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2)
맛있는 냄새가 오감을 일깨웠다. 따뜻하고, 포근했다. 그것을 인식하자마자 위화감을 느끼고서는 눈을 떴다.
주변이 지나치게 밝았다. 새벽은커녕 훤한 대낮이었다.
멍하던 정신이 날카롭게 벼려지면서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대는 텅 비어 있었고, 이불은 반듯하게 정리돼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무릎 위에서 곤히 자고 있던 고양이가 ‘야옹’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폴짝 안착했다.
곤히 자다가 깬 건지 하품을 하는 모습을 보니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완벽한 타인의 집에서 아무런 위기감 없이 자고 일어나다니. 그나 나나 별반 다를 것 없었다.
벽난로의 불은 꺼져 있었다. 까맣게 타고 남은 재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공기는 차갑지 않았다. 음식을 만들고 있기 때문인지 훈기가 돌았다.
노인이 어째서 날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지 않았는지 의문이었지만 크게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서둘러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창문을 통해서 나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뒷덜미가 잡혔다.
“식사는 하고 나가야지.”
낯선 타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뻣뻣하게 굳어서 그대로 가만히 서 있으니 노인이 나를 질질 끌고 갔다.
그녀는 나를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반항을 시도해 볼 수 없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밤새도록 끙끙 앓던 사람이 맞나 싶었다.
“공복으로 밖에 나가면 쓰나.”
그렇게 말하며 내 앞에 갓 만든 스튜 한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 모든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얼떨결에 식탁에 앉게 된 나는 스튜와 맞은편에 앉은 노인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는 의중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작은 존재는 어디로 갔는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속으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조금이라도 내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최대한 순진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고 애썼다. 하지만 썩 효과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녀를 돕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라고 하여도 그 경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돌팔매질을 맞더라도 입 한 번 뻥긋하지 못하는 입장이었다.
웬만하면 조용히 해결하고 싶지만 자꾸 안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노인을 기절시키고 도망쳐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불안한 침묵을 깨고 그녀가 드디어 내게 말을 걸었다.
“젊은이가 순진한 얼굴로 자고 있지 않았더라면 너무 놀라서 도끼로 머리통부터 찍어 버렸을지도 몰라.”
“……그랬더라도 할 말이 없죠.”
고개까지 절로 숙여지게 하는 발언이었다.
어설픈 변명은 도리어 독이 되었다.
실제로 그녀의 뒤편에 걸려 있는 도끼를 힐끔 흘겨보았다. 살벌하게 번뜩이는 그것이 무방비하게 자는 동안 내 목을 내리치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여겼다.
“도둑이면 도둑이지 병자를 간호해 주는 도둑은 또 무엇이람. 그런 천성으로는 도둑질도 제대로 하지 못했겠구먼.”
노인은 끌끌 혀를 찼다. 슬쩍 고개를 들어 보니 그리 엄한 시선은 아니었다. 오히려 동정에 가까웠다.
이대로 오해하게 내버려 두어 동정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이 여리면 도둑질은 그만두고 차라리 얼굴로 남을 뜯어먹으면서 사는 것이 나을 텐데. 주위에서 그런 얘기를 해 주는 사람은 없었나?”
“……예?”
유심히 내 얼굴을 살피는 노인의 말에 당황하여 잠깐 얼이 빠져 있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내가 쑥스러워서 그러는 것이라 생각하는지 부자연스러운 내 행동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아침이나 먹고 가게나. 내가 어디 가서 요리 못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어.”
“아니, 저는…….”
그녀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듯했다.
굳이 정정해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분위기를 타서 이만 떠나겠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말하던 도중 노인이 거세게 기침을 하더니 거친 숨을 내쉬면서 쓰러졌다.
“괜찮으세요?”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의 상태를 살폈다. 조금 전만 해도 반짝이던 눈동자가 흐리멍덩했다. 그녀에게 계속 말을 걸면서 황급히 찬장에 있는 약을 찾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약을 쓸어 담고서는 쓰러진 그녀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어떤 약이 필요하나요?”
그녀의 눈앞에서 약을 종류별로 흔들어 주었다. ‘끅끅’ 소리를 내던 노인은 식탁을 더듬더니 가루 형태의 약을 잡았다.
그것을 빠르게 물에 탔다. 그리고 그녀의 고개를 강제로 치켜들게 하여 억지로 입에 흘러 주었다.
반은 그녀의 턱을 잡고 있는 내 손등을 적셨고, 나머지 반은 무사히 삼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미약하게 정신이 남아 있었기 때문인지 사레 걸리는 일은 없었다.
괜히 잘못 삼켜서 상태를 악화시킬 수도 있는 터라 노심초사하며 지켜보고 있던 나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천천히 숨 쉬세요.”
과장되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그녀는 나를 따라서 숨 쉬는 시늉을 했다.
효과가 있었던 건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호흡이 점점 안정되었다.
나는 그녀의 등을 간헐적으로 다독여 주었다.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역시 하루아침 만에 나은 것이 아니었다.
괜찮은 척했던 거지 그녀는 여전히 병을 앓고 있었다.
흐리멍덩하던 노인의 눈에 이채가 돌기 시작했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는 부탁을 받고 왔어요.”
“……부탁?”
“당신을 알고 있는 사람이 제게 부탁했어요. 오늘이 고비가 될지도 모르니 곁에서 지켜봐 달라고요.”
그녀가 고개를 들어서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심했다.
“젊은이 혹시 마물 사냥꾼인가?”
이제야 내 복장을 제대로 본 건지 그녀가 나를 마물 사냥꾼으로 착각했다.
나를 도둑보다는 마물 사냥꾼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나았기 때문에 사실을 정정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녀는 내 예상대로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요 며칠 전에 마물 사냥꾼이 들렀다가 가긴 했지.”
근처에 마물이 없다 했더니 역시 마물 사냥꾼이 마물을 소탕하고 떠난 모양이었다.
“편히 쉬다 가게. 그리고 나는 괜찮아.”
“멀리 떨어진 마을에 약사가 있다고 들었어요. 한시라도 빨리 그분을 만나러 가세요. 홀로 가기 어려우시다면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아니, 굳이 그럴 것 없네. 젊은이한테 부탁한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나에 대해 잘 모르는가 보지. 하루 이틀 이런 것도 아니니 금방 또 괜찮아질 거야.”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었다.
“그보다 나 때문에 식은 스튜를 먹게 생겼군. 스튜를 다시 끓여 줄 테니 앉아 있겠나.”
본인의 몸보다 스튜가 더 신경 쓰이는지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게 등을 돌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언젠가 끝은 오기 마련이에요.”
“…….”
“죽고 나서 후회한다 한들 알아주는 사람은 없어요.”
“……젊은이가 벌써부터 인생에 회한이 많나 보군.”
거듭 경고를 한다고 하여 들을 것 같지 않았다.
작은 존재의 바람과는 달리 노인은 제 몸 상태에 대해 미련 없어 보였다. 아니면 치료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일찍이 희망을 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여기서 더 참견할 수 없었다.
물끄러미 그녀의 뒷모습만 쳐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쾅쾅 문을 두드렸다. 뒤이어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마가렛 할머니!”
“잠깐 실례하지.”
내게 양해를 구한 노인이 정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깊게 한숨을 내쉰 나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주제에 남의 인생에 간섭하려 들었으니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노인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문 앞에서 나누는 대화가 방음이 될 정도로 집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어린 방문객과 노인이 대화하는 소리가 여과 없이 들렸다.
“식사 중이셨어요?”
“그래.”
“공방에는 언제 가실 거예요? 할머니가 전쟁놀이에 쓸 검을 만들어 줄 거라고 잔뜩 자랑했어요!”
“네가 이 할미만큼 자라면 만들어 준다고 얘기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미리 만들어 주시면 되잖아요. 제발 만들어 주세요, 할머니이이.”
소년이 애교 있는 목소리로 노인에게 졸랐다.
평화로운 한낮이었다. 여태껏 나를 지배하던 긴장감과는 다른, 일상의 여유를 곱씹으며 벽난로 앞에 섰다.
작은 존재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쭈그려 앉아서 자세히 살펴보니 타다 만 나뭇잎이 남아 있었다.
작은 존재가 남긴 흔적이었다.
“악마는 어디로 갔죠?”
“아직 쉬고 있어.”
방에 남아 있던 고양이가 내게 대답했다.
날이 밝았건만 아직까지 쉬고 있다니.
그 때문에 곤혹스러운 상황을 겪은 나는 불만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타다 만 나뭇잎을 주웠다.
“같은 시간이라도 악마와 인간의 체감 시간은 다르지. 하루살이의 하루와 인간의 하루가 다르듯이.”
사라진 작은 존재를 대신하여 고양이가 대신 변명했다.
내가 짐작할 수 없는, 까마득한 시간을 살아온 존재이니 그럴 만도 했다.
“널 찾느라 가진 힘을 많이 소모했으니 완전히 회복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거야.”
“그런데 제게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 거예요?”
“그만큼 절박하니까. 알잖아.”
내 소매를 붙잡던 작은 손을 떠올렸다.
다시금 날 불쾌하게 만드는 애처로운 손이었다.
“그녀는 알고 있을까요.”
자신을 걱정하는 악마가 있음을.
짐작건대 모를 것이었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정확한 대답은 고양이 쪽에서 나왔다.
“모를 거야. 둘이 계약한 것도 아니니 악마는 인간을 알아도 인간이 악마를 알 도리가 없지.”
“악마는 절대 인간의 눈에 보일 수 없는 건가요?”
“악마가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는 상황이 아닌데도 인간이 악마를 볼 수 있는 경우는 단 두 가지야. 첫 번째, 악마와 계약했을 때. 그리고 두 번째, 인간이 가진 욕망이 강할 때.”
“그 말은 원한다면 인간에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뜻이네요.”
“그래, 하지만 지금은 안 돼. 힘이 이전만 하지 못하니 괜히 어설프게 모습을 드러내려 하다가 영원히 쉬게 될 수 있지.”
가만히 나뭇잎을 바라보았다. 작은 존재에게 기댈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깨워 줄까?”
“네.”
고양이가 앞발로 재를 툭툭 건드리니 작은 불꽃이 일었다. 그리고 그 불꽃에서 작은 존재가 나타났다.
나뭇잎 모양의 날개는 사라지고, 조류의 것과 비슷한 까만 날개를 달고 있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약사를 찾아가라는 제안까지 했지만 거절한 건 그녀예요.”
그를 보자마자 하고자 하는 말을 줄줄 내뱉었다.
더는 미련하게 날 붙잡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저는 이제 떠날 거라는 얘기를 전하러 왔어요. 제게 더 매달린다고 해도 이 이상 설득하지 않을 거예요.”
악마도 잠을 자는 건지 다소 잠이 덜 깬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던 작은 존재가 갑자기 포르르 날아갔다. 충격받은 건가 싶어서 그를 지켜보니 창가에 있는 화분 위로 올라가서 잎을 땄다. 그리고 그 잎을 제 날개에 붙였다.
……내 말을 못 들은 척하고 딴짓을 할 정도로 충격받은 것일까.
열심히 제 날개 위에 잎을 덧붙이는,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하는 작은 존재를 지켜보다가 결국 말을 걸었다.
“뭐 하세요?”
“날개를 붙이고 있어.”
“날개는 이미 있잖아요.”
“이러면 요정 같아 보이잖아.”
“……어딜 봐서요?”
내가 알고 있는 요정과 그가 알고 있는 요정의 정의가 다른 듯했다.
게다가 악마가 요정 같아 보이고 싶어 하다니.
무언가 이상했다.
“메그한테 요정처럼 보이면 된 거야.”
내 이상함과는 상관없이 굉장히 만족한 건지 작은 존재가 활짝 웃었다.
“메그가 치료받길 거부했다고 했지?”
“네.”
“그럴 줄 알았어. 내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 많이 난처했을 텐데 수고했어.”
“그토록 간절하게 빌더니 저를 붙잡지 않으시네요.”
“메그의 의견이니까. 적어도 어젯밤에 한고비는 넘겼으니 됐어. 덕분에 하루라도 더 함께할 수 있게 되었잖아.”
이상한 악마였다.
악마는 다 이상한 걸까.
그녀가 완쾌하길 빌었으면서 이제 와 물러서는 악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고마워.”
“천만에요.”
“그러면 이제 네 소원을…… 헙.”
작은 존재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본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닌 뒤편에 고정되어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노인이 우뚝 서 있었다.
검을 만들어 달라고 조르던 어린아이는 돌려보냈는지 혼자였다. 그녀는 천천히 내 곁으로 다가왔다.
“잎이 떨어져 있군.”
노인의 눈에 보일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 작은 존재가 뻣뻣하게 굳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작은 존재 옆에 타다 만 잎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시선이 그 잎에 고정되었다.
“부탁을 받고 내게 왔다고 했었지.”
“네.”
“혹시 잎이 젊은이에게 말을 걸었나?”
“어떻게 해! 메그가 알고 있어!”
노인이 한 말의 파장은 매우 컸다.
요정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작은 존재가 정신 사납게 돌아다녔다. 꺅꺅 소리를 지르는 작은 존재에게 정신이 팔린 탓에 제때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노인은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식후에 나와 같이 공방을 구경하는 건 어떤가?”
“공방이요?”
“은퇴하여 이제는 취미 삼아 망치를 때리고 있지만 이래 봬도 대장장이라네. 오랜만에 몸 풀 겸, 겸사겸사 젊은이의 무기도 한번 봐 주도록 하지.”
“혹시 무기를 판매하고 계시나요?”
녹이 슨 단도는 장식용 외에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당장 쓸 수 있는 검이 필요했던 차였기 때문에 내 목소리에서 다소 조급함이 묻어 나왔다. 그걸 읽었는지 노인이 미소 지었다.
“본격적인 얘기를 하기 전에 일단 텅 빈 배부터 채우러 가지. 그런데 고양이가 있다는 걸 이제야 눈치채다니. 나도 참 노안이 심각하군. 고양이한테는 우유를 주면 되겠나?”
노인이 고양이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는 손길을 피해 빠르게 내 다리 뒤로 숨었다.
어째서 메그의 손길을 피할 수 있냐고 꿍얼대는 작은 존재를 확인하고서는 한숨을 내쉰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얼굴을 보이게 되었으니 그녀에게서 쓸 만한 검을 얻어 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 * *
대충 먹는 척만 하려고 했는데 스튜 그릇에 바닥이 보이는 걸 끝끝내 확인하고 나서야 노인은 나를 공방으로 안내했다.
은퇴 후 취미로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듯, 따로 도제는 두지 않는 건지 공방은 휑했다. 화로에는 불이 꺼져 있었으며 그 근처에는 망치, 모루, 메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지금은 주로 농기구를 만들고 있지만 한때 대도시에서 잘 나가는 대장장이였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잔뜩 묻어 나왔다.
“처음에는 대장장이가 될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제 인생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놈팡이가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가 되겠다고 객기를 부리는 거 아니야. 너 같은 놈이 성공하면 나는 더 성공할 거라고 떵떵 외치면서 망치를 들기 시작했지.”
“…….”
“결국 최고가 된 건 그놈이 아니라 나였어.”
“그놈이 바로 죽은 메그의 남편이야.”
내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작은 존재가 엄청난 비밀을 밝히듯이 귓가에 속삭였다.
“심지어 더 오래 살아 있는 것도 나였지.”
그녀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표정마저 덤덤할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일부러 그녀를 보지 않았다.
“나같이 독한 년은 일찍 뒈지지도 못한다는 말이 딱 맞아떨어진 거야. 어째 골골거리는 나보다 먼저 갈 수 있는 건지.”
노인이 쯧쯧 혀를 찼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느릿한 걸음으로 주위를 돌아다니던 나는 무언가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휘청거리다가 겨우 중심을 잡고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바닥에 모루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정리해 두는 걸 깜빡했군.”
성큼성큼 걸어온 노인이 허리를 숙였다.
도저히 혼자서 들 수 있을 만한 무게가 아닌 듯해 나 또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노인은 모루를 번쩍 들어서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올려놓았다.
마치 깃털을 드는 것처럼 가볍게.
“한동안 이곳은 신경 쓰지 않은 탓에 엉망이야. 양해해 주길 바라네.”
모루 하나 드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은지 힘겨운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 얼굴로 노인이 말했다.
“보통은 요정이 왔다 가지만 요즘에는 힘에 부치는지 잘 보이지 않아서 말이야.”
“……요정이라고 말씀하셨나요?”
노인의 입에서 ‘요정’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나는 내 어깨에서 움찔움찔거리는 작은 존재를 힐끔 흘겨보았다. 신경 쓰고 싶지 않더라도 정신 사나워서 도저히 아닌 척할 수가 없었다.
“젊은이 눈에는 제대로 보이는 듯하니 말한 거네. 보이지? 요정이.”
“네, 요정인 건 처음 알았지만 보여요.”
내가 긍정하자 노인이 활짝 웃었다.
“괜히 이런 얘기 잘못 꺼냈다가는 이교도 취급받으면서 잡혀가기 일쑤니 평생 입 다물고 살았는데 인간도, 신도 아닌 존재는 있어. 아주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지.”
“메그의 어머니가 내 계약자였어. 지금은 죽었지만.”
옆에서 작은 존재가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믿음이 헛되지 않아서 다행이야. 정말.”
그녀는 정말 기쁜 듯이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작은 존재와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불현듯 노인이 거세게 기침했다.
또다시 쓰러지는 것은 아닐까 싶어 다급히 다가가자 괜찮다는 의미에서 그녀가 손을 가로저었다. 그런 그녀의 손바닥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젊은이가 낮에 말했지. 죽고 나서 후회한다고 해서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고.”
“네.”
“나는 후회하지 않아.”
손바닥에 묻은 피를 익숙하다는 듯이 닦아 낸 노인이 이어서 말했다.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차례대로 보내고 난 후라서 순리를 거스르면서까지 생명을 연장하고픈 마음은 없다네.”
“…….”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남은 자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르지. 야속한 일이야.”
“그래도 살아야죠. 한 번뿐인 삶인데 끝까지 살아야죠.”
“젊은이는 삶에 회한도 많고, 미련도 많은 것 같군.”
“그렇지 않은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요.”
무력한 나의 대꾸에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이 나이쯤 돼서 사랑하는 이를 하나둘씩 잃으면 집착도 희미해지지. 나는 너무 오랫동안 달렸어. 쉴 때는 쉬어야지.”
그녀의 손길은 다정했고, 목소리는 살짝 지쳐 있었다. 나보다 훨씬 앞서간 세월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한 가지 미련은 있었는데 젊은이 덕에 다 풀었네. 죽을 때가 돼서야 모든 미련이 사라질 줄 알았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그 미련이라는 게 무엇인가요?”
그녀의 시선이 내 어깨로 향했다.
정확히 작은 존재가 있는 곳이었다.
“어머니가 말했지. 죽음의 문턱에 서면 나도 요정을 볼 수 있을 거라고.”
그녀는 내가 아닌 작은 존재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직접 보게 된다면 평생 내 곁을 지켜 주어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어쩌면 벌써 들었을지도 모르겠군.”
“언젠가 직접 전할 수 있는 날이 올 거예요.”
작은 존재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얘기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그녀의 시선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검을 갖고 있지?”
“네.”
“어디 한번 볼 수 있을까?”
잠시 머뭇거리다가 녹슨 검을 건네주었다. 검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지만 도저히 쓸 수 없는 그것에 노인은 넋을 놓았다.
“요즘 마물 사냥꾼은 이런 식의 무기를 사용하던가. 엊그제 만난 사냥꾼만 하더라도 이렇게 오래된 무기는 사용하지 않던데.”
“……개인 취향이에요.”
“확실히 베이면 제아무리 강한 마물이라고 해도 골로 갈 것 같기는 하군.”
나 또한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역시 녹슨 무기는 다른 의미로 위험해 보였다.
“대체 이런 단검은 어디서 구할 수 있는 거지?”
“무덤이요.”
나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무덤이라는 장소가 주는 특수성 탓에 노인은 날 측은하게 쳐다봤다.
자세히 알아서는 안 될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 무기를 계속 들고 다닐 건가?”
“아니요, 처분하고 새로운 무기를 장만할 생각이에요.”
“그렇다면 내가 하나 만들어 주지.”
“아뇨,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이미 만들어 놓은 검 하나만 제게 파시면 되는걸요. 대금은 이만큼 지불할 수 있어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금화를 꺼냈다.
금화 한 닢이면 검 한 자루를 사기에는 과분한 대가지만 나는 일일이 아쉬워할 처지가 아니었다.
“돈은 넣어 두게. 그보다 역시 새로 만드는 게 낫겠어.”
“아뇨, 저는 당장 쓸 수 있는 게 필요해요.”
“어떤 종류를 찾는 건지는 몰라도 판매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심심풀이 삼아 만들어 놓은 거라서 젊은이 손에 맞지 않을 거야. 검 한 자루 만드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니 조금만 기다리게.”
노인이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사연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물 사냥꾼이 녹슨 검을 들고 다니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지.”
“하지만 몸도 안 좋으신데…….”
“이 상태로 십 년을 버텼어. 젊은이보다 건강하니 더 이상 걱정하지 말게.”
만약 첫 만남 때 병상에 누워 있지만 않았더라면 그녀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했을 거였다.
“잠깐 내게 손을 줄 수 있겠는가?”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다. 단단한 굳은살이 박인 손이 강하지 않은 힘으로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젊은이, 화염 마법을 쓸 줄 알지?”
“그걸 어떻게…….”
“젊을 적에 연금술을 배운 적이 있어. 마법사의 무기를 만들려면 그 정도 이해는 있어야 하니까.”
“역시 최고의 대장장이시네요.”
“그렇지?”
칭찬 한마디에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검사의 손은 아닌 듯하니 마법만 할 줄 아는 거면 지금보다 더 휴대하기 좋은 단검으로 만들면 되는가?”
“아뇨, 장검이 필요해요. 검을 쓸 줄 아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눈이 마주쳤다. 짧은 정적 끝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되도록 내일까지 만들어 보도록 하지. 그동안 손님방에 있게. 아 참, 손님방을 정리해 놔야 하는데.”
인상을 찡그린 그녀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아직도 정리하는 습관이 몸에 배지 않아서 문제야.”
“정리는 메그의 담당이 아니었으니까.”
추억을 곱씹듯이 작은 존재가 중얼거렸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짝 엿보게 된 기분이었다.
“하루만 기다리게. 딱 하루만.”
계속 떠나야 한다고 말한 탓에 내가 도망칠까 봐 걱정됐는지 노인은 재차 하루를 강조했다.
일이 이렇게 됐는데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가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로에 불을 피우고, 곧바로 노인이 작업에 들어갔다. 발이 묶이게 된 나는 멀찍이 떨어져서 노인을 구경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작은 존재는 노인을 돕겠다며 공방에 남겠다고 했다. 바깥 구경을 할 수도 없으니 일찍이 침대 위에 누워서 한참을 뒤척였다.
혹여나 또 함정일까 봐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정황상 그럴 리 없는데 쉽게 타인을 믿을 수 없었다.
초조했다. 정자세로 누워서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창밖이 어두워지고,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잦아들 때쯤 작은 존재가 홀로 돌아왔다. 늦은 밤이었다.
“메그가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 몰랐어.”
날개에 붙인 잎 한쪽을 태워 먹은 작은 존재가 살짝 훌쩍이면서 중얼거렸다. 한바탕 울고 온 걸까. 몸을 일으켜서 작은 존재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흐른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녀도 내 계약자처럼 갑자기 사라질까 봐 두려워서 네게 도움을 청했던 건데 쓸데없는 짓이었네.”
“그녀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아니, 되돌아보면 어릴 적에 제 남편의 머리통에 구멍을 낼 정도로 강인한 아이였는데 내가 너무 얕봤어.”
“……남편분께서는 괜찮으셨나요?”
“그날 이후로 조금 더 멍청해진 것 같긴 한데 어쩌겠어. 메그한테 덤빈 그놈이 잘못한 거지.”
작은 존재가 빙그레 웃었다.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이었다.
“그녀의 고통을 목격하게 되니 눈이 멀어서 현자의 돌을 맹목적으로 요구했는데 메그는 애초에 바라지 않았어. 내가 너무 앞서 나갔던 것 같아.”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작은 존재가 말했다.
“매일 고통 속에 살아가는 메그를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아프지만, 동시에 유한한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느껴.”
“…….”
“끝이 있으니 이 순간이 더욱 소중한 것일 거야. 아, 내가 너무 수다를 떨어 버렸네. 그러면 이제 약속했던 대로 소원을 들어줄게.”
잠깐 잊고 있었던 문제였다.
고민하게 되었다. 그에게 빌 만한 소원이 없었다.
나의 목적은 오로지 한 가지였고, 그가 이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당신이 저의 권속이 된다면 제게 있어서 무슨 이득이 있죠?”
“언제든 날 부르고, 나의 힘을 쓸 수 있어. 그리고 너에게만은 절대 거짓말을 할 수 없지.”
‘악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야. 너희가 신이라고 믿는 드래곤보다 긴 세월을 살았지.’
‘필요하게 될 거야.’
은발 남자가 했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처음 들었을 땐 본인에게 보물이 필요하다고 말한 줄 알았는데, 곱씹어 보면 보물인 악마가 내게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당신을 권속으로 삼으면 제가 강해질 수 있을까요?”
“내 힘이 네게 영향을 끼치니까 아마 강해질 거야.”
계약을 하게 되면 72마리나 되는 악마를 찾아다녀야 했다. 하지만 그것이 계약을 하지 않으면 눈앞에 있는 악마를 권속으로 삼을 수 없다는 말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내게 이득이 된다면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저의 권속이 되어 주세요.”
“보통 인간과는 계약을 하지 권속이 되진 않지만 약속이니까 지킬게. 악마는 약속을 꼭 지키는 존재이니까.”
작은 존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주변에 불꽃이 일었다. 한쪽 날개에 붙이고 있던 잎이 타고, 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나는 53번째 악마, 잔불의 전령 ‘카임’.]
처음 듣는 언어였다. 절대 알아들을 수 없어야 했지만 그의 이름은 낙인이 찍혀지듯 선명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나의 주인이 될 자여. 너의 진정한 이름을 알려 줘.]
나는 한숨처럼 내 이름을 내뱉었다. 내 의지로 말하는 것이 아닌 듯한 기분이었다.
[슈리엘.]
작은 존재, 카임의 눈이 놀란 듯이 살짝 커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착각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찰나의 변화였다.
[슈리엘, 나의 주인이시여. 잔불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영원을 맹세하리라.]
카임이 내 오른쪽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동시에 양손 모두 손등에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오른쪽 손등에는 처음 보는 문양이, 왼쪽 손등에는 익숙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왼쪽 손등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드래곤의 표식이었다.
“대체……!”
직접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기다란 드래곤이 제 꼬리를 물고 있는, 동그란 모양이 내 왼쪽 손등 위에 선명히 찍혀 있었다. 어째서 드래곤의 표식이 드러난 것인가.
그동안은 황제의 씨앗을 품어야 나타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황제를 포함한 그 누구와도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저를 집어삼킬 것처럼 내 손등 위에서 원을 만들고 있는 드래곤은 내가 어디로 도망가든 결국 남자의 손바닥 위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금쯤 남자의 손등에도 똑같은 표식이 새겨졌을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서, 어서 떠나야 해요.”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진 짐은 없었기 때문에 몸만 나가면 되었다.
“왜 그러는 거야?”
갑작스럽게 돌변한 나의 행동에 카임이 고개를 갸웃했다.
황급히 일어나느라 바닥에 쓰러질 뻔한 나는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그가, 저를 찾아올 거예요.”
말을 더듬었다.
형편없는 발음이었다.
혀가 꼬이는 걸 느끼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진정해.”
그런 나를 가로막은 건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고양이였다.
그가 붉은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봤다.
“아무 일도 아니야.”
“아무 일도 아니라고요?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팔을 뻗어서 그가 왼쪽 손등을 잘 볼 수 있도록 했다.
따끔하게 나를 찔러 오는 표식은 속을 점점 타들어 가게 했다.
“당황할 거 없어. 네가 현자의 돌의 힘을 쓰게 돼서 그런 거니까.”
경황이 없는 나와 달리 그는 침착했다.
나를 달래는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 남자의 손등에도 표식이 새겨졌을까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목이 졸리는 사람처럼 거칠게 숨을 내쉰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두려웠다.
또다시 드리운 남자의 존재가 너무나 거대해서 두려웠다.
“두려워할 것 없어. 자, 봐 봐.”
내 곁에 다가온 고양이가 앞발로 왼쪽 손등을 톡톡 쳤다. 멍하니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드래곤의 표식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그가 널 찾아오는 일은 없을 거야.”
드래곤의 표식뿐만 아니라 오른쪽 손등을 차지한, 처음 보는 문양마저 흐릿해지고 있었다. 나는 두 손을 가까이 놓아서 그 두 문양을 바라봤다.
전혀 다른 문양이 양손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건 내 상징이야. 내가 네게 종속되었고, 나의 주인은 너뿐이라는 증거지.”
카임이 오른 손등의 문양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섬뜩해졌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구역감이 치밀어 올라서 검지로 드래곤의 표식을 건드렸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살갗이 타는 냄새가 났다.
표식이 떠올랐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통증이 손등을 잠식했다.
“지울 수 없다면 덮을 거예요.”
이를 꽉 깨물었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신 보지 않도록.”
마법을 썼다. 손끝에 피어난 불꽃은 내 손을 따라서 문양을 그려 내기 시작했다.
까딱하다가는 다신 왼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태워 먹을 수 있었다. 화력 조절을 해야 하는 섬세한 작업이었다.
나는 삶의 끝에서 여러 번 그렸던 문양을 다시 한번 그려 냈다. 남자가 내게 억지로 쥐여 준 흔적을 덮기 위해.
“내 상징이잖아. 혹시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거야?”
“아뇨, 그 반대예요.”
손등에 붉게 남은 흔적을 내려다봤다.
돌이켜보면 이 문양을 그릴 때 항상 붉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잊지 않기 위함이에요.”
처절하게 문양을 그렸던 지난 삶을, 내게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는 사실을, 사라져 버린 나의 과거를.
내 손등에 새겨진 문양은 언제든 이 삶에서 도망칠 수 있는 탈출구가 아닌 그 모든 걸 잊지 않기 위한 다짐이었다.
은발 남자와는 다르게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르는 카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날 바라봤다. 조심스럽게 “아프지 않아?”라고 묻는 그에게 나는 다소 성급하게 계속 묻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드래곤의 심장, 아니. 엘릭시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얘기해 주세요.”
“엘릭시아? 으, 응. 알겠어.”
권속이 되면 그는 내게 진실만을 말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니 그가 알고 있는 걸 전부 털어놓아야 했다.
드래곤의 심장을 없애거나 꺼낼 방법을 모른다 하더라도 드래곤의 심장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아는 눈치였다.
내게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황실과 공작 가문만이 공유하고 있는 비밀을 알게 된다면 최종적으로 내가 알고자 하는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엘릭시아는…….”
통증 탓에 눈살을 찌푸렸다.
화력을 조절했지만 불은 불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익숙한 종류의 고통에 신경이 쏠려도 카임이 하는 말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카임의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림자의 주인인 검은 고양이는 입을 크게 벌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꿀꺽.
카임을 한입에 삼켰다.
그가 엘릭시아에 대해 운을 떼고 있던 도중이었다.
“뭐 하는 짓이에요?!”
그 순간 통증이 말끔하게 잊혀졌다. 곧바로 손을 뻗어서 고양이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어떻게든 카임을 토해 내게 만들어야 했다.
“뱉어 내요! 어서!”
“아, 어지러워.”
“뱉어 내요!”
고양이의 등을 두드렸다. 꽤나 거센 힘으로 두드렸건만 고양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미 삼켰는걸.”
“미쳤어요?”
“날 완전히 경멸하는 표정이네.”
“산 제물 운운할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당신이 그러고도 신이에요?”
“지금은 악마지.”
“악마가 악마를 먹는 것도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아요.”
하필 카임이 드래곤의 심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던 중이어서 남자가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닐까 의심이 되었다.
“그보다 손등부터 치료해야 하는 거 아니야?”
“뱉어요.”
은근슬쩍 화제를 바꾸려는 시도는 통하지 않았다.
고양이의 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하며 똑똑히 말했다.
“어서.”
“이미 소화시켰다니까?”
“아까는 삼키기만 했다면서요. 그리고 소화가 그렇게 빠를 리 없잖아요. 뱉어요! 뱉을 수 없다면 토해요!”
거듭되는 나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고양이는 순진한 눈망울로 날 쳐다봤다.
“지금은 이러는 게 나아. 어차피 이 녀석은 자세히 아는 것이 없는걸.”
“아뇨, 아닌 것 같아요.”
결국 억지로 그의 입을 벌렸다.
손가락을 넣고 혀를 꾹 누르자 앓는 소리를 냈다. 사람 소리가 아니라 고양이 소리를 내어 괜히 애꿎은 고양이를 괴롭히는 기분이 되었다.
몇 차례 더 카임을 구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고양이는 끝까지 뱉어 내지 않았다.
“손등 이리 줘.”
“삼키게요?”
“할 수만 있었다면 널 내 배 속에 넣고 다녔겠지.”
“끔찍하네요.”
얼핏 고양이가 웃는 것처럼 보였다.
표정 변화가 인간일 때처럼 확실하지 않았다.
질색하며 가만히 있으니 내게 다가온 고양이가 손등을 핥았다. 혀에 까슬까슬한 돌기가 돋아나 있어서 움찔하게 되었다.
“윽.”
차마 삼키지 못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고양이가 손등을 핥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많이 아프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갈까?”
“아뇨, 그건 비위 상해요.”
“상처받았어.”
상처받았다면서 말투는 여전히 장난스러웠다.
굳이 이런 식으로 치료해야 한다면 사람보다는 고양이가 나았기 때문에 나서서 그를 달래 주지 않았다. 대신 더는 신음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손등의 통증이 점점 진정되었다.
“진짜 먹은 거예요?”
“그러면 가짜로 먹는 것도 있나?”
미심쩍은 눈빛으로 고양이를 쳐다봤다. 마지막으로 내 손등을 핥은 고양이는 포만감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가 그 녀석을 권속으로 삼아서 다행이야. 치료가 빨리 되었어.”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너는 나의 사제니까 너의 힘은 곧 나의 힘이 되지. 계약하지 않더라도 아예 관계없는 건 아니니.”
“…….”
“그리고 방금 그 녀석을 몸보신 삼아서 힘이 넘쳐나지.”
“사기꾼.”
카임을 권속으로 두라고 한 이유도, 권속이 되자마자 카임을 먹은 이유도 모두 제 잇속을 채우기 위함이었다. 서슴지 않고 비난하자 고양이가 억울하다는 듯이 변명했다.
“결국 너를 위한 힘이야.”
“저를 들먹이지 마시죠.”
“힘을 얻었어도 방금 네 상처를 치료하는 데 다 썼어. 너무 화내지 마.”
“제가 치료받길 원한 적 있나요? 멋대로 굴어 놓고 이제 와서 제 탓 하지 마세요.”
나는 싸늘한 시선으로 고양이를 내려다봤다.
그는 자신은 아무 죄가 없다는 듯이 내 손등에 머리를 비볐다.
“그래도 네 상처를 외면할 수 없잖아.”
“뱉어 내기나 해요.”
치대는 고양이를 밀어냈지만 다시 달라붙었다.
하는 수 없이 고양이를 번쩍 들어서 문밖에 놔두었다.
“뱉어 낼 때까지 들어올 생각 말아요.”
“너무해.”
“너무한 건 그쪽이죠. 산 채로 잡아먹었잖아요.”
그대로 문을 닫았다. 고양이가 무어라 항의하는 듯했지만 그걸 듣지 않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팔을 뻗으니 손등에 찍힌 문양이 선명히 보였다.
단순히 마법진을 그리는 것만으로 마법은 발동되지 않는다.
마력을 불어넣어야 수식은 저가 가진 힘을 드러냈다.
처음 시간을 되돌렸을 때, 나는 마법을 쓸 줄 몰랐다. 하지만 간절히 바라는 것만으로 문양은 내게 반응해 주었다.
단 한 번도 이 문양이 내 부름에 응답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적 없었다.
이마 위에 손등을 놓고서는 눈을 감았다.
나를 태울 것만 같던 열기는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뜨거웠다.
* * *
“대장장이들이 손님에게 물건을 팔 때 흔히들 무어라 하는 줄 아는가?”
동이 트자마자 검 한 자루를 들고 내게 찾아온 노인이 외쳤다. 개운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 검은 내 인생 최고의 역작이라고 큰소리를 치지. 그만큼 자부심을 갖지 않은 검이 없는 거야.”
그녀에게서 검을 건네받자마자 한번 휘둘러보았다. 손에 감기는 감촉도, 휘두를 때 느껴지는 감각도 모두 최고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 검을 쥐고 있었던 것처럼.
“이 검 또한 인생 최고의 역작인가요?”
“그래.”
노인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만든 사람도, 쓰게 된 사람도 만족하는 검이었다.
“이전에 만들어 두었던 것이 있어서 작업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네. 그리고 마법을 쓰기 편할 게야. 원한다면 검에 화염 마법을 부여할 수 있어서 마물을 상대할 때 제격이지.”
속성 마법을 부여할 수 있는 검은 극히 드물고,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녀처럼 연금술을 심도 있게 배운 대장장이가 아닌 이상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연금술을 배웠다 하더라도 만드는 과정이 까다로워 숙련자조차 수차례 실패를 거듭하여 무기 하나를 만들어 낸다고 들었다.
그런 귀한 검을 하루 만에 만들어 냈으니 최고의 대장장이라는 칭호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검을 얻어 가네요.”
이렇게 좋은 검을 얻어 갈 줄 몰랐던 터라 잠깐 당황하던 나는 어제 주지 못한 금화를 건네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노인은 금화를 받지 않았다.
“아니, 돈은 됐다네. 내 옛이야기를 들어 준 것으로 값을 대신하도록 하지.”
“얘기를 들어 준 것치고는 너무 과분한 걸 얻어 가게 되어 마음이 편치 않네요.”
“내 얘기는 이 정도 값어치를 해. 이 나이쯤 되니 편히 대화할 사람마저 하나둘씩 사라지더군. 오랜만에 옛이야기를 실컷 떠들 수 있어서 고마웠네. 정 마음이 편치 않으면 하룻밤 나를 돌봐준 값이라고 생각하게.”
“제가 귀인을 모셨네요.”
“그렇게 말해 주니 기분이 좋구먼.”
그녀가 호탕하게 웃다가 일순 기침을 했다.
깜짝 놀라 다가가니 괜찮다는 의미에서 손을 저었다.
“이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일일이 반응해 줄 필요 없어.”
그녀와 이미 얘기를 모두 끝마친 뒤였다.
내가 왈가왈부 참견할 권리는 없었다. 대신 왼쪽 손등을 짧게 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장갑을 갖고 계신가요?”
“장갑?”
“장갑을 쓸 일이 생겨서요.”
그녀는 아무런 의심 없이 검은 장갑을 건네주었다. 장갑을 끼자 손등에 남은 흔적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인가?”
그녀는 별생각 없이 내게 물었겠지만 아직 의심이 남아 있는지 흠칫하게 되었다. 다행히 내가 대답하기 전에 아직 날 마물 사냥꾼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노인은 대답을 지레짐작했다.
“마물 사냥꾼 무리를 따라갈 예정인가?”
“아, 네.”
이제 이곳을 떠나야 했다. 자연스럽게 내 곁으로 온 고양이가 인사를 하듯이 ‘야옹’거렸다.
그는 아직 고양이 역할에 충실하게 임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요정은…….”
“요정?”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쯧, 젊은이가 싱겁기는.”
결국 고양이는 카임을 뱉어 내지 않았다. 아침부터 고양이의 뒷목을 두드려 봤지만 소득 없는 짓이었다. 차마 그녀에게 고양이가 요정을 먹었다는 괴상망측한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어색해 보이지 않도록 표정을 갈무리하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히 계세요.”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다시 한번 목적지를 향해 떠나는 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