으로 보는 악마다운 표정이었다.
“방법이 무엇인데요?”
“노는 녀석이 하나 있잖아.”
“노는 녀석이요?”
내가 의문을 표하자 크로셀은 곧장 대답했다.
“9번째 말이야! 9번째를 부르는 거야.”
“하지만 쉬겠다고 한걸요.”
“괜히 엄살 부리는 거야. 쉬는 거야 네가 죽은 이후에도 평생 할 수 있는 거고, 지금 힘으로 마차 하나를 못 끌겠어.”
그런 이런 사소한 일로 악마를 불러내는 것이 괜찮을까.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나의 걱정과는 별개로 흥분한 크로셀은 속내를 드러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 녀석한테 다 시켜 버리자! 마부 노릇, 짐꾼 노릇 다 시키는 거야. 그러면 편하게 이동할 수 있겠지.”
“그래도 괜찮은 걸까요.”
“마부 노릇 몇 년 한다고 안 죽어.”
“여기서 수도까지 멀긴 하지만 몇 년까지는 가지 않을 거예요.”
작정하고 파이몬을 부려 먹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동안 내가 크로셀을 험하게 대한 것일까.
악마처럼 웃고 있는 크로셀을 얼굴을 보게 되니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게 되었다.
애초에 내가 가진 짐이 없어서 유별나게 무거운 짐을 든 적도 없었고, 악마는 숙식이 불필요한 존재여서 먹고 자는 것에 대한 불평도 없었다.
무엇이 크로셀을 저렇게 만든 걸까. 아니면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지 내게 불만이 많았던 걸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요한이 그런 나를 깨웠다.
“저 녀석은 그냥 남을 부려 먹고 싶어서 저러는 거야. 천성이 못된 거지.”
천성이 못됐다는 말은 악마에게 있어서 전혀 흠 될 것 없는 말이었다.
실제로 파이몬을 부려 먹겠다는 의지로 가득 찬 것인지 크로셀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리고 네가 필요로 한다면 악마는 언제든 불러내도 상관없어. 굳이 거창한 일이 아니어도 네가 불러 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뻐할 테니까.”
“그럴까요?”
“그래, 한번 불러 봐.”
요한 또한 크로셀의 의견에 옹호하는 입장인 것 같았다.
결국 파이몬을 불렀다.
내가 이름을 부르자마자 모습을 드러낸 파이몬은 벌써 자신이 필요한 일이 생겼냐며 기뻐했다.
그는 무력을 쓸 일이 생겼다고 생각한 건지 적은 어디 있냐고 두리번거렸다. 나는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파이몬에게 마차를 끌 줄 아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곧이어 마차를 끌 사람이 필요해서 불렀다고 하자 파이몬은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뭐? 나보고 마차를 끌라고? 한낱 마차 따위를 끌기 위해 나를 불렀단 말이야?”
파이몬의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그를 달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했다.
그 전에 크로셀이 나섰다.
“우리의 주인이 탈 마차야. 불만 있어?”
오만한 그 외침을 듣고선 움찔한 파이몬이 힐끔 나를 쳐다봤다.
“죄송해요. 무리라고 생각되시면 돌아가셔도…….”
“무리는 무슨! 마차 몇 대 끌면 되는데? 백 대? 천 대?”
“아니요, 그렇게까지 많지 않아요. 그러고 보니 일단 마차부터 구매해야겠네요.”
악마들의 숫자 개념은 인간으로서 조금 감당하기 힘들었다.
얼떨결에 파이몬의 승낙도 받아냈고,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확정되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마차와 함께 말을 구매하기 위해 이동했다.
규모가 큰 항구 도시인 만큼 마차를 판매하는 곳은 많았는데, 대부분이 짐마차였다.
짐마차는 불편하다는 이유로 기각되었고, 장시간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튼튼한 마차를 고르려다 보니 시간이 제법 걸렸다.
사실 그들의 요구를 다 충족하는 마차는 귀족들이 타는 마차밖에 없었고, 그런 마차를 여기서 팔 리 없었다.
일단 지금까지 둘러본 것 중에서 제일 괜찮은 마차를 한 대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상인이 부르는 가격이 심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사기를 치는 것 같죠?”
나는 요한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내가 간과한 점이 있다면 인간이면 몰라도 악마는 귀가 밝다는 거였다.
“뭐? 사기라고?”
내 말을 들은 파이몬이 다짜고짜 상인의 멱살을 잡았다.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내 주인이 탈 마차에 사기를 쳤다는 거야?”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상인은 사기가 아니라고 했지만 파이몬의 기세에 눌려서 목소리가 점점 쥐구멍으로 들어갔다.
“……파이몬이 원래 저런 성격이었나요?”
“네 앞이라서 내숭을 떤 모양이지. 네가 저것의 생명의 은인이니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군.”
어째서인지 불쾌한 얼굴을 한 그가 파이몬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어깨를 가볍게 쳤다.
“쓸데없이 주목받는 짓 하지 마.”
“아니, 지금 내 주인한테 사기를 친다는데 말이 돼?”
“말이 안 돼도 가만히 있어. 이 문제는 네가 낄 만한 일이 아니니까.”
씩씩대는 파이몬은 요한의 얼굴에 주먹이라도 한 대 칠 것 같았다. 그런 파이몬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던 요한이 내 쪽을 가리키고서는 말했다.
“너 때문에 난처해하고 있잖아.”
파이몬은 고개를 돌려서 날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내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주자 그는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한풀 꺾인 태도였다.
“알겠어.”
“우리한테 무력만큼 절대적인 것이 없지만 인간들에게는 무력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잊지 마.”
낮게 경고한 요한은 잠깐 고민하더니 파이몬의 귓가에 무어라 속닥거렸다.
나는 악마들처럼 청각이 좋지 못해서 귓속말을 엿듣지 못했다.
대신 요한의 말을 듣고 나서 두 눈을 크게 뜬 파이몬이 크로셀을 힐끔 쳐다보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상황이 진정되고, 파이몬에게 멱살을 잡혔던 상인은 공포에 질려서 우리를 쳐다봤다.
이러다가 치안대를 불러도 이상할 것 없는 분위기였다.
돈이 아쉬운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위로금을 포함하여 비싼 값에 마차를 샀다. 어차피 이것 외에 달리 구매할 수 있는 마차도 없었다.
돈을 보자마자 표정을 푼 상인은 곧바로 장사치로 돌아갔다. 그는 우리에게 마차를 끌 말이 없다는 걸 알고 중매까지 나서 주었다.
덕분에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짐을 정리하고, 파이몬에게 지도와 나침반을 건네주며 길을 상세히 알려 주었다.
초행이었지만 도로는 잘 닦여져 있었고, 큰길로만 마차를 끌면 됐기 때문에 웬만하면 길을 잃을 일은 없을 거였다.
“덕분에 편하게 가겠다. 앞으로 잘 부탁해!”
떠날 준비가 끝나자마자 활기차게 외친 크로셀이 마차에 올라타려고 한 순간이었다.
파이몬이 크로셀의 뒷덜미를 잡아채서 끌어당겼다.
“내가 인간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말이야. 나보다 먼저 인간과 생활한 악마로서 옆에서 지켜봐 줬으면 좋겠어.”
파이몬은 자신을 부려 먹자고 의견을 낸 악마가 크로셀이라는 걸 알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대로 뒷걸음질한 크로셀은 마부석으로 질질 끌려가게 되었다.
“살려 줘! 내 안락한 여행길이……!”
크로셀의 단말마가 멀어졌다.
“자업자득이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요한은 즐거운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불현듯 마차를 살 때 파이몬에게 은밀히 속닥거리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혹시 그때 요한이 파이몬에게 얘기한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는데 마차 문을 연 요한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아……, 네.”
파이몬에게 그 얘기를 해서 요한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어란 말인가.
나는 머릿속에 있던 생각을 지웠다. 그리고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우여곡절 끝에 마차가 출발했다.
파이몬과 크로셀은 마부석에 있었고, 마차 안은 요한과 나. 단둘뿐이었다.
나는 애꿎은 창밖 풍경만 노려봤다.
처음에는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좁은 공간에 둘만 있으니 괜히 지난 사흘간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첫 시작은 분명 프리실라 일행과 떠들면서 술을 마신 거였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위는 어두웠고, 빗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렸다.
더불어 나는 침대 위였다.
정확히는 요한의 품 안이었다.
단번에 상확 파악이 되지 않아서 두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분명 식사 중이었는데 어째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내가 옮겨 주었지. 그런데 기억 못 하는 건가?’
‘네? 제가 혹시 실수라도 했나요?’
‘나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했었는데 오로지 나만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군.’
‘…….’
‘그리고 네가 날 덮쳤지.’
경악한 나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란 말인가.
무어라 반박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돌처럼 굳어 있자 빙긋이 미소 지은 요한이 말했다.
‘농담이야.’
단번에 긴장이 풀렸다. 그러나 이루 말할 수 없는 창피함이 몰려왔다.
나는 그대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려서 숨어 버렸다. 당장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이불 속뿐이었다.
‘슈리엘.’
요한은 누에고치처럼 이불을 돌돌 말고 숨어 있는 나를 끌어안으며 다정히 불렀다. 살짝 숨이 막혔지만 이 상태로는 도저히 그와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날 피하지 마.’
‘…….’
‘네가 보고 싶어.’
이불 한 겹을 사이에 두고 들리는 애처로운 부름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결국 이기지 못하고 살짝 얼굴을 내밀자 그가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그 후로 나의 하루는 온전히 그의 것이 되었다. 비가 그칠 때까지.
나는 지난 기억을 빠르게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군. 혹시 아픈 건가?”
“아니, 아뇨. 아니에요.”
갑작스러운 그의 물음에 내가 할 수 있는 온갖 부정이 입 밖으로 나왔다.
요한은 몸을 일으키더니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슬쩍 엉덩이를 그의 반대쪽으로 옮겼다. 그러나 멀어진 거리만큼 그가 가까워졌다.
몸이 마차 끝에 바싹 붙게 되고, 더는 퇴로가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서야 짧은 추격전이 끝났다.
“내 흔적만 남도록 노력했는데 아직 아프다면…….”
뒷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가 손가락으로 내 목덜미를 쓸어내렸기 때문이었다.
찬 기운이 퍼졌다.
솜털이 쭈뼛 섰다.
나는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면서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 내 모습을 조용히 쳐다보던 요한이 낮게 속삭였다.
“너는 몇 번이나 내 인내심을 시험하게 만들어. 처음에는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는데 지금은 닳아 없어질 것 같아.”
그가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목덜미가 훤히 드러났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붉은 자국이 여러 군데 새겨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이 남긴 흔적을 더듬었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다가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
“다른 악마들이 눈치챌 거예요.”
“괜찮아, 지금 둘이 싸우느라 이쪽은 전혀 관심이 없거든.”
“참 사이도 좋지.”라고 중얼거린 그가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기껏 밀어냈는데 더는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가까이 붙여졌다. 내가 힐끔힐끔 마부석 쪽을 보는 사이 그가 고개를 숙였다.
목덜미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요한은 지난밤에 자신이 흔적을 새겼던 그곳을 지분거렸다.
지난 사흘간 비가 내리는 탓에 사위가 어두워서 다른 것보다 몸에 남겨진 감각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 자극이었다.
나는 황급히 손바닥으로 입술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신음이 삼켜졌다. 그 떨림을 느끼듯, 그의 손가락이 목울대를 스쳐서 쇄골을 어루만졌다.
의도가 노골적인 손길이었다.
밀폐된 공간이었지만 근처에 파이몬과 크로셀이 있다는 걸 상기하며 다른 한 손으로 내 목덜미에 얼굴을 박고 있는 그를 밀어냈다.
“여기서는 안 돼요.”
“안 돼?”
“네, 안 돼요.”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과연 눈치채지 못했을까.
악마의 청각이 얼마나 좋은지 경험상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삼킨다고 삼킨 신음조차 들었을지도 몰랐다. 지금으로선 내가 낸 소리가 마차가 굴러가는 소리나 말발굽 소리에 파묻혔길 바랄 뿐이었다.
그는 밀어낸다고 밀려 나가지 않았다.
구석에 몰린 나는 어쩌지 못하고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짧은 침묵이 흐른 후, 그가 입을 열었다.
“키스는?”
요한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보채듯이 물어봤다.
“입 맞춰도 되는가?”
나지막하게 묻고서는 슬쩍 날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간절함을 담은 눈빛과 마주하고 있자니 도저히 안 된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키스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나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이 맞닿았다. 동시에 내 뒤쪽으로 손을 뻗은 그가 커튼을 쳤다. 사위가 단번에 어두워졌다.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눈을 다시 떠야 했다.
마을을 벗어났는지 마차가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구석에 몰려 있던 나는 벽 쪽에 자꾸 뒤통수가 부딪쳤다.
자세를 바꾸려고 움찔거리니 요한이 제 손으로 내 뒤통수를 받쳐 주었다.
“불편하군.”
계속 부딪치는 것이 거슬렸는지 입술을 떼어 낸 그가 중얼거렸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나와 살짝 거리를 벌렸다.
불편해서 그만두는 걸까.
자세를 고쳐 잡으려고 하는데 요한이 내 손을 잡았다.
다른 한 손으로 제 넓적다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이리 와.”
“……이러려고 마차를 타자고 한 거예요?”
“사심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없지.”
솔직하게 대답한 그는 이어서 말했다.
“안 그래도 짧은 삶인데 너무 오래 헤어져 있어서 널 먹어도, 먹어도 갈증이 나. 함께하지 못한 시간만큼 너와 있고 싶어.”
“…….”
“넌 모를 거야. 내가 얼마나 이 날을 기다려 왔는지.”
내가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까지 그는 날 기억하고 있었다.
지워진 다섯 번의 시간조차 기억하고 있으니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긴 시간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나는 천장에 머리가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의 위에 앉았다.
“들킬 것 같으면 그만둘 거예요.”
“할 수 있다면.”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옅은 흥분이 묻어 나오는 그의 목소리를 곱씹으며 나는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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