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16)

Chapter 3. (1)

“……대체 뭐예요?”

“고양이 싫어해?”

“그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게 아니잖아요.”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는 고개를 숙여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원래라면 키 차이 탓에 고개를 들어야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동그란 붉은 눈동자가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익히 알고 있던 눈동자와 똑같은 색이었다.

문제는 그 외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거였다.

“근처에 고양이가 있길래 잠시 몸을 빌렸지. 아, 같이 다니려면 고양이보다 새가 편하려나.”

웬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태연자약하게 인간의 말을 했다.

그 꼴은 한 세기를 산다 하더라도 쉬이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한때 신이었으나 믿음을 모두 잃고 악만이 남았다고 자신을 소개했던 남자는 인간 같았던 외양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길 가다가 흔히 볼 수 있는 길고양이가 되어 있었다.

“네가 좋아하는 동물이 있다면 성심성의껏 찾아보도록 하지.”

“그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계실 텐데요.”

말투가 짐짓 엄하게 나가자 검은 고양이가 내게 다가와서 애교 부리듯이 발목에 얼굴을 비볐다.

“지금 힘이 바닥나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소멸되고 말 거야. 네가 원한다면 인간 모습을 유지할 수야 있지만, 그렇게 되면 너와 붙어 있어야 하는데 그건 아까 싫다고 했잖아.”

“그거야…….”

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틈만 나면 날 부둥켜안거나 슬쩍 손을 잡으면서 거리를 좁히는데 신경이 쓰이지 않을 리 없었다.

차라리 고양이가 나았다.

“이걸로 빚은 다 갚은 거예요.”

나는 그에게 빚을 두 가지나 지고 있었다.

둘 다 황제에게 벗어나기 위해 도움을 청하여 진 빚이었다.

하나는 피를 줌으로써, 다른 하나는 동행을 묵인함으로써 모든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

아무리 농담이었다고 하더라도 처음에 그가 요구한 것이 나 자체인 걸 생각한다면 싼값이었다.

차곡차곡 쌓이는 부채감이 부담스러웠던 차였다.

빚을 다 갚게 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게다가 이것저것 다 따져 봐도 내가 손해 본 것 없는 장사였다.

쉬지 않고 걸어갔다. 마치 날 쫓는 사람이 바로 뒤에 있는 것처럼 조급함이 느껴지는 걸음이었다.

성마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쯤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완벽하다고 여겼던 도주가 이미 한 번 실패한 적이 있었다.

잠깐이라도 멈추게 된다면 기다렸다는 듯이 황제가 내 앞을 가로막을 것만 같았다. 머리채가 잡힌 채 질질 끌고 간다 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침묵 속에서 바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새벽녘부터 이동하기 시작했으니 열 시간은 족히 걸었을 거다.

그동안 고양이는 투정 한 번 부리지 않고, 나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로 따라왔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지만 미리 노숙할 준비를 해야 했다.

인가와는 다르게 숲의 밤은 이르게 찾아왔다.

근처에 마물이 없음을 확인하고서는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왔다. 이 일대에는 비가 내리지 않은 건지 바싹 말라 있는 나뭇가지가 많았다.

그것을 한데 모아 놓고 불을 피웠다.

화염 마법을 쓸 줄 알아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불을 붙이는 것마저 험난한 과정이 되었을 것이다.

토끼의 목덜미를 잡아 들었다. 나뭇가지를 모으던 중 운 좋게 잡은 오늘의 양식이었다. 어설프게 기절시켰다가 나중에 놓칠까 봐 곧바로 숨통을 끊어 버렸기 때문에 토끼는 축 늘어져 있었다.

먼저 그것의 피를 뺐다. 그리고 피를 빼는 동안 돌멩이를 날카롭게 갈아서 토끼의 가죽을 벗기는 데 이용했다.

도구의 한계 때문에 영 시원찮았지만 불평을 늘어놓을 입장은 아니었다. 녹이 슨 단도를 갖고 있었지만 그 검을 사용했다가는 굶어 죽는 것보다 병에 걸려 죽는 것이 빠르리라.

전쟁이 끝난 후, 이 근처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떠난 탓에 지나가는 길에 짐승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사냥만 잘하면 웬만해서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특이 사항이라고 할 만한 게 있다면 생명에 위협이 될 만한 짐승이나 마물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짐승은 그렇다 쳐도 마물을 맞닥뜨리지 못한 건 찜찜했다.

마물 사냥꾼이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는 걸까.

마물이 지나치게 보이지 않으니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거나 마물 사냥꾼이 마물을 소탕한 후일 수도 있었다. 마물 사냥꾼 또한 황실 소속이었기 때문에 마주쳐서 좋을 것 없었다.

최대한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계속 오늘과 같이 평화로운 날이길 바라며 내장을 분리하고 나뭇가지에 고깃덩어리를 꿰었다. 고기를 태울까 봐 두 눈 부릅뜬 채로 나뭇가지를 살살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법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혹여나 냄새를 맡은 짐승이나 마물이 몰릴까 봐 걱정했는데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잘 익은 고기를 식혔다.

오늘의 첫 끼니였다.

“먹을래요?”

고기를 입에 담기 전, 얌전히 앉아 있는 고양이에게 물었다.

고양이와 나밖에 없는데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고 생각하지 못한 건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고양이가 대답했다.

“네가 먹을 것도 없는데 권하는 건가?”

“먹을 걸 앞에 두고 굶기는 건 동물 학대 같잖아요.”

속내가 어떻든 일단 겉모습은 고양이였다.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날 쳐다보는데 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양이의 육체보다는 네가 더 중요하니 사양할게.”

“고양이를 굶겨 죽일 생각이에요?”

긴 시간 동안 잠깐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은 강행군이었다.

지금 나만 하더라도 다신 잡히면 안 된다는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데 저 작은 짐승의 육체가 지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진짜 악마였네요.”

“내가 악마인 건 맞지만 고양이는 굶겨 죽이지 않을 거야. 걱정 마.”

“생각 바뀌면 말하세요.”

“그래.”

고깃덩어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고기 잡내가 심하게 났다.

향신료를 뿌리지 않아서 날것 그대로의 맛이 났지만 예전이라면 이것마저 귀하여 아귀처럼 먹어 치웠으리라. 사치스러운 음식에 한번 길들여지니 뭣 모르고 먹을 수가 없었다.

닿을 수 없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무지한 것이 나았다.

하루 종일 제대로 먹은 것도 없건만 허기를 잊은 것처럼 허한 배에 고깃덩어리를 억지로 욱여넣었다.

내가 눈앞에서 열심히 먹고 있는데도 고양이는 한 입 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대신 진짜 고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루밍만 해 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평범한 고양이라고 생각할 만한 모습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대충 뒷정리를 했다. 밤은 깊어진 지 오래였다. 활활 타오르는 불이 유일하게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휴식 시간이었다.

그러나 몸은 편할지언정 머릿속은 잡념이 복잡하게 얽혀 들었다. 차라리 몸이 고되면 머릿속이 고요할 텐데.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꽃을 멍하니 보았다.

얼마나 더 가야 할지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다. 현재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건 국경을 넘고 나서도 한동안 지금과 비슷한 상태라는 것이다.

상황이 나빠지면 더 나빠졌지 지금보다 좋아질 리 없었다.

내가 드래곤의 심장을 갖고 있는 한 절망적이고 암담한 예측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무릎을 끌어안아서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부정적인 미래만이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밤은 길었다. 긴 밤을 부정적인 미래를 떠올리는 데 쓰느니 차라리 아무 생각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육체는 피곤했으나 눈은 감지 않았다.

불침번을 서야 했다.

내 곁에는 고양이의 겉가죽을 쓴 악마가 있었지만 동행을 허락했을 뿐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없는 셈 치고 이 밤을 지키려 했다.

굳이 황제가 보낸 사람이 아니더라도 무방비하게 밤을 보내는 여행자를 습격할 만한 이는 많았다. 내게 있어 네 발 달린 짐승이나 두 발로 걷는 인간이나 달갑지 않은 건 매한가지였다.

피곤에 전 몸이었다. 하루 종일 무리하게 걸은 것도 모자라서 어제오늘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원치 않아도 눈을 껌뻑거리게 되었다.

고집스레 눈을 뜨려고 노력했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 주지 않았다. 어둠을 몰아내는 빛만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너울거리는 불꽃이 흐릿하게 보이다가 이내 투명하게 반짝였다.

“졸려?”

남자가 내게 물었다.

나른한 목소리였다.

그 얼굴을 보면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고개를 젓는 게 뭐 그리 웃긴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떠서 남자의 입매를 보았다. 살짝 올라가 있었다.

고양이의 입술이 아닌 완전한 인간의 입술이었다.

“고양이는요?”

“지금 모습보다 고양이가 더 좋아?”

“악마보다는 네 발로 걷는 짐승이 낫죠.”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며 대꾸했다. 남자의 얼굴을 정면에서 보게 되니 잠기운이 싹 가셨다.

“네 피를 받아 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잠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어.”

그가 한 말을 조각내어 곱씹었다. 지금 남자는, 또다시 흡혈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너의 피를 받아 갈 기회를 내게 줄래?”

“이미 받아 갔잖아요.”

대가는 이미 치렀다. 남자는 내 피를 원했고, 카타콤에서 그가 원하는 만큼 내어 주었다.

이제 우리 사이에 빚은 없을 텐데 남자는 지금 같은 요구를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한 번만 받아 간다고 했던가?”

“……사기 계약 아니에요?”

“계약 내용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쪽이 잘못한 거지.”

남자가 능청을 떨었다.

“이러려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거군요. 차라리 토끼 피를 마셔요.”

“토끼는 날 알지 못하지.”

“눈 색이 똑같은데 이번 기회에 친해져 보는 건 어떨까요?”

“안타깝게도 시체랑 대화하는 고약한 취미는 없어서.”

나는 남자를 노려보고, 남자는 내 시선을 맞받아쳤다. 남자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다정하게 날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도 굴하지 않았던 나는 머릿속으로 내 이익을 따져 보고서는 한풀 꺾인 목소리로 물었다.

“……얼마나 줘야 하는데요?”

“네가 나와 계약할 때까지.”

“하지만 계약을 하면 72개나 되는 보물을 찾으러 다녀야겠죠.”

어쩐지 일이 쉽게 풀리나 했다.

그 힘에 비해 내가 치른 대가는 너무나 별것 아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내게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실이 되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입을 열지 않았던 거였다.

그때 침묵을 선택했던 것이 이런 식으로 되돌아올 줄이야.

억지이니 아무것도 줄 수 없다고 버티고 싶어도 이제 와서 날 도와준 걸 무르겠다고 할 시엔 곤란해졌다.

눈앞에 있는 악마는 적으로 돌리면 귀찮아지는 인물이었다.

내게 하는 행동을 보면 적대감을 갖지는 않을 것 같지만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거창한 걸 원하는 것도 아니니 대충 바라는 걸 들어주어 넘어가는 게 나았다.

피 몇 방울 더 남자의 목구멍에 넘어간다 하더라도 내가 잃을 것은 없었다.

한쪽 손을 내밀었다.

부드럽게 내 손목을 잡은 남자가 검지를 입에 살짝 물었다.

동시에 따끔하고 아릿한 통증이 퍼졌다.

“이제껏 그래 왔던 것처럼 제 육신을 요구할 수도 있었잖아요.”

따끔한 부분이 살살 혀로 핥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이 두 번째이지만 전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차라리 다른 데 집중하고 싶어서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었다.

“왜 하필 제 피예요?”

그가 무엇을 요구하든 나는 거절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흥정은 서로 가진 것이 있어야 할 수 있는 행위였다.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여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주제에 왈가왈부할 권리가 있을 리 없었다.

내게 있어서 피의 가치가 그다지 높지 않기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의문이 들었다.

“악마에게도 규칙은 존재하지. 인간이 법과 도덕에 얽매여 있다면 악마는 이 제약에 얽매여 있어.”

“…….”

“너의 소원과 내가 가져갈 대가가 저울에 놓인다면 수평을 맞춰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균형이 무너지니까.”

“지키지 않으면 불이익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래. 그리고 네 피의 가치를 격하시키지 마. 넌 네 생각보다 대단한 아이고, 네가 있기에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거니까.”

“저는…….”

그는 내가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얘기했다.

의문이 고개를 들어서 입술을 달싹이다가 또다시 느껴지는 통증에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물었다.

“왜 꼭 저여야만 했던 걸까요.”

“무리할 필요 없어. 이전처럼 조금씩, 천천히 함께하다 보면 닿을 수 있겠지.”

그는 나를 이미 알고 있는 듯이 말했지만, 나는 그를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구체적으로 물으려니 그때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자세히 알고 싶어도 고통이 너무 심해서 회피하게 되었다.

남자 또한 그걸 아는지 한층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나를 달랬다.

“네 궁금증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신에게 소원을 빌면서 제물을 바치지. 경우에 따라서는 산 제물을 내놓기도 하고. 네 피는 내게 있어 그 제물과 같으며 힘의 원천이야.”

“산 제물이라니. 야만적이에요.”

이교도의 산 제물 풍습은 직접 본 적은 없으나 들은 적은 있었다. 가축을 바치는 건 그렇다고 치지만 살아 있는 인간을 제물로 삼는 건 차마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잔혹한 이야기였다.

피가 생명력을 상징하기 때문인지 굳이 산 제물 얘기를 꺼낸 탓에 새삼 그가 어떤 존재인지 다시금 반추할 수 있었다.

“네가 살기 위해 토끼의 가죽을 벗겨도 그 누구도 야만적이라고 비난하지 않잖아.”

남자가 내 손바닥을 느릿하게 핥았다.

“내게 있어선 별반 다르지 않은 행위야.”

낯선 감촉에 인상을 찡그렸다.

노골적으로 불쾌해하는 내 얼굴을 보고서는 남자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고 이보다 더한 걸 너와 할 수 없잖아?”

그는 굳이 돌려 말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의도가 적나라한 발언에 검지를 남자의 입에 쑤셔 넣었다.

“피만 마셔야 해요.”

“이미 하고 있는데 네 손길이 거치네.”

그가 장난을 치듯이 내 손가락을 살짝 깨물었다. 아프다기보다는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제아무리 악마라 한들 입 안부터 천천히 타들어 가는 고통을 즐기지는 않겠죠.”

남자가 깨문 손가락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리 세지 않지만 여린 살을 건드리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 마법은 보잘것없지만 그렇다고 아예 쓰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네가 주는 고통이라면 달게 받을 수 있어.”

내 손목을 잡아서 손가락을 빼낸 남자가 손끝에 가볍게 입을 맞댔다. 남자가 아무리 약해졌다고는 하나 태생적인 힘의 차이가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한 경고는 경고 축에도 들지 못한 것 같았다.

괜히 힘이 빠져서 가만히 있는데 반복적으로 내 손에 입을 맞추던 남자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이제야 왔군.”

동시에 머리 위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굉장히 가벼웠기 때문에 나뭇잎인가 싶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머리 위에서 나뭇잎이라고 생각했던 무언가가 외쳤다.

“너, 현자의 돌을 갖고 있지!”

나뭇잎이 시야를 가렸다.

이러고 있으니 꼭 나뭇잎이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귀찮으면 치워 버릴까?”

내가 나뭇잎을 집어 들기 전에 남자가 먼저 말하는 나뭇잎을 낚아챘다. 남자의 손에는 예상대로 나뭇잎이 있었다.

하지만 나뭇잎뿐만이 아니었다.

나뭇잎을 날개처럼 단, 엄지만 한 사람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당장 현자의 돌을 내놔!”

현자의 돌.

은발 남자는 드래곤의 심장을 현자의 돌이라고 불렀다.

나뭇잎 또한 남자와 같은 명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현자의 돌이든, 드래곤의 심장이든, 엘릭시아든 그 뜻만 같으면 되었다.

내 목적은 하나였으니.

척 봐도 인간이 아닌 저 존재는 심장을 꺼낼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것을 가져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지 않을 테니.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세요.”

드디어 찾았다.

심장을 빼낼 방법을.

너무 기뻐서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던 나뭇잎은 날 보더니 순간 넋을 놓았다.

대체 뭐가 문제인가 싶어서 엄지만 한 남자의 시선을 맞받아치자 살짝 얼이 빠진 음성으로 그것이 말했다.

“어차피 가져갈 수 없을 테니 한번 해 보라는 의미야?”

“……그런 의미로 들었다면 유감이네요.”

전투적인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들으면 그런 식으로 해석하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좋아, 싸우자! 누가 현자의 돌의 진정한 주인인지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하자!”

작은 존재가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여전히 대롱대롱 매달린 채였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전혀 기백이 느껴지지 않는 자세였다.

이대로 딱밤 한 번 때리면 작은 존재가 저 멀리 날아가서 승패를 가를 수 있을 듯했다.

“네가 원한다면 치워 줄게. 시끄럽잖아.”

“아뇨, 그러지 않아도 돼요.”

당장이라도 던져 버릴 것 같이 행동하여 남자에게서 그것을 빼앗았다.

“어지러워…….”

혹여나 다칠까 봐 조심하며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반쯤 넋이 나간 작은 존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손바닥을 내 눈높이에 맞춰서 꼼질꼼질 작은 몸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존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얼굴에는 평범한 인간처럼 눈 두 개, 코 한 개, 입 한 개가 모두 제대로 달려 있었다.

그렇다고 머리가 두 개인 것도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을 엄지만 하게 축소한 느낌이었다.

나뭇잎을 날개처럼 달고 있다거나 은발 남자와 마찬가지로 붉은 눈을 하고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러했다.

붉은 눈이 이토록 흔했던가.

살면서 마물 외에 붉은 눈을 본 적 없었고, 붉은 눈동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크기가 엄지만 하여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역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인간이 아닌 존재는 이 나라의 황제밖에 없다고 교육받았는데 단기간에 인간이 아닌 존재를 많이 만나는 듯했다.

“현자의 돌이라고 했죠? 엘릭시아를 말하는 것이 맞나요?”

“맞아, 현자의 돌!”

그것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마음대로 가져가세요.”

“정말?”

“네.”

“진짜?”

“네, 진짜요.”

이토록 빠르게 드래곤의 심장을 빼낼 수 있을 줄이야.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때맞추어 등장한 소인에 대한 의문을 갖기에는 내게는 하루라도 빨리 드래곤의 심장을 빼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드래곤의 심장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인물은 황제와 다섯 공작 가문의 가주들뿐.

그리고 태초에 드래곤이 있던 시대 전부터 존재했던 악마 또한 심장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소인은 악마일까.

그의 붉은 눈이 은발 남자와 같았기에 옳은 가정인 듯했다.

어찌 되었든 악마든 아니면 그도 아닌 다른 존재든 내게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를 저들의 알력 다툼에 이용하는 황제와 공작가의 틈바구니에 섞여서 내가 원하는 진실을 알려 주기는커녕 단물만 빠지고 버려지느니 소인에게 기대를 거는 것이 나았다.

“헉, 맞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그것이 화들짝 놀라더니 제 몸집만 한 나뭇잎 날개를 퍼덕이더니 날아올랐다.

그리고 내 손끝을 잡아당겼다.

“어서 가야 해! 급해!”

“어디로요?”

“현자의 돌을 이용해야지!”

“이용하다니요? 가져간다면서요.”

“빨리 와, 빨리!”

전혀 내 말을 듣고 있는 기색이 아니었다.

정신없이 날갯짓하는 소인은 누군가에 쫓기는 걸 자각이라도 한 듯이 다급해 보였다. 함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겨우 하루가 지났다.

황제에게 위치가 발각되기에는 아직 일렀다.

일단 드래곤의 심장을 꺼낼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됐기 때문에 작은 존재를 따라갔다.

그것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빠르게 날아갔다. 주위가 어두워서 놓치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반딧불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탓에 중간에 길이 엇갈리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그것을 따라서 당도하게 된 곳은 어느 마을이었다.

늦은 시각이었기 때문에 마을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어서 더 이상 작은 존재를 따라가길 망설였다.

국경을 넘기 전까지 타인과 접촉하지 않으려고 했다. 얼굴이 드러나서 좋을 것 없는 지금, 혹여나 사람과 마주치게 된다면 낭패였다.

그래서 일부러 마을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 속내를 모르는 작은 존재가 머뭇거리고 있는 내 등을 떠밀었다.

여기까지 와서 물러서기도 애매했다.

모두 잠든 시각이니 조심하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결국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채로 작은 존재를 따라갔다.

그것은 마을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한 가정집의 살짝 열린 창문 틈새로 포르르 날아갔다.

창문 앞에 멈춰 서서 창문 너머의 작은 존재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언제부터였는지 고양이로 돌아온 남자가 멀뚱히 나를 쳐다봤다.

내가 어디로 가든 따라가겠다고 말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뭐 해? 빨리 안 들어오고!”

창문에 착 달라붙은 작은 존재가 말했다.

나 또한 손가락 하나 겨우 집어넣을 수 있는 틈새로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 전에 창문을 통해서 들어가는 건 무단 침입이었다.

누군가 목격한다면 도둑으로 몰릴 게 뻔했다.

“정문으로 들어갈 수 없는 건가요?”

창문이 아닌 출입문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는 기본 상식을 아예 생각하지 못한 건지 작은 존재가 두 눈을 깜빡였다.

“열어 줄게. 기다리고 있어.”

문이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니 처음부터 잠겨 있지 않았던 것처럼 문이 열렸다.

“어서 들어와.”

작은 존재는 나를 방으로 안내했다.

그 안으로 들어가자 색색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긴 나는 소리의 근원과 가까워졌다.

“현자의 돌이 필요해.”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이 주름진 얼굴을 비췄다.

노년의 여인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를 면밀히 살피고서는 짧은 감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인간이군요.”

“당연히 인간이지!”

지금은 고양이인 척하고 있지만 자신을 악마라고 소개한 은발 남자나 절대 인간일 수가 없는 작은 존재가 내 곁에 있었다.

게다가 엘릭시아와 관련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니 막연히 인간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이분과 엘릭시아가 무슨 관계죠?”

“많이 아파. 그러니까 현자의 돌이 있다면 금방 나을 수 있을 거야.”

살며시 여자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뜨거웠다.

단순히 아프다는 이유로 엘릭시아를 가지려고 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긴 했으나 타인의 인생이지 내 인생은 아니었다.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필요하면 가져가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내가 했던 말을 다시 곱씹어 봐도 해석이 잘못될 만한 여지는 없었다.

이번에는 또 어떻게 잘못 들었나 싶어서 작은 존재를 바라보았다.

“……너 계속해서 나보고 가져가라고 하는데, 혹시 그 힘을 쓸 수 없는 거야?”

“못 가져가세요?”

물음에 물음이 이어졌다.

대화의 흐름이 전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인지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가져갈 수 있으면 아주 옛날에 억지로 빼앗았지.”

“아예 없애는 방법은 알고 있어요?”

“가장 완전한 물질을 없앤다고?”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내가 나가려고 하자 작은 존재가 빠르게 날아서 바로 내 얼굴 앞에 섰다.

“이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죽을 거야!”

“그분이 죽는 거랑 저랑…….”

상대에게 내가 원하는 정보가 없다는 걸 안 순간부터 내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무슨 상관이죠?”

작은 존재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서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같은 인간이잖아. 여기까지 왔으니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거 아니야?”

드디어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드래곤의 심장만 없었더라면 언제 황제가 날 찾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좀먹히고 있지는 않았을 거였다.

그런데 제대로 헛발을 짚었다.

“자비라는 건 말이에요.”

“…….”

“가진 자들만이 베풀 수 있는 특권이에요.”

나는 작은 존재를 옆으로 밀어내며 스쳐 지나갔다.

가야 할 길이 멀었다.

위험 부담을 떠안으면서까지 이곳에 머무를 여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야영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려는데 오른쪽 소매가 당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걸음을 멈추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상했던 대로 작은 존재는 필사적으로 내 소매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내가 그를 바라보자 붉은 눈동자를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며 성마르게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다 들어줄게!”

작은 존재가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묻어 나왔다.

“나와 거래하자. 얘만 살려 주면 그 어떤 소원이든 들어줄게. 아직 힘이 남아 있어서 소원쯤은 들어줄 수 있어.”

그는 내게 있는 엘릭시아를 빼내는 방법을 아예 모르는 듯했다.

엘릭시아를 빼 달라고 소원을 빌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용 가치는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뿐이니까.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소인의 제안을 거절하려는데 아래쪽에서 고양이가 선수를 채 갔다.

“좋은 기회잖아. 권속으로 삼아. 필요할 때마다 써먹게.”

너무 작아서 딱히 써먹을 일도 없어 보였다.

나는 작은 존재의 노동을 착취하라는 제안을 태연하게 하는 고양이를 무시했다. 그런데 고양이가 말을 하는 모습이 신기한 건지 작은 존재가 삿대질했다.

“앗, 너는!”

말하는 고양이가 신기해서 삿대질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작은 존재가 비명처럼 짧게 외쳤다.

구면인 것처럼 보였다.

“아는 사이예요?”

“53번째 보물.”

내 물음에 고양이가 대답했다.

보물이라고 하기에 당연히 물질이라고 생각했는데 작은 존재를 가리키며 보물이라고 하니 어리둥절했다.

그건 작은 존재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내가 보물이었던가?”

“……이라고 불렀지만 나와 같은 악마지.”

고양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언급한 보물이 비유적인 표현이었던 듯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악마를 보물이라고 할 줄 몰랐다.

“딱히 찾을 생각은 없었는데 72개의 보물 중 하나와 만나게 되다니. 우연치고는 운이 좋네요.”

“뭐야, 날 찾았어?”

“콕 집어서 너만을 찾았던 건 아니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하지.”

나를 대하는 것과 달리 고양이의 반응은 영 미지근했다. 태도의 차이가 너무 커서 바로 와 닿았다.

“그보다 소개가 너무 늦어.”

묘하게 강압적인 어투였다.

그 말을 듣자마자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 작은 존재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마음이 급해서 소개를 안 했구나. 정식으로 인사할게. 나는 53번째 악마, 잔불의 전령이야.”

“잔불의 전령?”

“이명이야.”

내가 되묻자 고양이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악마는 진명으로 부르지 않아. 이름에는 존재의 힘이 담겨 있기 때문에 자신의 계약자에게만 알려 주지. 아니면 주인이거나.”

“그렇군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기침 소리가 들렸다.

노년의 여성이 낸 소리였다.

그걸 듣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건지 작은 존재가 다시 애원했다.

“메그만 무사하다면 기꺼이 너의 권속이 되어 줄 테니까 제발, 제발 가지 말아 줘.”

“…….”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할게. 그 무엇이든 네가 하는 말이면 이루어 주겠다고.”

내 허락만 떨어지면 여자의 병이 깨끗하게 낫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나는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었다.

“저는 의사가 아니에요.”

“그래도,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

“적어도 인간에게 모습이 보이지 않는 나보다는 낫겠지.”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저도 인간이에요.”

드래곤의 피가 흐르는 황족이나 악마인 그들과는 다르게 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특별한 힘을 타고난 것도 아니었다.

우연히 시간을 되돌릴 방법을 알아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이미 죽어서 이 자리에 없었을 인간이었다.

“너는 현자의 돌을 갖고 있는 데다 둘이 계약했잖아.”

“아니요, 안 했어요.”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기에 단호히 부정하고서는 작은 존재를 내려다봤다.

그는 한 손으로는 여전히 내 소매를 잡고 있었다.

날 놓치면 무저갱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애처롭게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 장면이 잠깐 과거의 내 모습과 겹쳐졌다.

역겨움이 기저에서부터 치솟아 절로 인상을 찡그리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악마라고 하면 타락한 존재를 뜻했다.

무자비하고 인간을 악으로 인도하는 상종해서는 안 될 족속.

인간 한 명의 목숨에 선뜻 제 목을 내놓을 것처럼 구는 건 직접 목도할 때까지 상상할 수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작은 존재에게 있어서 노인이 소중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어쩌면 제 목숨보다 더.

“마을에 약사가 없나요?”

“여기보다 더 큰 마을로 가야 해. 그런데 거긴 너무 멀어.”

“오늘 밤만 무사히 넘기게 된다면 낮이 되자마자 이동하는 걸로 하죠.”

“도와주는 거야?”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을 꾹 다물어서 침묵했건만 작은 존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는 말없이 노인의 이마를 훔쳐 주었다.

땀이 묻어 나왔다. 거친 숨소리, 간헐적인 기침, 발열 같은 증상만 본다면 내가 알고 있는 사람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칼. 그 얼굴을 떠올렸다.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건만 노인의 얼굴 위로 칼의 얼굴이 덧대어졌다. 끝까지 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던 그 모습이 어른거려서 멈칫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 앞에 있는 노인은 칼이 아니었다.

감기와 증상이 같아 보인다고 해서 그녀의 병을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그녀가 지병을 앓고 있었나요?”

“무슨 병인지는 모르겠는데 몸이 안 좋아진 지는 꽤 됐어.”

“그런 두루뭉술한 대답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내 말에 작은 악마가 횡설수설했다. 그동안 그녀가 어떻게 아팠는지에 대한 얘기였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잔불이 남은 벽난로에 불을 피웠다.

근처에 있던 장작을 넣어 주니 얼마 가지 않아서 주위가 따듯해졌다.

“아, 맞아! 아플 때마다 약을 먹었어!”

“약은 어디에 있나요.”

“날 따라와!”

날개를 파닥거리며 작은 존재가 날아갔다.

그를 따라가니 주방 찬장에 있던 약봉지 찾을 수 있었다.

약은 한 가지가 아니었다. 그것을 일일이 확인하고서는 표정을 굳혔다.

드래곤의 심장을 받기 전, 걷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던 때에 약을 이만큼 처방받았었다. 그냥 아프다고 해서 복용할 만한 가짓수는 아니었다.

의술에 조예가 깊지 않더라도 그녀의 몸이 좋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는 지표였다.

약봉지를 제자리에 도로 두고, 대야에 물을 받았다.

물수건을 만들어서 하나는 그녀의 이마에 얹어 두고, 다른 하나로 바짝 말라 있는 입술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었다.

작은 존재는 내 소매가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붙잡았지만 그가 잡은 건 썩은 줄이었다.

언제 줄이 끊어져 떨어질지 모르는 썩은 줄.

“고마워,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내가 하고픈 말을 알 텐데 그것을 외면한 작은 존재가 연거푸 내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를 힐끗 보고서는 노인의 식은땀을 훔쳐 주었다.

거창한 간호는 없었다. 그저 지켜보는 것이 다였다.

약을 먹게 하려면 그녀를 깨워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었다. 그녀에게 나는 생면부지의 타인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딱히 나아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작은 존재는 안도하는 듯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나는 힘을 너무 많이 써서 잠시 쉬고 있을 테니까…….”

한참을 곁에 있던 작은 존재가 벽난로 안으로 들어갔다.

벽난로에는 내가 피웠던 불이 아직 타오르고 있었다.

거침없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작은 존재를 지켜보았다. 평범한 생명체였다면 자살이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는 악마였다.

악마는 특이하구나, 하고 생각하고서는 다시 고개를 돌려서 노인을 내려다봤다.

그녀를 내버려 두고 도망칠까.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이곳을 떠난다면 내가 왔다는 흔적은 남지 않을 것이다.

쫓기는 주제에 타인을 돌보느라 발이 묶여 있다니. 여유가 넘쳤다. 게다가 내게는 전혀 득 될 것 없는 선행이었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고자 하는 충동에 휩싸였다. 입술을 꾹 깨문 채로 노인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니 고양이가 무릎 위에 올라와서 앉았다.

그는 애교를 부리듯이 내 팔에 머리를 비볐다. 그러나 내 시선은 여전히 노인에게 고정돼 있었다.

“악마는 오래된 존재이니 알고 있는 게 많을 줄 알았어요.”

고요한 공간에 나지막한 내 목소리가 울렸다. 고양이는 내 팔에 머리를 비비는 것을 멈추고 얘기를 들어 주었다.

“직접 만나 보니 인간보다 약해 보이는데 다 찾으면 정말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걸까요?”

“실망한 것 같네.”

그의 말을 듣고 나서 감정이 얼굴로 오롯이 드러나지 않도록 갈무리했다.

“실망은 기대가 있어야 성립될 수 있는 말이에요.”

“기대하고 있었잖아.”

내가 가진 패를 다 보여 주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멍청했다.

필사적으로 숨겨야 했던 나의 욕망을 모두 간파당했다.

아무리 여유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의 앞에서 아둔하게 굴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이상, 나는 그를 이길 수 없었다.

“……타인에게 희망을 거는 짓만큼 비참한 일은 또 없을 거예요.”

침대 시트가 손바닥 아래에서 무참히 구겨졌다.

“참 어리석어요.”

홀로 중얼거리면서 쓰게 웃었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뒤늦게 의식하고서는 황급히 힘을 풀었지만 시트에는 구김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굳이 깨끗이 펴지 않았다.

“어리석지 않아.”

내 팔에 머리를 맞닿은 채로 남자가 말했다.

“인간은 항상 희망을 좇는 존재인걸.”

“…….”

“한없이 약해서 몇 번이고 쓰러지지만 곧잘 일어서지. 그리고 다시 달려가. 그런 나약함은 어리석은 것이 아냐.”

위로를 해 주는 것일까. 남자의 말을 몇 번이나 곱씹다가 동이 트기 직전에 자리에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평민들의 아침은 귀족보다 일렀다. 동이 틀 때쯤이면 깨어 있을 테니 적당히 이웃 주민 한 명만 이곳까지 유인하면 되었다.

그 뒤로는 노인을 발견할 사람이 알아서 해결할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물수건을 뒤집었다.

그때까지 노인이 잘 버텨 주기만을 바라야 했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와 타인의 거친 숨소리가 밤의 정적에 스며들었다.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나는, 느릿하게 두 눈을 껌뻑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까무룩 잠들었다.

그 누구도 깨지 않는 밤이었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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