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 8화 (9/16)

Chapter 6. (2)

여관으로 돌아와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식사를 끝낸 후 씻고 나니 태양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나는 침묵했다. 푹신한 소파에 편안하게 등을 기댄 채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악마들은 원래 수다스러운 성격이 아니었다.

크로셀이 그나마 말이 많은 편이긴 했으나 그건 욱하는 성격 탓이었다.

건들지 않으면 조용한 건 크로셀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자리에 모여 있지만 다들 다른 생각이었다.

온화한 고요가 따분했는지 크로셀은 트럼프를 찾아서 게임을 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거절했고, 남자는 선선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덕분에 아까보다는 살짝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을 오가는 트럼프 카드를 멍하니 지켜보다가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며 먼저 방에 들어갔다.

애초에 잠을 자지 않기 때문에 침대가 불필요한 그들은 각자 한마디씩 내게 인사를 건넸다.

불은 켜지 않았다. 어둠에 잠겨서 침대에 누웠다.

완벽한 적막이었다.

몸을 둥글게 말았다. 이러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들겠거니 하면서.

그러나 쏟아지는 잡념은 나를 잠 못 이루게 했다. 언제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았냐는 듯이 정신이 지나치게 멀쩡했다.

하염없이 시간만 흘렀다. 잠들지 못하고 두 눈만 깜빡이고 있는 이유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두려움 탓이었다.

이대로 밤을 꼴딱 새울 것 같았다.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마시면 좀 낫지 않을까.

오랜 고민 끝에 꾸물꾸물 침대에서 벗어나서 문을 열었다.

무덤처럼 조용할 줄 알았던 바깥은 의외로 말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제법 지났기 때문에 지금쯤이면 판을 정리하고 각자 방에 들어가 있을 줄 알았던 악마 두 마리가 체스를 두고 있었다.

“뭐야? 벌써 낮이야?”

날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뜬 크로셀이 창문부터 확인했다.

창밖은 여전히 빛 한 점 스미지 않았다.

“아니네. 아직 밤이잖아.”

“네, 아직 밤이에요.”

몇 시간은 뒤척인 것 같은데 바깥은 내가 방에 들어갔을 때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이번에는 체스네요.”

“응, 질려서.”

부딪치기만 하면 티격태격하더니 밤을 보낼 상대가 서로밖에 없어서 그런지 무섭도록 집중하고 있었다.

창문에서 시선을 떼자마자 체스 판을 노려보는 크로셀을 스쳐 지나가려니 줄곧 침묵하던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뭐 하려고?”

“차를 마실까 해서요.”

“내가 갖다줄게.”

흑색 말을 대충 아무 데나 내려놓은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뇨, 괜찮아요.”

“어차피 내가 이긴 게임이라서…….”

“그냥 해 준다고 할 때 딴말하지 말고 받아 마셔.”

크로셀이 남자의 말을 중간에 뚝 끊었다. 소년은 툴툴거리면서 빠르게 체스 판을 치웠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사과할 것 없어. 지금 처음으로 안 져서 입이 귀에 달린 거 보이잖아.”

“내가 언제!”

크로셀은 남자의 말을 격하게 부정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입꼬리를 살살 매만졌다.

진짜 웃었는지 확인하기 위함인 듯했다.

“나 진짜 안 웃었어.”

“그래, 그래.”

손이 빠른 크로셀로 인해 이미 판은 뒤집어졌다.

크로셀에게 무신경하게 대꾸해 준 남자는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에 날 앉혀 주고 자리를 떠났다.

얼떨결에 크로셀의 맞은편에 앉은 나는 전혀 피곤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는 소년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악마는 잠을 자지 않아서 밤이 길겠어요.”

“자고자 한다면 잘 수야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렇지.”

껍데기는 어린아이지만, 나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산 존재였다.

나는 흑백의 체스 말을 만지작거리는 소년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뭐에 홀린 것처럼 입을 열었다.

“저기, 크로셀.”

“응?”

“한 번 죽은 사람이 되살아날 수 있나요?”

“…….”

“말 그대로 되살아나는 것이요.”

크로셀은 미묘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서는 다급히 말을 바꿨다.

“죄송해요. 제가 괜한 걸 물었네요.”

어떤 대답을 듣고자 하여 이런 걸 물어보고 있는가. 나는.

일순 치미는 비참함에 고개를 숙였다.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는 몰라도 죽은 사람은 다신 살아날 수 없어.”

“…….”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와도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자 절대 불변의 법칙이야.”

“하지만 릴리는…….”

“죽은 적 없어.”

크로셀이 딱 잘라서 내 말을 끊었다.

“그 아이는 특수한 경우야. 내 실력뿐만 아니라 운 또한 작용되었기 때문에 똑같은 사례는 아마 앞으로 없을 거야.”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역시 륀느의 간계로부터 피하고자 죽은 척했던 것뿐일까.

그동안 나는 살아 돌아온 샬롯을 원망했다. 그녀는 장례식까지 치른 죽은 사람이었고, 나는 산 사람이었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니 그녀가 가졌던 것들이 내 것이 되어도 불합리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륀느 공작은 ‘반려’ 자리가 원래부터 내 것이어야 했다고 강조했었다.

거듭된 세뇌와 내게 걸린 기대.

그리고 짧은 순간만큼은 오롯이 나를 향했던 사랑이 주는 달콤함에 중독되었던 듯했다.

정말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라면 어째서 다시 살아났는지, 이제 와서 돌아오면 나는 무엇이 되는지 따지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샬롯의 대용품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돌아오고 나면 설 자리는 없었다.

나라는 사람 자체가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 결말이 싫어서 더 필사적으로 샬롯을 따라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 자신을 갈고닦았던 것 같았다.

이번에는 다를 거야.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뇐 주문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더 잘난 사람이 된다면 바라봐 줄 거라는 그릇된 믿음에서부터 나온 주문.

그러나 내가 샬롯을 원망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녀의 자리를 빼앗은 사람은 바로 나였다.

만약 진실로 샬롯이 죽었더라면 덜 비참했을까.

진짜 그녀는 없었던 순간이니 내 노력과 시간이 정당했던 것이라고 자위할 수 있었을까.

어찌나 힘을 주고 있었는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펼쳤다.

손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이제는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길 바랐다.

나는 당신을 만난 적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고, 당신은 내게 원하는 걸 얻어 내기 위해 거짓된 감정을 속삭이지 않고.

주위에 안개가 낀 것처럼 불투명한 미래를 그려 보다가 표정을 갈무리했다. 머릿속에서 그들까지 다시 지워 냈다. 그리고 빠르게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9번째 악마는 어떤 악마인가요?”

“이상한 놈.”

“네?”

“악마 중에 정상인 놈이 없긴 한데 걔도 참 별나.”

본인 또한 악마라는 사실을 잊었는지 슬쩍 험담을 하며 크로셀이 끌끌 혀를 찼다.

“악마는 남성밖에 없다는 건 알아?”

“아뇨, 몰랐어요.”

내가 모르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인지 크로셀은 나의 무지에 놀라기보다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악마가 초월적인 존재처럼 느껴져도 전능하지는 않아. 그 증거 중 하나가 바로 여성성을 가지지 않았다는 거지.”

“성별과 전능한 게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창조.”

크로셀이 비밀을 털어놓듯,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건 여성성뿐이야. 남성보다 여성이 더 우월하며 완전한 존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얘기가 살짝 샜는데 어찌 되었든 그래서 악마는 남성성을 가진 것들밖에 없어.”

크로셀은 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키며 “그래서 나 또한 남성이지.”라고 하고선 말을 이었다.

“그런데 9번째는 여성성을 갖고 싶어 해.”

“파괴와 창조라니. 절대 공존할 수 없는 단어네요.”

“그렇지.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헛된 바람을 품고 있는 걸 거야. 미련하기 그지없어.”

크로셀은 본인이 악마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악마에 대한 평가가 박했다.

특히 9번째 악마에 대한 평가는 냉랭하기까지 했다.

“내가 알기로 완전한 존재에 도달하고자 하는 미련한 악마는 딱 둘이 있어. 바로 9번째랑 56번째야.”

“크로셀은 그들과 같은 욕심을 가진 적 없어요?”

갑작스러운 내 질문이 당황스러웠는지 움찔한 크로셀이 고개를 저었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것만큼이나 허무맹랑한 이야기야. 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욕심은 가지지 않아.”

소년의 반응을 보니 어째서 9번째 악마를 괴짜 취급하는 건지 이해가 갔다. 성격이 괴팍해서 이상하다고 하는 줄 알았더니 공상가여서 평가가 박한 것이었다.

“9번째를 물어보는 걸 보아하니 찾으러 가기로 마음먹은 모양인가 봐.”

“고민 중이에요. 성에 잠입하길 성공한다 하더라도 악마를 찾아내야 한다는 문제가 남아 있잖아요.”

“내가 있는데 그걸 왜 걱정해?”

“저 혼자 있어야 할 상황에 놓일 가능성 또한 있으니까요.”

“세 마리나 권속으로 들였으니 악마가 근처에 있다면 너도 딱 느낌이 올 거야. 그리고 만약 놈이 봉인돼 있다면 놋쇠로 만든 항아리부터 찾아봐. 문양이 각인돼 있는 항아리로.”

“문양이요?”

“너도 알겠지만 인간마다 이름이 다르듯이 악마 또한 자신을 상징하는 문양이 달라.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떤 문양이다, 라고는 할 수 없지만 대충 네가 알고 있는 악마들의 문양과 비슷한 양식의 문양이 새겨져 있으면 무조건 악마가 봉인돼 있다고 볼 수 있지.”

듣던 중 희소식이었다.

9번째 악마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르겠으나 얌전히 봉인당한 상태이길 바라게 되었다.

“크로셀.”

“응?”

“만약 제가 성에 잠입했는데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저를 도와줄 수 있나요?”

“너.”

크로셀은 단단히 화가 났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얼굴을 보게 되니 뜨끔하게 되었다.

안 그래도 천사를 싫어하는 악마였다. 너무 허무맹랑한 요구를 한 게 아닌가 싶었다.

공작 성은 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미술품이 전시돼 있을 거였다. 그런 곳에서 나오지 못하는 나를 도와 달라는 말은, 천사와 마주치라는 의미와 같았다.

오늘따라 크로셀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많이 하는 듯했다.

차라리 은발 남자한테 물어볼 걸 그랬나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크로셀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너 진짜 그 재수 없게 생긴 자식이 하는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는 게 맞구나.”

“예?”

소년은 팔짱을 꼈다. 그리고 남자가 있는 쪽을 잠깐 흘겨보고서는 멍청한 소리를 내는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내 주인이 너라는 걸 잊었어?”

“아뇨, 알고 있죠.”

“알고 있죠? 진짜 알면서 묻는 말 맞아?”

무엇이 그리도 불만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한 표정을 짓자 답답함을 숨기지 못한 소년이 외쳤다.

“나는 내 이름을 걸고 네게 평생을 맹세했어.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명령에 복종할 거야.”

그렇게 말하는 크로셀은 사뭇 비장했다.

“그리고 명령하지 않아도 주인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 아니야? 천사의 손에 갈기갈기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구해 줄 테니까 미안하다는 표정 짓지 마.”

“…….”

“너랑 안 어울려. 넌 내가 아는 인간 중에 가장 뻔뻔한 인간이잖아.”

힐난하는 어조는 아니었다. 오히려 물음 안에 담긴 불안과 망설임을 읽어 내서 일부러 더 과장되게 말하는 것 같았다.

맹세. 악마가 입에 담는 그 단어가 그리 가볍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믿음직하네요.”

“너……! 너는 너무 악마를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어!”

본의 아니게 악마를 깔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지 크로셀이 이번에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언성을 높였다.

능력은 냉기에 가까운데 참 화가 많은 악마였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는데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남자가 한마디 거들었다. 크로셀의 목소리가 워낙 커다란 탓에 대화를 듣게 된 모양이었다.

“나만 하더라도 길 가다 발에 채는 돌멩이만 못한 시선을 받을 때가 많지.”

내가 무어라 항의하기 전에 그는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식기 전에 마셔.”

“감사해요.”

“천만에.”

의미 없는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더는 따지지 않고 조심스럽게 찻잔을 들었다.

향긋한 냄새가 퍼졌다.

한 모금 마시자 따뜻한 찻물이 목구멍을 넘어갔다.

몸 전체가 따듯해지는 느낌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크로셀과의 대화 때문인지 혼자서 침대에 누워 있을 때보다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그런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너는 정말 경각심을 가져야 해. 계약자는 악마마다 다루는 방식이 다르니 그렇다 치지만, 주종 관계만큼은 다르잖아.”

“악마는 주인에게는 헌신적으로 굴지. 평생을 모셔야 할 존재니까.”

“그래, 그러니까 내 말은 관계의 무게를 깨달을 필요가 있다는 거야!”

남자가 맞장구를 쳐 주자 힘을 얻은 듯이 크로셀이 더더욱 목청을 높였다.

그들이 하고자 하는 말은 대충 이해했다.

그러나 아무리 거창하게 포장해도 별로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실감이 나지 않아요.”

악마를 권속으로 삼은 건 원대한 야망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만약 내게 드래곤의 심장만 없었다면 악마와 엮이는 일은 없었으리라.

그 남자가 내게 마지막으로 선물한 드래곤의 심장을 없애고, 인연을 끊어 내는 것.

단순하다면 단순한 이유였다.

그러니 내가 그들의 주인이라고 말해도 절절히 느껴지는 바는 없었다.

가만히 오른쪽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꼭 드래곤의 심장만이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내 생각의 골조 자체가 결정적인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제껏 완전한 소유는 없다고 여겼다. 진정한 내 것을 가져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저들의 주인이라고 하는 악마들이 홀연히 사라지고, 복작복작한 지금의 분위기가 언제라도 부서진대도 이상할 것 없었다.

“악마를 권속으로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그럴 수 있어.”

계속 크로셀의 의견에 동조하던 남자가 이번에는 나를 이해한다는 듯이 느릿하게 운을 띄웠다.

“그러니 실감이 나도록 호칭을 바꿔 보자.”

“호칭이요?”

호칭이라는 단어가 다소 뜬금없이 나왔다.

내가 반문하자 남자는 살짝 허리를 숙여서 내 귀에 바싹 입술을 갖다 댔다.

그리고 속삭였다.

“널 평생 ‘주인님’이라고 부르게 하는 거야.”

천천히 두 눈을 깜빡였다.

딱히 주인 노릇을 한 적도 없고, 책임감도 없었다.

그런 내가 평생 주인님이라고 불린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부담스럽지 않을까 싶었다.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

“어째서?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되는데.”

금방이라도 으스러질 듯한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크로셀은 귀가 밝았다.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상을 팍 구겼다.

반항적인 크로셀의 태도에 남자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설마 자존심이 상해서 못하는 건가?”

나는 속으로 공감했다.

크로셀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내가 그럴 리 없잖아!”

“그러면 해 봐.”

이곳에 있는 악마는 분명 둘이었다. 그런데 어째 둘이 아닌 하나만 악마인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었다.

화만 내다가 말 것 같던 크로셀은 결국 남자의 도발에 넘어갔다.

소년은 씩씩거리면서 일어났다. 참으로 단순한 성격이었다.

“그러니까……!”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움찔한 크로셀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듯했다.

“주……!”

짧은 침묵 끝에 겨우 한 음절 내뱉었다.

막상 인간한테 주인님이라고 부르려니 자존심이 크게 상하는 건지 잇새로 ‘주’라는 음절만 반복해서 나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크로셀의 감정은 격해졌다.

날 바라보는 눈빛은 주인을 주인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사람 한 명을 죽여도 이상할 것 없었다.

“……주인님!”

몇 차례의 시도 끝에 크로셀이 올바른 발음으로 ‘주인님’을 외쳤다.

동시에 옆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짝, 짝, 짝.

뒤늦게 자신이 놀아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크로셀이 수치심에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홀로 씨근덕대던 소년은 내게 등을 보였다.

“이제 안 해!”

성큼성큼 뛰어가듯이 걸어간 크로셀은 ‘쾅’ 소리가 나도록 거세게 문을 닫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남자는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상황을 충분히 즐기고 있는 듯했다.

“즐거워 보여요.”

“재미있잖아.”

“악취미예요.”

“살면서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 있어야지.”

따지고 보면 나 또한 공범자였다.

중간에 끼어서 남자의 장난을 저지하지 않고 방관했다.

크로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토라진 소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가올 걸 알았다.

남자와 크로셀 사이에 자주 있는 일이라서 위기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더는 따지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대화가 오가지 않는 실내는 고요했다. 크로셀이 사라졌을 뿐인데 분위기가 살짝 처지는 것 같았다. 소년이 수다스러운 성격도 아닌데 체감이 크다고 생각하며 아직 따듯한 차를 마저 마셨다.

“어때?”

“괜찮아요.”

“다행이다. 이제 뭘 좋아할지 몰라서 한참 고민했어.”

남자는 안도한 듯, 내 옆에 앉았다.

조용히 차를 홀짝이고 있자니 허리를 숙여서 테이블에 한쪽 뺨을 댄 채로 나를 올려다봤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핏빛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같이 잘까?”

낮게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간지러웠다.

나는 그를 보지 않도록 노력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찻물이 너울거리며 수면 위로 금빛이 투영되었다.

“악몽을 꾸잖아. 내가 잡아먹어 줄게.”

“제가 아니라요?”

“허락만 떨어진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남자는 슬쩍 손깍지 꼈다. 찻잔을 들지 않은 왼쪽 손마디 사이로 타인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아니면 내 손만 빌려 가도 좋아.”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남자는 맞닿은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얽힌 손가락에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별일 없을 거야.”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의 감촉은 적나라했고, 속삭임은 귓가에 바로 대고 말하는 듯한 착각을 일게 했다.

나는 동요하지 않도록 애써야만 했다.

“손만 잘라서 주실 거라면 한 번 고민해 볼게요.”

찻물의 잔물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최대한 무심하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노력하느라 내가 듣기에도 필요 이상으로 무덤덤한 어투였다. 거절이나 다름없는 제안을 듣고선 남자는 목 안으로 낮게 웃었다.

그리고 잠깐 침묵하더니 불쑥 내게 물었다.

“줄까?”

“뭘요?”

“내 손.”

“…….”

“원하면 줄게.”

찻잔을 내려놓고 남자를 보았다.

그는 계속해서 올곧게 날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돌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눈이 마주쳤다.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나와 달리 그는 농담이 아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인다면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제 손목을 자를 것이었다.

“눈알을 파내서 너의 눈이 되어 주는 것도, 목을 잘라서 너의 숨이 되어 주는 것도 할 수 있어. 날 잘게 조각내서 가져가.”

비 오는 날의 늪처럼 음습했다. 머리 위로 거대한 괴물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손을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남자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덫처럼 나를 옭아매는 손아귀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어떤 형태로 쥐여지든 상관없어. 네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빈틈없이 단단하게 얽혀 있는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원치 않아요.”

그토록 노력했건만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내 손을 놓지 않는 남자의 손처럼 집요하게 파고드는 시선을 피하여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원치 않으니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빈 공간에서 남자와 함께 덩그러니 놓여 있는 기분이었다.

작은 숨결마저 놓칠 수 없을 정도로 주변은 적막했다.

바늘처럼 나를 찌르는 시선을 느끼며 다시 찻잔을 들었다.

일련의 행동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였으면 좋겠건만 애석하게도 찻물은 여전히 일렁이고 있었다.

한숨과 함께 찻물을 삼켰다.

남자는 더 이상 내게 함께 잠들자는 제안을 하지 않고 손을 잡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손아귀의 힘이 점차 풀렸다. 그러나 놓지 않았다.

한 손으로는 찻잔을, 다른 한 손은 남자에게 잡힌 채로 느리지만 꾸준히 차를 마셨다.

남자는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살짝 힘을 주었다가 풀거나 손등을 훑는 등, 꼼지락거리고 있으니 온 신경이 왼손으로 쏠렸다.

힐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상념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의식중에 내 손을 만지고 있는 듯했다.

그에게 손을 놓아 달라고 부탁하기보다는 침묵을 깨지 않는 걸 선택했다.

아직 찻잔에 찻물이 남아 있었다.

또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귀족으로서의 몸가짐이 아직 배여 있는 탓에 습관적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 마시고 있었다. 그러다가 찻잔이 바닥을 드러냈을 때쯤에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9번째라고 했으니 많이 강하겠죠.”

“딱히.”

이제껏 내가 만난 악마는 48, 49, 53번째였다.

다들 두 자릿수의 등위를 차지한 악마로, 한 자릿수에 드는 악마를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만약 최악의 상황 이 닥칠 가능성을 염려하여 운을 띄우자 남자는 냉정하게 부정했다.

“악마들의 등위는 인간에게 알려진 순서라서 힘과는 전혀 상관없어.”

악마들이 숫자를 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부터 막연히 힘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혀 관계없다는 얘기를 들으니 한결 안심되었다.

“게다가 예전이면 몰라도 지금은 모두 나약해서 누가 강하고 약한지 나누는 것이 의미 없어졌지.”

“안타까운 얘기네요.”

어투에서 전혀 안타깝지 않다는 진심이 묻어 나왔지만 남자는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만약 제가 9번째 악마와 싸우게 된다면 이길 수 있을까요?”

“쉽지 않겠지.”

“상대는 하나인데 확답을 얻을 수 없다니. 얼마나 강한지 짐작조차 가지 않네요.”

한고비를 넘기고 나니 또 다른 복병을 만난 듯했다.

그러나 방법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법 희망적으로 느껴졌다.

성공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지만, 이전과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면 날 무조건적으로 도와줄 존재가 곁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위안이 되었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이제 내일을 맞이할 차례였다.

* * *

눈을 뜨자마자 주머니부터 털었다.

있는 돈, 없는 돈 바닥까지 다 긁어모아서 숙박을 연장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처분하지 않은 황금을 모두 악마들의 품에 떠넘겼다.

잠을 자지 않는 데다 주변에 천사까지 가득하여 바깥을 돌아다니는 걸 꺼려 하는 그들이었다. 길거리에 나앉게 할 수 없으니 내가 없는 동안 편의를 봐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악마들은 이러한 호의를 기껍게 여기지 않았다.

“싫어, 같이 가!”

크로셀은 길길이 날뛰었다.

소년이 받지 않은 황금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멀어지는 황금을 누구도 주우려고 나서지 않았다.

“위험할 게 뻔한데 왜 혼자 가려는 거야?!”

“조심해서 나쁠 것 없잖아요.”

“그러니까 조심하려면 날 데리고 가야지!”

“크로셀이 말했잖아요. 젠틸라 공작이 천사를 만드는 장인이라고. 성 내부는 이제까지와 비교할 수 없이 천사가 많을 거예요.”

“그깟 천사 따위 상관없어.”

“어제 한 얘기를 들어 보면 그깟 천사가 아니던걸요.”

당장이라도 내 손을 잡고 성으로 돌진할 것처럼 구는 크로셀을 달랬다.

저돌적인 크로셀의 태도를 보고 있자면 고마운 마음부터 들긴 했지만 객관적으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천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인간 외의 존재였다.

어느 정도의 파괴력을 갖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무려 악마를 봉인시킬 힘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들이 깨어나게 되면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절망적으로 치닫게 되리라는 건 예정돼 있었다.

불필요한 위험을 안고 가느니 혼자 가는 것이 나았다.

“사도라 불렸던 녀석들 중 하나의 핏줄이라고 했잖아. 만약 너와 나의 관계를 알게 된다면…….”

말을 끝맺지 못한 크로셀이 마른세수를 했다.

소년은 착잡한 심정을 숨기지 못했다.

내게 하고픈 말이 많은 듯했지만, 이내 들숨과 함께 삼켰다.

나는 소년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악마와 관계가 있다는 걸 젠틸라 공작이 알게 된다면 결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화형이겠죠. 아니, 머리는 효수시키고 나머지는 잘게 조각내어서 들짐승의 먹잇감이 될 가능성이 더 높겠네요.”

이단자가 눈앞에 있는데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지극히 일반적인 경우를 읊자 크로셀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얘기가 아니야.”

“그러면요?”

핏빛 눈동자로 가만히 날 쳐다보던 소년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힘을 어떻게 다루는지도, 천사도 모르는데 이런 얘기를 해 봤자 위기감을 느낄 리 없겠지.”

“그만해.”

이제껏 잠자코 나와 크로셀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남자가 크로셀의 머리를 꾹 눌렀다.

“아니, 말이 안 되잖아! 넌 왜 저걸 두고 보는 거야?”

크로셀이 버둥거렸다.

소년의 악에 받친 외침만이 허공을 울렸다.

“넌 두렵지 않아? 아니면 잃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는 거야?”

잃어 본 적이 없냐는 크로셀의 발언은 잘못되었다.

나는 카타콤의 잔해를 목도했다.

모든 것을 잃고 폐허 위에 서 있던 남자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이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또한 알았다.

뒤늦게라도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서 상황을 정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남자가 크로셀의 머리를 놓아주고서는 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서 남자를 올려다봤다.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슬픔도, 아픔도, 참담함도.

그는 무감한 얼굴로 나와 눈을 마주치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차라리 다 죽일 수 있다면 편할 텐데…….”

“…….”

“다 없앨까.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잃어버리는 두려움을 겪을 바에 차라리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없애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움에 떠는 것보다 겁에 질린 것 같은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잖아요.”

제법 솔깃한 제안이긴 했다.

실현 가능의 여부는 상관없이 죽음만큼 쉽게 갈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러나 그만큼 덧없는 길은 또 없었다.

“잃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아니, 그러지 않을 거예요.”

가만히 날 바라보던 남자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렇다면 날 데려가.”

“아니, 내가 갈래!”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크로셀이 손을 번쩍 들었다.

서로 앞다투어 자신을 데려가라고 하고 있었다. 난장판이 되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점점 분위기가 과열되는데 그들과 동행할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말다툼을 하는 두 악마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이내 그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당장이라도 서로를 물어뜯을 것처럼 굴던 악마들이 입을 다물었다.

“저와 약속했잖아요.”

번갈아 가며 그들과 눈을 마주쳤다.

“부르면 언제든 찾아와 줄 거라고.”

“그거야 그렇지만…….”

크로셀이 우물쭈물거렸다.

약속한 적 없다고 발 빼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 흘렀다. 소년이 도망칠 구석은 없었다.

“제게 오지 않으실 건가요?”

“누가 안 간대!”

빽 소리를 지른 크로셀은 곧장 내 손을 꼭 잡았다.

“꼭 불러. 알겠지?”

“당연하죠. 제게는 당신밖에 없는걸요.”

“아니, 나도 있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린 남자가 끼어들어서 크로셀의 손아귀에 잡힌 내 손을 풀어 주었다.

“하지만 당신은 제 권속이 아니잖아요.”

남자는 슬쩍 크로셀을 밀어냈다.

그리고 크로셀이 잡았던 손을 제 뺨에 비볐다.

“권속이 아니어도 너에게만은 순종적이지.”

올곧게 날 직시하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린 나는 손을 빼냈다.

당황해서 황급히 빼낸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곧바로 한 몸처럼 지니고 다닌 검을 크로셀에게 건네주었다.

“잠시 맡길게요.”

그동안 검을 차고 다니는 것이 익숙해졌는지 비어 버린 검의 무게가 느껴졌다.

나를 지켜 줄 수단이 사라져서 아쉬운 마음이 앞섰으나 무리해서 들고 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들고 간다고 하더라도 빼앗기기밖에 더 할 테니 크로셀에게 맡기고 나니 안심되었다.

한차례 소란이 끝나고 나서 마지막으로 준비를 하기 위해 방에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섰다.

빙그르르 한 바퀴 돌며 내 모습을 확인했다.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런데 발목에 쇠공을 달아 놓은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우뚝 서 있었다.

거울 속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허리를 숙여서 얼굴을 거울 가까이 대었다.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이 반사되었다.

나는 그것을 낱낱이 훑어봤다.

젠틸라 공작은 얼굴만 썩 괜찮으면 그림 모델로 삼아 준다고 했다.

그림 모델을 지원하는 척, 성 내부로 진입할 생각이었으나 결정을 내리고 나니 그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문턱조차 밟지 못하고 쫓겨나는 것만큼 억울한 일은 없을 것이었다.

내 얼굴을 뜯어봐도 객관적인 아름다움을 판가름하기는 어려웠다. 객관적으로 아름답다 하여도 젠틸라 공작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또 안 됐기 때문에 확신은 들지 않았다.

어릴 적, 날 선택한 륀느 공작의 안목을 믿을 수밖에.

혹시라도 젠틸라 공작이 내 얼굴을 알아보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대외적 활동을 할 때 샬롯 행세를 했다.

내 진짜 얼굴을 알고, 직접 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게다가 륀느가에는 환각 계열 마법사가 없다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마법으로 얼굴을 똑같이 구현하는 건 그 얼굴을 직접 본 마법사만이 행할 수 있었다. 괜히 공작 가문에서 날 공개 수배하지 않고 마물 사냥꾼에게만 은밀히 지시를 내린 것이 아니었다.

구체적인 얼굴을 알 수 없으니 한눈에 날 알아볼 수 있는 사냥꾼들에게만 정보를 흘린 것이다. 그러니 날 알아볼 사람은 륀느 혹은 단안경을 쓴 마물 사냥꾼밖에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 모습을 꼼꼼히 확인한 후, 크로셀은 여관에 남겨 둔 채 남자와 함께 공작 성으로 향했다.

공작 성에 들어가는 계획은 간단했다.

남자가 날 팔아넘기는 척한다, 내 외모가 마음에 든다면 경비병이 성 내부로 안내한다. 끝.

든든한 주머니를 들고 아무 식당이나 찾아가서 식사를 즐기는 것만큼 쉬워 보였다.

그러나 여기서 내 외모가 젠틸라 공작의 그림 모델을 할 만큼 괜찮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각오를 다진 시간이 허무해지기 때문에 긴장되었다.

경비병은 뻣뻣하게 굳은 내 얼굴을 살펴봤다.

어제 소년을 데리고 갔을 때는 대충 훑어보고 만 것 같은데 내 얼굴에 달라붙은 시선은 쉬이 떼어지지 않았다.

혹시 알아본 걸까.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른침을 삼키게 되었다.

옷자락을 쥐었다.

손에 땀이 차고 있었다.

이대로 우악스럽게 머리채가 잡힌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시선이 하염없이 아래로 떨어지려고 했다.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남자가 경비병과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그냥 좀…….”

“그냥 좀?”

남자는 고압적으로 되물었다.

어째서인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이런 식으로 경비병의 신경을 긁어 봤자 득이 될 만한 건 없었다.

그만하라는 의미에서 남자의 소매를 슬쩍 잡아당겼다.

내가 남자의 주의를 끄는 동안 다른 경비병은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경비병의 옆구리를 찔렀다.

“어차피 공작 각하의 모델 지원자야. 미련 갖지 마.”

“아, 아 참. 그랬지.”

옆구리가 찔리자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몸을 떤 경비병은 남자에게 돈을 쥐여 주었다.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돈을 쥐여 주었다는 건 합격이라는 의미였으니.

이제 안내에 따라 성에 들어가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남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은데 괜찮습니까?”

얼굴을 맞대며 시선을 교환하던 경비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남자는 나를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했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도록 노력했다.

보는 눈이 있어서 밀어낼 수도 없었다. 얌전히 품에 안겨 있으니 그가 내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들과 너무 오래 눈을 마주치지 마.”

나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지 않았지만, 어쩐지 알 것 같았다.

“너도 모르는 사이에 잡아먹히게 될 테니까.”

말을 끝냄과 동시에 남자는 날 놓아주었다.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눈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남자의 경고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천사에 관해 얘기하고 있음을 곧바로 눈치챘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서는 등을 돌렸다.

성문이 열리고, 경비병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어제와는 달리 경비병들은 내게 고압적으로 굴지 않았다. 그들이 이끄는 대로 얌전히 따라가고 있는 탓이리라.

바깥에서 볼 때는 철옹성 같았건만 그림 모델을 자처하고 나니 성의 내부로 들어가는 건 허무할 정도로 쉬웠다.

중간부터는 경비병의 손을 떠나서 하녀의 안내에 따라 복도를 거닐었다.

일정 간격을 두고 우뚝 서 있는 천사 조각상은 방문객을 환영하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그림이 걸려 있었다.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림은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기 충분했다.

나는 황궁이나 륀느 저택에서도 이와 비슷한 광경을 자주 봤기에 경외보다는 익숙함을 느끼게 되었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고향을 다시 방문한 듯한 기분이었다.

아름다움의 정점에 서 있다고 여겼던 황궁보다 더 사치스러운 면이 있다는 감상이 들었다.

그 감상이 더욱 극대화된 건 거대한 홀에 들어섰을 때였다.

머리 위로 건국 신화가 펼쳐져 있었다. 무수히 많은 색감과 선이 쏟아지는 천장 벽화는 지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오로지 앞만 바라보며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녀는 어떤 문 앞에 섰다.

곧바로 젠틸라 공작을 만나게 되는 건가 싶어서 잔뜩 긴장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각하를 만나기 전에 몇 가지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모두 각하의 모델이 되기 위한 일환 중 하나이니 가만히 받아들이십시오.”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날 안으로 밀어 넣고서는 치장을 시작했다.

그녀가 말한 절차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던 거다.

지독히 사무적인 태도로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가볍게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렸다. 침묵 속에서 일련의 작업들이 매우 빠르고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잠깐 대화라고 할 만한 걸 나누긴 했는데 손등에 새겨진 문양 탓이었다.

옷을 갈아입힐 때 내 왼쪽 손등을 보고서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황급히 문양을 등 뒤로 숨기며 화상 자국이라고 얼버무려야 했다.

문양을 제대로 보지 못했는지 그들은 내게 이것저것 따져 묻지 않았다. 대신 눈에 띄는 흉터는 젠틸라 공작한테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당부하고는 새 장갑을 끼워 주었다.

그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가꿔진 이후에야 드디어 젠틸라 공작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녀의 뒤를 따라갔다.

다시 한번 날 바라보는 무수히 많은 그림 속 시선을 느끼며 문 앞에 섰다.

“각하. 말씀드렸던 그림 모델 지원자가 왔습니다.”

그리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힘으로 문을 두드린 하녀는 내가 왔음을 알렸다.

굳게 닫힌 문 너머로 젠틸라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도록.”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하녀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어서 내게 들어가라고 눈짓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서는 안으로 들어갔다.

한창 공무에 시달리고 있던 중이었는지 서류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젠틸라 공작은 내가 그의 바로 앞에 섰을 때가 돼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와 나 사이에는 딱 책상만큼의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젠틸라 공작의 시선이 내 얼굴에 꽂히자마자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드리웠다. 그러나 쭈뼛 솟은 솜털마저 찾아서 볼 듯한 타인의 시선은 피할 수 없었다.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고, 젠틸라 공작은 조용히 나를 살폈다.

젠틸라 공작에게서는 담배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맡으며 나를 찌르는 시선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일 초가 영겁처럼 더디게만 흘렀다. 체감상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건만 긴장되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침묵이 길어지니 불길한 생각을 도저히 떨칠 수가 없어서 힐끔 젠틸라 공작을 보았다.

주름진 얼굴에 새겨진 진한 푸른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듯이 반짝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혹시 내가 슈리엘 륀느라는 것이나 악마와 관련이 있다는 걸 눈치채거나 모델로서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그러나 젠틸라 공작은 예상과 달리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제처럼 같잖은 걸 데리고 왔으면 경비병부터 갈아치울 생각이었는데 오늘은 괜찮은 물건을 들여왔군.”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지 못한 채로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모델을 구했어.”

내 정체를 의심하는 것 같지 않았다. 모델로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도 아닌 듯했다.

당장 끊어져도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팽팽한 분위기가 완화되었다.

공작은 나를 스쳐 지나갔다.

“바로 화실로 가지. 지금 당장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겠다.”

“그렇다면 아가씨께 연락을…….”

“아니, 그럴 필요 없다.”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의 말을 딱 잘라서 끊은 공작은 앞장서서 성큼 걸어갔다.

나는 뒤늦게 하녀의 안내를 따라 화실로 이동하게 되었다.

나를 자리에 앉히며 하녀는 각하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서는 밖으로 나갔다.

젠틸라 공작과 나.

둘만이 남은 공간에서 나는 입을 다문 채 앉아 있었다.

이렇게 바로 모델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줄 몰랐던 터라 마음의 준비가 덜 돼 있었다. 어색하게 눈알을 굴리고 있으니 캔버스 앞에 앉아서 나와 빈 공간을 번갈아 쳐다보던 공작이 열심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별다른 요구 사항은 없었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입장에서는 몰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어야 하니 지루한 시간이었다.

9번째 악마를 찾아야 한다는 맹목적인 목적의식 하나로 지루함을 버텨 냈다.

젠틸라 공작은 순수하게 그림만 그렸다.

천사를 만드는 장인이라고 하더니 그림을 그리는 모습에서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정갈하게 정리된 내부는 나 외의 다른 모델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째서 젠틸라 공작의 그림 모델이 되었던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남자와 크로셀은 이유를 아는 눈치였던 것 같은데 공작이 천사를 만드는 장인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나는 몰두하는 공작을 면밀히 살폈다.

처음에 눈살을 살짝 찡그린 채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공작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홀로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흡사 광인 같았다.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손은 사납게 움직였다.

그가 내뱉는 투박한 언어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손짓이었다.

작업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잠깐 쉬기를 반복하던 공작은 이내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거칠게 붓을 집어 던졌다.

붓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제법 크게 났다.

화들짝 놀란 나는 이상한 점을 한 가지 발견할 수 있었다.

공작은 다른 한 손으로 제 손목을 잡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손이었다.

그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어째서……!”

공작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잇새 사이로 짓이겨지는 한탄은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림 모델이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었을까.

분노를 참지 못한 젠틸라 공작이 내게 폭력을 가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만약 젠틸라 공작이 날 죽일 만큼 때리게 된다면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보복할 수도 없는 입장인 터라 바짝 긴장한 채로 공작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광기 어린 중얼거림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나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불시에 문이 열렸다.

자연스럽게 눈길이 문 쪽으로 향했다.

그건 젠틸라 공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소리 없이 열린 문틈 사이로 눈까지 가려지는 화려한 반 가면을 쓴 젊은 여인이 들어왔다.

가면에 어울리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뒤편에는 노인처럼 머리칼이 하얗게 센 소년이 따르고 있었다.

여인에 비하면 단출하게 입은 소년은 존재감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버지, 어제처럼 독단적으로 행동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냄새를 맡아 보니 어제와 같은 꼴은 나지 않은 것 같군요.”

여인의 목소리가 화실을 울렸다.

목청은 크지 않았지만, 주위를 압도하는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작업 중이다. 누가 작업 중에 함부로 들어와도 된다고 가르쳤더냐.”

공작은 여인에게 핀잔을 놓았다.

그녀는 가면 탓에 하관만 확인할 수 있었으나 젠틸라 가문 특유의 비취색 머리칼은 숨길 수 없었다.

나는 그녀가 누군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젠틸라 공작의 유일한 자식이자 소문에 따르면 스스로 제 눈을 찔러서 맹인이 되었다는 비운의 후계자.

아델린 젠틸라였다.

“제가 아버지의 자식이니 아버지께 배운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델린.”

“예, 아버지. 눈이 멀어서 아버지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는 딸이 여기 있습니다.”

“…….”

“아버지께서는 저와 달리 앞이 멀쩡히 보이면서 어찌 저를 부르시는 겁니까.”

말투는 날이 서 있었고, 내용은 자학적이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 위를 걷는 듯했다. 방금 전의 사나운 기세는 어디로 가고, 젠틸라 공작은 멍하니 그런 아델린을 보았다.

그러다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설마 모델을 너와 공유하지 않아서 성이 난 게냐?”

공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델린은 비웃었다.

가면으로 얼굴이 가려져서 삐뚜름하게 올라간 입꼬리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델린이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혼자서는 붓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주제에 아버지의 모델을 탐내다니요. 그런 무례한 짓을 능력 없는 후계자인 제가 할 수 있겠습니까.”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그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너는 가문의 정당한 후계자다.”

젠틸라 공작이 달래듯이 대답하자 아델린은 진저리가 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젠틸라 가문을 대표하는 것이 미술이라는 걸 떠올린다면 아델린의 반응은 그다지 이상하지 않았다.

가문의 후계자는 나이도, 성별도, 부모의 애정도 아닌 오로지 개인의 재량만을 따지며 정해졌다.

아델린은 현 젠틸라 공작 못지않은 그림 실력으로 어릴 때부터 촉망받는 인재였다. 게다가 외동딸이니 그녀가 젠틸라 가문을 이어받는 건 모두가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앞이 멀게 된 이후로는 그녀의 자리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보이지 않으니 그릴 수 없었고, 그릴 수 없으니 정당성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어째서 눈을 찔렀냐고 젠틸라 공작이 물어보자 그녀는 이리 말했다고 한다.

‘제 그림을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그림에 대한 폄하이자 더는 붓을 들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원칙상으로는 다른 자식에게 작위를 물려줘야 했지만, 젠틸라 공작에게는 아델린밖에 없다.

또한 당장 그릴 수 없을 뿐이지 원래 능력이 출중하다는 걸 인정받아서 후계자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게 되었다.

스스로 맞이한 비극 탓인지 그 일이 있고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녀에 대해 떠드는 사람이 많았다. 나조차 그녀를 알고 있으니 샬롯 버금가는 유명 인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직접 보게 되는 건 처음이었다.

예상보다 더 냉소적이고, 자기혐오적인 사람이었으며 미묘하게 시선이 계속 가게 된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아델린이 정확히 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만약 가면만 없었다면 날 바라보게 되었을 것이다.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앞이 훤히 보이는 것처럼 망설임 없는 움직임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이번 자원자가 제법 마음에 든 모양입니다.”

“보자마자 나의 또 다른 역작을 완성시킬 수 있을 거라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곁에 둔다면 네게도 도움이 될 게다.”

“역작이라는 말을 너무나도 쉽게 입에 올리는군요.”

젠틸라 공작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공작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아델린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작품은 잘 그려지던가요. 아버지의 작품을 보고 싶은데 볼 수 없군요.”

“당장은 아니지만, 결국 완성시킬 거다. 역사에 길이 남을, 불사의 아름다움이 될 테지.”

젠틸라 공작이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기쁨 어린 얼굴로 캔버스에 눈길을 옮긴 젠틸라 공작은 단숨에 입매를 일자로 굳혔다.

덜덜 떨리는 손을 숨기며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쉬어야겠구나. 모델은 항상 그렇듯 네게 맡기마.”

“아버지는 떠맡기는 걸 가장 좋아하시죠.”

무책임하다고 비난하는 아델린을 뒤로하고 공작은 쫓기는 사람처럼 발 빠르게 문밖으로 나갔다.

화실에는 나와 아델린 그리고 이름 모를 백발 소년만이 남게 되었다.

그림 모델로서 이곳에 있었던 나는 순식간에 목적을 잃게 되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아델린이 나를 불렀다.

그녀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가 문턱을 밟기 전,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힐끔 캔버스를 보았다.

엉망진창으로 얼키설키 한데 뭉쳐진 물감만이 캔버스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나를 모델로 세웠으니 당연히 인물화를 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확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멍하니 미완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누덕누덕 칠해진 거대한 캔버스는 눈도 없건만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보면 안 돼.

남자의 나지막한 경고가 다시금 떠오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문이 닫히기 전까지도 서늘히 등골을 긁는 듯한 시선이 따라붙고 있었다.

* * *

“한동안 그림 모델 일뿐만 아니라 내 곁을 지켜 주는 것이 이 성에서 네가 해야 할 일이야.”

복도를 가로지르며 아델린이 말했다.

그녀는 부축을 받지 않고, 거침없이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곁을 지켜 준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요?”

“거창한 것은 아니고, 바깥에 나갈 때마다 직속 하녀처럼 옆을 지킨다는 거야. 그리고 내가 부르면 바로 달려와야 한단다.”

“모든 모델이 그랬나요?”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아델린의 입매가 일자로 굳었다.

“대부분 그랬지.”

대부분 그랬다는 것은 그러지 못한 사람 또한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어제 보았던 소년이 어쩌면 더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기분 나쁘니?”

어찌 되었든 명목은 그림 모델이었지 시중이 아니었다.

반강제적으로 높으신 분의 수발을 들게 된 것이었다.

한낱 평민이 귀족의 명령에 어찌 반기를 들겠냐 싶어도 감정이라는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아델린은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아델린이 보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래, 돈에 팔려 왔는데 뭔들 못할까.”

돈에 눈이 멀어 팔려 온 걸 비난하는 어투는 아니었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젠틸라 공작을 대하는 것보다 유하다고 느끼며 그녀와 보폭을 맞추었다.

“나는 내 것에 손을 대는 걸 싫어해. 조금이라도 배열이 흐트러지면 곧바로 알아채니 조심하렴.”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나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조슈아, 다과를 준비해 와.”

줄곧 아델린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던 소년이 아델린의 명령을 받고 방을 나갔다.

아델린은 아무런 도움 없이 자연스럽게 근처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그녀의 경고나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추측건대 보이지 않으니 주변에 무엇이 있고, 몇 걸음을 가야 원하는 장소가 있는지 외우고 익힌 모양이었다.

일련의 행동이 앞이 보이는 사람보다 더 자연스러웠다.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화실로 데려가서 당황스러웠을 테지.”

“아니요, 그렇지도 않았어요.”

앉으라는 명령이 없었기 때문에 가만히 서 있던 나는 최대한 순종적인 어투로 대꾸했다.

“차와 과자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자꾸나. 배 속이 따뜻해지면 사람은 한결 온화해지니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혜라…….”

아델린의 입장에서는 기껏 차와 과자를 내어 주었다고 은혜를 운운하는 내가 웃길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별것 아닌 호의였으니.

아델린의 속마음이 들려오는 듯했지만, 애초에 그걸 노리고 한 대답이었기 때문에 순진하게 굴었다.

아델린은 앉아 있었고, 나는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사치스러운 방이었다. 전형적인 귀족의 방이기도 하여 젠틸라 공작이라고 하여 륀느와 별다를 것 없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눈에 띄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놋쇠로 만든 항아리였다.

화려하게 번뜩이는 물건 사이로 자리 잡고 있는 놋쇠 항아리 두 개는 손바닥만 했지만 굉장히 눈에 띄었다.

크로셀은 악마가 봉인돼 있다면 놋쇠 항아리에 봉인돼 있을 거라고 했었다. 기척을 죽이며 슬금슬금 항아리가 있는 쪽으로 갔다.

그러면서 항아리를 주의 깊게 살폈다.

그것의 뚜껑에는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남자의 문양과는 달랐다. 또한 오른쪽 손등을 덮었던 카임과 하겐티 그리고 크로셀의 것과도 달랐다.

그러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악마와 관련이 있음을.

지금 이곳에는 눈이 먼 아델린과 나뿐이었다. 조슈아는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돌아오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내가 항아리를 건드린다고 하여 목격할 사람은 없었다.

슬쩍 아델린을 보았다. 그녀는 내가 움직이는 동안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언뜻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항아리에 손을 뻗었다.

손끝이 항아리에 닿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놋쇠 항아리는 비어 있었다.

악마를 봉인하는 그릇임은 맞았지만, 봉인당했던 악마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항아리 또한 건드려 보려다가 무의미한 행위임을 깨달았다.

크로셀은 근처에 악마가 있다면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여기 오기까지 기척 비슷한 것마저 느낀 적이 없었다.

비어 있는 항아리와 사라진 악마들. 그리고 그들을 처단할, 잠들어 있는 천사.

덩그러니 놓인 항아리를 빤히 응시했다.

9번째 악마는 성내를 활보하는 중인 걸까.

그렇다면 어째서 아델린은 악마가 빠져나가고 비어 버린 항아리를 방에 두고 있는 것일까.

혹 그녀가 악마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된 것이 아닐까.

의심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다.

아델린을 돌아봤다.

그녀는 내 시선이 닿자마자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마치 눈이 마주친 것처럼.

“무엇을 하고 있니?”

“……이곳에 있는 항아리가 신기해서 보고 있어요.”

“보기만 한 것이 아닐 텐데.”

그녀의 말을 듣고 있자면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곁에서 지켜본 것만 같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기서 거짓말을 한다면 화를 부를 뿐이라는 것을.

간사한 꾀를 부려 봤자 통하지 않을 거였다.

“죄송해요.”

“내 것에 손대는 걸 싫어한다고 했잖니.”

내가 빠르게 사과하자 아델린은 한결 누그러진 어투로 말을 이었다.

“처음이니 봐주도록 하마. 하지만 다음부터는 그러면 안 돼.”

“네, 아가씨.”

나는 최대한 굽히고 들어갔다.

9번째 악마가 봉인에서 풀려났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직 그것의 행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니 조금 더 공작 성에 붙어 있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생각할 것이 많아서 깜빡하고 앉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구나. 어서 앉으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살며시 운을 띄웠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

“옛날에는 놋쇠 항아리에 악마를 봉인했대요.”

고귀한 푸른 피를 잇고 태어나, 첫울음을 게워 낸 그 순간부터 평생토록 최고만을 취급하며 살아왔을 여자다.

그런 그녀가 별 볼 일 없는 놋쇠 항아리 따위를 아무 이유 없이 방에 들일 리 없었다.

악마와 관련된 물건이니 더더욱.

악마와 관련된 줄 몰랐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을 거였다. 건국 신화와 관련이 있는 물건인데 몰랐을 리 없었다.

“혹시 악마가 들어 있지 않을까 해서 살펴보게 되었어요. 이곳에 그런 삿된 물건이 있을 리 없는데 제가 안일했네요.”

아델린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눈까지 가려지는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 괜찮은지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악마라. 굉장히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구나.”

지나치게 평온한 어조로 중얼거린 아델린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악마는 선조들의 손에 의해 봉인되었지. 더는 존재하지 않아.”

악마의 존재가 딱 잘라서 부정당했다.

나는 이 이상 따져 물어서 의심을 사기보다는 재빠르게 수긍했다.

“역시 제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군요.”

“민감한 시기는 지났지만 충분히 염려가 될 만하지. 항아리는 누가 장난삼아 놔둔 것 같으니 나중에 치우라고 말해 두어야겠구나.”

거짓말.

어떤 간 큰 하녀가 놋쇠 항아리를 모시는 아가씨 방에 장난삼아 둔단 말인가. 아델린의 성격을 감당하면서까지 장난을 칠 만한 인물은 없어 보였다.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았지만 속으로 삼키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슈아가 트레이를 들고 들어왔다.

소년은 소리 없이 능숙하게 다과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내 앞에 찻잔을 내려놓을 때 처음으로 소년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깡마른 몸이 더욱 도드라졌다.

길고 앙상한 손가락은 한 푼이라도 얻어 내기 위해 달려들던 걸인의 그것과 같았다.

귀족의 옆에서 바로 시중을 드는 하인치고는 손이 잔뜩 부르터 있었다. 아직 2차 성징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소년이었다.

나이와는 걸맞지 않은 손이라는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소년의 특징 없는 외모가 시야에 가득 들이찼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했다.

굳이 따지자면 핏기없이 창백한 낯짝이 꼭 유령 같았다.

소년은 생기 없는 까만 눈을 한 채 다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왔을 때처럼 조용히 아델린의 뒤편에 섰다. 존재감이 희미하여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마저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아델린의 전속 하인인 듯한데 그녀를 모시기에는 지나치게 나이가 어렸고, 보통 곁에 두는 아랫사람은 동성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굉장히 이례적인 경우였다.

소년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자니 내가 긴장해서 찻잔에 손을 대지 않는다고 생각한 건지 아델린이 나서서 차를 권했다.

“식기 전에 마시렴.”

“네, 감사합니다.”

“나는 단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과자는 눈치 보지 말고 먹도록 하고.”

“……네.”

“다 먹고 싶다면 다 먹어도 된단다. 원한다면 더 내어 올 수 있으니 편히 먹으렴.”

다과도 내어 왔으니 이제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내가 찻잔에 세 번째로 입을 댈 때까지도 그녀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윗사람이 입을 열지 않으니 아랫사람이 경솔하게 나불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조용히 차와 과자를 먹어 치웠다. 내가 먹고 마시는 소리만이 정적을 일깨웠다.

혹여나 중간에 말을 걸까 봐 느릿하게 음식물을 먹어 치웠다. 그러다가 차도, 과자도 바닥을 드러낼 때쯤에야 아델린이 입을 열었다.

“입에 맞니?”

“네.”

“다행이구나.”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잠깐 뜸을 들이다가 내게 손짓했다.

“이리로, 가까이 오렴.”

자리에서 일어나서 아델린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앞에 우뚝 서 있자 이번에는 자신의 바로 옆자리를 가리켰다.

“여기 앉아.”

바로 앉지 않고 머뭇거렸다.

일반 평민들이 할 법한 반응이었다. 아델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혼내지 않을 테니 내 옆에 앉아.”

그녀가 괜찮다고 했지만 살짝 망설이다가 쭈뼛거리면서 옆에 앉았다.

내가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내 쪽으로 몸을 돌린 아델린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로 물었다.

“네 얼굴을 만져 봐도 되겠니?”

“제 얼굴을요?”

“볼 수 없으니 어떻게 생겼는지 만져 보고 싶구나.”

내 의사를 묻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내가 행사할 수 있는 거부권이란 없었다.

알겠다고 하자 그녀가 내 얼굴을 감쌌다.

조심스럽게 뺨을 만지던 손이 위쪽으로 올라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이 눈두덩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코를, 입술을 배회했다.

오랫동안 그녀의 손이 내 얼굴을 더듬었다. 한 번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부분은 자취를 더듬듯, 여러 번 매만져졌다.

“아버지가 한눈에 반한 얼굴인데 이 두 눈으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쉰 아델린이 손을 뗐다.

“내겐 조슈아가 있으니 대부분의 시간은 널 자유롭게 둘 테지만, 부르면 곧장 찾아와야 한단다.”

“네.”

“성 내부라면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고, 입고 싶은 옷이 있다면 입고, 먹고 싶은 것이 있다면 먹으렴. 네가 아버지의 그림 모델로 있는 동안 귀빈 대우해 줄 테니 말만 해.”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감사를 표하자 잠깐 망설이던 아델린이 덧붙여 말했다.

“은혜라고 생각하지 말아. 그만큼 또 네게서 받아 갈 테니까.”

“하지만 저는 가진 것이 없어서 고귀하신 분께서 제게 받아 갈 것이 없는걸요.”

“네게는 아름다운 얼굴이 있잖니. 너 자체가 소중하단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자니 섬뜩한 감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아름다운 얼굴임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구나. 오늘 많이 피곤할 텐데 이만 돌아가 보렴. 내일 다시 만나도록 하자꾸나.”

할 말은 다 끝이 났는지 조슈아를 시켜서 설렁줄을 당기게 한 아델린은 하녀가 길 안내를 해 줄 테니 내게 나가 보라고 했다.

밖으로 나가기 전, 나는 일부러 살짝 소리를 높여서 아델린에게 물었다.

“혹시 제가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면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아가씨께서는 어디든 가도 괜찮다고 하셨지만, 분명 저 같은 것이 가면 안 될 장소가 있겠죠.”

“…….”

“성이 넓어서 실수로라도 길을 잘못 들까 봐 걱정이 돼서 여쭤봐요.”

성 내부에 악마가 있다면 그곳은 보통 사람들이 가지 말아야 할 곳일 테다.

무작정 성을 돌아다니기보다 그 범위를 좁히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 이런 건 아가씨가 아닌 조슈아한테 물어봐야 되는 것이겠죠. 제가 실수했네요.”

내가 조슈아를 언급할 줄 몰랐는지 아델린의 몸이 일시에 딱딱하게 굳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 긴장했냐는 듯, 금세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해 주었다.

“조슈아는 말을 못 한단다.”

“죄송해요. 몰랐어요.”

“말을 하지 못하는 건 티가 나지 않으니 그럴 수 있지.”

귀족 영애의 표본처럼 온화한 대답이었다.

“서쪽 탑 꼭대기 층에는 가지 마. 어차피 잠겨 있겠지만, 그곳에는 귀중한 것을 잔뜩 두어 자칫 잘못하다가는 도둑으로 몰릴 수 있으니 조심할 필요가 있지.”

“그렇군요.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대화를 끝으로 나는 방을 나왔다.

밖에 나오니 아델린의 부름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하녀가 길을 안내해 주었다.

나는 내게 배정된 방으로 가며 뺨을 더듬어 보았다.

어쩐지 얼굴 가죽을 뜯어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 * *

아델린과 헤어진 후, 저녁 시간은 별다른 일 없이 평온하게 흘러갔다.

성 내부를 둘러볼 시간은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주어졌으나 나는 일부러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팔려 온 주제에 첫날부터 성을 구석구석 돌아다녔다가 쓸데없는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았다. 괜히 조급하게 움직여서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기에 첫날만큼은 다소 평화롭게 흘러갔다.

그렇게 다음 날이 되어 여유롭게 오전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가 되어서 젠틸라 공작의 그림 모델 일을 하게 되었다.

화실에 들어가기 전, 치장을 했다.

그런데 어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잔뜩 경직돼 있는 분위기가 피부로 와 닿았다.

“절대 벗으시면 안 됩니다.”

화장은 어제와 달리 입술만 간단히 색을 입혀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고운 천으로 눈이 가려졌다.

여자는 내 눈을 가린 천을 단단히 묶었다.

“꼭 해야 하나요?”

“예, 앞으로 공작 각하의 모델로 설 때마다 진행되어야 할 절차이니 참으십시오.”

“각하께서 작업이 끝나면 저희가 풀어 줄 테니 얌전히 있으시기만 하면 됩니다.”

천을 벗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한 그들은 치장을 마친 후에 날 화실까지 인도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한 걸음 내딛는 것마저 조심스러워졌다. 그런 나를 이끌고 화실에 도착한 그들은 자세를 잡아 주고 나서 떠났다.

어둡고, 조용했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곧이어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사람이 젠틸라 공작일 거라고 추측했다.

외부의 정보를 오로지 청각에 의존해야 했다. 감각은 잔뜩 예민해져 있었다. 때문에 기척을 죽이며 들어온 공작에게 온 신경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구두 굽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조차 내지 않은 공작은 곧바로 도구를 찾는지 주위가 약간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나 그것도 찰나의 순간일 뿐이었다.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호흡하는 방법마저 의식하게 되는 침묵 속, 가끔 붓을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이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제처럼 분위기가 거칠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단조로운 상태가 유지되었다.

젠틸라 공작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변화였다.

하루 만에 젠틸라 공작에 대한 모든 걸 단정 지을 수는 없었지만 분위기가 너무 판이하여 이질감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희미하게 악마 기운이 느껴졌다.

악마가 근처에 있다면 느낄 수 있을 거라고 한 말을 곧장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본능에 가까운 깨달음이었다.

악마였다.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눈을 가리는 천을 풀어 직접 확인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충동에만 휩싸일 뿐, 손이 묶여 있는 것도 아니건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막연한 두려움 탓이었다.

천을 풀어도 괜찮은 걸까?

혹시 내가 악마와 관련이 있다는 걸 눈치챈 공작이 시험을 하고 있는 거라면?

젠틸라 공작은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악마가 나타나다니.

상식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인지 어긋난 화음처럼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보이지 않으니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이곳에 있는 악마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9번째인지 아니면 같이 봉인돼 있던 다른 악마인지.

갖가지 상념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올라서 머뭇거렸다.

그사이 젠틸라 공작은 꿋꿋이 그림을 그렸고, 그림 모델로서의 일은 어제보다 빠르게 끝이 났다.

내가 고민하는 동안 젠틸라 공작은 왔을 때처럼 조용히 자리를 떴다. 어느새 들어온 하녀가 천을 풀어 주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자유가 되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다. 악마는 지금, 젠틸라 공작의 곁에 있었다.

천이 벗겨진 이후에도 내가 멍하니 앉아만 있으니 하녀는 다소 조심스러운 어조로 아델린이 나를 부른다는 얘기를 전했다.

하녀의 안내를 받아서 아델린의 방으로 가게 되었다.

넓은 방에 가만히 앉아 있는 그녀는 그녀 자신을 둘러싼 조각상과 같은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갑자기 불러서 놀랐지?”

“아니에요.”

아델린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녀의 가슴이 느릿하게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가만히 냄새를 맡는 듯했다.

“날이 조금 추운 편이긴 하지만, 함께 햇볕을 쬐러 나가지 않겠니?”

활짝 열린 창을 통해 커튼이 나부끼며 겨울의 찬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델린은 내가 거절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불렀으리라. 실제로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이라고는 “네.”밖에 없었다. 어차피 주변 지리를 익힐 필요가 있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정원으로 가기 전, 아델린은 하인을 시켜서 윤기 나는 검은 털을 가진 거대한 개의 목줄을 잡았다.

내가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그녀가 재빠르게 설명해 주었다.

“안내견이야. 정원을 산책할 때마다 도움을 받고 있지.”

“그렇군요.”

나는 슬쩍 한 발자국 물러섰다.

개를 딱히 좋아하는 편이 아닌 터라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안내견이 있는데 굳이 저를 데려가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내가 불편하니?”

“아니요, 그게 아니라 개가 있으니 제가 필요 없어 보여서요.”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안내견이 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 없었다.

굳이 나를 곁에 두고 산책하려는 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개는 순종적이야. 인간을 굉장히 잘 따르고, 무조건적으로 복종해. 게다가 어릴 적부터 훈육을 잘 받아서 인간만큼이나 똑똑하기까지 하지.”

아델린의 걸음이 살짝 느려졌다.

“그러나 개는 개야.”

“…….”

“인간과 같을 수 없어.”

그녀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네 발 달린 짐승이 인간과 같은 선상에 둘 수 없지. 개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한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너 또한 이해할 거야.”

내게 이해를 구한 아델린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건지 살짝 목소리 톤을 올렸다. 이전보다는 활기찬 목소리였다.

“그리고 밖에 나갈 수 없는 입장이다 보니 항상 같은 사람만 만나게 되지. 고인 물은 썩게 돼. 썩지 않기 위해서 내겐 새로운 사람과의 교류가 절실히 필요하지.”

“저는 아가씨가 기대하는 것만큼 새로울 만한 점이 없어요.”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단다. 새로움을 찾아내는 건, 네가 아닌 내가 해야 할 역할이니까.”

그녀가 나에 대해 물어본다면 해 줄 만한 얘기가 없었다.

대화가 나라는 사람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 걸로 바뀌기 전에 화제를 전환시켰다.

“그러고 보니 조슈아가 보이지 않네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조슈아는 처음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 아이를 걱정하다니. 다정하구나.”라고 중얼거린 아델린이 대답해 주었다.

“조슈아는 몸이 좋지 않아서 쉬고 있단다.”

“많이 안 좋은가요?”

“아마 앞으로 자주 아플 테니 네가 걱정할 것은 없단다. 너는 그저 어떤 고민거리 없이 잘 먹고, 잘 자고, 누리고 싶은 건 다 누리면서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면 돼.”

귀에 듣기에도 다디단 얘기였다.

정말 돈이 없어서 그림 모델이 되길 선택했다면 이곳이 낙원처럼 느껴졌으리라.

“음식은 입에 잘 맞고?”

“네, 제가 다 먹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라서 조금 남기게 되었는데 남기는 게 아쉬울 정도로 맛있었어요.”

아델린은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모델 일 하는 도중에 불편한 일은 없었니?”

“없었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편해서 제가 죄송할 정도인걸요.”

“어제도 말했지만 그런 생각하지 말아. 너는 뻔뻔하게 요구해도 돼.”

아델린은 내가 그녀에게서 부채감을 느끼는 걸 기꺼워하지 않는 듯했다. 당장은 아무런 사심 없는 목소리로 수긍했다.

그렇게 소소한 대화가 이어지고, 정원을 돌다가 벤치에 앉아서 쉬기를 반복했다.

이제 슬슬 안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어째서인지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단순 기분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지나친 감이 있어서 소란이 생긴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저편에서 성인 남성이 아델린을 불렀다.

“아델린!”

그 목소리가 익숙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건만 반사적으로 몸이 돌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아니야, 말도 안 돼.

그 사람이 여기 있을 리 없어.

비슷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일 뿐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싶었으나 도저히 착각할 리 없었다.

“불청객이 찾아왔구나. 이만 돌아가도록 하자.”

“……네, 아가씨.”

그녀에게도 영 달갑지 않은 손님인 듯, 아델린이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망쳐야 해.

오로지 그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들이찼다.

어서 상대에게서 멀찍이 떨어져야 한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것과 달리 몸은 착실하게 아델린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불청객은 거듭 아델린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그가 가까이 왔을 때 아델린은 더는 무시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급히 앞으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서는 몸을 돌렸다.

나는 재빠르게 아델린 뒤로 숨었다.

아델린의 뒤편으로 숨기 전, 다가오는 남자의 백금발이 햇빛 아래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걸 얼핏 볼 수 있었다.

“아델린, 그동안 잘 있었어? 근처에 방문할 일도 있고, 젠틸라 공작께 직접 얼굴 보고 할 말이 있어서 오게 되었어.”

백금발의 남자는 아델린의 앞에 서자마자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구구절절하게 늘어놓았다.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던 그는 마른침을 삼키더니 잠깐 머뭇거리다가 낮게 속삭였다.

“정말, 오랜만이야.”

“오랜만이라고 한다면 오랜만이지. 이번에는 또 무슨 핑계를 대며 찾아온 거지?”

들뜬 백금발의 남자와 달리 아델린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핑계가 아냐. 정말 볼 일이 있어.”

“그거야 나와 상관없는 일이지. 보아하니 아버지를 만나러 온 모양인데 여기에는 안 계셔.”

“알고 있어. 하지만 당장은 네가 보고 싶어서…….”

“너는 한가한지 몰라도 나는 바빠서 이만.”

“아델린, 아델린!”

상대의 말을 중간에 끊은 아델린이 발 빠르게 자리를 피하려 했다.

나 또한 그녀처럼 백금발의 남자에게서 등을 돌려서 따라가려던 차였다.

상대는 다급하게 손목을 잡았다.

그런데 손목이 붙잡힌 건 그가 애타게 부르는 아델린이 아니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을 지운 채로 곁에 있던 나였다.

나는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삐걱거리면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슈리엘?”

눈이 마주쳤다.

나는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걸 간신히 참아야만 했다.

날 붙잡은 상대는 륀느의 차남, 제레미아였다.

제레미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내 이름을 불렀다.

“슈리엘, 너 맞지?”

제레미아는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덫처럼 팔목을 옥죄는 강한 악력에 나는 아픈 걸 내색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분명 그년이 절벽에 떨어져서 죽었다고 했는데…….”

제레미아의 중얼거림을 듣자마자 그가 가리키는 사람이 한나임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내가 마물에게 잡아먹혔다는 변명을 한다던 한나는 상황이 제 맘대로 흐르지 않음을 깨닫고 곧이곧대로 진실을 분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진실마저 꾸며진 진실이었다.

내 예상대로 제레미아는 신기루를 좇아 헛고생을 하고 돌아온 듯했다.

한나도, 제레미아도 동시에 골탕을 먹였으니 즐거워야 하는데 지금 상황으로서는 작은 미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죽지 않았구나.”

팔목이 저려 오기 시작했다.

피가 통하지 않는 손이 창백하게 질려 있음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살아 있었어.”

제레미아의 두 눈은 분노와 희망 그리고 배신감으로 점철돼 있었다.

그는 지금 내가 나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널 찾으려고 밤낮을 지새우며 절벽 밑까지 구석구석 돌아다녔는데……!”

분노에 찬 제레미아의 노성이 귓전을 때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려야만 했다.

제레미아가 언성을 높이자 옆에서는 아델린의 개가 짖었다.

그를 적으로 간주한 건지 짐승 특유의 으르렁거림이 낮게 울렸다.

제레미아의 고함과 짐승의 울부짖음.

두 소리가 한데 울려서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더는 손목을 조여 오는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잡힌 건 손목이건만 목이 졸린 것처럼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뒤늦게 조잡한 변명이라도 꺼내기 위해 입술을 벌렸다.

그러나 거친 날숨만이 흩어졌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나는 한 줌의 언어도 내뱉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제레미아를 바라만 봐야 했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야. 어서 돌아가자. 어머니가 널 얼마나 애타게 찾고 있는지는 알아? 널 데리고 돌아간다면 필시 기뻐하실 테지.”

제레미아가 나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의 목소리에는 조급함이 느껴졌다.

“너 하나 때문에 꼬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한시라도 빨리 륀느의 명예를 회복해야 해.”

나는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나를 잡아당기는 힘이 더 강했다.

내가 반항하려고 하자 얼굴을 사납게 구긴 제레미아는 억지로 날 끌고 가려고 했다.

만약 중간에 아델린이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수도까지 날 질질 끌고 갔을 것이다.

“제레미아 륀느.”

아델린은 고압적으로 제레미아를 불렀다.

마지막 이성이 남아 있는 건지 제레미아는 날 잡아당기는 걸 멈추고 아델린을 돌아봤다.

“내 것에 손대지 마.”

“아델린, 하지만……!”

“네가 륀느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야.”

아델린의 목소리는 제레미아에 비해 낮고, 차분했으나 고저 없는 그 어투는 위압감을 형성하기에 충분했다.

“이곳은 내 구역이고, 너의 오만한 태도를 묵과해 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내 인내심을 시험하려 들지 마.”

아델린이 날 두둔해 주리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닌 듯, 제레미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재차 확인하고 있는 듯했다.

“너, 이 애가 누군지 알고 말하는 거야?”

내가 아닌 아델린을 상대하기 때문인지 제레미아는 아까보다는 훨씬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아델린은 무심히 대꾸했다.

“아버지의 그림 모델 지원자이지.”

“뭐? 모델 지원자?”

제레미아는 순간 넋이 나간 얼굴이 되었다.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아주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델린. 네 곁에 있는 여자는 그냥 모델 지원자가 아니야.”

제레미아가 나를 노려봤다.

그딴 식으로 아델린과 젠틸라 공작을 속이고 있었냐고 묻고 있는 듯했다.

날 당장이라도 찢어발기려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눈초리였다.

“내…… 동생이지.”

내게 사나운 시선을 보내던 제레미아는 ‘동생’을 어색하게 발음했다.

그사이에 있던 잠깐의 머뭇거림은 아델린 또한 느꼈으리라.

우린 가족이었지만, 가족이 아니었다.

날 동생이라고 여긴 적 없으니 제레미아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머뭇거림이었다.

“네가 아무리 바깥소식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우리 가문에서 은밀히 반려를 차출했다는 얘기는 들었을 테지. 그리고 그 이후의 얘기 또한.”

제레미아를 만난 순간부터 상황이 전혀 내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나는 바짝 긴장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꺼내는 변명은 볼품없어질 뿐이었다.

만약 필요하다면 그들이 보는 앞에서 크로셀을 부를 생각이었다.

그만큼 더는 도망칠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뭐?”

“그래서 나에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지? 제레미아 륀느.”

“아델린!”

나와 제레미아의 시선이 아델린에게로 꽂혔다.

두 쌍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그녀는 날벌레를 쫓아내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나는 눈이 먼 거지 귀가 멀지 않았어. 소리치지 마. 시끄러워.”

차가운 아델린의 반응에 제레미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 슬쩍 아델린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을 벌레처럼 여기던 제레미아였다.

그런 그가 아델린에게만큼은 눈에 띄게 한 수 접고 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제레미아가 저런 태도를 취하는 건 어머니인 륀느 공작이 다였다.

형제인 레미지오에게도 안하무인으로 행동하고는 하니 지금 제레미아는 내게 있어서 미묘하게 낯설 수밖에 없었다.

“날이 춥구나. 나 때문에 몸이 차가워진 것 같은데 안에 들어가서 따듯한 코코아를 준비하라고 해야겠네. 어서 돌아가자.”

결국 사나운 분위기를 종식시킨 건 아델린이었다. 그녀는 분위기와 맞지 않게 다정한 목소리를 내며 제레미아에게서 등을 돌리려고 했다.

나는 여전히 손목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걸 눈치챈 건지 아델린은 경고했다.

“제레미아. 이쯤 해서 조용히 돌아가.”

내 손목을 잡던 손아귀에 힘이 풀렸다. 나는 재빠르게 손을 빼내었다.

손목이 얼얼했다. 또다시 손목이 잡힐까 봐 손을 등 뒤로 숨기며 한두 걸음 뒷걸음질 쳤다.

아델린이 어째서 내 편을 들어주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일단은 이 기회를 통해 제레미아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제레미아가 그런 나를 노려봤다.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 그는 멀어진 거리만큼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쟤 때문에 번거롭게 시골 촌구석까지 걸음하게 되었어. 거기다 쓸데없이 시간과 힘을 낭비했는데 모른 척하고 돌아가라고? 한시가 급한 이 상황에?”

“그거야 내가 알 바가 아니지.”

“아니, 네가 젠틸라 가문의 후계자라면 당연히 알아야 해. 네가 감싸 돌고 있는 이 여자는 드래곤의 심장을 갖고 있으니까.”

직접적으로 드래곤의 심장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아델린은 미동 없이 서 있었다.

제아무리 소문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입을 틀어막았다고 한들 그녀는 가문의 후계자이니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델린이 아무 반응이 없자 제레미아가 황당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설마 이 얘기를 정말 모르고 있었던 거야?”

“아니, 알고 있어.”

“그렇다면 내게 협조해야지!”

제레미아가 제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나 아델린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래, 협조를 해 주지 않겠다는 거지. 아델린, 네 의견이 그렇다면 이 여자는 내가 빌려 가도록 하지.”

제레미아가 내 어깨를 잡고 끌어당겼다.

최대한 버티려고 애썼으나 갑자기 날 당기는 강한 힘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제레미아 륀느. 내가 네 이름을 여러 번 부르는 일을 만들지 마.”

“젠틸라 공작의 그림 모델 지원자라고 했지. 그러면 각하께 허락을 받으면 되겠네.”

사람의 신경을 긁는, 껄렁대는 말투였다.

언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냐는 듯이 내가 알던 제레미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네 그림 모델이 아닌 젠틸라 공작의 그림 모델이라며. 그렇다면 네가 아닌 젠틸라 공작의 허락을 받아야지.”

“…….”

“어차피 날 이곳으로 부른 건 젠틸라 공작이고, 이 여자와 관련하여 얘기를 나누고자 온 것이니 굳이 빙 돌아갈 필요 없잖아.”

제레미아의 입술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복잡한 절차를 거칠 필요 없이 사냥꾼의 단안경만 있다면 내 말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을 테니 아주 간단해.”

역시 그들은 사냥꾼의 단안경으로 나를 찾아내려고 했던 것이었다.

“만약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면 무릎을 꿇어서라도 아델린 네게 사과하도록 하지. 하지만 만약 반대일 경우에는 네가 내게 미안하다고 해야 할 거야.”

제레미아가 빈정댔다.

그러다가 짐짓 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국가적인 문제를 무시한 것이니까.”

“너와 너희 가문이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는 말을 대의를 위한다는 듯이 거창하게 하는구나.”

아델린이 비웃었다. 그녀는 륀느와 하이넨이 권력을 움켜쥐고 위해 서로 치고받는,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 아버지와 관련이 되었다면 내가 나서서는 안 될 일이겠지. 어디 한번 네 마음대로 해 봐.”

“……아가씨…….”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나는 가냘픈 목소리로 아델린을 불렀다.

내 표정을 확인할 수 없으니 목소리라도 최대한 불쌍한 척을 해야 했다.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아버지께서는 그림 모델을 소중히 여기신단다. 그러니 조금만 참으렴.”

하지만 이미 결정을 내린 듯, 아델린은 나를 다독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제레미아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잘 생각했어. 아델린.”

“그거야 두고 봐야 아는 일이지.”

“그러면 나중에 보도록 하지. 내가 곧바로 찾아갈 테니 기다리고 있어.”

철벽같던 아델린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녀가 물러서자마자 제레미아는 거칠게 내 손목을 잡고 다소 성급하게 앞장서서 걸어갔다.

결국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제레미아의 손에 질질 끌려가게 되었다.

“……아파요, 놔주세요.”

“어디서 가여운 척이야. 슈리엘, 그런다고 해서 내가 속을 것 같아?”

경멸 어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 제레미아가 비아냥거렸다.

절대 물러섬이 없는 태도였다.

지금 그는 내가 나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닮은 사람일 뿐이라는, 얄팍한 거짓말을 한대도 전혀 들어 주지 않을 듯했다.

그동안 그가 얼마나 이를 갈며 나를 찾고 있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크로셀을 불러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내 몸은 이미 실내에 들어와 있었다.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 쏟아지는 화살처럼 날카롭게 꽂혔다. 이 자리에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주위에 그림과 조각상이 지나치게 많았다.

무엇이 천사고, 천사가 아닌지 판가름할 능력은 없었으나 이곳에서 크로셀을 불러낸다면 그까지 위험에 처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함께 자멸하는 것이다.

“젠틸라 공작께서는 어디 계시지?”

“각하께서는 현재 집무실에 계십니다.”

내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 제레미아는 당황해하는 하인들을 성큼 지나, 집무실로 돌진했다.

순식간에 집무실 앞에 선 그는 저돌적인 기세처럼 힘을 주어 문을 열었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은 어쩔 줄 몰라 했으나 제레미아는 그것을 무시했다.

소란스럽게 열린 문틈 사이로 그는 나를 질질 끌고 들어갔다.

“온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내 그림 모델과 함께 오겠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군. 무슨 일이지?”

충분히 무례한 제레미아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젠틸라 공작은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니, 제레미아를 살짝 무시하는 것 같았다.

공작은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보인 반응이라고는 한 번 곁눈질한 것이 다였다.

“덕분에 찾았습니다.”

“찾았다니? 중간보고에 따르면 아무런 소득이 없다고 했는데. 그사이에 시체라도 찾은 건가.”

공작이 ‘시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자 제레미아는 코웃음을 치며 나를 밀어서 억지로 앞장세웠다.

“쥐새끼처럼 이곳에 숨어든 이 여자가 엘릭시아를 갖고 있는 제 동생입니다.”

분주히 움직이던 펜대가 뚝 멈췄다. 잠깐 멈칫하던 젠틸라 공작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정확히 나를 향한 시선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내가 곧바로 고개를 숙이자 “쥐새끼라니. 말이 험하군.”이라고 중얼거린 공작은 펜대를 내려놓았다.

“그러면 용건은 끝났으니 제 동생과 함께 당장 수도로 귀환하도록 하겠습니다. 덕분에 쉽게 찾게 되었으니 이 얘기는 제가 어머니께 자세히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는 안 될 것 같군.”

“예?”

덤덤하게 이어 가던 제레미아는 공작의 말을 듣자마자 멍청한 소리를 냈다.

“하루만 더 일찍 왔어도 흔쾌히 보내 주었을 텐데 안타깝게 되었군. 륀느 공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소중한 모델을 보낼 수 없지.”

“이해할 수 없군요.”

“내 그림은 한 번 작업이 시작되면 끝장을 봐야 하지. 반려라는 사실을 알기 이전에 내 모델이었고, 당사자가 맞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선뜻 보내 줄 리가 없지 않은가.”

제레미아는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고서는 내 어깨를 잡아서 조금 더 젠틸라 공작이 있는 쪽으로 밀었다.

내 얼굴을 자세히 보라는 의미인 듯했다.

나는 불가항력으로 반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의심할 것 없이 제 동생입니다!”

“그거야 알 수 없지 않은가. 나는 슈리엘 륀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네. 아, 보긴 했지만 적어도 저런 모습은 아니었지.”

젠틸라 공작은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제레미아의 성질을 돋울 뿐이었다.

“저를 불신하는 것이라면 지금 당장 확인하면 되지 않습니까. 사냥꾼의 단안경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곧바로 확인할 수 있겠죠.”

“자네 말대로 사냥꾼의 단안경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

“그렇다면……!”

“하지만 정말 엘릭시아를 갖고 있다고 해도 내 의견은 변치 않네.”

“그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옆에 서 있던 내가 움찔할 정도로 제레미아가 크게 소리쳤다. 분노에 가득 찬 그의 고함이 실내를 울렸다.

“말이 되고, 안 되고를 결정하는 건 나지. 자네가 아니라.”

노여움에 이성을 잃은 제레미아와 반대로 공작은 태연했다.

그는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는 듯이 다시 펜대를 잡으려고 했다.

“돌아가려면 자네 혼자 가도록 하게. 교통편은 아주 빠르고, 편안할 수 있도록 신경 써 주지.”

제레미아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과도 같았다.

“지금 그깟 그림 나부랭이 때문에……!”

“뭐? 그깟 그림 나부랭이?”

한 자도 제대로 쓰지 못한 젠틸라 공작은 제레미아의 말을 중간에 끊고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러다가 내 얼굴을 한 번 보더니 다시 원래의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륀느 공작이 후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식 교육을 덜 시킨 모양이군. 방금 한 말은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못 들은 척해 주마.”

“…….”

“그리고 마법 나부랭이도 제대로 못 쓰는 애송이에게 제대로 말해 주지. 나는 그깟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역사를 그리고 있는 것이지.”

자부심을 가득 담아 말한 공작은 일순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달콤한 초콜릿을 입에 물고 있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너와 달리 교양과 미학이 있는 륀느 공작이라면 필시 나를 존중해 줄 거다.”

“그래요. 어머니가 당신을 존중한다고 칩시다.”

순식간에 교양도, 미학도 없는 무뢰배가 된 제레미아는 분노를 겨우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지금 본인 가문의 일이 아니라고 막 나가시는 거 아닙니까? 륀느의 명예뿐만이 아니라 제국의 존망이 걸린 문제입니다.”

“존망이라. 재미있는 소리군.”

젠틸라 공작은 아델린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드래곤의 심장을 가진 내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황실의 후대는 없었다.

그러나 위기감은커녕 시큰둥한 반응이 돌아오자 제레미아는 쓰레기통에 들어가기 직전의 종이처럼 사정없이 얼굴을 구겼다.

“젠틸라 가문이 반려를 차출하는 차례가 아직 한참 남았다는 이유로 이러시는 거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요. 한 번의 실수로 다신 차례가 돌아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려의 순서는 하이넨 이전이 젠틸라였다.

비교적 최근 차례가 지나갔으니 당장은 자신과 무관하여 한 발 빼고 있다는 제레미아의 추측을 듣고선 젠틸라 공작은 쯧 하고 혀를 한 번 찼다.

“물론 선조가 세워 놓은 질서를 제 욕심에 못 이겨 무너뜨리려고 하는 하이넨은 괘씸하다. 그러니 내가 선뜻 륀느에게 협조한 것이지.”

“…….”

“내 관할 구역에 있는 마물 사냥꾼이 그 여자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하이넨도, 황제도 아닌 륀느에게만 몰래 전달해 주지 않았더냐.”

“그 건에 대해서는 어머니께서도 따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라고 할 만큼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도의 소식이 여기까지 오는데 유독 느리지는 않을 테고, 황제와 하이넨의 공녀가 약혼했다는 소식을 정녕 듣지 못하신 겁니까?”

“알지. 알고말고.”

“그렇다면 태연하게 있을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제레미아의 귀에도 약혼 소식이 들어갔는지 그는 눈에 띄게 초조해하고 있었다.

“어차피 엘릭시아를 갖고 있지 않으니 당장 후계를 잉태할 수는 없겠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하이넨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레미아의 발악 같은 외침에도 불구하고 젠틸라 공작은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어서 그런지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어린아이 취급당한 제레미아 는 잔뜩 골이 나 있었다.

스스로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씨근덕거렸다.

“이야기가 계속 한 자리를 맴도는군요. 당장은 무엇이 그릇된 일인지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는 듯하니 이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합시다.”

“듣던 대로 교만하구나. 네가 그러니 후계자가 되지 못하는 거다.”

공작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내 딸은 멍청한 남자를 싫어하지. 그건 나나 다른 공작들 또한 마찬가지이고.”

지속적으로 모욕을 당한 제레미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하지만 공작에게 손을 올릴 정도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닌지 주먹만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나중에 뵙도록 하죠.”

젠틸라 공작을 노려본 제레미아가 대답도 듣지 않고 방을 나섰다.

어찌나 세게 문을 닫았는지 쾅 하는 거대한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올 때는 날 끌고 왔던 제레미아가 갈 때는 내버려 두고 간 탓에 나는 어정쩡하게 자리에 남게 되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자니 한숨을 내쉰 공작이 서랍에서 시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순식간에 시가 냄새가 퍼졌다.

잔기침을 쏟아 낸 나는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저…….”

그림에 대한 맹목적인 열정이었다.

그림이 완성되기 전까지 절대 나를 보내지 않겠다는 젠틸라 공작의 의견은 지조 있다 못해 기괴하게까지 느껴졌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젠틸라 공작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대충 눈치를 챈 듯했다.

머뭇거리고 있자 먼저 말했다.

“나는 네가 륀느든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태생이 어찌 되었든 지금의 너는 내게 있어서 소중한 그림 모델이니.”

“…….”

“설령 네가 진짜 엘릭시아를 갖고 있는 륀느라고 하더라도 당장 급할 것 없지.”

“……어째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가요?”

“마치 내가 못할 말을 했다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그런 주제넘은 짓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의문이 들어서요.”

제레미아가 날 보며 ‘슈리엘’이라고 말한 순간부터 정체는 들킨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젠틸라 공작은 내 정체를 눈감아 주겠다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만약의 상황을 위해 애매모호한 입장에 서서 말했다.

“얘기를 들어 보니 무려 드래곤의 심장과 관련된 중대 사안이고, 다른 누구도 아닌 륀느 공자의 증언인데 어찌 사익을 앞세우는 것인지 의문이 들어서 말을 올린 겁니다.”

“결혼이 아닌 약혼 발표였다. 약혼은 언제든 번복할 수 있지.”

“…….”

“만일 당장 결혼한다 해도 진짜 반려의 자리에 오를 수 없는데 굳이 내 작업을 중단하면서까지 다급하게 일을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

“제 이익을 챙기기 바쁜, 허울뿐인 자리다. 다들 이익을 셈하기 바쁜데 나라고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없지.”

말을 마친 공작은 자세를 편안하게 바꿨다.

창문을 닫아 놓은 탓에 환기가 되지 않아서 시가 냄새가 코끝을 찌르고 있었다.

“내 기분이 좋으니 이 얘기를 해 주마. 하이넨의 딸이 장례식을 치른 것은 알고 있겠지.”

“……예.”

“그 아이가 왜 죽었다고 생각하느냐?”

“애초에 죽지 않았는데 어째서 죽었다고 물으신다면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겠군. 샬롯, 그 아이는 건강상의 문제로 요양했다고 세간에 알려져 있지. 잔병치레 한 번 한 적 없이 건강하던 그 아이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된 이유는 무엇일까?”

“저 같은 것이 그걸 어찌 알겠습니까.”

“사실은 륀느 공작이 범인이라고 말하고 싶겠지.”

“아니, 아닙니다. 제가 어찌 륀느 공작님을 모함하는 생각을 품겠습니까.”

나는 다급히 부정했다. 그런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시가를 깊게 빨아들인 공작은 날숨과 함께 연기를 내뱉었다.

희뿌연 연기가 번지면서 공작의 얼굴이 일순간 흐려졌다.

그 사이로 언뜻 위로 당겨진 공작의 입꼬리가 보인 듯했다.

“샬롯을 죽인 건 폐하다.”

“……예?”

뒤통수를 가격한 것처럼 강한 충격이 일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나는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을 거였다.

“내가 말실수를 했군. 샬롯, 그 아이를 해친 것이 황제 폐하라고 해야 하는데 말이야.”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네요.”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손 또한 벌벌 떨리고 있었다. 동요를 숨기기 위해 주먹을 쥐어야 했다.

그러나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음을 완벽히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제가, 그 남자가 샬롯을 해쳤다니.

두 귀로 똑똑히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이렇듯, 놀라움을 숨기지 못한 나와 달리 젠틸라 공작은 덤덤한 어조로 얘기했다.

“폭주하여 드래곤으로 변모한 황제가 샬롯을 덮쳤다. 그 아이가 반려가 되리라고 다들 믿어 의심치 않은 상황에서 그런 사고가 터졌으니 다들 진실을 은폐하려 들 수밖에 없었지. 반려를 해친 황제라. 어찌나 꼴사나운 일인지.”

젠틸라 공작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나는 최대한 침착해 보이도록 노력하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의문을 뱉어 냈다.

“하지만 반려는 폭주한 드래곤을 잠재울 수 있다고 알고 있는걸요.”

내 말을 듣자마자 공작은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반려로서 살아왔다고 하여 그 아이가 진짜 반려였던 것은 아니지. 정작 엘릭시아는 갖지 못했는데 다들 그 아이가 진짜 반려였던 적이 있는 것처럼 말하더구나.”

“그야…….”

황제는 샬롯을 사랑했다.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미쳐 버릴 정도였으니 지독한 사랑이었다.

이제껏 신은 단 한 명의 인간을 사랑했고, 그 인간은 반려였다. 그러니 샬롯이 엘릭시아가 없어도 진짜 반려라는 건 내게 있어서 진리나 마찬가지였다.

“사랑의 위대함을 믿는 건 낭만을 좇는 이들밖에 없지. 반려란 그깟 조잡한 감정 따위로 결정되는 자리가 아니다.”

순간 말문이 턱 막혀서 문장을 채 완성하지 못했으나 젠틸라 공작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눈치챈 건지 곧바로 냉정하게 대꾸했다.

“따지고 보면 진짜 반려는 샬롯이 아닌 네가 되겠구나. 아니, 또 내가 말실수를 했군. 내 앞에 있는 너는 륀느가 아닌데 말이다.”

공작은 금세 장난치듯이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진짜 반려.

평생 듣지 못하리라 여겼던 그 단어가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토록 참담한 자리임을 알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넘보지 않았을 그 자리가.

문득 황궁으로 떠나기 전에 륀느 공작과 나누었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께서는 어느 날 갑자기 죽은 샬롯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으신가요?’

‘신체 일부분이 찢겨 있었지만 얼굴만큼은 멀쩡했지. 땅에 파묻힌 시체는 의심할 것 없이 하이넨의 계집이었다.’

그때 륀느 공작은 찢겨 있었다고 표현했다.

일반적으로 짐승에게 당하지 않는 이상, 찢겨 있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만약 황금빛 비늘이 돋아난 거대한 손에 목이 졸린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면?

‘안 돼, 또 이런 식으로 널 잃을 수 없어.’

의식이 흐릿하던 와중에 들었던 절박한 외침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세로로 찢어진 동공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구역질이 일었다.

흩어져 있던 퍼즐이 단숨에 맞춰지는 듯했다.

입을 틀어막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아야만 했다.

“미련한 하이넨.”

필사적으로 숨을 쉴 때마다 역한 담배 냄새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이대로 있다가는 속에 있는 걸 모두 게워 낼 것만 같았다.

“하긴 말이 좋아서 검사지, 태생부터가 천하기 그지없으니 륀느가 하이넨을 질색할 만하지.”

머릿속이 멍했다. 젠틸라 공작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저 낄낄 웃는 공작의 웃음소리만이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제게 이런 극비 사항을 얘기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죠?”

“말했지 않느냐. 기분이 좋아서 하는 말이라고.”

“단순히 기분이 좋아서 하는 말이라기에는 저 같은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얘기가 아닌걸요.”

한마디, 한마디 뱉어 낼 때마다 아침에 먹었던 음식과 함께 게워 낼까 봐 신경 써야 했다.

가까스로 무표정을 유지하며 문장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덜덜 떨고 있는 손만은 숨길 수 없었다.

젠틸라 공작의 눈길이 짧게 내 손 쪽을 향했다가 다시 허공으로 옮겨졌다.

“어차피 너는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만약 어딜 가서 이 얘기를 나불거린다고 해도 우리의 손바닥 안이겠지.”

“…….”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결국 륀느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네가 안쓰럽더구나. 이런 식으로 나의 모델이 되어 준 것도 인연인데 이 정도 얘기는 해 줄 수 있는 것 아니더냐.”

“……불필요한 동정입니다.”

젠틸라 공작의 입장에서 보는 나는 얼마나 한심하고 처량할까.

주먹 쥔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정체가 들킨 판에 체면을 세우는 것이 웃기지만 최소한의 존엄성만은 지키고 싶었다.

제레미아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냉소적으로 대했던 젠틸라 공작은 내가 손을 등 뒤로 숨기는 걸 봤지만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너는 아마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에 내 그림 모델이 되길 자처한 것이겠지.”

설마 내가 악마를 찾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일까.

바짝 긴장하고 있으니 젠틸라 공작은 시가를 입에 물며 무기력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무엇 때문에 자진해서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한번 잘해 보거라. 나는 간섭하지 않도록 하마. 제레미아 륀느에게 말했던 것처럼 작품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네가 이곳에서 편히 지낼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할 생각이니 말이다.”

“간섭하지 않겠다고요?”

“그래, 모델 일에 순순히 협조만 해 주면 나 또한 네가 하는 일을 눈감아 주도록 하마.”

“설마 지금 저와 거래를 하자는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젠틸라 공작의 말 한마디를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날카롭게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입가에 조소를 베어 물며.

“거래는 가진 것이 동등할 때만 성립할 수 있는 거지. 지금 내가 하는 건 명령이다.”

“…….”

“나는 섬세한 사람이라서 모델의 사지를 잘라야 할 만큼 극단적인 일이 오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러니 도망칠 수 있으리라는 헛된 희망은 품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 어리고 무른 황제와 달리 나는 일부러 속아 주는 일이 없을 테니.”

젠틸라 공작의 목적은 오로지 완벽한 그림을 완성시키는 것뿐이었다. 그 맹목적인 열정을 상식적으로 이해하려 들었던 내가 잘못된 것이었다.

“너는 내가 주는 것을 누리고, 나는 명작을 완성하고. 이 얼마나 완벽한 관계란 말이더냐.”

젠틸라 공작은 꿈속을 헤매는 듯한 표정을 했다.

그림을 언급할 때마다 그는 저런 표정을 지었다.

“순수한 영혼을 담으면 그만큼 아름다운 대작이 나오고는 하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구나.”

허공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리던 젠틸라 공작은 입에 물고 있던 시가를 재떨이 위에 올려놨다.

“할 말이 끝났으면 이만 나가 보거라. 륀느의 차남과는 이 이상 마주치지 않도록 손써 보도록 하마.”

“그것 또한 모델을 위한 배려인가요?”

“그래. 나는 최상의 그림을 위해 무엇 하나 아끼지 않지.”

그렇게 말하는 젠틸라 공작의 말투에서 사심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오로지 그림에만 꽂혀 있어서 다른 곳을 둘러보지 못하는 상태인 듯했다.

내겐 차라리 젠틸라 공작 같은 사람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방을 빠져나갔다.

방을 빠져나가기 전, 공작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을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었다.

“엘릭시아를 품은 그림이라……. 내 생각보다 더한 걸작이 탄생할 수 있겠군.”

첫날, 그림을 그리던 공작의 잇새로 나오던 것과 같은 광기 어린 중얼거림이었다.

* * *

해가 기울고, 밤이 되었다.

하루 동안 많은 일이 폭풍처럼 지나갔지만 변한 건 없었다.

제레미아와 맞닥뜨리고 다름 아닌 그 남자가 샬롯을 해쳤다는 얘기를 들었건만 어제와 별반 다를 것 없이 평화로운 저녁 시간을 보내고, 밤을 맞이했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얇은 빙판 위에 서 있는 듯한 기괴하고도 아슬아슬한 평화였다.

하루 종일 넋이 나간 것처럼 굴던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딱히 누군가 나를 감시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본인의 손바닥 안이니 무슨 짓을 하든 금세 눈치챌 수 있다는 뜻일까.

지금이라도 이곳을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방에 걸린 그림을 전부 뒤집어 놓았다.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액자나 조각상 위로는 천이 뒤집어 씌워졌다.

날 지켜보는 그 모든 시선을 차단하고서는 창문을 열었다.

겨울의 찬바람이 뺨을 적셨다. 날카롭게 옷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을 느끼며 창문 밖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크로셀.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으려다가 잠깐 머뭇거리게 되었다.

한 번 공작 성을 빠져나가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선택지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크로셀을 부르는 순간 9번째 악마를 찾는 것도, 내 안의 엘릭시아를 파괴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샬롯을 죽인 건 폐하다.’

낮에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쏟아지고, 창백한 숨이 일렁거리다가 흩어졌다.

그동안 하이넨 공작이 무엇으로부터 샬롯을 지키고자 했는지 알 수 없었는데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다름 아닌 그 남자로부터 샬롯을 지키고자 거짓 죽음을 고했던 것이었다.

‘안 돼, 또 이런 식으로 널 잃을 수 없어.’

남자는 내가 숨이 넘어가던 그 순간마저 나를 통해 샬롯을 보고 있었다.

당연했다. 결국 난 샬롯을 가장해야만 그 남자 앞에서 가치가 있는 존재였으니까.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운 뺨을 더듬었다.

눈물길은 말라 있었다.

더는 흐를 눈물이 없었다.

대신 참담함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당신이 지워져 버린 삶을 모두 기억하지 않았다면 덜 비참했을 텐데.

그 모든 걸 기억하면서 언제까지나 당신만을 바라보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 줄 알았다고 시인하던 남자였다.

내가 엘릭시아를 갖고 있는 한 계속 그렇게 이용만 하려 들겠지.

그렇게 살 바에 차라리 엘릭시아를 파괴한 후 이단이라고 몰려서 찢겨 죽는 게 나았다.

젠틸라 공작은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성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나의 모든 행동을 묵인해 준다고 했다. 그 말투로 보아 아직까지 내가 악마와 관계가 있다는 건 모르는 듯했다.

그렇다면 그림을 그리던 중 느껴진 악마의 기척은 무엇인지 이제부터 알아봐야 할 일이었다.

크로셀을 부르기를 포기하고 그대로 몸을 돌린 나는 화구를 챙겼다.

9번째 악마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 뒤에 크로셀을 불러도 늦지 않다.

제한된 시간 안에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해 보는 것이다.

초에 불을 붙였다.

주위가 아까보다 밝아짐을 느끼며 나는 은촛대를 들고서는 밖으로 나갔다.

* * *

어둠에 잠긴 성은 적요했다.

낮에만 하더라도 번뜩이는 화려함을 자랑하던 실내는 어둠에 묻혀서 까맣게 물들어 갔다.

밤의 찬 공기와 어우러져 스산함마저 느껴지는 복도를 밝히는 빛은 내가 들고 있는 초가 유일했다.

바람 앞에서 흩어질 작은 불꽃이었다. 빛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으나 어둠 속에서 홀로 빛을 내고 있으니 눈에 띄었다.

빛뿐만이 아니었다. 걸을 때마다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복도의 유일한 소음이었다.

이쯤 되면 돌아다니던 하인과 맞닥뜨려도 이상할 것 없었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성은 규모와 달리 지나치게 고용인이 적은 편이었다.

나는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을 느끼며 촛대를 슬쩍 옆쪽으로 갖다 댔다. 그러자 석고로 만든 천사 조각상과 눈이 딱 마주쳤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창백한 얼굴에 음영이 도드라졌다.

그것의 눈에 동공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섬뜩한 기분이 들어서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양옆도, 위도 보지 않고 오로지 앞만 바라보며 서쪽 탑의 꼭대기 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아델린의 말에 따르면 서쪽 탑 꼭대기 층은 귀중한 것을 잔뜩 두었다고 했다. 그 귀중한 것이 정말로 귀한 것인지 아니면 골칫거리인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계속 위로 올라가다 보니 꼭대기 층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들었던 대로 꼭대기 층으로 통하는 묵직한 철문은 잠겨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고 밀어 봤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문에 귀를 바싹 붙이고서는 가만히 소리를 들었다.

문 너머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악마의 기척 또한 마찬가지였다.

혹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 집중해 봤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이 아닌 걸까.

당장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미련이 남아서 괜히 근처를 서성이다가 어쩔 수 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일단 무작정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올곧게 앞만 바라보며 너무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악마의 기척이 느껴졌다.

젠틸라 공작의 그림 모델이 되었을 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기척이 느껴지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기억상 이쪽으로 가면 화실이 있었다.

화실에 악마가 남아 있는 걸까, 하면서 걸음을 옮기는데 악마의 기척이 강해진 곳은 화실이 아니었다.

화실의 바로 옆방이었다.

나는 섣불리 문을 열지 않았다.

혹 젠틸라 공작과 마주하게 될까 봐 살짝 문을 열어 두고 낌새를 살필 생각이었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아서 돌렸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짝 문을 미는데 문틈 사이로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였다.

“……또 사람을 죽이게 될 거예요.”

새끼손가락이 들어갈 만한 작은 틈을 만들고서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화답하듯, 곧이어 목소리가 이어졌다.

“항상 있어 왔던 일이잖아.”

이어지는 목소리는 같은 사람의 것이었지만 말투가 달랐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억양을 흉내 내는 것 같았다.

“저는 더 이상 살인을 하고 싶지 않아요. 아니, 아니지. 네가 칼을 든 적 있니? 아니면 상대의 목을 조른 적은? 네가 직접 사람을 해친 적 없어. 너는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야.”

“…….”

“박제하는 것이지.”

소름이 끼쳤다.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는 소년은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음습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등골을 섬뜩하게 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아요. 부탁이에요. 그건 안 돼. 우리 사이의 계약이잖아. 저를 내버려 둬요. 제발.”

소년은 가냘픈 말투로 애원했고, 색색거리는 거친 호흡을 내며 단호히 그 애원을 쳐 냈다.

“내게 빌어도 무의미한 행동이야. 그 인간이 널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목소리만 듣고 있자면 소년은 스스로를 달래고 있었다. 조금 누그러진 분위기였다.

“벗어나고 싶어요. 이곳을.”

소년은 울먹거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목소리는 울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불쌍한 조슈아. 너의 재능은 독이 든 성배구나.”

조슈아?

아델린은 조슈아가 말을 못 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조슈아라니.

조슈아라는 이름이 그리 귀한 것은 아니니 혹 동명이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소년이 목소리를 바짝 낮춘 채 중얼거렸다. 이번에 입을 연 것은 음습한 말투를 구사하는 쪽이었다.

“잠깐, 잠깐. 조슈아. 느껴지니? 누군가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어.”

나는 당황하여 반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문틈 사이로 소년의 속삭임이 들렸다.

“인간 냄새가 나. 아니, 악마 냄새인가.”

그렇게 말하며 짐승처럼 킁킁거렸다. 바로 내 뒤에 서서 냄새를 맡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이대로 도망치고 싶다는 본능과 같은 충동을 이겨 내고서는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활짝 열었다. 내부는 컴컴했다. 단단히 커튼을 치고 있어서 빛 한 점 스미지 않았다.

내가 촛불을 들고 들어가자 두 개의 그림자가 벽면에 비쳤다.

하나는 온전한 인간의 형상을, 다른 하나는 네 발 달린 짐승의 형상을 띄고 있었다. 후자는 등에 날개를 달고 있었다.

악마였다.

악마는 내 시선이 닿자마자 빠르게 사라졌다. 나는 그림자를 따라서 눈길을 옮겼다.

내가 알고 있는 조슈아가 그곳에 있었다.

흰 머리에 특이한 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상을 가진 아델린의 직속 하인.

“말소리를 들었어.”

붉은 불빛이 소년의 얼굴을 밝히고, 눈이 마주치자 그는 흠칫 몸을 떨었다.

“말할 줄 알았던 거야?”

소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창백하게 질린 그 얼굴에는 공포가 새겨져 있었다.

“아니, 네가 말을 할 줄 알고 모르는 건 상관없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혹시 9번째 악마의 계약자니?”

조슈아는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계약자가 아닐까.

실제로 ‘계약’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었다.

나는 인내심 있게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소년은 입 한 번 뻥긋거리지 않았다.

두려워하기만 할 뿐.

그제야 내가 갑자기 등장한 불청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9번째 악마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앞서서 미처 섬세하게 주위를 둘러보지 못했다.

“괜찮아. 불안해할 것 없어. 나 또한 악마의 존재를 알고 있는 데다 실제로 악마와 관계가 있는걸.”

최대한 친절한 음성을 짜냈다.

소년에게서 동질감을 얻어 내려고 했지만 내 의도와 달리 조슈아는 뒷걸음질 쳤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 것뿐이야.”

희게 질린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급한 마음에 손목을 잡았다.

내가 손목을 잡자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란 소년이 나를 밀쳐내고는 뒤돌아서 뛰어갔다.

“……조슈아?”

찰박찰박 물소리가 났다. 나는 조슈아가 있는 쪽으로 촛대를 옮겼다. 소년은 물그릇에 손을 담그고 거칠게 제 손을 씻어 냈다.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듯한 거친 손길이었다. 강박 관념에 사로잡힌 사람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소년에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 쪽으로 촛대를 가까이 대니 중얼거리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빠르게 달싹거리는 입술과는 달리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신경질적인 물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나는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씻는 소년의 옆모습이 기괴하게 느껴졌다.

그 한쪽 얼굴을 보며 어찌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돌풍이 불었다. 예고 없이 강하게 몰아치는 바람은 머리칼이 사정없이 휘날리게 했다.

나부끼는 머리칼로 인해 시야가 가려짐과 동시에 유약하게 일렁이던 촛불이 꺼졌다.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주위가 어두컴컴해지기 직전에 조슈아의 그림자에서 검은 물체가 기어 나오는 장면을 언뜻 본 것만 같았다.

악마였다.

어둠이 찾아오자 바람이 멈췄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지워진 것처럼 어두워진 실내는 작은 소음조차 끼얹어지지 않았다.

소년은 강박적인 손 씻기를 멈춘 듯했다.

나는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 눈살을 찌푸리다가 거미줄처럼 시야를 가리는 머리칼을 정리했다.

그리고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아서 상대의 이목구비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기에 두려워하지 않았다.

“조슈아를 건드리지 마.”

앳된 목소리였다.

내가 엿들었을 때 들었던 그 목소리이기도 했다.

“당신이 9번째 악마인가요?”

붉은 눈동자는 악마의 상징이었다. 익히 알고 있던 기운이 강렬해지는 것을 느끼며 곧바로 물어봤다.

“아니.”

“아니라고요?”

“나는 25번째 악마. 사혈의 계승. 9번째는 이곳에 없어.”

크로셀은 분명 성 내부에 9번째 악마가 있다고 했다.

꼴을 보아하니 최악의 상황이 닥칠 일은 없을 것 같아서 나는 다소 성마르게 입을 열었다.

“9번째 악마를 찾고 있어요. 그가 어디 있는지만 알려 주세요.”

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거칠게 숨을 내뱉은 악마는 또다시 킁킁 냄새를 맡았다.

“다른 악마의 기운이 느껴져. 계약자는 아니고, 권속으로 삼은 건가? 그렇다는 말은…….”

“저는 천사도 아니고, 장인과도 관련이 없어요. 오로지 제 의지로 9번째 악마를 찾고 있는 거예요.”

나를 천사라고 착각하여 지나치게 경계하던 크로셀을 떠올리고서는 미리 불필요한 오해를 방지했다.

“9번째 악마의 위치만 알려 준다면 그를 찾아내고선 조용히 떠날게요. 원한다면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어째서 그를 찾는 거지?”

“그의 힘이 필요해요. 절실히.”

그의 힘이 필요하여 수많은 위험을 짊어지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너희 인간은 항상 그렇게 말하지. 욕망을 불온하게 여기면서 정작 욕망을 위해 움직이는 것들이야.”

그의 말투에서 인간에 대한 혐오가 묻어났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돌아가.”

“안 돼요, 그럴 수 없어요.”

“넌 9번째를 만날 수 없어.”

“어디 있는지만 얘기해 주세요. 어째서 만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만날 수 없다면 만날 수 있게 만들 거예요.”

내가 부서지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 남자와의 연결고리를 끊어 내는 것은 멈출 수 없었다.

“여기서 포기할 수 없어요. 이렇게 허무하게 포기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거예요.”

악마는 내 의중을 가늠하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그 시선을 받아쳤다.

“그림은 그려지기 시작했어. 넌 제물이 될 운명이야. 영원히 액자 속에 박제되겠지.”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으나 젠틸라 공작의 그림 모델이 그림이 완성된 후에도 돌아가지 못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해진 운명 같은 건 없어요. 삶은 선택에 따라 바뀌고, 지금 이 순간마저도 바뀌고 있어요.”

원래라면 내가 눈앞의 악마를 만날 일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설혹 정해져 있다고 해도 그 운명을 바꾸기 위해 다섯 번이나 시간을 되돌렸어요. 이제 더는 물러설 곳이 없어요. 저에겐.”

나는 벼랑 끝에 서 있었다. 한 걸음만 더 뒷걸음질 친다면 추락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물러나서 지금껏 다섯 번이나 보았던 마지막을 또다시 반복할 수 없었다.

“결말은 바뀔 거예요.”

한 치의 물러섬이 없이 악마를 보았다. 눈앞에 있는 악마가 안 된다는 말만 반복한다면 되게 만들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나는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다.

“다섯 번이라. 균열. 그래, 미세한 균열이 있었지. 시간을, 역행한 것이었어.”

그것은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내가 아닌 내 어깨 너머를 보았다.

“그들이 눈을 뜨려고 하고 있어. 면죄부를 받은 죄수라도 오랫동안 바깥에 있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는 거겠지.”

말하기가 힘든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악마가 눈을 감았다.

유일하게 드러나 있던 붉은 눈동자가 어둠에 파묻혔다.

“이만 돌아가.”

“하지만……!”

“나와 함께 있는 걸 눈치챈다면 그들이 널 의심할 거야.”

스산한 속삭임과 함께 시야가 까맣게 물들였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그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눈을 감았다.

암전이었다.

* * *

꿈이었다.

어린 나는 벽에 걸린 그림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내 몸집의 몇 배는 될 듯한 거대한 그림이었다. 액자 속, 광배를 단 다섯 사도가 은은한 빛을 휘감은 채 서 있었다.

그들의 밑에는 무수히 많은 손이 우악스럽게 뻗어지고 있었다.

손들은 사도의 옷자락이라도 잡아채려는 듯했지만 전혀 닿지 못했다. 닿기는커녕, 찬란하고도 아름다운 사도와 비교되어 더럽고 거친 피부가 도드라져 보였다.

“너 거기서 뭐 하냐?”

“……작은 오라버니.”

껄렁한 목소리가 날 상념에서 깨웠다. 나는 홀린 것처럼 그림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제레미아가 불퉁한 얼굴을 한 채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으, 향수 냄새. 어디서 지독한 냄새가 난다고 했더니 너였냐.”

“허, 허락을 받고 나온 것이에요. 멋대로 나오지 않았어요.”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모기만 한 목소리로 앵앵거리지 마. 딱 밟아 죽이고 싶어지잖아.”

제레미아의 날것 그대로의 발언에 나는 정말 그에게 발길질을 당할까 봐 몸을 움츠리게 되었다. 내게 직접 손찌검을 한 적은 없었지만 워낙 성정이 잔혹하여 방심할 수 없었다.

“뭐야, 아델린이 그린 그림이잖아. 꼴에 보는 눈은 있어서.”

얼어붙은 것처럼 바짝 긴장하고 있자니 제레미아의 시선이 내 뒤편에 있는 그림으로 옮겨졌다.

힐끗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하는 듯한 그 그림을 보는 제레미아는 미묘하게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네 눈엔 저게 뭐로 보이냐?”

나는 제레미아의 손가락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사도에게 닿고자 하는 손이 있었다.

“……손이요.”

“손이요? 할 수 있는 대답이 그거밖에 없어? 그러니까 네가 천한 출신인 거야.”

나의 무지함을 탓하듯 제레미아가 쯧쯧 혀를 찼다.

안 그래도 륀느가에 입적된 후로 그동안 내가 몰랐던 걸 하나씩 알아 가던 중이었다. 수치스러움 또한.

오답을 내놓았다는 것이 창피하여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는데 갑자기 뒷목이 낚아채졌다.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제레미아에게 목덜미가 잡힌 나는 강한 힘으로 인해 그림에 바짝 얼굴을 붙이게 되었다.

핏줄이 돋아난 손등이 시야에 들이찼다.

물감으로 여러 번 덧칠하여 탄생한 가짜건만 진짜 손처럼 생생했다.

“잘 봐. 이게 그냥 손으로만 보여?”

찬물을 뒤집어쓴 듯이 피가 차갑게 식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젓기 위해 노력했다.

내 눈에는 그저 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일단 부정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너같이 천한 피를 타고 난 것들이 우리에게 닿고 싶어서 아등바등하는 모습이야.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네가 뒹굴었던 시궁창이지.”

제레미아는 역겨움을 감추지 못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잊지 마. 넌 저 중 하나였어.”

“…….”

“쓸모는 없는데 그 수는 어찌나 많은지. 머릿수만 따지면 개미와 비등한데 정작 쓸모는 개미만도 못한 쓰레기 말이야.”

“아, 알고 있어요…….”

내가 어서 긍정하기를 재촉하듯이 내 목을 쥔 제레미아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컥컥대면서 겨우 대답했다.

“행복한 줄 알아. 원래라면 지금쯤 저 밑바닥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 너를 어머니가 데려온 거니까.”

“어머니가 아니면 누가 너 같은 걸 데려왔겠어.”라고 중얼거린 제레미아가 꽉 잡고 있던 목덜미를 놓아주었다.

강한 압박이 사라지자 한결 숨 쉬기가 편해졌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잔기침을 뱉어 내고 있자니 제레미아가 내 멱살을 잡고서는 거칠게 뒤로 밀어냈다.

“아델린의 그림이 더러워지잖아. 지금 내가 한마디 했다고 그림에 침을 뱉는 거야?”

“아니, 아니에요. 죄송해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제레미아는 그런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이런 덜떨어진 걸 어째서 이 집에 들인 건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니까. 뭐, 어머니의 결정이니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투덜거리던 제레미아는 곧이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 맞아. 재미있는 구경이 있었지. 따라와.”

“아니, 저는…….”

“어디서 말대꾸야. 네가 내 말에 토를 달아도 된다고 생각해?”

“……아뇨.”

이 이상 반항하다가 또다시 목덜미가 잡힐 것 같아서 나는 고분고분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근처에 있던 하인들이 이런 제레미아의 거친 언행을 목도했으나 다들 눈치만 볼 뿐, 말리지 않았다.

나는 제레미아를 따라서 정원으로 나가게 되었다.

제레미아는 자신이 기르는 사냥개가 있는 곳으로 날 끌고 갔다.

검은 털이 반짝이는 거대한 사냥개는 어째서인지 재갈이 물려 있었고, 곳곳에 상처 자국이 남아 있었다.

“너는 바깥에 나가지 못하니 모르겠지만 말이야 오늘 이 녀석 덕분에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

나는 눈에 띄게 위축된 개와 전혀 기뻐 보이지 않는 제레미아를 번갈아서 힐끔거렸다.

그는 입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제레미아가 저런 표정을 할 때 항상 좋지 않은 일이 뒤따랐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여우 사냥을 하러 녀석을 데리고 갔는데 차라리 내가 직접 발로 뛰는 게 나을 정도로 형편없는 사냥 실력을 보였지.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때를 반추한 듯, 제레미아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아직 성인이 되지 못했건만 그 얼굴에 담긴 감정만큼은 나이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순수한 분노에 절어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륀느인 나를 모두가 비웃게 만들었다고!”

“…….”

“이딴 수모를 당하려고 제때제때 먹여 주고, 재워 주면서 기른 것이 아니었는데.”

제레미아가 악에 받쳐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개가 있는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는 말도 있잖아.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오, 오라버니!”

제레미아가 무슨 짓을 벌일지 눈치채고 곧바로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으나 이미 늦었다.

제레미아는 마법을 썼다. 아직 마력을 운용하지도 못하는 나와 달리 그는 륀느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일찍이 마법적 재능을 개화했다.

비록 레미지오와는 달리 완벽하게 제 힘을 제어하지 못했지만, 륀느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마법사였다.

제레미아의 마법 속성은 그 불같은 성질처럼 화염이었다.

불꽃이 개의 주변을 동그랗게 감싸더니 위협적으로 거리를 좁혔다.

갑작스러운 열기에 개는 낑낑거렸다.

재갈이 물려서 주둥이를 제대로 벌리지 못했다.

그 좁은 주둥이 사이로 가냘픈 울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그 잔인한 광경을 더는 지켜볼 수가 없어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쿵쿵 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눈 감지 말고 똑똑히 봐.”

내가 눈을 감자 제레미아가 턱 끝을 잡아당겼다. 강압적인 그의 요구에 나는 결국 꼭 감았던 눈을 떠야만 했다.

목줄을 달고 있어서 멀리 도망치지도 못하고, 불꽃 사이로 발버둥 치는 개가 시야에 담겼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지옥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오라버니,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 그만하세요. 제발.”

“네가 왜 빌어? 잘못은 저 개새끼가 했는데.”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건 자비를 구하는 것밖에 없었다.

필사적으로 제레미아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잔혹하게 제 마법 실력을 뽐내었다.

제레미아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와 짐승의 울부짖음이 뒤섞였다.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제발 그만해 달라고, 다 내가 잘못했다고 빌었다. 더 늦기 전에 개를 저 지옥에서 꺼내 주려면 모두 다 내 책임으로 돌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나는 무능하며 유약했다.

멀쩡히 붙어 있는 두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손바닥이 닳도록 싹싹 비는 것 외에 없었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제레미아에게 그만하라고 애걸하기를 반복했다.

제대로 된 사고를 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원래라면 그에게 손을 대지 않겠지만, 간절한 마음에 제레미아의 옷자락을 부여잡게 됐다.

제레미아는 내 손이 닿자마자 더러운 것이 묻었다는 듯이 험악하게 밀어냈다.

나는 볼품없이 뒤로 넘어졌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일어나야 했다.

일어나서 제레미아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빌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중이었다.

그때 레미지오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위층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어딜 가나 눈에 띄는 백금발이 보였다. 눈물로 시야가 흐릿하여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아니, 어떤 표정을 짓는지 상관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벌레처럼 날 본다고 하더라도 개의치 않았다.

내게는 지금 당장 제레미아를 막아 줄 사람이 필요했다.

크게 소리를 치려다가 이제는 목소리마저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입을 벙긋거렸다.

도와주세요.

성정이 잔혹한 제레미아와 달리 레미지오는 이성적이니까 자비를 베풀어 주지 않을까.

내게 단 한 번도 다정하게 굴어 주지 않았지만 적어도 제레미아처럼 면전에 대고 못된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작은 희망에 매달렸다.

레미지오가 제대로 보지 못했을까 봐 반복해서 입을 벙긋거렸다.

도와주세요. 제발.

레미지오의 시선이 내게 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야가 흐릿하여 정확히 확인할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제레미아는 레미지오가 한마디 한다면 고개를 숙이는 척이라도 하니 그가 어서 나서 주길 바랐다.

그러나 내 바람과 달리 그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내가 잘못 본 걸까 싶어서 두 눈을 깜빡였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곳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참담한 심정으로 멍하니 고개를 들어서 레미지오가 있던 자리만을 바라보았다.

내가 가만히 있으니 제레미아는 억지로 날 일으켜서 뒷덜미를 잡아챘다.

딴 곳에 시선을 팔지 말라며.

“만약 제대로 말 안 들으면 너도 저 꼴이 날 줄 알아.”

온몸이 덜덜 떨렸다. 열 살 남짓 하는 어린아이가 보기에는 너무나 잔인한 광경이었다.

나는 제레미아에게 매달려서 연거푸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앞으로 말 잘 들을게요, 말대꾸하지 않을게요…….

몇 번째일지 모를 애원을 반복하던 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제레미아를 불렀다.

“제레미아.”

“어머니.”

륀느 공작이 나타나자 제레미아가 반색했다.

잇몸이 드러나도록 활짝 웃은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마법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겸사겸사 처분해야 할 것이 있었고요.”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지 못한 제레미아는 살짝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사냥을 하라고 길렀던 개새끼가 제게 주어진 그 유일한 임무 하나를 똑바로 못하지 뭐예요. 혈통 좋은 개마저 이렇게 실수를 하는데 더러운 피가 흐르는 것들은 얼마나 더 할까요.”

더러운 피.

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눈에 띄게 위축된 나와 달리 제레미아는 륀느 공작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자신이 한 일에 칭찬을 바라는 듯했다.

제레미아와 나 그리고 불구덩이 속에 던져진 개를 차례대로 쓱 바라본 륀느 공작은 무덤덤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얼굴에 담긴 감정만큼이나 고저 없는,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처분할 생각이라면 빨리 치우 거라. 저 멀리까지 역한 냄새가 나는구나.”

그녀는 제레미아를 칭찬하지도 않았고, 그의 비도덕적인 행동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한결같은, 소름 끼치도록 덤덤한 말투에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너의 힘을 함부로 쓰지 말거라. 사사로운 일에 사용하기 위해 부여된 힘이 아니다.”

“네, 어머니.”

제레미아는 빠르게 마법을 쓰는 걸 멈추었다.

불길이 사그라졌다.

그리고 나는 뒤늦게 눈치챘다.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걸.

온몸에 소름이 돋음을 느끼며 목각 인형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차마 개가 있던 쪽으로 고개를 돌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으니 륀느 공작이 나를 불렀다.

“슈리엘, 무엇하느냐. 가자꾸나.”

“네? 네!”

레미지오가 날 외면했듯이 또다시 제레미아와 단둘이 남겨지는 줄 알았다.

개의 차례는 끝났다. 이제는 내 차례라는 불안감에 잠식돼 있던 와중이었기 때문에 나는 쫓기는 사람처럼 륀느 공작에게로 빠르게 달려갔다.

중간에 다리에 힘이 풀려서 넘어질 뻔했지만 겨우 중심을 잡고 그녀의 바로 뒤에 설 수 있었다.

륀느 공작이 슬쩍 고개를 돌려 그런 나를 쳐다봤다. 나는 시선을 느끼고서는 눈을 내리깔았다.

“얼굴이 형편없구나.”

“죄, 죄송해요.”

그녀의 지적처럼 눈물을 제대로 닦지 않은 탓에 얼굴이 엉망이었다. 나는 황급히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닦아 냈다. 얼굴 가죽이 벗겨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거세게.

피부가 따끔하게 아파 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륀느 공작은 청결하지 못한 것을 싫어했고, 방금 내게 형편없는 얼굴이라고 했다.

그러니 어서 깨끗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깨끗하지 않으면 버림받게 될 것이었다.

“제레미아의 말은 흘려듣거라. 내가 너를 혼낼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번뜩 고개를 들었다.

혼낼 일이 없다니.

그녀의 말은 내게 있어 구원이나 마찬가지였다.

“너는 내가 하는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고, 앞으로도 그럴 텐데 혼낼 일이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

“……네, 당연하죠. 어머니.”

개한테서 멀어졌건만 그것의 애처로운 울부짖음이 메아리처럼 머릿속에서 맴도는 듯한 기분이었다.

“착한 아이가 될게요.”

착한 아이가 되지 않으면 안 됐다. 나쁜 아이가 된다면 불구덩이에 던져지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영원히 침묵하겠지.

“어머니가 주신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원하는 대답을 들은 륀느 공작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슈리엘. 더 가까이 와라.”

살짝 머뭇거리던 내가 그녀와 거리를 좁히자 손을 뻗어서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을 가만히 느끼고 있자니 여린 눈물샘이 자극되었다.

그저 쓰다듬어 주는 것뿐인데 안심이 되어서 눈물이 절로 차올랐다.

그러나 얼굴을 망칠까 봐 눈물을 흘리지 않고 꾹 참았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꽉 깨물고 있자니 코를 훌쩍대게 되었다. 주위가 워낙 조용한 터라 내가 훌쩍거리는 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렸다.

혹여나 어머니가 내가 울고 있다고 착각하시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슈리엘.”

무뚝뚝한 부름을 듣고선 흠칫 몸을 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얼굴을 가리고 싶었지만 그녀의 부름은 내게 있어서 불가항력이었다.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기 전에 재빨리 고개를 들자 끝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이 마주쳤다.

공작은 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지켜보다가 손수건을 꺼내서 눈가를 훔쳐 주었다.

그녀의 손길은 건조했고, 나를 바라보는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상관없었다.

방금 전에 목도한 지옥과 비교하면 낙원이나 다름없었으니.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때 내 머리 색은, 륀느를 상징하는 백금발이었다.

* * *

눈을 떴다. 그러나 눈을 감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시야는 까맣게 물들여져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은 여전히 나를 잠식하여 이곳이 어디인지 분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직 꿈속을 헤매고 있는 듯했다.

나를 경멸하던 어머니와 오라버니가 지척에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 모든 것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앞으로 말 잘 들을게요, 말대꾸하지 않을게요…….

어린 날의 처절한 중얼거림과 함께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한데 모여 귓바퀴를 맴돌고 있었다.

나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괜찮아.”

누군가 나를 끌어당겼다.

그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부림쳤다.

손톱을 세워서 긁고, 주먹을 쥐어서 힘껏 내리쳤다.

날 놔 달라고. 제발 놔 달라고.

그러나 상대는 그런 날 더욱 단단히 붙잡았다.

“다 꿈이야. 널 괴롭히는 건 이곳에 없어.”

다정하고 평온한 목소리였다. 귓가를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익숙하다는 걸 깨닫고 반항을 멈추었다.

날 붙잡고 있는 자가 륀느와 전혀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어 주었다.

그의 존재는 더 이상 내가 악몽을 헤매지 않고 있다는 걸 알리는 지표가 되어 주었다.

나는 남자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로 숨을 헐떡였다.

오랫동안 물속에 잠겨 있다 겨우 수면 위로 떠오른 사람처럼.

거칠게 숨을 게워 내고 있자니 나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를 속박하는 힘은 좋지 못한 기억을 일깨웠다. 반사적으로 살짝 몸을 떨자 그가 조심스럽게 등을 쓸어 주었다.

느릿하고, 가벼운 손길이었다.

심장의 고동보다 느린 다독임은 전신을 지배하던 긴장을 풀어 주었다.

나는 그에게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칠었던 호흡이 점차 진정되었다.

그러나 깊숙한 곳까지 썩어든 마음은 여전했다.

나는 눈앞을 어른거리는 장면을 지워 내기 위해 애썼으나 나를 훑고 지나간 악몽은 방금 전에 겪은 일처럼 너무나 생생했다.

내 뒷목을 잡아채던 제레미아의 험악한 손아귀나 내 눈가를 어루만져 주던 어머니의 손길이 피부에 남아 있는 듯했다.

그들 모두 흉터처럼 새겨져 있었다.

삶을 반복하면서 통각이 무뎌졌다 여겼는데 지난 과거는 나의 착각을 비웃듯이 악몽이 되어 내 목을 졸라 왔다.

오랜만에 제레미아를 만났기 때문일까. 날 쳐다보며 사납게 얼굴을 구겼던 그를 떠올리게 되니 또 움츠러들게 되었다.

그것을 눈치챈 듯, 남자는 내 머리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가 떨어졌다.

그만의 위로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반짝이는 은빛 머리칼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또렷이 보이는 그 빛은 어째서인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운 느낌이었다.

눈으로 멍하니 그 빛을 좇았다.

크로셀과 함께 대기하고 있어야 할 그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뒤로 밀어 두었다.

한참을 바라만 보던 나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키스, 해 주세요.”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목소리는 끔찍할 정도로 버석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남자를 붙잡았다.

나는 지금 타고 있었다.

불구덩이 속에 내던져져 그 무엇도 남지 않도록 불타고 있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야만 하는데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

잔뜩 풍화되었다고 믿었던 마음마저 날 배신할 지금, 내게 내려진 구명줄은 눈앞의 남자뿐이었다.

더불어 언제나 날 고통에서 꺼내 준 것은 그와의 입맞춤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악몽만이 부유하고 있었다. 나는 학습하듯이 그의 입술부터 찾았다. 곧잘 내게 입을 맞추곤 했던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깊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는 의중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마주하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침묵이 길어졌다.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맞춘 것은 나였다.

“너…….”

남자는 나를 밀어내려 했지만 밀려 나가지 않도록 절박하게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 입술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것은 함정도, 도발도, 간계도 아니었다. 그저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처음에 나를 밀어내려고 했던 남자는 내가 집요하게 입술을 맞대자 더는 밀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감싸 안았다. 그렇다고 내 속도에 맞춰서 호응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조급한 나와 달리 남자는 느긋했다. 앞서서 달려가는 내 속도를 늦추어 주는 듯했다.

서로의 혀가 얽혀 들었다.

나는 게걸스럽게 숨을 갈구하고, 그를 탐했다.

더는 아프지 않아. 아프지 않을 거야. 그렇게 스스로에게 속삭이며.

남자는 내 머리통을 잡고 가만가만 쓸어 주었다.

그 손길이 좋았다.

꿈속에서 느꼈던 어머니의 손길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해서.

“제발.”

딱 붙어 있던 입술이 살짝 떼어졌다. 나는 헐떡이며 조각난 단어를 뱉어 냈다.

“저를 떠나지 마요.”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더 이상 울지 않으리라고 믿었는데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꼭 눈물샘이 고장 난 것 같았다.

“제게 등 돌리지 말아 주세요.”

내 목소리는 여전히 형편없었다.

그대로 침몰할 듯,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거듭 중얼거렸다.

그를 놓지 못한 채로 다시 입술을 찾았다.

몇 번 잘못하여 그의 입가에 입을 맞추고 있자니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이 닿자 흠칫 몸을 떨게 되었다.

그대로 입 맞추기를 멈춘 나는 딱딱하게 굳어서 그의 눈치를 보았다.

“떠나지 않아.”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나를 끌어당긴 남자는 눈물길을 따라서 내 뺨에 잘게 입을 맞춰 주었다.

“더는 널 떠나지 않을 거야. 서로를 지키기에는 너무 나약했던 이전과 같은 선택을 반복하지 않도록 지금껏 노력해 왔잖아.”

눈가를 핥아 준 그는 눈물이 멈췄을 때쯤에야 나를 제 품에 가두었다.

나는 더욱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누군가 나를 찾지 못하도록.

그렇게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어둠 속에 젖어 들었다.

“……이 꿈에서 깨면 또 다른 꿈이 저를 반기고 있겠죠. 다음번은 악몽일 거예요.”

눈을 감으나 감지 않으나 어두운 것은 매한가지였으나 일부러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으면 악몽이 불현듯이 날 찾아올 테니까.

“꿈이 아니야.”

내가 그의 존재를 한낱 꿈으로 치부하자 남자는 빠르게 부정했다.

“하지만 당신이 이곳에 있을 리 없는걸요.”

“네가 천사들의 얼굴을 가리고, 창문까지 열어 준 덕에 널 찾아오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어.”

크로셀을 불러내야 할까 고민하며 미술품에 천을 씌우고, 창문을 열었었다. 벌써 옛일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걱정이 돼서 근처를 서성이다가 들어온 건데……. 역시 너를 홀로 보내지 말았어야 했나 봐.”

분노를 곱씹는 듯한 음성이었다.

나를 달래던 방금 전과는 달리 격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나는 피부에 선연히 와 닿는 노여움을 느끼며 두 눈을 껌뻑이다가 말했다.

“당신의 걱정과 달리 혼자서 많은 것을 해냈어요. 오늘, 악마를 만났어요.”

“9번째를?”

“아니요. 9번째인 줄 알았는데 그는 스스로를 25번째라고 소개했어요.”

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레미아를 만났어요.”

남자가 제레미아를 모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빠르게 설명을 덧붙였다.

“죽음을 가장해서 한 번 따돌렸던 제 오라버니요.”

“성질 더러운 나쁜 놈이라고 했었지.”

“……그렇게 설명한 적은 없었어요.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제껏 제레미아를 대놓고 험담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일까. ‘성질 더러운 나쁜 놈’이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아까보다 한결 나아졌다.

나는 젠틸라 공작 앞에서 사정없이 구겨지던 그 얼굴을 떠올리다가 이내 지워 버렸다.

제레미아의 얼굴은 웃는 얼굴이든, 찡그린 얼굴이든 상관없이 잠깐이라도 머릿속에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리고 있자니 남자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돌아갈까?”

“……네?”

“원한다면 그만둬도 좋아.”

“이제 와서요?”

내가 모든 악마를 권속으로 삼길 바라던 남자였다.

9번째 악마는 아니더라도 25번째를 악마를 만났다고 분명 말했는데 내게 그만두길 권유하는 그가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 힘을 꽤 모았으니 앞으로는 내가 널 지켜 줄게.”

남자의 찬 손이 뺨을 감싸고, 귓가를 어루만졌다.

나는 나지막하게 울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너의 아픔이 곧 성장의 발판이 되어 줄 수 있다면 모든 걸 감내하고 지켜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말투는 지독히도 덤덤했으나 어둠 속에 잠긴 남자의 얼굴은 살짝 일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망각은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이지. 차라리 모든 걸 잊어버리고 싶다면 말해. 날 만났던 기억처럼 그들을 만났던 기억도 지워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너의 불안도, 아픔도 종식될 테니.”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덧없이 흩어지는 숨이었다.

“네가 날 영원히 기억하지 못한대도 좋아. 네 웃는 얼굴만 볼 수 있다면.”

서글픈 중얼거림이었다.

맞닿은 슬픔을 느끼며 나는 지난 나날을 모두 잊어버리는 상상을 했다.

한때 나의 가족이었던 륀느도, 내게 거짓 사랑을 속삭였던 그 남자도 잊고 살아간다.

처음부터 만난 적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되면 악몽을 꾸지 않을 거다.

날 불안하게 만드는 그 모든 것을 머릿속에서 깔끔히 지워 버렸으니 고통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사라진 시간을 메꾸며 살아갈 것이었다.

무지는 막 눈이 내린 설원처럼 깨끗했다.

그 자리에 새로운 발자국을 하나씩 남기다 보면 새로운 정경이 펼쳐져 있으리라. 그러나 새하얀 눈에 매몰된다 하여도 그 밑에 있던 진실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나간 시간을 지운다 한들 제가 짊어진 죄악마저 깨끗이 씻어 낼 수 없겠죠.”

회피는 당장의 위기를 모면시키겠지만, 그 끝이 행복하리라고 믿지 않았다.

또한, 무지는 면죄부가 되어 주지 않았다.

“그러니 쉽게 잊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담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절 지켜 주겠다는 말도, 모든 걸 잊게 해 준다는 제의도 감사해요. 정말로.”

이 인사가 조금이나마 그의 슬픔을 달래 주길 바랐다.

그가 나의 악몽을 몰아 주었듯이 나 또한 그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남자는 다른 생각에 잠긴 듯, 가만가만 나를 어루만졌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다시금 꼬물꼬물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지금은 그냥……, 이렇게 있고 싶어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이곳이 그에게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탓인지 말을 꺼내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천으로 그들을 가렸다고 한들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곤란한 부탁인 거 알아요. 그러니 동이 틀 때까지……, 아니. 1분 만이라도 괜찮아요.”

“…….”

“조금만 더 제 곁에 있어 주세요.”

찰나의 순간이라도 좋았다.

나는 내가 어리광을 피우고 있다는 걸 알면서 도저히 그의 옷자락을 놓을 수 없었다.

“네가 잠들 때까지 있어 주겠다고 약속할게.”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만약 제가 잠들지 못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잠들고 싶지 않았다.

꿈을 꾸는 것이 두려웠다.

내가 걱정하자 남자는 내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괜찮아. 이번에는 편히 잠들 수 있을 거야.”

그는 확신했다. 미래를 엿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어둠은 많은 것을 가려 주니까. 내가 네 곁에 있었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야.”

그의 옷자락을 쥔 손에 살짝 힘이 풀렸다.

안심이 되는 목소리였다.

그렇게 그의 다정함에 기대어 안겨 있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든 것 같았다.

나를 깨우러 온 하녀의 부름을 들으며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옆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그의 빈자리를 더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 밤중에 문을 열어 놓으셨나요? 밤바람이 차가워서 감기가 들 수도 있으니 앞으로 꼭 닫고 계세요.”

분주히 움직이던 하녀가 살짝 열려 있는 창문을 확인하고는 한마디 했다.

“괜찮아요. 춥지 않았어요.”

나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어젯밤 내가 열었을 때보다는 틈새가 좁다는 걸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꼭 황급히 문을 닫아 놓고 가느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투명하게 비치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가 창문을 활짝 열고 상체를 기울였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서늘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그것을 만끽했다.

아침이었다.

* * *

오늘도 어김없이 치장을 받고, 젠틸라 공작의 그림 모델로 서게 되었다.

화실로 들어서기 직전까지도 또다시 악마의 기척을 느꼈을 때 어찌 행동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25번째 악마는 내게 호의적이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오랜 감시로 인해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가 내게 기다려 달라고 했으니 잠자코 기다려야 할지 아니면 먼저 나서서 행동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눈을 가리고, 한정된 감각으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건 예상보다 더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는 일이었다.

내가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사이 젠틸라 공작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기척을 죽인 채로 들어왔다. 곧이어 잠깐 부산스러워졌다가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희미하게 25번째 악마의 기운이 느껴졌다. 오늘은 그를 그냥 보낼 것인가 아니면 이 빌어먹을 천을 풀어낼 것인가.

고민하는 사이 악마가 제 몸집을 불리고 있는 것처럼 기운이 점점 강해졌다.

더불어 묵묵히 그림을 그리고 있어야 할 젠틸라 공작이 내게 다가왔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25번째 악마의 계약자는 조슈아인 듯한데 어째서 젠틸라 공작이 그림을 그리는 도중 악마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일까.

젠틸라 공작이 바로 내 앞에 섰을 때였다.

그가 내게 다가온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긴장하고 있다는 걸 숨기기 위해 의식적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느릿하게 호흡하던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젠틸라 공작에게서 짙게 풍기던 시가 냄새가 나지 않았다.

내 앞에 있는 상대가 젠틸라 공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과 동시에 정체불명의 사람이 내게 손을 댔다.

그 조심스러운 손길이 닿자 반사적으로 움찔하게 되었다.

내가 움찔하자 상대 또한 동요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또한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지레짐작할 뿐이었다.

상대는 되도록 날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시야를 가리고 있는 천을 풀어 주려고 했다.

생각보다 매듭이 잘 풀리지 않는 건지 꼼지락거리는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따로 누가 들어오는 소리는 듣지 못했으니 하녀는 아닌 듯했다.

상대의 행동에 의문을 느끼며 스스로 천을 풀기 위해 손을 들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나설 필요는 없었다.

시간을 들여서 애쓰던 보람이 있었는지 때마침 천이 풀어져 내렸다.

빛 한 점 없이 까맣던 시야가 단번에 밝아지고, 정체불명의 상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조슈아?”

내 앞에는 조슈아가 있었다.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젠틸라 공작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캔버스 뒤편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그는 이곳에 없어.”

내 시선이 캔버스 쪽으로 향하자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젯밤에 들었던 것과 같았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내가 본 것이 진짜인지 재차 확인했다.

“그동안 널 그리던 사람은 공작이 아닌 조슈아니까.”

나는 두 번 놀라야만 했다.

젠틸라 공작이 아닌 조슈아가 날 그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한 번, 목소리의 근원을 보고 나서 또 한 번.

소년의 머리 위를 올려다봤다.

그의 하얀 머리칼 위에는 자그마한 강아지가 앉아 있었다.

동그랗게 뜬 눈동자와 앙증맞고 촉촉한 검은 코, 쓰다듬으면 부드러울 것 같은 검은 털까지.

참으로 귀여운 외양이었다.

보통 강아지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마물이 가질 법한 붉은 눈동자와 등에 달린 날개를 꼽을 수 있었다.

“모래알이 모두 떨어지기 전까지 그들은 우리를 방해하지 않을 거야. 유일하게 자유로운 시간이지.”

강아지가 힐끔 캔버스가 있는 쪽을 흘겨보았다.

따라서 눈길을 옮긴 나는 그림 도구 사이에 있는 모래시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모래알이 소리 없이 작은 구멍을 통해 아래로 알알이 떨어지고 있었다.

“당신이 25번째 악마인가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재차 확인 과정을 거쳤다.

악마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외모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찾아와 주신 건 감사하지만, 저를 그리던 사람이 젠틸라 공작이 아닌 조슈아라니요. 무슨 말인가요?”

“다른 의미는 없어. 말 그대로야.”

“하지만 저는 젠틸라 공작의 그림 모델로 들어온걸요.”

“다들 그렇게 믿고 있지. 공작 또한 그렇게 믿도록 만들고 있고.”

악마는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이 몹시 지쳐 보였다.

“이번에는 내가 묻지. 너는 어째서 9번째를 찾고 있는 거지?”

“그가 엘릭시아를 파괴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당신들이 현자의 돌이라고 부르는 그것이요. 저는 그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왔어요.”

“그것이 결국 네 목숨을 위협하는 행위이더라도?”

“네.”

내가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악마는 생각에 잠긴 듯,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절실하구나.”

악마의 말을 부정할 수 없는 터라 나는 쓴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균열이 생긴 데다 남의 명령은 절대 들으려 하지 않는 그 악마를 셋이나 권속으로 삼았다는 건, 그만큼 네가 강하다는 의미겠지.”

악마는 그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결심을 내린 듯했다.

“나는 9번째가 어디 있는 줄 알아. 그는 네가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있어. 하지만 내가 도와준다면 만날 수는 있을 거야.”

“그렇다면 만나게 해 주세요.”

듣던 중 희소식이었다. 머뭇거릴 틈이 없이 요구하자 악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나와 거래를 하자.”

“당신은 무엇을 원하죠?”

“젠틸라 공작의 죽음.”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실래요?”

단 한마디의 말이었다.

짤막한 악마의 발언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나는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어서 묻게 되었다.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로.

“그를 죽여 줘. 그의 죽음만이 우릴 구원할 수 있어. 네가 진정 강하다면 해낼 수 있겠지.”

“공작을 죽이라니요. 혹시 농담은 아니죠?”

악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내가 당황하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너 또한 그림이 완성되기 전까지 끝을 봐야 할 거야. 그림이 완성되면 더는 돌이킬 수 없으니까.”

“…….”

“네가 진정 사도나 천사와 관련이 없다면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겠지.”

내가 당연히 거래를 승낙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어투였다.

그러나 덥석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의문점이 남아 있었다.

“공작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다면 굳이 남의 손에 피를 묻힐 필요 없이 직접 행하면 되는 일 아닌가요?”

겉으로는 귀여운 강아지처럼 보이지만 악마는 악마였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이 만들어 낸 제도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 있는 악마가 굳이 거래까지 하며 살인을 청탁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곳은 천사가 많아. 그 탓에 나는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지만, 인간이라면 다르지.”

“본인 입으로 면죄부를 받았다고 하셨던 걸 기억해요. 인간을 죽이는 데 그다지 많은 힘이 들지 않잖아요.”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목숨이고, 가장 하찮은 것 또한 목숨이다. 제 입으로 약하다고 말하던 은발 남자조차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장정 두 명의 목숨을 앗아 갔다.

“악마에게 사람을 죽이는 일은 길 가다가 무심코 개미를 밟는 것과 동급이죠.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요. 그런데도 젠틸라 공작의 죽음을 거래 조건으로 건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요?”

나는 악마를 빤히 쳐다봤다.

나와 마주한 그것은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이 세상에서 단 한 명의 인간만이 악마를 권속으로 삼을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렇다는 말은…….”

“그래, 젠틸라 공작이 나의 주인이야.”

“…….”

“네가 그를 죽이고 나를 거둬들이면 이 영겁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되면 조슈아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되겠지.”

악마는 사뭇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젠틸라 공작이 눈앞에 있는 악마를 권속으로 들였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 여운을 느끼기도 전에 이어지는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려야 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내가 악마와 대화하는 동안 입 한 번 벙긋거리지 않고 있던 조슈아가 말했다.

아니, 조슈아가 말했다고 표현하기에는 애매했다.

소년은 분명 입을 열어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정작 목소리가 나온 건 소년의 입이 아니었으니.

소년과 함께 입술을 벙긋거린 악마의 입을 통해 목소리가 나왔다.

그 모습이 꼭 복화술을 하는 것 같았다.

“네 탓이 아니야. 나 또한 지금의 삶이 진저리가 나는걸.”

위로를 하듯, 악마가 앞발로 조슈아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소년을 내려다보는 두 눈에는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일반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장면이었기 때문에 내가 멍하니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악마는 아차 싶었던 건지 설명을 해 주었다.

“계약의 대가로 목소리를 받아 냈어. 내 입을 빌려서만 말을 할 수 있지. 그러니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

“아, 죄송해요.”

소년을 빤히 쳐다보는 것이 무례한 행동이었음을 깨닫고 빠르게 사과했다.

계약자에 관한 얘기를 들어 보기만 했지,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었다. 그것이 당연한데 조슈아가 아직 어리기 때문인지 썩 좋은 감상은 들지 않았다.

“둘이 계약 관계라는 걸 젠틸라 공작은 알고 있나요?”

“알다마다. 계약을 주선한 이가 공작이었으니 모를 리 없지.”

“계약을 주선하다니요?”

악마의 봉인을 풀고 권속으로 삼은 젠틸라 공작과 그 성에 지내면서 공녀의 시중을 들고 있는 조슈아.

갈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악마와 계약하고, 계약을 함으로써 그걸 얻었을 텐데 조슈아는 아델린의 하인으로 남아 있었다.

게다가 젠틸라 공작이 아닌 조슈아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얘기를 듣게 되니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젠틸라 공작과 조슈아.

그리고 아델린까지.

그들의 관계를 한데 모으면 미묘하게 어긋난 듯이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공작의 권속이 된 것도, 조슈아와 계약을 하게 된 것도. 모두 자의가 아닌 젠틸라 공작의 욕심 때문이야.”

악마는 다소 격앙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것이 말할 때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언뜻 모습을 드러냈다.

“시작은 욕망. 욕망이었어. 보다 더 높은 곳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

“…….”

“처음은 혈육이었지. 그러다가 만족하지 못하고 본인을 대신하여 완벽한 창작을 해낼 제물을 모았어.”

“잠시만요. 본인을 대신할 제물을 모았다니요? 젠틸라 공작은 이미 미술계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인걸요.”

“한때는 그랬지. 지금 그는 손을 다쳐서 붓을 들지 못해.”

악마의 말을 듣자마자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성에 도착한 첫날, 그림을 그리다가 덜덜 떨리는 제 손을 붙잡았던 젠틸라 공작이었다. 당시에는 분위기가 워낙 험악했던 터라 본인의 화를 이기지 못해 그러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희생이 있었어. 지금도 희생을 강요받고 있지.”

그렇게 말하는 악마의 목소리에는 침울함이 깃들어 있었다.

“조슈아는 잠재력을 인정받고 선발되었어. 나와 계약하게 되어 목소리를 잃은 대신 본인이 가진 재능 그 이상의 능력을 갖게 된 거야.”

“…….”

“능력은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지만, 결과물은 조슈아의 것이 아니게 되었지. 그것들은 젠틸라 공작의 이름이 새겨지게 되었어. 애초에 그러기 위해 계약을 강요당한 것이었으니까.”

“부당한 일이네요.”

나는 내가 보았던 미술품을 떠올렸다. 현 젠틸라 공작이 그렸다고 알려진 그림들이었다.

지금껏 젠틸라 공작의 이름으로 발표된 그림 중 본인이 직접 그린 것은 몇이나 될까.

모두가 젠틸라 공작이 그렸다고 믿고 있었다. 공작 또한 본인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양 행동하고 있었고.

그 누가 공녀의 하인밖에 되지 않는 소년이 공작을 대신하여 작품 활동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을까 싶었다.

“공작이 그 많은 천사를 거느리지만 않았어도……! 아니, 힘이 소실되지만 않았어도 권속이 될 일은 없었을 텐데!”

퍽 억울한 듯 악마가 분노를 곱씹었다.

“너무 오랫동안 봉인돼 있었어. 세상은 더 이상 나를 믿지 않고, 애매한 권능만을 유지한 채 명령을 받드는 입장이 되었지. 나는 그를 거스를 수 없어.”

“그래서 제게 부탁하는 거였군요.”

악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붉은 눈동자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성공만 한다면 너는 나의 힘과 함께 그토록 원하던 9번째를 찾을 수 있고, 나는 나의 계약자와 함께 자유로워질 수 있어.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가 될 거야.”

거래는 가진 것이 동등할 때만 성립할 수 있는 거라고 했던 젠틸라 공작의 말이 떠올랐다.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은 권위적일 수밖에 없었다.

제 밑에 있는 것들에게 자비를 베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절박한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서로를 붙잡고 늘어졌다.

“혹시 9번째 또한 공작의 권속이 돼 있나요? 그런 식이라면 곤란해요.”

“아니, 그는 권속이 아니야.”

“제가 9번째 악마와 부딪칠 가능성은요? 이명에 ‘종말’이 붙은 만큼 강하다고 들었어요.”

“네가 9번째와 대립할 일은 없을 거야.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것은 9번째 악마의 존재를 아예 배제하고 있었다.

크로셀은 분명 이곳에 9번째가 있다고 했고, 봉인이 풀려 있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9번째 악마가 대체 어디에 숨어 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오래 고민할 시간은 없어. 앞서 말했다시피 그림이 완성되면 너는 박제될 거야. 오늘은 너와 거래를 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있지만 다음부터는 아니야.”

“당신은 명령을 받는 입장이니 불가항력이겠죠. 하지만 섣불리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제 입장도 고려해 주세요.”

악마는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어서 내가 거래를 승낙하겠다고 말해 주길 바라는 듯했다.

그것은 본인이 직접 나설 수 없으니 인간인 내게 기대를 거는 듯한데 안타깝게도 나는 생각보다 더 무력했다.

거기다 살인을 기꺼이 할 수 있는 성정도 아니었다.

“죄송해요, 제가 당신을 죽이게 될 거예요.”

내가 생각에 잠겨 있자, 중간에 서 있던 소년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저는 그릴 수밖에 없어요. 죄송해요.”

그림이 완성되면 사람이 죽는다.

악마는 그것을 박제되었다고 표현했다.

미술품 속에서 살아가는 천사와 그림 속에 박제된 인간.

나는 진실을 깨닫고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천사가 된다는 뜻이니?”

내가 ‘천사’를 언급하자 소년은 흠칫 몸을 떨었다.

안 그래도 하얗던 피부는 창백하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소년에게서 물음에 대한 긍정도, 부정도 듣지 못했으나 그 대답을 쉬이 유추할 수 있었다.

“천사를 만드는 장인은 젠틸라 공작이 아닌 너였구나.”

“죄, 죄송해요.”

“내게 사과하지 않아도 돼. 널 탓하려고 한 말이 아니니까.”

조슈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죄책감에 짓눌려 있는 소년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썩 편치 않았다.

“천사란 인간의 목숨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존재인가요?”

크로셀의 말에 따르면 천사는 악마를 사냥하기 위해 인간이 직접 만든 피조물이었다.

장인이라고 불릴 만큼 능력 있는 사람이 미술품을 만들면 천사가 태어나리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듯했다.

“장인은 아름다운 미술품을 만들어서 천사가 기생할 수 있을 만한 틀을 제작하고, 인간의 혼을 담아서 천사를 완성시켜.”

천사가 어떻게 탄생되는지 자세히 모른다는 걸 눈치채고 악마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나는 날 쳐다보던 수많은 시선을 떠올려야만 했다.

“각하께서는 천사가 되는 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죽음이라고 하셨어요.”

조슈아가 말했다.

소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한마디, 한마디 꺼내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요. 더는 그리고 싶지 않아요. 그림을 그리는 게…… 더는 즐겁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며 소년은 벌벌 떨리는 손을 들었다.

“저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어요.”

어젯밤, 필사적으로 씻어 내기 위해 노력하던 그 손이었다.

멍하니 제 손을 내려다보던 조슈아는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지금까지 조슈아는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이긴 했지만 큰 몸짓을 보이지 않았었다.

무엇 하나 붙잡지 못하고 허공에서 벌벌 떨리는 손을 한 채 필사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악마는 소년의 머리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년의 작은 손을 핥아 주었다.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지만 더러운 것을 핥아 내듯이 정성스러웠다.

“아, 아…….”

시간이 지날수록 조슈아는 차차 진정되었다.

악마는 그런 조슈아를 위로하려는 듯이 핥아 주는 것을 멈추고 소년의 손에 뺨을 비볐다. 짐승의 것과 같은 낑낑대는 소리가 났다.

두 손이 더는 떨리지 않았을 때, 조슈아는 자신을 위로해 주는 악마를 안아 주었다.

그리 강한 힘은 아니었으나 어떤 마음으로 악마를 붙잡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잔뜩 부르터 있는 앙상한 손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 나이에 걸맞지 않은 손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했다.

어둠 속에서 강박적으로 손을 씻어 내던 모습을 떠올리다가 이내 살며시 눈을 감았다.

“어서 선택해. 이대로 우리를 외면하고 박제될 것인지 아니면 시도할 것인지.”

색색거리는 앳된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악마는 조슈아의 품에 안긴 채 말했다.

“우리의 얘기를 들려줬으니 이제 와서 뒤로 내빼지 않겠지.”

“제게 동정을 사기 위해 진실을 밝힌 것이었군요.”

어쩐지 필요 이상으로 친절을 베푼다고 했다.

은폐하여도 모자랄 진실을 순순히 털어놓은 것은 내게 협조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도 모험을 하는 거야. 만약 네가 실패하여 흉계를 꾸민다는 걸 공작이 알게 되면 돌이킬 수 없어.”

악마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나는 그들의 제안과 내가 얻을 수 있는 이익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잃을 수 있는 걸 감안해 보았다.

“저는 이 일에 인생을 걸었는데, 그쪽은요?”

“마찬가지야.”

“…….”

“우리 또한 남은 생을 걸었어.”

“좋은 대답이에요.”

원하던 대답이었다.

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당장 확답을 줄 수 없어요. 조금 더 고민할 시간이 필요해요.”

내가 거듭 결정을 미루자 악마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더는 독촉한대도 내가 변심하지 않으리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결정을 내리면 어제 만났던 방으로 와. 어차피 이 복도로는 그림 그리는 시간을 제외하고 사람들이 오가지 않으니까 상관없을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힐끔 모래시계를 보니 남은 모래알이 얼마 되지 않았다.

“슬슬 시간이 되었네.”

나를 따라서 모래시계를 본 악마가 말했다.

모래알이 다 떨어지면 하녀가 찾아올 것이었다. 대충 용건도 다 끝냈으니 풀어져 있던 천을 들었다.

조슈아가 도와주고 싶은지 손을 뻗었지만 매듭을 제대로 풀지 못했던 걸 기억하여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다시 그림을 그리죠. 아 참, 그림이 완성되려면 얼마나 걸리나요?”

“두세 달 정도. 참고로 일부러 늦게 그려 줄 수 없어.”

“알고 있어요. 공작에게 반기를 든다고 해도 결국 당신은 그의 권속이니까요.”

나는 수긍하면서 눈을 감고, 그 위에 천을 감쌌다.

단번에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괜찮나요? 대화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는데.”

“그건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야.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지.”

목소리만 듣는대도 그 얘기가 불길하게 느껴졌다. 일단은 모르는 척 매듭을 묶었다.

그렇게 조슈아가 멀어지고, 실내는 언제 대화 소리가 들렸냐는 듯이 조용해졌다.

시간은 금세 흘러서 왔을 때처럼 아무 말 없이 조슈아가 나가고, 뒤이어 하녀가 다가와서 묶인 천을 풀어 주었다.

“이상하네요.”

“……이상하다니요?”

내 뒤에 서서 평소보다 느릿하게 천을 풀어내던 하녀가 말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묶여 있었나요?”

“네, 당연하죠.”

나는 최대한 침착한 음성을 만들어 냈다.

눈치챈 것은 아니겠지.

온 신경이 뒤편으로 쏠렸다.

“설마 풀었을 리는 없겠지만, 이 천을 풀 생각조차 하지 마세요.”

“왜 풀면 안 되는 건지 알 수 있을까요?”

순진한 어투로 물으면서 천천히 눈을 떴다. 아무도 없는 화실이 나를 반겼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천을 풀었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어요.”

“사라지다니요?”

“말 그대로예요. 눈을 가렸던 천만을 남기고 사라졌어요. 그러니 괜한 생각 하지 마세요.”

하녀는 다른 누가 있는 것도 아니건만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천을 풀면 다들 사라지는 탓에 내가 천을 다시 묶었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으려는 듯했다.

의심은 잠깐이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창문을 열어 둔 것을 보고 혹시나 해서 말하자면 밤중에는 방 밖으로 나가지 마세요. 웬만해서는 저희를 부르지도 마시고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녀는 다른 이들이 들을까 봐 두려운지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예전부터 이 성에는 밤이 되면 그림이나 조각상이 움직인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실제로 사라진 사람도 몇몇 되어서 밤이 되면 다들 밖으로 나가지 않죠.”

“무서운 이야기네요.”

어쩐지 한산하다 싶었다.

아무도 없던 어두운 복도를 떠올리며 하녀의 얘기를 유심히 듣는 척했다.

“이곳에서 지낼 때는 조심하고, 또 조심하세요.”

“네, 새겨들을게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화실을 빠져나간 후 아무렇지 않게 오후를 보냈다.

그들이 주는 대로 먹고, 그들의 손길에 따라 씻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옷을 갈아입고.

어디 모난 데 없이 온순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왔을 때 문을 열었다.

조슈아를 찾아가기 위해.

* * *

아무도 없는 어두운 복도를 가로질렀다.

내가 걸어갈 때마다 일렁이는 촛불이 어두컴컴한 주위를 밝혔다.

그들의 제안을 바로 승낙하지 않다가 밤이 되자마자 찾아가는 이유는 간단했다.

젠틸라 공작 성에서 나는 이방인이었고, 수집한 정보는 너무나 적었다. 당장 그들의 협력자가 되기보다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정보를 얻어 내는 것이 이득이었다.

은발 남자와의 일을 통해 깨달았다.

거래를 할 때는 자세히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며 절박한 쪽이 무조건 지게 돼 있었다.

나 또한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처지이긴 했지만 그림이 완성되려면 두세 달이 걸린다고 했다.

공작은 죽이겠다고 마음먹는다 하여 곧바로 죽일 수 있는 자가 아니니 내 손에 패가 있을 때 써먹어야 했다.

지금은 그들에게 넘어갈 것처럼 굴면서 모호하게 시간을 끌 때였다.

조슈아의 방문 앞에 섰다.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문틈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틈새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 이전에 조슈아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어째서 오늘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거니? 불필요한 반항은 그만두겠다고 나와 약속했잖아.”

아델린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우리 더 이상 아파하지 말자고 약속했던 거, 잊은 거니? 아니면 혹시 그 여자를 동정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아델린은 계속 말했다.

“륀느 공작이 사산한 딸아이를 대신하여 입양했다던 그 여자한테 동질감을 느껴서 그런 거라면 이해해. 하지만 어차피 남이잖아.”

그녀의 목소리가 옅게 떨리고 있었다.

“내겐 네가 제일 소중해.”

문틈 사이로는 조그마한 빛 하나 들지 않았다.

나는 그 까만 어둠과 함께 서글픈 아델린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네가 날 용서하지 않는대도 상관없어. 내가 공작이 되면 더는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되니까,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참아 줘. 조슈아.”

오늘 조슈아와 25번째 악마를 만나는 건 무리인 듯했다.

더 이상 그들의 대화를 엿듣지 않고 조용히 되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거기 누구니?”

아델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내가 도망가기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저예요, 아가씨.”

“……네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야?”

이대로 뛰어갈까 잠깐 고민했었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내 존재를 알렸다.

“너, 혹시 들었니?”

불안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아델린은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아가씨, 아파요.”

“어디서부터 들었니? 언제부터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냐고!”

아델린이 언성을 높였다.

가녀린 팔목에 어울리지 않게 엄청난 힘으로 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아델린을 보았다. 대체 그녀는 조슈아와 무슨 관계인 걸까.

조슈아의 방에 있는 자가 아델린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나는 25번째가 제안한 거래가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제 아비에게 냉소적이라고는 하나 결국 그녀는 젠틸라 공녀였으니.

어떤 대답을 해야 좋을지 고민하던 중이었다. 어둠 속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조슈아가 아델린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연약한 손길이었지만 소년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했다.

“조슈아? 어째서…….”

아델린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복도 저편에서 하녀가 아델린을 찾으며 다급히 뛰어오고 있었다.

“아가씨, 아가씨! 이곳에 계셨군요!”

아델린은 내 어깨를 잡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하녀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방금 전의 불안했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젠틸라 공녀인 아델린만이 남아 있었다.

“소란스럽구나. 내가 이곳에 오지 말라고 했는데 이 시간에 어쩐 일이니.”

“륀느 공자께서 지금 화원을 불태우고 계십니다! 각하께서는 부재중이어서 다들 긴급히 아가씨를 찾고 있어요!”

“제레미아 륀느가? 어째서?”

“그게 당장 그림 모델을 데려오라고…….”

뒤늦게 내 존재를 눈치챈 하녀가 나를 힐끔 쳐다보고서는 말끝을 흐렸다.

나는 단번에 상황을 파악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아델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망나니가 기어코 일을 저질렀구나.”

나와 함께 한숨을 내쉰 아델린이 중얼거렸다.

제레미아가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제 능력을 이용한, 요란한 소란이었다.

손님이 되어 성을 방문해 놓고 화원을 불태우다니.

앞뒤 가리지 않고 무모한 것이 너무나 제레미아다운 방법이었다.

가문 간의 갈등을 야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런 부차적인 문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할 짓이 있고, 안 할 짓이 있지. 내 화원을 태워 먹어?”

아델린의 목소리에는 아까와 비견할 수 없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지금 그쪽 상황은 어떻지?”

“상황을 뒤늦게 파악하고 불을 끄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륀느 공자께서 진정하지 않는 탓에 아무래도 빠른 제압이 힘듭니다.”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구나. 하긴, 아랫것의 말은 죽어도 들으려 하지 않지.”

아델린은 제레미아의 성질머리를 잘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말에 공감했다.

“륀느 공자께는 내가 한마디 하도록 하마. 어서 가자꾸나.”

아델린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서둘러 걸어가려고 했다.

나는 그녀가 내게 등을 돌리기 전에 입을 열었다.

“저도 함께 갈게요.”

내가 직접 제레미아에게 모습을 드러내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건지 짧은 침묵이 맴돌았다.

“방금 전의 이야기 못 들었니? 둘이 같이 있어 봐야 좋을 것 하나 없단다. 네가 제레미아 륀느의 성격을 알고 있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해하겠지.”

제레미아는 날 보자마자 내 머리채를 잡는 일이 있더라도 당장 수도로 끌고 가려고 할 것이었다.

조슈아를 시켜서 천사를 만드는 데 혈안이 된 젠틸라 공작의 의지를 반하게 되는 일이었다.

“제레미아와 널 격리시킨 것은 아버지의 배려이니 받아들여.”

“하지만 그분은 저를 찾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이잖아요.”

“그러니 더욱 숨어 있어야지.”

“아가씨께서 저를 지켜 주리라 믿고 있어요.”

나는 아델린을 똑바로 쳐다봤다.

젠틸라 공작의 목적은 확실했다.

제 명성을 드높일 아름다운 그림.

그것 하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델린은?

조슈아를 도구 취급하는 젠틸라 공작과 달리 아델린은 조슈아를 퍽 소중히 여겼다.

악마가 제안한 거래를 받아들일지 아닐지 정하는 건 그들의 사정을 정확히 파악한 후라고 해도 늦지 않았다.

“그리고 저 때문에 많은 이들이 피해를 입었어요. 혹시 모르니 따라갈게요.”

“……그래, 마음대로 하렴.”

내가 자책하자 잠깐 고민하던 아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녀를 따라서 화원으로 가려니 조슈아가 항상 그렇듯이 조용히 나와 함께 아델린의 뒤를 따랐다.

보이지는 않지만, 조슈아의 기척을 느낀 것인지 아델린이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조슈아, 너는 몸도 좋지 않은데 쉬고 있으렴. 바깥이 걱정되는 건 이해하나 상황을 정리하는 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힐끔 나를 쳐다봤다.

“조슈아도 함께 가고 싶어 하는 듯하네요.”

“하, 오밤중에 이게 무슨 소란인지.”

조슈아가 언어로 의사 표현을 하지 못하는 걸 고려하여 내가 대신 말해 주었다.

아델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꺼번에 일어난 일들로 골치가 아픈 듯했다.

“아가씨.”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계속 제레미아에게 가는 것이 지체되자 하녀가 아델린을 불렀다.

길게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그래, 다들 같이 가자꾸나. 여기서 머뭇거리다가는 그 망나니가 이 성까지 태워 먹을 기세니까.”

아델린의 말투는 다소 격했다.

결국 하녀가 앞장서고, 조슈아는 아델린의 눈이 되어 주며 다 같이 화원에 가게 되었다.

화원이 불타고 있는 건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새까만 연기가 하늘을 뒤덮을 듯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당장 슈리엘, 그년을 데려와!”

그리고 소란의 중심에는 제레미아가 있었다.

제레미아는 미친 사람처럼 크게 외쳤다.

주변에서는 그를 말리려던 하인들이 쩔쩔매고 있었다.

그 모습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상상이 현실이 되어서 직접 목격하게 되니 참 착잡했다.

“넌 일단 여기에 있어.”

제레미아에게 다가가기 전, 아델린이 말했다.

내가 자책 어린 발언을 할 만큼 무모하게 나설 것이라 생각한 듯했다.

“제레미아는 널 보자마자 눈이 뒤집힐 거야. 그렇게 되면 아무리 나라도 널 보호해 줄 수 없어.”

나 또한 아델린의 의견에 동의하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레미아가 아델린에게 유독 약한 모습을 보여 주긴 했지만 그것도 이성이 남아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아델린과 제레미아의 관계는 잘 알지 못했으나 그녀가 과연 제레미아를 막을 수 있을까 싶었다. 제레미아의 꼴을 보니 륀느 공작이 와야 제정신을 차릴 것 같았다.

“아델린 아가씨.”

아델린이 제레미아에게 가기 전에 그녀를 불렀다. 멈칫한 아델린이 나를 돌아보았다.

“아가씨께서도 제가 그림 모델이기 때문에 지켜 주려고 하시는 건가요?”

“……그래, 너는 아버지의 소중한 모델이니까. 비록 내가 직접 볼 일은 없겠지만, 모두에게 칭송받는 아름다운 그림이 완성되길 기대하고 있단다.”

아델린이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붉게 타오르는 화원을 등진 채 우뚝 서 있는 그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중간에 끊긴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꾸나.”

아델린의 옆에 서 있던 조슈아가 움찔했다.

소년은 나와 아델린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아델린을 보좌하며 제레미아한테 갔다.

아델린이 제레미아에게 가고, 양동이에 물을 가득 채워서 나르는 하인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불을 끄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화재의 근원이 저러고 있으니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이었다.

제레미아를 막지 않는 이상 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서 일정 거리를 둔 채 아델린과 제레미아의 대화를 엿들었다.

제레미아는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저 아델린을 보자 반색했을 뿐이었다. 그런 제레미아와 반대로 아델린의 목소리는 무뚝뚝하기 그지없었다.

“제레미아 륀느. 어서 마법을 멈춰.”

“아델린, 드디어 날 봐 주는구나. 하루 종일 별 같잖은 이유를 들어가며 날 피했잖아. 내 동생도 못 만나게 하고 말이야.”

“그녀는 네 동생이 아니야. 아버지께 충분한 얘기를 들었다고 알고 있는데?”

“충분한 얘기. 그게 충분한 얘기라 이거지.”

제레미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림 한 점 완성시키겠다고 내게 거짓말을 하고 그걸 충분한 얘기라고 표현한다고? 젠틸라 공작께서는 손이 아닌 귀부터 가꿔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제레미아가 한껏 비꼬아 말했다.

어머니인 륀느 공작이 아닌 다른 공작들에 대한 존경심이라고는 개미 눈물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이긴 했지만 도를 넘는 반응이었다.

“그 얘기는 천천히 하도록 하자. 일단 불부터 꺼. 륀느 공작께서는 네가 어디서 마법을 쓰든 눈감아 주셨는지 몰라도 여기서는 아니야.”

“…….”

“제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서 고삐 풀린 말처럼 구는 걸 묵인할 정도로 너그럽지 않거든.”

모욕당한 제레미아는 사납게 얼굴을 구겼다. 그는 아직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는 듯했다.

“내 동생이라고! 그런데 뭐? 근처에도 갈 수 없다고? 아델린, 내가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앉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적어도 화원을 불태우지는 않았겠지.”

격정적인 제레미아와 달리 아델린은 덤덤히 그런 제레미아를 비난했다.

“어서 불 꺼.”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넌 날 바라보지 않았겠지. 내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을 거야.”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마법으로 만들어 낸 불꽃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서, 그 모든 걸 살라 먹을 듯이 굴었다.

“내 동생만 데려온다면 끝날 문제야. 황제의 반려인 그녀를 이곳에 묶어 두는 것이 젠틸라 공작의 뜻이라면 젠틸라가 륀느를 적으로 둔다고 간주하겠어.”

“…….”

“그리고 직접 내 앞에 데려올 때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야. 내가 이딴 꽃만 태울 줄 알 것 같아?”

“참으로 뻔뻔하구나.”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제레미아의 입술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라는 의지를 드러냈다.

“어서 내 동생을 데려와.”

나는 최근만큼 제레미아의 입에서 ‘동생’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아델린 또한 그걸 눈치챈 듯했다.

그녀는 역겨움을 감추지 못했다.

“누가 보면 가족애가 대단한 줄 알겠어.”

“…….”

“그녀를 데려오면 곧장 폐하의 침실로 밀어 넣어서 합방시킬 생각만 가득한 주제에 말이야.”

“모두 가문을 위한 일이야.”

“우리는 항상 가문을 위해서라는 말로 스스로를 방어하지. 한결같은 변명이야.”

아델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무기력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물어보지. 지금까지 네가 한 말, 다 책임질 수 있니? 젠틸라 가문을 적으로 돌리겠다는 그 말까지 말이야.”

제레미아가 흠칫했다. 반쯤 분위기에 취해 막 던진 말이다 보니 책임을 질 수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제레미아는 후계자도 아니었다.

“너는 방자하지만 그래도 선은 지켰지. 제레미아 륀느. 그동안 알고 지냈던 네가 맞다면 감정적으로 굴지 말고 불부터 꺼.”

“……그거야 네 앞이니까.”

“뭐?”

제레미아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듯, 아델린이 반문했다. 제레미아는 답지 않게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 앞이니까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 거지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런 적 없어. 하지만 그렇게 지내면 뭐 해. 오늘뿐만 아니라 지금껏 넌 날 피해 다녔지.”

“제레미아.”

“네게 고백도 했는데 말이야.”

“제레미아 륀느!”

그 제레미아가 아델린에게 고백을 했다니?

아델린의 새된 비명을 듣고 있자니 조금 당황스러워졌다.

공작 가문의 적통끼리는 혼인도 연애도 불가했다.

그 고백이라는 것이 이성 간의 연애 감정을 뜻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문제가 될 법했다.

“이렇게까지 날 무시하니까 직성이 풀려? 난 널 위해 모든 걸 포기할 생각까지 했는데…….”

아델린은 입을 다물었다. 불을 끄기는커녕 대화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제레미아를 부추기고 있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네가 이상해진 건 저 벙어리가 네 옆을 졸졸 따라다닐 때쯤부터였지. 맞아, 그때쯤이었지. 네가 스스로의 눈을 망가뜨린 것도.”

제레미아가 홀린 듯이 조슈아에게 손을 뻗었다.

아델린의 옆에 서 있던 소년은 두려움이 가득한 까만 눈동자로 제게 뻗어진 손을 바라보았다.

타는 냄새가 났다.

어디선가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치솟는 불길 속에서, 나의 나약함으로 지키지 못했던 과거의 한때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깊게 생각하기 이전에 몸이 앞섰다.

나는 그대로 달려가서 제레미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다행히 늦지 않았다.

제레미아가 조슈아에게 해를 입히기 전에 그의 손목을 붙잡을 수 있었다.

“젠장, 누구야. 누가 감히 나를……!”

누군가 자신을 방해하자 제레미아는 투박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내가 나설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그토록 내 이름을 부르짖었지만 실제로 나타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건지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그는 잠깐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슈리엘?”

“오라버니, 그만하세요.”

그의 손목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속에 담아 두었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추해요.”

제레미아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의 눈 또한 이전보다 커졌다.

“뭐?”

“추하다고요. 남들 보는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세요?”

걷잡을 수 없이 번진 화마에 다들 신경이 팔려 있긴 하나 그렇다고 그들에게 듣는 귀가 없는 건 아니었다.

지나가다가 제레미아와 아델린의 대화를 들었을 것이다. 내가 쉽게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듯이.

“지금 본인 꼴을 보세요. 그 누가 당신을 고귀한 륀느의 아들이라고 생각할까요.”

나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방화라니. 마법 좀 쓸 줄 안다고 해서 제 능력을 뽐내기 급급한 불한당이나 할 법한 짓이네요.”

“……못 본 사이에 너 미쳤냐?”

제레미아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로 말했다.

“다쳐서 엘릭시아를 받게 되었다더니 그때 머리라도 다친 거야? 돌았어?”

시간을 되돌린 이후로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으니 제레미아는 아직까지도 날 순종적인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다.

언제든 쓰다가 버릴 수 있는 예쁘장한 인형. 가문의 말에 복종하는 충성스러운 번견.

그런 수식어가 어울리는 사람.

하지만 나는 자랐고, 더 이상 그날의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지금 본인의 행동이 가문에 폐가 된다는 걸 혼자만 모르는 것 같으니 제가 상기시켜 드리죠.”

“…….”

“반항하지 말고 고분고분 따라라. 오라버니가 항상 입에 달고 다니던 말 아니었던가요.”

나는 지난 나날을 곱씹으며 한마디, 한마디를 음미했다.

“모범이 되어도 모자랄 판에 훈육받은 적 없는 짐승처럼 아래위도 모르고 짖어 대는데 누가 당신의 말을 제대로 들어 줄까요.”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제레미아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잡히지 않은 다른 한 손을 들었다. 내 뺨을 내리칠 듯이 높게 치솟은 그 손을 보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제레미아와 눈을 마주한 채로 마법을 썼다.

“뭐, 뭐야.”

맞닿은 부분에 열기가 닿자 제레미아는 황급히 내 손을 쳐 내고 뒷걸음질 쳤다.

내가 마법을 쓸 줄 안다는 걸 모르는 그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제 손목과 나를 번갈아서 쳐다봤다.

“본인 처신부터 똑바로 하세요. 제 손으로 가지고 있는 모든 걸 잃고 싶지 않으면.”

나는 제레미아의 손목을 잡았던 손을 털어 냈다.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불쾌했다.

“너, 마법을 쓸 줄 알았던 거야?”

“마법이라니요. 갑자기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마법을 쓴 적이 없다는 듯 능청을 떨었다.

그런 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제레미아는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법을 쓰고 싶다고 그렇게 발악을 하더니 결국 해냈구나. 하필 나와 겹치는 화염 속성이라는 것이 영 내키지 않지만……. 그래 봤자 나와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별것 아닌 능력이겠지.”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한 제레미아는 언제 당황했냐는 듯이 곧바로 나를 깔봤다.

정말이지 제레미아다웠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도망을 친 거였군. 아니, 아니.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지.”

제레미아는 팔목을 매만지고서는 아델린을 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옅은 흥분이 담겨 있었다.

“들었지? 제 입으로 날 오라비라고 불렀어.”

“…….”

“이래 놓고 아니라고 발뺌할 셈이야?”

제레미아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제껏 분노했던 것과 달리 기세등등한 모습이었다.

“제 입으로 정체를 시인했으니 젠틸라 공작 또한 할 말이 없겠지. 자, 슈리엘. 어서 가자. 우리 집으로.”

우리 집이라니.

퍽 다정한 음성이었다.

이제 와서 오라비 흉내라도 내겠다는 걸까.

결국 황제와의 합방시키기 위해 동생을 찾는 것이 아니냐는 아델린의 비난을 의식하여 이리 구는 것일지도 몰랐다.

뒤늦게 사이좋은 남매 행세를 하려는 제레미아를 보고 있자니 역겨움이 치솟았다.

그는 내가 반항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건지 거리낌 없이 내게 손을 뻗었다.

그 손길을 피하려고 할 때였다. 아델린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제레미아 륀느. 아니, 륀느 공자.”

그녀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단번에 이목을 집중시킬 호소력이 있었다.

“공자와의 인연도 여기까지인 것 같군.”

“……그게 무슨 소리지, 아델린?”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이 나왔기 때문인지 제레미아의 목소리가 잘게 흔들렸다.

“차기 젠틸라 공작의 권한으로 명한다. 륀느 공자. 방화죄로 한 달간 근신에 처하고, 근신이 끝난 이후 평생 젠틸라 공작령 접근을 불허한다.”

눈앞에 대본이 있는 것처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정확한 어투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오늘 행동은 륀느가와 무관한, 오로지 네 개인행동으로 여겨 주지. 대신 네가 평생 이 땅을 밟을 일은 없을 거야.”

“아델린, 농담이 지나쳐.”

“하루빨리 너와의 인연을 정리했어야 했는데. 내가 어리석었어.”

아델린이 차기 젠틸라 공작을 운운했음에도 제레미아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 제레미아의 행동에 쓴웃음을 지은 아델린은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외쳤다.

“마법으로 일어난 화재다. 물을 길어 오는 것을 그만두고 흙으로 불을 덮어라. 작은 불길은 두꺼운 이불을 가져와서 저지하도록 하고, 저택으로 번지는 불길을 최우선으로 막아.”

정신없이 움직이던 하인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 아델린을 바라봤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도록. 꽃은 다시 심으면 되지만 선조부터 일궈 놓은 재산은 다르다.”

이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한때 명성을 떨친 화가였으나 스스로 시력을 잃고, 무능하다고 평가된 여자가 아니었다.

미래의 젠틸라 공작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초기 진압밖에 없으니 대지와 물 속성 마법사를 수소문하여 당장 데려오도록 해. 대금은 그쪽에서 원하는 금액의 두 배를 부르는 걸 잊지 말아.”

웅성거리던 하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아델린의 명령에 따랐다.

“그리고 화재가 진압되는 동안 방화범인 제레미아는 구금시키도록 하겠다.”

이전 명령을 따라 다들 재빨리 움직였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누가 먼저 나서서 제레미아를 붙잡지 않았다.

그걸 눈치챈 아델린이 서늘한 음성을 냈다.

“뭣들 하는 거지? 이자는 륀느가의 차남이 아니다. 감히 젠틸라가를 얕잡아 보고 방화를 저지른 한 남자일 뿐이지. 젠틸라 공작이 부재한 지금, 모든 권한은 일시적으로 내게 일임된다. 책임 또한 내가 짊어질 테니 다들 서둘러 움직여.”

그제야 하인들이 제레미아의 팔을 붙잡았다.

거칠게 반항한 제레미아는 그들의 구속을 풀고 아델린에게 달려갔다.

혹 아델린에게도 해를 입히려는 것일까.

제 성을 이기지 못하고 조슈아에게 손을 대려고 했던 것이 떠올라서 나는 바짝 긴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레미아는 손을 들지 않았다.

무릎을 꿇었다.

“아델린, 내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

“내가, 내가 미쳤었나 봐.”

제레미아는 내가 있다는 것도 잊고 아델린에게 빌었다.

“널 위해서라면 내 이름도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은 여전해. 그러니 그렇게 말하지 마. 응? 제발.”

“…….”

“내가 널 만나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어. 너도 알잖아. 내가 널 사랑한다는 사실을.”

제레미아가 저런 사람이었던가.

내 앞에서는 항상 권위적이고 오만한 오라비였다.

레미지오 또한 마찬가지긴 했지만, 레미지오가 날 무시했다면 제레미아는 날 직접 짓밟는 쪽이었다.

한 번도 짓밟힌 적 없는 사람처럼.

“제레미아.”

아델린이 제레미아를 불렀다.

이름을 불러 줬을 뿐인데 제레미아의 눈에는 희망이 가득 들어찼다.

“네가 사랑하는 건 내 그림이지 내가 아니잖아. 과거의 망령을 붙잡지 마.”

“아니, 나는…….”

“더 이상 내가 붓을 들 일은 없을 테니 네게 아쉬울 건 없겠지. 원한다면 예전에 그린 그림이라도 위로 삼아 보내 주도록 할게.”

제레미아의 기대와 달리 아델린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대신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동안 연을 맺은 마지막 예의로서 말이야.”

아델린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평생 그 그림이나 품에 안고 살아.”

그렇게 말한 그녀는 미련 없이 제레미아에게서 등을 보였다.

제레미아는 아델린의 옷자락이라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뻗어진 손은 아델린에게 닿지 않았다.

하인들이 다급히 달려와서 제레미아를 붙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워 줬다.

나는 제레미아가 반항할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본인의 비참한 처지를 받아들일 리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의 성격상 화원뿐만 아니라 성까지 불태우려고 들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닌 듯, 제레미아를 붙잡은 하인들 또한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제레미아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고만장했던 그는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하인들의 손에 질질 끌려갔다.

나는 그런 제레미아의 뒷모습을 시야에 담다가 아델린을 따라가서 진화 작업에 동참했다.

화재의 원인인 제레미아가 퇴장하고, 아델린의 지휘에 따라 절대 꺼지지 않을 것 같았던 불도 사그라졌다.

더불어 돈을 높게 부른 탓에 마법사가 금방 도착했다. 그들의 지원으로 더욱더 빠른 수습이 가능했다. 탐욕스럽게 날름거리던 불꽃이 꺼지고, 그 까만 흔적만이 자리를 잡았을 때는 먼동이 희붐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불길이 성까지 번질까 봐 노심초사했던 사람들은 잿더미를 보며 식은땀을 훔쳤다.

다들 고생한 서로의 어깨를 도닥이며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성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델린은 사용인들이 떠나고 나서도 자리에 남아서 혹 잔불이 있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그렇게 화원을 한 바퀴 돌고 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덕분에 빠르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지. 고생했어. 하다 만 얘기는 내일 하도록 하자꾸나.”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으나 밤새도록 진화에 나섰으니 지칠 만도 했다.

제 방에 들어가기 직전에 피곤함을 드러낸 아델린이 말했다.

“조슈아, 너도 들어가 보렴.”

더는 대화할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건지 휘휘 손을 저은 아델린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조슈아와 함께 복도를 거닐었다.

복도는 한산했다. 다들 뒤늦은 숙면을 취하러 갔으니 새벽이 되어도 깨지 못한 듯했다.

나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는 입을 열었다.

“내일 젠틸라 공녀 앞에서도 할 얘기지만, 본의 아니게 대화를 엿듣게 된 것은 사과할게.”

내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나는 앞만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어 말했다.

“사실 네게 할 말이 있어서 찾아간 거였어. 하지만 방금 전의 소란으로 너도 피곤할 테지.”

이 상태로 얘기를 나눠 봐야 피곤만 가중되었다.

오늘은 이만 시간도 늦었으니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조슈아가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어째서…….”

조슈아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한두 발자국 앞장서 있던 나는 그대로 멈춰 서서 소년을 돌아봤다.

“어째서 저를 감싸 줬나요?”

“…….”

“저는 그저 이 손만 멀쩡하면 되는데…….”

조슈아의 머리 위에는 25번째가 있었다.

부름을 받고 나타난 악마는 조슈아가 하고자 하는 말을 대신 해 주었다.

“조슈아.”

나지막하게 그 이름을 부르며 눈을 마주쳤다. 동시에 소년은 고개를 떨궜다.

처량한 하얀 머리통만이 보였다.

“그런 말 하지 마.”

나는 소년에게 다가가서 떨리는 두 손을 잡아 주었다.

내가 손을 잡자 소년은 흠칫 몸을 떨고서는 뒷걸음질 치려고 했다.

“씻, 씻어야 해요. 어서 씻어야 해요.”

극도로 불안해 보이는 소년이 주변을 둘러봤다.

소년의 손은 더럽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은 죄악으로 물든 손을 못 견뎌 했다.

“조슈아.”

나는 소년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덜덜 떨리는 그 손을 꽉 잡아 주었다.

“조슈아. 나를 봐.”

한쪽 무릎을 꿇어서 소년과 눈높이를 맞췄다.

손을 꽉 쥔 채로 거듭 그 이름을 불렀다.

소년은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제레미아를 막은 건 당연한 일이었어. 그가 감정적인 이유를 들먹이면서 널 때리는 건 부당한 일이고, 내게는 그를 막을 힘이 있었잖아.”

지금의 나는 어렸을 때의 나와 달랐다.

울면서 매달리고,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밖에 못 하는 내가 아니었다.

“그리고 너는 스스로를 살인자로 여기지만 네 죄는 하나밖에 없어.”

나는 조슈아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봤다. 경계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는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나약함.”

“…….”

“아마 네가 평생 짊어져야 할 죄악이겠지.”

강자는 선과 악을 가르지 않는다. 본인의 뜻이 곧 정의였으니.

반대로 약자가 선의를 지니게 되면 그것은 제 목을 찌를 칼날이 되어 돌아온다.

악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약자의 악의는 추하다.

“사실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어. 그 감정을 안고 가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닌 널 이용하려 드는 사람들이니까.”

약한 것은 아름답지 않다.

그저 처절하기만 하다.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죄책감은 약자의 것이고, 너는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죄악마저 너의 것으로 삼겠지.”

손의 떨림이 차차 잦아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만약 네가 체념하고,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바뀌는 건 없었을 거야. 하지만 너와 나는 만났고, 너는 내게 도움을 청했지.”

소년이 내게 거래를 제안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여기까지 오며 수많은 고뇌를 곱씹었던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를 도와줄게.”

조슈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동요하는 소년과 짧게 눈을 마주쳤다가 25번째를 올려다보았다.

“거래를 하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점이 있어요. 9번째 악마의 힘을 빌리면 엘릭시아를 파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내 물음에 25번째가 대답하려고 하던 차였다.

조슈아가 입을 열었다.

“이건 불공평한 거래예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어서 여기서 도망쳐요.”

“……뭐?”

“조슈아, 안 돼.”

악마가 황급히 조슈아를 저지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 이상 말하지 마. 말하지 않도록 나는 입을 다물 거야.”

“불공평한 거래라니? 무슨 의미니?”

조슈아는 필사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지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악마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술 모양이라도 읽어 내려고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몇 번이나 말하기를 시도하던 조슈아는 내게 잡힌 손을 빼내더니 옷 안에 있던 목걸이를 벗었다.

목걸이에는 열쇠가 걸려 있었다.

“열쇠?”

무슨 열쇠인가 싶어서 유심히 살펴보고 있자니 적잖이 당황한 악마가 입을 열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조슈아가 말했다.

“9번째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열쇠예요. 9번째 악마는 이곳에 있어요. 진실과 함께.”

조슈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경악한 악마가 이어서 말했다.

“조슈아! 그녀가 아니면 더는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없어! 너는 말을 못 하고, 나는 일반인의 눈에 보이지 않잖아. 게다가 우리에게 유일하게 호의적인 아델린, 그 여자는 너무 멀고 불확실한 미래를 기약해.”

“알아요. 하지만 속이고 싶지 않아요. 그건 동등한 거래가 아니잖아요.”

악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아예 눈을 감았다.

“진실을 알게 되면 9번째 악마를 찾길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어질 거예요. 차라리 그 전에 도망쳐요.”

악마는 체념한 듯, 조슈아가 하고픈 말을 소리 내어 주었다.

“문 너머에는 대체 무엇이 있는데?”

“말로만 설명해서는 믿기지 않을 거예요.”

조슈아는 그 진실이라는 걸 자세히 언급하는 것조차 꺼려 하는 듯했다.

“너는 내가 9번째 악마를 만나지 않고 이대로 도망치길 바라?”

“네.”

소년의 까만 눈동자에는 여전히 공포가 서려 있었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결정을 내렸다.

“진실을 확인하고 나서 결정을 내려도 늦지 않을까?”

“너무 끔찍해서 보게 된 걸 후회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내가 붙잡을 수 있는 희망은 이것밖에 없는걸.”

나는 그 모든 위험을 감내하고 여기까지 왔다. 뒤늦게 원인 모를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칠 리 없었다.

“조슈아, 9번째가 있는 곳으로 날 안내해 줘.”

내가 결심을 마치고 일어서자 조슈아가 고민 끝에 앞장서서 걸어갔다.

소년을 따라가니 서쪽 탑 꼭대기 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델린이 귀중한 것을 잔뜩 두었다고 한 곳이었다.

이미 이곳을 온 적이 있었던 나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악마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슈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넣었다. 열쇠가 딱 맞게 들어가자 조슈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괜찮아.”

소년의 작은 손등 위로 손을 얹히며 속삭였다. 나는 열쇠를 돌리기 전, 핏기 없이 창백한 소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주었다.

“어떠한 진실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

열쇠가 돌아가고, 굳게 잠겨 있던 문이 열렸다. 망설임 없이 거대한 문을 밀었다.

빛이 쏟아졌다.

작열하는 유월의 정오보다 더욱 눈부신 빛이었다.

한순간에 밝아진 터라 적응하기 위해 두 눈을 깜빡여야 했다.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거대한 홀이었다. 벽에는 빈틈없이 액자가 걸려 있었고, 몇인지 정확히 셀 수 없는 천사 조각상들이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다.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으니 조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악마는 저 문 너머에 있어요.”

소년은 한곳을 가리켰다.

나는 그 손가락을 따라 눈길을 미끄러뜨렸다.

그 끝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천사와 검은 드래곤으로 장식된 화려한 문. 제국의 황제를 상징하는 금빛 드래곤이 아닌 검은 드래곤이라는 점이 특이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것은 열 수 없는 문이었다.

진짜 문이 아닌 벽화였으니까.

“각하께서는 저 문 너머의 세계를 천국이라고 불러요.”

“천국?”

“천사들이 살기 때문에 천국이라고 불러요. 실제로는 불량품을 저 문을 통해 폐기 처분하는 거지만요. 장인이라고 해서 항상 완벽한 천사를 만들어 내는 건 아니거든요.”

“…….”

“각하께서는 불량품이 존재하기 때문에 완성품이 더욱 돋보인다고 하셨어요. 불량품의 존재 의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면서요.”

나는 이해를 할 수 없어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저곳에 9번째 악마가 있다고? 천사들 중 불량품을 버리는 곳이라고 했잖아. 아니, 그 이전에 실제로 갈 수 있는 곳인 거야?”

“갈 수 있어요. 이 문은 인간이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입구예요. 그리고 9번째 악마는…….”

조슈아가 말을 더듬었다.

소년이 머뭇거리자 그의 머리 위에 앉아 있던 악마가 대신 설명해 주었다.

“아주 오래전에 완벽한 천사를 만들기 위한 실험을 했어. 다양한 시도 끝에 사도들은 평범한 인간이라면 해낼 수 없는 발상을 했지.”

“…….”

“인간의 혼이 아닌 악마를 재료 삼아서 천사를 만들면 강하고 아름다운 결과물이 탄생하지 않을까. 그 과정에서 9번째가 희생되었어. 하지만 악마의 힘을 한낱 인간이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잖아.”

“폐기 처분당했군요.”

“맞아, 결국 완벽한 천사가 되지 못한 9번째는 저곳에 버려지게 되었지.”

나는 무기력해 보이는 악마를 짧게 바라보다가 중앙을 가로질렀다.

천국으로 통하는 문에 다가갔다.

“만약 9번째 악마를 만나게 되어도 그것이 온전한 형체를 유지하고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거네요.”

나도 모르게 기대하고 있었던 건지 생각보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것을 읽어 낸 듯 악마는 다급하게 대답했다.

“아니, 아니야. 악마는 인간처럼 육신과 혼을 나누는 것이 무의미해. 9번째를 가두고 있는 미술품만 부순다면 금방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영 쉽지 않아 보였다.

그냥 여기서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갈까.

애초에 불공정한 거래였다.

이제 와서 포기한다고 해도 악마는 아무 말 하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거대한 벽화 앞에 섰다. 저마다 다른 행동을 하고 있는 천사들을 훑어보다가 손을 뻗었다.

손가락으로 포효하는 검은 드래곤을 쓸어내렸다. 밋밋했다. 이것이 진짜 문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당장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때였다.

“참으로 아름답지 않느냐?”

맞닥뜨려서는 안 될 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화들짝 놀란 나는 빠르게 몸을 돌렸다.

젠틸라 공작이 황홀한 미소를 지으며 문 앞에 서 있었다.

“초대부터 만들어 온 아름다운 역사지. 이곳은 제국의 신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문 앞에 서 있던 젠틸라 공작은 느릿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곳에 손님이 찾아온 것은 오랜만이구나. 감상이 어떠냐?”

공작이 나타날 것을 예상하지 못한 건 나뿐만이 아닌 듯, 조슈아는 벌벌 떨었고 25번째는 바짝 긴장했다.

“오늘처럼 성을 돌아다니며 작품을 감상할 때는 절대 방해를 받지 않지만 너는 다르지. 이들 중 하나가 될 운명이 아니더냐.”

나는 젠틸라 공작을 빠르게 훑어봤다.

제레미아한테 정신이 팔려서 공작의 부재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더불어 다들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여서 그러려니 했는데 그는 화원이 전소되는 동안 작품을 감상했다고 태연하게 밝히고 있었다.

작품에 대한 칭찬을 바라는 것인지 공작은 기대 어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역겹군요.”

“역겹다니?”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쌓아 올린 영광이 아닙니까. 아무리 거창하게 표현한다 한들 그 사실은 변치 않으니 어찌 역겹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덤덤히 말하자 공작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다소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그는 금세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아직 우매하여 이 위대한 사명을 깨우치지 못했구나. 하긴, 비루한 인간의 육신에 갇혀 있으니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거겠지. 이해하마.”

멋모르는 어린아이의 실수를 감싸는 어른 같은 어조였다.

그는 나의 무지함을 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결국 죽는다. 질병, 사고, 살해 혹은 자살. 이 얼마나 미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단어더냐. 그것들에 비하면 천사가 되는 건 축복이라고 할 수 있지.”

“살인을 정당화하려는 헛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군요.”

“입이 거칠구나. 륀느 공작은 대체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건지. 쯧.”

젠틸라 공작이 혀를 차며 이어 말했다.

“하지만 괜찮다. 그림이 완성되면 그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게 될 테니. 할 수 있을 때 말을 많이 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

빙긋 미소 지은 젠틸라 공작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 순간 드는 위화감에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댔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건 없었다. 그동안 날 지켜 주던 검은 크로셀에게 넘겨준 지 오래였다.

대신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집요하고 적대적인 시선이었다.

이제껏 느껴졌던 것보다 더욱더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은 착각이 아니었다. 액자 속의 인물들이 모두 날 쳐다보고 있었다. 조각상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늘한 냉기가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머릿속에서는 위험 신호가 울렸다.

“크로……. 읍.”

이제 앞뒤 가릴 것 없었다.

천사가 있든 말든 상관없이 크로셀을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딱딱하고 차가운 손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반사적으로 상대의 명치를 팔꿈치로 쳤다. 보통 사람이라면 고통을 느끼고 손을 놔야 하지만 찍소리도 나지 않았다.

팔꿈치로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제야 내 입을 틀어막은 손이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하얗다는 걸 깨닫고 뒤편을 흘겨보았다.

조각상이었다. 조각상이 움직이고 있었다.

“악마를 불러 봤자 소용없다. 그것들은 이런 신성한 공간에 발을 내디딜 수 없지. 저 무능한 녀석은 나의 권속이기에 상관없지만 말이다.”

언급당한 25번째는 으르렁거렸고, 조슈아는 귀를 틀어막은 채로 움츠러들어 있었다.

애초에 그들에게 도움을 바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모습을 직접 목도하게 되니 현실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륀느 공작이 원하는 건 황손을 잉태할 준비를 마친 너의 육체뿐이니 나는 네 영혼을 갖고, 륀느는 네 육체를 갖고. 네가 엘릭시아를 받는 순간부터 정해진 수순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럴 수 없었다.

내 입을 막고 있는 조각상을 치우기 위해 팔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러나 곧바로 팔이 붙잡혔다.

작은 소년의 형체를 띤 두 개의 조각상이 양팔을 붙잡았다.

둘 중 하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문득 위화감이 느껴져서 이목구비를 자세히 훑어봤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누군가 깎아 내린 것처럼 묘하게 인상이 달라졌지만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 이전에 젠틸라 공작의 그림 모델로 팔려 갔던 소년이었다.

이전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을 한 소년은 석고로 만들어진 것처럼 하얀 몸뚱이로 나를 붙잡았다.

……설마.

조슈아가 두려워했던 것은 천사들이 폐기 처분당하는 문뿐만이 아니었다.

“슈리엘, 슈리엘. 네게는 따로 이름을 지어 줄 필요가 없겠구나. 이미 천사식으로 지어져 있으니 말이다. 아마 신의 불꽃인 대천사, 우리엘에서 따온 이름이겠지.”

나는 크게 소리 내어 웃는 젠틸라 공작을 노려봤다.

“애초에 륀느 공작은 널 인간이 아닌 제물로 봤기 때문에 그 이름을 주었나 보구나. 너는 네 이름을 따라갈 운명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헛소리라고 반박하고 싶은데 입을 단단히 틀어막고 있는 하얀 손 때문에 언어가 되지 못한 뭉개진 소리만이 나왔다.

“육체는 늙고, 혼은 스러지지만 미술품에 박제된 아름다움은 변치 않지.”

“…….”

“나와 함께 이 세상을 구원하는 거다. 영원불멸. 불사의 아름다움으로.”

더는 들을 가치조차 없는 말이었다.

나는 마력을 불어넣었다.

“지랄…….”

그리고 있는 힘껏 내 팔을 붙잡고 있는 천사상을 밀어냈다.

“지랄 말아.”

내 팔을 붙잡는 천사도, 내 입을 틀어막는 천사도 거칠게 쳐 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젠틸라 공작은 그런 나를 흥미롭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호오, 마법을 쓸 줄 알았더냐. 륀느는 그 사실을 모르는 눈치던데 알면 몹시 기뻐하겠구나. 륀느의 이름에 걸맞은 힘이니 말이다.”

시작은 륀느를 위해서였지만, 지금은 내가 일궈 낸 오롯한 나의 힘이었다.

이대로 젠틸라 공작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공작은 손가락을 부딪쳐 소리를 냈다.

“물론 륀느의 기쁨은 나의 그림이 완성된 후겠지만.”

조각상들이 단숨에 내게 달려들었다.

그것들은 내 다리를, 내 팔을, 내 목을 잡고 나를 밑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리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닿지 않았다.

“조슈아, 네게는 실망했다.”

날 옥죄는 순백의 손에 이끌려 가며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

그것들의 손가락 사이로 조슈아를 돌아보는 젠틸라 공작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네가 만든 이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으라는 의미에서 열쇠를 준 것인데 내 허락 없이 손님을 초대를 하다니. 열쇠는 도로 가져가도록 하마.”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날 이끄는 창백한 손길을 따라 몸뚱이가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아래로, 아래로…….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떠도 시야는 까맸고, 두 손과 다리는 움직일 수 없었다.

입에 무언가를 물렸는지 제대로 다물 수도 없었다.

크로셀, 크로셀, 크로셀.

나는 속으로 그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다.

그러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시야를 점령한 어둠처럼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구속구를 착용시킨 건지 마력을 운용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마법을 쓰려고 노력하고, 크로셀의 이름을 불렀는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또한.

그렇게 내가 살아 있는지조차 의심이 들 때쯤 문이 열리고,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재갈을 풀렴.”

아델린이었다.

뒤이어 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여나 자살할 위험이 있으니 재갈을 풀지 말라고 각하께서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자살을 할 만큼 여린 심성과 용기를 가졌다면 이미 예전에 죽었겠지.”

항상 그렇듯 신랄한 어투였다.

아델린의 얘기를 듣고 하녀가 재갈을 풀어 주었다.

오랫동안 입을 벌리고 있었는지 입가가 얼얼했다. 아직도 재갈을 물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색하게 입을 다물고 있자니 하녀는 방을 나가고, 아델린과 나만이 남았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화려한 가면이 번뜩인 듯했다.

“다시 한번 너와 산책을 나가고 싶었는데 이제는 다신 가지 못하겠구나.”

“…….”

“이번 봄은 꽃을 보기가 힘들겠지. 꽃 냄새는커녕 풀 냄새도 맡을 수 없게 되다니. 안타깝게 되었어.”

아델린은 퍽 안타깝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연민을 담은 그녀의 말에 나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저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죠?”

“못 본 새에 인내심이 없어졌구나. 하긴, 오랫동안 널 방치해 뒀지. 하필이면 폐하께서 갑작스럽게 방문하여 성 내부를 쥐 잡듯이 돌아다녀서 말이야.”

“……폐하께서요?”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아델린의 입 밖에서 나와 순간 넋을 놓았다.

“그래, 폐하께서. 마치 네가 이곳에 있다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널 가둔 그날 바로 찾아오시더구나. 하마터면 네가 이곳에 있다는 걸 걸릴 뻔했어.”

어째서 그가 아무 언질 없이 젠틸라 성을 방문했는지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제레미아가 일으킨 화재.

내가 젠틸라 성에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난 다섯 번의 삶에서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일 테니 그 남자는 내가 젠틸라 성에 있다는 걸 눈치챈 게 분명했다.

“직접적으로 널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모습이 꼭 널 찾으려는 것 같았지.”

아델린이 그때를 떠올리듯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광증으로 인한 이상 행동일 뿐인데 내가 확대 해석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 들리는 말로는 광증의 주기가 극도로 짧아졌다고 했으니 말이야.”

“…….”

“하지만 널 가두자마자 찾아오다니. 덕분에 한동안 정신이 없었단다. 그림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널 보낼 수 없었으니까.”

피로가 묻어 나오는 아델린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광증의 주기가 짧아졌다니요. 폐하의 광증은 낫지 않았던가요?”

진짜 샬롯이 돌아왔다.

그토록 사랑하는 그녀가 돌아왔으니 남자의 광증은 호전되어야 했다. 그런데 주기가 짧아졌다니.

아델린에게 물어보는 목소리가 떨렸다.

“아, 너는 한동안 외부인이 되었으니 모르겠구나.”

내가 동요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아델린은 덤덤히 말했다.

“네가 그렇게 사라지고 나서 다시 증세의 주기가 짧아졌단다.”

“하지만 샬롯이 돌아온 지 제법 긴 시간이 지났는걸요. 애초에 폐하께서 광증을 앓게 된 원인은 샬롯의 죽음이 아니던가요.”

“진정으로 샬롯을 사랑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 현실은 동화 속 결말처럼 키스로 모든 일이 해결되지 않으니까.”

그가 지난 삶을 기억하는 것과 관계가 있는 걸까. 아니, 그 이전에 남자는 정녕 광증을 앓고 있는 걸까.

주기가 짧아진 것치고는 멀쩡한 모습으로 날 마주했던 지난 시간이 떠올랐다.

그때는 샬롯이 돌아온 직후이니 상태가 썩 좋지 않아야 했는데 너무나 정상적이다 못해 치밀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도망친 나를 잡아 올 그날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한 것처럼 별장까지 마련해 놨으니 그의 모든 것이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요 며칠 사이에 피를 보기도 하고 원인 모를 폭발 사고까지 연달아 일어나서 골머리를 앓았지만, 네게는 다 쓸데없는 얘기구나. 폐하의 손에 남들이 다 죽어도 엘릭시아를 가진 너만은 끝까지 살아남을 테니까.”

“……대신 억지로 관계를 맺고 임신을 해야겠죠. 그 뒷얘기는 고리타분할 정도로 뻔하지만 받아들여야 할 거예요. 그 모든 것이 반려의 의무니까요.”

속이 역해졌다. 그 남자의 손에서 나만이 살아남을 거라는 말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

“이상하구나. 반려가 되지 못한 현실을 비관하여 자살한 사람이 바로 전대에 있었는데 말이야.”

“그분과 저를 비교할 생각이라면 집어치워요. 애초에 반려가 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생을 포기한 걸 당연히 여기는 당신네들이 더 이상한걸요.”

나는 사납게 일갈하며 아델린을 노려봤다.

“이런 역겨운 얘기는 길게 할 필요도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그래, 이런 시시한 수다를 떨기 위해 널 찾아온 것이 아니었지.”

한숨을 내쉰 아델린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바로 앞까지 온 그녀를 올려다봐야 했다.

“처음에는 그날 못다 한 얘기를 나누기 위해 널 만나려고 했단다. 그런데 그 얘기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그날 밤, 네가 어째서 조슈아를 만나러 왔는지 알 것 같으니까.”

25번째는 젠틸라 공작의 질문에 진실을 답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우리 사이에 이루어지지 않은 거래는 젠틸라 공작도, 아델린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께 들었어. 너 또한 악마를 권속으로 들였다는 걸.”

“…….”

“탐욕에 눈이 멀었던 거니?”

탐욕. 그 단어를 듣게 되니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탐욕에 눈이 멀어 악마를 권속으로 들인 건 내가 아닌 젠틸라 공작이었다.

그와 내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다는 걸 너무 잘 알 수 있었다.

“제가 어떤 심정으로 황궁을 벗어나고, 끝내 악마를 권속으로 들였는지. 당신같이 사람을 사람이 아닌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이들은 평생 모를 거예요.”

아델린은 조슈아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젠틸라 공작과 다르다고는 할 수 없었다.

조슈아가 그린 그림에 젠틸라 공작의 이름이 새겨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천사가 되는 동안 방관하지 않았던가.

그녀 또한 공범자였다.

“그래, 네가 보기에는 나도 같은 사람처럼 보이겠지.”

“같은 사람처럼 보이는 게 아닌 같은 사람이죠. 당신 또한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젠틸라 공작을 답습할 테니까요.”

그녀 또한 젠틸라였고, 젠틸라 공작이 손을 쓰지 못하듯 그녀는 앞을 보지 못한다.

참 반복되기 좋은 상황 아닌가.

웃음기를 머금으며 그녀를 비난했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아델린은 차분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너는 내 어머니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고 있니?”

젠틸라 공작 부인은 오래전에 병마로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타계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렇지만 젠틸라 공작 부인의 얘기가 나오기에는 대화 흐름이 뜬금없었기 때문에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아델린이 이어 말했다.

“보다 더 아름다운 미술품을 창조하고 싶다는 욕망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께서도 갖고 있었지. 그녀 또한 예술가였으니까.”

“…….”

“부모님은 제 자식이 본인들을 뛰어넘는 재능을 갖길 바라며 악마를 깨웠어. 죽은 자의 재능을 어느 정도 따라 할 수 있게 해 주는 악마를 말이야.”

그렇게 말한 아델린은 “미술품뿐만 아니라 자식마저 완벽하게 만들어 내려고 한 거지.”라고 중얼거렸다.

그 얘기를 듣고 있자니 25번째 악마가 한 말이 떠올랐다.

‘처음은 혈육이었지. 그러다가 만족하지 못하고 본인을 대신하여 완벽한 창작을 해낼 제물을 모았어.’

젠틸라 공작의 욕망은 조슈아에게만 닿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자신의 비극을 덤덤히 읊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다음은 명목상 후원을 하며 고아원에서 재능 있는 아이들을 선별해 왔지. 그 뒤 이야기는 네가 짐작하는 바와 같아.”

“…….”

“완벽에 가까워지고자 어머니를 제물로 바치고, 조슈아는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으며 아버지 대신 그림을 그리고 있지. 어머니의 한계를 뛰어넘은 그림을.”

“…….”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본 내가 어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 나는 스스로 눈을 찌르면서 고리를 끊은 거란다.”

아델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리는 것밖에 없는데 이제 그것마저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내 입장에서는 큰 희생을 치른 거지.”

말을 마치며 아델린이 몸을 낮춰서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제레미아가 폭주한 날, 어떤 마음으로 조슈아를 도와줬는지 몰라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려고 찾아왔어. 그림이 완성되고 나면 너는 더 이상 조슈아를 도와줬던 네가 아닐 테니까.”

제가 할 말을 다 끝내자마자 미련이 없다는 듯이 아델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나는 그녀가 일어나기 전에 입을 열었다.

“당장 살려 달라고 외치고 있는데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요. 그때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잖아요.”

“…….”

“제레미아가 당신을 공격하려 들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지켜 주려고 들었겠지만, 조슈아는 아니니까.”

내 말을 듣고서 아델린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젠틸라 공녀인 자신을 위해 줄 사람은 많지만, 일개 하인인 조슈아의 편은 없다는 걸.

“어째서 그날 밤에 조슈아를 찾아갔는지 알 것 같다고 하셨죠. 자세한 얘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네요.”

나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들이 제게 부탁했어요. 젠틸라 공작을 죽여 달라고.”

얘기를 듣지 못한 건지 충격을 받은 듯, 아델린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고리를 끊었다고 했죠. 하지만 조슈아는 제게 도움을 청했어요. 당신의 사정을 모두 알면서.”

조슈아는 아델린의 곁을 지켰으니 그녀가 무엇을 포기했는지 가장 잘 알고 이해할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내게 도움을 청했다.

“당장 아프고 고통스러운데 주위에 완벽한 제 편이 없으니까 끝내 저 같은 사람한테 손을 뻗었다고요.”

“…….”

“당신은 조슈아를 위했다고 했지만, 결국 헛된 기대와 불확실한 미래만 약속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 아닐까요.”

제 죄가 씻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거칠게 손을 닦아 내던 작은 손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건 다했어. 그렇다고 아버지까지 거스를 수는 없잖아.”

“정확히 말하면 당신은 가문을 외면할 수 없는 거겠죠.”

젠틸라 가문이 대대로 쌓아 온 업적과 전통. 그들이 만들어 낸 역사였다.

그것을 이어 가는 건 그들에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저는 한때 가문을 위해 죽었다고 알려진 이를 따라 하며 기꺼이 목숨을 걸었고, 제레미아는 가문을 위해 그런 저를 다시 사지로 끌고 가려고 하고 있으며 당신은 가문을 위해 방관했죠.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가문을 위해서 조슈아를 이용할지도 모르겠네요.”

“…….”

“젠틸라의 피를 이어받은 당신이 과연 완벽한 작품에 대한 열망을 버릴 수 있을까요?”

아델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떤 불합리한 일도 가문을 위한다는 명목이 붙으면 타당한 것처럼 느껴져요. 하지만 아델린, 당신을 알고 있잖아요. 가문을 위해서라는 변명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할 만큼 했다고 자위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변화를 두려워할 것 없어요. 공포란 형체가 없으니까.”

그림 모델로 캔버스 앞에 섰을 때 나는 손과 발이 묶인 것도 아닌데 꼼짝도 하지 못했다.

막연한 두려움 탓이었다.

막상 천을 풀어내고 앞을 보면 별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공포에 사로잡혀서 그 무엇도 하지 못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필사적으로 몸뚱이를 움직였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이 움직이자 당황한 아델린이 허리를 숙이며 내게 손을 뻗었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나는 재빨리 그녀가 쓰고 있는 가면의 가장자리를 이로 물었다. 그리고 뜯어내듯이 거칠게 그것을 벗겨 냈다.

그녀가 항상 쓰고 다녔던 가면이 형편없이 바닥을 나뒹굴고,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민낯을 볼 수 있었다.

“아델린, 네게는 충분한 힘이 있어. 그런데도 계속 외면할 생각이야?”

아델린의 감은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동안 가면에 가려져서 알 수 없었던 그녀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걸. 이제 와서 내가 조슈아를 자유롭게 해 주고 싶다고 해도…….”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한 그녀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는 희게 반짝이는 그 얼굴을 보며 말했다.

“방법이 없다고 생각할 때 좌절하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아.”

이 이상 나아질 것 없다고 믿었다면 우리는 바뀌지 않는다.

진창을 뒹굴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보다 더 나을 거라 믿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내게 생각이 있어. 하지만 내가 인생을 걸고 여기까지 왔듯이 너 또한 너의 모든 걸 걸어야 할 거야.”

지금껏 누려온 영광, 이름, 신념.

그녀를 이루고 있는 그 모든 것을 바쳐야 할 것이다.

“성공하면 네가 바라 왔던 걸 이룰 수 있으나 실패하면 그 모든 걸 잃게 되겠지. 그래도 나와 손을 잡겠어?”

가면을 쓰고 있을 때만 해도 지나치게 냉정하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얼굴에는 희미한 불안이 묻어났다.

“잃을 게 더 많은 제안을 하다니. 거절하라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구나. 그리고 지금 륀느 공녀로서 내게 말하는 거니?”

“륀느는 내가 오래전에 버린 이름이야. 지금 나는 륀느 공녀도, 젠틸라 공작의 그림 모델도 아닌 동등한 사람으로서 네게 제안하는 거야. 아델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젠틸라 공녀와 그림 모델이 아니었다.

나는 사람 대 사람으로서 그녀에게 청하고 있는 것이었다.

“잃을 것이 많다고 했지만 네 삶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지 스스로 잘 알겠지. 어떤 선택을 해야 미련이 남지 않을지 또한.”

“…….”

“기회는 이번뿐이야.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절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해.”

“……너는 참 사람을 무모하게 만드는구나. 슈리엘.”

슈리엘. 아델린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 주었다.

“그 어리고 약한 조슈아마저 용기를 냈는데 내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니.”

그렇게 말하며 아델린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듣기 위해.

“그러면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 볼까. 만약 너무 무모하다고 여겨지면 난 여기서 포기할 거야.”

“그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어.”

“무엇인데?”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이는 이야기가 있었다.

“원인 모를 폭발 사고. 범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거든. 범인을 만나 줬으면 해.”

“범인을 잡아 준다면 나야 고맙지. 안 그래도 제레미아가 한 번 휩쓸고 간 후라서 성채의 꼴이 처참한데 폭발까지 일어나게 돼서 골머리를 앓던 참이었거든.”

그 누가 겁 없이 젠틸라 성을 폭파하려고 들겠는가.

얘기를 듣자마자 범인이 누군지 대충 짐작 갔다.

나는 두 팔이 묶여 있는 탓에 볼 수 없지만 양 손등에 새겨진 문양을 떠올렸다.

날 찾고 있는 것은 황제뿐만이 아니었다.

* * *

“손도, 다리도 묶여서 갑갑한데 시야 정도는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어차피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젠틸라 공작이 아니라는 걸 다 알고 있는데 굳이 가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지나치게 조용한 공간에 내 목소리만이 울렸다. 그 어떤 근심도, 걱정도 찾아볼 수 없는 어투였다.

그 때문인지 작은 한숨 소리와 함께 25번째 악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눈은 일부러 가려 놓은 거야. 눈을 그리지 않은 미완성의 미술품을 보게 하는 것으로 천사가 완성되니까. 흔히들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하잖아. 그런 거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25번째 악마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델린이 다녀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림 모델로서의 일을 이행하게 된 나는 차분히 그 목소리를 들었다.

“결국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실패한 것이 되었네. 처음부터 벗어나리라고 생각한 내가 잘못된 거였어.”

“죄, 죄송해요. 제가 쓸데없는 짓을 해서. 다 제, 제 잘못이에요.”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는지 조슈아가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조슈아, 그림을 그려. 계약이잖아.”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소년에 비하면 너무나 평온했다.

“하지만…….”

“내버려 둬. 삶을 포기한 모양이지.”

내가 비관하다 못해 체념했다고 지레짐작한 25번째가 말했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조슈아. 그림을 그리는 거야.”

“…….”

“나와 같이.”

아델린이었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옅은 흥분을 담아낸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함께 그려 보자. 운명을 바꿀 마지막 그림을.”

* * *

제레미아는 목이 탔다.

젠틸라 성에 근신하게 된 지도 벌써 석 달째였다.

처음 아델린이 말한 근신 기간은 한 달이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 그는 근신 중이었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젠틸라 쪽에서 갖가지 이유를 들며 제레미아의 발목을 붙잡았다. 최근에는 그림이 완성되면 슈리엘과 같이 돌아가라는 말까지 들었다.

제 성격 같아서는 한바탕 뒤엎고 슈리엘을 데리고 수도로 돌아갔을 테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한 번 크게 난리를 쳤기 때문이었다.

제레미아는 반성을 약자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 와 자신이 한 일이 잘못되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조용히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델린. 그녀가 제게 등을 돌리던 모습이 아직까지도 어른거렸다.

만약 그날처럼 제 성질머리대로 행동했다가는 영원히 아델린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될까 봐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만 계속 흘렀다. 일단 명목상으로는 근신이다 보니 그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인 륀느 공작께 슈리엘과 자신의 근황이 제대로 전해졌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언제쯤 그림이 완성되냐고 물어봐도 하인들은 ‘곧’이라는 무신경한 답변만 반복해서 내뱉을 뿐이었다.

근신 기간이 여기서 한 번만 더 길어진다면 어떻게든 아델린을 직접 만나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매일 아델린만을 생각해서 미쳐 버린 건지 제레미아는 소리 없이 열린 문 사이로 아델린이 들어오는 걸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끔뻑였다.

“……아델린?”

제레미아는 황급히 두 눈을 비볐다. 거세게 눈을 비비고, 여러 번 두 눈을 깜빡여 봐도 눈앞 풍경은 변치 않았다.

아델린이었다.

“그림이 완성됐어. 오래 기다린 만큼 네가 제일 궁금해할 것 같더라고.”

그녀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용건을 꺼냈다.

“원한다면 완성작을 처음으로 보게 되는 영광을 주고 싶다는 얘기를 하러 왔어.”

“정말이야? 드디어……! 드디어 완성되었구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어서 가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제레미아가 아델린에게 다가갔다. 그러다가 근신 이후 첫 만남인 걸 깨닫고 흠칫했다.

아델린은 아무렇지 않게 대하고 있었지만 제레미아는 한동안 악몽을 꿀 정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었다.

언제 흥분했냐는 듯이 몸가짐을 단정히 한 제레미아가 아델린을 따라갔다.

둘 사이에 불편한 침묵이 맴돌았다. 아니, 불편하게 느끼는 건 제레미아뿐이었다.

제레미아는 어째서인지 복도에 있는 그림 속 인물들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입술을 달싹였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먼저 말을 건 것은 제레미아가 아닌 아델린이었다.

“내가 저번에 너에게 그림을 선물해 준다고 했지. 바로 떠날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해 두었어. 가기 전에 선물부터 확인할래?”

“어, 응. 그래.”

선물을 받지 않겠다고 말해야 하는데 당황해서 말이 잘못 나왔다.

제레미아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참 멍청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정하기에는 또 눈치가 보이는 터라 조용히 아델린을 따라가기만 했다.

제레미아는 갑작스러운 아델린의 등장으로 바짝 긴장하느라 아델린을 졸졸 따라다니던 벙어리 소년이 없다는 것도 뒤늦게 눈치챘다.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아델린은 곁에 아무도 두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그림을 보관한 방에 들어온 후였다.

기름 냄새가 심하게 났다.

제레미아는 그것을 물감 냄새라고 생각했다.

“네 확인이 먼저라고 생각해서 포장하지 않았어. 확인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이 있다면 말해. 명목상 선물이니 네 의사가 가장 중요하니까.”

제레미아는 그림을 훑어봤다.

개중 미공개작인 듯 처음 보는 그림 또한 있었다. 지금까지 공개된 아델린의 그림은 모두 꿰뚫고 있었다.

아델린 특유의 붓 터치를 자세히 감상하며 제레미아는 경외 어린 눈빛을 했다.

“제레미아.”

아델린이 제레미아를 불렀다. 넋을 놓고 있던 그는 깜짝 놀라며 아델린을 돌아봤다.

“예전에 날 사랑한다고 했던 고백, 아직 유효하니?”

“그럼, 당연하지.”

길게 고민할 것 없었다.

곧바로 긍정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증명해 줘.”

“증명? 어떻게?”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지만 제레미아는 잃어버린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눈이 멀었다.

그녀가 어떤 방법을 제시해도 고개를 끄덕일 생각이었다.

“여기 있는 그림을 모두 네 능력으로 불태우는 거야.”

“……뭐?”

제레미아는 본인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재차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너의 진심을 증명해 봐. 그림이 아닌 날 사랑한다면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 그림은 네 작품이잖아! 다신 똑같은 그림이 나올 수 없다고!”

제레미아는 오랫동안 아델린의 그림을 추종했다. 그런데 그걸 불태우라니.

믿을 수 없는 소리였다.

“하긴, 네겐 무리한 요구였겠구나. 그렇다면 말아.”

아델린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냉정한 목소리였다.

제레미아는 뜨끔했다.

여기서 물러서면 아델린과의 관계는 영원히 회복되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결국 그는 머뭇거리다가 그림에 손을 뻗었다.

* * *

“아델린, 늦었구나.”

고운 천으로 가려진 캔버스 앞에 서 있던 젠틸라 공작이 말했다.

정신을 잃은 슈리엘은 제단에 누워 있었고, 천사를 그리는 건 장인에게도 부담이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조슈아와 25번째 악마는 구석에서 쉬고 있었다.

“오는 길에 제레미아가 소란을 피웠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신경 쓰느라 늦었습니다.”

“그 녀석, 또 방종하게 능력을 쓴 게냐?”

이미 한 번 전적이 있어서 젠틸라 공작은 아무 의심 없이 쯧쯧 혀를 차고 말았다.

“불을 끄는 것은 아랫것들의 일이니 우리는 완성된 그림이나 느긋하게 감상하자꾸나.”

젠틸라 공작은 성이 불타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흥분 어린 얼굴로 장갑을 낄 뿐이었다.

“그보다 네가 그림에 이토록 신경을 쓰다니. 가면을 쓰게 된 이후로 처음이구나.”

“모델의 얼굴을 직접 만져 보니 흥미가 생기더군요. 아버지의 말씀대로 걸작이 완성된 것 같습니다.”

“역시 넌 내 딸이다.”

오랜만에 제 딸아이에게서 듣는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젠틸라 공작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진정한 명작은 그 과정에서부터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지. 너 또한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지 않았더냐.”

“…….”

“그래도 작업 중에 찾아가는 일은 앞으로 삼가도록 해라. 너는 앞이 보이지 않으니 그림에 먹힐 일이 없겠지만, 혹 그림에 불순물이 섞일 수 있으니 말이다.”

“예, 아버지.”

순종적인 대답이었다. 미소를 지우지 못한 젠틸라 공작은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슈리엘의 육체로 눈길을 옮겼다.

“육체마저 재료로 쓸 수 없어서 참으로 안타깝구나. 륀느에게는 빚이 있는 데다 엘릭시아를 갖고 있으니 여기서 더 욕심을 부리면 안 되는 거겠지.”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리고서는 젠틸라 공작은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캔버스를 가리고 있는 천에 손을 댔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천을 풀어 내렸다.

천이 바닥에 떨어지고, 기대감에 가득 찼던 젠틸라 공작의 얼굴은 단숨에 경악으로 얼룩졌다.

“이건 대체…….”

공작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이 명령한 대로 천사의 모습을 한 슈리엘이 그려져 있긴 했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악마의 목을 베어 징벌을 행하는 천사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악마의 얼굴이 그려져 있어야 할 곳에 자신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아니, 애초에 자신을 그리는 건 명령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던가.

젠틸라 공작이 충격으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 탓에 눈이 그려져 있지 않은 자신의 얼굴만 화풍이 다르다는 걸 눈치채기 전이었다.

두 개의 손이 그를 뒤에서 밀었다.

“아버지, 징벌을 받을 시간입니다.”

젠틸라 공작이 그림에 온 신경을 쏟는 동안 일어난 슈리엘과 이 순간만을 기다렸던 아델린이 함께 그를 그림 속으로 밀어 넣었다.

공작은 더는 피할 수 없이 그림 속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단말마의 비명조차 삼켜진 채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이제껏 자신이 제물로 삼았던 모델들과 마찬가지로 작품을 완성하는 마지막 재료가 되는 순간이었다.

* * *

젠틸라 공작이 쓰러지고, 나는 완성된 그림을 보았다.

실컷 떠들던 공작이 사라져서 주위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완성작을 보게 되는 건 슈리엘 너도 처음이겠구나. 어떠니, 마음에 드니?”

정적을 깬 건 아델린이었다.

그림을 그릴 때는 항상 눈을 가리고 있었고, 직접 볼 기회는 오지 않아서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아델린의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도로 입을 다물어야 했다.

불청객 탓이었다.

“뭐, 뭐야. 너희 미쳤어?”

제레미아였다.

뛰어왔는지 거친 숨을 내쉬며 제레미아가 충격받은 눈빛으로 나와 아델린을 보았다.

반응을 보아하니 젠틸라 공작의 최후를 지켜본 듯했다.

“하인들에게 붙잡혀 있느라 늦을 줄 알았는데 빨리 찾아왔구나. 그래도 때맞춰 왔어. 방금 그림이 완성되었거든.”

제레미아와 달리 아델린은 침착했다. 방금 전에 제 아비를 천사로 만든 사람 같지 않았다.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저건 그림이 아니야! 괴물이지! 분명 그림 속에서 손이 튀어나와서 젠틸라 공작을 끌어당겼다고!”

비명처럼 고함을 내지른 제레미아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이어 말했다.

“심지어 공작을 악마로 표현해? 이런 괴물 같은 그림이 용납될 거라고 생각해? 이 그림이 공개되면 젠틸라 공작가는 필시 제명될 거야.”

“상관없어. 제명하라고 해.”

“뭐?”

“내 이름을 버릴 각오로 저지른 짓이야. 수많은 희생 위에 고고하게 서 있는 우리가 과연 용서받을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해.”

아델린의 말을 들은 제레미아는 잠시 멍청한 얼굴을 하다가 이내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델린, 네가 그런 아랫것들이나 할 만한 나약한 소리를 하다니. 실망했어. 혹시 이러려고 나한테 불태우라고 시킨 거야? 성을 아예 다 태울 목적으로?”

아델린은 굳이 긍정하지 않았다.

침묵하는 그녀를 보며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며 미친 사람처럼 웃던 제레미아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 슈리엘 일단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자. 내가 멍청했지. 시간을 너무 지체했어.”

빠르게 중얼거린 제레미아가 내게 성큼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내 손목을 잡고 질질 끌고 갈 것 같은 기세였다.

“제가 왜요? 저는 간다고 한 적 없어요.”

“너마저 내 신경을 긁지 마! 어찌 됐든 그림이 완성되면 널 보내 준다고 약속했으니 약속은 지켜야지!”

“그 약속을 한 건 제가 아닌걸요.”

분노로 제레미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화를 참지 못한 제레미아는 언제나 그렇듯 날 공격했다.

“크로셀!”

그의 이름을 부르자 내 앞에 얇은 빙벽이 생겼다. 빙벽은 마법으로 만들어진 불길로부터 날 지켜 주며 녹아내렸다.

“아, 진짜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잖아!”

언제나처럼 크로셀이 투덜대면서 나타났다. 소년의 옆에는 은발 남자가 서 있었다.

둘 다 오랜만이었다.

“그래도 슬슬 부를 거라고 생각했어. 바깥에 천사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난리를 치더라.”

“불타는 성을 보면서 요란하게 박수 치고 좋아해서 인간들이 꼬마를 방화범으로 의심했지. 관련 없는 척하느라 힘들었어.”

싱글벙글 웃는 크로셀을 내려다보며 은발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나랑 멀찍이 떨어져 있었던 거야?”

“당연하지.”

“점잖은 척했지만 너도 좋아했잖아! 성이 더 잘 타도록 은근슬쩍 힘을 보탠 주제에!”

천사 때문에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던 악마들은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듯했다.

이 상황을 무척 즐기고 있었다.

나는 입꼬리를 매만졌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정겨워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그들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도록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서 나지막하게 크로셀을 불렀다.

“크로셀.”

“아, 맞아. 여기. 네가 내게 맡겼던 물건.”

“감사해요.”

검을 뽑아 들었다.

마력을 불어넣자 검이 붉게 달아올랐다.

“말도 안 돼. 황족이 아닌 이상 마법 속성은 하나만 가질 수 있는데…….”

제레미아는 갑작스러운 악마들의 등장과 함께 내가 다른 속성의 마법을 쓴 걸 보고 넋이 나가 있었다.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지 멍청히 서 있는 그에게 검을 휘둘렀다. 검날이 제레미아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먼저 공격했으니 이 정도는 정당방위겠죠.”

화들짝 놀란 제레미아가 뒷걸음질 쳤다.

그는 뺨에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져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는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저 그림이 공개되면 젠틸라가 제명당할 거라고 하셨죠.”

나는 제레미아 앞에 섰다.

“어차피 공개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러니 혹시라도 쓸데없는 말을 옮길 목격자만 없애면 되는 일 아닌가요.”

그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내가 의미한 바를 알아챈 제레미아는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을 했다.

이전과 달리 내가 저를 서슴없이 죽일 수 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내가, 내가 잘못 말했어. 못 본 척할 테니 한 번만 봐줘라. 응? 넌 내 동생이잖아. 지금은 내가 화가 나서 마법부터 썼지만 그동안 네게 손찌검 한 적 없었잖아.”

“…….”

“게다가 우리가 널 위해 얼마나 많은 걸 해 줬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 기억 안 나? 어머니가 널 입양하지 않았으면 넌 굶어 뒤지거나 얼어 뒤졌어.”

“……맞아요, 그동안의 은혜가 있는데 오라버니께 무자비하게 굴 수 없죠.”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렇다고 오라버니를 이대로 보내 주자니 사람의 입이 원체 가벼워서 믿음이 가지 않네요. 또한 이곳을 나가자마자 제가 젠틸라 성에 있다고 떠벌릴 걸 생각하면…….”

“말하지 않을게!”

“맨입으로요? 망자는 말이 없죠. 차라리 죽음으로 증명하는 건 어떨까요.”

검날을 제레미아의 목에 조금 더 가까이 붙였다. 제레미아가 바짝 얼어붙었다.

그 얼굴을 내려다보며 느릿하게 말했다.

“음, 사실 죽음 외에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에요.”

“뭐, 뭔데?”

나는 활짝 웃었다.

“제 발밑에서 짖어 봐요.”

어릴 적 제레미아를 떠올리며.

“개처럼.”

“……뭐?”

두 눈을 크게 뜬 제레미아가 멍하니 나를 올려다봤다.

목숨을 구걸하고 싶으면 자존심을 버리고 개처럼 짖어 봐라.

내가 한 말이라고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못하겠어요? 아니면 개보다 못한 저한테 빌려고 하니 자존심 상하세요?”

“……너 진짜 미쳤구나. 네가 감히 날……! 륀느인 나를……!”

말을 더듬거린 제레미아는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수치스러운 듯했다.

“농담이에요.”

제레미아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그 얼굴을 보았다.

“제가 설마 오라버니께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겠어요.”

“그렇다면…….”

“아델린이 오라버니의 마음을 받아 주지 않자 욱해서 폭주했다고 하세요. 충동적인 방화. 딱 좋네요. 아예 틀린 말도 아니고, 전적도 있으니 사람들은 쉽게 믿겠죠.”

“그러다가 파면당할 거야.”

“파면당하라고 하는 말이에요.”

“…….”

“륀느의 이름을 버린 오라버니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제레미아 륀느.

그의 삶은 모두 륀느이기에 굴러갈 수 있었다. 그만큼 제레미아의 륀느에 대한 자부심은 엄청 났다.

“본인 입으로 아델린을 위해 이름을 버릴 수 있다고 했잖아요. 고작 그 정도 각오로 사랑을 속삭였나요? 오라버니는 참으로 얄팍한 사랑을 가슴에 품고 계셨군요.”

“아니, 나는…….”

제레미아의 시선이 아델린에게로 옮겨졌다. 그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더 이상 좋아하지 않아.”

새삼스럽지도 않은 발언이었다. 나는 짧게 소리 내어 제레미아를 비웃었다.

“그래서 못 하겠어요? 차라리 죽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잘못 생각했나 봐요.”

제레미아를 겨누고 있던 검을 위협적으로 들었다. 움찔한 제레미아가 그제야 본인의 처지를 깨닫고 외쳤다.

“아, 아니야. 할게! 네가 말한 대로 할게!”

나는 그대로 검을 내리꽂았다.

바닥에.

“그리고 어머니, 아니. 륀느 공작께 전하세요.”

지린내가 풍겼다.

제 목을 칠 줄 알았는지 바짝 긴장하던 제레미아가 오줌을 지려서 나는 냄새였다.

“당신의 딸은 죽었으니 더는 찾지 말라고.”

“…….”

“사냥꾼에게 내린 추적 명령을 모두 철회하세요. 슈리엘 륀느는 죽어서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거예요.”

제레미아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바지 갈아입으셔야겠다. 냄새가 너무 심하네요.”

나는 가볍게 코를 틀어막았다.

제레미아가 수치심에 고개를 숙였다.

* * *

젠틸라 성이 붕괴됐다.

천문학적인 가치를 자랑하던 그림들은 거의 다 소실되었다.

석상은 타지 않았지만 누군가 일부러 깨부순 듯, 온전한 형체로 남아 있지 않았다. 앙상한 골조만이 남은 것이다.

“네가 떠나고 나면 이곳은 개방할 거야. 그동안 쌓아 올린 건 역사가 아닌 한 혈족의 치부라는 걸 모두가 알게 되겠지.”

서쪽 탑 꼭대기 층으로 들어가며 아델린이 말했다.

불길이 닿지 않아서 온전한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내부는 여전히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다들 비난할 테고, 어쩌면 제레미아의 말대로 제명될 수도 있겠지. 우린 항상 더러운 적이 없어야 하니까.”

“하지만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것이 두려워서 내버려 둔다면 썩지 않은 부분까지 썩어 가기 시작하겠지. 그래서 모든 위험을 짊어지고 이런 선택을 한 거잖아.”

나는 미소를 지으며 아델린을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셀.”

“응?”

9번째 악마가 있다는 문 너머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멈춰 섰다.

“줬다가 뺏는 것 같아서 죄송한 말이지만 제게 금화를 줄 수 있나요?”

“어차피 네 것이잖아. 편하게 말해.”

“감사해요.”

나는 크로셀에게서 금화를 받고서는 익숙한 얼굴 앞에 섰다.

나 이전에 그림 모델이 되었던 소년이었다.

그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의 방관이 널 지옥으로 인도했구나.”

내게는 충분한 돈이 있었다.

그날, 내가 일찍 나섰다면 소년에게 일어난 비극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미 지나간 일이건만 죄책감이 남아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편히 쉬렴.”

소년의 손아귀에 금화를 쥐여 주었다. 그리고 천국으로 통하는 문 앞에 섰다.

“정말 지금 당장 갈 거니?”

젠틸라 공작이 그렇게 된 지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서둘러 움직이는 내가 걱정된 건지 아델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충분히 쉬었으니 어서 움직여야지. 그리고 날 쫓는 사람이 찾아오기 전에 얼른 가야 해.”

“쫓는 사람?”

“곧 폐하께서 찾아올 거야.”

“……폐하께서? 그럴 리가.”

황제가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 것이냐는 뉘앙스였다. 설명하자면 길었기 때문에 나는 능청을 떨었다.

“우리 내기할까? 나는 오늘 중으로 오는 것에 걸게.”

아델린은 확신을 가지지 않는 이상 그렇게 빨리 오는 건 불가능하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얼떨결에 내기를 하고서는 마지막으로 확인 절차를 거쳤다.

우리의 목적은 천사가 된 9번째 악마를 구출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얘기만 들으면 간단했다.

악마의 기운이 느껴지는 미술품을 부수기만 하면 됐으니까.

9번째 악마를 깨운 후 어떻게 천국을 벗어나야 하는지 걱정하자, 입구가 유일한 것이지 출구는 장인이 만든 그림 전부라고 했다.

대신 이상한 곳에 떨어지면 안 되니 아델린은 출구가 될 그림을 지정해 주었다.

지정한 그림과 똑같이 생긴 그림 속으로 뛰어들면 된다고 했다.

일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풀리고 있었다.

“저 너머에 천사들이 살아가고 있어서 천국이라고 부른대요.”

문을 열기 전, 나는 뒤를 돌아서 두 악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불량품이어도 천사는 천사니 악마한테는 힘든 상대가 될 거예요. 저는 이제 제 몸 하나는 건사할 정도로 강해졌어요. 그러니 무리해서 따라오지 않아도 돼요.”

어쩌면 악마인 그들에게는 위험한 일이 될지도 몰랐다.

이번에도 그들을 떼어 놓고 가려고 하자 은발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너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마. 어떤 난관이 있다 하더라도 난 너와 함께할 거야.”

“맞아! 또 기다리기만 하라고? 너무 오랫동안 쉬었더니 몸이 쑤셔서 그렇게는 못 해.”

은발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크로셀이 고개를 치켜들며 외쳤다.

“그리고 넌 내, 주……, 주…….”

크로셀의 목청이 워낙 크다 보니 주변에 있던 이들이 모두 크로셀을 쳐다봤다.

시선을 느낀 소년은 말을 잇지 못했다.

“구경났어? 뭘 봐!”

괜히 바닥에 발길질을 한 소년을 보며 나는 소리 내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다 같이 가도록 해요.”

악마들과 동행하기로 결정을 내리자 25번째가 포르르 날아서 내 앞에 왔다.

“한창 화목한 와중에 미안한데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말할게. 나는 거래에 따라서 네 권속이 될 거야.”

“하지만 저는 거래를 승낙하지 않았잖아요.”

거래를 듣고 나서 어영부영 시간만 흘렀다. 실제로 그가 내 건 조건을 모두 이루긴 했지만 거래라서 한 것이 아니었다.

우연히 25번째와 내 목적이 일치했을 뿐이었다.

“사실 거래가 아닌 내 의지야. 너의 것이 되게 해 줘.”

나는 투명한 붉은 눈과 마주했다.

결연한 의지를 담고 있는 그것을 확인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를 권속으로 둔다는 건, 강해진다는 걸 의미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그의 힘을 거두어 가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25번째 악마, 사혈의 계승 ‘글라샬라볼라스’.]

악마를 권속으로 들이는 건 이제 네 번째였다.

[나의 주인이 될 자여. 너의 진정한 이름을 알려 줘.]

[슈리엘.]

[슈리엘, 나의 주인이시여. 피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존속하리라.]

글라샬라볼라스가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따끔거리는 통증과 함께 오른손에 낯선 문양이 떠올랐다.

이제는 놀랍지 않은 현상이었다.

“그러면 나도 너랑 같이…….”

글라샬라볼라스가 꼬리를 흔들며 내게 말했다. 나는 냉정하게 그것의 말을 끊었다.

“당신은 여기 있어요.”

단호한 내 말에 글라샬라볼라스의 귀가 축 처졌다. 바짝 세운 채로 빠르게 흔들리던 꼬리 또한 축 처졌다.

“조슈아와 아델린의 곁을 지켜 주세요. 도움이 필요하면 부를 테니 그때는 바로 달려오는 거예요. 알겠죠?”

“응.”

수긍한 글라샬라볼라스가 손등을 핥아 주었다. 본인의 상징이 있는 부분이었다.

“간지러워요.”

너무 강아지 같은 행동이라서 웃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잡고 뒤로 당겼다.

은발 남자였다.

“그새 친해진 건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서로뿐이었으니까요.”

썩 마음에 들지 않은 대답이었는지 남자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러다가 가볍게 나를 끌어안았다.

“그러고 보니 인사를 하지 않았더군.”

제레미아한테 신경을 쓰느라 반갑다는 얘기조차 하지 못했다.

조급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나는 귓가에 닿는 그의 나지막한 속삭임을 들었다.

“보고 싶었어. 그리고 두려웠어.”

널 잃을까 봐.

그렇게 중얼거린 남자는 내 머리에 쪼는 듯한 키스를 했다.

너무 오랜만이라 나는 어찌할 줄 몰랐다.

밀어내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으니 크로셀이 끼어들었다.

“낯부끄럽게 뭘 그런 걸 하냐!”

깜짝 놀라서 남자를 밀어냈다. 하지만 남자가 밀려나지 않아서 애를 쓰고 있는데 크로셀이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서 슬쩍 내 눈치를 봤다.

대체 왜 그러는지 몰라서 빤히 쳐다보자 얼굴을 살짝 붉힌 크로셀이 외쳤다.

“나, 나도 널 보고 싶었다고!”

“아.”

그제야 크로셀이 하고픈 얘기를 깨달았다.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저도요. 보고 싶었어요.”

남자에게서 겨우 벗어나서 크로셀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크로셀은 뭘 또 포옹까지 하냐며 질색했지만 말하는 것과 달리 날 밀어내지는 않았다.

“할 일을 끝내고 돌아온다면 나도 그렇게 격하게 반가워해 줘.”

아델린이 웃음기를 담은 채 말했다. 그 옆에 있던 조슈아가 슬쩍 손을 들었다.

“무사히 돌아오면 기쁘게 안아 줄 수 있어. 자, 조슈아. 이제 문을 열어 줘.”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나는 허리춤에 느껴지는 익숙한 무게감을 느끼며 조슈아를 앞장세웠다.

장인만이 문을 열 수 있었다.

조슈아는 단도로 손끝을 찔러서 피 한 방울을 검은 드래곤에게 먹이자 문이 열렸다.

문 너머는 하얬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반신반의하며 살짝 손가락으로 눌러 보자 손이 쑥 들어갔다.

“그러면 나중에 보자.”

무사히 9번째 악마를 찾아내고 돌아오리라는 믿음을 가지며 남자와 크로셀과 함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 아델린.”

한 발자국 안으로 들어갔을 때,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조심해야 할 거야.”

“조심하다니?”

“어쩌면 폐하께서는…….”

마지막 여정이 되길 바라며.

* * *

“황제 폐하를 뵙겠습니다.”

응접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델린이 황제, 라이문트에게 인사했다.

저번보다 훨씬 규모가 큰 화재를 진압하고, 젠틸라 공작의 혼수상태 소식을 알리자마자 황제가 찾아왔다.

공식적인 방문이었다.

슈리엘이 예측했듯이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아델린은 내기에서 졌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버지의 소식을 듣자마자 이리 달려오시다니. 만약 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아셨다면 폐하의 도량에 감복하셨을 겁니다.”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아델린은 무심하게 젠틸라 성을 방문한 라이문트에게 의례적인 인사를 했다.

“그녀는 어디에 있지?”

“그녀라니요?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린 듯한 미소를 지은 아델린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리고 말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라이문트의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들어야 했다.

그녀의 앞에 있는 황제는 광증을 앓고 있어서 언제 이상한 데로 튈지 몰랐다. 다른 이들을 상대할 때보다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샤샤.”

“…….”

“나의 반려 말이다.”

아델린의 입매가 일자로 굳었다.

그녀는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을 겨우 참아야 했다.

“하이넨 공녀라면 현재 황궁에 기거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하이넨 공녀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약혼 소식 이후 영 들리는 얘기가 없군요.”

아델린은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황제가 찾는 것이 샬롯이 아닌 슈리엘임을 알면서.

“귀환하고 나서 얼굴 몇 번 보여 줬다고 하는데, 샬롯이 환자인 걸 고려해도 너무 싸고도시는 거 아닙니까. 정말 살아 있는 게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입니다.”

아델린은 살짝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내며 비꼬았다.

애초에 아델린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음을 알고 있었던 라이문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건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추궁하지 않은 이유는 작품에 대한 젠틸라 공작의 집념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지.”

젠틸라 공작 하나만으로도 난처한데 그가 륀느 공작과 손을 잡고 있어서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바에 가만히 기다리는 것을 선택했던 라이문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삶은 너무 많은 변수가 생겼고,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슈리엘에게 엘릭시아를 건네준 것부터 시작하여 도망친 슈리엘이 얌전히 있지 않고 젠틸라 공작 앞에 선 것까지.

그 모든 일이 나비 효과가 되었다.

무려 젠틸라 공작이 혼수상태가 된 지금, 슈리엘이라는 변수를 감안하는 선에서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판을 다시 짜야 했다.

이제 남은 기회는 이번 한 번뿐.

다섯 번의 실패를 거듭하여 여기까지 왔으니 이번에는 기필코 사명을 이뤄 내야 했다.

“……그녀를 작품에 가두리라는 걸 알면서 묵인했다는 말씀입니까?”

“작품이 완성되면 내 곁으로 보내리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으니까.”

“작품이 완성되면 그림 모델은 육체만이 남은 껍데기가 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계실 텐데요.”

“상관없다. 살아만 있다면.”

그래, 살아만 있어 주면 되었다.

지난 삶에서 서늘한 시체가 되어 있던 슈리엘을 떠올린 라이문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다시 한번 물으마. 그녀는 어디에 있지?”

“…….”

“작품이 되었다는 헛소리는 믿지 않으마. 네가 그녀를 빼돌렸을 테니까.”

“손목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아버지가 인생을 비관하여 자살 시도를 하다가 혼수상태가 되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작품 활동을 제 삶처럼 여기시는 분이니 안타깝게 되었죠.”

“그건 젠틸라 공작이 해결책을 만들어 놓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지.”

라이문트의 시선이 아델린의 뒤편에 서 있던 조슈아에게로 향했다. 존재감 없이 우두커니 서 있던 조슈아는 그 서늘한 시선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제 아버지에 대해 관심이 많으셨군요.”

덤덤히 라이문트를 비꼬던 아델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기 싸움을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사람들이 신화라고 칭송하는 이야기에 대한 진실을 잘 아는 분이시니 그토록 듣고 싶어 하시는 대답을 해 드리도록 하지요.”

거짓말을 해 봐야 금세 들킬 것이었다. 아델린은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

“선조들이 대대로 천국이라 부르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의 존재에 대해서는 폐하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라이문트의 얼굴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델린의 이름을 읊조렸다.

“아델린 젠틸라. 지금 장난치는 건가?”

“제가 설마 위대하신 황제 폐하와 농담 따 먹기를 하겠습니까.”

라이문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았다. 잘 벼려진 검 끝이 아델린의 목을 향했다.

조금이라도 더 깊숙이 들어간다면 목을 찌를 수 있건만 아델린은 동요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 한때 검은 우산을 애지중지 여기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샬롯이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던가요.”

아델린은 젠틸라 공작에게 들었던 얘기를 떠올렸다.

황제가 웬 시골 촌구석의 폐허에서 우산을 갖고 돌아왔는데 그걸 또 소중히 여긴다는 얘기였다. 당시 아델린은 황제가 미쳐도 제대로 미쳐서 그런 기행을 벌인다고 생각했었다.

지금 황제는 지극히 정상이었다. 그런데 젠틸라인 자신한테 검부터 드는 것이 미쳤을 때와 무엇이 다르나 싶었다.

“제게 그 우산을 하사하시려는 겁니까? 안타깝게도 오늘 날씨가 화창하여 제게는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세 치 혀는 아비를 닮았구나.”

“아버지의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 혈족이니 닮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델린 젠틸라. 쓸데없는 기 싸움은 불필요하다고 본인 입으로 말했을 텐데.”

결국 칼끝이 아델린의 목을 살짝 찔렀다.

피가 났다. 그러나 아델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폐하께서는 결국 제게 문을 열라고 명령하고 싶은 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곳은 공간을 왜곡해서 만든 곳이니 현실과 시간이 어긋날 수밖에 없습니다. 뒤쫓는다 해도 그녀는 이미 밖으로 나갔을 가능성이 높지요.”

가만히 아델린의 말을 듣고 있던 라이문트는 검을 거두어 도로 검집에 넣었다.

“굳이 따라갈 필요가 있는가.”

라이문트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출구에서 기다리면 되는데.”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데가 아니니 금방 나올 것이었다.

어째서 그곳으로 가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으나 라이문트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을 선택했다.

“하지만 보아하니 내게 출구를 알려 주지 않을 것 같군. 그렇다면 장인이 그린 그림을 모두 압수하도록 하지. 젠틸라 성에 걸린 그림은 대부분 소실된 덕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겠어.”

“…….”

“전 대륙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그림을 되찾는 것 또한 그다지 오래 걸리진 않겠지.”

출구가 될 그림은 황제가 올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숨겨 놨다.

아델린은 황제가 절대 그림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으나 다른 이유로 초조해졌다.

잠깐 고민하던 아델린은 조슈아에게 명령했다.

“조슈아, 아버지의 마지막 그림을 가져오라고 해.”

젠틸라 공작의 마지막 그림이라고 했지만 그것이 자신과 아델린의 합작품이라는 걸 바로 눈치챈 조슈아가 바깥으로 나갔다.

라이문트는 웬일로 아델린이 협조적으로 구는 것인가 싶어서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슈아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거대한 캔버스를 든 하인들과 함께였다.

“어차피 폐하께 보여 드릴 생각이었으니 지금 여기서 아버지의 최후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하인들이 나가고, 조슈아는 꽁꽁 싸매어 있는 천을 풀었다.

그림이 모습을 드러내고, 라이문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을 감은 여자가 누워 있는 젠틸라 공작의 목을 자르려고 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눈을 감고 있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여자는 슈리엘이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무수히 많은 손이 젠틸라 공작의 몸뚱이를 먹어치울 듯이 잡아서 아래로 이끌고 있었다.

“저는 패륜을 저질렀습니다.”

공허하게 울리는 아델린의 목소리를 들으며 라이문트는 그림 앞에 섰다.

“절대 그려서는 안 될 그림을 그렸죠. 아마 다른 공작 가문에서 저를 제명시키자고 할 겁니다.”

“확실히 이 그림을 보게 되면 득달같이 달려들지도 모르겠군.”

“예, 그러니 자진해서 직위를 반납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 성을 개방하고, 선조들이 이제까지 저지른 죄를 알릴 생각입니다.”

라이문트는 손으로 그림 속 슈리엘의 얼굴을 더듬었다. 진짜 슈리엘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퍽 그녀가 마음에 들었나 보군. 그런 일까지 할 정도면.”

“올곧은 마음을 갖고 있는데 이끌릴 수밖에 없지요. 폐하께서는 한 번도 그녀에게 흔들린 적 없으십니까?”

슈리엘이 한동안 샬롯을 따라 했다고 하는데 두 사람은 전혀 닮지 않았다.

아델린이 알고 있는 샬롯은 말괄량이 소녀였다. 제멋대로에다가 독선적인 성향 또한 있는, 어찌 보면 전형적인 공녀.

마주칠 일이 딱히 없어서 몇 번 만난 적은 없었지만, 굳이 따지자면 살짝 신경질적인 면이 제레미아와 닮았다는 생각을 한 적 있었다.

그만큼 다른 성향을 가진 두 사람이었다.

라이문트가 샬롯을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슈리엘과 함께한 시간이 있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떠보았다.

“그녀에게 영향을 받은 건 너뿐만이 아니다. 나 또한 원래라면 하지 않을 선택까지 하게 되었으니.”

“그게 무슨…….”

라이문트는 아델린의 말을 끊었다.

“아델린 젠틸라. 선조들의 죄를 알린다고 했는데 그 뒷일을 감당할 수 있는가?”

“예, 가문의 치부를 밝혀도 황실에는 피해가 되지 않도록 할 겁니다. 오로지 젠틸라가 짊어져야 할 죄이니.”

“일이 결국 이렇게 흐르는 건가.”

못이 박힌 듯, 그림 속 슈리엘만을 빤히 쳐다보던 라이문트가 중얼거렸다.

“세대교체는 당연한 일이다. 현 륀느 공작만 하더라도 일족을 모두 살해한 전적이 있지. 직위를 반납하겠다는 말은 못 들은 걸로 하마.”

“…….”

“그리고 아직 황실이나 엘릭시아에 대한 진실을 완전히 알지 못한 모양이군.”

“아직 임시로 자리를 맡고 있는 터라 가끔 아버지께 들은 얘기가 다입니다.”

“그러면 정식으로 직위를 받은 이후에 다시 한번 얘기를 나누도록 하지. 네가 이처럼 부당한 일에 반할 수 있는 정의를 갖고 있다면 내게 협조할 것일 테니까.”

원래라면 그림이나 그려야 할 젠틸라 공작은 그가 사랑하는 그림 속에 박제되었고, 그것을 묵과하였던 아델린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라이문트는 올곧게 자신을 바라보던 금빛 눈동자를 떠올리게 되면 이 변화가 당연하겠다 싶다가도 허탈한 감정은 숨길 수 없었다.

“제가 어째서 눈을 찌른 줄 아십니까?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폐하의 목적이 무엇이기에 제가 협조하리라고 단정 지으시는 겁니까.”

아델린은 제 목소리가 불퉁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굳이 그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황제에게 협조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너희 공작 가문들이 망쳐 버린 모든 걸 바로잡을 생각이다. 그리고 내가 망쳐 버린 것 또한.”

라이문트는 그림 속 여자의 머리칼을 쓸어 보았다.

진회색.

항상 빨갛게 물들이고 다녀서 최근에야 알게 된 색이었다.

이렇게 보니 정말 붉은색이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았다.

거짓된 네 머리 색으로도, 한때 네 몸을 흥건히 적시던 색으로도.

라이문트는 느릿하게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손끝을 스치는 감각은 물감의 그것이었지만 이러고 있자니 부드럽게 감기던 슈리엘의 머리칼만이 떠올랐다.

너무나 늦게 그녀를 사랑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아니, 너무 늦게 사랑에 빠졌다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네 번이나 이 손으로 죽이고 나서야 사랑하게 되었으니 늦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라이문트에게 있어서 슈리엘은 예상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모든 걸 기억하고, 기억하면서도 제게 올곧은 사랑을 보였던 유일한 인물.

계획대로라면 다섯 번째 삶에서 사명을 끝낼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슈리엘은 항상 그렇듯이 라이문트의 예상을 벗어나 스스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미 네 차례나 보았던 그녀의 죽음이지만 그때는 의미가 달랐다.

그리하여 성공을 목전에 앞두고 그녀와 함께하고자 하는 갈망 하나로 또다시 시간을 되돌렸다.

비록 그녀는 몸도 마음도 망가졌으며 자신을 항상 올곧게 쳐다보던 눈동자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지만.

그 얼굴을 그리고 있자니 저가 선택한 길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고민은 잠깐이었다.

그녀에게 엘릭시아를 건네줌으로써 더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 주어진 기회는 없었다.

약한 마음을 갖게 되면 또 실패하고 말 것이었다. 일단 슈리엘을 완벽히 되찾는 것은 그가 짊어진 사명을 이루고 난 후였다.

그때가 된다면 그녀는 자신을 이해해 줄 테니까.

“그 모든 것에 그녀가 포함되지.”

“본인이 그걸 원치 않는다 해도 말입니까.”

“당장은 힘들더라도 끝내 날 이해하게 될 거다. 지금껏 항상 그래 왔으니까.”

다섯 번째 삶의 끝에서 슈리엘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낀 라이문트였으나 자신의 예감을 끝내 부정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샬롯과 약혼을 하셨는데 어찌…….”

“정녕 그녀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가?”

“…….”

“이 두 손으로 숨통을 끊어 놨다. 죽은 이가 살아나는 기적은 절대 일어나지 않지.”

설령 그것이 엘릭시아라고 하여도 죽은 이는 되살릴 수 없었다.

“폐하께선 다 알면서 약혼하신 겁니까?”

샬롯이 죽었다는 걸 알면서 지금까지 살아 돌아온 그녀를 사랑하는 척 연기했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약혼은 그저 형식적인 의례일 뿐이다. 크게 의미를 둘 필요가 없지.”

겨우 그림에 시선을 뗀 라이문트는 뒤를 돌아서 아델린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체되었군. 나머지 얘기는 네가 젠틸라 공작이 된다면 나누도록 하지. 그리고 전 젠틸라 공작의 마지막 유산은 내가 들고 가도록 하마.”

라이문트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서는 바깥으로 성큼 걸어갔다.

라이문트가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아델린은 슈리엘이 떠나기 전에 했던 말을 곱씹었다.

‘아델린, 조심해야 할 거야.’

‘어쩌면 폐하께서는…….’

미치지 않았을지도 몰라.

“‘미치지 않았다’라.”

라이문트가 떠나고 조슈아와 둘만 남은 아델린은 흠, 하고 콧숨을 내쉬었다.

슈리엘의 말을 듣고 난 후에 황제가 광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대화를 통해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황제는 사랑에 미쳐서 두 공작 가문한테 이용만 당하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샬롯.

“조슈아, 샬롯의 장례식을 다녀오자마자 아버지께서 하신 말을 들었지. 폐하께서 살롯을 찢어 죽였다는 그 말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눈썰미가 좋다. 게다가 젠틸라 공작은 자주 시체를 보고는 하니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곧바로 알아봤을 것이다.

‘하이넨이 결국 나와 비슷한 길을 걷게 되었구나.’

샬롯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젠틸라 공작이 했던 말이었다. 당시에는 관심이 없어서 흘려들었는데 생각해 보면 샬롯은 진짜 죽었다.

악마의 힘으로 죽은 자를 살릴 수는 없지만, 시체를 살아 있는 사람처럼 꾸미는 건 가능하니까.

“정말 하나같이 제대로 된 인간이 없구나.”

지금까지 일어난 일과 연관된 사람들을 쭉 머릿속으로 떠올리던 아델린은 제 아버지를 포함한 다섯 공작을 떠올리고서는 고개를 저었다.

방관만 하던 자신이 뭐라 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다른 공작들은 동정심이나 가책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일단 당장 해야 할 일은 허울뿐인 공작이라도 돼야 하는 것이겠지.”

아델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위를 포기하는 건 반려되었으니 젠틸라 공작이 되어 그 알량한 진실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돌아올 슈리엘을 따뜻하게 맞아 줄 준비 또한 해야 할 것이다.

그때까지도 아델린은 라이문트에게 협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