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그러게 내가 쉬어 가자고 했잖아.”
고양이가 아닌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남자가 말했다.
그는 내 신발을 벗기고, 맨발을 주무르는 중이었다. 남자가 조심스럽게 내 발을 누를 때마다 날카로운 검으로 발바닥을 난도질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 테지. 네 몸이 이전 삶과 같지 않다는 걸.”
“……네, 알고 있어요.”
황궁을 탈출한 후 바닥부터 기어 다녔으나 곱게 자란 세월이 훨씬 길었다. 게다가 내 몸은 며칠간 계속된 강행군을 버틸 만큼 단단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혹사시켜 굳은살을 단단히 박이게 한 시간은 모두 사라져 여린 몸뚱이만이 남았다. 물러도 너무 물렀다.
“오늘은 푹 쉬어. 불침번은 내가 서 줄게.”
“하지만…….”
내가 머뭇거리자 그가 안심하라는 듯이 빙그레 미소를 짓고 서는 고개를 숙였다.
“내게 맨발을 맡겼잖아.”
고개를 숙인 남자가 내 발등에 입을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진 입술 이후로 그의 숨결과 함께 나지막한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다.
“날 믿어.”
거리낌 없는 행동이었다. 신체의 가장 아래에 있는 발의 특징상, 생리적인 거부감을 느낄 법도 한데 그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서는 발로 남자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고양이였을 때 카임을 한입에 꿀꺽 삼킨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작은 악마는 죽은 건가요?”
“글쎄.”
남자는 모호하게 말을 흐렸다.
“어떨 것 같아?”
어떨 것 같냐고 해도 잡아먹혀서 죽었다고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꿀꺽하고 삼키는 걸 직접 목격하지 않았던가.
“당신은 제가 강해졌으면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당신이 강해지는 데 동참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는 내가 강해지길 바란다고 했지만 몸보신으로 카임을 먹어 치웠다. 날 위한 일이라고 말해도 썩 신뢰가 가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왠지 속고 있는 기분이에요.”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다가 이내 한탄을 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깨닫고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저는 이만 사냥을 하러 가 볼게요. 갈 길이 먼데 굶을 수 없는 노릇이니까요.”
“내가 다녀올 테니 오늘은 얌전히 있어.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하고.”
“말만 하면 곰이라도 한 마리 잡아 오실 것처럼 얘기하시네요.”
“흰 담비 가죽이라도 흔쾌히 벗겨 줄 수 있지.”
흰 담비를 길 가다가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동물 취급 하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흰 담비는커녕 작은 다람쥐 한 마리 잡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제껏 나타나지 않던 마물이 길을 가면 갈수록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었다. 최대한 그들을 피해 가고 있어서 직접 맞닥뜨린 적은 없지만 여전히 위험했다.
마물이 늘어나는 것과 반비례하여 짐승의 수가 점점 줄어들어서 사냥이 힘들어졌다.
이를 대비해 저번에 고기를 훈제해서 따로 챙겨 두었지만 동이 나고 있던 참이었다.
굶고 싶은 게 아니라면 슬슬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남자가 발을 만져 주어서 그런지 아까보다는 통증이 덜했다.
몸 상태가 괜찮은데 남자를 대신 보내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자 내 속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발바닥을 꾹 눌렀다.
유리 조각을 밟는 듯한 통증이 치밀어서 입술을 꽉 깨물고 신음을 삼켰다.
“일그러졌네.”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눈동자에는 작은 연민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그 시선을 피해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거짓말이 서툴러.”
“하지만 그렇게 만지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누가 봐도 아파 보이는 얼굴을 하고 나서 전혀 아프지 않다고 거짓말을 하기보다는 그를 탓했다.
그러자 남자가 아까보다 훨씬 약한 힘으로 내 발을 쥐었다.
“너는 얼마나 더 자라야 단단해질까.”
부드럽게 발을 감싸 쥔 감촉만 아니었다면 실제로 그가 날 만지지 않고 있다고 착각할 만큼 약한 힘이었다.
“가끔은 내가 널 부서뜨릴까 봐 두려워.”
남자는 고개를 숙여서 내 다리에 가만히 이마를 맞댔다.
지독히도 낮은 목소리에 한숨이 깃들었다.
“그러니 오늘 하루는 나한테 모든 걸 맡기고 편히 쉬자.”
“……결론이 이상해요.”
짧게 웃은 남자가 맞대고 있던 이마를 떼어 내고 간절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붉은 눈동자에는 아까보다 다채로운 감정이 서려 있었다.
“평소라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겠지만 오늘만은 양보할 수 없어.”
“…….”
“왜 그런지는 네가 더 잘 알 테지.”
지금까지는 아무리 힘들어도 군말하지 않고 내 선에서 모든 일을 해결했다. 하지만 이제 슬슬 한계라는 걸 체감하고 있었다.
항상 그렇듯, 정신보다는 육체가 문제였다.
만약 혼자 있었다면 아픈 몸으로 어떻게든 꾸역꾸역 해냈겠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고집을 부려 가며 따라가 봤자 짐이 되면 되었지 도움이 되지는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착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가볍게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가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정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지만 마음 한편에 그에 대한 불신이 남아 있었다.
엘릭시아에 대해 알아내려고 할 때 카임을 먹어 버린 일이 결정적이었다.
내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는지 그날의 일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남자 또한 그걸 알고 있었지만 절대 카임을 뱉어 내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벌써 소화되고도 남았을지도.
짧은 만남이었던 만큼 카임에게 큰 애정을 갖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충격적인 건 충격적이었다.
그가 떠나고, 검은 고양이와 나만이 남았다.
고양이는 골골 대면서 자고 있었다.
남자가 고양이의 힘을 다 뺏어 간 건지 고양이의 육체는 남자가 빠져나가면 조용히 잠만 잤다. 하릴없이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앉아 있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이 기분 좋았다.
하마터면 나까지 잠들 뻔한 고요함이었다.
폭풍이 오기 전처럼 평화로운 시간을 오랜만에 즐기고 있는데 기척이 났다.
벌써 돌아온 것일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섬뜩한 감각이 등허리를 훑고 지나갔다.
그가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마물의 괴기스러운 울음에 반사적으로 손이 검을 찾게 되었다. 허리춤에 있던 검이 뽑혔다.
되도록 마물을 피하려고 했건만 운도 오늘까지인 모양이다.
발을 대충 신발에 욱여넣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늑대처럼 생긴 마물이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전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무언가 쫓기는 듯한 모양새였다.
정확히 내게로 달려오는 마물을 자세히 보았다.
그것의 눈뿐만 아니라 미간에 붉은색이 선명하게 반짝였다.
눈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붉은 것은 마물의 핵이었다.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마물 사냥꾼만이 마물을 잡는 이유는 그것이 도저히 평범한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국가에서 지급한 특수한 물건이 있어야 마물을 죽일 수 있는 ‘핵’을 볼 수 있었다. 그 핵을 부숴야 확실하게 마물을 죽였다고 할 수 있었다.
핵을 부수지 않는다면 마물은 계속해서 살아났다.
어째서 내가 핵을 볼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상황이 상황인 터라 고개를 드는 의문은 잠깐 뒤로 미뤄 둬야 했다.
당장 급한 건 내게 달려오고 있는 마물이었다.
그것 또한 뒤늦게 기척을 느꼈는지 이제는 날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내 마력에 반응하듯이 은빛 나신에 문양이 새겨지더니 붉게 달아올랐다.
검을 받은 후에 직접 써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전신에 두근거리는 감각이 퍼졌다.
심장이 빠르게 뜀을 느끼며 마물이 지척에 왔을 때 도약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마물의 미간에 검을 찔렀다.
검은 핵이 있는 곳에 제대로 꽂혔다.
그러나 아직 핵은 부서지지 않았다. 힘이 예전 같지 않은 탓이었다.
엘릭시아 덕분에 육체가 회복됐지만 워낙 바닥에서 끌어 올린 터라 겨우 일반인 수준이었다.
한참 검을 수련했던 이전 삶과는 달랐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저를 죽이려는 걸 알고 마물이 당장이라도 나를 먹어치울 듯이 아가리를 벌렸다.
썩은 내가 났다. 최악이었다.
점점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힘의 차이였다.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핵을 부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검에 마력을 더 불어넣었다.
그것이 좋지 못한 결과를 부른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마물이 비명을 질렀다.
코앞에서 우는 터라 귀가 멍멍했다.
그러나 나는 뒤로 밀려가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것이 나를 할퀼 듯이 발톱을 세우고 짧은 다리를 허우적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검을 밀어 넣었다.
검이 깊숙이 들어갔다.
마물의 비명이 높아졌다.
귀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검을 놓지 않고 더욱더 힘주어 밀어 넣었다.
곧 한계였다.
그것이 먼저 쓰러질지, 내가 먼저 쓰러질지 섣불리 가늠할 수 없었다.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는 듯했다.
마물의 붉은 핵만을 노려봤다.
곧이어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쓰러진 것은 내가 아닌 마물이었다.
어찌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렇게 큰 마물을 직접 상대한 건 처음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쓰러지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마물이 언제라도 다시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한참을 서 있다가 마물을 완벽하게 쓰러뜨렸다고 판단했을 때야 검을 뽑아냈다.
그러자 까만 피가 튀겼다.
마물의 피는 붉지 않고 까맸다. 자연에서 나고 자란 생명체 중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피 색깔이었다.
피를 대충 닦아 내고서는 마물을 살폈다.
아무래도 처음에 정신을 놓은 것처럼 달려오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상위 포식자에게 쫓겼을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추측이 맞다면 발이 아픈 것과는 별개로 당장 이곳을 떠나야 했다.
마물은 이미 누군가에게 공격당했는지 곳곳에 상처 자국이 나 있었다.
이 정도 크기의 마물을 상대할 수 있는 존재는 몇 되지 않았다. 더 큰 마물이거나 제 실력에 자신이 있는 기사, 혹은 마물 사냥꾼.
“제가 이쪽으로 몰았어요.”
“반대쪽으로 몰아가라고 했지 않았던가?”
“아, 그 정도 실수는 눈감아 주세요. 마물만 잡으면 됐……. 어?”
갑작스레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장서서 달려오던 남성이 중후한 목소리의 여성과 대화를 나누던 중, 하던 말을 끝내지 못하고 쓰러진 마물을 발견하고 달려갔다.
“뭐야? 죽었잖아.”
숨을 장소가 없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는 너무 늦었다.
뒤늦게라도 잠시 몸을 감출 만한 곳이 있지 않을까 하여 둘러봤지만 쓸모없는 짓이었다.
“우와, 진짜 깔끔하게 죽여 놨다. 단번에 핵을 부순 것 같은데 이 구역에 우리 말고 다른 사냥꾼이 또 있었나.”
내 또래로 유추되는 적갈색 머리칼의 남성이 마물을 살피면서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는 아직 날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슬금슬금 기척을 죽이고 뒷걸음질했다.
그런데 내가 도망치려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마물에게 온 신경이 쏠려 있던 그가 번뜩 고개를 들어서 정확히 나를 쳐다봤다.
“네가 죽인 거야?”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동자와 마주치자마자 서둘러 후드를 뒤집어썼다. 상대의 정체는 굳이 묻지 않아도 입고 있는 옷으로 알 수 있었다.
마물 사냥꾼.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존재를 연달아 만나게 되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운수가 나쁜 듯했다.
얼굴을 가리고, 살짝 몸을 움츠렸다.
말을 못 하는 사람처럼 조용히 있으니 마물 사냥꾼은 여전히 호기심을 지워 내지 못하고 내게 다가왔다.
“네 쪽으로 이어진 마물의 핏자국을 보면 네가 죽인 게 맞는 것 같네.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내가 노골적으로 그를 경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냥꾼은 속사포처럼 저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 냈다.
“우와, 좋은 검을 가지고 있네. 혹시 근처에 동료라도 있어? 아니, 그 전에 어디 출신이야?”
“…….”
“아, 겁먹지 않아도 돼. 우리는 마물을 죽이지 사람은 안 죽이거든.”
대꾸 한번 한 적 없는데 횡설수설하던 사냥꾼이 갑자기 침묵했다.
쉼 없이 떠들던 사람이 갑자기 입을 다물자 정적이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왜 그러나 싶어서 힐끔 상대의 얼굴을 보려는데 그 전에 사냥꾼이 다시 입을 놀렸다.
“진짜야. 정말 단 한 번도 사람은 죽인 적 없어.”
사냥꾼은 갑자기 검게 물든 손을 펼쳐서 내 눈앞에 들이 내밀었다.
마물의 피가 흐르다 못해 진득하게 눌어붙어 있는 듯한 사냥꾼의 손은 원래부터 검은색이었던 것 같았다.
팔목 아래까지 마물의 피로 적셔진 듯한데 사냥꾼의 복장이 흑색이라서 티가 나지 않았다.
갑자기 시야를 가득 채운 검은 손을 보고 있자니 구역질 나는 냄새와 함께 생리적인 혐오감이 치밀어 올라서 뒷걸음질 쳤다.
동시에 건너편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 두 명과 남자 한 명.
총 세 명의 마물 사냥꾼이 있었다.
“노란 눈동자.”
남성과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가 그 짧은 사이에 제대로 날 봤는지 눈동자 색을 언급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움찔하게 되었다.
“거기다 진회색 머리였던가.”
살짝 머뭇거리던 여자는 내 머리 색까지 정확히 짚어 냈다.
점점 구석으로 몰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너, 맞지?”
내 시야에 여자의 신발 코가 잡혔다.
신발의 주인은 내게 아는 척을 했다.
“오랜만이야.”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우두커니 그 손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시간이 느릿하게 흐르는 것 같았다.
기다란 적색 머리카락.
순간 숨이 막혔다.
“안녕, 친구야.”
친구.
내게 있어 낯선 단어를 언급한 여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었다.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적갈색 머리칼의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뭐야, 아는 사이야?”
“너도 아는 사람이야.”
“나 아는 사람 없는데?”
무신경하게 대꾸한 그가 허리를 숙여서 내 얼굴을 보려고 했다. 나는 더 이상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뒷걸음질 쳤다.
“너 혹시 내가 누군지 기억 안 나?”
“……누구신지 모르겠는데요.”
나는 그녀를 알지 못했다.
그녀는 내게 아는 척했지만 처음부터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머리 색을 본 순간 착각해서는 안 될 사람과 착각했을 뿐, 진짜로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샬롯.
그 어떤 장미보다 붉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귀족 영애로 나고 자란 그녀의 머리칼에는 윤기가 돌았다. 그리고 하이넨 가문의 상징인 순수한 붉은색 머리칼을 하고 있었다.
극도로 긴장하고 있던 탓인지 적갈색 머리칼을 샬롯의 붉은 머리라고 착각했다.
닮은 점이 하나도 없음에도 말이다.
샬롯은 그 무엇도 내 앞에 있는 그녀와 같지 않았다.
얼굴도, 체형도, 목소리도, 눈동자 색도, 억양마저도.
오랫동안 샬롯을 모방해야 했던 내가 잘 알았다.
“하긴 십 년이 넘어가니 기억하지 못할 만도 하겠다. 그렇다면 이렇게 소개해야 날 기억하려나.”
십 년. 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던 나는 굳어 버렸다.
설마…….
“안녕, 73. 나는 38이야. 쟤는 37이었지. 휘릴 지방의 작은 고아원에 지내던 쌍둥이, 기억 안 나?”
오랜만에 듣는 숫자였다.
한때 내 이름을 대신하던 숫자이기도 했다.
이제야 그들이 누구인지, 어째서 내게 아는 척을 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절묘한 인연이었다.
“쌍둥이들, 민간인은 그만 괴롭혀. 특히 한스.”
“괴롭힌 거 아니에요. 그리고 민간인도 아닌 것 같은데요.”
중후한 목소리의 여성이 꾸짖자 한스라고 불린 남자가 억울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갑작스럽게 내게 인사를 한 여자 때문에 그들과 헤어질 타이밍을 완벽히 놓쳐서 발 뺄 수가 없었다.
최악의 상황이 연달아 겹치고 있었다.
“확실히 민간인이라고 하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 것 같군.”
시선이 따끔따끔하게 날 찔러 왔다.
그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가렛은 내가 카임을 알고 있는 사실 하나만으로 호의를 베풀었지만 저들은 달랐다.
마물 사냥꾼 앞에서 마물 사냥꾼과 비슷한 복장을 한 의문의 여자라니. 아무리 봐도 수상쩍었다. 적당한 변명은 통하지 않을 것이었다.
“한스, 핵을 회수해.”
“제가 해요?”
“군말 말고 해.”
“네에.”
불만스러운지 일부러 말끝을 늘인 한스가 마물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숨 막히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그래서 너는 누구지?”
“……우연히 이 근처를 지나가던 모험가입니다.”
“모험가?”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 외에 별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은발 남자가 처음 나를 만났을 때 했던 소개를 답습하는 것밖에.
모험가라는 단어밖에 그럴싸한 소개가 없었다.
쫓기는 입장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한나, 너는 이자를 아는 것 같던데 무슨 사이지?”
“저랑 같은 고아원 출신이에요.”
그녀와 내가 있었던 고아원에서는 아이들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원래 이름이 있더라도 어차피 입양되면 새로운 이름을 받을 테니 고아원에서만 부를 수 있는 가명을 주었다.
사실 말이 가명이지 그냥 숫자였다.
아이들은 숫자가 적힌 이름표를 붙이고 다녔다.
우리는 입양될 때까지 숫자로 불렸다. 나는 실질적으로 륀느가에 입양될 때까지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고아원에 있던 시절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 때문에 고아원에 있던 시절의 날 기억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한 적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 시절에 유별나게 기억나는 사람 또한 없었다.
나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녀는 정확하게 그 시절 내 숫자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심할 수 없었다.
“흐음, 같은 고아원 출신이라.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우연이군. 그런데 그 옷은 어디서 난 거지?”
“어디서 난 것이냐고 물으셔도 원래부터 입고 있던 옷이라서 잘 모릅니다.”
“그러면 다시 묻지. 그 옷이 우리 마물 사냥꾼의 제복과 비슷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아뇨.”
“모른다는 말인가?”
“예, 몰랐습니다.”
얄팍한 거짓말이었다.
제국 내에서 마물 사냥꾼은 유명했다.
어딜 가나 마물은 있었고, 그것들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그들뿐이니까.
그런데 내가 입은 옷이 마물 사냥꾼의 제복과 비슷하다는 걸 전혀 모른다는 건 살면서 마물을 본 적이 없다는 말과 비슷했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살았기에 마물 사냥꾼의 옷도 모르는 거지?”
“대장, 말투가 너무 살벌해요.”
한스가 거들었다.
그가 마물의 핵을 회수한 자리에는 잿더미만이 남아 있었다.
바람이 불면 사라져 버릴 잿더미.
“넌 닥치고 있어, 한스.”
“살벌하다, 살벌해.”
여자에게 한마디 들었는데도 한스가 꿋꿋이 중얼거렸다.
덕분에 나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다면 이것조차 모르는가?”
그녀가 옷에 가려져 있던 목걸이를 꺼냈다.
드래곤이 검을 휘감고 있는 은색 장식이었다. 중앙에는 붉은 보석 같은 것이 반짝였다. 마물 사냥꾼만이 갖고 있는 증표였다.
곧바로 알아보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옷 디자인이 살짝 다른데요.”
“워낙 제 입맛대로 바꿔 입는 녀석이 많아서 누군가의 옷을 훔쳐 입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
그렇게 말하며 여자는 한스를 힐끔 쳐다봤다. 그녀가 대놓고 눈치를 줘도 알아차리지 못한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한스가 아무렇지 않게 제 할 말을 했다.
“요즘 누가 미쳤다고 옷을 훔쳐 입어요. 대부분 근처에도 다가오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하던데. 진짜 모르는 것 같으니까 추궁은 그만하는 게 어때요.”
한스가 계속 옆에서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가 하는 말이 아예 틀린 말은 아닌 터라 여자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보다 대장, 지쳤어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쉬어요.”
한스가 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한스의 행동에 여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더는 날 추궁할 의욕을 잃은 듯했다.
“네가 어린애야?”
“응, 너보다 늦게 태어났잖아. 어린애지.”
나를 알아봤던 여자, 한나가 누워 있는 한스를 발로 여러 번 찼다. 한스는 그 발길질이 익숙한 것처럼 앓는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아까보다 훨씬 지친 표정으로 여자가 나를 돌아봤다.
“말투에 날이 섰던 건 사과하지. 요즘 워낙 흉흉한 일이 많이 일어나서 말이야.”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말해 줘서 고맙군.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 말이야, 함께 야영할 수 있는가? 이 근처에는 편히 묵을 마을도 없어서 어차피 야영 준비를 해야 했는데 이왕이면 같은 사람끼리 모여 있는 것이 훨씬 좋지 않은가.”
단칼에 거절한다고 해서 그녀가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긍정해 줄 것이라 확신한 채로 의견을 묻고 있었다.
“이 일대의 마물은 정리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흉흉하다네. 솜씨를 보아하니 자신이 있어서 홀로 다니는 것 같지만 이왕이면 전문가와 같이 있는 것이 마음 놓이지 않겠는가.”
마른 나뭇가지를 미리 모아 둬서 지나가던 길이었다는 말은 변명으로 들릴 것이었다.
누가 봐도 이곳에서 야영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최대한 그들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선택지가 없었다.
당장 그들을 피하고 싶어서 거짓말을 하거나 길을 다시 떠난다면 골치 아플 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 여자는 다투고 있던 한나와 한스를 불러서 야영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들은 다툼을 멈추고, 역할이 이미 정해진 것처럼 능수능란하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야영 준비를 했다.
“이 주변이 원래 이렇게 시끄러웠던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동안 남자가 기척 없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들이 듣지 못하도록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자, 오늘의 양식. 여기 둘게.”
“……왜 이렇게 많이 잡아 왔어요?”
“조금이라도 널 살찌울 필요가 있으니까.”
남자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새 네 마리와 그것들이 낳은 것으로 추정되는 알들이 내 옆에 놓아졌다.
새의 둥지를 아예 털어 버린 건지 알차게 챙겨왔다.
아무리 봐도 일가족 몰살 현장이었다.
혼자서 하루 만에 처리할 수 없는 양이긴 했지만 많아서 나쁠 건 없었다.
넘치면 넘치는 대로 챙겨 두면 되었으니.
“수고했어요.”
“천만에.”
남자는 다시 고양이로 돌아갔다.
그동안 죽은 듯이 자고 있던 고양이가 번쩍 눈을 떴다.
긴 잠에서 깨어난 듯이 기지개를 켜고서는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내 무릎 위에 앉았다.
일련의 행동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당연하다는 듯이 내게 치대는 고양이를 내려다보다가 턱 밑을 긁어 주었다. 고양이가 골골거렸다.
“앗, 고양이다.”
뒤늦게 고양이를 발견한 한스가 내게 다가왔다.
그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고양이를 보았다.
“만져도 돼?”
“아마.”
허락 아닌 허락이 떨어지자 한스가 고양이에게 손을 뻗었다.
한스의 손끝이 고양이의 털에 닿으려는 순간, 고양이가 잽싸게 한스의 손가락을 콱 물었다.
“고양이가 날 물었어.”
한스가 놔 달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지만 고양이는 놓지 않았다. 아무래도 남자는 한스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내가 싫나 봐.”
그가 고양이에게 손가락이 물린 채로 중얼거렸다.
눈에 띄게 풀이 죽어 있었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고양이는 전혀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생판 모르는 남이 자신을 만지는 걸 어지간히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손가락이 아플 법도 하건만 앓는 소리 한번 내지 않는 한스를 신기하게 쳐다보다가 결국 내가 나섰다.
“그만 놔줘요.”
달래듯이 고양이의 미간을 살살 만졌다.
한스의 손가락에 구멍을 낼 듯이 굴던 고양이는 곧바로 그를 놓아주었다.
“와, 입 벌렸다.”
그대로 자리에 쭈그려 앉은 한스는 바보처럼 입을 헤 벌린 채 고양이를 구경했다. 그러다가 농땡이를 친다고 한나에게 한 소리를 듣고선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시며 일어났다.
오랜만에 주위가 시끌벅적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상황만큼은 최악을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당장 먹을 음식이 없는지 근처에 있는 짐승을 사냥해 오겠다고 했던 한나는 풀만 몇 개 들고 돌아왔다.
영 소득이 없어 보였다.
갖고 있는 음식을 탈탈 털어도 세 명이 먹기에는 부족했다.
나는 잠자코 지켜보기만 하다가 남자가 잡아 온 수확물을 내밀며 같이 먹자고 제안했다.
곧바로 그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루 종일 움직여야 해서 너무 배가 고팠다는 한스의 중얼거림은 덤으로 들으며 새의 깃털을 뽑고, 먹기 좋게 손질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내 몫을 나누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세 사람이 내가 할 일까지 대신해 주었다.
덕분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느새 어둠이 찾아와 그들과 나는 모닥불을 가운데에 두고 빙 둘러앉았다. 모닥불에는 새알과 네 마리의 새가 통째로 구워지기 시작했다.
“모험가라고 했지. 자네는 어디로 가는 길이었지?”
한스에게 대장이라고 불린 여자가 내게 물었다.
계속 묻고 싶어서 참고 있던 기색이었다.
국외로 도피 중이었다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었다.
끝까지 후드를 벗지 않은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노력하며 대답했다.
“그냥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중이에요. 목적지 같은 건 없어요.”
“그럼 너도 우리랑 같이 마물 사냥꾼 할래?”
“한스!”
“왜?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불쑥 제안한 건 새 통구이를 보면서 침을 뚝뚝 흘리던 한스였다.
갑작스러운 한스의 발언에 한나가 소리 높여 그를 불렀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도 봤지? 깔끔하게 핵만 노려서 처리한 거. 안경도 없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거면 엄청 대단한 거 아니야?”
한스는 신나서 떠들었지만 주변 분위기가 싸늘했다.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데도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대체 어떻게 한 거야?”
한스가 내 쪽으로 몸을 붙여 왔다.
그의 목소리에는 옅은 흥분이 묻어났다.
“혹시 보여? 그 빨간 게?”
“부담스러워하잖아. 그만 다가가.”
한스를 중재한 건 한나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한스의 머리 위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소리가 제법 세게 났는데 ‘악’ 소리 한번 내지 않은 한스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데 너 진짜 나 몰라?”
질문에 이어서 질문이었다.
한나가 목소리를 살짝 내리깔며 내게 물었다.
한스의 질문이 부담스러운 건 알면서 본인의 질문이 날 난처하게 한다는 건 모르는 모양이었다.
“먼저 후드부터 벗고 날 자세히 봐 봐. 그러면 기억날지도 모르잖아.”
웬만해서는 물러서지 않을 듯했다.
여기 있는 세 사람 모두.
치근대는 남매를 사이에 두고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 쌍의 시선이 내게 꽂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저, 사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내가 말을 끝내자마자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기억나지 않는다니?”
“말한 그대로예요. 제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없어요.”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이라면 아예 대답하지 못할 상황을 만들면 되었다. 그들이 나를 구석으로 몰아붙여도 아무 말 하지 못할 상황을.
“그래서 기억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는 중이었죠.”
“진짜 모험가로군.”
여자는 여전히 날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심증만으로 내가 한 말을 거짓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거짓에 진실을 섞는다면 어디서부터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인지 경계가 애매해진다.
나는 진실을 살짝 섞어서 거짓을 연기했다.
“너 입양됐던 것도 기억 안 나?”
한나가 다소 성마르게 물어봤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청 잘살 것 같은 여자가 널 데리고 갔잖아. 그러고 보니 가족은?”
십여 년 전 내 모습을 기억한다는 것부터 놀라웠는데 그녀는 내가 어떤 사람에게 입양됐는지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평범한 관심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나와 한스.
적갈색 머리칼의 쌍둥이.
그들에 대한 기억을 뒤지면서 대답하지 않고 손만 만지작거렸다.
여러모로 대답하기 난처하다는 듯이 구는 내 행동은 그들에게 충분한 답이 되어 주었다.
“아, 우리한테 편하게 말해. 너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우린 친구였어.”
“……응.”
“그러고 보니 이름은 뭐야? 그것도 기억 안 나? 널 계속 숫자로 부를 수는 없잖아.”
“리엘.”
미묘한 울림이 남았다.
사탕을 혀에 굴리듯 그 단어를 음미하고서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아.”
“리엘. 예쁜 이름이네. 이미 내 이름은 들었겠지만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정식으로 소개할게. 나는 한나야. 이쪽은 내 쌍둥이 동생인 한스. 그리고 이분은 우리 팀의 리더인 마리사.”
한나는 지금까지 보여 줬던 조급함을 숨긴 채 쾌활하게 소개를 이어 갔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일부러 더 쾌활한 척하는 것이었다.
나는 굳이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의심과 동정이 뒤섞여 있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개인적인 불행을 그들에게 노출시켰다.
더 이상 나를 추궁할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우리 셋이서 한 팀을 이루는 마물 사냥꾼이야. 나와 한스는 입양되지 못하고 고아원에서 자라다가 결국 마물 사냥꾼이 되었어.”
“…….”
“흔한 일이지.”
별다를 것 없는 흔한 얘기였다.
전쟁으로 인해 무수히 많은 아이들이 국가를, 신앙을, 부모를 잃었다.
개미 떼처럼 바글거리는 아이들 중 나처럼 운 좋게 입양되는 아이가 있는 반면 선택받지 못하여 인생을 타의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마물 사냥꾼이 되는 건 그다지 별난 길이 아니었다.
마물은 강하고, 인간은 나약했으며 위험 부담을 지고 싶어 하지 않아 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희생을 강요받아야 했기 때문에 저항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책임을 떠맡겼다.
마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위대한 사냥꾼.
명분은 항상 그럴싸하지만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었다.
그 후로 영양가 없는 얘기가 오갔다.
나는 최대한 말을 아꼈고, 내가 말이 없자 세 사람은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었다.
그동안 고기와 알이 먹음직하게 익었다.
개수가 딱 네 개였기 때문에 한 사람당 한 마리를 먹으면 되었다.
나는 살코기만 발라서 뜨겁지 않게 후후 불어 준 후 그것을 고양이한테 주었다. 얌전히 내 옆에 누워 있던 고양이가 살짝 머뭇거리다가 그것을 한입에 먹었다.
만약 우리 둘밖에 없었다면 또 내 몫을 뺏어 먹지 않겠다고 거절했을 것 같은 머뭇거림이었다.
고양이와 사이좋게 고기를 나눠 먹고 있으니 한나가 관심을 보였다.
“그 고양이, 네 거야?”
“아니, 길고양이.”
고양이가 항의하듯이 ‘야옹’ 소리를 냈다.
표정마저 약간 불만스러웠다.
“널 굉장히 따르던데.”
“언제부터인가 날 따라왔어.”
“고양이한테 인기가 많구나.”
한나는 고양이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한스처럼 만지려고 하지 않았다. 덕분에 한나의 손가락까지 구멍이 나는 일은 없었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그들은 주위에 설치한 덫을 잠깐 확인하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뒤에 돌아온 그들은 근처에 마물이 없는지 덫에 걸린 것도 없다면서 취침 준비를 했다.
사람이 셋이나 늘어난 덕인지 모든 준비는 금방 끝났다.
불침번을 서는 건 그들만의 순서가 있는지 아무도 언급하지 않기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들은 내게 굳이 불침번을 서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다.
어차피 세 명이서 교대로 설 테니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나 나는 그들을 믿지 못했다. 내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가만히 앉아서 그들의 호의를 받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이유를 대며 끼워 달라고 부탁했다.
살짝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던 마리사는 민간인 혼자서 불침번을 서게 내버려 둘 수 없으니 원하는 시간대에 사냥꾼과 함께 서라고 했다.
나는 일부러 가장 선호하지 않는 중간 시간대에 불침번을 서겠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그 시간에 불침번을 서는 건 한나였다.
한나는 안 그래도 심심한데 말동무 상대가 생겨서 기쁘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깨워 줄 테니 푹 자고 있어도 된다고 했다.
딱딱하고 차가운 땅바닥.
전혀 편안하지 않은 잠자리였다.
하지만 이제는 푹신한 침대가 떠오르지 않을 만큼 익숙해졌다.
바닥에 몸을 누인 나는 눈은 감았지만 정신만큼은 또렷한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도저히 편히 잘 수 있을 리 없었다.
잠자리가 불편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이 또 남자가 설치한 덫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하여 마음 놓고 잘 수 없었다.
피곤에 전 몸은 지쳤지만 잔뜩 경직돼 있었다.
그 모든 기척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으니 어느덧 교대 시간이 되어 한스가 날 깨웠다.
나는 자고 있었던 척, 하품을 하며 일어나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한나의 옆에 앉았다.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였다.
타닥타닥, 마른 나뭇가지가 타들어 가는 소리만이 빈 공간을 메꾸었다.
밤은 차갑고, 어두우며 고요했다.
나는 모닥불을 빤히 쳐다봤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불꽃을.
“우리가 정말 친구였어?”
침묵을 깨뜨린 것은 나였다.
‘친구’라는 단어가 어색하게 발음된 것 같아서 신경 쓰였다.
그럴 만도 했다.
살면서 그 단어를 말해 본 적이 없으니.
“응, 친한 친구였어.”
친한 친구.
생소한 단어의 조합이었다.
만약 날 제대로 속이려고 했다면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나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는 거야? 다른 사람일 수도 있잖아.”
“절대 헷갈릴 수 없어.”
너무 단호하여 오히려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짧은 고아원 생활. 그에 비하면 기나긴 공백.
공백을 채워 줄 사적인 감정이 있지 않은 이상 오랜 시간 헤어졌던 상대를 첫눈에 알아보는 건 무리였다.
“네게 있어 난 그냥 지나가는 사람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널 평생토록 잊을 수 없었거든.”
“내가 너의 무엇이었는데?”
고개를 돌려서 그녀를 쳐다봤다.
후드를 잔뜩 눌러써서 얼굴을 반이나 가렸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봤다.
밤처럼 까만 눈동자였다.
“네 삶에서 내가 중요한 사람이었어?”
확인하듯이 재차 물어보았다.
그들을 떠올리기 위해 나는 하루 종일 악몽 같은 고아원 생활을 반추해야만 했다. 실제로 악몽으로 꾸고 있으니 과거를 되짚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휘릴 지방에 있는 작은 고아원에서 ‘73’이라는 번호를 이름처럼 달며 살았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다 그렇듯, 마음에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다들 제 밥그릇 챙기기 바빴다.
한나가 내게 친근하게 구는 것과는 달리 누군가를 친구라고 부를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녀와 같은 적갈색 머리카락의 쌍둥이가 고아원에 있었던 것 같지만 나는 그녀처럼 그들의 정확한 숫자까지 기억하지 못했다.
친한 관계가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녀와 나는 친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날 친구라고 부르며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친한 친구라니.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거였다.
“…….”
“…….”
결국 한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모닥불에 반사되어 얼굴이 살짝 붉어 보였다.
고개를 돌리면서 보인 그녀의 목덜미 또한.
나는 고개를 돌리기 전, 그녀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다시금 떠올려 봤다. 실마리를 잡은 듯했다.
“……기억을 찾고 있다고 했지.”
“응.”
목소리를 가다듬은 한나가 주제를 환기시켰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긍정했다.
“기억을 찾은 뒤에는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할 거냐니?”
“기억을 찾게 되면 네 여정은 끝날 텐데 그 후에는 하고 싶은 게 있을 것 같아서 물어봤어. 목적 없이 떠돌아다닐 수는 없잖아.”
그녀가 꼭 드래곤의 심장을 없애고 난 후에 어떻게 살 것인지 물어보는 것 같았다. 단어만 몇 가지 바꾼다면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당장의 목적을 위해 그간 외면했던 질문이기도 했다.
“모르겠어.”
사람은 목적 없이 살아갈 수 없었다.
어린 시절, 나의 삶은 ‘삶’ 그 자체에 목적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륀느가에 입양되고,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되었다.
그들의 사랑 하나만을 바라고 달려왔으나 그 모든 것이 덧없음을 깨달은 지금, 나는 새로운 목적을 찾아야만 했다.
륀느와도 황제와도 전혀 관련이 없는 목적을.
칼과 함께 지낸 시간은 내게 있어 유예 기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생각할 수 있는 유예 기간.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나는 정답을 찾지 못했다.
카페를 운영하며 잠깐 느낄 수 있었던 고즈넉함마저 열사 위에 누워 있는 것처럼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게 했다. 그 자리는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이었다.
“기억을 찾게 되면 알 수 있겠지.”
한나는 내게 더 할 말이 있어 보였다.
몇 번이나 내 눈치를 보던 그녀는 끝내 모닥불만 쳐다봤다.
문득 입양되었을 때가 떠올랐다.
매끼 맛없고 냄새가 고약한 음식을 먹어야 했는데 그것마저 귀하여 전쟁 같은 식사 시간을 치러야 했던 촌구석이었다.
그곳에서 벗어나 돈 있는 집안의 아이가 되었을 때 어찌나 설렜는지 모른다. 마차를 처음 타 본 그날, 바로 앞에 륀느 공작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날 쳐다봤지만 개의치 않고 창밖을 바라봤다.
모든 것이 생경하고, 신기해서.
그땐 마냥 착한 아이로 살면 되는 줄 알았다.
처음으로 생긴 가족에게 순종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세상은 착한 아이가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척박했다.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믿어 왔던 것들이 하나씩 부서지고 있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이며 내가 설 곳은 어디인지.
그 모든 것이 안개 낀 듯 흐릿했다.
정확한 답을 찾기 위해 나는 멈추지 않고 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끝에 도달하면 알 수 있을 거라고, 그 믿음 하나만은 절박하게 붙잡고 있었다.
서늘한 냉기가 벌레처럼 기어 올라왔다.
나는 무릎을 끌어당겨 몸을 웅크렸다.
그날 밤, 뜬눈으로 밤을 새웠으나 황제가 날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폭풍이 오기 전날 밤 같은 고요였다.
* * *
“자네, 목적지가 없다고 했지.”
“네.”
“그러면 우리와 함께 다니는 건 어떤가.”
동이 트자마자 떠날 채비를 마쳤다.
자연스럽게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했던 나는 그리 놀랍지 않은 제안을 들어야 했다. 함께 야영을 하자고 했을 때부터 상황이 이렇게 흐를 것이라고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이 일대는 어차피 우리가 맡은 구역이니 지리를 잘 알고 있네. 그뿐만 아니라 함께 다니면 훨씬 안전하겠지.”
그녀는 거듭 안전을 강조했다. 그러나 실제 속내는 따로 있을 것이다.
“만약 어제 그 마물을 잡은 것이 자네가 맞다면 한스의 말대로 마물 사냥꾼으로 전직하는 것 또한 고려해 봤으면 좋겠군.”
“우연이었어요.”
“우연?”
“네, 우연히 찔렀더니 죽은 것뿐이에요.”
“오로지 우연으로만 마물을 잡을 수 없지.”
마치 마물의 핵이 정확히 보이는 것처럼 찔러서 죽였으니 꾸준히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근처에 마물 사냥꾼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대충 시간만 끌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나의 실수였다.
“그리고 자네의 과거를 알고 있는 쌍둥이와 함께 다닌다면 기억을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그들은 내 얼굴을 확실하게 보았다.
그리고 나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어젯밤 황제는 찾아오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하여 함정이 아닐 가능성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내가 언제 방심하는지 알고 있었고, 완벽한 극을 준비해 놓는 사람이었다.
나는 빙긋 웃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올라간 내 입꼬리만이 선명히 보였을 것이다.
“네, 그러도록 하죠.”
내 옆에서 고양이가 울었다.
왜 그러냐는 듯이.
내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우는 것인지 아니면 본인의 말을 빼앗겨서 우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나와 한스가 알고 있는 사람이 진짜 저였으면 좋겠네요.”
고양이의 거죽을 뒤집어쓴 남자가 날 걱정하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으나 그의 걱정과 달리 무작정 수락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은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없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고양이를 무시했다.
“그러면 리엘도 우리와 같은 사냥꾼이 되는 거야?”
“두고 봐야 아는 일이지.”
단지 동행하겠다고 한 것뿐인데 한스는 슬쩍 나까지 저와 같은 마물 사냥꾼으로 만들었다. 흥분한 그의 물음에 한나가 차분하게 대답해 주었다.
“리엘의 말처럼 단순히 우연으로 마물을 잡았다면 사냥꾼이 되지 않는 편이 나아. 어설픈 실력으로 실전에 뛰어들면 개죽음만 당하니까.”
“하지만 검 한 자루만 들고 여기까지 왔다는 건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뜻이니까…….”
“그건 길을 잃어서 그래.”
그들이 나를 과대평가하기 전에 재빨리 한스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내 말을 듣자마자 한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구나.”
“목적지가 없으니까.”
“그래도 이 근처에 마물이 많이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몰랐어? 딱 봐도 인적이 드물잖아.”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황당함이 묻어났다.
나는 일부러 인적이 드문 길로 왔다는 얘기를 할 수 없으니 대충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길을 잃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어.”
“우리를 만나서 다행이지, 아니면 너 비명횡사할 뻔했어.”
한나의 걱정을 순진한 척, 거짓 미소를 짓는 것으로 받아쳤다.
그렇게 내가 그들과 동행하기로 결정한 후, 사냥꾼들은 내게 양해를 구하고 나서 오늘의 일을 시작했다.
“나눠서 주위를 살펴봐야 할 텐데 이제는 네 명이 되었으니 둘씩 나눠서 다니면 되겠군. 리엘 양, 자네는…….”
“저요, 저.”
마리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스가 손을 번쩍 들었다.
“대장, 저랑 같이 다니게 해 주세요.”
“……한스, 안전이 최우선인 걸 알고 있겠지?”
“네!”
그는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모순적이게도 그의 거듭된 긍정은 신뢰성을 떨어뜨렸다.
영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던 마리사는 거듭되는 한스의 요청에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한스의 실력은 확실하니 위험한 일은 없을 테지만, 충동적인 성향이 있기 때문에 혹 문제가 생기면 이걸 불게.”
“대장, 저 못 믿어요?”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한낱 인간인 내가 알 도리가 없지.”
단호하게 대답한 마리사가 내게 엄지만 한 피리를 건네주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곧장 달려가도록 하지.”
“네, 알겠습니다.”
피리를 챙기고, 두 사람과 헤어졌다. 딱히 누구와 동행하든 상관이 없는 터라 나는 순순히 한스를 따라갔다.
한스는 가볍게 주변을 둘러보며 마물의 움직임을 감시했다.
마물만 없었더라도 평화로운 산책이었을 것이다.
그는 기민하게 기척을 느끼고서는 덩치가 제법 큰 마물과는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꼼꼼히 살펴봤다. 하지만 다람쥐만 한 마물은 그냥 스쳐 지나갔다.
덫에 걸린 작은 마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냥 놓아주고 말았다. 관심 없다는 듯이.
“그것도 마물이잖아.”
“크기가 작고, 위협이 되지 않을 만한 마물은 안 죽여.”
“왜?”
“그거까지 죽이려면 영원히 이 숲을 떠나지 못할걸.”
“…….”
“마물은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어. 어디서 바글바글 번식하는 건지 죽인 후에 나중에 가 보면 또 있지. 그래서 민간인에게 크게 피해를 줄 만한 마물만 사냥해.”
검은 피가 흐르고, 붉은 눈동자를 가진 생명체를 마물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짐승에게도 서열이 있듯이 그들 모두가 서열의 꼭대기에서 군림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생김새도, 크기도, 강함도 모두 달랐다.
“네가 잡지 않은 마물이 자라서 피해를 줄 만큼 커지는 것이라면 지금 당장 잡는 게 낫지 않아?”
“마물은 자라지 않아.”
“……뭐?”
“예전에 키워 본 적 있는데 전혀 자라지 않았어. 그리고 수도 근처는 마물이 덜하다고 하는데, 이곳은 아직 드래곤의 가호가 완전히 미치지 못하는지 매일 마물이 날뛰어. 당장 피해를 막는 데 급급해.”
한스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귀찮은 일이야. 안 그래?”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해 주었다.
겉으로는 마물 사냥꾼을 숭고한 일을 하는 자라고 추켜세우지만 실제로는 더러운 오물을 치우는 도구로 취급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마물 사냥꾼에 대한 인식은 나보다 한스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그의 도덕성이나 직업 윤리를 따지는 건 부질없는 짓이었다. 게다가 한스는 원하여 마물 사냥꾼이 된 것도 아니었다.
운명에 등 떠밀려 목숨을 내놓고 있는 한스에게 해 줄 말은 없었다.
짧은 대화가 끝난 후 조용히 주위를 돌아다녔다.
발치를 살피지 않고 가다가 순간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아직 발이 완전히 나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 정도 통증은 이제 익숙했다. 알아서 중심을 잡으려고 하는데 한스가 재빠르게 날 잡아 주었다.
“미안, 삐끗했어.”
한스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 전에 그가 나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에게 놓아 달라는 의미로 몸을 비틀었지만 놓아주기는커녕 더 힘주었다.
주머니에 있는 피리를 꺼낼까 하다가 말로 해결하기 위해 입을 여니, 그 전에 한스가 내게 물었다.
“얼굴은 왜 가리려고 하는 거야?”
“남한테 보이기 싫어서.”
한스가 내게 손을 뻗었다.
그는 후드를 살짝 뒤쪽으로 젖혀서 내 얼굴이 드러나도록 했다. 동시에 한나와 닮은 검은 눈동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너 예쁘잖아.”
“…….”
“자세히 보니까 옛날 얼굴 그대로네.”
한스가 내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호기심, 흥미, 흥분.
옅게 떠오른 그의 감정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맞닿은 부분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역겨웠다. 하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한스, 넌 나에 대해서 얼마나 기억해?”
오히려 이용해야 했다.
노골적으로 내게 관심을 보이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속삭였다.
“네가 기억하는 나를 알려 줘.”
상대 쪽에서 대놓고 패를 보였다.
지금 우리 둘밖에 없어서 방해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멍청히 날 내려다보던 한스는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넌 인형 같았어.”
“인형?”
“잘 먹는 인형.”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생각나는 대로 막 던진 것치고는 성의가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음식을 열심히 먹었잖아. 그래서 신기했어.”
“……내가 고아원에 있었다고 했지. 음식이 귀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귀해도 맛없는 건 맛없는 거야. 다들 싫은 티를 엄청 냈는데 너만은 인상 한번 찡그리지 않았어.”
정말 과거의 날 본 듯이 그가 말했다.
식사를 하면 식사를 했지, 그때 내가 지었던 표정까지 일일이 기억나지 않는 터라 한스의 말이 진실인지는 당사자인 나조차 알지 못했다.
“처음 봤을 때, 네가 진짜 인형인 줄 알았어. 감정도 없을 것 같았거든.”
남의 입을 통해 듣는 나는 마치 타인 같았다.
아주 오랜 과거를 자세히 기억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날 인형이라고 표현하는 한스는 딱 한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륀느 공작.
날 제 입맛대로 키웠던 어머니.
“그래서 내가 널 좋아했…….”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언제부터 따라왔는지 발치에는 검은 고양이가 한스의 발목을 물고 있었다.
“맞아, 고양이 너도 귀여워서 좋아해.”
아무렇지 않게 고양이를 번쩍 든 한스가 고양이에게 뽀뽀를 하려고 했다.
그의 시도는 고양이가 얼굴을 할퀴면서 불발되고 말았다.
“안 아파?”
“응? 아프다니?”
얼굴에 생채기가 남았다. 제법 아파 보이는데 한스는 손톱자국을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고양이를 내려놓았다.
척 봐도 아플 것 같은데 한스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나 또한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한스와 별 탈 없이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 마리사, 한나와 합류했다.
그들은 재빠르게 마물의 위치를 공유한 후 본격적인 사냥에 나섰다.
그들의 역할은 정확히 나뉘어져 있었다.
한스가 마물을 덫이 있는 쪽으로 몰면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한나가 덫에 걸려서 허우적대고 있는 마물의 핵을 파괴했다.
그들을 지휘하는 것은 마리사였다.
마물의 핵을 볼 수 있는 단안경을 쓴 그녀는 빠르고, 간결하게 핵의 위치를 알려 주고는 다음 행동을 지시했다.
공작 가문들이 힘을 합쳐 만든 귀한 물건이기 때문에 팀마다 하나씩 제공된다고 했다.
정신력을 많이 소모하게 된다며 그것을 쓰고 나서 마리사는 불쾌하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렸다.
“대장, 오늘도 야영할 생각이에요?”
마리사의 손에서 붉은 액체가 찰랑거렸다.
마물의 핵이었다.
핵이라고 불러서 막연히 심장과 비슷한 것일 줄 알았는데 투명한 병 안에 든 것은 언뜻 보면 피 같았다.
한스의 물음에 마리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핵을 챙겼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지쳤는지 힘든 기색을 여실히 보이며 한스가 투정을 부렸다.
“얼마 전에 반려가 돌아와서 축제 분위기일 때도 저희는 쉬지 못했잖아요.”
“…….”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고 난리였는데 우리만 지금까지 마물이랑 부대끼고 있어야 한다니. 불공평해요.”
“한스, 이건 소꿉놀이가 아닌 일이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마리사가 사무적으로 대꾸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차가웠다.
“네가 어린애인 건 맞다만, 너무 어린아이처럼 굴지 마라.”
한스가 불만스러운지 마물이 있던 자리에 남은 잿더미를 발로 툭툭 찼다.
그가 한번 발길질할 때마다 재가 흩어졌다.
“반려는 좋겠다. 우리는 죽으면 아무도 몰라주는데 반려는 되살아나기까지 하니까.”
한스의 입술이 삐쭉 내밀어졌다.
어지간히 쉬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 사실 반려가 마물인 거 아니에요? 그래서 마물처럼 죽어도 계속 나타나는 거면…….”
한스가 말을 끝내기 전에 한나가 검집으로 그의 머리를 내려쳤다.
제법 힘을 주었는지 소리가 크게 났다.
“차라리 다른 공작 가문에서 여러 번 암살 시도를 해서 숨어 살았다는 소문이 더 신빙성 있다.”
“그러면 공작 가문에서 죽인 거야?”
한스가 별생각 없이 되묻자 한나는 힐끔 내 눈치를 보았다.
“몰라,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괜히 어디 가서 입 함부로 놀리지 마. 우리끼리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 까딱 잘못했다가는 잡혀가.”
“그래, 한스. 너는 항상 입조심 하도록.”
“네에.”
양옆에서 한 소리를 듣게 된 한스는 건성으로 대답하고서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들은 별생각 없이 세간에 떠도는 소문을 한 번씩 언급한 것이겠지만 내 인생 전반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인지 주의 깊게 듣게 되었다.
그들이 한 얘기 중 한나가 언급한 소문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었다.
실제로 륀느 공작은 그동안 나를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다가 샬롯이 죽고 나서 기다렸다는 듯이 황제 앞에 서도록 하지 않았던가.
그동안 내가 태생이 천박하기 때문에 귀족으로서 몸가짐이 부족하여 바깥에 내놓지 않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만약 그 모든 것이 륀느 공작의 계획이라면…….
‘이곳이라면 륀느나 다른 공작 가문의 시선에서도 자유로우니 제일 안전할 거다.’
도망치기 전날 밤, 그 남자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가 무엇으로부터 날 지키려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만약 날 반려 자리에 올려놓을 생각이었다면 륀느 공작은 황제의 조력자가 되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는 륀느 공작까지 경계했다. 그녀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음을 눈치챈 게 분명했다.
또한, 하이넨 공작이 륀느 공작에게서 샬롯을 지키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라는 얘기도 신빙성이 있었다.
물론 예전에 보았던 하이넨 공작의 눈물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마저도 거짓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었다.
순서가 엇갈린 반려 자리로 인해 각 공작 가문의 분열이 가속화 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내게 륀느가 샬롯을 죽이려고 들었다는 것이나 샬롯이 마물이라는 얘기는 더 이상 상관없었다.
나는 더 이상 내부자가 아니었고, 그들이 어떤 계략을 꾸미고 있든 결국 나에게는 다들 한통속이었다.
내 앞에 있는 저자들 또한.
“낮에 했던 말, 유효한가요?”
결정을 내릴 시간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단숨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후드를 벗었다.
“할게요.”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강렬한 햇살이 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마물 사냥꾼.”
그렇게 말하며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음을 바꾼 이유가 무엇이지?”
갑작스러운 내 발언에 기뻐하기보다는 의심을 가장 먼저 품은 마리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재미있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한나와 한스가 저의 과거를 자세히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한나와 한스를 한 번씩 보며 말했다.
“저를 알고 있는 사람과 오랫동안 같이 있는 편이 기억을 찾는 데 더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와, 잘됐다.”
한스는 뛸 듯이 기뻐했다.
잔뜩 들뜬 그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대장, 이런 날에는 축하 파티를 해야죠!”
기뻐하는 한스와 반대로 마리사는 내 대답을 듣고 나서 영 탐탁지 않아 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봤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
“자네의 실력이 괜찮은 것 같아서 내가 먼저 말을 꺼냈지만 마물 사냥꾼은 단순히 재미있다는 이유로 할 만한 일이 아니야.”
“알아요.”
“…….”
“다들 필사적이라는 것쯤은 지켜봐서 알고 있어요.”
그들과 함께한 시간은 짧았다. 그러나 굳이 오랜 시간 공들이지 않더라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쌍둥이는 어쩔 수 없이 마물 사냥꾼이 되었고, 명령만 따르면 되는 위치였다. 반면 마리사는 ‘대장’이라고 불리는 만큼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여자에게 단순 재미있다는 이유로 일을 시작하고 싶다고 했으니 좋은 반응이 나올 리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흥미가 생겨야 시작하는 거 아닐까요? 아, 혹시 기분 상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한없이 가벼운 어조였다.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하지 않은 듯, 불쾌함을 드러내던 마리사는 억지로 표정을 굳히고선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마리사가 한나와 한스를 돌아봤다.
“오늘은 이만하면 된 것 같으니 마을로 돌아가도록 하지. 어차피 먹을 것도 떨어져서 슬슬 가야 했어.”
“파티 해요?”
“아니, 안 한다.”
한스에게 차갑게 일갈한 마리사가 앞장서서 나아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뒤따라가려는데 한나가 내 팔을 붙잡았다.
“리엘! 한스랑 무슨 얘기를 나눴어?”
친근하게 팔짱을 끼려는 그녀의 행동을 알아채고 슬쩍 그 팔을 밀어냈다.
그녀는 궁금할 것이다.
내가 한스와 둘이 있을 때 무슨 대화를 나눴기에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인지.
마리사 못지않게 궁금해하고 있을 거였다.
“그냥, 별 얘기 안 나눴어.”
그러나 내 입으로 얘기해 줄 생각이 없었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로 한나를 스쳐 지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앞장서는 그들을 따라간 나는 자연스럽게 한스의 옆에 섰다.
등 뒤로 따끔하게 찔러 오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 * *
“마물 사냥꾼 같은 거 할 생각 없잖아.”
하루 종일 ‘야옹’거리기만 하던 고양이가 단둘이 남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말을 걸었다.
여관에서 각방을 쓰지 않았다면 그가 말할 기회는 영영 찾아오지 않았을 거였다.
“미끼를 던진 거예요.”
물끄러미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딱히 수상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겉으로만 평화로울 수 있었다.
“제가 가진 패는 몇 장 없으니 거짓 패라도 만들어서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어요.”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 튕겼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높이 떠오른 금화가 무사히 내 손에 착지했다.
그것을 무의미하게 반복했다.
“이미 덫에 들어온 이상, 단순히 도망치고 싶다고 해서 도망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그들과 만난 순간부터 나는 거미줄에 걸린 나비 신세였다.
어설프게 도주를 시도했다가는 그들에게 금방 붙잡히는 건 물론이고, 저번과 같은 실패를 반복할 것이었다.
이곳 지리를 훤히 꿰뚫고 있는 그들과 달리 나는 맹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내게 불리하기만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내 꾀에 내가 넘어간 적이 있었던 탓인지 생각보다 차분할 수 있었다.
조급함은 독이 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게 다 그 남자 덕분이었다.
황금을 닮은 머리카락을 떠올리자마자 허공에 떠오른 금화를 낚아챘다. 더는 보이지 않도록 주먹을 쥐었다.
“사냥감이 덫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깨닫고 발버둥 치면 어떻게 되는 줄 아세요?”
오늘만 하더라도 수많은 마물을 보았다.
그들은 자신이 몰이 당하는 줄 모르고 달렸고, 덫에 걸렸다.
그리고 당연하게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덫이 점점 더 숨통을 조여 와요.”
억눌린 한숨을 내쉬었다.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는데 모순적이게도 그 노력은 죽음만 재촉해요.”
궁지에 몰리면 몰릴수록 이성적인 행동을 하기 어려워졌다.
아프면 아픈 대로 소리를 지르고, 두려우면 두려운 대로 몸을 웅크렸다.
그 모든 것이 사냥꾼이 원하는 바였다.
“지금쯤 그들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하며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겠죠.”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재미있지 않아요? 저는 지금 인생을 건 도박을 하고 있어요.”
말은 재미있다고 했으나 말투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
외줄 타기를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발 한번 잘못 내디디면 그대로 추락이었다.
“네 행동이 오히려 죽음을 재촉하고 있다면 어쩔 거지? 덫 안에 더 깊숙이 들어가고 있다는 생각, 해 본 적 있을 거 아니야.”
“네, 했어요.”
모든 가능성을 고려했다.
저번 죽음보다 더 참혹한 결말을 맞게 되는 절망적인 가능성까지 말이다.
“어쩌면 당신이 제가 한 말을 어머니나 폐하께 그대로 전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어요.”
완벽한 나의 편이라는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내 눈을 가리던 얇은 막을 걷어 내고 세상을 보니 모두 내 목에 칼을 찔러 넣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사람뿐이었다.
얼마나 더 날 이용할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셈을 하면서.
“내가 널 배신할 가능성까지 내다보고 있으면서 내게 속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는 건, 날 믿는다는 뜻 아닌가?”
“아뇨.”
“…….”
“당신이 아닌 저 자신을 믿기 때문에 하는 말이에요.”
주먹을 쥔 손에 있는 금화가 거슬렸다.
금화를 도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나까지 중심을 잃어서는 안 됐다.
“제가 믿고 있는 건, 저뿐이에요.”
“어떻게 해야 날 믿을 거지?”
창밖에 시선을 떼고 몸을 돌렸다. 여전히 고양이의 육체를 빌려다 쓰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투명한 붉은 눈동자로 나를 올곧이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 제 권속이 되면 믿을게요.”
“…….”
“권속이 되면 절대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들었어요. 제게 진실만을 고하게 될 테니 앞으로 일어날 돌발 행동 정도는 막을 수 있겠죠.”
그 또한 악마였다.
악마 하나를 권속으로 두었는데 두 마리라고 못하지는 않을 거였다.
“그렇다면 나와 계약하는 건 어때?”
“계약을 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계약과 권속은 둘 다 악마에게 힘을 빌린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행위였다.
계약은 쌍방의 이익을 위해 서로를 이용한다면 권속은 아무런 대가 없이 내 밑으로 둘 수 있었다. 그러니 계약이 아닌 권속으로 둔다면 굳이 72, 아니 이제는 71마리나 되는 악마를 찾으러 다닐 필요가 없었다.
“당신이 말한 보물은 물질이 아닌 악마였어요. 보물을 악마라고 했듯이 찾는다는 표현 또한 권속으로 삼아야 한다는 걸 에둘러 말한 것이겠죠.”
단순히 악마를 찾아내는 것만으로 강해지지 않았다.
계약을 하든, 권속으로 삼든 악마와 관계를 맺어야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둘 중 무엇이 되었든 금기를 범해야 한다는 건 똑같았다.
이교도나 악마와 엮이는 것은 속죄받을 수 없는 큰 죄악이었다.
당장 화형을 당한다고 하여도 이상할 것 없었다.
그동안 그 죄악을 범하며 시간을 되돌렸다고는 하나 처음부터 악마를 권속으로 삼으라는 얘기를 들으면 당연히 거부감을 느낄 테니 남자는 일부러 돌려서 표현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결국 계약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당신도 제 권속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계약의 대가는 72마리나 되는 악마와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조건을 단 남자 또한 악마였다. 어차피 계약을 해도 권속이 될 운명인데 계약을 건너뛰는 것쯤은 크게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됐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내 예상과는 달랐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보물에 포함되지 않아서 말이야.”
“당신도 악마잖아요.”
“악마지. 하지만 그 72마리에는 속하지 않아.”
“세상에는 제 생각보다 악마라고 불리는 존재가 많나 보네요.”
“원래라면 더 많았겠지만, 다들 사멸하여 딱 이 정도만 남았지.”
“73마리요?”
“나까지 포함한다면.”
고양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많은 숫자였다.
이번 기회에 아무런 대가 없이 그의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쉽지 않았다.
“인정할게요.”
그렇다면 방법을 바꿀 수밖에.
“당신이 말한 것처럼 저는 약하고, 무력하며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 없어요. 지금 이 순간마저 휘청거리고 있는 것이 여실히 보일 테니 길게 설명할 필요 없겠죠.”
“…….”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그 많은 악마를 찾아다닐 만큼 시간적 여유가 없어요.”
총 72마리나 되는 탓인지 아니면 남자가 잡아먹었기 때문인지 카임을 권속으로 삼았지만 그 힘이 크게 체감이 되지 않았다.
이왕 강해지길 바란다면 조금씩 강해져서는 안 됐다.
요행이 필요하다는 걸 마물 사냥꾼을 만나고 나서 확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완벽한 내 편 또한.
“당신만은 제가 이전과 같은 결말에 도달하길 원하지 않잖아요.”
지금은 약해졌다고 하나 그에게는 시간을 되돌릴 만큼 강력한 힘이 있었다. 지금의 나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인 힘이.
그런 그가 나의 죽음만큼은 바라지 않는다는 걸 일찍이 눈치챘기 때문에 그대로 쭈그려 앉아서 최대한 고양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동물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탓인지 남자의 표정을 읽어 내기가 힘들었다.
“제게는 당신만 있으면 돼요.”
굳이 72마리의 악마를 모두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눈앞에 있는 그만을 완벽한 내 편으로 만든다면 이 한 몸은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검지로 그의 턱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턱 아래를 살살 만졌다.
“우리의 관계에 꼭 다른 악마가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마 저뿐만이 아니겠죠.”
살짝 손톱을 세워 긁어냈다.
고양이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눈동자는 투명하여 내 얼굴만 비출 뿐, 그의 감정을 엿볼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내가 너무 어설퍼 보여 속으로 비웃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절로 조급해졌지만 괜히 속내가 티 나지 않도록 느릿하게 턱을 긁어 주었다.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소리는 다른 쪽에서 들렸다.
똑똑.
노크 소리였다.
곧이어 한나가 날 불렀다.
“리엘, 허기지지? 식사하러 내려가자.”
“……그래.”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대답 없는 그를 스쳐 지나, 문을 열자 한나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문을 닫기 전, 고개를 돌린 내가 속삭였다.
고양이는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랑 대화하고 있었어?”
“아니.”
“말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착각이겠지.”
무신경하게 대꾸하자 한나가 화제를 돌렸다.
“아까 보니까 고양이가 네 뒤를 졸졸 따라가더라. 아직 네 방에 있어?”
“응.”
“걔도 챙겨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매일 굶고 다니는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데리고 올래? 아 참, 고양이는 보통 뭘 먹더라. 길고양이라서 아무거나 줘도 상관없으려나?”
신이 난 듯 떠드는 한나의 말을 끊고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내가 따로 챙길게.”
“으, 응. 그래. 널 따르는 고양이니까 네가 잘 알 텐데 내가 너무 말이 많았지.”
“아냐, 그럴 수 있지.”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2층부터는 여관을, 1층에는 식당 겸 주점을 운영하는 가게였다. 한적한 2층 복도와는 다르게 식사 시간이어서 1층은 북적북적했다.
그 사이에서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마리사와 한스는 한눈에 띄었다. 나는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그들에게 다가가 빈자리에 앉았다.
“술은 마시나?”
“아뇨.”
앉자마자 마리사가 내게 물었다.
고개를 저었으나 그녀는 내 앞에 술잔을 내밀었다.
“마시지 못해도 한 모금 정도는 마셔 두는 것이 좋을 거야. 아무리 비위가 좋아도 제정신으로 마물을 계속 보지 못하니까.”
오늘 수많은 마물을 보았다.
그 때문에 어째서 그녀가 내게 술을 권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대충 입술만 축였다.
“보통은 그 광경을 보고 하루 이틀 만에 나가떨어지지.”
“회까닥 돌아 버리는 사람도 봤어.”
내 뒤를 따라와서 자리에 앉은 한나가 관자놀이 옆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그런 사람은 사냥꾼은커녕 마을에 숨어 살아야 돼. 그런데 리엘 너는 크게 놀란 것 같지 않아서 다행이다. 혹시 마물을 자주 봤어?”
“자주는 아니고, 길 가다가 가끔.”
“마주칠 때마다 마물을 죽인 거야? 그래서 놀라지 않은 건가.”
“아니, 이번이 처음이야.”
괜히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입에서 단내가 나는 것 같았다.
“안 그랬으면 내가 죽을 것 같았거든.”
“…….”
“인간은 벼랑 끝에 몰리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고는 하잖아. 그런 경우였던 것 같아.”
내가 없을 때 미리 시킨 건지 타이밍 좋게도 음식이 나왔다.
덕분에 대화가 잠시 끊겼다.
오랜만에 보는 제대로 된 음식이었다.
하지만 술과 마찬가지로 먹는 척만 했다.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 치우는 한스 덕에 먹는 척만 해도 티가 나지 않았다.
“리엘 양, 자네가 마물 사냥꾼이 되는 건에 대해서는 전서구를 보냈으니 이르면 내일이나 모레쯤 사제가 찾아올 거야.”
“그렇군요.”
“그리고 그 전에 마물을 쓰러뜨리는 걸 우리가 직접 본 것이 아니니 간단한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할 테지.”
“확인 절차라고 해 봤자 실력이 어느 정도 되나 보는 것뿐이니까 걱정하지 마.”
한나가 우물우물 먹던 음식을 꿀꺽 삼키고서는 말했다.
“확인 절차만 통과하면 곧바로 사냥꾼의 증표를 받을 수 있을 거야. 진짜 사냥꾼이 됐다는 의미지.”
그렇게 말하며 한나가 오른쪽 소매를 걷어 냈다.
그녀의 팔목에는 익히 보았던 마물 사냥꾼의 증표가 반짝이고 있었다.
“나랑 한스는 증표로 팔찌를 만들었어. 보통 대장처럼 목걸이로 많이 쓰던데 리엘은 어떻게 할 거야?”
“너무 이른 질문이 아닐까. 아직 증표를 받은 것도 아닌데.”
“마물을 보고 토하지는 않았으니 합격은 기정사실이지. 안 그래도 인력 부족이라서 웬만하면 통과시켜 줄걸.”
한나가 포크로 고깃덩어리를 찔렀다.
“명색이 마물 사냥꾼인데 사냥꾼인지 사냥감인지 모를 인간이 워낙 많아서 말이야. 네가 우리 팀이 되면 멍청하게 죽을 일은 없을 거야.”
그녀는 기쁜 듯이 고깃덩어리를 잘라 냈다.
그녀의 손 아래에서 해체당하는 고기를 보다가 조용히 미소만 지어 주었다.
그 뒤로 한나는 마물 사냥꾼이 되면 얼마나 좋은지 즐겁게 떠들었다. 그러던 중 처음 보는 남자가 마리사에게 다가오더니 살짝 목소리를 낮춰서 말을 걸었다.
“그 마물은 잡았습니까?”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더 필요한 겁니까?”
“늦어도 모레쯤에는 해결하도록 할 겁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나를 제외하고 다들 대화 내용을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남자가 떠난 후 나는 마리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그 마물이라니요?”
“어차피 이 일대에 유명한 얘기니 숨길 것도 없지.”
한숨을 내쉰 마리사가 다소 피곤한 얼굴로 술을 단번에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
“이 근처에 핵이 보이지 않는 특이한 마물이 있다네.”
“핵이 보이지 않는다면 마물이 아닌 거 아닌가요?”
“외양이 기괴해서 착각할 수 없어. 그냥 핵이 잘 보이지 않는 것뿐이야.”
그것을 떠올리고 있는지 마리사가 다른 곳을 보며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핵이 보이지 않으니 잡기 너무 까다로워 골머리를 앓고 있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만한 점은, 근처에 가기 전까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거지만……. 주로 사람 많은 길목 근처에 있다 보니 하루빨리 없애야 하는 놈이지.”
“우리 이전에 이 지역을 담당한 팀이 그 녀석한테 모두 당했대. 그래서 핵이 보이지 않아서 파괴할 수 없다면 아예 치워 버릴까, 하고 고민하고 있어.”
한나는 마리사보다 한결 가벼운 어조로 내게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얘기만 들어도 참 독특한 마물이었다.
“오늘은 쉬기로 했으니 이 얘기는 내일 녀석을 확인하면서 하도록 하지.”
그 뒤로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계속했다.
쌍둥이는 대식가였고, 마리사는 주로 술을 마셨기 때문에 틈틈이 종업원을 불러서 추가로 음식과 음료를 주문해야 했다.
먹는 속도가 점점 줄어들고, 테이블 위에 음식이 거덜 나자 열성적으로 먹던 한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한나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마리사와 나.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저도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따로 챙긴 음식을 들고서는 눈치를 보다가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은 고양이에게 줄 몫이었다.
“리엘 양.”
“예?”
마리사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할 말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아니, 아니네. 난 더 마시다가 들어가도록 하지.”
“그러면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편히 쉬게나.”
하루의 고단함을 잊기 위해 여기저기서 불콰한 낯짝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언성이 높아졌다.
나는 그들을 지나서 위로 올라갔다.
“늦었어.”
문을 열자마자 고양이가 아닌 인간의 모습을 한 남자가 침대에 걸터앉아서 나를 반겼다.
그를 한 번 보고서는 구석에서 자고 있는 고양이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으로 있는 걸 보니 결정을 내리셨나 봐요.”
허리를 숙여서 접시를 고양이 앞에 두었다.
깨어나면 알아서 먹겠지 싶어서.
다시 허리를 펴고 침대 쪽으로 몸을 돌리니 남자가 바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너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건 어렵지 않아.”
그가 부드럽게 내 팔목을 잡았다.
춤이라도 출 것처럼 다른 한 손으로는 내 허리를 감싸고, 끌어안았다.
고개를 들자 억지로 끌어 올린 듯한 남자의 입꼬리를 볼 수 있었다. 명백한 조소였다.
“원한다면 네 발가락 사이사이를 핥아 줄 수 있는데 그딴 호칭이 무슨 상관이겠어.”
“그렇다면 이제부터 저를 주인님이라고 불러 주실 건가요?”
“하지만 그 전에…….”
시야가 반 바퀴 뱅 돌면서 푹 꺼졌다.
나는 그대로 침대에 눕게 되어 남자를 올려다봐야 했다.
“날 감당할 수 있겠어?”
얼굴이 가까웠다. 남자가 살짝만 더 고개를 숙인다면 입술이 닿을 것만 같았다.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가 있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는 남자와 마주하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고양이 한 마리 키우는 것쯤이야 딱히 어렵지 않아요.”
“단순히 고양이 한 마리가 아닐 텐데.”
“그거야 두고 봐야 아는 일이죠.”
그가 내 왼손을 제 입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서는 내 손끝을 물어서 장갑을 벗겨 냈다.
팔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소매가 아래로 흘러내리고, 창백한 손이 드러났다.
피부가 하얀 터라 손목에 남은 붉은 멍 자국이 도드라져 보였다. 넘어지려는 나를 잡아 줬을 때, 한스가 너무 강하게 팔목을 쥐어서 남은 자국이었다.
그는 붉은 흔적을 느릿하게 핥았다.
내 손등에는 그의 상징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 녀석에게 했던 것처럼 날 대하면 통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못할 것도 없죠.”
남자는 살짝 짜증이 난 듯했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엇비슷하여 한스를 대했던 것처럼 한다면 넘어가 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잘못 짚은 모양이었다.
“눈빛부터 맛 간 놈과 같은 취급을 하다니. 굉장히 모욕적이야.”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인 분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가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놈보다는 인내심 있지.”
“인내심이요?”
“너는 지금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의 입에서 인내심이라는 단어가 나온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되묻자 그가 느릿하게 읊조렸다.
“마음 같아서는 할퀴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놈의 얼굴이 원래 어땠는지 잊어버릴 때까지 머리통을 바닥에 처박았어.”
피식자를 눈앞에 둔 굶주린 포식자와 같은 눈빛으로 남자가 나를 내려다봤다.
“박살 난 그놈의 머리통 앞에서 네 피를 취하는 것보다 기꺼운 일은 없겠지.”
흉포한 시선이 내 얼굴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오싹한 감각이 등줄기를 훑었다.
“하지만 참고 있는 거야.”
“…….”
“그놈처럼 앞뒤 분간 못 하고 무작정 침부터 흘리고 보는 머저리가 아닐뿐더러 분별력 없이 행동했다가는 네가 싫어할 테니까.”
아까보다 훨씬 누그러진 어조로 중얼거린 남자가 내 팔목에 입술을 맞췄다.
“이 정도면 인내심이 넘친다고 칭찬해 줄 만하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칭찬을 바라고 한 말인가요?”
“아예 사심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
머뭇거리다가 그에게 붙잡히지 않은 오른손으로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은빛 머리칼이 흩어졌다.
지그시 눈을 감은 남자는 나른한 한숨을 내쉬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선뜻 손을 떼기가 힘들었다.
기껏 만들어진 평화를 깨는 느낌이라서 섣불리 행동하지 못하고 있다가 제법 시간이 지난 후에야 손을 내려놓았다.
내가 쓰다듬는 걸 그만두자 남자는 여운을 곱씹듯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한층 더 짙어진 듯한 붉은 눈으로 날 내려다보며 살며시 손깍지를 꼈다.
“예전에는 이렇게 손을 잡고 있으면 너무 작아서 네가 사라질까 봐 걱정했어. 그 후로 제법 자란 것 같은데 여전히 작다는 게 신기하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남자는 내 손등에 쪼는 듯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의 입술이 푸르스름한 핏줄을 따라 점점 내려왔다.
“필멸자의 시간은 빠르게 흐르는데 어째서 너만은 그대로인 것 같은 걸까.”
발자국을 찍듯이 피부에 닿던 남자의 입술이 멍 자국에 닿고, 아직 완전히 낫지 못한 붉은 흔적을 핥았다.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천천히, 그곳만.
“그때도 지금도 널 위해서 조금만 더 참자고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널 보고 있자면 지나가 버린 시간을 채우려는 것처럼 갈증이 나.”
핥기만 하던 그가 그곳을 한입에 물었다.
상처는 삼켜지고, 내게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자가 치아로 살갗을 긁는 것이 느껴졌다.
통증 위로 새로운 통증이 덧대어졌다.
가볍게 스치는 자극이 노골적이었다.
나를 잘근잘근 씹어 삼킬 것처럼 깨물고 핥는 남자의 시선은 내게 고정돼 있었다.
“아.”
“네가 말라 죽어도 나는 아귀처럼 널 집어삼키려 들겠지.”
불시에 날 깨물고서는 남자가 입을 뗐다.
팔목은 처음부터 아무렇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했다. 남자가 새긴 잇자국을 제외하고서는.
흉터처럼 새겨진 잇자국을 보고 있자니 뒤늦게 완전히 그에게 말렸음을 깨달았다.
관계에 있어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권속이 되라고 먼저 제안을 했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이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남자는 내 위에 서 있었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잠깐 머뭇거리다가 옷의 목 부분을 끌어 내렸다.
그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목덜미가 더 잘 보이도록.
“당신이라면 기꺼이 몸을 내줄 수 있으니 갈증이 나면 마셔요.”
“갑자기 무슨 생각이지?”
“제 권속이 되면 참지 않으셔도 돼요.”
그가 하는 말을 전부 이해할 수 없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에게는 내가 필요하고, 나에게는 그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
나는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 모든 걸 이용해야 했다. 그것이 순수하지 못한 감정이라 하더라도.
“그게 바로 주인 된 도리가 아니겠어요?”
최대한 화사하게 웃으려고 노력했다.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마른침을 삼킨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목덜미에 더운 숨이 닿았다.
동시에 눈을 감았다.
입술이 닿고, 이어질 통증을 가늠했다.
하지만 통증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쪽’ 하는 소리만이 들렸을 뿐이었다.
남자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었다.
다시 눈을 뜨니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와 마주할 수 있었다.
“본인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않으면서 남의 식사를 챙기는 거, 나쁜 버릇이야.”
남자는 내가 사냥꾼들과 있을 때 음식에 제대로 입을 대지 않았던 걸 지켜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내가 억지로 네 입에 먹을 걸 물려 줘도 할 말 없는 상황인 건 너도 알 테지.”
“…….”
“내 주인이 되길 자처하면서 실제로는 내가 널 일일이 챙겨 주길 바라는 건가?”
찬 손이 입술에 닿았다.
“만약 그걸 원한다면 언제든 해 줄 수 있어.”
그는 내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속삭였다.
“누구의 숨인지 모를 만큼 입을 맞대고, 교미하는 뱀처럼 하나가 된 듯이 뒤엉켜서 살아간다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지.”
그리고 남자는 힐끔 고양이를 보았다.
“성배에 독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말이야.”
치부가 낱낱이 드러난 기분이었다.
곧바로 그를 밀어냈다.
남자는 생각보다 순순히 밀려났다.
“내가 잠시 고양이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해서 고양이를 키우는 것과 같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알고 있어요.”
다급하게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역시 어설픈 유혹은 통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를 부추기기만 한 듯했다.
괜히 더 도발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들 것 같아서 가장 먼저 고양이 앞에 놓은 음식부터 치우려고 했다.
침대에서 일어나자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휘청거리고 말았다.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는 누가 봐도 발목을 삐끗한 사람이었다.
“발목이 아직 안 나았잖아. 마저 봐 줄게.”
“충분히 견딜 만해요.”
“또 거짓말이지.”
그가 날 뒤에서 껴안았다.
“이제 허튼짓은 하지 않을 테니 내게서 도망치려 하지 마.”
“…….”
“알잖아. 내 인내심은 강하다는 걸.”
뒤를 돌아보자 그는 한결 온순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본심을 보게 된 탓인지 그것이 연기라는 걸 곧장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군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계약이 아닌 다른 형태로 그와 관계를 맺는 건 불가능한 일일 것이었다.
저렇게 완고한 태도로 입장을 굳히는데 한낱 인간인 내가 아등바등 발버둥 쳐 봤자 그의 눈에는 어설퍼 보일 거였다.
그러니 괜히 어설프게 꾀어내려고 노력할 바에 그가 주는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를 믿지 않고 있다고는 했으나 애초에 남자는 신에게 반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악마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황실과 공작 가문의 편에 설 리 없었다.
“편히 있어.”
발목을 치료하려던 순간이었다.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쾅쾅 거세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엘, 안에 있지?”
“저런.”
한나였다.
혀를 차는 남자를 밀어내고 서둘러 한쪽 장갑을 꼈다.
침대에서 벗어나서 문을 열자 화들짝 놀란 한나가 내게 따지듯이 물었다.
“너 누구랑 있었어?”
“아무도.”
“대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나 보지.”
한나는 초조해 보였다.
힐끔힐끔 내 어깨 너머를 보는 그녀에게 다정함을 가장한 미소를 보이며 부드럽게 물었다.
“왜 그래?”
“혹시 한스가 찾아오지 않았어?”
“아니.”
“오지 않은 거, 확실하지?”
“한나, 무슨 일 있어?”
평소와 비교하면 한나는 굉장히 여유가 없어 보였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되묻자 그녀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 그냥 한스가 안 보이길래. 늦은 시각까지 말없이 돌아다니는 애가 아닌데 걱정이 돼서.”
“한스는 어린아이가 아니잖아.”
“……그렇지.”
“근처를 산책하는 걸 수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위로에도 불구하고 한나는 또다시 내 어깨 너머를 보았다.
“잠자리는 괜찮아?”
“응, 덕분에.”
그녀는 내가 한스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떠나지 않고 계속 다른 얘기를 꺼냈다.
“가기 전에 고양이를 한번 봐도 될까?”
고양이는 구실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그녀가 내부를 볼 수 있도록 살짝 비켜 주었다.
“보다시피 고양이는 자고 있어. 내일 아침에 실컷 구경하도록 해.”
“아, 응. 그래. 고마워.”
더 이상 핑계를 댈 게 없는 데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 시켜 줬기 때문인지 드디어 한나가 떠났다. 나는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문을 닫았다.
“아까 하던 거 계속할까?”
문이 닫히자마자 그가 날 뒤에서 껴안았다.
그런데 또 기다렸다는 듯이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 소리가 들린 쪽은 문이 아니었다.
창문이었다.
“하아, 둘만의 단란한 시간을 보내려는데 쌍둥이가 전혀 도와주지를 않는군.”
“한스인가요?”
나무 창문이 굳게 닫혀 있는 터라 바깥에 누가 있는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내 입에서는 곧바로 특정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지금 이 시간에 내가 묵고 있는 방의 창문을 두드릴 만큼 대담한 기행을 벌일 사람이 한스밖에 없었으며 남자가 정확히 ‘쌍둥이’라고 표현한 탓이었다.
내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날 놓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내버려 두면 자는 줄 알 테니 무시하자.”
다정히 속삭인 남자가 내 뺨에 입을 맞췄다.
바깥에서는 한스가 어서 들여보내 달라는 듯이 재차 노크하고 있었다.
“창문을 열면 한스의 머리통을 깨 버릴 건가요?”
“지금이라면 가능할지도.”
내가 한스를 들여보낼 가능성을 보이자 남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머리통뿐만 아니라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지 마세요.”
전혀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를 저지하게 되었다.
“어째서?”
남자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 녀석들이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건 고양이 눈으로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어째서 감싸 주는 거지?”
“물론 당신이 그들을 죽이면 편하기야 하겠죠.”
비록 나는 살인자로 몰리겠지만 다시금 추적을 피해서 도망갈 수 있을 거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이미 늦었고, 악마의 손을 빌려 가며 남의 목숨을 빼앗는 건 찝찝했다.
더불어 내게 계획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직 그들이 필요해요.”
날 껴안은 남자의 팔을 풀어내고서는 창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똑같이 대해서 통하지 않는다고 했죠.”
잠깐 걸음을 멈추고서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이쪽은 얼마나 잘 통하는지 한번 보실래요?”
“썩 즐겁지 않은 광경이 될 것 같은데.”
“……제가 하는 일에 동조하지는 못하더라도 충동적으로 한스의 머리통을 깨면 안 돼요.”
“안 그래.”
재차 확인을 거치고서는 잠시 멈췄던 만큼 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굳게 닫혀 있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창문이 열리자마자 한스가 튕기듯이 들어왔다.
그는 가쁜 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시각에 웬일이야? 그것도 문은 내버려 두고.”
“이쪽이 더 빠를 것 같아서 벽을 타고 올라왔어.”
무엇을 그리 열심히 찾기에 두리번거리는 건가 했더니 그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구석에서 자고 있는 고양이에게 다가갔다.
“자고 있는 거야?”
“응.”
“이거 가져왔는데.”
그가 주머니에서 주먹만 한 덩어리를 꺼냈다.
길게 삐져나온 꼬리, 피가 묻은 털, 초점 없는 까만 눈동자.
쥐의 사체였다.
피 냄새가 짙게 풍겼다.
“고양이는 쥐를 좋아한다고 해서 잡아 왔어.”
이제 보니 한스의 손도 피범벅이었다.
쥐의 상태를 보니 본인의 피는 아닌 것 같았다.
“자고 있어서 못 먹겠지?”
“그렇지.”
유심히 고양이를 관찰한 한스가 울적한 표정으로 그릇에 쥐 사체를 하나씩 정성스레 올려 두었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쥐의 꽁무니만 쫓았는지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한나가 널 찾았어.”
“아, 그래?”
한나가 절박하게 한스를 찾은 것과 별개로 한스는 한나가 자신을 찾든 말든 별로 관심 없는 듯했다.
사실 온 신경이 고양이와 쥐에 팔려서 내 말을 제대로 듣고 있는지조차 의심되었다.
“어, 깼다.”
쥐의 꼬리를 가지고 고양이의 얼굴을 툭툭 치던 한스가 반색했다. 남자는 한스의 머리통을 깨는 상상에 젖어 있기보다는 내가 하는 일에 동조하려는 모양이었다.
푹 자다가 깬 척, 고양이가 하품을 했다.
하품을 하느라 크게 벌어진 고양이의 입에 한스가 억지로 쥐를 넣으려고 했다.
깜짝 놀란 고양이가 그대로 입을 닫고 한스를 할퀴었다.
그러나 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쥐를 고양이에게 들이댔다.
“왜 안 먹지?”
수차례 한스를 할퀴고서는 날카롭게 운 고양이가 잽싸게 도망갔다. 나는 그 뒤를 따르려는 한스를 붙잡았다.
“괜찮아?”
“응? 응.”
내가 무엇을 괜찮냐고 물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한스는 시선을 고양이에게 고정한 채로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프겠다.”
손등뿐만 아니라 뺨까지 할퀸 자국이 남아 있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기다란 선을 바라보고 있자니 고양이에서 시선을 뗀 한스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게 아픈 거야?”
“피가 나잖아.”
붉을 선을 따라 손가락으로 훑어 내렸다.
내 손길에 한스는 뜨끔했다.
“차가워.”
장갑을 낀 손이었기 때문에 차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차갑다고 했으면서 내 손을 피하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약을 발라야 하지 않겠어?”
“이게 아픈 거라면 한나가 해 줄 거야.”
그렇게 말하며 한스는 내가 만졌던 곳을 더듬어 보았다.
나는 그런 그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한스.”
“응?”
“너는 내가 너와 같은 사냥꾼이 되었으면 좋겠어?”
“응.”
“왜?”
“재미있잖아. 너랑 있으면 재미있어.”
깊은 고민 없이 한스가 대답했다.
“네가 고아원을 떠나지 않았다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그때 왜 떠난 거야?”
그의 목소리에서는 원망이 묻어 나왔다.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혔다.
고아원에 지내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서.
잊고 있었던 그리고 잊고자 했던 그때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제 떠나지 않을게.”
“정말?”
“더 이상 내게는 갈 곳이 없는걸.”
“다행이다.”
한스가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잠자코 있던 고양이가 다가와서 한스를 또다시 할퀴지 않았다면 계속 날 안고 있었을 듯했다. 그의 등을 벅벅 긁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자, 고양이가 시끄럽게 울었다.
그제야 한스는 떨어졌다.
그는 잠시 잊고 있었던 고양이한테 관심을 돌리며 분주히 방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쥐의 사체를 먹이려는 한스와 꿋꿋이 피해 다니는 고양이의 추격 탓에 또다시 실내는 분주해졌다.
“고양이한테 먹이를 주려고 찾아온 거야?”
“응. 열심히 찾았어.”
그렇게 말한 한스가 피 묻은 손을 불쑥 내밀었다.
“계속 구석으로 도망치길래 더는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쫓아다녔어. 쥐는 작고, 팔딱거려서 귀찮은 것 같아.”
마물을 코앞에 두는 것과 비견할 만큼 역겨운 악취가 났다.
단순 피 냄새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리며 그가 나가길 종용했다.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아. 나도 내일을 위해서 슬슬 자야 할 것 같으니까 돌아가는 게 어때?”
“아, 맞아. 자야지.”
늦은 밤인 걸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한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스는 아쉬운 듯이 구석에 숨어 있는 고양이를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창문이 아닌 문을 통해서 방을 나갔다. 한스가 떠나자마자 끝끝내 쥐를 먹지 않은 남자는 최악의 경험이었다며 인상을 찡그렸다.
내 허락만 떨어진다면 한스를 쥐의 사체와 같은 꼴로 만들 기색이라서 조심스럽게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금세 기분이 나아진 남자는 그 후로 잊지 않고 내 발을 치료했다.
덕분에 한결 가벼운 상태가 되어 침대에 누웠다.
어둠이 내려앉았다.
나는 습관적으로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았다.
어서 잠들기 위해 가만히 눈을 감고 있자니 한스가 놓고 간 사체가 저들끼리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나를 쳐다보고 있는 듯했다.
찍, 찍, 찍.
간헐적인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귀를 막았다.
고아원에 있던 그 시절로 다시금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방문 앞에 고양이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 * *
“리엘! 거기서 뭐 해?”
한쪽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검은 고양이를 내려다봤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누가 이런 짓을…….”
멍하니 고양이를 보고 있자니 가까이 다가온 한나가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럴 만했다. 발톱이 다 뽑혀 나가 있었다.
차마 계속 보고 있을 광경이 아니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고양이를 조심스럽게 들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내 굳은 표정을 봤기 때문인지 한나는 따라오지 않았다.
여관 주인에게 고양이를 보여 주니 오늘 하루는 재수가 없겠다며 자신이 빨리 버려 주겠다고 했다. 그녀에게 사체를 넘기며 혹시 고양이 울음을 듣지 못했냐고 묻자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고양이 울음은커녕 쥐새끼 우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면서.
사체를 처리하고서는 바깥으로 나갔다.
아침의 찬 공기가 폐부에 가득 들이찼다.
분주히 아침을 깨우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장갑을 꼈는데도 손바닥에 서늘한 사체의 감촉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악마 같으니라고.”
“그거, 나한테 하는 말인가?”
마치 처음부터 내 옆에 있었던 것처럼 남자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남자만 들을 수 있도록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누가 죽인 거예요.”
“그러게. 누가 죽였을까.”
“농담하는 거 아니에요.”
“나도 농담 아냐.”
슬쩍 남자를 올려다보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입꼬리만 올린 채 한결같은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막을 수 있었잖아요. 왜 당하고만 있었어요?”
“평범한 고양이니까.”
“…….”
“아무 힘 없는 고양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 그리고 묻고 싶은 건 따로 있었잖아.”
내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네가 준 음식에 독은 없었어. 수면제 또한.”
“그런데 누군가가 제 방에 들어와서 고양이를 죽이고, 발톱까지 뽑는 동안 세상모르고 곤히 잠만 잤다는 말이에요?”
“기척을 숨기는 데 능한 마물 사냥꾼이라면 가능할지 모르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고양이를 죽일 리 없었다.
내게 갑자기 몽유병이 생겨서 그런 참혹한 일을 저지를 일도 없었고.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셋이서 짜고 이런 일을 저지를 것 같지 않으니 결국 범인은 셋 중 하나였다.
“정확히 누구예요.”
고양이를 죽인 건 경고였다.
내가 쓸데없는 짓을 하면 고양이처럼 만들어 놓겠다는 경고.
괜히 발톱을 뽑아 놓은 것이 아니었다.
“누구 짓인지 이미 눈치챘잖아. 내가 말해 주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들 사이에 껴서 실컷 도발했다.
오늘내일이면 더는 안 볼 사이이니 무던하게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한 내가 물렀다.
문득 기다란 붉은 선이 떠올랐다.
그의 손등뿐만 아니라 뺨까지 길게 가로지르던 선이.
“……맞아요, 의미 없는 일이죠.”
다 한 패거리인데 내 추측에 확신을 얻는다고 하여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그들에게 벗어날 생각만 해야 했다.
“점점 더 네 숨통만 조이는 것 같은데……. 어때? 덫에서 나올 수 있을 것 같아?”
“고작 이 정도에 지레 겁먹고 도망칠 거라면 시작도 하지 않았어요.”
고양이 시체를 봤다고 덜덜 떨면서 무너져 내릴 마음가짐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다.
“저를 고분고분하게 만들 생각이었다면 도망치지 못하게 다리를 자르고, 다른 수를 쓰지 못하도록 팔을 자르며 말하지 못하게 입을 꿰매야 했어요.”
“…….”
“그 사람이 했던 것처럼 눈까지 뽑으면 완벽하겠네요.”
흔들릴지언정 무너지지 않았다.
나약한 마음으로 임했다가 잡아먹히는 건 나였다.
쓴웃음을 삼키며 괜히 여관 근처를 서성이다가 다시 들어갔다.
내가 밖에 있자 사람들이 날 쳐다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시선이 썩 곱지 않았다. 아마 나를 마물 사냥꾼으로 오해해서 그런 듯했다.
따끔따끔 찔러 오는 시선을 무시하며 시간을 때우다가 다시 여관에 들어가자 미리 자리에 앉아 있던 한나가 날 불렀다.
“리엘, 괜찮아?”
“응.”
한나는 내 얼굴을 샅샅이 훑어봤다.
표정 관리가 잘 되지 않아서 괜히 고개를 숙였다.
“안색이 창백해.”
“아, 당황해서 그래.”
“하긴, 아침부터 그런 걸 보면 당황할 만해. 누가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맛있는 거라도 먹으면서 기운 차리자.”
한나가 말하는 중에 한스가 내려왔다.
그는 뺨에 거즈를 붙이고, 손에는 붕대를 감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누군가 리엘의 고양이를 죽였어.”
“그래?”
어젯밤 고양이를 위해 쥐를 잡아 온 것치고는 선선한 반응이었다.
“아쉽네.”
한스는 입맛을 다시며 한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들을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네가 정 붙여서 기르던 고양이 아니었어? 많이 상심했겠다. 대체 누가 그런 거래.”
“그냥 길고양이야.”
“아니, 그래도…….”
“정 붙이지 않았어. 그러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살짝 목소리가 떨렸지만 전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다.
내가 더 이상 고양이에 대해 거론하길 꺼려 하니 한나 또한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아침 식사를 시킨 그들과 나는 다른 화제를 찾아서 대화했다. 그러던 중, 음식이 나오고 마리사가 내려왔다.
그녀는 어젯밤에 술을 많이 마신 것치고는 멀쩡한 얼굴이었다.
“오늘 하루는 푹 쉬도록.”
“갑자기 웬 휴가예요?”
“늦어도 오늘 저녁에는 사제가 온다고 하더군. 괜히 길이 엇갈리면 안 되니 오늘은 그냥 이곳에서 쉬도록 하지.”
짧게 내게 시선을 준 마리사가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음식을 먹는 척했다.
“그러면 그 마물은요?”
“내일 처리해야겠지.”
“마을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었다가는 저한테 돌멩이부터 던질걸요.”
주위에 듣는 귀를 의식한 듯, 한나가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제부터 되게 눈치 줬어요. 오늘 하루 놀면 나랏돈을 받아먹으면서 농땡이 친다고 뒤에서 험담할 게 분명해요.”
“그런 험담이 하루 이틀은 아니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마리사가 대낮부터 술을 주문했다.
한나가 무어라 해도 오늘 하루는 쉬겠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대장. 어차피 그들이 오기 전에 실력 확인은 간단히 할 필요가 있지 않아요? 실력 확인을 하지 않으면 마물 사냥꾼이 될 수 없잖아요.”
“……그렇지.”
단번에 맥주를 들이켠 마리사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한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그 마물을 잡는 걸로 리엘의 실력을 확인하는 건 어때요?”
“하지만…….”
“마물한테 얼마나 면역력이 있는지, 신체 능력은 어느 정도 되는지 확인하려는 거잖아요. 처음부터 핵을 파괴하라고 하는 것보다 미끼 노릇을 하는 것이 훨씬 덜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한나, 네 말도 옳지만 실력 확인은 사제들이 보는 앞에서 해도 상관없을 텐데 굳이 리엘 양에게 과중한 임무를 맡길 필요는 없지.”
마리사가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하는 것과 반대로 한나는 적극적으로 나섰다. 나를 사이에 두고 다투는 그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내가 입을 열었다.
“미끼라고 했죠.”
운을 띄우자 옆자리에 있는 마리사가 경직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걸 모르는 척하며 말을 이었다.
“저도 어서 한 명의 마물 사냥꾼으로서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커요.”
뒤이어 한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괜찮다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언뜻 보니 그들이라고 하여 모두 한마음 한뜻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 균열을 원했기 때문에 덫임을 알면서 자진해서 목을 내밀었다.
내가 관심을 드러내자 확연하게 희비가 엇갈렸다.
이곳에서 가장 걱정이 없는 건 한스뿐이었다.
“그러면 얘기를 들어 보고 네가 직접 결정하는 걸로 하자. 무리라고 생각된다면 거절해도 좋아.”
나는 한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나.”
“왜 그래요, 대장?”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식사가 끝난 후, 슈리엘이 방으로 올라가자마자 마리사가 한나의 어깨를 잡았다. 무의식적으로 힘이 실렸기 때문에 한나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가 신음하자 옆에 있던 한스가 마리사의 손등 위로 손을 얹었다.
“한스, 대장이 내게 할 얘기가 있는 듯하니까 여기 있지 말고 리엘을 따라가.”
험악한 기류가 맴돌았다. 그 중심에 있던 한나가 장난스럽게 한스를 툭툭 치며 말했다.
마리사와 한나를 번갈아 보던 한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슈리엘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대장, 무슨 일이에요?”
“오늘 중으로 륀느가의 둘째 공자께서 이곳을 찾아온다는 얘기, 들었을 거 아니야. 그런데 뭐? 마물을 잡으러 간다고?”
혹여나 누군가 들을까 싶어서 목소리를 낮춘 채, 마리사가 한나에게 따졌다.
잠자코 그 얘기를 듣던 한나는 “아, 그 얘기를 하려고 붙잡은 거예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대장, 그 애가 태연하게 기억을 잃었다고 했던 거, 기억 안 나세요?”
“…….”
“쟤는 그런 애예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애.”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하고, 아무렇지 않게 사람의 마음을 헤집어 놓고.
오랫동안 지켜봐 온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빈틈을 노렸다.
“그만큼 영악한 애한테 오늘 하루 마을에 발이 묶이게 됐다고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 것 같아요? 저희의 행동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채자마자 벗어나려고 들 게 분명해요.”
한나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마리사 또한 슈리엘이 공작 가문에서 찾던 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로 평소처럼 행동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던 중이었다.
“……공작가에서 직접 움직일 정도로 큰일인데 까딱 잘못하면 너도나도 끝이야. 그녀를 최우선으로 지켜.”
슈리엘을 최우선으로 지키라는 말을 듣자마자 한나는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사지를 잘라도 되고, 반병신으로 만들어도 되니 생포만 해라. 대신 몸뚱이는 절대 건드려선 안 된다. 그리고 아주 똑똑한 년이니 무슨 말을 하든 듣지 말라.”
반년 전쯤 마물 사냥꾼 모두에게 은밀히 내려온 지령이었다.
그 뒤로 인상착의가 일치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잊고 있었던 지령이기도 했다.
“제가 먼저 말 꺼내지 않았다면 위에서 내려온 지령을 잊어버려서 그녀를 허무하게 놓아줬을 거 아녜요. 저한테 따지기보다 고마워해야 하는 상황 아닌가요?”
“같은 고아원 출신이라는 어설픈 거짓말을 해서 그녀가 우릴 수상하게 여기게 만든 사람치고는 당당하구나.”
“거짓말 아니에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단호하게 부정한 한나가 들뜬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쯤 저희를 기억했을걸요. 만약 아직도 기억하지 못했다면 기억나게 만들 거고요.”
“허튼짓하지 마. 떠날 사람이야.”
“허튼짓이라니요. 사지를 잘라도 된다고 한 건 고귀하신 공작 나리예요. 그 말은, 장난감을 갖고 놀다가 망가져도 저희 책임은 아니라는 뜻 아닌가요?”
“한나.”
“농담이에요, 농담. 뭘 그렇게 정색하면서 쳐다봐요.”
한나가 까르르 웃으며 손을 저었다.
“오랜만에 재회한 친구와 마지막 인사만 나눌게요. 몸뚱이는 절대 안 건드릴 테니 걱정 말아요.”
마리사는 여전히 의심 어린 눈길로 한나를 바라봤다.
그러나 한나는 억울하다는 듯이 그 시선을 받아쳤다.
“정말이에요. 저희가 함께한 세월이 몇 년인데 저를 못 믿는 거예요?”
함께한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
마리사가 표정을 굳힌 채 한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많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시선으로도 마리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충분히 전해졌다.
“그보다 대장, 어깨에 힘 빼요.”
하지만 한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리사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그 얼굴로 돌아다니면 저라도 무서워서 도망칠 것 같잖아요.”
“너 지금…….”
“이럴 때일수록 웃어야죠. 활짝.”
한나가 손가락으로 제 피부를 위로 올려서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따라 웃으라는 의미에서 한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반응이 없자 얼굴에서 손을 떼어 냈다.
“제 의견에 동의 한 건 리엘이에요. 이제 와서 무를 수 없으니 저는 이만 사냥 준비를 하러 가 볼게요.”
잔뜩 신이 난 듯, 한나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리사를 스쳐 지나갔다.
마리사의 한숨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 * *
쌍둥이를 양옆에 두고 풀숲에 숨어서 마물을 보았다.
소의 머리에 삐쩍 마른 몸.
앙상한 갈비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하지만 그것의 길이는 성인 남성의 두 배쯤 되고, 덩치는 집채만 했다. 척 봐도 위험해 보이는 마물은 눈을 감고 있어 숙면을 취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샅샅이 훑어봤지만 그들이 말한 대로 붉은 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머리에 달려 있는 뿔이 황금색이었다.
그것의 뿔이 진짜 황금처럼 빛 아래에서 번뜩였다.
“마력을 쓸 줄 알아?”
고개를 저었다.
한나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단안경을 꺼냈다.
“안타깝네. 마력만 운용할 줄 알았다면 저놈의 핵이 보이지 않다는 걸 바로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하긴, 마력을 운용할 줄 알면 넌 마법사가 되었겠지.”
괜히 단안경을 만지작거리던 한나가 그것을 한번 써 보더니 나를 바라봤다.
“넌 마력을 쓸 줄 알아?”
“아니.”
“그런데 왜 들고 온 거야?”
“대장한테서 슬쩍했어. 혹시 모르잖아. 쓸 일이 있을지.”
여관에서 사제를 기다리고 있는 마리사가 이 소리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눈에 훤했다.
쌍둥이는 쌍둥이라고, 마리사의 속을 썩이는 것이 비단 한스뿐만은 아닌 듯했다.
마력을 쓸 줄 아는 사람이 없으니 쓸모없는 물건이 된 단안경을 도로 주머니에 넣은 한나가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왔다.
“알다시피 마물은 핵을 파괴해야만 죽어. 그렇지 않으면 재생하지. 그런데 저놈은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으니 아예 이곳에서 치워 버릴 예정이야. 어쨌든 마을 사람들의 안전이 우선 되어야 하니까.”
“치워 버린다니?”
“이 근처에 절벽이 있어. 제아무리 마물이라고 해도 절대 기어오를 수 없는, 가파른 절벽이야. 우리는 저 마물을 그곳으로 유인해서 떨어뜨릴 생각이야.”
“운이 좋다면 절벽 아래로 떨어지다가 몸이 산산조각 나서 핵까지 부서질지도 몰라.”
한스가 시선을 마물에 고정한 채로 중얼거렸다.
그는 마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래서 미끼가 필요하다고 한 거구나.”
“응, 빨라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겸사겸사 협동심도 볼 수 있을 것 같아. 팀의 호흡이 맞는 것도 은근히 중요해.”
언뜻 들으면 발만 빠르면 해결되는 일이라서 간단한 것 같았다. 적어도 홀로 마물과 맞서 싸우는 것보다 쉽게 들리긴 했다.
“그리고 넌 길을 잘 알지 못하니까 한스가 도와줄 거야. 한스는 우리 중에서 가장 발이 빠르거든.”
“맞아, 나 빨라.”
한스가 손을 번쩍 들었다.
한스의 동작이 제법 컸기 때문에 혹여나 마물이 깼을까 봐 힐끔 흘겨보았지만 그것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 이 방법을 대장은 반대했어. 결국 해치우지 못한 거니 다른 곳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냐면서.”
마리사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자신이 마물 사냥꾼인 것에 대해 엄청난 긍지를 갖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저히 어찌하지 못할 마물을 두고서 저런 반응이 나올 리 없었다.
“하지만 너도 봤잖아.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모습을. 결국 우리밖에 할 수 없고,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 탓이 되는 일이야.”
한나는 내 실력을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겸사겸사 골칫거리인 마물을 해치우려는 것 같았다.
“어때? 할 수 있겠어? 못하겠으면 다른 마물을 찾아보자. 적당한 크기의 마물이 근처에 있다면 그놈을 죽이는 걸로 하면 될 거야.”
나는 다시 멀찍이 떨어져 있는 마물을 보았다.
저 마물을 상대하는 것이 썩 나쁜 일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절벽 아래로 밀어 넣을 거라고 했지.”
“응.”
“거기까지 가는 길을 한번 확인해 볼 수 있을까? 가뜩이나 길을 모르는데 마물이 뒤에서 쫓아온다면 당황해서 한스가 있다고 해도 헤맬 것 같아.”
“그래, 알겠어.”
“그리고 혹시 소리 안 들려?”
―……죽여 줘.
“소리?”
―……를 죽여 줘…….
“무슨 소리?”
한나뿐만 아니라 한스까지 내 물음에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에게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내가 너무 긴장했나 봐. 환청을 듣게 되네.”
환청치고는 또렷했지만 괜히 더 말을 꺼냈다가는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것이 뻔하여 얼버무렸다.
한나는 내가 긴장하여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 건지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리엘, 넌 어제 우리가 사냥하는 것도 멀쩡한 얼굴로 지켜봤잖아. 마물에 대한 두려움만 없다면 무사히 끝낼 수 있을 거야.”
애써 웃어 보이며 이동하기 위해 한나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스가 덩달아 일어나려 했지만 한나가 저지하여 도로 앉아야만 했다.
“한스는 여기서 마물을 지켜보고 있어. 중간에 이동할 수 있으니까.”
“내가 리엘이랑 가면 안 돼?”
“저번에 네가 리엘이랑 같이 행동했잖아. 이번에는 내 차례야.”
“그래도.”
“한스.”
한나가 단호하게 한스를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냉정했다.
“순서를 지켜야지.”
“알겠어. 대신 빨리 갔다 와야 해.”
결국 한스가 꼬리를 내렸다.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그 감정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렇게 나와 한나는 한스를 마물과 함께 내버려 두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네가 왔다 간 후에 한스가 찾아왔어.”
“아, 그래? 아침에 한스한테 들었어.”
한스가 어느 정도 멀어졌다고 판단되었을 때 그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어젯밤 불안했던 모습과 달리 한나는 평온한 반응을 보였다.
한스가 뺨과 손에 거즈와 붕대를 감고 있던 것으로 보아 그녀는 이미 한스에게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네 말대로 한스는 어린아이가 아닌데 너무 유난을 떤 것 같더라고. 어젯밤에는 미안했어.”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잖아. 걱정이 될 수도 있지. 네 마음 이해해.”
처음에는 그들이 륀느가에서 얘기해 준 사실을 바탕으로 내 과거를 아는 척 연기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과 부대끼면서 고아원에 있을 적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고아원에서 한 몸처럼 저들을 아끼던 쌍둥이.
지금과 똑같았기 때문에 아주 오래된 기억의 서랍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불쾌하여 신경 쓰지 않았고, 고아원을 떠나자마자 빠르게 잊었던 그들이 몸만 큰 채로 지금 내 앞에 있었다.
“이쯤에서 한스와 동시에 양옆으로 갈라지면 방향을 바꾸지 못한 마물이 절벽 아래로 떨어질 거야.”
거의 절벽 끝에 다 와서 한나가 말했다.
“만약 그 방법이 먹히질 않는다면?”
“절벽 아래로 밀어 넣어야겠지. 만약 그런 일이 날 걸 대비해서 내가 저곳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활을 쏴서 도와줄게.”
“달리기 실력뿐만 아니라 몰아넣는 능력까지 있어야 하는구나.”
“그렇지. 마물 사냥꾼이 아니면 누가 이런 일을 하겠어.”
한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한나.”
“응?”
“잠깐 혼자서 주위를 둘러볼 수 있을까?”
“어? 어. 그래. 그러면 나는 저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한나가 멀어지고,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파르게 깎아내린 듯한 경사와 높은 고도. 까마득한 그 아래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가파른 경사만큼이나 거센 물길이었다.
한 걸음만 삐끗하여도 무저갱과 같은 아래에 추락하게 되었다.
쌍둥이가 주장한 대로 물살이 빠르고, 언뜻 뾰족한 바위까지 보여서 추락한 순간 인간이라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었다.
“당신은 그 목소리를 들었죠?”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이곳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악마인가요?”
“악마이자 마물이지.”
줄곧 남들에게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채로 내 곁을 지키던 남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악마와 마물은 다른 존재잖아요. 그 둘이 공존할 수 있는 단어였나요?”
악마는 인간과 비슷한 지능을 갖고 있지만 마물은 아니었다.
원초적인 본능에 이끌려 행동하는 것이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전혀 비슷하지 않은 단어를 나란히 내세워 존재를 정의 내리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면 제가 미쳐 가고 있는 건가요?”
내 옆에 있는 남자는 내 눈에만 보였다.
그를 만난 순간부터 겪었던 모든 일이 환상일 뿐이라면…….
나는 긴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깨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그 녀석은 보통의 마물과 다른 점이 있었지.”
“네, 뿔이 황금색이었어요.”
“길게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겪어 보는 게 낫겠지. 다시 그것과 마주하게 된다면 뿔을 만져 봐.”
남자가 온화하게 말했다.
“너라면 볼 수 있을 거야.”
덩치가 거대하여 근처에 다가가는 것마저 쉽지 않을 텐데 황금 뿔을 만져 보라니. 가능할지 모르겠으니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깜빡이며 마물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죽여 줘.
그것은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진짜로 죽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나는 평범한 인간이지만 그의 힘을 빌려서 죽음을 반복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죽음은 아니었다.
내 인생이 완벽하게 끝난 것은 아니었으니.
“정말 끝일까요?”
발을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흙 부스러기가 낭떠러지 아래로 흩어졌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죽음이 삶의 모든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출입구라면, 제가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내게도, 그 남자에게도, 샬롯에게도.
그가 내게 심장을 줌으로써 우리 셋의 관계는 꼬여 버렸다.
도저히 풀 수 없을 만큼 엉켜 버린 우리의 관계가 나의 죽음 하나로 풀 수 있다면 내가 퇴장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
나는 언제나 그들 사이를 방해하는 악역이었고, 그들의 해피 엔딩을 위해 일찍이 무대에서 내려왔으니 내가 죽은 이후의 이야기는 알지 못했다.
샬롯이 진짜 반려가 되어 행복하게 살았을지 아니면 끝까지 발악한 륀느가 승기를 차지했을지.
나의 삶이 다섯 번이나 스쳐 지나가는 동안 그 결말만은 확인하지 못했다.
이제는 그들의 그늘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니 누군가 들려준다고 해도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만약 제가 진짜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 사람이 가장 먼저 알아차리겠죠.”
왼쪽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장갑을 끼고 있는 손이었다.
그러나 손등에 떠올랐던 드래곤의 표식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와 내가 이어져 있다는 증거였다.
“저는 오늘 죽을 생각이에요.”
“……너.”
“아마 방금 전에 본 마물의 손아귀에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겠죠.”
죽음이라는 단어에 뒤따르는 고통에 대해서는 별다른 유감이 들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생각보다 더 덤덤하게 죽음을 언급할 수 있었다.
“얼마나 지났다고 약한 소리지.”
“살아 있는 한 그림자처럼 영원히 절 따라올 거예요. 한낱 인간인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죽음인가?”
“네.”
사람이 죽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했다.
지금 여기서 한 발만 더 앞으로 나아간다면 끝없이 추락할 것이었다.
한 발자국.
별거 아닌 거리가 생사를 좌우했다.
“부탁이 하나 있어요.”
고개를 들어서 남자를 보았다.
“만약 제가 실패한다면 도와주세요.”
“지금, 나보고 널 죽이라고 한 거야?”
“이제껏 해 왔던 것처럼만 하면 돼요.”
내 목소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차분하게 나왔다.
그것이 감정을 억누르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와 대조되었다.
“어렵지 않을 거예요. 당신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으니까요.”
나 혼자였다면 완벽한 죽음에 도달하기 힘들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결국 죽음 또한 힘이 있어야 완성될 수 있다니.
나는 내가 무력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진정 그것이 너의 소원이라면…….”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들어줄 수밖에 없어.”
그의 숨결과 함께 이마에 입술이 살며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때가 되면 내 이름을 불러 줘.”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누군가 기분 나쁘게 살살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나뿐인 나의 사제여.”
나는 남자의 이름을 몰랐다.
만약 남자의 이름을 알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건 그와 관계를 맺는 날일 것이다.
애써 찝찝함을 무시하며 남자를 밀어냈다.
한나가 있는 방향을 보았다.
그녀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시야에서 사라질 정도로 멀어지지 않았다.
계속 날 보고 있던 것인지 눈이 마주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제들이 오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내야만 해요.”
아무리 마물 사냥꾼이 부족해도 그렇지 사제가 부리나케 달려온다는 건 이상했다. 마리사는 사제라고 표현했지만 필시 황실이나 공작 가문 측의 사람일 것이었다.
대충 내 정체를 눈치챘지만 이때까지 어쩔 수 없이 장단을 맞춰 주는 모양새였으니.
“아, 그래. 륀느의 둘째 공자가 온다는 얘기를 들었어.”
“……네?”
“육체가 없으니 엿듣기 쉽더군. 그만큼 행동에 제약이 걸리긴 하지만 엿듣는 행동은 큰 힘이 들지 않지.”
남자는 본인이 지금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을까.
일순 당황하여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륀느의 둘째 공자.
제레미아 륀느.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의 얼굴이 오랜만에 떠올랐다.
“결국 둘째 오라버니께서 직접 찾아오시는군요.”
아랫사람을 시킬 줄 알았다.
그런데 공작가의 일원께서 직접 움직여 주다니.
그들이 어떤 상태인지 짐작게 했다.
“어머니께서 어지간히 애가 타나 봐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분노가 지워지기는커녕 더더욱 커졌을 어머니의 모습을 쉬이 상상할 수 있었다.
내가 드래곤의 심장을 얻게 되어 좋아했더니 자취를 감춘 것도 모자라서 죽었다고 알고 있었던 샬롯이 돌아왔으니 얼마나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갈까.
대놓고 하이넨을 경멸하던 어머니이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위안 아닌 위안은 드래곤의 심장이 내게 있어서 샬롯이 진정한 반려가 되지 못하는 것뿐.
기필코 나를 찾아서 억지로라도 황제와 동침하게 만들 생각일 게 분명했다. 그리고 아이를 낳게 되면 더는 필요 없으니 죽이려 들 것이고.
차라리 여기서 내가 사라지는 것이 나았다.
“마리사 씨와 오라버니의 발을 묶어 주세요.”
“날 믿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가 언제든 황제와 륀느가의 앞잡이가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을 마음에 두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왼쪽 장갑을 벗었다.
“대가예요.”
맨손을 내밀었다.
손등에는 드래곤의 표식이 아닌 그의 상징이 그려져 있었다.
“어떤 소원이든 등가 교환의 법칙은 적용하니 대가를 줄게요. 대가를 받으면 적어도 받은 만큼 일하겠죠.”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피식 웃은 남자가 조심스럽게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그리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정확히 그의 상징이 그려져 있는 부분이었다.
“대가는 이미 받았어.”
“저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어요.”
어리둥절했다. 피를 마시라는 의미에서 손을 내밀었더니 피는커녕 입만 맞추니 거절하는 건가 싶었다.
“아니, 너의 믿음을 얻었잖아. 그것만으로 됐어.”
남자는 해사하게 웃었다.
어쩐지 기쁜 듯 보였다.
“제 몸 안의 피를 반절 정도 뽑아 갈 줄 알았더니 의외네요.”
“그렇게 야만스러운 짓은 안 해.”
“그보다 더 야만스러운 행동을 봐서 그런지 설득력이 없어요.”
이미 대가를 받았다고 하는 남자의 입에 억지로 손가락을 쑤셔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장갑을 꼈다.
손가락 사이에 압박이 느껴질 정도로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여기까지 왔으니 뒤로 물러설 수 없었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남자가 내 부탁대로 마리사 씨를 감시하기 위해 사라지고, 나는 한나에게 다가갔다.
“다 둘러봤어?”
“응, 지금 당장 시작하자.”
“지금 당장?”
“사제들이 오기 전에 실력을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적극적으로 나오자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이던 한나가 방긋 웃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러면 내가 다시 한스에게 데려다줄게.”
“아니, 내려가는 길은 기억하고 있으니 혼자서 갈게.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어.”
한나를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그녀가 다급하게 나를 붙잡았다.
“혹시 대장이 준 피리를 아직 갖고 있어?”
“응, 그러고 보니 돌려주는 걸 깜빡했네.”
“피리 하나쯤이야 대장은 신경 쓰지 않을걸. 없으면 내 것을 빌려주려고 했는데 잘 됐다. 근처에 오면 그걸로 신호를 보내.”
“알겠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왔던 길을 그대로 걸어갔다.
한스가 헤어졌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마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나는?”
“위에서 대기하고 있어.”
“위에?”
“마물 몰이를 바로 시작할 거야.”
풀숲을 해치고 마물에게 다가갔다.
―……제발, 나를 죽여 줘.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나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하지만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달리 내가 바로 앞에 설 때까지 마물은 꿈쩍하지 않았다.
보통 마물이라고 하면 인간보다 오감이 발달하여 근처에 가기만 해도 기민하게 눈치채는데 이것은 그러지 않았다.
마물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매끈한 검은색 피부, 소의 머리통, 기다란 꼬리, 앙상하지만 커다란 몸체. 그리고 황금빛 뿔.
멀리서 봤을 때와 똑같았다.
마리사가 준 피리를 불었다.
삐익―.
큰 소리가 났다.
하지만 마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큼성큼 나아가는 나를 다급하게 뒤따라 온 한스가 깜짝 놀랐다.
멀리서 봤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청각이 퇴화된 듯했다.
마물 몰이를 하려면 마물을 깨워야 하는데 난감했다.
“이렇게 얌전한데 어떻게 피해를 입힌 거야?”
“얌전히 있다가 갑자기 미친 것처럼 달려들어.”
“미친 듯이 달려들 때까지 기다리기만 해야 해?”
“아니, 한 가지 방법이 있어.”
한스의 목소리와 마물의 목소리가 섞였다.
두 가지 목소리를 구별할 수 없었다.
계속 죽여 달라고 하던 목소리는 내가 근처에 가자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방해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중간, 중간 끊겼다.
목소리의 근원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남자가 내게 암시를 주었던 것처럼 마물의 황금 뿔을 만졌다.
동시에 흠칫 몸을 떨었다.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 기억.
내가 직접 겪은 것처럼 스쳐 지나간 타인의 기억 탓에 길게 여운이 남았다.
“리엘?”
“아, 미안해. 방금 뭐라고 했어?”
“저놈을 죽일 듯이 굴어야 움직이는 것 같아.”
한스가 검을 뽑았다.
그러자 마물의 붉은 눈이 드러나고, 그것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일어났다.
마물이 움직이자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멍하니 마물을 지켜보고만 있으니 한스가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뭐 해! 달려!”
뒤늦게 한스를 따라 달렸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지만 쿵쿵 바닥을 내리찍는 것 같은 울림으로 마물이 뒤따라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스.”
한스보다 살짝 앞장서서 달리며 그를 불렀다.
점점 숨이 차고 있었다.
“만약 저 마물을 죽일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거야?”
“못 죽여. 핵이 안 보이잖아.”
“심장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듯, 핵은 존재해.”
한스가 날 바라보았다.
나는 앞만 바라보며 최대한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할 수 있어.”
“하지만 한나의 계획은…….”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한 마물을 쓰러뜨린다면 다들 좋아할 거야.”
“…….”
“그리고 다들 우리를 인정하고, 그 누구도 너와 내가 팀인 걸 부정하지 않겠지. 영원히 널 떠나지 않게 되는 거야.”
곧 절벽이었다.
나는 한나가 들을 수 있도록 피리를 불었다.
“너는 내가 마물 사냥꾼이 되어 너와 함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
삐익―.
더는 피리를 불지 않았지만 날카로운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잔음이 귓바퀴를 맴돌았다.
“우리 함께 증명해 보자.”
나무가 그늘이 되어 주었던 숲을 벗어나자 강렬한 빛이 쏟아졌다. 원래라면 더 달려가야 했지만 멈춰 서서 몸을 돌렸다.
마물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오른쪽 손끝을 물었다.
그대로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며 장갑을 벗겨 냈다.
“네 곁이 내가 있을 자리라는 사실을.”
장갑 한 짝을 대충 주머니에 욱여넣고서는 검을 뽑았다.
나의 죽음까지 앞으로 한 걸음이었다.
* * *
맨손에 칼자루가 감기는 감촉이 좋았다. 절대 놓치지 않도록 오른손에 힘을 주며 검을 마물에게 겨누었다.
마물은 한 덩치 하는 탓에 제 앞을 가로막는 나무를 쓰러뜨리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몇 분 전에 얌전하다고 표현했던 걸 취소해야 했다.
마물 특유의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가까워지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당장이라도 날 집어삼킬 듯이 아가리를 벌리는 마물이 바로 코앞에 왔을 때, 빠르게 옆으로 굴렀다.
차마 방향을 틀지 못한 마물이 계속 앞으로 달려갔다.
자칫 잘못 했다가는 딱딱한 뿔에 부딪쳐 죽었을지도 몰랐다.
“한스, 내가 시선을 끌게. 일단 검을 집어넣고, 저것의 뿔을 잘라 내도록 해 봐.”
“……응.”
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알 것이다. 내가 개별 행동을 한 순간부터 처음에 짰던 계획은 모두 백지가 되었음을.
“대체 뭐 하는 거야!”
미리 대기하고 있던 한나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소리쳤다.
갑자기 내가 멋대로 움직이고 있으니 당황할 만했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는 거야?!”
알고 있었다.
열심히 무덤을 파고 있는 짓이었다.
마물이 콧김을 내뿜으며 내게 달려들었다.
다시 한번 구르고서는 일어나 크게 검을 휘둘렀다.
정확히 마물의 다리에 맞았지만 내 공격을 비웃듯,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한나! 녀석의 머리통을 쏴!”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건데?!”
내 명령을 듣고 한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외쳤지만 제멋대로 날뛰는 마물 앞에서 자세한 설명 따위 해 줄 여유는 없었다.
마물을 처리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했기 때문인지 더는 반문하지 않고 착실하게 화살을 쐈다. 솜씨가 좋아서 화살이 대부분 마물의 머리에 맞긴 했지만 박히지 않고 튕겨져 나갔다.
“왜 이렇게 단단한 거야!”
한나가 커다랗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마물은 덩치가 크고, 강했다.
게다가 단단하기까지 하니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었다.
유일한 위안이라면 덩치가 큰 탓에 동작이 커서 피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대신 마물의 공격을 한 번이라도 맞는다면 치명상은 피하지 못했다.
마물을 살육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무수히 사람들이 마물 하나를 어찌 못하여 죽어 나간 상황을 이해 할 수 있었다.
만약 약점을 알지 못했다면 나 또한 이런 식으로 맞서 싸우지 않았을 거였다.
……어서 나를 죽여 줘.
마물과 대치하는 와중에도 그것의 목소리가 귓가를 어지럽게 울렸다.
내가 검을 겨누는 순간부터 마물은 자신의 죽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힘껏 마물을 내리치고 있자니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어째서 남자가 내게 설명하기보다는 직접 보는 것이 낫다고 했는지 뿔을 잡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것은 한때 인간에게 경배의 대상이었으며 신앙을 잃고 악마라고 불린 적이 있었고, 현재는 마물이라고 일컬어졌다.
어째서 마물의 껍데기를 쓰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오랫동안 마물로 살아와서 이지를 잃고, 육체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은 알았다.
아주 긴 세월이었다.
마물의 황금 뿔을 만진 순간 형용할 수 없는 시간의 깊이가 날 훑고 지나갔다.
그러나 존재의 근원이 무엇이 되었든, 결국 악이라는 점은 같았다.
내가 약 올리듯이 마물의 공격을 피하는 동안 잽싸게 마물의 등에 올라탄 한스가 녀석의 뿔을 잡았다.
“녀석을 죽이면 날 떠나지 않을 거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내려다본 한스가 망설임 없이 검을 꺼내어 뿔을 내리쳤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굴던 마물이 뿔에 충격을 가하자마자 울부짖었다.
그것은 한스를 떼어 내기 위해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마물의 머리에 딱 달라붙은 한스는 야생마에 올라탄 것처럼 인정사정없이 흔들려야 했다.
그는 끝까지 버티면서 마물의 뿔을 때렸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비명이 간헐적으로 울렸다.
마물의 시선을 내 쪽으로 옮기기 위해 다가가려 했지만 워낙 기세가 흉흉한 터라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내가 짓뭉개질 판이었다.
쿵!
마물이 근처에 있던 나무에 머리를 박았다. 나무가 쓰러지고, 커다란 소리와 함께 한스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흙먼지가 나부꼈다.
서둘러 손을 저어 봤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한스!”
한나의 외침이 마물의 포효에 묻혔다.
소리가 나는 쪽을 집중해서 보았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언뜻 황금 뿔 하나가 반짝였다.
한스의 공격이 헛된 것은 아니었는지 마물의 한쪽 뿔이 부러져 있었다.
뿔을 잃은 마물이 분노에 찬 발길질을 했다.
만약 그대로 한스를 짓밟았다면 한스는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물은 한스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세히 보니 바닥에 반짝이는 물체가 있었다.
떼어진 뿔 조각이었다.
곧장 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이를 꽉 깨물며 붉게 달아오른 검으로 마물의 뒷다리를 내리쳤다.
이전까지 몇 번을 때려도 꿈쩍도 하지 않던 마물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흉흉한 눈빛으로 날 내려다봤다.
노여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마물이 앞발을 들었다.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안 돼! 리엘!”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자마자 검을 들었다.
방패처럼 사용한 덕에 아슬아슬하게 막아 낼 수 있었다.
어찌 막아 내긴 했지만 팔이 바들바들 떨리고, 당장이라도 검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납작하게 짓눌려서 죽을 운명이었다.
압력에 못 이겨 점점 무릎이 꿇리려고 하고 있었다.
더는 버티지 못하겠다고 생각한 그 순간, 무언가가 날아와서 정확히 마물의 눈에 꽂혔다.
단단한 피부와 다르게 눈은 연약한 부위였다.
마물이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나를 내리찍던 앞발을 들고선 뒷걸음질 쳤다.
마물의 눈에 꽂힌 건 화살이었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한나가 있었다.
그녀는 기절한 한스를 품에 안은 채 분노에 찬 얼굴로 마물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확인하고서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검을 다시 쥐었다.
뿔을 하나 제거했으니 조건은 충족했다.
몸 상태를 보아하니 이제 앞으로 남은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눈에 박힌 화살 탓에 잠깐 동요하던 마물이 아무렇지 않게 화살을 뽑아냈다. 화살촉만 사라진 화살이 마물의 손아귀에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날 바라봤다.
여러 번 확인했듯, 마물은 귀가 먹었다. 청각이 아예 퇴화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한스가 검을 뽑자마자 기척을 느낀 것처럼 눈을 떴다. 그 후로는 자신을 깨운 한스가 아닌 나를 계속 노리고 있었다.
마물이 반응하는 건 검을 든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금속.
금속이 근처에 있으면 그것을 먹기 위해 아가리를 벌렸다.
일반적인 마물한테 보이지 않는 행동이니 마물 사냥꾼이 고전한 것도 이해가 갔다.
그리고 지금, 황금 뿔이 잘린 마물은 뿔을 재생시키기 위해 이전보다 더 금속을 갈구하는 상태였다.
자신의 약점을 보여 줄 만큼.
나는 마물의 몸통 쪽으로 가지고 있던 금화를 던졌다.
동시에 뱃가죽이 벌어졌다.
앙상한 갈비뼈 사이로 붉은 핵이 보였다.
곧장 달려가서 도약했다.
게걸스럽게 금화를 삼키는 마물의 또 다른 아가리에 검을 밀어 넣었다.
저번에 마물을 상대하며 깨달은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장갑을 끼는 것보다 맨손으로 칼자루를 잡는 것이 훨씬 더 힘이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있는 힘껏 검을 찔러 넣으며 마력을 불어넣었다.
굉음과 함께 솜털이 쭈뼛 섰다.
마물이 날 짓뭉개기 위해 손을 뻗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검을 놓고 도망친다면 마물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지금 이 손을 놓는다면 이 검마저 잃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놓을 수 없었다.
내가 가진 모든 힘을 짜냈다.
마물의 울음소리와 죽여 달라는 비명 같은 고함이 고막을 찢어 낼 듯이 높게 울렸다.
“…….”
“…….”
마물의 몸통을 뚫은 검을 타고 까만 액체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더는 죽여 달라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검을 타고 흐른 마물의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제야 내가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검을 뽑아내고 마물에게서 살짝 멀어지자 앞발을 내리찍을 듯이 들고 있는 상태로 굳어 버린 마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돌이 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빛만은 여전히 흉흉한 그것은 끝내 옆으로 쓰러졌다.
엄청난 무게답게 큰 소리가 났다.
곧이어 따로 핵을 수거한 것도 아닌데 마물의 육신이 조금씩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마물 쪽으로 다가갔다. 동시에 발밑이 무너져 내렸다.
훅 하고 꺼지는 감각에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다행히 무언가가 잡혔다.
절벽 끝에 겨우 매달린 나는 위로 올라가기 위해 팔에 힘을 주었다. 가까스로 팔까지는 지상 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숨 쉴 때마다 흙먼지가 같이 섞여 들어와서 연거푸 기침을 쏟아 내야 했다.
마물은 쓰러뜨렸지만 여러모로 최악이었다.
“약속을 지켰어요. 이제 그쪽 차례예요.”
먼지처럼 부유하는 황금빛을 노려보며 성마르게 중얼거렸다.
마물의 뿔을 만진 그때, 그의 과거만을 엿본 건 아니었다.
[인간 주제에 악마를 권속으로 부리고 싶다니. 필시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인연을 끊어 낼 수 있다면 어떤 대가도 감당할 수 있어요.”
[겁도 없는 인간이군.]
“겁을 먹었다면 애초에 당신을 죽이지 못했겠죠.”
자조적으로 웃었다.
아무리 약점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강한 마물과 싸우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마물과 맞서 싸운 이유는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발버둥이라도 쳐야 했다.
[나는 48번째 악마, 황금의 안식 ‘하겐티’.]
빛무리가 오른손을 덮쳤다.
그리고 낯선 문양이 천천히 오른 손등 위로 떠올랐다.
[나의 주인이 될 자여. 너의 진정한 이름을 알려다오.]
[슈리엘.]
어금니를 꽉 깨물며 짓이기듯이 내 이름을 내뱉었다.
꼭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슈리엘, 나의 주인이시여. 황금의 이름으로 녹슬지 않는 복종을 맹세하리라.]
손등이 따끔거렸다.
동시에 문양이 선명히 반짝였다.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온몸에 스며드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은 혹시…….”
하겐티에게 현자의 돌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가 말을 끝맺기 전에 시야에 익숙한 신발 코가 잡혔다.
“한나.”
한나가 나를 내려다봤다.
한나가 보는 앞에서 현자의 돌이니, 엘릭시아니 떠들 수 없는 터라 하겐티와의 대화는 잠깐 뒤로 미뤄 두고 순진무구한 척 연기를 했다.
“마물을 죽였으니 시험에 통과한 거지? 어서 잡아 당겨 줘. 나 혼자서 올라가는 건 무리야.”
최대한 힘을 짜내서 밝은 어조로 떠들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깊은 침묵만이 우리 사이를 배회했다.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던 한나가 낮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너, 사실 기억 잃은 거 아니지?”
반신반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나는 지금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거짓으로 무장한 채 그들에게 다가갔음을.
“그리고 내가, 아니 우리가 누군지 기억해 냈지?”
더 이상 거짓말이 통하지 않을 상황인 듯했다.
처음부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한 거짓말이었기 때문에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맞아, 알고 있어.”
“역시 그랬구나.”
내가 수긍하자 한나는 이대로 콧노래라도 부를 것처럼 즐거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 줄까?”
그녀는 나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반년 전쯤에 말이야, 공작 가문에서 노란 눈을 가진 여자를 찾는다고 했어. 사지를 잘라도 좋고, 반병신으로 만들어도 좋으니 생포만 하라는 거야. 그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지.”
그녀의 목소리는 꿈을 헤매듯 달콤했다.
그러나 그 내용만큼은 아니었다.
“아, 너구나.”
한숨과 같이 마지막 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어떻게 바로 깨달았는지 궁금하지 않아?”
“아니, 전혀.”
“전혀라니. 왜 그렇게 심한 말을 하니.”
가식적으로 목소리 톤을 높인 한나가 내 손끝을 밟았다.
순간 손을 떼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윽.”
“궁금해해야지.”
한쪽 손을 느릿하게 밟으면서 한나가 내게 강요했다.
나는 최대한 신음을 삼키며 목소리를 내지 않도록 노력했다.
“아프니?”
아팠다. 겨우 내 몸뚱이 하나를 지탱하고 있는 손을 밟고 있으니 여러 충동이 나를 난도질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손을 떼어 낸다면 추락할 것이었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봤다.
여기 오기까지 몇 번이나 봤던 광경이 펼쳐졌다.
“나는 네가 더 아파했으면 좋겠어. 다시 만나자마자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가엾은 내 동생에게 생채기를 입혀 놨잖아. 그걸 생각하면 이 정도면 약과지.”
그녀의 목소리에서 심술이 느껴졌다.
아마 한스가 내 명령을 들어서 짜증이 난 것일 거다.
한스와 함께 마물과 맞서 싸우는 건 한나의 계획에는 전혀 없었을 테니까.
그로 인해 한스가 다치게 된 것까지 모두 한나의 심기를 거슬렀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고양이 새끼도 조금 더 괴롭혔어야 했는데.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서 발톱만 뽑았잖아. 그게 참 아쉬워.”
“역시 너였구나.”
“어머, 눈치챘니? 제대로 날 기억해 냈나 봐.”
고양이를 죽인 것이 한나 혼자만의 행동이라는 건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예전에도 그러했다.
고아원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둘만의 세상에 있던 쌍둥이.
그들 중 남자애는 선천적으로 통증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인지 굉장히 난폭하고, 감정적으로 결여돼 있었다.
볼 때마다 어디서 주워 왔는지 모를 소동물을 안고 있었는데, 안고 있는 동물은 항상 바뀌었다.
공교롭게도 남자애의 손을 거쳐 간 동물은 전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 때문에 다들 불길하다며 가까이하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애초에 누군가와 엮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필시 남자애가 죽였을 거라는 속닥임을 듣고만 있었다.
그때도 항상 남자애의 곁에 붙어 있던 쌍둥이 누나를 의심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 참.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깜빡했네.”
한나가 발을 치웠다.
“뭐, 몸뚱이는 아니니까 상관없겠지.”
더는 그녀가 밟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손끝이 아려 왔다.
“인생 참 재미있어. 고아원에 있던 애들 중에 네가 가장 잘살 줄 알았는데, 엉망진창이 된 채로 내 발밑에 있다니. 그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한나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쭈그려 앉아서 내 얼굴을 감상하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한테는 할 줄 모른다고 했으면서 마력을 운용할 줄 알더라.”
내가 검에 마력을 불어넣는 걸 목격한 듯했다.
검의 색깔이 변한 걸 마법 외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부정하는 것도 의미 없었기 때문에 나는 침묵했다.
“그런데 그거 알아?”
한나가 주머니를 뒤적이는 소리가 났다.
곧이어 단안경을 쓴 그녀가 고개를 훅 숙여서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너만 거짓말한 거 아니야.”
밤처럼 검은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물론 재능이 애매해서 마법사는커녕 평생 마물 사냥꾼으로 살아야겠지만, 덕분에 재미있는 구경을 했으니 만족해.”
그녀가 샅샅이 날 훑어봤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시선이 섬뜩했다.
“너, 더 이상 인간이 아니더라?”
“……뭐?”
“마물화가 진행되어서 핵을 품게 된 인간이라니. 가끔 마물한테 물려서 마물이 되는 인간이 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는데 그게 너일 줄 몰랐지.”
멍하니 한나를 바라봤다.
지금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또 그렇게 순진한 얼굴을 하네.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이제 와서 날 동요하게 만들기 위해 헛소리를 한다고 하기에는 그녀는 진지했다.
“하긴 대장이 네 앞에서 대놓고 핵의 유무를 확인했을 때도 전혀 모르는 눈치긴 했어.”
그들과 함께 마물을 잡으러 다닐 때 마리사는 단안경을 낀 채로 나를 쳐다보고는 했었다.
주위에 마물이 있으니 단안경을 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니 유독 그녀는 나와 눈이 자주 마주쳤으며 눈에 띄게 피곤해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마물의 핵을 품고 있다니.
사냥꾼들과 만나기 전에 마물과 접촉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네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지 인지하고 있는 거야?”
“헛소리라고? 아, 네 입으로 직접 말하기 싫어서 부정하는 거구나.”
한나는 키득키득 웃더니 정확한 발음으로 속삭였다.
“고귀하신 분들의 실험체. 공작 가문에서 마물과 관련하여 연구하다가 도망친 게 바로 너잖아.”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웬만해서는 한나가 거짓을 진실이라고 믿고 있구나, 하고 넘어갈 텐데 내게 마물의 핵이 보인다는 말은 도무지 흘려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네게 감사하고 있어. 덕분에 우리는 부모에게만 버림받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했거든.”
한나가 뚱하게 중얼거렸다.
“입양되면 잘살기는 무슨. 다 헛소리지. 태어나자마자 버림받는 운명을 짊어진 우리 따위가 남들처럼 살아갈 수 있을 리 없잖아.”
“…….”
“처음부터 우린 버림받고 이용당하다가 죽기 위해 태어난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나가 또다시 내 발을 밟았다.
신음은 겨우 삼킬 수 있었으나 형편없이 구겨지는 얼굴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얼굴을 하고 있네. 정말 사랑스러운 표정이야.”
“너 정말 미쳤구나.”
“그런 소리 많이 들어.”
한나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 참, 네가 물었지. 내 삶에 있어 너라는 존재가 무엇이길래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거냐고.”
그녀를 기억해 내지 못했을 때 했던 질문이었다. 물음에 대한 대답이 뒤늦게 돌아왔다.
“놓친 장난감이었어.”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뇌까렸다.
“갖고 놀지 못해서 계속 안달이 나고, 짜증이 나고, 거슬렸던 장난감.”
“…….”
“그래서 적당히 갖고 놀다가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억울하더라고. 내가 갖지 못한 걸 왜 남한테 줘야 해?”
그녀는 지금 진심이었다.
정말 억울하다는 듯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만약 네가 진짜 마물이라면 이대로 떨어져도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꼴을 보아하니 그건 아닌 것 같네.”
당연했다.
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여기서 떨어지면 즉사할 것이었다.
“널 내 손으로 직접 망가뜨리는 것으로 오랜 미련을 떨쳐 낼 수 있다니. 너무 행복해.”
한나가 달뜬 한숨을 내쉬었다.
“리엘, 넌 시험에 통과했어. 덕분에 마물 몰이는 성공이야.”
그녀가 사냥하려고 했던 진짜 마물은 나였다.
우리는 각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이 자리에 모인 거였다.
“뒷감당할 수 있어? 네 입으로 직접 말했잖아. 공작가에서 날 찾고 있다고. 그 사실을 잊지 마.”
“내 걱정은 하지 마. 마물한테 잡아먹히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게 되거든. 이 지역은 마물이 넘쳐나니 사람 하나쯤 사라져도 이상할 것 없지.”
그런 변명이 통할지 의문이었다. 그들이 찾고 있는 건 정확히 내가 아닌 드래곤의 심장일 테니까.
아마 내가 마물한테 잡아먹혀서 죽었다는 얘기를 듣는다면 그 마물부터 해부할 것이었다.
내가 곱게 죽지 못하는 운명이라는 것을 굳이 한나에게 알릴 필요가 없어 입을 다물고 있자니 그녀가 갑자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사실 다 농담이야.”
“농담?”
“내가 장난기가 많잖아. 이때 아니면 못하는 농담을 좀 해 봤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내밀어진 손을 잡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설마 지금까지 내가 했던 얘기를 다 진심으로 받아들인 거 아니지? 그냥 연기야, 연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한나가 가볍게 말했다.
“내가 장난이 심했지?”
“정말 장난이야?”
“그럼, 당연하지. 설마 진심으로 받아들였던 거야? 농담이니까 아까 했던 말은 잊고, 어서 내 손 잡고 올라와. 힘들잖아.”
“…….”
“어차피 내 손을 잡지 않으면 올라오지 못하는 거 알아. 고집부리지 말고, 어서.”
점점 손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이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처음부터 내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나는 한쪽 손을 떼어 내어 그녀가 내민 손을 잡으려고 했다.
농락당하듯 아슬아슬하게 잡히지 않았다.
손끝만이 그녀의 살갗에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그녀가 빠르게 손을 뒤로 빼냈다. 무언가가 내 손아귀에 잡혔지만 그것은 날 지탱해 주지 못했다.
“믿었니? 이것도 농담이야.”
한나가 나머지 한쪽 손을 밟았다. 강렬한 통증과 함께 반사적으로 손에 힘이 풀렸다.
지탱해 줄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자, 중력이 나를 끌어당겼다.
“잘 가, 친구야.”
한나가 손을 흔들었다.
점점 멀어지는 그녀는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욕설만이 공허하게 울렸다.
나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