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빠졌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익숙한 통증이 온몸을 덮쳤다.
통증과 함께 한기가 도는 듯하여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낸 것 같았다. 입술 사이로 소리가 비집어 나왔다는 걸 인식한 순간 누군가 조심스럽게 내 뺨을 쓸어 주었다.
그리고 머리 위로 익숙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피곤할 텐데 조금 더 자.”
눈꺼풀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남자의 목소리만큼이나 다정한 온기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비처럼 연거푸 쏟아지는 온기에 잠기운이 싹 가심을 느끼며 살며시 눈을 떴다. 바로 코앞에 은발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여기는 어디죠?”
“위험한 곳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 집 주인은 우리가 평범한 사람인 줄 알아.”
“그렇군요.”
방금 자고 일어난 탓에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헛기침을 하니 남자가 내게 물 잔을 건네주었다.
“내가 때맞춰 나타나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 죽을 뻔했어.”
“그래서 부탁드린 거잖아요.”
“내가 아니었으면 누구도 해내지 못할, 불가능에 가까운 부탁이었지.”
“당신이라면 가능할 거라고 믿었어요.”
구타당한 것처럼 온몸이 쑤셨고, 한기가 돌았으며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다.
최악이었다.
손가락으로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대충 만져 보니 딱히 바위에 부딪치거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단순히 찬물에 오래 노출되어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것일까.
잠깐 지나갈 감기 정도로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따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잠시 잊고 있었던 남자가 멍하니 날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문제 있어요?”
“그냥, 예뻐서.”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그 작은 입술로 귀여운 말을 하니 예뻐 보일 수밖에 없지.”
“……제가 무슨 말을 했는데요?”
다시금 되짚어 봐도 딱히 도드라지게 이상한 말을 한 것 같지 않았다.
머리가 아파서 남자의 이해할 수 없는 발언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는 못하고 그냥 넘어가려는데 잔기침이 쏟아졌다.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채 기침을 쏟아 내고 있으니 남자가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두개골이 쪼개진 것처럼 아팠던 머리가 조금은 상쾌해진 기분이었다.
“감사해요. 당신에게는 계속 도움만 받게 되네요.”
창문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실내를 봤을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지만 평범한 마을의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한낮이었다.
“혹시 그 뒤로 하루가 지난 건가요?”
“그래.”
“오래 잤네요.”
시간이 흐르는 걸 잊고 푹 자본 적이 얼마 만일까.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며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꿈이 아니었다.
창문 속 풍경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도 그대로였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소리가 새어 나오는 듯해 다급하게 손바닥으로 입술을 틀어막았다.
“지금쯤이면…….”
목소리가 떨렸다.
긴장이 풀리니 웃음이 삐져나온 탓이었다.
자꾸 웃음소리가 섞여 들어가서 입꼬리를 매만진 후에 말을 이었다.
“조각난 제 육신이라도 찾기 위해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겠죠. 작은 오라버니 성격이라면 한나의 거짓 증언을 듣자마자 그녀의 뺨부터 갈겼을지도 몰라요.”
뺨만 갈겼으면 다행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격한 반응에 당황한 한나와 어떻게든 드래곤의 심장을 찾아내려는 제레미아.
상상만 해도 즐거운 광경이었다.
아마 륀느는 존재하지 않는 내 시체를 영원히 찾아다닐 것이었다. 신기루를 좇는 꼴이었다.
“한동안 추적은 따돌릴 수 있겠어요. 팔이나 다리 하나쯤은 희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둘 다 멀쩡하네요.”
손가락을 까딱여 봤다.
모두 멀쩡하게 붙어 있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마물한테 죽은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상당량의 혈액과 신체의 일부를 남겼겠지만, 나의 죽음을 의심하지 않을 한나가 있으니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걸 감안하면 한나가 짓밟아서 손끝에 난 상처 같은 건 별것 아니었다.
“넌 네 희생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여겨.”
“제가 온전히 가진 것이 저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어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얻기는커녕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나마저 잃어버리게 될 것이었다. 무참히 빼앗길 바에 차라리 내가 먼저 나서서 이용하는 것이 나았다.
“살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무엇이든 원하는 걸 얻고자 할 때는 응당한 희생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내게는 죽음이 필요했다.
목격자가 있는 완벽한 죽음이.
마리사는 냉정했고, 한스는 집요했다.
그들 중 내 죽음을 바라는 한나만큼 알맞은 목격자는 없었다.
사냥꾼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한나가 날 죽이고 싶어 한다는 건 쉬이 짐작하고 있었다. 알기 때문에 일부러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고, 부추겼다.
계속 자극했기 때문에 한나는 결국 참지 않고 날 위험한 마물과 접촉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나의 죽음을 확신하여 제 솔직한 마음을 떠들고, 벼랑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제는 내 죽음을 필사적으로 증언해 줄 거였다.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을 의심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한나가 보기에는 이제까지 일어난 일이 모두 그녀가 계획한 대로였으니까. 그러나 내가 거짓 죽음을 바라고 맞장구를 쳐 주었던 것뿐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녀는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다고 착각하고 있었으나 실제로 한나는 스스로를 좀먹고 있었다.
서로 속고 속이는 연기였다.
“사람의 욕망이란 참 단순해요.”
사람은 복잡하고 어렵지만 욕망은 간단하다.
“그만큼 덧없죠.”
모두 한 번씩 날 스쳐 지나갔던 욕망이었다.
나 또한 겪어 봤기 때문에 얼마나 헛된 것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직도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네 친구 일은…….”
“제겐 친구가 없어요.”
남자의 말을 중간에 끊어서 정정했다.
한나는 끝까지 날 친구라고 불렀지만 우리 둘 다 서로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허울밖에 없는 관계였다.
“유감이야.”
남자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그는 정확히 한나가 밟은 부분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대충 눈치챈 듯했다.
“그리고 내 이름은 ‘빌어먹을 악마’가 아니야.”
“하지만 제게 왔잖아요.”
‘때가 되면 내 이름을 불러 줘.’
헤어지기 직전에 남자가 한 말이었다.
“당신이 제 부름에 대답했으니 된 거 아닌가요?”
나는 그의 이름을 몰랐다.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없는 것이다.
물론 소원을 빌 때 항상 그러했듯이 왼쪽 손에 새겨 놓은 문양에 마력을 불어넣는 방법이 있었지만, 추락하는 도중 마력을 모으기 위해 집중할 만한 정신은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고양이가 죽었을 때 ‘빌어먹을 악마’라고 하니 자신을 부른 거냐고 했던 것이 떠오른 건 우연이나 마찬가지였다.
“애칭으로 나쁘지 않다고 보지만, 다시 한번 날 그렇게 부른다면 그 예쁜 입술을 뜯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릴지도 몰라.”
남자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손을 슬쩍 빼냈다.
그대로 몸을 슬금슬금 뒤로 내빼려고 하자 남자가 내 어깨를 잡고 뒤로 밀어서 침대에 눕혔다.
“항상 그런 충동에 시달리고는 하지만 실제로 다짜고짜 달려든 적은 없으니 편히 누워 있어.”
“잠이 깨서 누워 있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요.”
내 위로 올라탄 그는 앞머리를 살짝 옆으로 넘겨 주고서는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아직 아프잖아. 더는 고통스럽지 않도록 치료해 줄게.”
“……제가 자고 있을 때 할 수 있었잖아요.”
“곤히 자고 있는 사람을 덮치는 건 예의가 아니지.”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낮게 울리는 속삭임이 낯간지럽게 느껴져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지금 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면 내가 어째서 예의를 차리고 있는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을 텐데. 그게 참 아쉬워.”
지금 날 놀리려는 게 분명했다.
남자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순순히 밀려가기는커녕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뻔뻔해요.”
“악마에게는 그만한 칭찬이 없어.”
가볍게 대꾸한 남자는 진중하게 내 이마부터 시작하여 눈, 뺨, 코 그리고 목덜미까지 시선을 내려뜨렸다. 내 겉가죽이라도 들춰내서 살펴볼 듯한 시선은 집요했으나 그보다는 고통이 앞섰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다.
긴장이 풀리니 통증이 더욱 선명해졌다.
잠도 오지 않았고,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 남자임을 알고 있었다.
가만히 누워 있으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앗…….”
낯선 소녀의 음성이었다.
“죄송해요! 나중에 다시 올게요!”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사라진 소녀에 대해 의구심을 느꼈다.
“누구예요?”
“이 집 주인의 딸.”
남자가 덤덤하게 대답하면서 내 뺨에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닿자마자 쓰라렸다.
또 언제 다쳤는지 모를 상처였다.
긁어내는 듯한 고통을 뒤로하고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 소녀를 되짚어 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놀랄 이유가 없었다.
소녀의 눈에는 남자가 보일 리 없을 테니까.
다른 사람이 보기에 나는 그냥 누워 있는 중이었다.
“왜 놀라는 거죠?”
“내가 너를 잡아먹는 줄 알아서 놀란 게 아닐까.”
무심히 대꾸하는 남자를 밀어내고 벌떡 일어났다.
문을 열자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움찔하며 나를 돌아봤다.
“네 눈에는 저 남자가 보이니?”
“네? 네.”
이쪽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정확히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내 손가락을 따라서 눈길을 옮긴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떨결에 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녀는 남자를 또렷이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벌써 두 마리째잖아. 모습을 드러내는 게 무리는 아니지.”
두 마리.
두 마리의 악마가 내 권속이 되었다.
그리고 한 마리는 그가 몸보신 삼아 먹어 치워 사라졌다.
“먹었어요?”
“뭐?”
“먹었냐고요!”
저번과 마찬가지로 내가 권속으로 삼은 악마를 먹어 치워서 제 힘으로 거둬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이성이 뚝 끊겼다.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험악한 기류가 흐르자 눈치를 보던 소녀가 슬쩍 자리를 피했다. 못 볼 꼴을 보여 줬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 아. 이번에 권속이 된 48번째는 안 먹었어. 걱정 마.”
내게 멱살이 잡힌 채로 남자가 태연하게 말했다.
긴장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못 믿어요.”
“어떻게 해야 믿을 거지?”
“다 토해 내면 믿을게요.”
만약 가능하다면 토사물이라도 뒤질 것처럼 말했으나 남자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은 듯했다.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두 손을 들었다.
“정말 안 먹었어. 이제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거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니요?”
“말한 대로야. 상황이 바뀌어서 급하게 힘을 불릴 필요가 없어졌어. 48번째의 힘은 오롯이 네 것이야.”
“오롯이 제 것인데 어째서 당신의 힘만 강해진 것 같죠?”
“너의 힘은 곧 나의 힘이니까. 네가 제물을 바치지 않더라도 네 힘은 내게 영향을 끼쳐.”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강하게 잡고 있던 멱살을 놓았다.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화를 삭이고 있자니 조금씩 이성이 돌아왔다.
“그때, 일부러 날 떼어 놓은 거지?”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었다.
마리사와 제레미아가 중간에 끼어든다면 귀찮은 건 사실이지만 오로지 감시 역할을 목적으로 그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
두 눈으로 직접 목도한 카임의 최후는 머릿속에서 쉬이 잊혀지지 않았다.
결론만 보자면 그는 나를 이용하여 제 힘을 키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작은 불안은 날벌레처럼 꾸준히 번식하여 우글거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내 귓가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남자에게 속고 있다고 든 생각이 착각이 아니라 진짜 속고 있는 거라면?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요즘 내 생각보다 자주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한나를 따돌린 일만 하더라도 남자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여기 오기까지 자의든 타의든 남자의 힘을 자주 빌리게 되었다.
홀로 서기보다 기대는 것에 익숙해지면 스스로 걷는 법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그렇게 나 자신을 살라 먹는 것이다.
‘쓸모없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가치가 떨어지면 자연스럽게 버림받았다.
내 눈앞에 있는 악마 또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접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서 하겐티가 악마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혹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남자를 멀리 보낸 것이었다.
오른쪽 손등을 빤히 내려다봤다.
한때 낯선 문양이 새겨져 있었던 손등은 깨끗했다.
하겐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목소리 또한 들리지 않았고.
남자는 하겐티를 먹지 않았다고 했지만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으니 완벽히 믿을 수 없었다. 기절했던 탓인지 하겐티를 권속으로 삼았던 일마저 꿈이었던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당장 하겐티가 눈앞에 나타나야 이 지독한 괴리감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듯했다.
소원을 빌었을 때처럼 하겐티의 문양을 그려야 하나 하고 고민하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오랫동안 방황해서 쉬고 있을 거야. 일단 네 기력부터 회복한 후에 불러. 그러지 않으면 또 쓰러질 테니까.”
“하지만…….”
“영원히 내 품에 안겨 있을 생각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48번째를 불러도 괜찮아.”
남자의 말에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게 되었다.
내가 침묵하자 남자는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회복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거야. 48번째는 몰라도 53번째는 너와 속성이 잘 맞아서 네 힘의 밑거름이 되어 줬을 테니까.”
“제가 강해졌다는 의미인가요?”
“그래.”
처음에는 실감하지 못했으나 돌이켜보면 카임을 권속으로 들인 이후로 마법을 더 잘 쓸 수 있었다.
마른 수건을 짜내듯 마력을 쥐어짜야 불꽃을 피워 낼 수 있었던 내가 무려 마물을 두 마리나 잡았다.
단순히 검이 좋아서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 마물을 잡았을 때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최근 마물을 잡으면서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럼 무엇 하나. 아직 그에게 기대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이제 72마리 중 2마리를 권속으로 삼았을 뿐이니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 괜히 조바심이 났다.
“어딜 가는 거지?”
“아까 그 아이한테요. 저 때문에 깜짝 놀랐을 테니 사과해야죠. 또 감사의 인사도 해야 하고요.”
“조금 더 쉬고 난 후에 해도 될 거야.”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의식을 잃은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한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죽음을 가장하여 잠시 추적을 따돌렸으나 그것이 완벽하게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는 뜻은 아니었다.
날 뒤쫓는 것은 공작 가문만이 아니었으니까.
추적자가 따라붙었을 때 단서를 남기지 않았는지 확인해야 했다. 또한 처음에 보자마자 언성부터 높였으니 지금쯤 많이 당황해하고 있을 거였다.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 껄끄러운 감정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기척이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녀는 부엌에서 수프가 든 그릇을 든 채 서 있었다.
날 보자마자 움찔한 것 같았다.
“깨자마자 경황이 없어서 널 붙잡고 이상한 소리를 해서 미안해. 많이 놀랐지?”
“아니, 아니에요.”
소녀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수프를 끓였는데 혹시 드실 건지 물어보려고 찾아갔는데…… 제가 타이밍이 안 좋았어요.”
“그런 거 아냐.”
소녀가 이상한 오해를 하기 전에 단칼에 잘라 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나와 뒤따라온 남자를 번갈아 보던 소녀는 조심스럽게 그릇을 내밀며 제안했다.
“지금이라도 드실래요? 사실 혼자 먹기 쓸쓸했거든요. 오늘 아버지가 늦게 올 거라고 하시기도 했고요.”
식사 중의 대화만큼 자연스러운 것은 없었다.
그녀에게 물어볼 것이 있는 터라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수프를 한 입 먹기 무섭게 소녀가 먼저 내게 물었다.
다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역시 마물 짓이죠?”
“마물 짓이라니?”
“얼어붙은 호수 아래에 있는 마물이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 잠자코 있으니 소녀가 설명해 주었다.
“저번에 왔다 간 사냥꾼은 마물이 없다고 했지만 호수 아래에 마물이 존재하기 때문에 조사하러 온 거죠? 그래서 젖어 있었던 거잖아요.”
난처해졌다. 힐끔 남자를 보니 이 상황이 꽤 재미있는지 관조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언니는 마물 사냥꾼이잖아요.”
아니라고 하려고 했다.
그 전에 소녀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사냥꾼만 갖고 있다는 증표를 가지고 있는 걸 봤어요.”
무심결에 잘못 본 것이라고 말하려고 하다가 짐작 가는 것이 있어서 그대로 입을 닫았다. 벼랑 밑으로 떨어질 때 잡았던 것이 한나가 가진 증표였다.
그녀의 팔찌를 쥔 채로 추락하던 것이 뒤늦게 기억났다.
“부탁드릴게요. 저희 언니의 시체를 찾아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 테니 마물만이라도 잡아 주세요.”
소녀가 간절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대충 얘기를 듣자 하니 소녀는 날 마물 사냥꾼으로 오해했고, 호수 밑에 있는 존재할지도 모르는 마물을 수색하느라 젖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편히 쉴 장소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남자는 그녀가 오해하도록 내버려 둔 것 같았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어쩐지 생면부지의 타인이 누울 자리를 마련해 주었나 했나 싶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땅바닥에 기절해 있는 것이 나았다.
“그러니까 이름이?”
“메리예요.”
“그래, 메리. 일단 내가 마물 사냥꾼이라는 건 비밀이야.”
“왜요?”
“비밀 임무를 수행 중이거든.”
대충 얼버무렸다.
아직 어리기 때문인지 크게 의심하지 않고 메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물은…….”
메리가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마물을 해치우러 왔다.’라는 대답을 고대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나는 마물 사냥꾼이 아니었다. 마물 사냥꾼은커녕 그 사냥꾼에게 쫓기는 신세였다.
소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마물을 잡는 것은 내 일이 아니니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이 집을 떠난다고 해도 문제없었다. 비난은 들어도 괜히 꾸물대다가 잡히는 것보다 나았다.
나는 두 다리가 붙어 있는 한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입장이었다. 한가롭게 마물이나 잡을 시간이 없었다.
소녀의 시선을 피해서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내 차림새가 한눈에 보였다.
원래 입고 있던 옷이 홀딱 젖었기 때문인지 갈아입혀져 있었다. 평민들이 흔히 입는 옷은 특색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소매에는 채 지워지지 않은 얼룩이 살짝 묻어 있었고, 풀을 먹여 놓은 듯이 빳빳했다. 생활감이 느껴지는 건 옷뿐만이 아니었다.
방금 음식을 만든 탓인지 집 전체에 훈기가 돌며 포근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대충만 살펴봐도 내게 필요 이상으로 호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길을 안내해 줄 수 있을까?”
“네, 네!”
“확인만 할 거야. 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날의 기억이 흐릿하거든.”
소녀가 내게 이토록 호의적으로 구는 이유는 마물을 잡아 줄 거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고는 하나 나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 탓인지 뒤로 내빼기가 찝찝했다.
면전에서 안 된다고 말하기가 힘들었다.
잠깐, 아주 잠깐만 시간을 내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곳에 마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결정을 내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물 사냥꾼이 없다고 했으면 그곳에 마물은 없는 거였다.
하겐티가 특이한 경우여서 그렇지 보통 마물은 단안경을 쓰면 무조건 핵이 보여서 몸을 완전히 숨기기가 힘들었다.
메리가 무엇을 봤는지 모르겠으나 없는 마물을 만들어 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마물을 찾는 척만 하고 곧장 떠나는 것이 서로의 감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가장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되었다.
결정을 내리자마자 먹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건 메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바라던 일이 이뤄질 거라는 기대감 탓이리라.
식사를 마치고서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장갑을 끼고, 검을 챙겼다.
옷이 아직 다 마르지 않아서 마물 사냥꾼과 비슷한 복장을 갖추지 못했지만 내 허리춤에 있는 검 때문인지 메리는 한층 더 눈을 반짝이며 날 바라봤다.
부담스러운 시선을 한껏 받으며 소녀를 따라가니 커다란 빙판이 있었다.
물이 얼 만큼 추운 날씨도 아니건만 호수는 단단히 얼어붙어 있었다.
이상함을 느끼며 주변을 쭉 훑어보았다.
핵은 보이지 않았다.
“조심해요.”
메리를 멀찍이 세워 두고 호수에 가까이 다가갔다.
한쪽 무릎을 꿇어서 표면을 만져 봤다.
차가웠다.
진짜 얼음이었다.
주먹으로 두드려도 전혀 금이 가지 않았다.
마물의 낌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내 행동을 주시하는 메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대로 돌아가자고 하면 크게 실망할 것 같아서 빙판 위로 살짝 발을 내디뎌 봤다.
얼음이 어찌나 두꺼운지 단단하게 날 받쳐 주었다.
꽝꽝 얼어붙은 것을 제외하면 별달리 이상한 점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메리가 실망할 것이 뻔했지만 할 만큼 했으니 되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려는데 빙판의 색깔이 변하고 있었다.
당황하여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 상태로 굳어 버렸다.
발밑에는 금빛 드래곤이 있었다.
나를 직시하는 서늘한 금색 눈동자.
살기를 담은 시선은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인간의 모습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나를 모르는 냉혹한 신.
얼음판을 사이에 두고 거대한 드래곤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와 마주했던 그날처럼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않아서 무언가와 부딪쳤다.
빠르게 뒤를 돌아보니 은발 남자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지?”
“저기에…….”
도저히 다시 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남자와 눈을 마주한 채로 호수를 손가락질했다.
남자가 내 손끝을 따라서 눈길을 옮겼다.
살짝 인상을 찡그린 그는 덤덤한 어조로 내게 되물었다.
“무엇이 있는데?”
무엇이 있냐고 내게 묻기에는 드래곤의 존재감은 숨길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남자가 나를 놀리는 건가 싶어서 다시 호수를 봤다.
“……아뇨.”
“…….”
“아무것도 없어요.”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선명하게 그려져 있던 거대한 드래곤이 깔끔히 사라져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안색이 안 좋아. 뭘 본 거지?”
“아녜요. 그냥, 몸이 안 좋나 봐요.”
눈을 여러 번 깜빡이고 나서 다시 호수를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드래곤은 없었다.
남자의 시선이 따끔하게 내 뺨을 찔러 왔지만 차마 ‘드래곤’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 얼버무렸다.
혹시나 거대한 드래곤이 빙판을 깨고 나와서 포효할까 봐 얼어붙은 호수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다시 내 눈에 담긴 풍경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마물이 나올 기미 또한 전혀 없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 원인이 된 걸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순간 누군가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적의가 담긴 시선이었다.
불쾌한 냉기가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뜨끔하여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할 때였다.
남자가 손바닥으로 내 뺨을 감쌌다.
얼떨결에 그와 마주하게 되었다.
왜 그러냐는 듯이 쳐다봤다.
남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서 제 이마에 내 이마를 맞댔다.
남자의 붉은 눈동자가 빈틈없이 시야에 담겼다.
“지금 뭐 하는…….”
“그냥 아무 걱정하지 말고, 하루만이라도 좋으니 쉬어.”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오늘 당장 떠날 생각이었지?”
“…….”
“아직 아프잖아. 네가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
사지는 멀쩡히 붙어 있다고는 하나 통증을 호소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내 생각을 꿰뚫어 본 것처럼 정확히 맞히는 남자에게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그래도 당신이 치료해 줄 거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전부는 아니야. 네 모든 상처를 치료해 주려고 들었다가는 내 품에서 꿈쩍하지 못할 테니까.”
외상은 심각하지 않다고 응수하려는데 남자가 아까보다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리고 쳐다보지 마.”
경고였다.
그가 쳐다보지 말라는 것이 호수를 뜻하는 건지 아니면 내게 적의를 보였던 시선의 주인을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혹은 둘 다를 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뗐다.
“무엇이 있는데요?”
“너는 무엇을 보았는데?”
남자의 반문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아챈 남자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 둘 다 말하지 못했으니까 각자 원하는 대답을 들은 걸로 칠까?”
“……그전에 손부터 놓아주세요.”
남자의 눈을 피한 건 나였다.
내 말에 남자의 미소가 짙어졌다.
“뺨이 차가워. 이제 슬슬 돌아가자.”
“한 가지만 더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네 의견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날 노려보던 정체불명의 시선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호수 쪽을 보지 않도록 노력하며 멀리서 기다리고 있던 메리에게 다가갔다.
“메리,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얘기해 줄 수 있을까?”
메리가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그 얼굴을 보고선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네 이야기가 도움이 될 것 같아.”
“정말요?”
“그래.”
호수 밑에 있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이 드래곤이었다.
이대로 드래곤의 존재를 묻어 두고 떠나기에는 결국 내가 알아내고자 하는 것이 드래곤과 관련이 있었다.
어째서 드래곤이 호수 밑에 있고, 내 눈에 잠깐 보였다가 사라졌으며 메리의 언니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면 드래곤의 심장을 파괴할 방법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를 적대하던 시선의 주인의 정체 또한 의문이었지만 적어도 추적자는 아니라고 생각됐다.
추적자였다면 대놓고 적의를 내비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거였다.
게다가 상황이 당장 위험하게 돌아갔다면 남자가 가장 먼저 내게 떠나자고 했을 텐데 그러지 않는 걸 보니 아직 안전한 듯했다.
어느 정도 위험을 짊어지는 거야 당연했기 때문에 나는 물러서기보다는 부딪치기를 택했다.
“……여름이었어요.”
머뭇거리던 메리가 힘겹게 입술을 뗐다.
메리가 해 준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빙판이 녹지 않는 호수에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고, 마을 사람들은 근처에 다가가지 않았다. 그러던 여름날, 정신없이 공놀이를 하던 메리가 잘못 찬 공이 호수 한가운데로 굴러간 건 모두 우연이었다.
워낙 좋지 않은 얘기를 많이 들은 터라 두려워하는 메리를 보고서는 그녀의 언니인 릴리가 공을 주우러 갔다. 그리고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던 빙판 아래로 릴리의 발이 빠진 건, 공을 주운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밑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 언니가 점점 아래로 끌려갔어요. 저한테 살려 달라고 손을 뻗었는데…….”
메리가 고개를 푹 숙였다.
“도망쳤구나.”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메는지 목소리를 가다듬은 메리는 뒷얘기를 마저 해 주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메리가 어른들을 불러와 호수에 갔지만 릴리는 없었다.
공도 없었다.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릴리가 빠졌던 구멍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이 사라지고 목격자가 있는데 정작 빙판에는 흠집조차 나 있지 않으니 다들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몇몇 용기 있는 어른들이 릴리의 시체라도 찾기 위해 빙판 위로 올라갔지만 금세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그렇게 릴리는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사냥꾼 언니는 강해서 저 아래에 빠졌다가 살아 돌아왔잖아요. 혹시 언니의 시체를 보았나요?”
“아니,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그래요?”
숙인 고개를 들지 못하는 소녀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소녀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너는 내게 강하다고 했지만, 아마 많은 도움은 되지 못할 거야. 네 기대에 어긋날 수도 있어.”
“…….”
“하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할게.”
메리의 눈이 커졌다.
희망이 차오르는 걸 목격하게 되니 쓴 미소가 지어지려는 걸 억지로 삼켜야 했다.
“그렇다면 마물은…….”
“당장은 없는 것 같아. 만약 마물이 존재한다고 해도 지금 몸이 좋지 않아서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러니 내일 다시 오도록 하자.”
“……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 되었던 메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긍정했다.
그 뒤로 메리의 집으로 돌아가며 근처에 있는 큰 도시 이름을 물어봤다.
국외로 도피해야 한다는 계획은 여전했으니 구체적인 위치를 알 필요가 있었다. 얘기를 들어 보니 절벽에서 떨어진 이후로 하류까지 떠내려온 듯했다.
다섯 공작 중 하나인 젠틸라 공작이 다스리는 젠틸라 공작령 근처라는 것이 살짝 걸렸지만, 만약 제레미아가 당장 달려온다고 해도 하루 이틀 만에 찾아올 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위안이 되어 주었다.
안심이 되니 내 몸 상태를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었다.
남자의 말처럼 아무 걱정 하지 않고 쉴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하겐티를 불러내고, 무사히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낮잠을 잤다.
악몽은 더 이상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되어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나니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메리가 식사 준비를 하고 있기에 그녀를 도와서 셋이서 저녁을 차렸다. 한때 카페 주방에서 일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내 요리 솜씨는 썩 좋지 않았다.
단번에 이를 눈치챈 남자와 메리는 자연스럽게 내게 식칼을 쥐여 주었다. 음식을 만드는 동안 내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 것은 식재료를 써는 것뿐이었다.
딱히 우울해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놀라웠던 점이 한 가지 있었다면 좌천된 나와 달리 남자는 의외로 요리에 소질이 있다는 것이었다. 거의 모든 일을 본인이 도맡아 했다.
제대로 먹는 거라고는 내 피밖에 없어서 미각이 살아 있는지조차 의심되는 존재였다. 그런 남자가 너무 자연스럽게 주방에 스며드는 것이 의아해서 유심히 그를 관찰했다.
처음에는 마법이라도 사용한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했는데 오로지 본인 실력인 듯했다.
요리를 잘하는 악마라니.
미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이었다.
뭐든 잘해서 나쁠 것 없다고, 악마가 요리를 잘하는 덕분에 수월하게 식사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맛있는 음식 냄새가 실내를 가득 채우고, 메리가 많이 허기진 지 제 배를 쓰다듬었다.
잔뜩 들뜬 소녀의 앞에 음식을 가져다 놓으려고 할 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메리!”
“아빠! 늦게 오신다고 했잖아요.”
“메리 너를 오랫동안 집에 혼자 두려니 마음이 편치 않아 일찍 돌아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쏜살같이 달려간 메리가 중년 남자의 품에 안겼다.
메리의 아버지였다.
함박 미소를 지으며 메리를 안아 준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나를 마물 사냥꾼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인지 경계하는 기색은 숨길 수 없었다.
하긴, 마물과 관련이 없었다면 마물 사냥꾼에게 도와 달라고 할 일은 평생 없었을 거였다.
상대가 내 직업을 오해하고 있는 걸 고려한다면 전혀 이상하지 않은 반응이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하자 화답해 주었다.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마침 식전이었기 때문에 다 같이 앉아서 식사를 했다. 힐끔힐끔 나를 보던 메리의 아버지가 운을 띄웠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네, 신경 써 주신 덕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행입니다. 남편분께서 어찌나 걱정하시던지. 밤새도록 옆에서 간호를 하시던데, 제가 크게 도와드리지 못해 안타까울 정도였습니다.”
“네?”
“당연히 제가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당황한 나와 달리 옆에 있던 남자가 유하게 대꾸했다.
남편이라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대체 또 무슨 거짓말을 한 건가 싶어서 남자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자 그는 “음식이 입맛에 안 맞아? 잘 못 먹네.”라고 하며 입가를 훔쳐 주었다.
방금 전에 남편 소리를 들었기 때문인지 다정한 그의 행동이 연인 사이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한마디 하려다가 메리와 그녀의 아버지의 시선이 내게 쏠려 있는 걸 눈치채고 조용히 고개만 저었다.
상황이 상황인 터라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남자에게 따지기 뭣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내가 마물 사냥꾼이 아니라는 사실마저 들킬 수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됐다.
“동료 사냥꾼의 얘기를 듣고 따로 조사하러 나오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아뇨, 제 일인걸요. 그리고 실례가 되는 일이지만 하룻밤만 더 신세를 지게 될 것 같습니다.”
“실례라니요. 얼마든지 머물러도 괜찮습니다.”
메리와 마찬가지로 메리 아버지 또한 내게 옅은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들이 보내는 모든 호의의 원인이었다.
“사라진 딸아이가 쓰던 방이라서 좁을 텐데 한 분은 거실에 따로 잠자리를 마련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방은 충분히 넓고, 침대는 하나면 됩니다.”
내가 대답하기 전에 남자가 선수를 가로챘다.
동행하며 알게 된 점이 있다면 악마는 잠을 자지 않았다.
그러니 침대가 필요 없었다. 하지만 그가 한 말의 뉘앙스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일부러 그런 것이리라.
다시금 남자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강한 힘으로 찔렀건만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뻔뻔한 얼굴로 잘도 거짓말을 했다.
얼떨결에 공범자가 되긴 했지만 이 이상 말을 하는 것을 삼갈 필요를 느끼고는 입을 다물었다.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의 대화 소리가 간간이 실내를 울렸다.
메리의 아버지는 실질적으로 대화하고 싶은 상대가 나인 건지 계속 내 눈치를 봤다. 생사가 불명확한 딸과 관련 있으니 당연했다.
그가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 눈치챘지만 일부러 외면했다. 괜히 입만 열어 봤자 거짓말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날 어렵게 느끼고 있던 메리의 아버지는 한참이 지나서야 아주 조심스럽게 호수 밑에 마물이 진짜 존재하는지 물어봤다.
그 짧은 질문을 하는데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던 건지 떨리는 목소리를 숨길 수 없었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메리가 아버지를 많이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내 손이라도 간절히 잡았을 것 같은 그에게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이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내일 다시 호수를 조사해 볼 생각이라고 일축했다.
메리의 아버지는 본인이 너무 주제넘은 소리를 한 것 같다며 고개를 떨궜다.
죄책감을 안은 채 식사를 마치고, 소소한 얘기를 나누다가 메리는 잘 시간이 되어서 들어갔다. 나는 아직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뒤이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뒤따라오려는 남자를 억지로 앉히고서는 방에 들어가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낮잠을 잔 탓인지 정신이 멀쩡했다.
결국 상체를 일으켜서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서 내가 가진 소지품을 정리해 봤다. 마리사의 피리는 잃어버렸고, 대신 마물 사냥꾼의 증표를 갖게 되었다.
그 외에는 마가렛 씨가 준 검과 카타콤에서 가져온 단검이 내가 가진 그 모든 것이었다.
긴 여정을 떠나기에는 단출한 구성이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이마저도 감사하게 여겨야 했다.
한숨을 쉰 나는 먼저 베개 밑에 단검을 숨겼다. 그리고 장갑을 벗었다.
드래곤의 표식 대신 악마의 문양이 왼손을 뒤덮고 있었다.
손끝으로 긴 선을 더듬어 보았다.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지금은 가려져 있으나 진실은 따로 있었다.
망연히 손등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남자가 들어왔다.
“진짜 마물 사냥꾼이 될 셈인가?”
문이 닫히자마자 그가 내게 물었다.
그동안 티는 내지 않았으나 내가 메리에게 했던 말이 계속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라고 할 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거짓말을 시작한 건 제가 아니라 그쪽이에요.”
“상대가 먼저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주길래 맞장구친 것뿐이야.”
“저 또한 마찬가지예요. 당신이 벌여 놓은 일을 수습하는 것뿐이고, 이 이상 엮이지 않을 생각이에요.”
“엮이지 않을 생각인데 호수로 돌아가겠다고?”
“더 엮이지 않기 위해서예요.”
남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하니 남자는 할 말이 더 있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모두 나로부터 시작되었으니까 내 책임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없지.”
내게로 성큼 다가온 남자는 손을 뻗어서 헝클어진 내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경고는 이미 한 번 했으니 더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미인 듯했다.
하지만 아직 따져야 할 것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남자의 손을 떨쳐 냈다.
“그보다 제가 왜 당신과 부부가 돼 있는 거죠?”
“동행하는 사람이 있는 편이 추적자를 교란시킬 때 편할 거야. 그리고 우리 사이에 그보다 더 적절한 단어는 없잖아.”
전자는 동의하는 바이지만 후자는 아니었다.
내가 살짝 인상을 찡그리자 작게 소리 내어 웃은 남자가 속삭였다.
“신과 사제의 관계는 흔히들 연인과 비슷하다고 하지.”
반박하기 전에 그가 내 어깨를 잡고 살짝 뒤로 밀었다.
“그 작은 머리에 담고 있는 잡념들은 잠깐 지우고 쉬도록 해.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쉬겠어.”
그대로 베개에 머리를 맞댔다. 남자는 오늘의 일과는 여기서 끝이라는 듯이 내게 등을 보인 채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남자의 커다란 등을 시야에 담았다.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졸음이 쏟아지기는커녕 정신이 또렷해졌다. 남자는 내가 모든 걸 뒤로 한 채 편히 휴식하길 바랐으나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너, 더 이상 인간이 아니더라?’
문득 한나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상처를 치료했음에도 불구하고 손끝이 아려 오는 듯했다. 짓밟히고 있는 것처럼.
주먹을 꽉 쥐었다.
헛소리야, 헛소리야, 헛소리야.
그녀가 미쳐서 헛소리를 지껄인 것뿐이라고 되뇌고 있는데 꿈틀거리면서 기어 나온 벌레가 귓가에 속삭였다.
‘처음부터 우린 버림받고 이용당하다가 죽기 위해 태어난 거야.’
종식되었던 불안과 의심 그리고 두려움.
꺼지지 않은 불씨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귀를 틀어막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거짓된 목소리는 망령처럼 떠나질 않았다. 고요하기 때문에 더욱 또렷하게 들렸다.
입 안에 피비린내가 퍼졌다.
익숙하면서도 역겨운 느낌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굳어 버렸다.
멍하니 앞을 보았다. 남자는 묵묵히 내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이 속삭임을 전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귀를 짓이길 것처럼 틀어막던 손을 빼냈다.
그리고 베개 밑에 숨겨 놨던 단검을 슬쩍 꺼내고서는 머뭇거리다가 남자의 손을 내 뺨에 끌어당겼다.
살갗과 살갗이 닿자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손가락이 내 입술에 닿을 수 있도록 했다.
“아파요.”
한나의 목소리를 흉내 내던 벌레가 숨을 죽였다.
더는 시끄럽지 않았다.
어두운 방에서 내 목소리만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너무, 아파요.”
남자가 나를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가 내 입술을 바라봤다. 그는 못 박힌 듯, 시선을 입술에 고정한 채로 엄지로 내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압력이 가해지자 상처 부위가 쓰라렸다.
잠시 후 그가 손가락을 떼어 냈을 때는 엄지에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치료해 주세요.”
“…….”
“당신만이 할 수 있잖아요.”
내 의중을 파악하려는 것인지 남자가 가늘게 눈을 뜨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손을 빼냈다. 그 손을 다시 잡지 못하고 움찔거리고 있자니 남자가 제 손가락에 묻은 피를 핥았다.
한층 더 짙어진 붉은 눈동자로 여전히 내 입술을 바라보면서.
“같은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무슨 생각이지?”
“같지 않아요.”
남자는 한스를 꾀어내려고 했을 때 쓰던 방법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단호하게 말했다.
“같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침묵이 이어졌다.
남자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아직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대로 절 내버려 둘 건가요?”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부탁한다면 남자는 결국 속아 줄 수밖에 없다는 걸.
그는 이 모든 것이 함정인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내게 입을 맞추었다.
성마른 입맞춤이었다. 남자는 집요하게 내 아랫입술을 물고, 핥았다.
치료되지 않은 상처 부위가 아릿한 통증을 호소했다. 손가락으로 눌렀을 때보다 자극적인 감촉이었다.
남자의 목에 팔을 감았다. 살짝 힘을 주자 내 위로 몸을 바싹 붙였다. 그러면서 서로의 입술이 맞물렸다.
그의 혀가 침범했다.
곳곳이 유린당하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입 안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훑는 시선에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목 뒤에 칼날이 세워져 있는 것도 모르고 남자는 나를 먹어치울 듯이 게걸스럽게 입을 맞추는 중이었다.
단검을 높이 들고, 그대로 내리꽂았다.
남자의 뒷목에 검이 박혔다.
그러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숨이 찼다.
아교로 이어붙인 듯이 맞물린 입술은 떼어지지 않았다.
따라가기 벅찰 정도였지만 내 신경은 온통 남자의 목에 박아 넣은 단검에 쏠려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입술을 살짝 떼어 냈을 때 엉망으로 휘갈겨 쓴 것 같은 문장을 겨우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었다.
“……아프지 않아요?”
“충분히 자극적이야.”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탁했다.
“이만큼 오싹오싹한 키스를 한 적이 없어.”
내가 제 목에 칼을 꽂아 넣었다는 사실을 알면서 남자는 화사하게 웃었다.
진심으로 기쁜 듯한 얼굴이었다.
“네가 주는 건 고통마저 사랑의 증거가 되어 주지. 고통이란 건 기본적으로 살아 있어야 느낄 수 있으니까.”
그는 고통을 언급했으나 아픔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른 한 손으로 남자의 목덜미를 만졌다.
단검은 제대로 박혀 있었다.
목에 칼을 박은 채로 나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다시 입을 맞추었다.
숨이 벅차오름을 느끼며 손끝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이미 그의 여린 입 안을 태우려는 시도가 실패한 적이 있었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었다.
남자의 목을 더듬었다. 애무를 나누는 것처럼 다정한 손길도 아니었건만 그가 만족스러운 신음을 삼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전혀 고통과는 동떨어진 반응이었다.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걸 알면서도 미약한 가능성에 기대어 충동적으로 시도했건만 막상 결과물을 눈앞에 두니 참담했다.
내 손으로 악마를 죽일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악마가 인간의 손에 죽을 수 있는 존재인가?
무엇을 더 해야 할지 몰라서 헤매고 있는데 남자가 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따끔하게 아플 정도로 깨문 터라 화들짝 몸을 떨면서 남자를 올려다봤다.
“네가 먼저 요구했잖아.”
“…….”
“나한테 집중해.”
강압적인 어투였다.
날 따끔히 찔러 오는 시선은 열사 위에 누워서 맞는 태양빛과 같았다. 그는 지금 오랫동안 타는 듯한 목마름에 시달린 사람처럼 허겁지겁 나를 삼키려 들었다.
얼마나 내게 갈증을 느끼고 갈구하는지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었고, 외면해도 보이게 되었다.
단검을 뽑아냈다.
악마는 목에 칼을 박아도, 마법을 써도 죽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시도해 본 것이었다.
순순히 그와 입을 맞대는 대신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내가 거부 의사를 내비치자 남자는 입술을 떼어 냈다.
얼마나 오랫동안 탐한 건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은 거칠었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은 은사처럼 기다랗게 이어지다가 끊어졌다.
숨을 고르고 있자니 아직 내 위에서 내려오지 않은 남자가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비켜요.”
“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았어.”
“상관없어요.”
“피가 나잖아.”
차가운 손이 촉촉이 젖은 입가를 매만졌다.
방금 전의 입맞춤으로 인해 잔뜩 예민해져 있는 탓인지 반사적으로 움찔하자 남자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피를 뚝뚝 흘리면서 돌아다니는 건 한 입만 먹어 달라고 외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내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은 남자가 달래듯이 쓰다듬어 주었다.
“하던 것은 마저 해야 성에 차는 성격이라서 말이야.”
“……성에 찰 때까지 한다면 끝나지 않겠죠.”
고개를 비틀어서 그를 거부했다.
“그래, 영원히 이곳에서 너와 뒹굴고 있겠지.”
날 쓰다듬던 손길이 멈추었다.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순순히 시인한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가볍게 입을 맞추고서는 몸을 일으켰다.
남자가 일어나자마자 나는 가장 먼저 그의 뒷목을 확인했다.
목덜미는 깔끔했다. 무언가에 찔린 흔적이 전혀 없었다.
화상 자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단검을 찔렀던 부위를 손가락으로 훑어봤다.
생채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만지면 또 키스하고 싶어지잖아.”
남자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손끝을 통해 울림이 전해졌다.
“다시 한번 더 찔러 봐도 될까요?”
손톱을 세워서 긁어내렸다.
그가 낮게 웃는 것이 느껴졌다.
“검보다는 네 입술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제 검을 한 몸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입술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전혀 달라.”
말로는 당장이라도 남자의 목에 칼을 박을 것 같았으나 다시 한번 더 찌른다고 하여 변하는 건 없을 듯했다.
“실체가 보인다고 해도 악마를 죽일 수는 없네요.”
“날 죽일 생각이었나?”
“가능하다면 그럴 생각이었죠.”
그와 마음에도 없는 키스를 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가 방심했을 때 찌르면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죽이지는 못해도 상처 정도는 입힐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그에게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다는 사실만을 확신하게 되었다.
“최후의 키스라니. 낭만적인 생각을 했군.”
“정말 최후의 키스가 되었으면 더욱 좋았을 거예요.”
침대에서 벗어나서 단검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피조차 묻지 않은 단검은 창문을 투과한 달빛을 받아서 녹슨 자국이 더욱 도드라졌다.
“내가 죽이고 싶은 만큼 싫었어?”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감정적인 이유로 그의 목에 칼을 박지 않았다.
“언젠가 끊어질 인연이라면 스스로 끊어 낼 방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뿐이에요.”
“끊어지다니?”
남자는 불만스러운 듯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는 새삼스럽지 않은 끝맺음이었다.
이용 가치가 사라지면 버림받는다.
나의 죽음은 항상 그러했다.
“저는 당신을 몰라요.”
“…….”
“당신은 저를 알지만, 저는 당신은 모르죠. 아니, 당신은 저를 안다고 했지만 어쩌면 착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아니, 착각이 아니야.”
남자는 의심을 딱 잘라서 부정했다.
“나는 하나뿐인 내 것을 착각할 정도로 머저리가 아닌걸.”
차라리 버림받기 전에 먼저 그를 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내가 한심스러울 만큼 단호했다.
“너는 내가 가진 유일한 것이었고, 그랬기에 더욱 소중했어.”
속삭이는 목소리는 다정했다.
날 바라보는 눈빛 또한.
“내게는 너 하나뿐이었지만, 남들이 가진 것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하고 아름다웠지. 내겐 네가 전부야.”
서슴없이 부딪쳐 오는 붉은 눈동자가 익숙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머리가 아파 왔다. 이제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에 그대로 다리에 힘을 잃고 주저앉았다.
“쉬이, 괜찮아.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더는 얘기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아프지 마.”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와중에 남자가 나를 품에 안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두서없이 주절거리면서 입을 맞춰 왔다.
“네가 아파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아.”
참 서글픈 목소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마저도 익숙하다고 여기니 어김없이 깨질 듯한 통증이 나를 덮쳤다.
얼굴을 와락 구기고서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토할 것 같았다. 머리뿐만이 아니라 속까지 메스꺼워져서 힘겹게 숨을 게워 냈다.
이대로 있다가는 방금 전에 먹은 걸 모두 토할 것 같아서 고르게 숨을 내쉬도록 노력했다. 한참을 그렇게 남자의 품에 안긴 채로 있었다.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고 생각될 때쯤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어떤 중요한 대화를 나눴던 것 같은데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기억을 중간에 잘라 낸 것처럼 뚝뚝 끊겼다.
그것이 부자연스러워서 되짚어 보려고 하려니 남자가 다소 성급하게 내게 말을 걸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뭔데요?”
“만약 내가 아닌 이 나라의 황제가 네 눈앞에 있었어도 망설임 없이 목에 칼을 박았을 건가?”
나도 모르게 남자를 밀어냈다.
지난 기억들이 떠올랐다.
기회는 있었지만 항상 찌르지 못했던, 그 기억이.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침묵이 대답이 되어 준 것이라고 판단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니 창밖 풍경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익숙한 뒷모습이 그 풍경에 이질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메리?”
뒷모습밖에 볼 수 없지만 분명 메리였다.
메리가 어둠을 헤치고 어딘가로 다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소녀가 사라지는 방향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대로 쭉 나아가면 호수가 있었다.
졸린 듯이 눈을 비비며 방에 들어갔던 메리가 이렇게 늦은 시각에 어딘가로 달려가는 것도 모자라 호수가 있는 방향이라니.
이상했다. 메리가 사라지는 동안 메리 아버지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뒤쫓아 갈 거지?”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에도 얼어붙어 있는 호수와 실종된 아이, 유일한 목격자. 그리고 드래곤.
수상쩍은 일뿐이었다.
만약 호수에서 드래곤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이대로 메리를 외면했을 것이다. 그러나 드래곤이 계속 발목을 잡았다.
결국 남자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채로 대충 겉옷을 꿰어입었다.
어쩌면 내가 느낀 의문의 실마리를 오늘 밤에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메리가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갔다.
남자는 그런 내 뒤를 조용히 따랐다.
* * *
메리는 호수 근처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모두가 잠든 늦은 시각에 몰래 집을 나온 것이 수상했지만 그 외에도 이상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메리는 곧바로 호수로 가지 않고, 그 주위만 맴돌았다.
치마로 무언가를 감싸든 채였다.
기척을 죽이며 뒤를 밟았다. 계속 호수 근처만 맴돌 것 같던 메리가 드디어 걸음을 멈추고 쭈그려 앉았다.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무 뒤에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결국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메리.”
“아앗.”
내 부름에 화들짝 놀란 메리가 벌떡 일어나서 뒤를 돌아봤다.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의 발밑에 돌멩이가 와르르 쏟아졌다. 치마폭에 싸여 있던 물건이었다.
“뭐 하고 있었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급히 돌멩이를 발로 치운 메리가 수많은 돌멩이 앞에 섰다. 내게 돌멩이를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는 듯한데 다 헛수고였다.
어지러이 널브러진 돌멩이가 다 가려질 리 없었다.
“돌멩이네.”
“그러게요. 돌멩이가 참 많네요. 하하.”
어색한 웃음소리를 낸 소녀가 다시 한번 더 돌멩이를 차서 제 뒤쪽으로 보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소중히 품에 안고 달렸던 것이 돌멩이라니.
여전히 수상했다.
“늦은 밤에 뭘 하고 있었던 거니?”
“그냥, 산책이요.”
말을 살짝 더듬은 메리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내 눈치를 봤다. 그녀의 어깨 너머를 보니 널브러진 돌멩이 사이로 돌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 돌탑은 네가 쌓은 거야?”
“아, 아니요!”
“솔직하게 말해도 돼.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
안절부절못하는 메리를 스쳐 지나가서 그녀가 쌓아 올린 돌탑 위에 돌을 올려놨다.
다행히 돌멩이는 꼭대기에 무사히 얹어졌고, 나로 인해 소녀가 쌓아 올린 탑이 쓰러지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봐, 나도 돌탑을 쌓았잖아.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같이 돌탑을 쌓은 나 또한 벌을 받아야 돼.”
메리가 힐끔 남자의 눈치를 봤다.
내가 곁눈질하자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남자가 다가와서 돌멩이를 하나 더 얹어 놨다.
“우리 모두 같은 비밀을 공유한 거야. 아니, 돌탑은 원래 있었던 거니까 메리랑은 상관없으려나.”
머뭇거리던 메리는 돌탑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그제야 자신이 한 일임을 시인했다.
“……제가 했어요.”
“왜?”
“예전에 할머니가 소원을 담아서 돌탑을 쌓으면 이루어질 거라고 했거든요. 그 얘기가 떠올라서 쌓은 거예요. 이런 거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거든요.”
“맞아, 나도 그 얘기 알아. 메리는 무슨 소원을 빌었어?”
“언니가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소원이요.”
메리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제 손으로 구하지 못한 언니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언니는 이제 절 잡아갈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해?”
“아빠가 그랬어요. 이런 짓 하면 잡혀가니까 절대 하지 말라고요. 특히 신께 사명을 받은 사람 앞에서는 더더욱.”
살아 있는 신을 모시고 있는 만큼 제국은 엄격하게 타 종교를 박해했고, 규정된 의식 외의 행위는 철저히 금했다.
만약 금기를 범하면 이교도로 낙인찍혔다.
그건 어린아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돌탑을 쌓아 올리는 건 내가 어렸을 때나 봤던 의식이었다.
메리가 이토록 두려움에 떠는 이유가 이해됐다.
아직 어려서 구체적으로 왜 나쁜 일인지는 몰라도 주위 어른들이 단단히 주의를 주니 자신이 그릇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는 인지하고 있을 것이었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하자. 우리는 오늘 밤에 만나지 않은 거야.”
새끼손가락만 세워서 내밀자 고개를 끄덕인 메리가 손가락을 걸었다.
“자, 그러면 오늘은 이만하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 그리고 앞으로는 아빠 몰래 집을 나와서 돌탑 쌓는 건 자제하고.”
“왜요? 걸리면 잡혀가서요?”
“그보다는 밤늦게 돌아다니다가 해코지라도 당하면 아빠가 슬퍼하실 거잖아. 불안한 건 알지만, 그렇다고 메리가 잘못되면 슬퍼할 사람이 주위에 많아. 안 그래?”
“……네, 알겠어요.”
고개를 끄덕인 메리가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쌓아 놨던 돌탑을 무너뜨렸다. 공들여 쌓은 탑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언니.”
“응?”
“오는 길에 남자애 못 봤어요?”
“남자애?”
“제 또래의 남자애가 가끔 같이 돌탑을 쌓아 주거든요. 오늘은 안 보이길래 혹시 언니는 봤을까 해서요.”
“아니, 못 봤어.”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메리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먼저 돌아가 있으라고 말했다.
그러자 소녀가 의아해하며 나를 올려다봤다.
“언니는 안 가요?”
“밤 산책을 즐길까 싶어서. 먼저 들어가 있어.”
“헉, 설마 마물이 주위에 날뛰는 건 아니죠?”
내 변명을 듣고 메리가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근처에 마물이 진짜 날뛰고 있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이 시각에 바깥에 나오는 걸 보고 겁이 없는 줄 알았더니 아예 위기감이 없는 건 아닌 듯했다.
“마물은 없지만 있다고 해도 상관없어. 내가 누군지 알잖아.”
은근슬쩍 내가 마물 사냥꾼이라는 사실을 인지시키자 재빠르게 수긍한 메리를 보내고, 발에 채는 돌멩이를 주워들었다.
“쳐다보지 말라고 했죠.”
“…….”
“그것을 보면 무슨 일이 벌어지나요?”
가만히 내 말을 듣던 남자는 다른 어딘가를 쳐다봤다.
고개를 돌려서 남자의 눈길이 닿는 곳을 보았지만 짙은 어둠만이 남아 있었다.
“네가 더 이상 아프지 않으면 좋겠어.”
다시 남자를 보았을 때는 언제 다른 곳을 봤냐는 듯이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그래서 네가 강해지길 바라는 것이고. 너 또한 나와 마찬가지겠지.”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자.”
“어째서 마음을 바꾼 거죠?”
“널 지킬 자신이 있으니까.”
“저를 지킨다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면 어지간히 위험한가 봐요.”
“딱히 위험한 건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 위험할 수도 있지.”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잠깐 고민하다가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손이 맞닿자 그린 듯한 미소 지은 남자는 정중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호수에 당도할 수 있었다.
은반이 교교한 달빛을 받아서 창백하게 반짝였다.
낮보다 흑백의 대비가 강렬하게 느껴졌다.
칼날처럼 차가운 은빛 위로 또다시 발을 내디뎠다.
이번에는 남자와 함께였다.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나 드래곤은 보이지 않았다.
황금빛으로 물들던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실망하지 않고 주의 깊게 아래를 살피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혹시나 메리의 언니를 잡아당긴 의문의 존재가 튀어나올까 봐 다른 한 손은 이미 칼자루에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았던 것처럼 빙판은 매끄러웠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우스운 꼴로 나자빠질지 몰랐다.
아무렇지 않게 나아가는 남자에게 의지하며 호수의 중심까지 걸어가던 때였다.
순간 미끄러져서 휘청거렸다. 곧바로 중심을 잡으려는데 남자가 내 허리에 팔을 감고 잡아당겼다.
“감사…….”
말을 끝맺지 못했다.
거대한 그림자가 발밑을 지나갔다.
서늘한 냉기가 등골을 사납게 할퀴었다.
빠르게 눈으로 좇아보려고 했으나 물고기의 형체를 닮은 그것은 나타났을 때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방금 뭐였죠?”
“거대한 물고기로군.”
그림자는 평범한 물고기라고 할 수 없는 덩치였다.
그렇다고 하여 섣불리 마물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핵이 보이지 않았다.
드래곤에 이어서 거대한 물고기의 그림자.
접점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존재가 빙판 아래에 있었다.
정말 드래곤과 관련이 있는 게 맞을까, 내가 헛발을 짚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힘들면 돌아가도록 하자. 무리하지 마.”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어요.”
여기까지 왔는데 의문만 남은 채로 돌아갈 수 없었다.
여러 번 고민한 끝에 장갑을 벗겨 내고, 검을 꺼냈다.
마력을 불어넣자 응답하듯 붉게 달아오른 검 끝이 아래로 향하게 들었다.
단서를 얻을 수 있다면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할 수 있었다.
그것이 다소 과격한 방법이 된다 하더라도.
그대로 검을 내리꽂으려던 그때였다.
낮에 느꼈던 적의가 가득한 시선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하니 남자가 칼자루를 쥔 내 손등 위로 손을 겹치며 속삭였다.
“모르는 척하고 계속해.”
“…….”
“무시하면 제 성에 못 이겨서 모습을 드러낼 거야.”
“그쪽도 성격이 참 나쁘네요.”
“칭찬으로 알아듣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남자가 손을 치웠다.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면서 딱히 말리지 않는 걸 보니 생사가 오갈 정도로 위험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면 내 실력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거나.
남자의 저의가 무엇이 됐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내가 관심 가진 상대는 날 노려보는 의문의 인물이 아닌 호수 밑의 드래곤이었다.
칼자루를 다잡은 후 힘주어 빙판 위에 내리꽂았다.
마력을 담았기 때문인지 검은 미끄러지지 않고 ‘쿵!’ 하는 큰소리를 내며 찍혔다.
자세히 보니 유리처럼 매끈한 은반에 금이 가 있었다.
이 짓을 여러 번 반복하면 깨질 것 같았다.
금이 간 부분을 노려서 다시 한번 검을 내리꽂으려고 했다.
날 저지하는 낯선 외침만 아니었어도 그리했을 것이다.
“당장 거기서 나와!”
검을 높게 듦과 동시에 줄곧 나를 지켜보던 인물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내 앞에 나타났다. 메리의 또래쯤 돼 보이는, 옅은 푸른빛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이었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선명한 붉은 눈동자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악마네요.”
“그래, 악마지.”
이미 알고 있었는지 남자가 평이한 어조로 맞장구를 쳤다.
“벌써 넷이에요.”
“그렇게 말하니까 징글징글하군.”
“혹시 발밑에도 악마가 있나요? 그렇다면 다섯이에요.”
“발밑에는 아니야.”
잔뜩 열이 난 소년과 달리 남자와 나의 대화는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이 두 눈으로 본 악마만 벌써 네 마리고, 권속으로 삼은 것은 절반인 두 마리였다.
처음 카임을 만났을 때만 해도 당황스러웠는데 이제는 악마를 마주해도 사람을 만나는 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감상이 들었다.
새삼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악마를 만났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다지 강해진 것 같지도 않고, 드래곤의 심장과 관련하여 알아낸 것은 아직까지 없으니 하루라도 빨리 하겐티를 깨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소년이 사납게 일갈했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비참하게 삶을 끝내고 싶은 게 아니면 어서 나와.”
비참한 죽음이라고 하니 자연스럽게 메리의 언니가 떠올랐다.
악마는 호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이 아래에 무엇이 있죠?”
“알아서 뭐 하게.”
“저는 알아야만 해요.”
“내가 너에게 말해 줄 의무는 없어.”
살짝 인상을 구긴 소년이 불퉁하게 대꾸했다.
집요하게 따져 묻는다고 해도 원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빙판을 깨부숴서 직접 보겠다고 나서면 소년이 훼방을 놓을 것 같았다.
역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쪽은 이 악마한테 먹히지 않을 자신이 있나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제가 먼저 물었어요. 이 악마의 몸보신이 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요.”
“나를 아무거나 주워 먹는 악마 취급 하다니 너무한걸.”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가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그를 본체만체하며 소년을 똑바로 쳐다봤다.
잠깐 당황하던 소년은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미쳤다고 먹힐 것 같아?!”
“하긴 한 입에 잡아먹기에는 많이 크네요.”
소년은 나를 미친년 보듯이 바라봤다. 하지만 상관하지 않고 그에게 제안했다.
“제가 당신의 주인이 되어 줄게요.”
“뭐?”
“그쪽은 그저 제가 묻는 질문에 대답만 하면 돼요.”
최대한 덤덤하게 말하려고 애썼으나 말투에서 절박함이 묻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내 얘기를 듣고 나서 묘한 표정을 짓던 소년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너, 이미 두 마리나 권속으로 둔 것 같은데 악마를 권속으로 부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 줄 알아?”
“제가 강해질 수 있다는 뜻이죠.”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자 소년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해져야만 알 수 있는 진실이 있어요. 옆에 있는 악마는 제가 강하다는 걸 증명할 때까지 말해 주지 않을 것 같으니 당신을 통해서 얘기를 듣는 것이 빠르겠네요.”
72마리나 되는 악마의 뒤를 쫓을 바에 만나는 악마마다 붙잡고 드래곤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 빨랐다.
게다가 지금 눈앞에 있는 악마는 드래곤과 관련이 있는 듯하니 어렵지 않게 진실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어렵지는 않을 거예요. 호수 밑에 있는 존재에 대한 얘기니까.”
내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무엇을 봤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실재하지 않아.”
“무슨 말이죠?”
“호수에 접근한 불청객을 쫓아내기 위해 당사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걸 보여 줬을 뿐이야. 그게 무엇인지는 나도 몰라.”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낮에 봤던 드래곤을 다시 떠올려봤다.
온기라고는 한 점도 찾을 수 없었던 냉랭한 시선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렇다면 그림자는요?”
소년이 흠칫 몸을 떨며 슬쩍 빙판을 내려다봤다.
“저는 물고기의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그렇겠지. 저놈이 막았으니까.”
언제 움찔했냐는 듯이 소년이 남자를 가리켰다.
이곳에 오기 전에 날 지켜 주겠다더니 내 두려움으로부터 지켜 주겠다는 의미였다는 걸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네가 어떻게 그 악마들을 권속으로 삼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관심 없어. 내가 있을 곳은 여기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도 여기야.”
“…….”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계약자 또한 필요 없으니 어서 가.”
소년이 단호하게 내 제안을 거절했다.
‘계약’이라는 차선책까지 미리 봉쇄한 걸 보아하니 재고의 여지는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꿀게요.”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내 대답은 똑같아.”
“여름에 이곳에서 실종된 여자애는 어떻게 되었나요.”
살짝 짜증이 어렸던 소년의 표정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저를 쫓아내기 위해 가장 두려워하는 걸 보여 준 것처럼 당신이 죽였나요?”
소년은 침묵했다.
나는 그 침묵을 통해 확신을 얻었다.
“메리를 알고 있죠?”
메리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오늘처럼 늦은 시각에 돌탑을 쌓으러 왔다. 그런데 또래의 남자애가 돌탑을 같이 쌓아 준다고 하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호수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에 사는 메리가 정확한 신상을 모르는 것처럼 거리감이 느껴지게 표현했다는 건 외지인이라는 뜻이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자칫 이교도로 낙인찍힐 수 있는 행위에 참여해 주는, 외지에서 온 또래의 남자아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악마가 아닌 이상 상식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리고 내 추측은 소년의 반응으로 인해 확고해졌다.
“메리가 무슨 소원을 비는지 뻔히 알면서 곁을 지킨다는 게 뻔뻔하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아, 악마라는 족속은 이렇게 말하면 칭찬으로 알아들으려나.”
“나는……!”
흥분한 소년이 앞뒤 가리지 않고 서두를 꺼냈으나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는 하고픈 말 많아 보였다.
“돌아가.”
하지만 끝내 한 말은 내가 원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네게 해 줄 얘기는 없어.”
입술을 꽉 깨문 소년은 내게 등을 돌렸다.
“당신이 있을 곳도, 당신을 필요로 하는 곳도 이곳이라고 했는데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나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소년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착각하고 있어요. 당신은 무고한 사람을 살육하는 악마일 뿐이에요. 아무도 원치 않죠.”
“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말해!”
휙 몸을 돌린 그가 내게 달려들었다.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이 일품이었다.
“네,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내 멱살을 잡을 것처럼 구는 소년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니 얘기해 달라는 거예요.”
미소 짓는 나를 보고 난 후에야 본인이 너무 감정적으로 나섰음을 자각한 듯, 소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 전보다 훨씬 누그러져 있었다.
“……너랑 상관없잖아. 왜 이렇게 관심을 가지는 거야?”
호수 밑에 드래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으니 이제 용건은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눈앞에 있는 상대가 악마라는 사실까지 변하는 건 아니었다.
“엘릭시아를 알고 있죠. 당신네들이 현자의 돌이라고 부르는 것이요.”
“그걸 누가 몰라. 당장 눈앞에도 있잖아.”
소년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냥 알기만 하면서 허세를 부리시는 건가요?”
“무슨 소리야! 현자의 돌 때문에 내가 온갖 수모를 겪었는데 알기만 하고 있을 리 없잖아!”
“그러면 됐어요.”
이 악마는 굉장히 다혈질적인 성격인 듯했다.
생각하고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나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소년은 내가 또다시 치근덕댈 거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는지 아차 하면서 긴장했다.
물론 충분히 그럴 수 있지만 쓸데없이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메리가 걱정할지도 모르니 어서 돌아가도록 해요.”
“어?”
“안 갈 거예요?”
밀어붙일 대로 밀어붙여 놓고 순순히 물러나겠다는 나를 보고 소년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남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살짝 당황한 듯하다가 내가 손을 내미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손을 잡아 주었다.
“뭐야, 진짜 가는 거야?”
“네, 안녕히 계세요.”
마지막으로 소년에게 인사를 하고서는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소년이 무어라 구시렁대고 있는 듯한데 딱히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굳이 뒤돌아보지 않았다.
남자의 도움을 받아서 무사히 호수에서 벗어나서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주위는 여전히 어두웠다.
“메리에게 모습이 보이는 걸 보니 강한 악마인가 봐요.”
“아마 그 아이의 간절함을 먹고 자란 것이겠지.”
“아이러니하네요.”
언니가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 오히려 언니를 죽인 악마에게 도움을 주게 된다는 사실을 알면 메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도저히 어린아이 혼자 감당하기 힘든 현실일 것이다.
“악마는 질이 나빠요.”
“그러니 악마라고 불리는 거겠지.”
애초에 정의에 반하여 악이라고 불리는 자들이니 그들의 악행을 비난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이 없었다.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 그리 많이 걷지 않은 탓에 처음 봤을 때와 다를 바 없는, 호수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는 아직 권속을 부를 수 없는 상태인가요?”
근처에 있는 나무에 오른손을 댄 채로 묻자 예상했던 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하루 이틀로는 어림없어. 며칠은 푹 쉬는 게 좋을 거야. 몸도 마음도 지쳐 있다는 걸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잖아.”
남자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려서 나무에 몸을 기댔다.
악마, 드래곤, 마물.
거기다 호수 밑에 사는 거대한 물고기까지.
도저히 나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인외 존재들이 꼬리처럼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어쩌면 나마저 인간이 아닐 수 있었다.
저주와도 같았던 한나의 말을 곱씹으며 처음으로 남자에게 그 얘기를 꺼냈다.
그라면 아는 것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제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대체 누가 그딴 말을 지껄인 거지?”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가 사납게 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과민한 반응이었다.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꼭 화가 난 것 같았다.
“제가 마물이 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제게서 마물의 핵이 보인대요.”
“그때 그놈들의 머리통부터 짓이겨 놨어야 했어. 아니면 그 망할 쥐새끼를 입에 처넣었어야 조용히 있었을 텐데.”
굳이 누구인지 지목하지 않아도 쌍둥이 중 한 명이라는 걸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쌍둥이에게 달려가서 그들의 목덜미부터 잡아챌 것처럼 남자가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딱히 놀랍지 않다는 반응이네요.”
“그거야…….”
“제가 마물이 되어 간다는 걸 알고 있었나요?”
“마물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니야.”
“그러면요?”
대답하길 망설이던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었나 봐요.”
어쩌면 륀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목줄을 걸어 놓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마물의 핵이 보이는 단안경은 다섯 공작 가문에서 힘을 합쳐 만든 물건이었다. 실제로도 그들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마물을 물리치는 데 힘쓰고 있었다.
그러니 나 몰래 무슨 짓을 벌였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정말 내가 마물이 되어 가는 중이라면 마물의 핵이 보였던 것도 이해가 갔다. 마물이니까.
“아니, 넌 인간이야.”
“…….”
“의심할 것 없이 인간이야.”
남자는 그 모든 가능성을 부정했다.
“사냥꾼은 네가 갖고 있는 현자의 돌을 마물의 핵이라고 착각하여 헛소리를 한 것뿐이니 불안해하지 마.”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둘은 아예 다르잖아요. 아니, 애초에 드래곤의 심장과 마물의 핵이 비슷한 취급을 받는 것이 말이 안 돼요.”
“한쪽은 완전히 실패작이니 네 말대로 비슷한 취급받는 건 다른 한쪽한테 굉장히 모욕적이겠지.”
냉소적으로 중얼거린 남자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근본은 비슷하니 둘 다 특별한 방법을 써야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이겠지.”
단안경으로 마물의 핵뿐만 아니라 드래곤의 심장까지 볼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륀느는 차마 드래곤의 심장을 가진 내가 도망쳤다고 할 수 없으니 실험체를 운운하며 마물 사냥꾼에게 지시를 내린 걸까.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원인 모를 찝찝함은 남아 있었다.
“그 단안경이 문제였던 건가. 놈들은 별 같잖은 걸 만들어서…….”
남자는 험악하게 욕설을 퍼부었다.
잇새로 짓이겨지는 욕지거리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조금은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마물 사냥꾼을 피해 다녀야겠네요.”
처음 그들에게서 도망쳤을 때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일부러 마물이 많은 숲에 갔다.
그때 만약 마물 사냥꾼과 맞닥뜨렸다면 나는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또한 운이 좋아서 사냥꾼을 만나지 않은 거지, 그 후로 수도가 아닌 인적이 드문 곳으로만 몸을 숨겼다면 발각되는 건 단순히 시간문제였다.
손끝이 떨렸다. 사실상 그들은 어디로 도망치든 내 목을 조여 오고 있었다.
애초에 도망칠 곳은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떨리는 손을 숨기기 위해 주먹을 꽉 쥐고서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내 곁에 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되니 뿌리 깊은 불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제가 정말 악마를 부를 수 없는 상태인가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당신과 계약을 했다면 그를 부를 수 있었을까요.”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떨궜다.
“아니, 그 전에 의심하지 않았을 거예요.”
하겐티를 불러낼 수 없다는 그의 말을.
“계약을 하거나 진실을 감당할 힘이 있다는 걸 증명할 때까지 당신이 교묘히 제 앞길을 막아설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요.”
먹혀 버린 카임과 종적을 감춘 하겐티.
남자는 하겐티를 먹지 않았다고 했으나 완벽하게 믿을 수 없었다.
카임을 만난 이후로 두 마리의 악마를 더 만나게 되었지만 자꾸 같은 곳을 맴도는 기분이었다. 내게 길을 제시해 준 사람은 남자였다. 그리고 반대로 그 길을 막아서고 있는 사람 또한 그였다.
“악마와 마주쳐서 그에게 정보를 알아내려고 할 때마다 당신을 일일이 멀리 보내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에요.”
왼손을 뻗어서 남자의 뺨을 감쌌다.
손길은 피하지 않았으나 남자가 눈에 띄게 긴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가 하겐티를 불러낸다면 저의 권속이 되세요.”
“결과가 빤히 보이는 내기로군. 결국 불러내지 못하고 너만 아플 테니 추천하고 싶지 않아.”
“직접 부딪쳐 보기 전까지 모르는 일이죠.”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네.”
내가 단호히 긍정하자 남자는 쓴웃음을 삼켰다.
“제가 감당하지 못할 거라고 하셨죠.”
“…….”
“저는 쓰러져도 일어날 거고, 부서지면 그 부서진 조각을 긁어모아서 앞으로 갈 거예요. 그러니 과보호하지 않아도 돼요.”
‘처음부터 우린 버림받고 이용당하다가 죽기 위해 태어난 거야.’
숨어 있던 벌레들이 다시 기어 나와서 한나의 목소리를 따라 했다. 그들은 발목에서부터 시작하여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나를 완전히 뒤덮고 있는 것 같았다.
우글거리는 벌레들의 끊이질 않는 속삭임을 들이며 느릿하게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사람으로서 태어난 것이 아닌 도구나 마찬가지였기에 쓸모가 없어지면 언제든 버려질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간과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이용 가치가 남아 있는 한 버려질 일은 없었다.
가치가 있다면 버리고 싶어도 버리지 못하여 어떻게든 붙들고 있을 거였다. 그러니 나는 내 가치를 높이기 위해, 가치 없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발버둥 치면 되었다.
지금껏 그래 왔듯이 가라앉지 않기 위해 자맥질하는 것이다.
남자의 뺨을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남자의 눈가에 파고들었다.
당장 눈알까지 파낼 듯, 힘을 주었지만 그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은 오래된 존재이니 본인의 방식을 고집하겠죠. 그래서 당신을 권속으로 삼지 못하면 어떻게 다뤄야 할지 생각을 해 봤어요. 무력으로 위협할까 아니면 좋은 말로 구슬릴까.”
양손에 마력을 불어넣어 마법을 썼다.
불꽃이 피어오르고, 남자의 살갗을 태웠지만 고요하기만 했다.
“그런데 그 무엇도 통하지 않잖아요.”
그가 약하다고 했지만 그건 인간이 아닌 악마의 기준이었다.
없애고 싶어도 평범한 방법으로 없앨 수 없을뿐더러 그는 나보다 강했기 때문에 다른 마음을 먹게 된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당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곰곰이 고민해 봤죠.”
“네가 나에 대해 골몰했다니 영광인걸. 내 약점을 찾아냈나?”
“네.”
“나도 모르는 내 약점은 무엇이지?”
“저요.”
나무를 짚고 있던 손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제야 내가 단순 위협용으로 마법을 쓴 것이 아님을 깨달은 남자가 내 팔을 잡았지만 이미 늦었다.
“저라는 제물이 있어야 당신은 존재할 수 있잖아요.”
딱딱한 나무껍질이 만져졌다.
손바닥 아래에는 불로 새긴 하겐티의 문양이 있었다.
하겐티를 불렀다.
만약 내가 쓰러지지 않고 하겐티를 불러낼 수 있다면 그토록 원하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를 불러내길 실패하고 이 자리에 쓰러진다 하더라도 내가 손해 볼 건 없었다.
‘하겐티.’
온몸에 있는 마력이 전부 빨려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겐티를 불러내는 데 실패했다.
둑이 무너진 것처럼 마력이 빠져나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현기증이 일고, 몸이 힘없이 아래로 기울었다.
“이건 경고예요.”
나는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 * *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곧바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메리의 집이었다.
기절해 있는 동안 남자가 날 옮긴 듯했다.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숨을 가다듬고 있자니 다소 격앙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남자였다.
“자칫 잘못해서 네가 죽을 수도 있었어.”
“하지만 살아 있어요.”
“아무리 권속이라고 하더라도 너는 인간이고, 마력을 다루는 데 아직 미숙해. 거기다 몸 상태도 좋지 않으니 죽을 확률이 더 높았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일이 아니야.”
힐끔 그를 흘겨보았다.
온기라고는 찾을 수 없는 서늘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일자로 굳어진 입매는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려 주고 있었다.
역시 내가 죽으면 곤란하구나.
나는 아직까지 그에게 가치 있는 인간이었다.
“상관없어요. 제가 죽는 것만은 당신이 절대적으로 막았을 테니까요. 안 그런가요?”
남자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긍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진짜 죽음에 가까웠다면 남자가 어떻게든 살리려고 했을 거였다. 애초에 죽지 않았겠지만.
하겐티를 부르기 전, 내게는 엘릭시아가 있으니 적어도 이 정도에 죽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역시 멀쩡하네요.”
손가락을 까딱여 봤다.
사지는 온전하게 붙어 있었다.
온몸에 가시넝쿨을 휘감은 듯한 고통이 노도처럼 날 덮치고 있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었다. 마력을 많이 소진하여 기력이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당장 움직인다 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제가 쓰러지고 나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죠?”
“대략 열두 시간.”
“생각보다 적게 잤네요.”
결국 하겐티를 불러내지 못했다.
남자가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여전히 가슴이 답답했다.
하겐티를 권속으로 삼을 때만 해도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건 계산에 없었다. 나는 언제까지 기다려 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장 정보를 줄 악마가 필요했다.
내가 원하는 정보를 갖지 않았을 가능성까지 고려한다면 더더욱.
하겐티를 불러내는 데 성공하든 실패하든 내가 짊어질 불필요한 위험이 없도록 판을 짜 놨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압도적으로 내게 유리하게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 시간이 문제였다.
어서 다음 행동을 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앞섰다.
더 따질 것 없이 침대에서 벗어났다.
오랫동안 누워 있다가 갑자기 일어난 탓인지 어지러웠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검을 챙겼다. 내가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자 남자는 그런 나를 저지했다.
“뭐 하는 거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요.”
“그 전에 네 몸부터 살펴야지.”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꼴로 어딜 가려고?”
“저는 항상 이랬어요. 제 꼴을 운운하기에는 새삼스럽죠.”
남자의 손을 털어냈다.
걱정이 담긴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하고서는 장갑을 꼈다.
“저를 막지 마세요.”
“경고로군.”
“네.”
그대로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고리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내가 문고리를 잡지도 않았건만 문이 열렸다.
“아저씨, 언니 아직 안 깼어요?”
메리였다. 문을 열면서 내 안부부터 묻던 소녀는 바로 앞에 내가 서 있자 놀랐는지 눈 크게 떴다.
“언니, 일어났네요. 아픈 건 좀 괜찮아요?”
“응, 괜찮아.”
“어젯밤에 찬바람을 많이 쐬어서 앓았다면서요. 그런데 일어나도 돼요?”
“이제 아프지 않아. 걱정해 줘서 고마워.”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메리를 바라봤다.
메리는 내가 일어났다는 사실이 기쁜 건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배가 많이 고플 텐데 식사부터 해요. 아저씨가 만들었는데 제가 미리 살짝 먹어 보니 맛있어요. 아침을 굶어서 많이 배고프죠?”
메리가 재잘거리면서 내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당장이라도 이 집을 나설 것처럼 굴었기 때문인지 남자가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두 쌍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크게 기뻐했고, 남자는 내가 꿍꿍이를 감추고 있는 걸 눈치챈 듯했다.
“아저씨가 슬슬 깰 때가 되었다면서 언니한테 갔는데 정말이었네요. 혹시 억지로 일어난 거 아니에요?”
“그냥 때가 되니까 눈이 떠졌어.”
어여쁘게 웃은 메리는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식탁에는 이미 음식이 준비돼 있었다. 만들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아직 김이 나고 있었다.
“오늘도 호수에 갈 거죠?”
“괜찮다면 오늘도 길 안내를 해 줄래?”
“네!”
메리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답을 받고 나서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으니 불쑥 메리가 물었다.
“언닌 아저씨랑 왜 결혼했어요?”
“그야 내가 잘생겼으니까.”
“사기 결혼이었어.”
이상한 거짓말을 하려는 남자를 무시하고 딱 잘라서 말했다.
그는 이 상황을 즐기는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헉, 아저씨가 사기 친 거예요?”
“왜 나라고 단정 짓는 거지?”
“그거야 당연히 언니가 아까우니까요! 저는 아저씨처럼 인상이 흐릿한 사람은 처음 봤어요.”
“……인상이 흐릿하다니?”
잠자코 듣고만 있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이상하여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머리나 눈 색이 아니더라도 남자의 외모는 절대 흐릿하다고 표현할 수 없었다.
“엄청 평범하잖아요.”
“전혀.”
“아빠는 그걸 콩깍지라고 부른다고 했어요.”
메리의 평가를 부정하자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냉정한 반응이 나왔다. 어려서 그런지 더 가차 없었다.
일말의 자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메리의 평가를 듣고 있자니 그동안 내가 잘못 본 건가 싶어서 남자의 얼굴을 훑어봤다.
그러나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내가 이제까지 느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감상이 나왔다. 저 얼굴을 보고 인상이 흐릿하다고 하는 건 사과를 딸기라고 부르는 격이었다.
“그만큼 서로 사랑하니까 결혼한 거야.”
“아저씨는 실력 좋은 사냥꾼이에요?”
“좋다고 할 수 없지만, 나쁘다고도 할 수 없지.”
“그게 뭐예요. 능력 있는 남자라서 결혼한 줄 알았는데 그냥 아저씨가 사기를 친 건가 봐요.”
멍하니 남자와 메리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떠오르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나만 하더라도 남자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전까지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인식하지 못했다.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았고.
그때를 떠올리니 메리의 반응이 이해가 가서 슬쩍 목소리를 낮추고서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마법인가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붉은 눈을 가진 존재는 살면서 마물밖에 보지 못했으니 사람들이 불길하게 여길 수 있었다. 차라리 흐릿한 인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다니는 것이 동행하는 입장에서도 편한 듯했다.
메리는 남자가 날 속여서 결혼한 거라고 확정을 지은 건지 식사 내내 측은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그것이 날 신뢰한다는 증거라고 여겼기 때문에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잘 먹었어.”
“저야 뭐 거드는 것밖에 안 했는걸요. 아저씨가 다 만들었어요.”
소녀는 헤헤 소리 나게 웃었다.
“그러면 이제 호수에 가자.”
“지금 당장이요?”
“그래.”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호수에 가자고 하니 메리가 살짝 당황한 듯했다.
“너도 빨리 마물이 없어졌으면 하잖아.”
“하지만 언니 몸은 괜찮아요?”
“응, 괜찮아. 이 정도에 쓰러지면 마물 사냥꾼 못하지. 메리는 내가 강하다는 걸 알고 있잖아. 그렇지?”
메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빠르게 외출 준비를 마치고 앞장서서 호수로 나를 데려다줬다.
다시 찾은 호수는 어제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여전히 빙판이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었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메리, 이리 와.”
별다른 의심 없이 메리가 다가왔다.
나는 그녀에게 호수를 보라고 했다.
“뭐가 보여?”
“아무것도 안 보여요.”
“더 자세히 들여다볼래?”
“더 자세히요?”
“그래.”
메리는 두려움으로 인해 머뭇거렸다.
그런 그녀에게 다정히 속삭였다.
“언니를 다시 만나고 싶지?”
“……네.”
“네가 날 도와주면 금방 만날 수 있을 거야.”
“정말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얼굴을 쳐다보던 메리는 결심한 듯 주먹을 꽉 쥐고, 허리를 숙였다.
“아직까지 아무것도 안 보여요.”
메리가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빙판을 살폈다.
열정적으로 호수 밑을 관찰하는 소녀의 몸이 점점 호수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 작은 등을 바라보던 나는 망설임 없이 소녀를 밀었다.
허리를 굽히고 있던 소녀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려, 빙판의 가장자리에 주저앉게 되었다.
“어, 언니…….”
당황하던 메리의 눈동자에 공포가 떠올랐다.
그런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지 않았다.
오히려 팔짱을 꼈다.
도와주지 않겠다는 강경한 의사를 내비치자 새파랗게 질린 메리가 얼어붙은 호수에서 나오기 위해 노력했다.
일어나려 했지만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으며 무릎을 부딪쳤다.
몇 차례 일어나려고 노력하던 메리는 결국 바닥을 기어서라도 호수를 벗어나려 했지만 계속 미끄러졌다. 조금만 더 가면 벗어날 수 있건만 그 짧은 거리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서 제자리만 맴돌았다.
“너 대체…….”
“그냥 지켜보세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가만히 있는 거예요.”
옆에 있던 남자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나는 그의 말을 자르고 메리를 지켜봤다.
머뭇거리던 남자 또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소녀는 언니를 불렀다.
하지만 소녀가 부르는 언니는 내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메리가 보는 세상은 나와 같지 않음을.
소녀는 눈물을 흘렸다.
절규했고, 비명을 질렀으며 공포에 질려 몸을 떨었다.
은반만큼이나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이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며 연거푸 언니를 부르던 소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 소녀의 뒤에는 어제 보았던 악마 소년이 서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메리를 안아 든 소년은 호수에서 걸어 나왔다. 나를 노려보면서.
“불쌍하잖아요.”
그 시선을 맞받아치며 죄책감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듯이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죽은 언니를 다시 보는 것이 소원인 아이예요.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없으니 다른 방법으로라도 보여 줘야죠.”
“너……!”
“본인 입으로 말했죠. 당사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걸 보여 준다고. 이보다 더 정확하고 효과적인 재회는 없어요.”
내가 드래곤을 봤던 것처럼.
내가 웃는 낯짝으로 덤덤하게 말하니 소년의 눈동자에 경멸과 혐오가 가득 차올랐다.
꼭 악마를 보는 듯한 눈이었다.
웃긴 일이었다. 악마가 인간을 악마처럼 보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야?”
“새삼스러운 질문이네요.”
잔뜩 격앙된 소년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비록 저는 인간이지만, 악마의 주인이 되려면 악마를 뛰어넘는 악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어요?”
“너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미치지 않고서야 악마 따위를 권속으로 들일 리 없죠.”
소년이 이를 갈면서 나를 쏘아봤다.
“그보다 진짜 악마는 제 앞에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려 잠깐 기절한 메리를 봤다가 다시 소년과 눈을 마주쳤다.
“기만인가요, 동정인가요.”
“…….”
“그도 아니라면 가축을 사육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인가요.”
소년이 메리를 도와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메리 덕에 강해졌다.
힘의 원동력이 되어 주는데 쉽게 놓을 수 없을 거였다.
신상에 문제가 생긴다면 빠르게 달려올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이다. 메리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녀를 이용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남자의 약점이 나이듯, 소년의 약점은 메리였다.
“그런 거 아니야.”
소년은 온 힘을 다해 부정했다.
“그런 식으로 상대한 적 없어.”
“하지만 릴리의 죽음으로 득을 본 건 당신뿐이죠. 의도된 죽음이라고 여겨도 이상하지 않아요.”
“아니, 나는……!”
계속 부정만 할 것일까.
여기서 더 소년을 밀어붙여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소년이 속내를 털어놨다.
“……이 아이의 혈육에게 일어난 일은 오롯이 내 실수였어.”
뒤이어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힘없었고, 메리를 안고 있는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약하기 때문에 저지른 실수.”
결국 소년은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품에 안고 있던 소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당신은 무엇을 지키고 싶은 거죠?”
호수에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있었다.
본인이 나약해서 메리의 언니를 지키지 못했다고 자책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악마의 행보는 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진실로 마을 사람들과 메리를 지키고자 했던 걸까.
어찌 보면 호수 밑에 사는 존재를 지키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가 만든 빙판 탓에 마물의 핵은 보이지 않았고, 괜히 접근했다가 본인의 공포와 마주해야 했으니까.
게다가 메리 앞에 나타나서 희망 고문을 하고, 그녀의 믿음을 갈취한 걸 생각한다면 지킨다는 것이 오히려 악마. 본인일지도 몰랐다.
“똑바로 행동해요. 그런 식으로 애매하게 희망을 줘 봤자 상처만 줄 뿐이에요.”
“나는 정말로 모두를 지키고 싶었어.”
“하지만 그 누구도 지키지 못했죠.”
망설임 없이 소년을 부정했다.
“저 아이를 봐요. 지켰다고 할 수 있나요? 당신의 실수로 인해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는데?”
소년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서 얼어붙은 호수를 바라보았다. 시선은 호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 잘해 왔어.”
소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멍하니 호수를 시야에 담다가 이내 결심한 듯, 날 쳐다봤다.
“호수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했지? 소문대로 마물이 있어. 그리고 나는 그 마물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지키고 있지.”
“…….”
“진실은 이게 다야.”
남자와 함께 호수로 걸어갔을 때 환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발밑을 지나간 그림자가 마물이었던 모양이다.
“네가 궁금해하는 건 다 알려 줬어. 이제 날 그만 괴롭히고 꺼져. 제발.”
내가 일부러 그를 도발하고 있음을 깨달았는지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러나 나는 호수 밑에 마물이 봉인되었다는 사실 하나를 듣기 위해 무자비한 짓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결국 비루한 자기변호만 늘어놓으셨네요.”
마물을 호수 밑에 가두지 않고 그냥 내버려 뒀다면 마물 사냥꾼이 처리했을 거다.
하지만 소년이 마을 사람들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호수 안에 가둔 탓에 마물 사냥꾼은 손가락만 빨고 있는 신세가 되었다.
모두를 지킨다는 건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위한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었다.
그가 하고 있는 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떠맡고 있는 것이었다.
“타인을 해쳐 놓고 지키기 위해 이런 짓을 한다고 하다니. 스스로가 치졸하게 느껴지지 않으세요?”
“알아, 하지만 마지막 약속인걸.”
“마지막 약속이라니요?”
“계약자와의 마지막 약속이야.”
잠깐 머뭇거리던 소년이 말했다.
“내게 남은 존재의 의의이고.”
“…….”
“이 빙판이 깨지면 이 세상에 없는 계약자와의 유일한 인연마저 사라지게 되는 거야. 나는, 그럴 수 없어.”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계약자와의 유일한 인연이라.
서로의 이익을 저울질하며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악마와 계약자란 오로지 제 득실을 따지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악마나 카임을 떠올리면 악마에게 계약자는 단순한 인간이 아닌 소중한 존재가 분명했다.
“당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건 예컨대 호수 밑 마물이군요.”
“발목이라니!”
“타인의 희망을 갈취하며 살아가겠다고 약속했나요? 계약자가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다시금 떠올린다면 답은 바로 나오겠죠.”
내가 상기시켜 주지 않더라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미련을 놓지 못하여 머물러 있음을.
“당신이 있을 곳도, 필요로 하는 곳도 이곳이라고 했죠.”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바짝 긴장하는 그를 보며 제안했다.
“아무도 당신을 원치 않게 되면 제게 와요.”
“무슨 헛소리야?”
“농담하는 거 아니에요. 거기 앉아서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으세요.”
그대로 소년에게서 등을 돌려서 얼어붙은 호수로 걸어갔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손끝을 물어서 장갑을 벗겨 냈다.
시린 냉기가 맨손을 적셨다.
“뭐 하는 거야! 거긴 아직 환각 마법이 걸려 있단 말이야.”
“상관없어요.”
발밑이 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화려하게.
나는 호수 밑, 거대한 드래곤을 내려다봤다.
그는 처음 봤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날 쏘아보고 있었다.
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동안 내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잔인한 신이었다.
이제는 나의 공포와 제대로 마주할 때였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검을 내리꽂았다.
‘만약 내가 아닌 이 나라의 황제가 네 눈앞에 있었어도 망설임 없이 목에 칼을 박았을 건가?’
그때 하지 못했던 대답을 몸소 보여 주게 될 차례였다.
붉은 검이 드래곤을 찔렀다.
나는 나를 노려보는 그것과 마주하며 다시 한번 검을 내리꽂았다. 검 끝을 타고 깊은 울림이 느껴졌다.
“너 미쳤어?!”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뒤늦게 눈치챈 소년이 외쳤다.
그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빙판을 치자 곧이어 금이 갔다. 어느새 발밑을 물들이던 황금빛 형체는 사라지고 거대한 어둠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부분을 집요하게 공략했다.
“그러다가 죽을 거야.”
소년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득바득 날 뜯어말릴 줄 알았더니 예상보다 얌전한 반응이었다.
“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
“죽음은 두렵지 않아요.”
“…….”
“제가 아직도 유약하다는 사실이 두려우면 두려웠죠.”
반복되는 결말과 항상 내 목을 조르는 손아귀.
도망치고, 또 도망쳐도 나를 따라오는 거대한 그림자는 악몽과 같았다. 지금의 나로서는 그것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깊은 늪에 빠진 듯 절망에 몸담게 했다.
그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강해져야만 했다.
갈라진 틈을 통해 반짝이는 붉은빛을 볼 수 있었다.
마물의 핵이었다.
그걸 확인하자마자 일순 불길한 신호가 머릿속을 울렸다.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자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던 빙판이 갈라지고, 내가 있던 자리에 검은 물체가 아가리를 벌리며 튀어 올랐다.
까만 물고기는 붉은 눈동자를 희번덕이며 다시 호수 밑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이 튀긴 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조금만 더 늦게 피했다면 녀석에게 한 입에 잡아먹혔으리라.
한기가 등골을 긁어내렸다.
빠르게 자세를 바로잡고서는 발밑을 유영하는 그림자를 눈으로 좇았다.
상성이 몹시 안 좋았다.
아니, 상성만 안 좋은 것이 아니었다.
이곳은 호수였다. 녀석을 육지 위로 유인하지 않는 이상,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물에 빠진 인간만큼 무능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붉은 핵 하나가 요사스럽게 번뜩이는 걸 지켜보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동시에 마물이 빙판을 깨부수고 또다시 튀어나왔다.
정말 나를 한 입에 삼킬 생각인지 아가리를 커다랗게 벌리고 있었다.
검을 다잡으며 붉은 핵을 노려봤다. 마물의 검고, 축축한 아가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마물이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까지 피하지 않았다. 그림자가 드리우고, 우두커니 서 있던 나는 집어삼켜졌다. 순식간에 세상이 까맣게 변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녀석의 아가리에 삼켜지자마자 빛을 쫓았다.
밤하늘에 떠 있는 유일한 별처럼 반짝이는 붉은빛.
정확히 그곳에 검을 박았다.
검날이 무른 살에 깊숙이 들어갔다.
먹잇감이 얌전히 소화되지 않고 입 속에서 버티자 마물은 고통에 찬 울음을 길게 내뱉으며 빠르게 아래로 잠수했다.
아가리를 벌린 채였다.
도저히 인간은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잠수하는 탓에 물살이 거세어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필사적으로 칼자루를 붙잡았다.
숨이 막혔다.
녀석은 절대 위로 올라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날 떼어 내기 위해 거칠게 몸부림치는 것만 보아도 그랬다.
마물이 먼저 죽거나 내가 먼저 죽거나.
빙판을 깬 순간부터 공존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깟 물고기한테 죽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익사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칼자루에 힘을 주어서 더 깊숙이 검을 밀어 넣었다.
물속이라서 체중을 실어 넣는 것이 어려웠지만 살덩이 자체는 여려서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검푸른 물속에서도 열기를 잃지 않은 검신이 마물의 속살을 태우고, 핵에 압력을 가했다.
마물과 나는 상성이 나빴다.
나는 물속에서 숨을 쉬지 못했다. 그리고 이 마물은 불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다.
평생 물에 갇혀 살았으니 타는 듯한 고통은 마물이 견디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마물이 거칠게 움직일수록 검이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죽음에 다다르는 몸부림이었다.
하겐티를 불러내느라 얼마 남지 않은 듯한 마력을 쥐어짜 냈다.
힘이 빠지면서 나 또한 한계에 이르기 시작했다.
점점 머릿속이 멍해지고, 손에 힘이 빠졌다. 칼자루를 놓칠 뻔한 걸 겨우 다잡아야 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으면 핵을 부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은 시간은 내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가 돌아왔다.
정신을 차렸을 때 왼쪽 손등에 새겨진 문양이 눈에 들어온 것은 단순히 우연이었다.
문양은 그려져 있으니 마력만 불어넣으면 됐다.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검이 아닌 손등에 집중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선택을 해야 했다.
여기서 포기하고 개죽음을 당할지, 아니면 그에게 도움을 청할지. 하지만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더는 쓰러지고 싶지 않았다.
홀로 서 있고 싶었다.
이런 내 바람과 달리 내게 주어진 선택은 능력 탓에 제한적이었다. 그 사실을 부정하고픈 마음에 당연히 선택해야 할 후자를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머뭇거리는 사이 마물의 핵처럼 선명하게 붉은빛을 띠던 검은 제 색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내가 조금 더 강했더라면 또 다른 선택지가 생겼을 거였다.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나 비참했다.
고개를 숙여서 손등에 이마를 박았다.
지금은 검을 붙잡고 버티고 있는 것이 다였다.
눈이 계속 감겼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티면 나의 승리였다.
스스로 해낼 수 있다고 믿으며 버티고 있는데 손에 힘이 풀렸다. 아차 하는 사이 두 손 모두 칼자루를 놓게 되었다.
한껏 날뛰는 마물의 입 속에서 중심을 잃은 몸뚱이는 추락했다. 필사적으로 다시 검을 잡기 위해 팔을 뻗는데 누군가가 나를 끌어당겼다.
누군지 확인하기도 전에 상대는 서슴없이 내게 입을 맞추었다. 자연스럽게 입술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숨결이 깃들었다.
깊이 생각할 정신은 없었다. 그토록 바라던 숨을 허겁지겁 탐했다.
입을 맞댄 채 힘껏 호흡하자 머릿속이 훨씬 맑아졌다.
여유가 생기니 뒤늦게 나와 입을 맞춘 상대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남자였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느릿하게 입술을 떼어 냈다.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를 불러낸 것일까.
잠시 손등을 보다가 마물의 속살에 박힌 칼자루를 다시 잡았다. 그 위로 남자가 손을 겹쳤다.
한결 또렷한 정신으로 검을 박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마물을 해치울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거짓된 것이 아니었는지 마침내 핵이 부서졌다. 마물의 마지막 발악도 끝이 났다.
검을 뽑아내자 검은 피와 함께 붉은 액체가 새어 나왔다.
마물의 핵이었다. 마치 생물의 혈액과 같은 붉은 액체는 뭉쳐 모이더니 돌과 같은 형상을 취했다.
액체인지, 고체인지 정확히 가늠하기 힘든 그것을 잡았다.
그 순간 눈부신 빛이 터지고, 내 눈앞에는 악마 소년이 서 있었다. 뾰로통한 얼굴로 날 쳐다보는 그의 모습은 안개에 낀 듯이 흐릿했다.
‘내가 너의 계약자니까 그들은 필시 나를 노릴 거야. 아마 나는 마물이 되겠지. 너와 계약을 한 순간부터 이단자의 낙인이 찍혔으니 당연한 수순인 거야.’
내가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내 의지로 하고 있는 말 또한 아니었고.
누군가의 기억을 훔쳐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로부터 이곳을 지켜 주지 않을래?’
낯선 음성은 잡음이 섞여 중간중간에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계약자로서 마지막 소원이야.’
‘계약을 할 거면 대가를 줘. 그게 규칙이야.’
‘너의 평생을 빌릴 대가를 갖고 있지 않아.’
기억의 주인이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또한.
‘그러니…….’
빛이 점멸하고, 풍경이 바뀌었다.
잔상이 남아 있는 듯해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핵마저 회수해 가자 마물이 있던 자리에 물보라가 일며 재가 흩어지고 있었다.
꿈이 아닌 현실임을 천천히 자각하고 있는데 물보라 사이로 사람 한 명을 발견했다.
열두어 살쯤 돼 보이는 소녀였다. 여름에 입을 법한 얇은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메리가 그토록 찾던 릴리였다.
남자를 밀어내고서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안아 들고 수면 위로 올라갔다. 물 밖으로 기어 나와서 거칠게 숨을 들이쉬고 있자니 소년이 내게 달려왔다.
나는 먼저 릴리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뺨이 차가웠다.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아래로 끌어내려 맥을 짚어 보려고 했다.
아마 죽었을 것이다. 반년 동안 호수 밑에 있었는데 살아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오래된 시체라고 하기에는 상태가 너무나 양호하여 죽은 듯이 잠들었다고 하여도 믿을 것만 같았다.
마물은 죽었고, 릴리의 시체는 찾았지만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마물이 존재하고 릴리의 시체를 찾지 못했을 때처럼 결국 남은 것은 비통과 공허밖에 없었다.
이제껏 흘렸던 눈물만큼 또다시 눈물을 흘릴 메리를 상상하게 되니 죽음을 단정 짓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물끄러미 창백한 얼굴만 내려다보고 있는데 시체가 움찔했다.
처음에는 내가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죽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탓에 헛것을 봤다고 여겼는데 그런 내 생각을 부정하기라도 하듯이 릴리가 물을 토해 냈다.
다급하게 코 밑에 손가락을 대어 봤다.
숨을 쉬고 있었다.
죽지 않았다.
살아 있었다.
“죽은 게 아니었군요.”
“난 죽었다고 한 적 없어.”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불가능한 일이에요.”
사람은 물속에서 살 수 없었다.
무려 반년간 숨 쉬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죽음과 같은 삶을 유지하는 건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혹시 죽은 자를 되살린 건가요?”
“아니, 죽은 자를 되살리는 건 그 누구도 하지 못해. 그냥 살아 있을 때 육신을 얼린 것뿐이야. ……다시 깨어날 수 있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했지만.”
얘기를 들어 보니 그 또한 메리의 언니가 살아 있으리라고 확신하지 못했던 듯했다.
“어째서 그녀가 죽었다고 믿게 했죠?”
“그 후로는 내 능력 밖의 일이었어. 그리고 다들 죽었다고 믿었잖아. 원래라면 죽었어야 하는 것이 옳았고.”
“믿음과 진실은 달라요.”
내 말에 소년은 쓰게 웃었다.
“나는 악마야. 기적을 일으킬 수 없지.”
하지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릴리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숨이 붙어 있었지만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마을에 약사가 있다면 어서 약사를 불러서 그녀를 살펴보게 해야 했다.
충격을 받아 기절한 메리 또한 함께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었다. 서둘러 그들을 옮겨야 함이 옳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유일한 삶의 이유는 사라졌어요.”
검을 지지대 삼아서 일어났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소년 앞에 섰다.
“너 지금 그 꼴로 나랑 싸우자는 거야?”
“제가 당신의 주인이 되어 줄게요.”
잔기침이 나왔다.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있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할 것이었다.
꼴은 물에 젖은 쥐새끼와 다를 바 없을 것이고.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말했잖아요.”
나는 그때와 똑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알아내야 하는 진실이 있어요.”
소년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해할 수 없어.”
“타인의 이해를 바란 적 없어요.”
내가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는 거였다.
남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게는 내 삶이 달린 문제였다.
“어째서 나야? 악마는 많잖아. 네가 이미 거느리고 있는 악마도, 네 곁에 있는 악마도 있는데 왜 꼭 나여야만 해?”
“다른 악마한테 잡아먹힐 덩치도 아니고, 금방 사라질 것처럼 약하지도 않죠. 그리고 지금 제 앞에 있잖아요.”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기약 없이 하겐티를 기다리는 것보다 마물 한 마리를 잡아서 새로운 악마를 권속으로 삼는 것이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마침 엘릭시아를 안다고 했기 때문에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게 다예요.”
소년은 선뜻 확답을 주지 못했다.
무엇이 또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인지 몰랐기에 그가 거슬려 할 만한 점을 미리 언급했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요. 당신이 아는 진실만을 얘기해 주면 관계를 정리한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내 말을 듣고만 있던 소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침묵을 고수한 소년은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잠자코 기다려 주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개를 들었다.
생각보다 훨씬 개운한 표정이었다.
“난 또 장인의 작품인 줄 알았더니 그냥 미친년이었잖아.”
“그런 것과 비교하면 섭섭하지. 저래 봬도 평범한 인간이거든.”
미친년이라니. 소년에게 말이 심하다고 응수하려는데 어느새 내 곁에 다가온 남자가 말을 가로챘다.
그들이 하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파악할 수 없었으나 분위기상 전혀 좋은 말이 아니었다.
“평범한 인간 주제에 현자의 돌을 갖고 있는 것도 모자라서 악마를 거느린다고? 내 평생을 통틀어서 너만 한 미친 인간은 없었어.”
“둘이서 험담만 할 생각이라면 조금 미뤄 두는 게 어때요.”
불쾌하기 이전에 악마끼리 한가하게 농담 따 먹기 할 시간이 없었다.
힐끔 메리와 메리의 언니를 봤다. 소년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하다면 그들부터 치료를 위해 옮기는 것이 나았다.
“널 주인으로 삼을게.”
정말이냐는 듯이 소년을 돌아봤다.
그는 내가 의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자 빠르게 대가를 요구했다.
“대신 네가 쥐고 있는 그걸 줘.”
“검이요?”
“아니, 검 말고.”
자그마한 마물의 핵을 일컫고 있었다.
어째서 악마에게 핵이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게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순순히 건네주었다.
“영광으로 알아. 악마가 동족이 아닌 인간을 주인으로 삼는 것이 얼마나 흔치 않은 일인데.”
마물의 핵을 받아 든 소년이 잠깐 고개를 숙인 채 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나는 49번째 악마, 빙결의 환상 ‘크로셀’.]
벌써 세 번째였다.
이번에는 변수가 없길 바랐다.
[나의 주인이 될 자여. 너의 진정한 이름을 알려 줘.]
[슈리엘.]
내 이름을 듣자마자 크로셀은 카임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는 빠르게 동요한 기색을 지우고서는 이어서 말했다.
[슈리엘, 나의 주인이시여. 빙결의 이름으로 절대 녹지 않을 영겁을 맹세하리라.]
크로셀이 내 오른쪽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동시에 양손 모두 손등에 냉기가 퍼지며 고통이 느껴졌다.
오른손에 낯선 문양이 떠올랐다. 왼손은 드래곤의 표식이 나타난 듯했지만 이미 다른 문양으로 덮어 놨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거였다.
왼쪽 손등을 애써 외면하며 크로셀과 마주했다.
이제 드래곤의 심장에 대해 물어보면 되었다.
그런데 손등에 문양이 떠오른 그 순간부터 어지러웠다.
서늘한 한기가 손등을 타고 올라와 살갗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한기뿐만이 아니었다. 강렬한 두통이 나를 내려찍었다.
익숙한 기분에 이마를 짚었지만 나아지는 건 없었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드래곤의 심장을…….”
다급하게 말을 꺼냈지만 한계였다.
대답을 듣지 못하리라는 걸 깨닫고 빠르게 말을 바꾸었다.
“……먹히지만 말아요.”
먹힐 거면 차라리 먹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는데 거기까지는 내 몸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소리야?”
황당함이 담긴 크로셀의 되물음과 남자의 웃음소리가 동시에 머릿속을 울렸다.
“지친 상태로 마물을 상대한 데다 이번 악마가 반대되는 속성을 가진 탓에 약간의 반작용이 있는 거겠지.”
몸이 허공에 붕 뜨는 듯했다.
확신할 수 없었다.
내가 느끼고 있는 감각이 착각인지 현실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또렷하지 않았다.
“편히 쉬도록 해. 나의 사제여.”
그의 속삭임을 끝으로 어둠에 잠식되었다.
* * *
최근 눈을 뜰 때마다 온몸이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깨질 듯한 고통을 느끼며 눈을 뜨자마자 은발 남자를 가장 먼저 볼 수 있었다. 그는 한숨 더 자라며 나를 달랬지만 쓰러지기 전의 기억이 선명했다.
주위를 둘러봤다. 크로셀이 없었다.
당장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먹었어요?”
만약 이번에도 악마를 먹었다면 목에 칼을 박아 넣는 것이 아닌 자르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떼어 놓을 생각이었다.
“안 먹었어.”
“하지만 없잖아요.”
“쉬이. 일단 진정해.”
“진정할 수 있어야 진정하죠.”
멱살을 놓고서는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망치로 머리를 두드리기라도 하는 듯이 아팠다.
며칠 사이에 절벽에 떨어지고, 악마를 불러내느라 마력이 빠져나가고, 마물을 잡는다고 호수에 담가졌다가 나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아파서 다행이라고 여겨질 만했다.
지난 나날을 곱씹으며 크로셀이 어디 있는지 눈빛으로 따져 물었다.
남자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낯짝으로 헝클어진 내 머리칼을 정리해 주며 속삭였다.
“그의 이름을 불러봐.”
크로셀.
그 이름을 불렀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근처에서 크로셀이 나타났다.
“아, 뭐야. 깼어?”
“어디에 있었어요?”
“혹시 나 때문에 잘못된 건 없는지 걱정돼서 애들 상태 좀 살펴보고 왔어.”
“아.”
메리와 릴리를 떠올리자 손이 차갑게 식었다.
특히 메리.
나 때문에 잊고 싶은 일을 떠올리게 되었으니 심적으로 많이 힘들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테지만 그렇다고 죄책감이 아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때요? 많이 안 좋나요?”
“다들 괜찮아. 너보다 건강해.”
“메리는요?”
“제 혈육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울면서 달려가던데. 아마 기나긴 악몽을 꿨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더 누워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방금 막 관 뚜껑 열고 튀어나온 것 같아.”
“아뇨, 괜찮아요.”
“전혀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침대에서 벗어나려는데 몸이 번쩍 들려지며 눈높이가 높아졌다.
“다른 악마도 안 괜찮아 보인다잖아. 네 몸을 조금만 더 아끼도록 해.”
날 안아 든 남자가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내가 발버둥 쳐서 떨어질까 봐 걱정되는지 나를 안은 두 팔에 단단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놓아주세요.”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말해. 네 발이 되어 줄 테니.”
“멀리 가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악마에게 할 말이 있어요.”
“그렇다면 여기서 해.”
“당신 앞에서 얘기하자니 껄끄러워서 자리를 옮기려고 했죠.”
“내가 허튼짓을 할까 봐 그런 건가?”
“네.”
굳이 숨길 필요도 없었다. 그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다는 걸 드러내자 남자는 침음을 삼켰다.
“그를 먹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미친 거 아니야? 내가 왜 먹혀?”
남자의 진지한 반응과는 달리 크로셀이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계속 먹니 마니 하고 있으니 거슬리던 모양이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먹힐 일은 없어.”
“그것참 믿음직스럽네요.”
남자에게 이미 한 번 먹혔던 카임이 만약 이 자리에 있었다면 크로셀과 같은 반응을 보였을 거라 생각하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것이 크로셀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소년은 얼굴을 사정없이 구겼다.
“맹세의 입맞춤이라도 하면 믿어 줄 건가?”
“절 내려놓으면 믿어 줄게요.”
악마가 입에 담는 ‘맹세’는 그 의미가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경고를 한 적도 있으니 크게 문제 될 것 없다고 여겨져서 그가 있는 곳에서 얘기를 나누기로 결정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날 내려 주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잠깐 중단되었던 본론으로 바로 들어갔다.
“엘릭시아를 파괴할 방법을 알고 있나요? 타인에게 건네주는 방법도 괜찮아요.”
“……너 진짜 이상한 애다. 그걸 왜 없애?”
“길게 설명할 시간 없어요.”
딱 잘라서 크로셀의 호기심을 차단했다.
캐물어 봤자 내가 대답해 줄 생각이 없음을 알아챈 소년은 순순히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 주었다.
“현자의 돌은 가장 완전한 물질이야. 파괴할 방법 같은 게 있었다면 내가 나서서 파괴했겠지.”
“타인에게 건네주는 방법은요?”
“현자의 돌은 선물 같은 게 아니야.”
“하지만 저는 받은 적이 있어요.”
“그거야 번식을 위한 것이고. 네가 하려는 건 완전히 결이 달라. 애초에 넌 현자의 돌로 태어난 존재도 아니잖아.”
번식이라는 말을 들으니 속이 울렁거렸다.
“타인에게 건네줄 방법이 아예 없는 건가요?”
“지금 너로서는 불가능해.”
힐끔 남자를 본 크로셀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한마디로 방법이 아예 없는 거군요.”
그 남자의 아이를 낳지 않는 이상.
역겨움을 참지 못하여 주먹을 꽉 쥐고 있는데 크로셀이 잠깐 고민한 뒤에 말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닐 거야. 파괴는 내 전문이 아니라서 모르는 걸 수도 있거든. 음, 아마 걔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걔라니요?”
“9번째이자 ‘종말의 집행자’라고 불리는 악마.”
“종말의 집행자?”
“종말이라는 단어가 이명에 붙은 악마답게 다 때려 부수고 다니니 어쩌면 현자의 돌 또한 가능할 거야. 대신…….”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 머뭇거리던 크로셀이 이어서 말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너는 결국 한낱 인간이니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 아마 현자의 돌이 아닌 네가 파괴될지도.”
곧바로 남자를 돌아봤다.
“알고 있었죠?”
“9번째 악마라면 알고 있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면서 일부러 말을 돌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지금의 저라면 심장을 파괴하는 방법을 알아봤자 살 확률보다 죽을 확률이 높으니 견딜 수 없다고 했군요.”
세 마리의 악마를 권속으로 삼은 것만으로는 강해졌다고 할 수 없는 듯했다. 썩 안전한 방법은 아닌 듯해 다시 크로셀을 보며 따지듯이 물었다.
“방법은 그뿐인가요?”
“내가 아는 선에서는 그렇지.”
길이 하나뿐이라면 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으니.
그러나 걸리는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제게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요. 만약 그 9번째 악마를 찾는 것이 힘들고 오래 걸린다면 포기해야 해요.”
“9번째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어떻게 확신하는 거죠?”
“너무 멀면 어디 있는지 감도 잡지 못하지만, 어느 정도 가까이 있으면 대충 어디에 있는지 느껴지거든.”
여기까지 알아냈는데 아무 소득 없이 국외로 도주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서 크로셀에게 9번째 악마가 있는 방향을 물어봤다.
방향과 거리를 대략적으로 가늠하며 찝찝함을 느꼈으나 일단은 이동하는 길에 9번째 악마를 만나 보기로 했다.
그 악마가 날 도와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직접 만나 봐야 아는 일이었다.
목적지가 정해지자마자 다시 떠날 채비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중간에 방에 들어온 메리의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는 내게 마물을 처치한 것도 모자라서 죽은 줄 알았던 딸아이까지 구해 줬으니 어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눈물을 훔쳤다.
마물을 죽였을 뿐, 나는 한 것이 없다며 고개를 저어도 감격한 메리의 아버지의 귀에는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내게 감사를 표하고 싶어 했고, 부담스러워진 나는 사양했지만 이미 날 은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신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라며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축제 준비가 한창이라고 했다.
당장 이곳을 떠나려고 했지만, 축제의 주인공이 빠질 수 없다면서 꼭 참석해 달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부탁했다.
악마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기적이 맞았으니 무어라 항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거듭 거절만 하다가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머무르겠다고 했다. 대신 눈에 띄기 싫으니 조용히 참석만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당장은 영웅 대접받고 있지만. 마물 사냥꾼의 취급이 어떤지 알기 때문인지 메리의 아버지는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떠날 수 없어서 여유가 생기니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먼저 떠도는 얘기를 주워들었다.
영원히 얼어 있을 것 같던 빙판은 녹아내려, 호수는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메리의 언니인 릴리는 잠깐 의식을 되찾았다가 다시 기절했다.
상태가 악화된 것은 아니고, 단순히 기력이 없어서 쓰러진 것뿐이니 내일 중으로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살아 있었다.
그것만으로 사람들이 감격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게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축제 준비가 끝나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축제는 급하게 준비한 만큼 소소했지만 수도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축제 못지않게 활기찼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먹고, 마시고, 춤추며 오늘을 즐겼다.
나는 구석에서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남자를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 던져 놓고 몰래 빠져나왔다.
곧바로 떠나기 위해 짐을 정리하고 있으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던 크로셀이 내게 다가왔다.
“널 위한 축제잖아. 하루 정도는 즐겨도 되지 않아?”
“일정이 많이 지체됐어요.”
신원 미상의 모험가보다는 차라리 마물 사냥꾼으로 계속 오해받는 편이 나은 것 같아서 원래 입던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날 빤히 쳐다보는 크로셀의 시선을 느끼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한곳에 오래 있어 봤자 좋을 것 없어요.”
이미 날이 어두컴컴해졌지만 하루 더 묵지 않고 바로 떠나기로 했다.
볼 일은 다 끝이 났고, 생각보다 오랫동안 이곳에 있게 되어 옅은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오늘 밤 이곳에서 자고 간다 하더라도 제대로 수면을 취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목적지가 정해졌으니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심신 건강에 이로웠다.
문득 고개를 들어서 창밖을 쳐다봤다.
바깥에는 불빛이 반짝이고, 사람들의 말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다들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어느 날보다 밝은 밤이었다.
“실언한 건 사과할게요.”
“실언이라니?”
“당신은 최선을 다했어요.”
비루한 자기변호라며 서슴없이 크로셀을 비난했던 것을 사과했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는 노력하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그 증거였다.
“멋대로 말해서 죄송해요.”
“아, 아냐.”
크로셀은 쑥스러운지 괜히 뺨을 긁적였다.
“미련이 남아서 붙잡고 있었던 것도 맞았으니까……. 만약 그대로 있었다면 고여 있는 채로 시간만 흘렀겠지. 그걸 과연 지켰다고 할 수 있을까.”
“다들 저마다의 신념을 갖고 행동하죠. 결국 그것을 평가하는 건 타인이지만, 섣불리 재단해서는 안 됐던 거예요.”
“…….”
“옳고 그름은 그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잖아요.”
소년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는 짐을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문을 열자 메리가 서 있었다.
메리는 일부러 날 기다렸던 것이 아닌지 깜짝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나를 올려다봤다.
“언니, 떠나는 거예요?”
“응, 어른들한테는 말하지 말아 줘.”
메리의 눈에는 크로셀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옆에 크로셀이 서 있는데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시간이 늦었는데 그냥 자고 가면 안 돼요?”
따로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나겠다고 하니 아쉬운지 길을 비켜 주지 않고 내게 졸랐다.
“아직 릴리 언니랑 만나지 않았잖아요. 릴리 언니는 생명의 은인을 보고 싶어 할 거예요.”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은인이 아니야.”
“은인이 아니라니요. 언니가 없었더라면 릴리 언니는 돌아오지 않았을 거예요!”
만약 호수 밑 드래곤을 보지 않았다면 메리를 외면했을 거였다. 내게는 숭고한 희생정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철저히 내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그 과정에서 내가 아닌 타인까지 짓밟았다.
이번 일은 다행히 결과가 좋았지만, 항상 결과가 전부가 되어 주지는 않았다.
“언니는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신께서 보낸 사자 같아요.”
“…….”
“어른들은 그른 일이라고 했지만 저는 돌탑을 쌓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았다면 언닐 만나지 못했을 것 같은 기분이 계속 들어요.”
메리가 말갛게 웃었다.
그녀는 내가 호수로 밀었다는 사실을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긴 악몽을 꾼 것뿐이었다.
순진한 소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쪽 무릎을 꿇어서 눈높이를 맞췄다.
“메리, 너는 신을 믿니?”
“네, 그럼요. 신께서는 황금으로 뒤덮인 화려한 궁전에서 살고 있다고 들었어요.”
두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메리를 끌어안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 소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건 비밀인데 사실 신은 그곳에 존재하지 않아.”
“그러면요?”
메리가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었다.
살짝 긴장한 듯한 목소리의 울림을 곱씹으며 대답했다.
“신이 존재하는 곳은 네가 알고 있을 거야.”
나는 품에 숨겨 두었던 돌멩이를 메리의 손에 쥐여 주었다. 돌탑을 쌓는 데 써서 그런지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멩이치고는 반듯한 생김새였다.
“그리고 나는 신의 사자가 아니고, 너의 소원은 궁전에 살고 있는 신이 들어주지 않았어.”
메리를 안고 있는 채라서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살포시 눈을 내리깐 나는 그동안 하고픈 말을 했다.
마지막이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게 말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너의 노력도, 정성도, 바람도 모두 너의 것이야.”
메리를 품에서 떼어 냈다.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스스로를 믿어.”
소녀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가는 거예요?”
“갈 길이 멀어서 어서 출발해야 해.”
“하지만…….”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 나쁜 기억을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고마웠어.”
“…….”
“그리고 미안했어.”
“미안하다니요.”
굳이 호수로 밀어냈던 것이 아니더라도 메리에게는 미안한 일이 많았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할 사과를 하고서는 그대로 지나치려다가 힐끔 크로셀을 흘겨보았다.
“메리.”
“네?”
“내가 떠나면 호수에 한번 가볼래?”
“호, 호수요?”
호수를 언급하자 메리가 눈에 띄게 두려워했다. 그럴 만도 했다. 모든 공포의 근원은 호수에 있었으니.
내 탓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입 안이 썼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것이었다.
더는 그곳에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으니.
“결국 네 언니도 돌아왔잖아.”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메리에게서 등을 돌렸다.
가야 할 길이 멀었다.
* * *
슈리엘이 떠난 후 메리는 호수로 향했다.
숲은 유독 어둡고, 고요했다.
방금 전까지 사람들 틈 속에 있어서 더욱 그렇게 느끼는 것이라고 여기며 메리는 호수에 점점 가까워졌다.
되도록 오고 싶지 않았다.
언니인 릴리는 돌아왔지만 릴리가 사라졌던 그날이 생생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발밑에서 검은 손이 뻗어 나와서 제 발목을 잡아 아래로 끌어당길 것만 같았다. 그도 아니라면 그날, 어째서 손을 잡아 주지 않았냐면서 릴리가 자신을 꾸짖을 것만 같았다.
진짜 릴리는 깨어나자마자 그녀를 보며 살포시 미소를 지어 주었는데 말이다.
현실과 달리 상상 속 릴리는 메리를 원망하고 있었다.
호수가 코앞이었다.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어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가던 메리가 공포로 인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물은 사라졌지만 마물에게 잡아먹힐 것만 같아서 몸을 움츠린 채 차마 눈 뜰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른들의 말대로 빙판은 녹아 있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처럼 어둡고, 무서운 물이 고여 있지 않았다. 수많은 황금빛 물고기가 무리 지어 이동하며 호수를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별이 흐르는 것 같았다.
넋을 놓고 눈으로 빛을 좇던 메리는 호수 반대편에서 서 있는 남자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돌탑을 쌓을 때 자주 보았던 소년이었다.
비록 이름도, 사는 곳도 몰랐지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옆집에 사는 또래 아이보다 더 친근했다.
소년 또한 호수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고 했다.
서로 공통된 아픔을 안고 소원을 빌었다.
이제는 돌탑을 쌓을 이유가 사라졌다는 얘기를 해 주기 위해 메리는 한달음에 달려가려고 했다.
그때, 소년이 입을 벙긋거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메리는 손으로 활자를 더듬듯, 입 모양을 읽었다.
“……안녕?”
무심결에 소리 내어 말했다.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소년이 등을 돌렸다.
쫓아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쫓아가더라도 소년을 잡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불현듯 들었다.
사라지는 소년의 뒷모습을 마지막까지 바라보다가 다시 호수로 시선을 옮겼다.
물결치는 황금빛 호수는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 * *
“작별 인사는 다 했어요?”
“덕분에.”
크로셀이 뒤늦게 합류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이별 후이니만큼 상실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메리가 좋으면 굳이 따라오지 않아도 돼요.”
“조, 좋아하는 거 아냐!”
화들짝 놀란 크로셀이 목청을 높였다.
창백한 달빛에 반사된 그의 얼굴은 살짝 붉어져 있는 듯했다.
“굳이 메리가 아니어도 미련이 남잖아요.”
크로셀을 길잡이 삼아 이동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으나 떠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억지로 데려갈 만큼 그가 꼭 필요한 건 아니었다.
‘너의 평생을 빌릴 대가를 갖고 있지 않아.’
마물의 핵을 잡았던 순간 들었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다정하고, 슬픈 목소리였다.
‘그러니…….’
이 풍경을 네게 줄게.
그 목소리를 곱씹었다.
어째서 크로셀의 계약자라고 추정되는 사람의 기억을 훔쳐보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껏 마물과 상대하면서 이런 적이 없었다.
마물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으나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또한 크로셀에게 내가 무엇을 보게 되었는지 얘기하지 않았다.
이미 죽은 계약자의 기억을 보았다고 하면 기분 나빠 할 것이 분명했다. 그와 계약자만의 기억이니 그들만의 추억으로 남겨 두고 싶었다.
“어차피 동행은 한 마리로 충분해요. 도망치는 입장에서 일행이 너무 많은 것도 번거로워요.”
“너 진짜 인간 맞아? 악마보다 더 독하게 말한다.”
인간인데 악마보다 정이 없다며 크로셀이 학을 뗐다.
“최대한 짐을 덜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내가 짐이라는 소리야?”
“정확히는 둘이요.”
이곳에는 두 마리의 악마가 있었다.
내가 마을에서 벗어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동행했던 남자와 크로셀을 번갈아 보았다.
“앞으로 마을에 자주 들를 것 같은데 그때마다 알아서 행동하세요.”
“왜?”
“무일푼이거든요.”
원래라면 추적을 피해서 인가로 가지 않았겠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평범한 사람이 아닌 마물 사냥꾼을 피해 다녀야 했다. 단안경만 없으면 날 알아보기가 힘드니 되도록 사람이 많고, 마물이 없는 길로 갈 예정이었다.
메리의 아버지가 여비를 조금 챙겨 주긴 했지만 몇 푼 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악마는 먹지도, 자지도 않는다는 거였다. 모습을 바꿀 수 있으니 알아서 요령을 부려 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크로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왜 돈 걱정을 하는 거야?”
“악마는 어쩔지 몰라도 인간은 살아가는 데 돈이 필요해요.”
“그건 나도 알아.”
대화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너 48번째의 주인 아니야?”
48번째. 하겐티를 의미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의 힘을 빌리면 어떤 금속이라도 황금으로 바꿀 수 있는데 왜 돈 걱정을 해? 혹시 내가 호수에 있는 동안 인간 사회의 금전 가치가 바뀐 거야?
“하지만 악마를 부르는 데 힘이 많이 들잖아요. 돈을 위해 여기서 또 기절할 수 없어요.”
“본체를 부르는 거랑 힘을 빌려 쓰는 건 다르지. 후자는 훨씬 부담이 없어.”
권속으로 삼으면 막연히 내가 강해진다고 생각했는데 악마의 힘을 빌려 쓸 수 있는 거였다. 거기다 하겐티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얘가 안 가르쳐 줬어?”
크로셀이 남자를 손가락질했다. 손가락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알려 주고 싶어도 서로를 마주하는 시간보다 네가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 더 길었으니 할 수 없었지.”
남자의 말에 나는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게 되었다.
절벽에서 떨어진 이후로 자주 쓰러져 있긴 했다.
그동안 손아귀에 가진 물질이 없어서 금전 문제가 나를 계속 뒤따라 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고민 자체가 불필요한 것이었다.
조금은 숨통이 트임을 느끼며 크로셀을 앞장세우고서는 9번째 악마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크로셀의 말대로 목적지는 멀지 않았다.
하지만 목적지가 가깝다는 것이 내게 마냥 희망적인 소식은 아니었다.
9번째 악마가 있는 곳은 젠틸라 공작령이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황제와 샬롯의 약혼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