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16)

Chapter 2.

“잘만 하면 부도 명예도 모두 쥘 수 있다니까?”

한 남성이 턱을 괸 채로 날 바라보며 나른하게 말했다.

한적한 카페에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오늘도 찾아온 자칭 모험가를 바라보지도 않으며 이미 여러 번 했던 대답을 반복했다.

“안 가요.”

아직 카페 오픈 전이라서 내 손에는 먼지떨이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단골손님이었기 때문에 바깥에서 기다리라고 하기 뭣해서 가게 안으로 들인 거였는데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듯했다.

“전설에 따르면 제국이 무서운 기세로 영토를 넓히게 되면서 망국의 보물이 사장되었다고 하지. 그 보물을 다 모으면 어떤 소원이든 들어준다는 얘기가 있는데 구미가 당기지 않아?”

“아뇨, 전혀요. 그렇게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다면 다른 사람 알아보세요. 아니면 칼이라도 데려가시든가요.”

“걔는 딱히.”

오래 생각할 것 없이 남자가 곧장 대답했다.

빠른 거절이었다.

“사람이 필요한 거라면 저보다 칼이 더 도움 될 거예요.”

남자의 얘기를 듣고 있자면 달콤한 낭만만을 가지고 모험을 떠나도 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모험을 떠나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더는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그의 말을 듣고 있자면 치근덕대는 기준을 알 수 없었다.

“나는 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을 원하는 게 아니야.”

“그러면요?”

남자를 보지 않은 채로 되물었다. 짧은 침묵 끝에 그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걔는 더 이상 바라는 게 없지만, 넌 이루고자 하는 게 있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고개를 돌려서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려던 차였다.

마침 오늘 치 식재료를 한 봉지 들고 오던 칼이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눈치채고 한마디 던졌다.

“낮부터 누나 곤란하게 하지 마세요.”

“혹시 질투하는 건가?”

“아니요!”

입꼬리를 올린 손님이 칼을 어린아이 취급했다. 놀리는 듯한 말투에 잔뜩 골이 난 칼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이제 슬슬 익숙해지려는 광경이었다.

칼은 단 한 번도 능청을 떠는 남자를 이긴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먼지떨이를 내려놓고서 슬쩍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다음 여행은 언제 떠나실 거예요?”

“네가 내 제안을 승낙한다면.”

남자는 날카롭게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머리가 찌르르 아파 왔다. 누군가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듯한 기분이었다.

두통을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불시에 통증이 나를 찍어 눌렀다.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이러니 원인이 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그저 환상을 좇는, 이름 없는 모험가였다. 어쩌면 모험가의 이름을 빌린 한량일지도 몰랐다.

그런 사람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는 건 비약이었다.

일순 거칠게 쏟아지려는 숨을 삼키며 대수롭지 않은 척, 최대한 가볍게 대꾸했다.

“죽을 때까지 저희 가게 단골손님 하셔야겠네요. 덕분에 매상이 올라서 저야 좋지만은.”

“사실상 내가 이 가게 주인 아닌가? 꾸준히 찾아와서 잔뜩 시키고 가고 있으니.”

“주인님이라고 불러 드릴까요?”

“그거 나쁘지 않지.”

영양가 없는 농담이었다.

턱을 괴고 날 빤히 쳐다보는 남자를 무시하며 음식을 만들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에서는 칼이 식재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내가 정리할게. 그동안 손님 말동무나 해 줘.”

“또 제의를 받을까 봐 저한테 떠맡기는 거죠?”

“이런, 들켰네.”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칼이 들고 있던 걸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하나씩 차근차근 정리하자 칼이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알겠어요. 커피 내리는 거랑 손님 접대는 제 몫이니까요. 주문은 평소랑 같죠?”

“응.”

나는 칼을 내보내고 분주히 손을 놀렸다.

카페는 그리 넓지 않았고, 허름한 건물은 방음이 될 리 없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지루했는지 손님과 칼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배경 삼아 베이컨을 구웠다.

“그런데 오늘이 무슨 날인가?”

순간 흠칫했다.

굳이 날짜를 세어 보지 않아도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었다.

항상 이날이 오지 않길 바랐으니까.

“다들 뭐가 돌아왔다고 하는데 자세히 듣질 못했네.”

“반려가 돌아왔대요.”

“반려?”

“예, 반려요.”

칼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되도록 이 주제에 대해 듣고 싶지 않았으나 손님은 최근 황실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지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웬 반려 타령이지. 황제의 반려를 말하는 거라면 항상 있어 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일 몰라요?”

“한동안 오지를 돌아다녔거든.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일 년 전쯤에 반려가 죽었는데 사실 그게 아니래요. 건강이 악화되었던 것뿐이라나 뭐라나. 듣기로는 장례식까지 치렀다고 하는데, 확실한 건 어찌 됐든 돌아왔대요.”

“미묘하게 복잡하군. 어째서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을까.”

“모르죠. 저희 같은 것들이 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생각을 알 리 없죠.”

칼의 말에 잠깐 고민하던 손님이 한 가지 가능성을 제기했다.

“사실 진짜 죽었는데 다시 살아난 거라면?”

“신에게 가장 사랑받는 인간이니 죽었다가 살아난 것도 아예 가능성 없는 말은 아니네요.”

칼은 이 이야기에 그다지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건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가 평민이고, 평민 중에서도 최하라고 할 수 있는 빈민가에 지내던 남자라는 걸 고려한다면 별난 반응은 아니었다.

제국민이 황제를 신이라 여겨 숭배한다고는 하나 당장 내일 굶어 죽을지도 모르는, 밑바닥에 있는 이에게는 실체 없는 신앙보다 눈앞의 빵이 먼저였다.

황제니 반려니 하는 것들 모두 그의 인생과 실질적으로 관계가 없기 때문에 드래곤과 다섯 사도에 대한 건국 신화를 듣는 것과 비슷한 감상이 들 것이었다.

나 또한 공작가에 입양되지 않았더라면 칼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으리라.

그 후로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손님은 옛이야기를 들려주듯이 드문드문 자신의 모험담을 꺼냈다. 내가 멀리 여행을 떠나 본 적이 없는 탓인지 꼭 이야기 속 이야기 같았다.

담백하게 이야기를 이어 가던 손님은 신의 가호를 받지 않은 다른 나라에 마물이 들끓어서 힘들었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수도에서 멀어질수록 마물의 수가 눈에 띄게 많아지는 건 다섯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는 사실이었다.

신화에 따르면 드래곤의 가호가 따라서 그렇다는데 따지고 보면 제국만큼 국가적으로 조직을 짜서 마물을 처리하는 나라는 드물었다. 굳이 가호가 없더라도 제국은 마물이 적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는 샬롯의 소식을 알지 못할 정도로 오지를 돌아다녔다고 하니 꽤나 고생했을 것이다.

칼은 모험가 손님의 넋두리를 묵묵히 들어주기만 했다.

나는 그 얘기를 반쯤 흘려들으며 음식을 만들었다.

다른 곳에 신경이 쏠려 있어서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음식이 완성돼 있었다.

“오늘따라 양이 많네.”

커다란 그릇에 음식을 한가득 채워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다소 지루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날 보자마자 반색했다. 그러다가 음식의 양이 평소보다 많다는 걸 바로 눈치챘는지 방긋 웃으며 물었다.

“양 조절에 실패했어요.”

“이렇게 장사해서 남는 건 있을지 걱정될 정도군.”

“괜찮아요, 저희 가게에 꾸준히 돈을 내시는 손님이 있거든요.”

“내 얘기네.”

남자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포크를 들었다.

즐거워 보였다. 언뜻 봐도 많아 보이는 양이긴 했지만 그는 대식가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맛있지 않을 텐데 무슨 이유인지 매번 찾아오고, 그때마다 두 사람은 너끈히 먹을 만한 양을 시켰다.

하루에 기본 두 번은 방문하고, 방문할 때마다 많이 시키니 단골손님이라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커피는 안 드세요?”

테이블 위에는 칼이 내어 준 커피가 그대로 있었다.

시간이 제법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입 한번 대지 않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닌 터라 물어보게 되었다.

“네가 만든 게 아니잖아.”

“……어째서 주문하신 거예요?”

“혹시 모르니까.”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이 손님은 가끔 이런 식으로 날 난감하게 만들었다.

“같이 떠나는 건 재고해 봤나?”

“아니요.”

“나와 함께한다면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 하더라도?”

“실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를 보물의 존재를 믿고 무턱대고 모험을 떠날 만큼 호기심이 넘치진 않아요.”

“마음이 바뀌면 말해. 언제까지나 너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항상 나는 거절하고, 손님은 내가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언제부터 이런 대화가 반복되었는지 떠올려 보려다가 두통이 도져서 생각하길 그만두고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내가 손님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칼은 ‘닫힘’이라고 적힌 팻말을 ‘열림’으로 바꿨다. 칼이 모험가 손님을 상대하느라 살짝 늦어지긴 했지만 이제 진짜 가게 문을 열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모험가만이 유일한 손님이었다.

위치가 애매하기도 했고, 특별한 것이 없어서 하루 종일 열어 놔도 손님이 한 명도 없을 때가 많았다.

돈이 나올 구석이 없는 가게였다.

만약 수중에 몇 푼이 없었다면 당장 내일 거리에 나앉을 두려움에 떨어야 했겠지만, 나는 남들처럼 일하면서 삶에 목적이 생긴 듯한 착각을 받는 것만으로 족했다.

모험가가 떠난 이후에도 가게는 한산했다.

다들 샬롯이 돌아온 것에 대해 입방아를 찧기 바쁜 것 같았다.

할 일이 없으니 멍하니 앉아 있게 되었다.

넋이 나간 것처럼 가만히 있던 중 문득 내가 테이블 위로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으나 어떤 문양을 반복적으로 그려 냈는지 곧장 알아챘다.

시간을 되돌리고자 할 때마다 그렸던 문양이었다.

무의식중에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깨닫고 주먹을 쥐었다.

근래 들어 지금처럼 멍해질 때마다 허공에 문양을 그려 냈다. 현재 상황을 후회한다거나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결단코 없었다. 그런데도 무언가를 갈망하듯이 행동하고 있는 내가 낯설었다.

지금껏 시간을 되돌릴 때를 제외하면 단 한 번도 문양을 그려 본 적이 없었다. 살아가는 것이 벅차서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어차피 문양을 몇 번이나 허공에 그려 낸다 하더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러고 있으니 내가 꼭 모든 일을 돌이키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상상조차 하기 싫은 가정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생각나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문양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최근 꿈으로 자주 보았던 장면과 함께.

허름한 제단 뒤편에 우뚝 서 있는 얼굴 없는 조각상. 얼굴뿐만 아니라 신체 곳곳이 누군가 깨부쉈는지 제 형체를 잃어버린 조각상 밑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내 기억상으로 가장 처음 문양을 봤던 순간이었다.

나는 움찔거리는 주먹을 얌전히 무릎 위에 올려놨다.

흔적이 남지 않으니 이교도로 몰릴 일은 없겠지만 무의식적으로라도 문양을 그려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손가락마저 가만히 놀게 되니 자꾸 병 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게 되었다.

밤마다 악몽을 꿔서 제대로 자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고즈넉한 분위기에 취하여 긴장이 풀어지는 듯했다.

칼은 가장 밝은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그는 내 권유에 따라서 최근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었다. 처음에는 본인 같은 무지렁이가 배워 봤자 어디에 쓰겠냐면서 질색하더니 막상 책을 읽는 자세는 진지했다.

바깥과 유리된 듯, 고요한 가게에서 드문드문 기침 소리가 들렸다. 칼이 내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무심히 넘겼지만 그 소리가 계속 들리다 보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 감기라도 걸릴까 염려가 되어 뒷정리는 내가 할 테니 일찍 돌아가라고 했다.

마침 오늘 기분이 뒤숭숭하던 참이었다. 차라리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어 괜찮다며 씨익 미소를 짓는 칼의 등을 억지로 떠밀었다.

그렇게 칼을 보내고, 아무도 남지 않은 카페는 조용했다.

내 숨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로 침묵만이 감돌았다.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청소 도구를 꺼내서 쓸고, 닦았다.

그 일에 집중하다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카페 내부를 청소하듯, 마음속에서 ‘황제’나 ‘반려’ 같은 단어를 지워 내 버렸다.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었다.

작은 흠집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힘을 주어 청소를 끝내고서는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샬롯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황제의 옆자리란, 선택받은 단 한 명의 인간만이 차지할 수 있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지대한 관심을 가질 만했다. 개중에 황제가 제 권능을 써 진짜로 죽은 샬롯을 되살렸다고 믿는 사람 또한 있었다.

애써 귀를 닫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빠르게 나아갔다.

하염없이 바닥만을 바라보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고 있는데 누군가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구걸하는 거지였다.

바짝 엎드린 채, 손을 내밀고 있는 거지는 샬롯의 귀환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들떠 있는 거리의 분위기와 동떨어져 보였다.

가던 길을 멈췄다. 그리고 유리된 세상에 사는 듯한 그에게 돈이 아닌 빵 한 덩이를 주었다.

돈을 쥐여 줘 봤자 필시 뒤에 수금하는 놈이 있을 테니 그놈이 꿀꺽할 거였다. 의미 없는 적선이었다.

거지는 배가 많이 고팠는지 거듭 내게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허겁지겁 빵을 먹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난 시간이 떠올랐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나는 이 거지와 다를 바 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선뜻 적선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절로 쓴 미소가 지어졌다.

남자에게서 도망친 후, 나는 바로 수도로 가지 않고 마물이 가득하여 인적이 드문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숨소리를 죽이며 매일 신경이 곤두서 있는 채로 시간을 보냈다.

온종일 마물이 날 위협하듯이 울어 댔고, 혹여나 마물 사냥꾼이라도 만날까 봐 두 눈을 시뻘겋게 뜨며 하루를 보냈다.

마물이든 사람이든 알아서 피해야 했다.

자칫 잘못하여 마물과 맞닥뜨리게 되면 화염 속성 마법을 위협용으로 쓸 생각이었다. 마물 사냥꾼이 아닌 이상 마물을 물리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운이 좋았던 건지 마물을 만난 적 없었다.

최대한 몸을 숨기고, 식사는 바스켓 안에 있는 음식을 최대한 적게 먹으면서 연명했다. 두 사람이 먹기에는 많은 양의 음식을 챙겨 온 덕에 금방 동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짐승만 못한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륀느가에 입양되기 전까지만 하여도 이와 비슷한 삶을 살았기 때문인지 입 밖으로 약한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새벽 어스름을 맞이할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두 손 모두 주먹을 쥘 수 있게 되었을 때, 숲을 떠나 수도로 향했다.

열흘간 쥐 죽은 듯이 지낸 보람이 있는지 수도에 도달하기까지 경계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수도에 들어서자마자 내 발길이 닿은 곳은 빈민가였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활은 할 수 있는 완벽한 사각지대였다.

궂은 숲속 생활로 인해 옷은 넝마가 되어 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몰골이 말이 아닌 터라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에 스며들 수 있었다.

수중에 돈은 있었기 때문에 구걸하는 척하며 빵을 사 먹었다. 주위 시선을 의식하여 동화 한 닢의 값어치조차 하지 못하는 퍽퍽하고, 맛없는 빵만을 먹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들의 뜻대로 살아가느니 퍽퍽한 빵이나 씹으면서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나았다. 여기 있다면 당장은 비참할지라도 틈을 노려 국외로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잡혀가서 다시 남자의 샤샤로 살아가게 된다면 당장은 호화스러울지언정 끝은 비참했다.

심장을 갖고 있으면 무엇하나.

그가 원하는 건 내가 아닌데.

또한 내가 원하는 건 그가 아니었다.

그가 주는 사치스러운 생활도, 눈부시게 반짝이는 금은보화도, 허울뿐인 애정도. 아름답기는커녕 이젠 지긋지긋한 그것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기회가 몇 번이 있든 내가 그에게 진짜 반려가 되어 주지 못한다는 걸 알았으니 지난 과오를 답습하고 싶지 않았다.

더럽고 차가운 땅바닥에서 자고, 바닥에 바짝 엎드려서 구걸하는 척하다가 배곯아서 쓰러질 것 같으면 딱딱한 빵을 뜯어 먹고 다시 구걸했다.

겨우 목숨만 연명하는 삶을 반복해서 살던 중, 칼을 만났다.

현재는 날 ‘누나’라고 부르면서 따르고 있지만 첫 만남만 하더라도 내 돈을 훔치려 했다. 어설프게 구걸하여 땡전 한 푼 얻지 못한 날이 많은데 하루에 한 번은 빵을 먹고 있으니 수상하게 여긴 모양이었다.

날 눈여겨보던 그는 내가 숨겨 둔 돈이 제법 있다고 생각한 건지 한두 푼 슬쩍하려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현장에서 잡힌 칼은 내 눈치를 보았고, 나는 그를 혼내지 않았다. 대신 제안을 했다. 나를 대신하여 보석을 암시장에 팔아 달라는 제안을.

수고비는 넉넉히 챙겨 주겠다고 했다.

‘제가 이걸 들고 튀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손톱만 한 보석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킨 칼이 내게 물었다. 진짜 욕심이 있었다면 내게 묻지 않고 몰래 꿀꺽했을 거다.

내게 물어본 시점에서 본인이 졌다는 걸 모르는 듯했다.

‘넌 눈앞의 이익만 좇는 멍청이가 아니잖아.’

칼만이 날 눈여겨본 게 아니었다. 나 또한 칼을 주시하고 있었다.

‘만약 그쪽이 절 오해한 거라면요?’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면 그건 내 잘못이었다. 제대로 사람을 보지 못한 채 헛된 기대를 품고 타인을 믿은 내 잘못.

나는 내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질 각오가 돼 있었다.

그리고 칼이 보석을 들고 튀어도 결코 내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내게 보석은 많았다.

‘자만하지 마.’

그러나 괜히 나와 기 싸움 하려는 칼이 가소로워서 한마디 했다.

‘내가 널 선택한 거야.’

그때 칼의 얼굴은 퍽 웃겼다.

새삼 그때를 떠올리며 가고 있는데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솜털이 쭈뼛 섰다.

누군가 나를 쫓아오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뒤를 돌아봤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륀느가의 추적자인가? 아니면 황실 측일 수도 있었다.

샬롯은 돌아왔지만 심장은 내게 있었다.

내가 없으면 황실은 대를 이어 갈 수 없으니 다들 필사적으로 날 찾으려는 중일 거다.

상대는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공작 가문과 황실이었다. 지금까지는 지나치게 조용했지만, 뒤에서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지 예측할 수 없었다.

웬만한 일은 모두 칼에게 맡긴 터라 뒤가 밟힐 리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내 오만이었다면…….

방향을 틀었다. 따라붙는 사람이 있다면 집으로 가서는 안 됐다. 아예 다른 방향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모든 것이 내 착각이길 바랐다. 그러나 시선은 가시질 않았다. 이대로 계속 거리를 돌아다녀 의심을 사기보다는 어딘가로 들어가 있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아무 가게나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마음이 급한 탓에 내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누군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사람이었다. 날 쫓아오던 사람.

보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극도의 공포감이 날 밀어붙였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어서 일어나야 하는데 너무 긴장한 탓인지 다리에 힘이 풀렸다. 주위에서는 샬롯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퍼졌다. 목이 졸린 사람처럼 숨이 막혔다.

혹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품에 숨겨 놓은 단검을 잡았다.

이것을 사용하는 일이 없이 상대가 그냥 나를 지나가길 바랐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바로 내 등 뒤에 섰다고 생각되었을 때, 어깨가 붙잡혔다.

“누나, 뭐 해요?”

“……아.”

칼이었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긴장이 풀리면서 힘주어 쥐고 있던 단검을 놓게 되었다.

고개를 돌렸다. 칼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안색이 창백해요.”

손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을 느꼈다. 긴장이 풀렸다고 하나 의심은 완벽하게 사그라진 것이 아니었다.

“날, 계속 따라왔어?”

“계속이요? 방금 누나가 보여서 쫓아온 건데 뭐 잘못됐어요?”

칼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말했다.

방금? 방금이라면 그 전에 내게 따라붙던 시선은 무엇일까.

모골이 송연해졌다.

오늘뿐만이 아니었다. 가끔 시선을 느끼고는 했다. 그때마다 일부러 목적지와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으면 집요하게 날 따르던 시선이 사라져 있었다.

실체 없는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인 터라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미친 걸까?

내가 미쳐 버려서 쫓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걸까.

이제껏 추적자와 직접 마주하게 된 적은 없었다.

시선만이 날 따라붙을 뿐.

실체를 본 적이 없기에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도망은 나 자신을 담금질하게 되었고, 타인뿐만 아니라 나까지 믿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쯤 되니 내가 한때 륀느가의 양녀였다는 사실이, 샬롯의 흉내를 내며 황제의 곁을 지켰다는 사실이, 그뿐만 아니라 지난 모든 세월이 있었던 일이 맞는지 의심됐다.

남자의 곁을 떠난 후 실질적으로 긴 시간이 지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다.

“돌아가라고 했잖아.”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말투는 아무 잘못 없는 칼을 책하고 있었다.

“집에 먼저 가 있으라고 내가 말했잖아.”

“이 시간쯤 누나가 집으로 오잖아요. 혼자 두기에는 걱정돼서 나왔어요.”

“…….”

“미안해요.”

칼이 내게 사과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관계없는 사람에게 괜히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나는 다급하게 마른세수를 하며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사과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나라고 칼에게 속삭였다.

샬롯이 돌아온 날이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이맘때쯤 나는 항상 불안했고,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다리는 괜찮아요?”

“괜찮아.”

“누나가 보통 괜찮다고 하면 안 괜찮던데. 정말 괜찮아요?”

대답하기 전에 칼이 내 다리를 살폈다.

무릎이 살짝 까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 집에 가서 소독약을 발라야겠다고 말한 그는 내게 등을 보였다.

“업혀요. 다리 아프잖아요.”

“아니, 굳이 그러지 않아도…….”

“미안해서 그래요.”

“…….”

“저 때문에 넘어진 거죠?”

도저히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방금 전 나는 누가 봐도 쫓기는 사람처럼 보였을 테니까. 불안해하는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보여 줬으니 변명마저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많은 말을 하는 대신 순순히 그의 등에 업혔다.

원래 덩치가 컸지만 오늘따라 그 등이 더 넓게 느껴졌다. 맞닿은 부분을 통해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업혀 있으니 주변을 울리는 말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애써 지운 ‘반려’라는 단어가 다시 새겨졌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차라리 가게에서 쪽잠을 자는 것이 나을 뻔했다.

머저리 같은 내 행동을 후회하고 있는데 칼의 목소리가 주변 소음을 지워 내며 들렸다.

“누나, 신에게 사랑받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그러게.”

“분명 행복할 거예요.”

숨이 턱 막혔다.

행복했던가?

하나둘씩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기억에 감은 두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처럼.

“신은 단 한 명의 인간만을 진정으로 사랑하잖아요. 여러 사람에게 쏟는 사랑보다 더욱 강력하고, 진실 되겠죠.”

칼이 어째서 이런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늘 다들 그 얘기를 떠들고 있기 때문일까.

반가운 대화 주제는 아닌 터라 굳게 입을 다물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덩달아 침묵을 유지하던 그가 내게 물었다.

“누나는 무엇으로부터 쫓기는 거예요?”

살포시 눈을 떴다.

이 얘기를 하기 위해 잠깐 말을 돌렸던 것이었구나.

평소에 제 앞길을 밝히기도 바빠 황족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던 칼이 뜬금없이 황제를 언급하여 불편하던 차였다. 그 이유를 알고 나니 불편한 감정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제게 얘기해 주면 안 돼요?”

칼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에게 있어 나는 그저 수상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난 꼴을 하고 빈민가에 나타나서는 죽은 듯이 지내더니 막상 알고 보니 빈민가에 있기에는 분에 넘치는 재물을 갖고 있는 여자.

사기꾼이 아닐지 충분히 수상쩍게 여길 만한 상황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본인도 위험한 일에 휘말릴 수 있으니 보석만 슬쩍할 수 있었을 텐데 칼은 그러지 않았다.

내게 정직하게 대금을 건네주었다. 그 뒤로 두 번 더 칼을 시켜서 보석을 팔다가 돈이 제법 쌓였을 때 아예 그와 함께 빈민가를 나왔다.

그에게는 돈이 필요했고, 나에게는 나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에 협력은 쉬웠다.

가게 건물이나 집은 칼의 명의로 계약했다. 법적으로나 대외적으로 카페 주인은 칼이었다. 당장의 이익만을 좇지 않은 거지는 그 정직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동화 같은 이야기를 실현해 낸 것이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누나에게 제가 그다지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요. 하지만 적어도 제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세요.”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문제라고 부를 만한 것이 생겼다.

그가 내게 지나치게 유대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불가항력이었다. 영원히 구걸만 하며 살 줄 알았던 빈민가의 걸인이 나로 인해 인간 구실을 하게 되었으니.

이럴까 봐 되도록 서로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사이로 남도록 노력했는데 생각보다 잘되지 않은 듯했다.

인생은 언제나 내 뜻대로 되어 주지 않았다.

인간관계는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복잡했다.

칼의 간절한 목소리를 곱씹으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사람을 죽였어.”

“…….”

“다섯 명이나.”

작년쯤부터 여성을 대상으로 한 납치 살해 사건이 긴 시간을 두고 연속적으로 발생했다. 범인은 잡히지 않았으며 납치당한 여성들은 끝내 토막 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이었다.

칼의 침묵이 길어졌다.

마침 그 연쇄 살인마가 죽은 사람의 수도 다섯 명이었다. 지금쯤 칼의 머릿속에는 해당 사건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그가 마음껏 상상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 외에 내가 칼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이대로 칼이 내게 두려움을 느낀대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분하고, 다정했다.

“누나가 사람을 죽였다면 이유가 있겠죠.”

“…….”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 죽이고 다녔다면 저는 이미 죽었을 거잖아요.”

지나치게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것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만큼 날 믿고 있다는 증거가 되어 주어 속이 답답하기도 했다.

“네 차례는 썰기 좋게 자란 다음이야.”

“저 지금 사육당하고 있는 거예요?”

“응.”

시답지 않은 농담이라는 걸 서로 알고 있었다. 이 또한 여유가 있기에 나오는 것이리라.

이러고 지내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초콜릿을 씹지 않고 혀 위에 올려놓기만 하듯이 그에게 기대어 여운을 즐겼다. 그런 내 귓가에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스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질 것만 같은 작은 속삭임이었다.

“누나라면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 말을 듣게 되니 기쁘기보다 슬프기만 했다.

내가 먹기에는 너무나 큰 빵을 억지로 입에 욱여넣은 것 같았다.

일찍이 칼을 만났다면 그 말에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었을까.

그토록 원하던 타인의 애정을 핥아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모르겠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은 것이 변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의 나로서는 계획대로 떠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내가 정착할 수 있는 곳이 어딘가에는 있겠지.

그 어딘가가 이곳이 아닐 뿐이었다.

칼의 속삭임을 듣지 못한 척,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둠이었다.

* * *

‘……로부터 저를 구원해 주소서.’

또 그 꿈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내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중얼거렸다.

기도하는 두 손은 작고, 형편없이 말라 있었다. 마치 마른 나뭇가지 같았다. 그러나 붙잡은 두 손은 단단히 결합돼 있었다.

내뱉은 말의 의의는 모르나 무엇을 위해 하는 행위인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신전이라고 부르기에도 뭣한 폐허 같은 건물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나는 허름한 제단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얼굴 없는 조각상이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원래 제 형체를 잃어버린 조각상 밑에는 내가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그렸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 * *

“누나, 누나! 괜찮아요?”

헛숨을 들이쉬며 눈을 떴다.

악몽이었다.

교차되는 과거에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이마를 짚으니 식은땀이 묻어났다.

축축했다. 기분 나쁜 감촉이었다.

숨을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끅끅거리다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고개를 숙이고 헛구역질을 하고 있자니 칼이 내게 손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그 손을 쳐 냈다. 살갗과 살갗이 부딪치는 커다란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헛구역질을 멈춘 나는, 느릿하게 숨을 내쉬며 칼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밀어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올곧게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속이 더부룩했다.

손바닥이 축축한 것보다 더 기분 나빴다.

“……예전에 누나가 제게 말했죠. 누나가 절 선택한 거라고.”

칼은 내게 거부당한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문장은 분명 내가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듣게 되니 사뭇 의미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러니 저를 얼마든지 이용해요.”

“…….”

“기꺼이 이용당해 줄게요.”

칼의 오른쪽 눈을 길게 가로지르는 흉터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와 함께 지내기 위해 빈민가를 나오다가 생긴 상처였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제 운명이 결정 난다.

빈민으로 태어났으면 빈민가에서 죽어야 했고, 귀족으로 태어났으면 황금을 두른 채 죽어야 했다. 빈민가에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와 다르게 칼은 빈민가에서 나고 자라 왔다.

그에게 있어서 빈민가는 요람이자 무덤인 것이다.

칼을 찌른 사람은 칼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수긍하고, 죽을 때까지 이 수렁을 기어 다닐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자신의 고정관념을 배반하는 존재가 나타났으니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짧은 몸싸움 끝에 칼은 평생 짊어질 흉터를 얻게 되었다.

그것은 꼭 낙인과 같았다.

“칼.”

상처가 생겼을 때부터 나는 칼이 아닌 다른 이를 택했어야 했을까.

칼과 만나게 된 건 이번 삶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내 선택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선뜻 확신을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옳든 그르든 나는 떠나야 했다.

또다시 떠나기 위해 잠시 수도에 몸을 의탁한 것뿐이었다.

“내게서 네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마.”

손을 내쳤을 때도 꿈쩍하지 않던 칼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이 나를 쳐다봤다.

안 그래도 처진 눈꼬리가 더욱 내려간 듯해 슬퍼 보였다.

“그리고 내 앞에서 울지 마.”

“…….”

“내가 널 위해 할 수 있는 건, 감정적인 게 아니니까.”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헛된 기대를 품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설픈 태도는 마음에 상처만 늘어나게 했다. 차라리 당장 상처를 받게 되더라도 나중에 덜 아픈 게 나았다.

오늘, 샬롯이 돌아왔다.

이날을 위해 보석을 팔았고, 국외로 최대한 빨리 도망갈 수 있는 루트를 짰다. 이제 슬슬 소꿉놀이를 끝낼 때였다.

내가 드래곤의 심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탓에 모든 이의 주목은 샬롯에게 쏠려 있었다.

어쩌면 진짜 죽었다가 살아난 걸지도 모르는 황제의 반려.

역사에 기록되기 딱 좋은 소재가 아닌가.

설사 샬롯이 진짜 요양만 한 것이라 할지라도 신화는 언제든 각색될 수 있었다.

정작 심장은 없으나 잊혀져 가던 샬롯의 등장으로 인해 륀느가 경계하고, 하이넨은 기세등등하며, 온 제국민이 기뻐하는 지금만큼 국외로 도망칠 수 있는 타이밍은 없었다.

“누나.”

칼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날 불렀다. 그는 내가 연쇄 살인자라는 거짓말을 했을 때도 나에 대한 올곧은 믿음을 보여 줬다.

황실의 사정에 대해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으니 진짜 내 얘기를 한다 하여도 내 곁에 있으려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애먼 사람을 이 진창에 끌어들일 수 없었다.

이제야 겨우 세상 빛을 본 그를 쫓기는 몸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저는 누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가진 게 저라는 존재 하나뿐이라서 누나가 절 끝까지 이용했으면 해요. 기대하지 않을게요. 바라지도 않을게요. 아무것도 원치 않고, 누나를 제 삶의 의미로 두지 않을게요.”

저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긴 하는 걸까.

점점 더 매스꺼워졌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입을 열었다.

“넌 네 생각보다 내게 많은 걸 해 줬어. 무려 네 이름을 빌려줬잖아.”

“제 이름은 그렇게 가치 있지 않아요. 알잖아요, 흔한 거지였을 뿐이라는 걸.”

칼은 빈민가에서 거지로 태어나 거지로 살아갈 운명이었다. 아마 되돌린 다섯 번의 삶 동안 칼은 구걸하며 살아갔을 것이었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이름 없는 거지로서.

“그렇게 느낀다면 스스로 네 이름의 가치를 높여.”

“…….”

“남의 지갑을 훔치지 말고 지금처럼 합법적으로 일해. 되도록 많은 걸 보고, 듣고, 배우면서 진짜 인간처럼 사는 거야.”

짧다고 한다면 짧고, 길다고 한다면 긴 시간 동안 날 도와준 그가 행복하게 살길 바랐다.

대리 만족을 하는 것이냐고 누군가 비난해도 상관없었다.

누군가의 행복을 바라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믿고 있으니까.

“불공평하잖아요.”

“…….”

“모두 제게만 좋은 일이잖아요.”

칼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네 정직에 대한 대가야.”

“저는 정직하지 않아요.”

“주변 환경이 네 등을 떠밀어서 항상 정직할 수 없는 거지, 네 천성은 올곧아.”

제아무리 단단한 돌이라 한들 오래도록 빗물이 스미면 깊게 패기 마련이다.

사람이라고 하여 다를 바 없었다.

천성이 착해도 환경이 따라 주지 않는다면 그 천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남의 재물을 탐내는 건 분명 잘못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 당장 먹을 수 있는 빵 한 덩이가 있었다면 과연 그가 소매치기를 했을까?

“누나, 저는…….”

무슨 말을 하려던 그가 말을 삼켰다.

나는 무표정하게 칼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못 견뎌 하듯, 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화는 끝이었다.

“이번에는 좋은 꿈 꿔요.”

내게 등을 돌린 칼이 느릿하게 문 쪽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입을 열었다.

“칼.”

내 부름에 칼이 뒤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미약한 희망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읽어 냈지만 보지 못한 척, 덤덤히 말했다.

“내일은 비가 올 거야.”

“…….”

“우산 챙겨 놔.”

“……알겠어요, 누나.”

비가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건만 뜬금없이 우산을 챙겨 놓으라는 내 말에도 칼은 수긍했다. 그러고는 내가 혹시 다른 말을 덧붙여 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날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건이 끝났음을 알리듯, 다시 누웠을 뿐이다.

누워 있으니 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서서 저를 보지 않는 날 바라보다가 이내 나갔다. 달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았다. 홀로 남게 되니 악몽의 잔재가 부유했다.

최근 날 괴롭히는 악몽은 항상 같았다.

남자를 만난 후의 나, 륀느 공작에게 입양된 나, 고아원에서 살았던 나, 그리고 이름 없는 신전에서 지내던 나.

꿈은 내 삶을 역순으로 비췄다.

나는 기도하던 어린아이를 다시금 떠올렸다.

삶에 최초의 기억이었다.

부모는 알지 못했다. 내가 알아서 죽길 바란 건지 신전이라 불렸으나 폐허나 다름없는 그곳에 나를 버렸다. 어떤 신을 모시는지 아는 사람도 남지 않은, 처참한 곳이었다.

다행히 마을 사람들의 동정을 받아 어찌어찌 삶을 연명하던 도중 전쟁이 벌어졌다.

결과는 뻔했다. 나라는 패전국이 되어 제국에 흡수되었고, 종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마을은 와해되었다. 나는 몇 달 전만 해도 날 부모 없는 새끼라고 놀리던 아이들과 함께 고아원으로 인계되었다.

굶어 죽기 직전이었던 터라 하루에 한 끼는 나오는 고아원이 나쁘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고아원에서는 세뇌시키듯 이 세상에는 하나의 신만이 존재한다는 걸 가르쳤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거부감을 느꼈으나 이내 수긍했다.

어른과는 다르게 아이들은 뭐든 쉽게 배우고, 받아들였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불완전한 신을 떠올렸다.

또다시 금빛 비늘이 돋아난 커다란 손에 목이 졸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 * *

아침까지만 해도 화창했던 날씨는 늦은 오후가 되자 갑자기 우중충해지더니 비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는지 황급히 손으로 머리를 가리며 아무 가게나 들어갔다.

카페에도 그런 손님이 한 명 있었다.

두어 번 방문하여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여자는 어깨에 묻은 비를 털고서는 들어왔다.

비가 덜 내릴 때까지 있을 생각인지 커피를 시킨 그녀는 조금 이따가 머뭇거리면서 내게 혹시 남는 우산이 없냐고 물어봤다. 비가 전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것을 건네주었다. 손님의 얼굴에 눈에 띄게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내게 돈을 주려 했으나 받지 않았다.

대신 감사의 인사만 받고서는 유유히 카페를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비가 내리기 전부터 카페에 있던 모험가 손님이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커피 잔을 내려놓고서는 내게 물었다.

“네 것은?”

“가게에 여분이 하나 더 있어요.”

내 말의 진위를 가늠하기라도 하듯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남자가 날 쳐다봤다. 나는 괜히 바쁜 척, 고개를 돌리고서는 말을 돌렸다.

“생각보다 비가 많이 내리는데 손님은 괜찮으세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가 내리는 걸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항상 있던 남자애가 안 보이는군.”

하루 종일 칼이 없었건만 너무 뒤늦은 물음이었다.

가게에 들어설 때부터 신경을 쓰지 않는 기색이기에 모르는 척하나 싶었더니 어투를 보아하니 그냥 몰랐던 듯했다.

“감기 기운이 있어서 오늘 나오지 않았어요.”

“비 오는 날 걸리는 감기만큼 끔찍한 건 없지.”

“맞아요.”

어제 기침은 감기의 징조였다.

내가 집에서 쉬고 있으라고 했을 때 얌전히 침대에 누워 푹 쉬었으면 될 것을 괜히 마중하러 나와 병을 더 키운 것 같았다. 바보같이.

그에게 업혔을 때 따뜻하다고만 생각했다. 지나치게 체온이 높다는 사실을 곧장 눈치채지 못한 나도 바보 같았다.

돌아가는 길에 약을 사 갈 생각이었다. 아마 내가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 될 것이었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이 비가 그치면 수도를 떠날 예정이었다. 어제 떠날 수도 있었지만 비가 내린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기한을 미루었다.

비는 질척거리게도 사람의 발목을 붙잡고는 했다. 괜히 비 때문에 일정이 꼬이는 것보다 날이 개어서 출발하는 것이 나았다.

차근차근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하고 있는데 모험가 손님이 남은 음식을 허겁지겁 먹더니 가게를 나갔다.

그의 손에는 우산이 없었다.

이보다 더 비가 쏟아지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내린 비 때문인지 거리는 한산했다.

그 후로 카페를 찾아오는 손님 또한 없었다.

칼에게 줄 약을 사야 했기에 일찍 카페 문을 닫았다.

바깥에 나오니 비가 얼마나 오는지 실감이 되었다. 캐노피 밑에 서서 우중충한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샬롯이 돌아온 다음 날은 비가 내렸다. 갑작스러운 샬롯의 등장처럼 갑작스레 내리는 비였다.

손을 내밀어 빗물을 받았다. 차가웠다.

가게에 여분의 우산이 남아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면 걱정할 것 같아서 안심시켰다.

나는 손바닥에 고인 빗물을 털어 내고는 쏟아지는 빗속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비를 맞지 않았다.

그늘이 지고, 어떤 사람이 우산을 씌워 주었다는 걸 깨달았다.

기척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흠칫했다.

빗소리가 커다랗게 사위를 울려서 귀가 먹먹했다.

모든 소음이 차단된 채로 우산을 씌워 준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나보다 훌쩍 키가 쓴 상대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얼굴이 반쯤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반듯한 입매만이 시야에 들어올 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크게 헛숨을 들이쉬었다.

동시에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비 오는 날 특유의 냄새와 섞였으나 내게 있어서 익숙한 냄새였다.

후드를 벗기지 않더라도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심장이 평소보다 느릿하게 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내 것이 아닌 심장이 원래 주인에게 반응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빗소리만이 그와 나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심장을 돌려받으려고 왔군요.”

그에게서 도망친 후 여러 가능성을 떠올려 본 적이 있었다.

그중 남자와 직접 맞닥뜨리는 가능성 또한 있었다.

내게 엘릭시아가 있으니 허황된 얘기는 아니었다.

막연히 상상만 하던 일이 현실이 되니 이상할 정도로 차분해졌다.

어제까지 날 괴롭히던 실체 없는 시선보다 차라리 그와 마주하는 것이 나았다.

그동안 날 괴롭히던 시선은 그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서 스스로를 의심하려 들게 하였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는 도저히 의심할 수가 없었다.

내가 미친 것이 아니었구나.

이제야 긴 꿈에서 깬 듯한 기분이었다.

“저를 죽여서 찾아가실 건가요?”

내 머리 색은 빨갛지 않았다.

륀느 공작이 처음 날 보자마자 재를 뒤집어쓴 것 같다고 표현한 진회색이었다.

내 눈동자는 녹음이 우거지듯 푸르지 않았다.

들짐승 같은 노란색이었다.

엉덩이까지 오던 긴 머리칼은 그에게서 도망친 날 잘라 내었다.

시간이 흘러서 어깻죽지를 넘겼지만 샬롯에 비하면 짧았다.

나는 샬롯이 아니었다.

그녀와 비슷한 모습을 한 인형 또한 아니었다.

샬롯과 닮은 점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타인이었다.

남자는 항상 내게서 샬롯을 찾았고, 남자가 기억하고 있을 나와 비교한다면 판이한 모습이니 지금 당장 날 죽인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남자가 날 죽이려 든다면 언제라도 반격하거나 도망칠 준비를 했다.

애초에 그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결국 도망에 성공했듯이 모든 일은 그 끝을 볼 때까지 부딪쳐 봐야 아는 일이었다.

“샤샤.”

유일하게 드러난 입술이 살짝 벌어지더니 한숨처럼 이름을 불렀다.

일순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빗소리에 묻혀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샤샤.

분명 그 이름으로 날 부르고 있었다.

“네가 숨긴 보물은 모두 찾았다.”

그가 우산을 들고 있지 않은 손을 펼쳐서 내 쪽으로 내밀었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 위에는 보석이 잔뜩 있었다.

그늘진 음울함 속에서도 손톱만 한 보석들이 저들끼리 빛을 내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보석들을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보았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들은 그냥 보석이 아니었다.

내가 칼을 통해서 암시장에 판매한 보석이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그러니 돌아가자. 샤샤.”

서늘한 공기가 마치 깨진 유리처럼 폐부를 깊숙이 찔렀다.

빗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남자의 언어는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나는 그의 샤샤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날 샤샤라고 부르는 것인가.

“네가 있을 곳으로.”

남자가 날 바라보았다.

입매만이 보였던 얼굴이 드러나고, 푸른 눈동자가 날 올곧게 마주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숨이 막혔다.

그에게 있어 샤샤란 누구인가?

그리고 내가 있을 곳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저는 샤샤가 아니에요.”

머릿속에서 난잡하게 뒤섞인 문장 중 하나를 겨우 끄집어내었다.

바짝 마른 천을 쥐어짜 내듯 한마디를 내뱉는 것이 너무나 힘겨웠다.

“진짜 샬롯은 폐하의 곁으로 돌아왔잖아요.”

샬롯이 돌아온 순간부터 남자가 부르는 ‘샤샤’는 진짜 샬롯이었다.

이 시기에 남자는 나라는 사람과 처음부터 만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다.

‘샤샤’든 ‘슈리엘’이든.

“그런데 어째서 저를 그리 부르시는 건가요. 제가 엘릭시아를 갖고 있기 때문인가요?”

현재 그와 나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중 남자를 변화시킬 만한 점은 샬롯이 아닌 내게 엘릭시아가 있다는 것밖에 없었다.

제 심장을 되찾아 가기 위해 나를 사랑하는 척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엘릭시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것을 되찾는 방법 또한 모르니 가장 가능성이 높은 가설이었다.

그 와중에 내게서 샬롯을 투영하며 사랑하는 척하는 것이 웃겼다.

남자는 과연 내 진짜 이름을 알고 있을까?

모르기 때문에 샤샤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완벽한 기만이었다.

“그렇다면 가져가세요.”

“…….”

“본디 제 것이 아니었을뿐더러 저에게 필요 없어요.”

“…….”

“주는 법이 있으니 필시 가져가는 법도 있겠죠.”

내 말을 가만히 듣기만 하는 남자는 점점 더 음울한 기색을 띠었다.

그가 등지고 있는 이 회색빛 도시와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샤샤.”

“폐하. 저는 샤샤가 아니에요.”

나는 남자가 무어라 더 말하기 전에 끊어 내고서는 단호히 말했다.

더 이상 나는 샤샤가 아닌데 어째서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부르는 것인가.

이러고 있으니 마치 내가 진짜 샬롯이라도 된 것 같지 않은가.

“당신의 샤샤도, 샬롯도, 륀느도! 폐하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일 뿐이에요. 그러니 제발 엘릭시아를 가져가서 모든 것을 바로잡도록 해 주세요.”

더는 그들에게서 내 삶의 의미를 찾지 않기 위해 도망친 거였다.

샤샤라는 애칭은 그런 날 부정하는 이름 같아서 감정이 절로 격해졌다.

“그러려고 절 찾아오신 거 아닌가요?”

남자는 그때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한 번도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인형처럼 조용히 지냈을 때 저렇게 슬픈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는 했었다.

그리고 그때도 지금도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네 앞에 선 것이지.”

이제야 내 것이 아닌 심장이 제자리를 찾아가는구나, 하고 생각했을 때였다.

남자의 입에서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너의 자리로 돌아가자.”

“…….”

“모든 사명이 끝나고 나면 너 또한 나를 이해하게 되겠지. 그러니 다시 한번 나를…….”

믿어다오.

남자의 마지막 한마디를 듣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도 모르게 남자를 밀어냈다.

우산이 바닥에 떨어지고, 그와 나는 쏟아지는 비를 속절없이 맞게 되었다.

거세게 내리는 비가 옷에 스며들어 몸을 적셨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느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여전히 날 쳐다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치니 한기가 돌았다.

한기를 느끼니 그제야 내가 덜덜 떨고 있다는 걸 인식할 수 있었다. 단순히 춥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믿어 달라는 남자의 그 한마디가 밑바닥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머리가 처박히는 듯한 기분이 들게끔 했다.

오도카니 서서 벌벌 떨고 있는 날 보던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우산을 주워서 다시 내게 씌워 주었다.

속이 역했다.

금방이라도 구역질을 할 것 같았다.

머릿속에는 남자가 한 말이 빙빙 맴돌고 있었다.

믿어 달라고?

끝까지 나를 이용하기만 한 륀느 공작마저 그런 간사한 부탁은 하지 않았다. 부탁하지 않더라도 항상 나는 그들을 믿었고, 그들은 내 믿음을 배신해 왔다.

끝이 정해진 결말이었다.

그런데 믿어 달라고?

우산은 다시 씌워졌지만 여전히 나는 젖어 있는 채였다.

당연했다.

비를 한 번 맞으면 닦아 내지 않는 이상 몇 번이나 우산을 씌운대도 돌이킬 수 없었다. 깨진 그릇을 아무리 잘 이어 붙인다 하더라도 결국 깨진 자국이 남아 있는 것처럼.

몇 번이나 내 믿음이 조각나서 이제는 다시 이어붙일 수가 없다는 걸 모르는 남자가 내 믿음을 청했다.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냉정하게 지금 내 이용 가치를 따졌다.

샬롯의 대용품이 아닌 오로지 내가 가진 이용 가치를.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설마, 제가 폐하의 아이를 낳길 바라는 건가요?”

엘릭시아를 되찾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돌려받은 사람이 없는 거라면?

그래서 샬롯 대신 아이를 낳게 하려고 수작을 부리는 중이라면?

내가 되돌아갈 자리가, 남자가 말하는 사명이라는 것이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씨받이 노릇을 하는 거라면…….

제발 아니라고 답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남자는 부정하지 않았다.

절망이 나를 집어삼켰다.

저번 삶에서 바닥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닥 밑에 더한 바닥이 있었다.

바닥으로부터 도망쳐 왔건만 끝없는 무저갱에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내일, 내일 다시 찾아오세요.”

도저히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어서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 짧은 말을 하는 것도 더듬게 되었다.

하루보다 더 길게 시간을 달라고 한다면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 이상을 말할 수 없었다. 아예 사라져 버리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그걸 들어줄 사람이었다면 내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을 거다.

“곧장 떠날 수 없어요.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요.”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던 남자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내게 우산을 쥐여 주려고 한 듯했지만 보지 못한 척,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빗속을 달렸다.

남자에게서 도망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날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산산이 부서졌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하여 이 길이 제대로 된 길인지 인지하지도 못한 채 무작정 다리를 움직였다.

눈을 뜨고 있었으나 감는 것만 못했다.

숨이 벅차오를 때까지 무작정 뛰다가 누군가와 부딪쳤다.

어찌나 거세게 부딪쳤는지 순간 휘청거리면서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그런 나를 상대가 붙잡았다. 덕분에 겨우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비틀대고 있는 느낌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상태로 미친 사람처럼 “감사합니다.”라는 말만 거듭 중얼거리다가 가던 길을 다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상대는 날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놓아 달라는 의미로 팔을 흔들었다. 그러자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다 젖었네.”

“아.”

한숨과도 같은 남자의 첫마디를 듣자마자 나와 부딪친 상대가 누군지 곧바로 깨달았다.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이고 있어서 조금씩 젖어 가고 있는 모험가 손님이 흐릿하게 보였다.

“우산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잃어버렸어요.”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채로 중얼거렸다.

그저 발음이 술에 취한 사람처럼 형편없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 거짓말이 서툴구나.”

남자의 속삭임이 빗소리와 함께 섞여 들어갔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듣지 못하여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습관적으로 눈이 아닌 입술을 확인하게 되었다.

나를 볼 때마다 항상 올라가던 입꼬리가 일자로 굳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갑자기 멍청이가 된 것처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으니 그가 우산을 잡고 있지 않은 한쪽 손으로 내 뺨을 닦아 주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 손을 쳐 내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익숙하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함께 떠나자.”

너무나 달콤한 제안이었다.

충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함께 떠나자.

그가 내게 자주 했던 말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대충 흘려들었을 텐데 지금은 도저히 농담으로 여길 수 없었다. 내가 방금 무슨 일을 겪었는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너무 알맞은 타이밍이었다.

어쩌면 내가 바라고, 또 바라던 제안이 아니었나 싶었다.

“저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 물감이나 마구잡이로 칠하듯이 여러 가지 색깔이 시야를 가렸다.

또다시 머리가 아팠다.

눈살을 찌푸렸다.

동시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모르겠어요.”

고통 속에서 힘겹게 문장을 완성해 냈다.

“이제 모르겠어요.”

이것이 가장 솔직한 속마음이었다.

혼란스러운 일투성이였다.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내밀어진 손을 잡고, 그와 함께 떠나는 것이 옳은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이럴 줄 알았다면 널 망가뜨려서라도 가졌어야 했던 걸까.”

내 뺨을 감싼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랬다면 지금쯤 나는 너의 무덤이 되었겠지.”

지독히도 낮은 남자의 목소리는 통증에 묻혔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 아팠다.

“네가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줄게.”

“…….”

“지나간 시간에 비하면 찰나일 거야. 항상 널 바라다 보니 기다림은 이젠 익숙해졌으니까.”

물에 잠긴 것처럼 아득하게 목소리가 겹쳐서 들렸다.

두통이 더욱 심해져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러니 눈앞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가 있던 자리에는 우산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사람이 사라질 수 없었다.

나는 미쳐 가고 있는 걸까.

내가 미쳐서 헛것을 보게 되는 듯했다.

어서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얼마나 몰두했으면 실존하지 않는 것까지 보고, 느낀단 말인가.

차가운 빗물이 다시 나를 적셨다.

현실이었다.

떨어져 있는 우산은 내버려 두고, 그대로 등을 돌려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이었다.

어떻게 문을 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빗물을 뚝뚝 흘리며 집에 들어갔다. 내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젖게 되었다.

방에 들어가려고 몇 걸음 나아가던 중 손바닥으로 입술을 틀어막았다. 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허리를 숙여서 헛구역질했다.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요란한 소리뿐이었다. 무엇 하나 나오는 것이 없건만 나는 계속해서 헛구역질했다.

감기에 걸린 탓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칼이 소리를 듣고 놀라서 내게 달려왔다. 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아무 말 없이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평소라면 내쳤겠지만 그럴 만한 경황이 없었다. 기력이 없어서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할 때까지 헛구역질을 반복했다.

겨우 그 짓을 멈췄을 때야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걸 떠올릴 수 있었다.

“어서 여길 떠나야 해.”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모든 감각이 마비되어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았고, 내 목소리가 내 목소리 같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누군가 나에 대해 물어보면 모른다고 해.”

칼을 통해 암시장에서 판매한 보석이 남자의 손에 있었다. 그렇다는 건 어떤 경우라도 칼의 존재가 노출되었다는 거였다.

내가 사라진다면 그들은 가장 먼저 칼을 붙잡을 거였다.

“이제부터 너와 나는 모르는 사이야.”

“누나,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어젯밤에 한 얘기 때문에 그런 거라면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 제발 그러지 말아요. 네?”

고개를 저었다.

그리 큰 움직임도 아니건만 어지러웠다.

이대로 쓰러지고 싶은 걸 꾹 참으면서 칼을 보았다.

“내가 말했지. 다섯 명을 죽였다고.”

지난 삶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매일 밤 악몽으로 꾸기 때문인지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어쩌면 가장 비참하게 여섯 번째 살인을 하게 될지도 몰라.”

샬롯 대신 남자의 아이를 품어 낳게 되면 나라는 사람의 이용 가치가 없어져 버림받을 거였다.

완벽한 인형으로 끝을 맺는 삶. 지난 삶 중에서 가장 끔찍한 결말이었다.

차라리 육체적으로 고문당했던 저번이 나았다.

“그러니까 도망쳐. 되도록 수도를 벗어나도 좋아. 내 보석을 줄게. 돈이 필요하면 그걸 팔아. 내일 오후쯤엔 비가 그칠 테니까 뒤도 돌아보지 말고 이 집을 떠나.”

경황없이 주절거렸다.

이러니 꼭 내가 미친 사람 같았다.

내가 무어라 주절거리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와중에도 그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숨을 고르고서는 아까보다 훨씬 차분한 어조로 그 말을 내뱉었다.

“넌 진짜 사람처럼 살아야 해. 알겠지?”

“……누나. 누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상관없어. 이해하지 못해도 떠나도록 해. 이제부터 너와 나는 남이야.”

칼이 나를 불렀다.

그것을 무시하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에 들어갔다.

칼이 따라 들어오려 했지만 재빨리 문을 잠갔다.

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문 앞에 서서 나를 불렀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온몸이 뜨거웠다.

칼이 아닌 내가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이대로 불타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문에 등을 기댄 채 미끄러지듯이 주저앉았다.

당장 도망쳐야 할까?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서 계획대로 국외로 도망치는 것이 옳은 선택인 걸까.

시일을 앞당겨 도망치는 나를 상상해 보다가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남자가 날 그냥 보내 줬을 리 없었다.

분명 근처에서 감시하는 사람이 있을 거였다. 괜히 섣불리 행동하여 의심을 산다면 하루라는 유예 기간마저 사라질 것이었다.

어둠에 잠겨 신중히 여러 가능성을 고려했다.

수많은 방법이 떠올랐지만 대부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잡힐 거라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래도 방법이 있을 거라 믿으며 계속 다른 방법을 떠올리고, 또 떠올리려고 했다.

머리가 이대로 폭발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감기약을 사 오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

약은커녕 아픈 사람에게 걱정만 가득 끼쳤다.

이보다 나은 헤어짐을 바랐는데 최악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허공을 울리는 낯선 웃음소리를 들으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어둠만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 * *

밤까지만 하더라도 거세게 내리던 빗발이 가셨다.

잘게 내리는 비를 제외한다면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오지 않길 바라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지만 더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집구석에 웅크리고 있다 하여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변수를 만들어 내어 바꿔야만 했다. 절대 바꿀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운명을.

필요한 물건을 챙기고, 감시자들이 날 수상하게 여기지 않도록 평소처럼 일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여니 미련하게 내 방문을 지키고 있는 칼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벽에 기댄 채 자고 있었다.

감기에 걸려서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불안하게 들렸다. 몸이 아프면 침대에서 자면 될 것을 내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생각할 것이 많아서 칼이 이러고 있으리라고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칼의 손아귀에 보석을 쥐여 주었다.

아직 암시장에 팔지 않은 보석이었다.

내 손은 지독하게 차가웠고, 그의 손은 지독하게 뜨거웠다.

그 온도 차를 느끼고서는 나 때문에 깨지 않을까 조심하며 우산을 챙기고 집을 나섰다.

딱히 지켜보는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방심할 수 없었다.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면서 간단하게 식재료를 사고 나서 카페 문을 열었다.

가게 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 누군가 있을까 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커튼을 걷어 내지 않아서 어둑한 내부에 불을 켰다. 짐을 대충 아무 데나 내버려 두고, 완전히 밝아지지 않은 공간에서 유령처럼 우뚝 서서 주위를 훑어봤다.

누군가 침입한 흔적은 없었다.

내가 어떻게 하든 결국 제 손바닥 안이니 마음대로 행동하라는 뜻일까.

굉장히 오만한 해석이었지만 그라면 가능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순진하게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계속 주위를 살피게 되었다.

잔뜩 신경이 곤두선 채로 항상 앉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손님이 오기를 기다렸다.

내가 기다리는 그 손님이 와야만 밤새도록 세운 계획을 실천할 수 있었다.

혹여나 오지 않을까 싶어서 불안감이 나를 덮쳤으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는 올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이 선택이 최선이었기 때문에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나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오늘같이 흐린 날이면 가뜩이나 없는 손님이 더욱 없어졌다. 그 때문에 내부에는 깊은 침묵이 가라앉아 있었고, 나는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손님은 오지 않았다.

나를 화들짝 놀라게 한 것은 대부분 바람 소리였다.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보았다.

달칵, 달칵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마음을 어지럽혔다.

이전 같으면 이미 손님이 방문하고도 남을 시간이었기 때문에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러다가 정오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는 그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시간은 계속 가고, 방법은 한정적이었다.

변수가 생겼으니 여기서 어떻게 계획을 수정해야 할지 몰라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을 때였다. 습관적으로 또 문양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흠칫하고 있는데 그토록 기다렸던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깥에서는 모험가 손님이 우산을 털어 내고 있었다.

곧바로 문 쪽으로 달려가자 카페 문이 열리고, 그가 살짝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오늘은 너무 반갑게 날 맞이해 주네.”

그의 얼굴을 보지 않은 상태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계획을 실행하기에는 아직 늦지 않았다.

“제게 같이 떠나자고 하셨죠.”

어제, 그와 나의 만남이 현실인지 환상인지는 상관없었다.

그 만남이 없었더라도 그는 날 원했고, 내게는 그가 필요해졌다는 사실만은 변함없었다.

남자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기 직전에 딱 멈춰 섰다.

닿지 않은 채로 손을 뻗었다.

상대에게서는 희미하게 비 냄새가 났다.

“저를 도와주시면 어디든 함께 갈게요.”

철컥.

내가 말하는 도중에 끼어든, 문을 잠그는 소리가 너무나 커다랗게 울렸다. 너무 성급한 게 군 게 아닐까 싶다가도 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떠올린다면 시간을 오래 끌 수 없었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나 혼자서는 도저히 남자에게서 도망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칼을 끌어들일 수도 없었다. 칼은 이미 존재가 노출돼 있으니까.

언제든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인간관계는 매우 협소했다. 칼 외에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람이라곤 그밖에 없었다.

“내가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 거지?”

예상외로 남자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화가 조금 더 길어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시작이었다.

“이곳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누군가에게 쫓기게 될 거예요. 최대한 그들에게 붙잡히지 않고 힘껏 도망쳐 주세요.”

“붙잡히지만 않으면 되는 건가?”

“네, 하지만 힘들 거예요.”

날 추적할 이들은 황실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어지간해서는 따돌리기 힘들 것이었다.

“그리고 저를 업은 것처럼 이걸 등에 멘 채로 달려 주세요.”

나는 대충 내버려 뒀던 가방에서 챙겨 왔던 걸 꺼냈다.

“베개?”

입고 있던 겉옷은 벗어서 베개에 감싸고, 나는 가방에서 새로 꺼낸 겉옷을 입었다. 그리고 베개를 부피감이 느껴지도록 만들자 남자는 곧장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했다.

“내게 미끼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거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날 감시하는 사람들을 그에게 붙여 놓고, 나는 조용히 수도를 벗어날 생각이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끈다면 여유가 생겼다. 짧지만 내게는 너무 과분한 시간이었다.

“만약 내키지 않으신다면 거절하셔도 돼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만약 여기서 그가 거절한다면 더는 방법이 없었다.

“아냐, 재미있겠는걸.”

“…….”

“그리고 네 부탁이잖아. 어떻게 거절해.”

그는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베개를 건네받았다.

내가 누구에게 쫓기는지, 왜 쫓기는지 자세한 건 묻지 않았다. 딱히 궁금한 기색 또한 아니었다.

단순히 제 흥미만을 위해 동참해 주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되는 한편, 미약한 불안감이 계속 남아 있었다.

애써 그것을 지우며 어디로 도망치면 좋은지 설명해 주었다.

어젯밤 한숨도 자지 않고 생각해 둔 경로였다.

내가 설계한 대로만 된다면 골목 사이사이를 지나게 되어 곧장 잡힐 일이 없을 거였다. 대신 당장 지도가 없어서 오로지 음성에 의존하여 설명하자니 그가 전부 기억을 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이런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한 번만 말했을 뿐인데 그는 내가 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따라 했다.

기억력이 굉장히 좋은 듯했다.

준비를 마치고 간단한 짐을 챙겼다.

어차피 오늘 떠날 예정이었기 때문에 준비는 다 돼 있었다.

“뭘 하는 거지?”

“불태울 거예요. 여기 있는 것, 모두 다.”

그냥 업혀 갔다가는 의심을 살 가능성이 높으니 시선을 분산시킬 겸 건물에 화재를 일으킬 생각이었다.

갑작스러운 화재로 인해 감시자들이 당황하는 동안 그를 먼저 내보내면 될 것이었다.

화염 마법을 썼다.

어제부터 비가 온 탓에 습기가 높기 때문인지 마법으로 만들어 낸 불꽃은 미약하게 피어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내가 강력한 마법사였다면 날씨에 구애받지 않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다.

애초에 없는 능력을 노력으로 겨우 끌어 올린 것이기 때문에 마력을 운용하고, 불꽃을 만들어 내는 것이 다였다.

“도와줄까?”

내가 계속 작은 불꽃을 만들어 내길 반복하자 지켜보던 그가 물었다.

“오늘 같은 날은 너와 상성이 맞지 않을 거야. 그러니 내게 협조한다면 널 도와줄 수 있어.”

“어떻게요?”

“네 피를 줘.”

“네?”

“조금이면 돼.”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얼떨떨하여 뿌리치지도 못했다.

“따끔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검지를 입에 넣더니 깨물었다.

날카로운 송곳에 찔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곧이어 남자가 혀로 상처 부위를 핥았다.

뜨끈하고 부드러운 것이 검지를 훑자 퍼뜩 정신이 들어서 황급히 그가 잡고 있는 손을 빼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하던 거 다시 해 봐.”

그가 건드리지 못하도록 가슴 쪽으로 손을 바짝 붙여 놓은 채 남자를 의심 어린 눈길로 흘겨봤다.

피를 한 방울 입에 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남자는 변해 있을 거라고 확신하며 당당하게 말했다.

마법은 선천적인 영역이었다. 피를 빼앗긴다고 하여 갑자기 마법을 잘 쓰게 된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불신하며 따지기에는 내게 남은 것이 없었다.

눈을 내리깔았다. 남자가 입에 담은 손가락에는 망울진 핏방울이 동그랗게 솟아올라 있었다.

결국 남자와 불필요한 언쟁을 하기보다 반신반의하면서 마법을 썼다.

내 손길이 닿는 곳마다 불꽃이 번졌다. 방금 전 희미한 불꽃과는 달랐다.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강렬한 불꽃이 주위를 에워쌌다.

단기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에 놀라서 그를 보았다.

“무슨 마법이죠?”

“효과가 길지 않으니까 하던 거 어서 마저 해. 네겐 시간이 없잖아.”

“…….”

“아니면 다시 한번 빨아 주길 바라는 거야?”

그는 의도적으로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피했다.

그가 나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듯, 나 또한 그에 대해 자세히 캐묻는 건 아닌 듯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내겐 시간이 없었다.

“뒷문으로 도망치세요.”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큰 폭발음이 건물을 뒤흔들었다.

열기가 얼굴을 훅 덮쳤다. 더는 마법을 쓰지 않더라도 화마가 주위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가 뒷문으로 나간 후에도 불구덩이 가운데에 서서 모든 것이 재가 되어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쌓였던 추억들이 그렇게 스러지고 있었다.

그들을 스쳐 지나, 음울한 하늘 아래로 나왔다.

가는 빗방울이 후드를 적셨다.

축축하게 신발을 감싸는 바닥을 밟으며 몇 걸음 나아가다가 이내 뒤를 돌아봤다.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탐욕스럽게 건물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붉은 불꽃과 까맣게 솟아오르는 연기.

이 불이 꺼지면 앙상한 골조만이 남아 있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항상 보았던 풍경이었다.

내가 가는 곳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였으니.

그동안 나는 폐허만을 봐 왔기 때문에 내가 그곳에 서 있는 거라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어쩌면 타고 있는 것은 나일지도 몰랐다.

느릿하게 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불타오르는 그 광경을 마지막으로 눈에 새겨 놓고서는, 그가 떠난 반대 방향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내가 지나간 자리마다 폐허가 된다 하더라도 이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 * *

갑작스러운 화재로 사람들의 이목이 건물을 집어삼킨 화염에 집중돼 있는 사이 인파를 헤치고 나아갔다.

바닥만 바라보며 달린 탓에 몇 번이나 사람과 부딪쳤지만 멈추지 않았다. 부딪칠 때마다 타인의 짜증 어린 중얼거림을 흘려들으며 기껏 얻은 기회를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 바지런히 다리를 움직였다.

길어 봤자 한 시간.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자신했지만 그렇다 하여 실패할 확률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이미 그간의 행적이 발각되었다. 칼을 통하여 움직여 왔음을 남자가 눈치챘으니 자연스레 국외로 도망치려는 계획 또한 들켰을 확률이 높았다.

이날을 위해 칼의 이름을 빌려서 마차를 구해 놨지만 황실 측에 매수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 마차를 타려고 하는 것은 제 발로 덫에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따로 마차나 말을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맨몸으로 수도를 벗어나거나 상황을 봐서 짐마차를 얻어 타는 수밖에 없었다.

어떤 선택이든 실수가 없어야 했다.

기껏 주어진 기회를 단 한 번의 실수로 날릴 수 없었다.

모험가 손님을 인적 드문 골목으로 보낸 것과 달리 나는 일부러 사람 많은 거리를 가로질렀다.

나무는 숲에 숨겨야 안전했다.

언제 그의 정체가 발각될지 모르니 한 걸음을 걷는 것조차 모두 계산하에 이루어졌다.

부슬비가 내리고 있어서 하늘은 흐렸으나 한낮이었다.

사람이 가장 많이 거리를 오가는 시간인 터라 또다시 반대편에서 지나가던 사람과 부딪치게 되었다.

몇 번째일지 모를 부딪침이었다.

이번에는 덩치 큰 사람과 부딪쳤기 때문인지 휘청거렸다.

뒤로 넘어질 뻔한 걸 겨우 다잡으며 다시 나아가려는데 불현듯 날 직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기이한 감각에 바삐 옮기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낯익은 사람이 서 있었다.

마지막에 보았을 때와 비교하면 조금도 변치 않은 얼굴이었다.

꾹 다문 입술이 고지식한 그녀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한 채 올곧게 날 쳐다보는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모시러 왔습니다.”

한때 나의 호위 기사였던 그녀가 마치 내가 이곳으로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우뚝 서 있었다. 기껏 타인을 끌어들이면서까지 도망쳤는데 감시를 완벽하게 따돌리지 못한 것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일까.

내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고도 놀랍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공녀를 믿었습니다.”

무표정하던 그녀의 얼굴에 감정이 서렸다.

마치 평생을 맹세한 친우에게 배반이라도 당한 것처럼 깊이 상처 입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저 또한.”

그녀가 힘겹게 덧붙인 한마디 말이 작지만 또렷하게 박혔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섞여 묻힐 수 있건만 이상하게도 내 귓가에 속삭이듯이 들렸다.

그러나 그녀가 내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호의적이든, 악의적이든 지금은 그저 내 앞길을 막고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비켜 주세요.”

“그럴 수 없습니다.”

별다른 기대 없이 내가 요구하자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만약 순순히 따라가지 않겠다고 하면 억지로라도 끌고 갈 듯했다.

그야 당연했다.

그녀에게 있어 남자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으니.

“경께서는 저를 믿었다고 하셨죠.”

“…….”

“저희가 믿음을 논할 관계였나요?”

그녀는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었다.

잠깐 내 호위 기사였지만 그 또한 남자의 명령으로 인해 엮여진 관계였다. 그녀와 내가 함께했던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덧없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네요.”

깊게 생각할 것 없다는 듯이 차갑게 대꾸하자 그녀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슬픔으로 비롯된 변화였다.

사적인 이야기와는 별개로 그녀가 나를 데려가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는 것은 변치 않았다.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한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공녀께서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더는 도망칠 퇴로가 없으니 저가 이끄는 대로 따라올 거라 생각한 건지 그 외에 수상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슬쩍 주위를 살펴보니 그녀만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던 듯했다.

“순순히 잡혀 줄 거라면 애초에 도망치지 않았어요.”

품에 손을 넣었다. 숨겨 둔 단검이 잡혔다.

손바닥을 감싸는 익숙한 촉감을 느끼며 조금씩 거리를 좁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그녀는 정의로웠다.

만약 내가 검을 들고 소란을 피운다 해도 가장 먼저 민간인을 우선시할 것이었다. 지나가는 행인을 무시하고 검을 휘두를 만큼 잔혹한 성정을 가진 이가 아니었다.

그러니 음습한 골목이 아닌, 유동 인구가 많은 거리에서 익히 알고 있는 그녀를 만난 건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미 한 번 당한 전적이 있던 그녀는 날 의심하여 모험가 손님을 따라가지 않은 거겠지만, 내게 있어서는 추적자를 마주할 거라면 차라리 아는 사람이 나았다.

단검을 꺼내려고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 내 어깨를 잡고 뒤로 밀었다.

속수무책으로 뒷걸음질 쳤다.

잔뜩 당황한 채로 고개를 드니 나를 밀어내고 내 앞에 선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커다란 등이 시야를 가렸다.

“……칼?”

내 부름에 그가 내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렸다.

울기라도 한 것인지 뺨뿐만 아니라 눈가가 빨갰다.

“누나, 어서 가요.”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는 거야?”

“늦잠 잤어요. 가게가 불타는 거 보고 길이 엇갈렸을까 봐 걱정했는데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건지 그는 중간중간에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겉옷은 대충 꿰입은 듯했고, 우산을 쓰지 않아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그대로 맞고 있었다.

찬 빗물이 그의 열기까지 식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깟 보석 몇 개를 작별 인사로 퉁 칠 생각이었어요?”

그에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이 이상 나와 엮여 봤자 좋을 것 없었기 때문에 집을 나선 순간부터 내 계획에 칼의 존재는 지워져 있었다.

보석을 건네준 것이 실질적인 작별 인사였던 것이다.

때마침 감기를 앓고 있으니 하루 종일 감기 기운에 취해 눈을 감고 있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내 예상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지친 몸을 이끌고 내 앞에 서 있었다.

날 위해서.

“제가 말했잖아요. 누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끝까지 함께할 수 없더라도 저라는 사람을 기억해 줘요.”

힐끔힐끔 그녀의 눈치를 보며 칼이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죄책감이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미안해.”

긴말은 나오지 않았다.

망설임으로 인해 입술을 달싹이다가 목소리를 내었다.

여러 단어가 맴돌던 것과는 다르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고작 ‘미안해’ 한마디였다.

“사과는 됐어요. 그보다 저 사람 때문에 난처한 거 맞죠? 시간을 끌 테니 망설이지 말고 가요. 항상 누나가 바라 왔던 거잖아요.”

항상 깔끔한 제복 차림을 고수하던 여자는 근처에서 잠입하고 있었던 탓인지 평범한 외출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일반 행인과 다를 바 없었지만 허리춤에 있는 검집이 평범한 사람은 아님을 알리고 있었다. 아무리 아프다 하여도 눈썰미가 좋은 칼 또한 눈치챘을 거다.

그런데도 칼은 망설이지 않았다.

내 앞을 굳건히 지키는 그에게 이래서는 안 된다고 말려야 하는데 막상 내가 한 행동은 당장이라도 도망칠 듯이 뒷걸음질 치는 것밖에 없었다.

내가 말린다고 해서 그가 내게 등을 안 내어 줄까?

차라리 그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내게 있어서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실이 될 건 없었다.

끝까지 칼마저 장기 말 취급하는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지만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남자에게서 도망칠 수 없었다. 당장은 나 자신이 싫을지라도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려면 필시 누군가를 밟고 올라설 수밖에 없었다.

한때 그녀의 마음을 짓밟았듯이.

“폐하의 명입니다. 비켜 주시죠.”

내가 뒷걸음질 치는 걸 확인한 그녀가 황제를 언급하며 칼에게 경고했다. 제아무리 황실에 대한 신앙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흔들릴 만했다.

게다가 칼은 내가 황실과 관련 있는 걸 모르고 있었다.

당황하거나 배신감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 그러나 칼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 다른 대답을 망설임 없이 내뱉었다.

“폐하든, 신이든 다 엿 먹으라 해요.”

“……신성 모독은 큰 죄입니다. 원래라면 제 권한이 아니지만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즉결 처분하도록 하겠습니다.”

칼이 황제를 모욕하여 화가 난 건지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나는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무작정 달렸다.

얼마나 버텨 줄지 몰라도 칼이 스스로를 희생하여 얻어 낸 시간이었다.

짧든 길든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것이 내가 칼에게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녀만이 남아 있었던 건지 더는 내 앞길을 막는 사람이 없었다.

예정대로 걸음을 옮겼다. 계획에 변화는 없었다. 대신 아까보다 더 스스로를 재촉하게 되었다.

쿵쾅쿵쾅 빠르게 뛰는 심장이 온몸을 울렸다.

내 몸뚱이 자체가 거대한 악기가 된 것 같았다.

빠른 춤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올라올 만큼 뛰었다. 이번에는 방해 없이 성문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제 검문만 통과하면 되었다.

그대로 성문을 통과하려다가 불현듯 추적자가 가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황궁 내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실력 있는 기사라는 점과 칼이 환자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오래 시간을 끌 리 없으니 근처에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성문을 통과해 봤자 맨다리로 걷게 되면 여기까지 온 노력이 무색하게도 금세 잡힐 것이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마침 흰머리가 힐끗힐끗 난 마부가 짐마차를 끌고 수도를 벗어날 채비를 끝내고 있었다.

일정 거리를 두고 짐마차를 살펴봤다.

무언가를 잔뜩 실어 놨는데 비 때문인지 검은 천으로 덮어 놔서 정확히 무엇을 실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곧장 출발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여서 더 늦기 전에 다급하게 다가갔다.

근처에 멈춰 있는 짐마차는 그것 하나뿐이었다.

“저기, 실례지만 어디로 가세요?”

“러프킨으로 간다네.”

힐끗 나를 본 마부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애초에 그의 목적지가 알고 싶어서 물어봤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다소 과장되게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말을 재빠르게 쏟아 냈다.

“세상에. 러프킨이요? 괜찮다면 짐칸을 얻어 탈 수 있을까요? 어머니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아서 하루빨리 고향에 가야 하는데 따로 마차를 구하기에는 제 주머니 사정이 썩 좋지 않아서요.”

일부러 지방 말투를 흉내 냈다. 고아원에서 별별 말투를 가진 아이들이 다 있었기 때문에 흉내 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오랫동안 수도에서 지내다 보니 수도에서 쓰는 말투가 입에 익었다.

지방 사투리를 제대로 따라 한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내 말투를 이상하게 느끼지 않길 바라며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제가 가진 돈이 이것밖에 없어요. 만약 너무 적다고 생각하시면 중간에 내려 주셔도 돼요.”

주머니를 털어 내자 동화 몇 닢이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한 번에 많은 돈과 보석을 챙겨 두면 나중에 귀찮은 일에 엮이기 쉬웠기 때문에 나눠서 챙겨 두는 편이었다. 이런 식으로 쓰일 줄 몰랐으나 결과적으로 올바른 선택이었다.

몇 푼 되지 않은 돈을 마부에게 내밀었다.

내게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닌 척했지만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수중에 돈이라면 많았다.

충분히 돈으로 매수할 수 있었지만 나는 돈보다 동정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기로 했다.

돈으로 사람을 사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얄팍한 관계였기 때문에 끊어 내기 또한 쉬웠다.

언제 어떤 식으로 상황이 흘러갈지 모르는 지금 같은 때에 대뜸 거금을 들이밀기보다는 흔한 만큼 공감하기 쉬운 이야기를 지어냈다.

상대방처럼 나이가 지긋하다면 돈보다는 사람의 이야기에 혹하고는 한다는 것도 노렸다.

마침 나는 비를 맞아서 젖어 있는 채였고, 한시도 쉬지 않고 뛰어오느라 의도하지 않아도 거친 숨이 색색 새어 나왔다.

볼품없는 내 꼴은 손바닥에 있는 동화 몇 닢과 어우러져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를 완성했다. 이런 내가 가여워 보였는지 마부는 흔쾌히 제 옆자리를 내어 줬다.

“언제 출발하시나요?”

“준비도 끝났으니 당장 떠나는 게 좋겠지.”

희소식이었다.

수도를 벗어나는 건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마부는 미련 없이 마차를 몰았다. 빗소리와 말발굽 소리,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우러졌다.

성곽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바짝 긴장하게 되었다.

다른 곳보다 여기서 잡힐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검문은 꽤 여유로웠다. 당연히 잔뜩 경계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대충 훑어보고 넘어갔다.

만약 내가 마차를 얻어 타지 않고 홀로 나가려 했어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았다. 경비병은 후드를 눌러쓴 날 쓱 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나 풀어진 분위기라서 덩달아 맥이 빠졌다.

수도를 벗어나려 하는 내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혹 내게 붙여 둔 사람을 믿고 성곽까지 오지 못하리라고 단정 지은 걸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사랑에 미쳐서 제정신이 아니어 보여도 남자는 허술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 자취를 쫓아서 끝내 암시장에 판매한 보석을 되찾은 것만 해도 그러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너무 잘 풀리니 찜찜했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니 좋아해야 함이 분명한데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복잡한 절차 없이 허가가 떨어졌다.

마부가 그대로 수도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때, 경비병이 갑자기 불러 세웠다.

“아, 잠깐.”

경비병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들킨 걸까?

후드 밖으로 머리칼이 삐져나오지도 않았건만 긴장하게 되었다.

고개를 살짝 숙였다. 혹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손을 슬쩍 품 안에 넣었다.

바로 내 옆에 경비병이 서는 것이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후드가 벗겨지고, 마차 밑으로 질질 끌어 내려질 것만 같아서 마른침을 삼켰다.

“길이 험하니 조심하시라는 말을 깜빡했군요. 몇 시간 전에 근처에서 사고가 나서 꽤 애먹었습니다.”

“비가 미친 듯이 왔으니 그럴 만도 하지.”

“네, 그러면 조심히 가도록 하세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얼떨떨했다.

경비병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의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바짝 얼어붙어 있는 사람은 나뿐인 듯했다. 이러고 있으니 경비병이 황실 측으로부터 아무런 언질을 받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럴 리 없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나 막힘없이 나를 수도 밖으로 몰아내고 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마부가 짐마차를 몰았다.

나를 태운 마차는 그렇게 성곽을 벗어났다.

수도를 빠져나온 것이다.

처음에는 길이 잘 닦여 있어서 크게 불편함이 없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마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어제오늘 내내 비가 와서 바닥이 진창이었다.

경비병이 말한 대로 험한 길이었다.

“비가 징글징글하게도 오는군.”

“……그러게요.”

“기세를 보아하니 내일쯤엔 그칠 모양이야. 땅이 굳으려면 며칠 더 있어야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마부는 혀를 끌끌 찼다. 갑작스럽게 내린 비가 반갑지 않은 건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옅은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그치지 않는 비처럼 불안은 금세 가시지 않았다.

무사히 수도를 빠져나왔건만 이것이 끝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국외에 도착할 때까지 이 감정을 안고 가야 할 듯싶었다.

덜컹거리는 마차에 몸을 맡겼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나아가는 마차는 어느덧 수도와 까마득히 멀어졌다.

성벽이 보일 리 만무한데 무의식적으로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추적자가 따라붙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이쯤 되면 누군가 따라붙을 만도 한데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칼이 오래 버텨 주리라고 믿지 않았다. 그가 기발한 묘책을 쓴다 하여도 무인의 길을 밟아 온 그녀와 상대하여 분 단위로 버티는 건 객관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모험가 손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 얼마나 빠른지 몰라도 벌써 잡히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날 따라오지 않았다.

왜? 어째서?

의문이 계속 떠올랐다. 상념에 잠긴 채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봤다.

마부는 과묵한 편이었기 때문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은 끊기질 않았다.

어느덧 노을이 졌다.

주홍빛을 받으며 울퉁불퉁한 길을 가던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상념에서 깨어난 내가 당황해하자 마부는 진흙탕에 바퀴가 빠진 것 같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와드릴게요.”

“아니,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 아가씨는 앉아 있게나.”

무뚝뚝한 마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 옆으로 다가온 마부가 안 그래도 주름진 얼굴인데 더욱 깊이 주름이 팬 채로 말했다.

“너무 깊게 빠져서 아가씨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꺼내기 힘들 듯하니 근처 마을에 가서 도움을 받아야겠군.”

“제가 갈게요.”

“아니, 내가 가지.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 그동안 마차를 지켜 주게나.”

한차례 거세게 내린 비로 길이 험하다는 걸 알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건지 중간에 다른 마차를 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타인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부의 말대로 차라리 마을에서 사람을 불러오는 편이 나았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마차를 지키라고 내게 부탁한 것 또한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동정으로 호소한 것이 마부에게 통했는지 내가 그의 마차를 훔칠 거라는 상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마차를 훔칠 생각은 없었다.

대신 내가 너무 사람을 믿지 않고 의심만 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들킨 듯해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 때문에 괜히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마부가 내게 빵 한 덩이를 건네주었다.

“슬슬 저녁 시간이 되었겠군. 허기질 테니 이거나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네.”

“아뇨, 괜찮아요. 동승을 허락해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걸요.”

“내 손자를 보는 듯해서 그러네. 사실 별거 아닌 걸 주게 되어 썩 마음이 편치 않아. 그렇다고 아무것도 주지 않자니 굶기는 건 영 아닌 것 같아서 주는 거네.”

“……감사합니다.”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빵 한 덩이를 받았다.

그제야 안심하듯이 날 바라보더니 금방 다녀오겠다면서 마부가 떠났다.

빵을 쥔 채로 얌전히 서 있는 말을 지켜보았다.

긴장한 탓인지 마부가 떠난 후 한참이 지나서도 허기가 지지 않아서 빵을 쥐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시간이 지루해서 빵을 입에 댔다.

마부가 돌아왔을 때 빵이 그대로라면 슬퍼하겠지, 라는 생각도 하면서.

태양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익숙한 어둠이 찾아왔다.

안개에 싸인 듯, 뿌연 달이 뜬 하늘을 올려다봤다.

남자와 약속했던 하루가 끝나 가고 있었다. 잘게 내리던 비 또한 이제는 그쳤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창백한 숨이 부서졌다.

흩어지는 숨결을 보고 있자니 근처에 있는 사람은 나뿐임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가끔 말이 ‘푸르릉’ 하고 울지만 않으면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누군가 근처에 있다면 금세 눈치챌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내 숨소리만이 커다랗게 울리고 있었다. 날 지켜보는 시선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완벽한 혼자인 것이었다.

현재 마차 때문에 발이 묶여서 장시간 이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쫓아오는 사람이 있다면 벌써 붙잡히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심장을 가진 나를 순순히 포기했을 리는 없을 테니 꿍꿍이가 있다는 것밖에 결론이 나지 않았다.

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괜히 애꿎은 달만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마부가 너무 늦는다는 걸 깨달았다.

갈 때는 맨몸으로 걸어갔지만 올 때는 마을에서 말이나 마차를 얻어 타고 올 걸 고려한다면 슬슬 되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소식이 없었다.

정확한 시각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나는 제법 오랫동안 마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황제와 돌아오지 않는 마부.

불현듯 그 둘을 붙여 놓자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마부가 추적자와 마주했을 수도 있었다.

내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 없다는 것이 아예 쫓아오지 않는다는 의미가 될 수는 없으니까.

내가 안심하길 바라여 일부러 느긋하게 추적을 진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내 가정이 맞다면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마부를 기다리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지만 남자에게서 완벽하게 벗어나려면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물기를 머금은 땅을 밟았다.

일단 마차의 상태를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마부는 내 도움이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혹시 내 선에서 처리할 수 있다면 바퀴를 꺼내 놓고 기다리는 것이 옳았다.

경우의 수는 두 가지였다.

추적자가 있다와 없다.

후자의 경우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전자의 경우라면 맨몸으로 도망쳐 봤자 멀리 가지 못할 테니 마부의 말을 훔쳐야 했다.

그러나 추측만으로 남의 재산을 강탈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짓이었다.

혼자서 바퀴를 꺼낼 수 있다면 꺼내 놓고 기다릴 것이고, 그럴 수 없다면 근처에서 몸을 숨긴 채로 있을 거였다.

드문드문 고여 있는 물이 옅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걸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뒤쪽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걸음이 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과 다르게 조심스러웠다.

뒷바퀴를 확인했다.

순간 흠칫하고서는 반대쪽도 확인했다.

그리고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마차는 멀쩡했다.

땅이 무른 건 맞았으나 바퀴는 중간에 이동을 멈출 만큼 빠져 있지 않았다. 마부가 마차를 멈춰 세웠을 땐 딴생각을 하느라 상황을 주의 깊게 살피지 못했다.

그래서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도 마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설마…….”

추적자가 따라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만약 따라올 필요가 없던 거라면?

그를 따돌렸다고 믿어 왔던 것이 모두 거짓이었다면?

도망쳐야 했다.

함정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몸을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내 움직임은 날 끌어안은 누군가로 인해 막혀 버렸다.

익숙한 체취가 코끝을 찔렀다.

상대가 날 뒤에서 끌어안았기에 얼굴은 보지 못했으나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네가 내게 말했지 않느냐.”

“…….”

“하루만 기다려 달라고.”

밤공기처럼 서늘하고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샤샤, 나와의 약조를 지킬 시간이다.”

남자였다.

남자가 날 찾아냈다.

마치 목이 졸린 듯한 기분이었다.

일순 숨 쉬는 법조차 잊어버렸다.

남자에게 등을 내어 준 채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견고히 쌓아 올렸던 노력이 산산이 무너졌다.

그 광경이 너무나 처참하여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제아무리 뛰어 봤자 남자의 손바닥 안이었다는 사실이 선명히 와닿았다.

남자의 찬 손이 내 손등에 닿았다.

겨울처럼 시린 감각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밀어냈다. 강하게 힘주어 안고 있었던 것이 아닌 탓에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비틀거리면서 뒷걸음질 쳤다.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주저앉을 수 없었다.

그에게서 멀어져야 했다.

“샤샤.”

남자가 나를 불렀다.

내 이름이 아니었지만 그것이 내 이름인 양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부르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그 모습이, 그 모든 것이 가증스러웠다.

단검을 꺼내서 망설임 없이 남자에게 겨누었다.

날카로운 검 끝이 남자의 목을 향했다.

“가지 않을 거예요.”

의미 없는 발악이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어찌 행동할지 예상하고 천천히 궁지에 몰았던 남자였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제 발로 덫 안에 들어갔다.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서.

“시간을 달라고 했지, 폐하의 곁으로 가겠다고 약조한 적 없어요.”

나의 희망이 몇 번이나 산산이 부서진다 하더라도 무너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한다면 그건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제가 수도를 벗어나서 여기까지 온 이유를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아니, 아시면서 모른 척하고 계시는 거겠죠. 폐하께서는 심장이 주인을 잘못 찾아갔을 때처럼 외면만 하고 있는 것뿐이니까요.”

“…….”

“제가 폐하와 함께할 일은 없을 거예요. 다신.”

단검을 세워 그대로 남자를 찌르려고 했다.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한 위협용이었다.

그러나 내 움직임을 읽은 남자가 저를 향해 휘두른 검을 잡았다.

내 손목을 잡을 수도 있었건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것은 은빛 검을 적시고,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제아무리 태어나길 드래곤으로 태어났다고는 하나 당장 그를 감싸 줄 단단한 비늘 따위는 없었다.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연약한 살갗을 파고드는 검날이 아플 법도 한데 신음 한번 내지 않았다. 단검을 움켜쥔 창백한 손에 시선을 주다가 멍청해진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인상 한번 찡그리지 않고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서글퍼 보였다.

“나를 몇 번이나 난도질한다면 네 화가 풀리겠느냐?”

구슬픈 목소리였다.

빗속에서도 이런 목소리로 내게 말했었다.

무엇이 남자를 그토록 슬프게 만드는 것인지 아직도 나는 알 수 없었다.

“네가 원한다면 몇 번이든 좋다. 눈이든, 손가락이든, 심장이든 상관없으니 네 마음대로 하거라. 나의 모든 것은 이미 네 것이니.”

그리고 어째서 저를 내 것이라고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 샬롯이었다.

다섯 번이나 봐 온, 정해진 미래건만 왜 자꾸 스스로를 속이려고 드는 것인가.

남자가 단검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단검을 쥔 손을 놓았다.

단검은 남자의 가슴 지척에서 멈춰 있었다.

심장이 있는 곳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거리를 좁히려 든다면 남자의 심장을 정통으로 찌를 것이었다.

남자를 찌르고, 도망친다.

그토록 바라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계획을 실행할 순간이 다가오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피로 흠뻑 젖은 남자의 손과 처연한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혼란스러웠다.

제 목숨을 내게 맡기는 그의 행동이,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받아들이겠다는 남자의 행동이 날 혼란스럽게 했다.

“저는…….”

애초에 남자를 죽이기 위해 검을 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검은 남자의 심장을 향했고, 남자는 내 선택이 그의 죽음이라 하더라도 겸허히 받아들일 것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단번에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선택의 기로에 서 있던 나는 다급히 입을 다물어야 했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비를 조금 맞았다 하더라도 쓰러질 몸이 아닌데 갑자기 이러니 당황스러웠다.

눈이 감겨 왔다. 고통은 없으니 수면에 가까웠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마부가 내게 건네주었던 빵이 떠올랐다.

그 외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반항하리라는 걸 예상하고 수면제가 든 빵을 먹인 걸까. 내게 선택하라고 했지만 남자는 결국 날 데려갈 작정이었던 것이다.

세상이 한 바퀴 도는 것만 같았다. 중심을 잃고 기우뚱한 몸이 뒤로 넘어갔다.

시야가 까맣게 물들여졌다.

그 끝에서 마주하게 된 건 슬픔에 잠긴 남자의 푸른 눈동자였다.

* * *

바닥이 보이지 않는 짙은 푸름 속에 침잠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절로 눈이 떠졌다.

손끝에 감기는 부드러운 시트의 촉감과 낯선 광경. 시야를 점령하는 이질적인 공간으로 인해 몽롱했던 정신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빠르게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런다 하여 나를 에워싼 풍경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주위가 어두워도 선명히 보이는 고풍스러운 실내 장식은 결코 일반 평민의 집에서 볼 만한 것이 아니었다. 눈에 익지 않는 내부를 구석까지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러고 있으니 눈을 감기 전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마지막에 쓰러지는 나를 안았던 남자의 감정까지도.

입술을 깨물었다. 근처에 남자는 없었다. 차라리 그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이 상태로 남자를 보게 된다면 여전히 혼란스러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바짝 긴장한 채로 침대에서 벗어났다.

누군가 날 지켜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숨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손을 뻗어서 커튼을 걷어 냈다.

얼마나 잤는지 눈을 감기 전만 하여도 어두컴컴한 밤이었건만 커튼을 걷어 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어두운 곳에 있었던 탓에 곧장 적응하지 못하고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천천히 적응하고 나서야 바깥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정원은 회색 벽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벽담 너머에는 울창한 나무가 얼핏 보였다. 적어도 도심은 아니었다.

바깥을 더 자세히 살피기 위해 창문을 열어 보려 했다. 그러나 열리지 않았다. 무언가에 막힌 느낌이라서 살펴보니 작은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어째서 자물쇠를 걸어 놨는지 알 것 같아 실소가 나왔다.

창문을 통해 도망칠 거라고 생각한 것이겠지.

3, 4층쯤 되는 높이였는데 도망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못 뛰어내릴 것도 없었다. 대신 높이가 높이인 터라 죽지는 않더라도 몸이 성치 않을 거였다.

의미 없이 창문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다가 이번에는 뒤돌아서서 문이 있는 곳까지 성큼 걸어갔다.

아까의 조심스러운 걸음과는 달랐다.

문고리를 잡았다. 힘을 주었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창문과 마찬가지로 잠겨 있었다.

완벽한 감금이었다.

퇴로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내 발로 나가는 건 물론이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서 잠겨 있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충 예상했던 터라 놀랍지 않았다.

근처 마을에 잠깐 다녀온다던 마부가 추레한 차림이 아닌 깔끔한 정장을 입은 채 나를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비교한다면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일어나셨습니까.”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부의 모습을 먼저 본 탓인지 내게 깍듯이 대하는 상대가 어색했다.

“폐하께서는 새벽녘까지 자리를 지키시다가 공무로 인해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고저 없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부일 때 내게 무뚝뚝했던 건, 하대가 어색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냥한 대꾸를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지 상대는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든 말든 괘념치 않고 이어서 말했다.

“시장하실 테니 식사부터 하시죠. 금방 들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제 할 말을 끝내자마자 그가 등을 돌렸다.

나는 다시 밖으로 나가려는 그를 붙잡았다.

“이곳은 어디죠?”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보셨다시피 인적 드문 곳에 위치한 터라 요양하기 참 좋은 곳입니다.”

한마디로 도망치는 건 꿈도 꾸지 말라는 얘기였다.

어이없어서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렇군요. 얼핏 봐도 말씀하신 그대로인 것 같았어요.”

다소 신랄하게 나온 내 말투에도 반응하지 않고 그가 나갔다.

닫히는 문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옷은 갈아입혀져 있었다.

가벼운 침의였다.

소지품은 당연히 모두 빼앗겼다.

단검도, 보석도, 돈도.

내가 가진 것은 없었다.

침착하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분명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으리라 믿으며.

초조해지지 않도록 차게 식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고 있으니 다시 돌아온 그가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나는 가장 먼저 음식이 아닌 식탁 용구를 확인했다.

포크나 나이프는 뭉툭했다.

이걸로 누굴 찌른다 해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거였다.

딱 음식을 먹을 용도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그릇 또한 철이었다. 바닥에 떨어트린다 해도 깨지기는커녕 요란한 소리만이 날 것이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뾰족한 것은 내 치아뿐이었다.

뭉툭한 포크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이전에 삶을 끝맺었을 때처럼 날 씹어 삼키는 것밖에 답이 없는 걸까.

아드득아드득.

와작와작.

꿀꺽.

나는 내 자신을 씹어 삼켜서 작은 흔적마저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상상을 했다.

“불편하시겠지만 폐하의 명이 있을 때까지 이곳에 있어 주십시오.”

내가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있자 노인이 무덤덤하게 말하며 상념을 깨웠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음식을 먹기 위해서가 아닌,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제가 말도 안 되는 연기를 할 때까지 마차에서 기다리고 계신 건가요?”

상대는 침묵했다.

잘 짜인 연극 무대 위에서 놀아난 것뿐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남자가 어디까지 계산하고 명령을 해 놨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대본 없는 배우였고, 주위 사람들은 내 연기에 맞추어 극을 이끌었으니.

“폐하께서는 언제 오시나요?”

“그에 대해 확답을 드릴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금방 찾아오실 겁니다.”

“그때까지 훈육을 잘 받은 개처럼 얌전하고 조용히 있는 것이 제 역할이겠네요.”

“……나중에 빈 그릇을 가지러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갔다.

덩그러니 남은 나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수면제가 든 빵을 먹은 탓인지 이번에도 수면제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먼저 들었다.

한 번 넣은 수면제, 두 번 넣지 못할 리 없었다.

두 번이나 남자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나에 대한 신뢰는 이미 바닥을 찍었을 것이다.

고분고분 얌전히 있지 않고 반항할 걸 고려하여 차라리 재우려고 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먹지 않으려니 결국 내 손해였다.

계획을 행동으로 실천하려면 체력이 필요하다는 걸 일찍이 깨달았다.

굶어 죽느냐, 수상한 음식을 먹느냐.

짧게 고민하다가 포크를 들었다.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너무나 좁았다.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비가 그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아서 정말 비가 온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게끔 했다.

해가 질 때까지 혹시 쓸 만한 게 있을까 싶어서 방을 탐색하다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 침대에 누웠다.

할 게 없으니 지루하게 시간만 흘렀다.

어찌어찌 시간을 보내어 밤이 되었다.

그때까지 남자는 날 찾아오지 않았다.

수면제를 넣은 건 아닌지 잠이 오지 않아서 뒤척였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잠을 잤던 것 같다.

사실 잠이라고 하기에 민망한 옅은 수면이었다.

어둠을 헤매다가 타인의 기척을 예민하게 느끼고 눈을 떴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푸른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기시감이 들었다.

그 언젠가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하이넨 공작을 만난 후 쓰러졌을 때였던가.

그때와 비교하면 옷만 바꿔 입은 채로 다른 공간에 남자를 놔둔 것 같았다.

날 바라보는 얼굴은 그때와 다를 바 없었다.

내가 더는 샬롯이 되어 줄 수 없음을 아는데도 말이다.

“저를 취하실 건가요?”

“아니.”

“거짓말.”

거짓말이었다.

남자는 또 날 기만하고 있었다.

“그러려고 저를 데려온 거잖아요.”

“…….”

“제가 샬롯을 대신해서 폐하의 아이를 낳길 바란다고 하셨죠. 설마 본인이 한 말을 잊은 건 아니겠죠?”

“……대신하여.”

내가 했던 말을 멍한 표정으로 따라 한 남자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남자는 이전에 했던 말을 부정했다.

“내가 너를 오해하게끔 만들었구나.”

“오해라니요?”

반문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스스로 듣기에도 잔뜩 지쳐 있는 목소리였다.

“대체 무엇이 오해인데요?”

내가 오해하고 있는 건 없었다.

나는 누구보다 내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이전의 삶을 통해, 남자와의 짧은 대화를 통해 명확히 내 처지를 훑어볼 수 있었다.

진짜 반려가 돌아왔으니 드래곤의 심장을 가진 것 외에는 아무런 쓸모 없는 여자.

그 심장마저 어쩔 수 없이 쥐여 준 것이기 때문에 황족과 공작 가문 모두에게 골칫덩어리인 존재.

그것이 현재 내 위치이건만 어째서 부정하려 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아니라고 해도 바뀌는 건 없는데.

“나는, 그저 널 내 곁에 두고 싶을 뿐이었다.”

맹인이 활자를 손으로 더듬듯이 남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내가 그린 미래가, 그리고 나의 바람이 먼저 앞서서 네가 오해할 만한 상황을 만들었구나.”

올곧게 날 바라보는 푸른 눈은 저가 하는 말이 거짓 하나 없는 순수한 진심임을 주장하는 것 같았다.

만약 내가 단 한 번도 죽지 않았더라면 그가 날 사랑해서 이리 말하는구나, 하고 믿었을 정도로.

“어째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지만 지난 다섯 번 동안 그가 그린 미래에 내가 있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에게는 없던 일이겠지만, 나에겐 흉터처럼 깊게 남아 지워 낼 수 없는 시간이었다.

“이러니까 꼭…….”

샬롯이 아닌 절 사랑하는 것 같잖아요.

차마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 문장을 그대로 꺼냈다가는 나만 비참해질 것 같다는 생각에 절로 입을 다물게 되었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니.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사람의 마음은 바람 한 번 분다고 하여 뒤집어지는 종잇장처럼 얄팍하지 않았다.

이리 쉽게 변할 마음일 리 없었다.

이번 삶에서 내가 한 것이라고는 샬롯의 모습으로 남자 앞에서 죽을 뻔했다는 것밖에 없었다.

몇 번이고 스스로를 담금질하며 노력했던 지난 삶과 비교한다면 별것 아닌 일이었다.

그의 호감을 사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마음이 변했다면 여기 오기까지 노력했던 나는 무엇이 되는가.

더 말을 이었다가는 그가 모르는 지난 삶에 대한 얘기까지 꺼낼 것 같아서 황급히 화제를 바꾸었다.

“저를 도와줬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안 그래도 칼과 모험가 손님의 안위가 걱정되던 참이었다.

특히 칼은 하필 황궁 소속의 기사 앞에서 불경한 말을 내뱉은 탓에 당장 목이 날아갔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제발 살아 있기를.

나로 인해 그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길 바랐다.

“널 돕기 위해 거리에서 소란을 일으켰던 남자는 가두어 놓았다. 네가 싫어할 만한 짓은 하지 않으니 걱정 말거라.”

“다른 사람은요?”

큰불은 껐지만 안도하기엔 일렀다.

나를 업은 척 뛰어다닌 것밖에 없었지만 혹여나 모험가 손님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싶어서 다급하게 물어보게 되었다.

“한 사람 더 있잖아요.”

“누구를 말하는 거지?”

“저보다 이르게 건물을 빠져나온 사람이요.”

결국 나는 상체를 일으켜서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내가 말하자마자 알아들었을 것이 분명할 텐데 뜸을 들이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불경한 발언을 한 칼을 살려 뒀다.

그에 비하면 모험가 손님은 나쁜 일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비록 나를 업은 것처럼 위장하긴 했지만 불이 난 건물에서 빠져나와서 달리는 것이 범법 행위는 아니지 않은가. 크게 나쁜 일이 없을 거라 계산하고 그를 계획에 넣은 것인데 침묵이 길어지자 자꾸 불길한 생각이 끼어들었다.

나는 아직 그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거의 남이나 다를 바 없는 사이건만 나로 인해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그 입술을 주시했다.

“그는 놓쳤다. 현재 행방을 알 수 없지만 네가 원한다면 알아보도록 하마.”

“놓쳤다는 거, 정말인가요?”

“네게 거짓말하여 무엇 하겠느냐.”

진실을 확인할 수 없으니 남자가 하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모험가를 놓쳤다는 건 의외였고,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기에 불신이 고개를 들었지만 그렇다 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남자의 의지에 따라 침대에 누워 있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껏해야 남자의 말대로 모험가가 추적자들을 잘 따돌려서 도망쳤길 바라며 기도하는 것이 유일했다.

무력함이 나를 지배했다.

끝이 보이지 않은 무저갱에 추락하고 있었다.

그런 현실이 싫어서 부정하고 싶어도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모든 것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타인을 이 진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황궁을 나선 것이 아니었건만 현실은 너무나 참혹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내 삶을 살고자 했던 것이 그토록 잘못된 일이었던 걸까.

누군가는 반쪽짜리 피의 상징이라고 부르지만 내게 있어서는 한때 하늘이나 마찬가지였던 푸른 눈동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다가 더는 그를 보지 않기 위해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차라리 보고 있지 않는 편이 나았다.

“원하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해다오. 전부 들어주마.”

“보내 주세요.”

고민할 필요 없었다.

대답은 곧장 나왔다.

손을 내려놓고 남자를 또렷이 직시했다.

“저를, 내보내 주세요.”

한마디, 한마디 짓이기듯이 내뱉었다.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었다.

남자에게서, 륀느가에게서,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사는 것.

이 지긋지긋한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는 끝내 내가 원하는 대답을 꺼내지 않았다.

이리 쉽게 풀어 줄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날 찾지 않았을 것이다.

“폐하께서 제게 원하는 건 육체뿐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더 이상 그 무엇도 내어 줄 수 없으니 제발 보내 주세요.”

날 밖으로 내보내 달라는 부탁에 침묵했던 것과 달리 남자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내게 원하는 것은 육체뿐이라는 말에 대한 부정이었다.

“샤샤, 너는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된다. 내게 필요한 것은 너라는 사람 그 자체이니. 그러니 그 부탁만은 들어줄 수 없는 날 헤아려다오.”

“……이해할 수 없어요.”

내게 부딪쳐 오는 감정이 낯설었다.

“어째서 제가 필요한가요? 저는 이제 그 무엇도 아닌데 폐하께서는 왜 저라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꾸준히 내 가치를 높이려고 노력했을 때도 되돌아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나를 필요로 한다고 하니 당연히 의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좋은 말로 포장하려고 하지만, 결국 제가 갖고 있는 드래곤의 심장 때문이 아닌가요?”

남자는 계속 아니라고 부정했으나 내가 샬롯을 대신하여 아이를 낳길 바라여 붙잡아 두려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한 번 받은 드래곤의 심장을 되돌려 받을 수 없으니 날 이용하기 위해 달콤한 말로 꾀어내려는 것이 아닐까.

지난 삶을 돌이켜 보면 되돌아온 샬롯과 직접 대면한 횟수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악화된 건강을 이유로 죽은 척했던 그녀였다. 돌아온 이후에도 건강을 완전히 회복한 건 아닌지 대외 활동은 자제했다.

더불어 남자는 돌아온 샬롯을 아주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남들에게 보여 주길 꺼려 했다.

그때를 떠올리니 다시금 비참함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어설픈 거짓말에 넘어갈 만큼 짧은 각오로 제가 도망쳤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잘못 생각하셨어요.”

그가 내어 주는 달콤한 환상에 눈이 멀어서 절박하게 목을 매었던 나는 이미 여러 번 죽었다.

단호히 그를 밀어내자 남자는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네게 엘릭시아를 준 것은 모두 내 의지였고, 단순히 네가 엘릭시아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널 원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는 모르겠지. 내가 널 위해 얼마나 많은 걸 포기했는지.”

“그래서 후회하시나요?”

처음 그에게 심장을 받았을 때, 나는 그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길 바랐다.

그의 진정한 사랑은 돌아올 테니까.

그리고 늘 그래 왔듯 변함없이 샬롯이 돌아왔다.

이제 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게 심장을 준 것을 후회해야 할 차례였다.

“아니, 네가 날 떠났을 때마저 지금의 선택을 후회한 적 없다.”

“…….”

“그만큼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일순 숨 쉬는 법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절대 들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말이 남자의 입을 통해서 나오고 있었다.

“그러니 샤샤. 내가 모든 것을 제자리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할 테니 조금만 더 나를 믿어다오.”

비가 내리던 그날처럼 남자가 내게 믿음을 청했다.

“네가 있을 자리는 내 곁이지 않느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문득 처음으로 죽음을 맞이했을 때가 떠올랐다.

샬롯이 돌아온 후 자연스럽게 황궁에서 나가야 했지만 어머니는 무슨 생각인지 나에게 돌아오지 말고 남아 있으라고 했다.

샬롯이 돌아온 황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황제가 샬롯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얘기만이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 왔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초조해지던 중 우연히 그를 만났다.

앞뒤 가릴 것 없이 그를 붙잡았다.

그동안 함께했던 시간은 샬롯이 아닌 나와 보낸 것이라고, 이런 마법 따위 꿰뚫어 보는 힘이 있는 전능한 분이니 진실을 알고 있지 않느냐고.

날 기억해 달라고 애원했다.

‘너는 누구지?’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차가웠다.

무미건조한 시선이 나를 따끔하게 찔러 왔다.

지난 시간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날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에도 물러서지 않고 구걸하듯이 무릎을 꿇고, 옷자락을 붙잡고, 빌었다.

하지만 그는 검을 빼냈고, 단칼에 나를 베어 냈다.

쓰러진 나를 보고서는 근처에 있던 시종이 새파랗게 질려서 내가 륀느 공녀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아직 숨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죽음에 가까운 고통 속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내버려 두어라.’

‘예? 하지만…….’

‘쓸모없는 것이다.’

바닥에 쓰러진 내 시야에는 그의 신발만 보였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무심하게 검을 도로 집어넣은 그가 떠나고, 나는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채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순리대로였다면 나는 죽고, 다음 생은 존재하지 않았을 테지만 마치 계시처럼 문양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째서 그때 문양이 생각났는지 모른다.

그저 내게 주어진 기회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바닥을 흥건히 적시는 피로 문양을 그려 내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 후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나는 그를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사랑 또한 믿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연기든 진실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남자의 손을 잡았다.

살갗과 살갗이 닿자 남자는 크게 움찔했다.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는 그를 무시하고선 남자의 양손을 잡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정말 저를 사랑하시나요?”

떨리는 눈으로 날 바라보던 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지금 나는 샬롯이 아니었다.

착각하고 싶어도 착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외모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판이하게 달랐다.

비록 날 샤샤라고 부르고 있지만 외양만큼은 온전한 나를 바라보며 하는 말이었다.

예전의 내가 그토록 바라던 상황인데 막상 겪게 되니 마음 한편이 뻥 뚫린 것 같았다.

공허했다.

“진정으로 저를 사랑한다면…….”

남자의 손을 내 목에 갖다 댔다.

여전히 찬 손이었다.

나는 그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죽여 주세요.”

그는 몇 번이고 날 죽였다.

그는 알지 못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날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과 언어. 그리고 단번에 내 몸뚱이를 베어 내는 칼날의 감촉까지도.

그러니 쉬울 거였다.

그도, 나도.

나의 죽음으로 이 모든 관계를 끊어 낼 수 있다면 순순히 목숨을 내어 줄 수 있었다.

그의 마음이 거짓이든 진실이든 내게 심장이 있어 봤자 반복되는 굴레에 몸을 던지게 되는 것뿐이니.

“차라리 절 죽이고 심장을 가져가세요.”

만약 그가 심장을 가져갈 생각이 없다면 억지로라도 가져가게 만들어야 했다.

“……너마저 내게 그 말을 하는구나.”

남자가 손을 떠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일까, 그도 아니라면 희열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까.

제정신이 아닐 때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미친 남자이니 후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남자의 목소리는 지독히도 낮고, 음울했다.

“나의 오만과 불신이 끝내 너를 망가뜨리고 말았음을 인정하마.”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내 목에서 손을 뗐다.

그러고는 검을 빼 들었다.

그가 항상 차고 다니는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날 죽이려는 것일까.

나는 곧 이어질 고통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남자는 내 손아귀에 그 검을 쥐여 주었다.

“샤샤.”

“…….”

“눈을 감기 전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기억하고 있었다.

그를 찌르려는 나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겼었다.

그의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 하면서.

“나를 찌르거라. 당장은 모든 걸 내어 줄 수 없어도 네 기분이 풀린다면 내 한쪽 눈을 가져가도 좋고, 내 등을 난도질해도 좋다. 아니, 그 전에 한쪽 팔을 자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때 나는 주저했다.

남자를 찌를 기회는 무려 두 번이나 있었다.

남자가 드래곤으로 변했을 때와 단검을 직접 제 가슴에 갖다 댔을 때.

두 번 다 주저했고, 남자는 생채기 하나 입지 않았다.

그리고 또다시 내게 기회가 주어졌다.

이번에도 남자는 내가 자신을 찌르길 권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필요한 희생이었다 한들 결국 매듭짓지 못했으니 모두 내 잘못이다. 한쪽 팔을 잃어서 일상에 지장이 가는 것은 아니니 먼저 팔을 내어 주마. 그래야 네가 스스로 팔을 물어뜯은 것에 대한 응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겠지.”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남자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의문이 들었다.

내가 스스로 팔을 물어뜯다니.

이번 삶에선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제가 팔을 물어뜯다니요?”

남자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나 날 바라보는 눈빛만은 여전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는 팔을 걷어 냈다.

저번 삶의 끝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물어뜯은 탓에 피범벅이 되었던 팔은 생채기 하나 없이 깔끔했다.

그것을 남자가 잘 볼 수 있도록 내밀어 보였다.

“아직도 저를 당신의 샤샤라고 생각하고 하신 말씀이라면 착각하셨어요. 자, 보세요.”

“상처가 없어졌다고 하여 네 고통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지. 지난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네가 있는 것처럼.”

내 팔을 물끄러미 바라본 남자가 힘없이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후환과 갈등이 묻어 나왔다.

하지만 정작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얼이 빠졌다.

“설마…….”

아니었다.

그래서는 안 됐다.

불현듯 떠오른 한 가지 가능성이 날 좀먹기 시작했다.

“아니죠?”

나는 그동안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이가 나뿐이라고 생각해 왔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이었고, 되돌아오고 난 후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 눈앞의 남자는 이제껏 견고하게 지켰던 고정 관념을 부수고 있었다.

“아니라고 말해 줘요, 제발.”

지금처럼 남자에게 부정을 입에 담아 달라고 애원했던 적이 있었다.

그에게서 심장을 받았을 때였다.

그때 남자는 내 뜻대로 부정해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건만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남자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으로 인해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 끝에서 절망감을 맛보았다.

더는 헤어날 수 없는 깊고, 깊은 늪이었다.

차라리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을 외면하기 위해서.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내가 눈을 감는 걸 못 견뎌 하는 남자의 성마른 음성이 들렸다.

“나는…… 네가 영원히 내 곁에 있을 줄 알았다. 지난 시간, 항상 그래 왔으니. 하지만 그동안 널 믿지 못해 미안하다.”

그 목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남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깊은 우울을 담아내던 푸른 눈동자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내게 사죄하는 낯선 남자만이 남아 있었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남자였다.

“언제부터였나요?”

스스로 느끼기에도 목소리가 형편없었다.

잔뜩 갈라지고, 목이 메어 오는 것처럼 억눌려 있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언제부터……!”

남자가 이 세상에서 지워진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나의 노력과 절망, 그리고 죽음.

외면당했던 지난 기억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무려 다섯 번이었다.

다섯 번.

다섯 번을 죽었고, 이제야 내 의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건만 대체 언제부터 남자는 알게 된 것일까.

확실한 건 나의 다섯 번째 삶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팔을 물어뜯었다는 말을 할 리 없었다.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는 옅게 반짝이는 남자의 금색 머리칼만을 노려봐야만 했다.

수많은 언어와 가능성을 짓이기면서.

겉으로는 무덤같이 고요한 그와 나 사이에 정갈한 노크 소리가 끼어들었다.

노크를 한 자는 문을 열지 않고 용건을 말했다.

“폐하, 황궁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하이넨 공녀께서 찾으신다고 합니다.”

‘하이넨 공녀’라는 단어가 나오자 나는 반사적으로 움찔했고,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얼굴에는 피로가 깃들어 있었다. 내게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얼굴이었다.

항상 기쁜 얼굴로 샬롯을 맞이했지 않았던가.

내 기억 속 남자와 판이했다.

귀찮아한다면 오히려 날 귀찮아하던 사람인데 지금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나 낯설었다.

겉가죽만 비슷한, 아예 다른 인물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었다.

잔뜩 경직된 채로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남자가 내게 쥐여 주었던 검을 거두어 갔다.

“이건 날 찌르기 위해 있는 것이지 널 해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니 가져가도록 하마.”

검을 검집에 도로 넣고는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샬롯에게 가기 위함이었다.

지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남자는 군말하지 않고 샬롯에게 가려고 하고 있었다.

“이곳이라면 륀느나 다른 공작 가문의 시선에서도 자유로우니 제일 안전할 거다.”

당신은 대체 무엇으로부터 날 지키려는 것인가.

의문투성이였다.

언제부터 어떻게 지워진 시간을 알고 있는 것인지, 왜 지금까지와 정반대로 샬롯을 대하는 건지, 어째서 날 륀느뿐만 아니라 다른 가문으로부터 지키려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비록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네 곁을 지킬 수 없지만 일 년, 아니 꼭 일 년이 아니라도 좋으니 조금만 더 이곳에서 버텨 주어라.”

“어째서요?”

너무 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중 하나도 묻지 못하던 나는 등을 보이려는 남자를 보며 물었다.

입 밖으로 불쑥 튀어나온 진심은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제가 어째서 폐하를 기다려야 하나요.”

“…….”

“제가 얼마나 더 기다려야…….”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목이 막혔다.

꼭 커다란 돌멩이를 입에 억지로 쑤셔 박아서 목구멍에 걸린 듯한 기분이었다.

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언어를 대신하여 눈물이 흘렀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고,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손등을 적시는 눈물이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남자가 눈물을 훔쳐 주려는 듯이 손을 뻗었다.

그것을 눈치채고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제 이름을 불러 주세요.”

“샤샤.”

“아뇨, 제 진짜 이름 말이에요.”

시야가 흐릿하여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져 보였다.

그 탓에 남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굳게 다무는 것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내게 뻗어진 손 또한 거두어 갔다.

그것이 그가 내게 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어서 가세요. 당신의 샤샤가 기다리고 있잖아요.”

그는 날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척하는 것이었다.

지금 그가 하는 행동은 륀느 공작과 다를 바 없었다.

기대하게 하고, 짓밟고, 당신만을 바라보게 하여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어서 제 입맛대로 나를 조립한 후에 이용하려 드는 것이 똑같았다.

얼마나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들 셈인가.

과거에는 내게 샬롯을 투영하여 사랑을 속삭였고, 지금은 제 아이를 낳아 줄 사람을 찾는 것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또 다른 의문은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더는 부정할 수 없이 명확한 진실이 내 앞에 있었다.

눈을 가린다 하여 사라지지 않을 진실이었다.

“모든 일이 끝나면 이제껏 있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도록 하마.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으니…….”

“…….”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조금만 더 이곳에서 기다려다오.”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모두에게 일어나지 않았지만 내게는 일어난 일을.

그리고 어쩌면 그에게도 일어났을 일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변한 건 없었다.

“이번에는 널 위해서라도 이 지긋지긋한 사명을 끝내도록 하마.”

“…….”

“지금은 아니더라도 그날이 되면 너 또한 날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숨죽여 울고 있는 나를 보며 곧바로 나가지 못하고 망설이던 남자가 끝내 등을 보였다.

문이 닫히고, 더는 그의 등조차 보이지 않을 때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아직, 비가 내리고 있었다.

* * *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차라리 수면제를 먹었다면 나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숨도 자지 못했다.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얕은 잠을 취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 요원해져 괜히 뒤척이기만 하다가 아침을 맞이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시체처럼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자니 노인이 식사를 들고 왔다.

그는 침대맡에 쟁반을 조용히 내려놓고 나갔다.

나는 그제야 일어나서 그것을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입에 욱여넣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시간은 계속 흘렀다.

우울함에 빠져 언제고 침대에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내가 무기력하게 있는 것이 곧 남자가 바라는 것이었으니.

식사를 마치고, 식기를 챙기러 온 노인에게 방에서 나가고 싶다고 하자 선선히 내 요구를 들어줬다.

문이란 문은 다 잠근 사람치고는 흔쾌한 수락이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곧장 나가려고 하니 잠옷 차림으로 나가게 둘 수 없다면서 옷을 갈아입혔다.

이제껏 사람이라고는 노인밖에 보지 못하여 홀로 관리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했었는데 내 나이 또래의 여자가 와서 시중을 들었다.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생기가 넘쳤고, 날 보자마자 친근함을 표시했다. 타고난 성격이 그런 것인지 쉴 틈 없이 입을 놀린 그녀는 하지 않아도 될 얘기까지 했다.

“폐하께서는 좋은 분이세요.”

그 한마디에 내가 움찔한 것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아니면 제 얘기를 하고 싶어서 무시하는 건지 그녀가 조잘거렸다.

“저희 오빠가 동네에서 머리가 꽤나 잘 돌아갔거든요. 그래 봤자 촌구석이라서 맨날 오빠를 무시하기만 했는데 퍽 억울했는지 어느 날 가출을 한 거예요.”

남자에 대한 칭찬을 서두로 열었건만 제 오라비에 대한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놨다.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이고, 우리 철없는 오빠가 잔뜩 고생만 하고 돌아오겠구나 했는데 웬일인지 성공해서 돌아왔어요. 그냥 성공한 것도 아니고 폐하께서 실력을 인정해 줬다는 거예요.”

“…….”

“처음에는 괴한한테 몽둥이찜질을 맞아서 대가리가 깨진 건가 했는데 거짓 하나 안 섞인 참말인 거예요. 덕분에 이제 겨울이 되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을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렇게 말하며 여자는 해사하게 웃었다.

나만 하더라도 고아원에서 지냈던 시절이 있어서 없는 자의 겨울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고 있었다.

그 탓에 그녀의 미소가 진실 되게 느껴졌다.

“솔직히 신분 차는 극복하기 힘들잖아요. 그런데 미천한 오빠를 거두어 줬으니 폐하는 참 좋으신 분인 것 같아요.”

그녀의 말대로 신분 차는 극복하기 어려웠다.

귀족과 평민 사이에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 벽이 존재했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천재라 하더라도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농부로 살아가는 것이 정해진 삶이었다.

남자가 평민을 수족으로 부린다는 말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잠깐 의문이 들었다.

황제가 평민의 실력을 인정했다는 건 큰일인 만큼 소문이 날 법도 하건만 지난 삶을 포함하여 그런 기색을 보인 적은 없었다.

“아 참, 요즘 아빠랑 같이 피부 관리를 하고 있어요. 저희 아빠 보셨죠? 주름이 자글자글 많잖아요. 나이를 먹었으니 어쩔 수 없긴 한데 정장 입을 때 태가 살려면 관리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만약 제가 먼저 난리를 치지 않았으면 옷이 아빠를 입은 꼴이 됐을 거예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여자는 키득키득 웃었다.

남자에 대해 칭찬을 하여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꾀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했는데 그냥 제 가족에 대해 주절거리는 것이었다.

행복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어째서 이곳에 왔는지 알고 있니?”

“네, 알다마다요.”

여자는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잘 먹고, 잘 자고,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마음껏 하시려고 오셨죠. 혹시 부족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밖에 나갈 거야.”

“옷도 다 갈아입었겠다, 이제 나가면 되죠!”

“저택 밖에.”

‘저택 밖’이라고 하자 그녀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죄송해요. 폐하께서 그것만은 불허한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고 가셨어요.”

“…….”

“대신 저택 내에서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어요.”

“나를 위한 감옥이구나.”

“네?”

감옥에서 나왔더니 또 다른 감옥이 나를 반겼다.

감옥치고는 호화스러웠지만 그렇다 하여 본질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내 중얼거림을 제대로 듣지 못한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되묻는 그녀에게 고개를 저었다.

잠깐 의아한 기색을 보이던 그녀는 이내 아무렇지 않게 저가 하고 싶은 얘기를 떠들었다.

잠깐의 침묵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듯이 입을 움직이던 그녀는 내가 밖에 나가려고 하자 저택을 안내해 주겠다면서 동행했다.

괜찮다고 하여도 전혀 들어주지 않을 기색이라서 나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아 참, 저분들은 아가씨가 이곳에 온 날에 폐하께서 데려오셨는데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요. 혹시 나쁜 사람이 찾아오면 혼내 주려고 있는 거래요.”

밖으로 나가자 복도는 그 흔한 미술품이 하나 없이 깔끔한 대신 무장한 용병이 서 있었다.

내가 괜히 경계 어린 눈빛으로 흘겨보자 저들은 조각상처럼 하루 종일 꿈쩍하지 않는다면서 여자가 달래듯이 설명해 주었다.

실제로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그들을 스쳐 지나가며 나는 그녀의 안내를 받았다.

“저희 아버지가 요리를 잘하시거든요. 오늘 아침, 참 맛있지 않으셨나요?”

나는 그녀의 물음에 단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다.

주방 근처에 오자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갔다.

“저는 아버지와 다르게 덤벙거려서 주방에 얼씬도 못 해요. 아버지는 저보고 꼭 자기처럼 요리 잘하는 남자를 만나거나 매번 바깥에서 식사할 만큼 돈을 벌래요. 그래야 굶어 죽지 않을 거라면서요.”

불만스럽게 입을 비쭉 내밀었다가 내가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자 잽싸게 따라왔다.

언제 불퉁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이 그녀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 깜빡할 뻔했는데 아가씨께서 좋아할 만한 장소가 있어요.”

어느새 앞장선 그녀가 어서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가볍게 뛰듯이 걸어가는 그녀를 어쩔 수 없이 따라갔다.

“서재예요.”

문이 열리자 책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녀를 따라 내부에 들어가니 넓은 방 중앙에 마호가니 책상이 있었고, 그 주변에는 책들이 책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책상 위에마저 책이 쌓여 있으니 가히 독서를 위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가씨가 심심해하시면 이곳으로 데려오라고 하셨어요. 책을 참 좋아하신다면서요?”

나는 남자 앞에서 책을 읽은 적이 없었다.

적어도 이번 삶의 나는 그러했다.

“아가씨가 특히 좋아하는 책이라면서 몇 권 골라서 책상 위에 놓고 가셨어요. 두께가 제법 있던데 책을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여자를 스쳐 지나, 책상 위에 놓인 책 한 권을 들었다.

익숙한 제목이었다.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읽었기에 아직도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책이었다.

책 표지를 손가락으로 훑어보았다.

몇 번째 삶이었더라.

모든 문제가 나에게 있다고 생각했던 때이니 네 번째 삶일 것이다.

그때의 나는 샬롯의 모습을 한 채로 수많은 책을 읽고, 침대맡에서 그에게 재잘재잘 떠들었다. 꼭 부모에게 오늘의 배움을 자랑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칭찬을 바라고 떠들어 댔으니 아예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재미있어서 읽은 책은 한 권도 없었다.

단순히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읽은 책 또한 없었다.

조금이라도 남자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내가 조금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샬롯이 아닌 날 바라봐 줄까 봐.

샬롯인 척하면서 있어도 진짜 나라는 사람을 기억해 줄까 봐.

책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남자가 기억하고 있는 건 다섯 번째 삶뿐만이 아니었다.

너무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제껏 내가 당신을 기만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지만, 실제로 기만당하고 있었던 건 나라는 사실을.

“좋아하지 않아.”

“예?”

“책을 좋아한 적 없어.”

들고 있던 책을 제자리에 두었다.

필시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던 건지 냉랭하기 그지없는 내 반응에 당황한 듯, 두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여자는 서재를 나서는 날 뒤따라왔다.

성격대로라면 다시 제 이야기를 떠들고도 남았을 텐데 그녀는 조용히 내 눈치를 봤다.

그러다가 언제 입을 다물고 있었냐는 듯이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회복이 참 빨랐다.

“저기는 연무장이에요.”

“…….”

“아가씨께서는 학문뿐만 아니라 검술에도 조예가 깊다고 들었어요. 연무장이라고 해 봤자 쓰는 사람이 없어서 휑하지만 한번 가 보실래요?”

“그분이 네게 그런 얘기를 했니?”

항상 칭찬을 바라고 배움을 자처했지만 남자에게 진심 어린 칭찬을 들은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남의 입을 통해 듣는 내 얘기가 신기했다.

단순히 신기해서 물은 것인데 그녀는 조잘조잘 떠들던 입술을 잠시 다물더니 다소 조심스럽게 얘기해 줬다.

“몇 달 전에 저택을 둘러보신 적이 있어요. 그때 연무장에서 지나가듯이 말씀하신 걸 주워들은 것뿐이에요.”

“그렇구나.”

특별할 것 없는 얘기였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삼스럽게 검술 실력을 뽐내기 위함은 아니었다.

혹시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품고 연무장에 갔으나 진검이 아닌 목검만 잔뜩 있었다.

나는 금세 흥미를 잃고 다른 곳을 둘러봤다.

그 외에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장소는 화려한 옷이 잔뜩 들어 있는 방이었다.

그곳 화장대에는 진귀한 장신구가 가득 있었다.

내로라하는 귀족 영애의 드레스 룸 못지않았다.

여자는 마구잡이로 아무 옷이나 한 벌씩 꺼내 보이면서 너무 예쁘다며, 남들은 없어서 입지 못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잔뜩 흥분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날 갖고 인형 놀이라도 할 것 같아서 그 방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수많은 방이 있었고, 방마다 놀잇거리가 즐비했다.

대부분 혼자 즐길 수 있는 놀잇거리였다.

수용 인원은 많아 봤자 두 명이었다.

내 옆을 졸졸 따라다니고 있는 그녀와 즐기라는 의미인 듯했다.

바깥에 나갈 수 없다는 점과 남자가 허락한 사람만 만날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인간으로서 지낼 수 있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저택을 다 둘러보고 나서 처음 감상을 수정해야 했다.

감옥이라고 표현했는데 새장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았다.

적어도 감옥에서는 죄인을 길들이려 들지 않았다.

“사람이 없어서 심심하긴 한데 제가 있으니까 지루하진 않을 거예요.”

그녀는 자신이 한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듯이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이야깃거리가 끊이질 않았다.

나는 정원을 거닐면서 그녀의 목소리를 반쯤 흘려들었다.

마치 주위에서 새가 지저귀는 것과 비슷했다.

“앗, 제가 너무 말이 많았죠. 아가씨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입이 가만히 있질 못하네요.”

몇 시간 동안 쉼 없이 주절거렸는데 본인의 행동을 이제야 인식한 건지 입이 방정이라면서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그래도 한적한 것보다 낫지 않아요?”

방긋 웃는 그녀는 해사하고, 아름다웠다.

꾸밈없이 반듯한 그 얼굴을 보며 나는 어울리지 않는 상상을 했다.

방심하고 있는 틈을 노려서 그녀의 입을 막고, 급소를 쳐서 단숨에 기절시키는 상상을.

주위에 사람이라고는 그녀와 나밖에 없었다.

그녀의 아비는 지금 물걸레를 들고 저택 청소를 하고 있었고, 무장한 용병들은 근처에 없었다.

만약 내가 돌발 행동을 한다고 해도 놀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를 제압한 후 빠르게 저택을 나가서 도망친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달콤한 유혹이었다.

실제로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시간을 들여서 샅샅이 관찰한 결과, 저택 내에 있는 용병은 총 넷이었다.

내 방문 앞을 지키는 사람이 둘, 현관을 지키는 사람이 둘.

모두 실내에 있었으며 별도로 다른 용병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넓을 저택을 지키기에는 적다고 하면 적은 인원이었다. 아마 여자 한 명을 지키는 데 많은 인력을 투자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으리라.

거기다 날 돌보는 부녀는 무력이라고는 전혀 써 본 적 없는 듯한 사람들이었다.

부녀를 제압하고, 굳게 잠긴 방에서 빠져나와서 무장한 용병의 눈을 피해 마구간으로 간다. 그리고 말을 타고 저택을 벗어난다.

문자로 나열하면 하면 굉장히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위험 부담이 크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실패를 두려워하여 탈출만 꿈꾸다가 헛되이 시간을 보내다가는 평생 이곳에서 지내게 될 것이었다.

불가능이 가능이 될지는 부딪쳐 봐야 아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달콤한 상상을 애써 지웠다.

본인이 기절할 위기에 처했었다는 걸 모르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바탕 비가 내린 후여서 하늘은 깨끗했다.

밤하늘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내 몸뚱이밖에 없는 지금, 방향을 제시해 줄 나침반이 필요했다. 그리고 제아무리 신이라고 하더라도 절대 뺏을 수 없는 나침반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

강렬한 태양이 모습을 감추고 나면 수많은 별이 나를 인도해 줄 것이었다.

별자리를 읽는 법을 배운 적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신나게 떠드는 여자를 뒤로하고, 해가 질 때까지 정원을 산책하다가 방으로 돌아갔다.

저택 내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도 감시역이 붙는다는 전제가 따르는 건지 그녀는 어김없이 문을 잠갔다. 널찍하지만 휑한 방에 홀로 남아서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러다가 여자가 때맞춰 들고 온 식사를 사육당하는 개처럼 얌전히 먹고, 시간이 더 흐르길 기다렸다.

남자는 내게 기다리라고 했지만 고분고분하게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이전의 삶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남자가 진정으로 날 사랑하고, 사라져 버린 이전의 시간을 알고 있다면 지금처럼 붙잡아 놔서는 안 됐다.

외면할 것이라면 끝까지 외면해야 했다.

외면하고, 무시하고, 짓밟고.

이제껏 해 왔던 것처럼 하면 되었다.

내게 있어서 그런 행동은 익숙하고 당연했다.

오히려 날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 숨이 막혔다.

만약 괴롭힐 목적으로 사랑하는 체한 것이라면 날 정확히 파악했다.

남자를 떠올릴 때마다 설렘보다는 비참함이 앞섰으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화도, 시간도 아니었다.

그것이 아교 역할을 하기에는 감정의 골이 너무나 깊었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골이었다.

침대에서 벗어나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별이 제 존재를 선명히 알리고 있었다.

남자가 나타나기 전에 계획을 실행해야 했기 때문에 더는 지체하지 않고 다급하게 설렁줄을 당겼다. 그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문을, 창문을 열어 줘.”

여자를 보지 않은 채로 거칠게 호흡하면서 뜨문뜨문 말했다.

“괜찮으세요? 어디가 안 좋은 거예요?”

가슴을 부여잡으면서 숨을 거칠게 내쉬자 내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여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를 인식하지 못한 척, 최대한 아픈 사람처럼 연기했다.

“아버지, 아버지!”

여자가 벌떡 일어나서 제 아비를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귓전을 때렸다.

곧이어 그녀의 아비가 달려오는 걸음 소리가 들리고, 두 사람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두 쌍의 시선을 느끼면서 헛구역질했다.

뭘 잘못 먹은 것도 아닌데 곧 죽을 사람처럼 굴고 있으니 다들 혼란스러워했다.

괜찮냐고 물을 때마다 힘겹게 고개만 젓기를 반복하니 내게 직접 묻기를 포기한 두 사람은 의원을 불러야 한다거나 남자에게 어서 연락해야 한다는 등의 의견을 빠르게 나눴다.

짧은 토론 끝에 결국 여자의 아비가 의원을 불러오기로 결정이 났다.

그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말을 타고 가면 마을이 그리 멀지 않아요. 아마 금방 다녀오실 거예요.”

여자는 다정하게 나를 달랬다.

조심스럽게 등을 토닥여 주는 손길을 느끼고 있자니 초조해졌다.

내 몸은 지나치게 건강했고, 억지로 아픈 연기를 하려니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이 불편했다.

혹여나 연기인 걸 들킬까 봐 노심초사했다.

이런 걱정과 달리 아픈 연기가 부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 건지 등을 다독이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문.”

“네?”

“창문. 신선한, 공기가 필요해.”

내 입 밖으로 나오는 문장이 조각나 있었다.

그러나 용케 내 말을 알아들은 여자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그러면 잠깐만 열어 둘게요. 밤공기는 차니까 잠깐만이에요. 알겠죠?”

잠깐만 열어 두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한 여자가 창문을 열었다.

그녀의 부축을 받아서 창문 앞에 섰다.

굳게 닫혀 있던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찬 공기가 뺨을 적셨다.

그것을 느끼며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토하듯이 숨을 게워 냈다.

여자는 걱정 어린 시선으로 날 쳐다봤다.

“괜찮으세요?”

내가 진정이 되었다고 판단되었는지 여자가 물었다.

나는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용건을 꺼냈다.

“물……, 목이 말라.”

“네, 금방 갔다 올게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 여자가 내게 등을 돌렸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던 나 또한 몸을 돌려서 그녀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인내는 길었고, 실행은 빨랐다.

그녀의 입을 막고 급소를 쳐서 단숨에 기절시켰다.

오늘 하루 종일 나를 괴롭히던 달콤한 유혹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깔끔하게 기절시켰다는 기쁨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마을까지 얼마 걸리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침의를 갈아입을 여유가 없어서 대충 그녀의 겉옷을 뺏어 입었다.

더불어 열쇠 꾸러미까지 챙겼다.

이제 용병들 몰래 저택을 빠져나갈 일만 남았다.

굳게 닫혀 있는 문을 힐끔 보고서는 창틀 위로 올라섰다.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 찬바람이 들어왔다.

바람에 옷자락이 흩날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단단히 겉옷을 여미고 바닥을 내려다봤다.

못 뛰어내릴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뛰어내리려고 하니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대로 떨어진다면 다리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었다.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앞으로 닥칠 고통만을 상상하게 되어 더는 망설이지 않고 뛰어내렸다.

몸이 붕 뜨는 감각과 함께 손을 뻗었다. 동시에 강렬한 통증이 온몸을 감쌌다.

그대로 바닥에 떨어진다면 제대로 걷지도 못할 것 같아서 근처에 있는 나무에 걸리도록 노력했다. 노력이 빛을 발한 건지 겨우 나뭇가지를 붙잡아서 매달렸다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바닥에 떨어졌다.

생각보다 요란스럽게 떨어진 것 같은데 내 몸을 내리찍는 고통이 너무 강렬하여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땅바닥에 발을 내딛자마자 발목에 강렬한 통증이 일어서 비틀거렸다.

아무래도 발목을 삐끗한 것 같았다.

빌어먹을 몸뚱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동시에 멀리서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도망쳤다! 빨리 찾아!”

제발 아니길 바랐는데 떨어질 때 큰 소리가 났던 것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고요했던 저택이 단숨에 소란스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절룩거리면서 나아갔다.

발에 상처가 났는지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가시처럼 찔러 왔다.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잡힌다.

주저앉지 않더라도 앞으로 걸어가는 속도가 형편없어서 얼마 안 가 잡힐 것 같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이리 쉽게 포기할 생각이었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주먹을 쥐고 한 걸음, 한 걸음 더디게 나아가고 있는데 결국 내 발에 걸려서 넘어지고 말았다.

안 돼.

여기서 무너져서는 안 돼.

땅바닥을 짚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일어나야 했다.

일어나서 어서 달려야만 했다.

그래야 남자에게서, 이 지긋지긋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사육당하는 짐승이 아니었다.

인간이었다. 그들과 같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시도했다.

그와 동시에 주위에 그늘이 졌다.

달빛이 밝은 밤이었다.

갑자기 진 그림자에 이상함을 느끼고는 다급하게 고개를 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거칠게 팔이 잡히면서 몸이 강제로 일으켜 세워졌다.

“조심해서 다뤄. 상처라도 났다가는 큰일이니까.”

저택을 지키고 있던 용병들이었다.

그들이 벌써 나를 따라잡아서 다시 저택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나를 물건 취급하는 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반항했다. 그러나 너무나 쉽게 제압당했다.

“아프다고 들었는데 역시 꾀병이었나 보군.”

“아가씨, 우리도 그쪽을 험하게 다루고 싶지 않으니 제발 얌전히 있어 줘요. 응?”

허무하게 두 손을 움직일 수 없어졌다.

아니, 애초에 절뚝거리면서 앞으로 나가는 것이 다였던 내가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과가 빤히 정해진 일이었지만 이대로 현실에 순응할 수 없었기에 온 힘을 다해 벗어나려고 애썼다.

“차라리 기절시키는 게 어때?”

“괜히 잘못 손댔다가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저들끼리 속닥거린다고 목소리를 낮추었으나 내게 다 들렸다.

그들이 날 해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어 더욱 힘주어 반항하자 내 팔을 붙잡은 남자가 경고했다.

“아가씨에게 해를 입히는 것보다 아가씨를 놓치는 것이 더 두렵기 때문에 여기서 더 곤란하게 하면 어떤 짓을 할지는 저희도 모릅니다.”

반항을 멈췄다.

반항이라고 하기에 민망한 몸부림이었지만 그마저도 멈추니 용병이 손아귀의 힘을 살짝 풀었다.

“얌전히 있으니 편하네요. 몸도 안 좋으신 것 같은데 다시 방으로 돌아갑시다.”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같은 수법은 절대 먹히지 않을 거였다.

내가 아프다고 해도 잔뜩 경계하겠지.

그렇게 되면 영원히 거짓된 사랑에 기댄 채, 기만을 당하며 살아가지 않을까.

원치 않는 아이까지 낳게 되면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런 결말을 바라여 시간을 되돌린 것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 그렇듯, 운명은 스스로 바꿔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바뀌지 않는다면 바뀔 때까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날 붙잡고 있는 용병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들은 내가 더 이상 반항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잔뜩 방심하고 있던 탓에 공격이 먹혀들었다.

“제기랄!”

깜짝 놀란 용병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날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동시에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그대로 바닥에 얼굴이 처박혔다.

어서 일어나서 달려야 해.

이곳을 벗어나는 거야.

지금 이 순간은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어서 일어나지 않고 무너져 내리면 정말 끝이었다.

손바닥으로 땅바닥을 짚었다. 손목이 저릿하게 아파 왔다. 그러나 망설이지 않고 힘을 주었다.

그대로 일어나려고 하기 전이었다. 갑자기 두피가 팽팽하게 당겨 왔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무의미한 반항은 왜 하는 겁니까. 괜히 귀찮은 일만 늘어나게.”

그악스럽게 머리채가 붙잡혔다. 내 머리채를 잡고 당기는 용병이 하는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을 뿐.

“이 정도는 정당방위니 나중에 가서 일러바치지 않기로 약속하는 겁니다. 요즘 같은 상황에 돈 많이 주고 위험할 것도 없는 일을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압니까? 우리 같이 몸밖에 쓸 줄 모르는 것들은 거리에 나앉기 십상이라는 말입니다.”

나는 필사적으로 앞을 향해 손을 뻗었다.

조금만 더 하면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닿지 않았다.

“이봐, 쓸데없는 말 하지 마.”

“하긴, 세상 물정 모르고 곱게 자란 아가씨한테 이런 말을 해 봤자 뭣하겠어. 우린 돈이나 받아야지.”

손끝이 벌벌 떨렸다.

더 이상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절망만이 나를 삼키고 있었다.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그런데 실패했다.

다시 저곳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시간을 되돌린다면…….

처음 시간을 되돌린 그날처럼 문양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그리지 못했다.

아니, 그릴 수 없었다.

이보다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무기력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 외에.

용병들의 손에 붙잡혀서 다시 일어나야 했다. 그들의 손길은 이전보다 더 거칠고, 투박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멍하니 앞을 보았다. 나를 단단히 속박하는 손아귀에 잡혀 있자니 문득 낯선 신발이 시야에 잡혔다.

또 다른 용병인가.

나는 다소 절망적인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째서 여기 계세요?”

“네가 나를 불렀으니까.”

모험가 손님이었다.

그가 우산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로 내 앞에 서 있었다.

항상 얼굴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알아볼 수 있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씨건만 우산을 쓰고 있는 것도 모자라서 이 자리에 있어선 안 될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직접 보고도 믿어지지 않은 광경이라서 또다시 내가 만들어 낸 환상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러 왔어. 나와 함께 떠나기로 했잖아.”

남자가 태연하게 말했다.

너무 태평하여 도리어 내가 당황스러웠다.

약속을 하긴 했었다.

추적을 피하면 그가 원하는 대로 떠나기로 했으니.

그러나 그가 내 앞에 서 있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황제와 관련이 있지 않은 이상.

“황제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나요?”

“아니.”

여기서 더 나빠질 것이 없어서 내가 힘없이 묻자 그가 곧바로 대답했다. 그의 어투에는 불쾌한 기색이 묻어났다.

“날 그렇게 보다니 여러모로 섭섭한걸.”

“가만히 서서 뭘 그렇게 중얼거리는 겁니까?”

나를 붙잡은 용병들은 남자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내게 말했다. 날 미친 사람 보듯이 바라보는 그들을 보다가 다시 모험가를 보았다.

비가 오지 않는 날씨였다.

빗방울은커녕 비가 온 후 아주 맑은 날씨인데 우산을 쓰고 있는 것이 뒤늦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드디어 내가 미친 걸까.

망연히 서 있으니 모험가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박혔다.

“헤어질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인데. 이번에도 내가 도와주길 바라나?”

“……도움을 받는다 한들 변할까요?”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다면 지금 여기서 상처를 짊어진 채 있지 않았겠지.”

그의 말대로였다.

무언가 변하리라는 믿음이 없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한번 묻지. 내가 도와주길 바라?”

잠깐 머뭇거리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입으로 원하는 걸 말해.”

환상이라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희망이라고 믿고 잡은 이 손이 날 벼랑 끝에 밀어 넣는다 하더라도.

내가 가만히 있자 용병들이 나를 끌고 가기 위해 힘을 주었다. 나는 우악스러운 악력을 느끼며 다급하게 말했다.

“도와주세요.”

“어떻게?”

“어떤 방법이라도 좋아요. 이곳을 떠날 수만 있다면.”

우산 밑으로 유일하게 드러난 남자의 입술이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 말을 해 주길 기다렸어.”

남자가 우산을 접었다.

가려져 있던 남자의 얼굴이 드러나고, 눈이 마주치자 또다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색깔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였다.

두통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자 날 붙잡은 용병이 당황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가씨, 꾀병은 더 이상 안 통…….”

하지만 그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순간 싸한 기분이 들어서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뜨끈한 피가 뺨에 튀겼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를 내려다보던 얼굴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분수처럼 쏟아지는 피를 맞았다. 나를 옥죄던 속박이 풀린 채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곧바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니 모험가 아니, 이제 더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내 어깨를 잡아서 단숨에 끌어안았다.

“대체 당신은…….”

나는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들어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드디어 너와의 약속을 지킬 시간이구나.”

피비린내가 짙게 풍겼다.

여러 기억들이 뒤죽박죽 섞이는 와중에 조각났던 기억의 편린이 떠올랐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꿈속처럼 아득한 목소리가 선명히 울렸다.

어디선가 들었던 목소리였다.

그리고 강렬한 고통이 덮쳤다.

통증이 날 잡아먹을 듯이 옭아매고 있었으나 눈을 감지 않고 남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안개가 걷어지듯, 그의 얼굴이 점점 또렷해졌다.

“아.”

짧은 탄식 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붉은색이었다.

“나의 하나뿐인 사제여.”

교교한 달빛처럼 반짝이는 은발과 짙은 붉은 눈동자를 한 아름다운 남자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전설 속 악마 같은 모습으로.

“표정이 왜 그래? 이러니까 꼭 내가 널 죽이려 했던 것 같잖아.”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남자의 말로 추측할 뿐이었다.

“울상 짓지 마. 웃어.”

그가 다정하게 뺨을 쓸었다.

마치 눈물을 훔치듯이.

그의 손길에 흠칫 몸을 떨었다.

“넌 웃을 때가 제일 예뻤어.”

따라 웃으라는 듯이 다시 한번 남자가 미소 지었다.

그러나 따라 웃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제법 오랫동안 그를 알고 지냈으나 똑바로 얼굴을 쳐다보게 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와의 첫 만남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내 삶에 스며들었고, 그걸 너무 자연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게 이상할 정도로 존재가 의문스러웠던 남자였다.

내 눈을 가리던 베일을 걷어 낸 듯한 기분이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누군가는 나를 신이라고 부르지.”

내 질문에 남자는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꼭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혹은 악마거나.”

상반되는 지위였다.

신과 악마.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두 단어가 같이 나오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저는 당신을 몰라요.”

그는 나를 자신의 ‘사제’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알지 못했다.

내가 알고 있는 신은 이 나라의 황제가 유일했다.

실제로 ‘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황제만이 남아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가 이질적이었다.

“괜찮아. 천천히 알아 가면 되니까. 중요한 건 내가 널 안다는 사실이지.”

혼란스러움이 묻어 나오는 내 말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개의치 않아 했다. 태연자약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그리고 네가 내 도움을 바란다는 것과.”

포만감을 느끼는 것처럼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피 냄새가 짙게 났다.

순간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남자를 밀어내었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 비틀대면서 뒷걸음질 치다가 삐끗한 발목이 통증을 호소하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반사적으로 가장 먼저 손바닥을 바닥에 대었다. 그러니 손끝에 무언가 닿았다.

뒤를 흘겨보았다. 아직 온기가 남은 시체였다. 또한, 널브러진 시체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저는 사람을 죽여 달라고 한 적 없어요.”

“동정하는 건가?”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나와 대조적으로 남자는 일말의 감정이 담기지 않은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네가 죽었을 텐데…….”

멀어진 거리만큼 성큼 다가온 남자가 무릎을 꿇어서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널 죽여?”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투명하게 반짝였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스산했다. 기이한 울림을 남기는 그의 목소리를 곱씹으며 나는 그를 부정했다.

“그들을 죽이지 않더라도 제가 죽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진정한 죽음에는 닿지 않았겠지만 차라리 죽음을 바라게 되는 삶을 살았겠지.”

“…….”

“날 허락한 건 너야.”

입을 다물었다. 그는 여전히 올곧게 날 쳐다봤다.

“어떤 방법을 써도 좋다고 했잖아.”

투명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는 내 손바닥을 적시는 선혈과 같은 붉은색이었다. 이토록 선명한 색이건만 어째서 그동안 알아보지 못했는지 의문스러웠다.

“아, 혹시 비위가 상해서 그러는 건가?”

새삼 깨달았다는 듯이 말한 남자가 손을 뻗어서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의 손이 닿자마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게 되었다. 내가 동요하자 남자는 얼굴을 내 쪽으로 가까이 대었다. 시야에 그만이 들이찼다.

“그러면 나만 봐.”

당장이라도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과는 달리 내 머리칼을 어루만지는 손길만큼은 다정했다.

“보지 않고, 느끼지 않으면 없던 일처럼 느껴질 거야.”

“……그렇다고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남자는 내 말이 재미있다는 듯이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맞아, 모두 일어난 일이지.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 없어.”

내 쪽으로 기울이던 몸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린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내가 누구든 네 소원은 여전하잖아.”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꿈에서 깬 기분이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내 결심은 변함없었다.

그의 정체가 신이든 악마든 그도 아닌 다른 존재든 상관없었다.

이곳에서 나를 꺼내 줄 수만 있다면 내 남은 삶을 요구하여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줄 의향이 있었다.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지금 잡은 이 손이 더 깊은 무저갱으로 끌고 가는 손길이라고 하더라도 반복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절대 놓지 않을 것이었다.

손을 잡자마자 강한 힘으로 날 잡아당겨서 일으켜 세워 주었다. 그리고 남자는 내가 아차 하는 사이에 단번에 날 안아 들었다.

“자, 이제 떠날 시간이야.”

남자의 뒤로 거대한 검은 날개가 펼쳐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익히 알고 있는 드래곤의 날개와는 다른 형태의 날개였다.

새의 것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큰 날개가 남자와 나를 감쌌다.

시야가 까맣게 물들였다. 동시에 속이 뒤집어졌다.

마치 세상이 여러 번 뒤집히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속에 있는 걸 모두 게워 내고 싶었다. 통 속에 갇혀서 엉망진창으로 굴려진다면 이와 비슷한 기분일 것이다.

습관적으로 주먹을 쥐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은은한 빛이 내리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눈을 감기 전보다 밝아진 사위에 황급히 눈을 뜨고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봤다.

정말 세상이 뒤집히기라도 했는지 주위가 바뀌었다.

내겐 익숙한 풍경이었다.

망막에 아로새겨진 광경은 직접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여기는…….”

“집에 돌아온 걸 환영해.”

미약하게 흥분이 묻어 있는 어조로 남자가 말했다. 그는 나를 안은 채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여전히 어두웠고, 맑은 달빛만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그러나 어둠은 다 무너져 내린 신전을 숨길 수 없었다.

나는 기억의 서랍에서 가장 오래된 사진을 꺼냈다.

먼지가 잔뜩 쌓이고, 빛바랬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오래된 기억과 현실을 대조해 보았다.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처참한 폐허였다.

세월의 풍파에 휩쓸려서 녹슨 현실이 나를 반겼다.

“대체 당신은 누구길래 저를 이곳으로 데려온 거죠?”

지금 나는 내가 가진 첫 번째 기억의 장소로 돌아와 있었다.

의심 어린 눈빛으로 남자를 보았다.

도저히 평범한 인간의 힘으로는 단숨에 올 수 없는 장소였다.

“말했잖아. 신 혹은 악마. 둘 중 편한 대로 생각해.”

“신인 척하는 악마로군요.”

내가 단정 짓자 남자는 걸음을 멈추었다.

“글쎄, 답은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잠깐 생각에 잠긴 듯이 눈을 내리깐 남자가 곧이어 말했다.

“아니, 상관없으려나. 네가 부르는 것이 내 이름이고, 네가 믿는 것이 곧 내게는 진실일 테니까.”

신과 악마는 그 위치가 현격히 다르건만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듯했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결국 제게 바라는 것이 있으니 도와준 것이겠죠. 어서 대가를 말해 주세요.”

그가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악마라면 원하는 것만 내어 주면 되니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악마는 욕망에 솔직하다고 하니 차라리 인간보다 더 얘기가 빠를 것 같았다.

“내가 너에게 대가를 바라서 도와준 거라고 생각해?”

“네.”

대가 없는 친절은 없었다. 내게 베풀어진 친절뿐만 아니라 내가 베푼 친절마저 모두 대가를 바라고 행해진 일이었다.

오로지 상대를 위한 순수한 호의란 존재하지 않았다.

딱 잘라서 대답하자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남자가 다시 앞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에게 혼자서 걸을 수 있으니 내려놓아 달라고 부탁하기 전,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남자가 날 내려놓았다.

무너진 제단 위에 앉게 된 나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항상 이 순간만을 기다렸어.”

“…….”

“널 떠나보낸 날부터 줄곧.”

간절하게 날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

“절 아시나요? 저는 당신을 모르는데 어째서 기다렸다고 하시는 건가요.”

“넌 나의 하나뿐인 사제니까.”

그는 재차 나를 자신의 사제라고 표현했다.

문득 짚이는 것이 있어서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내 뒤에는 제단과 마찬가지로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얼굴 없는 조각상이 있었다.

종교 박해가 심해지고, 마을이 와해되기 전부터 조각상에는 얼굴이 없었다.

“믿은 적 없어요.”

신전에서 모시는 신의 이름조차 모르는 나를 과연 사제라고 부를 수 있을까?

갈 곳이 없어서 이곳에 몸을 의탁한 것뿐이지 신을 믿고, 사제라고 부를 만한 행위를 한 적 없었다.

찬찬히 조각상을 훑어보던 나는 그 밑에 새겨진 문양을 발견했다. 조각상과 마찬가지로 문양 또한 부서져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문양만은 내 기억 속에 선명했다.

제대로 그려 낸 것만 세어도 무려 여섯 번이니 익숙하지 않을 리 없었다.

“벌써 여섯 번째지.”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남자가 정확한 숫자를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상징을 그림으로써 네가 날 부른 거야.”

내가 죽음의 끝에서 문양을 그려 낸 것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굶주린 육식 동물이 먹잇감의 목덜미부터 물어뜯는 것처럼, 추락하는 새가 날갯짓하는 것처럼.

“어떤 심정으로 나를 불렀지?”

문양에 시선을 떼고 남자를 돌아보았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남자가 어째서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했는지 깨달았다.

“제 잘못을 바로잡고 싶었어요.”

“잘못이라.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네. 그런데 넌 잘못한 게 없는데 어떤 잘못을 바로잡고 싶었던 거지?”

이제까지 내가 하는 일에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줬던 사람은 없었다.

모두 나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잘못하고,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가족들도 황제도 날 돌아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듭되는 노력 끝에 이제는 그 생각마저 잘못됐다고 여겼다.

돌이켜 보니 나는 완벽한 관계에 억지로 끼어들어서 불균형을 만들어 낸 사람이었다. 불순물인 것이었다. 비참했던 과거였다.

나는 그에게 진창을 뒹굴었던 과거를 꺼내기보다는 화제를 돌렸다.

“이제 와서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당신의 힘을 쓴 대가를 받아 내기 위함인가요?”

“아니, 시간을 되돌리는 것에 대한 대가는 이미 모두 지불했어.”

문득 가시가 찔러 오는 듯한 따끔한 고통이 느껴졌다.

손바닥을 펼쳐서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엔 자잘한 생채기가 가득했다.

만약 엘릭시아를 받지 않았다면 지금쯤 양손 모두 쓰지 못했을 거다.

“역시 대가는 제 육신이었군요.”

“육신이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시간을 되돌리는데 팔 한쪽도 아니고 점점 갉아 먹히는 건강이라니. 너무 후하다고 생각한 적 있지 않나?”

부정할 수 없었다. 이번 삶에야 걸어 다니는 것조차 힘들어했지만 지난 삶은 아니었다.

천천히 쇠약해지는 몸은, 시간을 되돌린 대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값쌌다.

“네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더한 대가를 치렀을 수 있지. 잃어버렸다는 기억조차 잃으면 무엇을 내어 줬는지 모르게 되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것을 빼앗기고 있었던 걸까.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무려 시간이었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가능할 리 없는 기적을 일구어 냈으니 무엇을 내어 주었든 개의치 않았다.

남은 수명까지 기꺼이 내어 줄 각오가 있는데 이제 와서 빼앗겼는지도 몰랐던 무언가를 되찾으려고 할 리 없지 않은가.

“그리고 왜 이제야 나타났냐고 물었지. 안타깝지만 난 네 생각보다 약해.”

꼭 어리광을 피우는 것 같은 말투를 하며 남자가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나도 모르게 인상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약하다니.

시간을 되돌려 달라는 소원을 들어주는 것도 모자라서 순식간에 타인의 목숨을 거둬 간 인물이 할 말은 아니었다.

“죽음의 끝에서 네가 나를 부를 때마다 나의 무력함을 실감하며 얼마나 분노를 곱씹어야 했는지 넌 모를 거야.”

짙고, 낮은 목소리에서는 그가 품고 있는 감정이 드러났다.

“차라리 같이 사멸할까.”

내가 방심하고 있는 사이 그가 빠르게 손을 뻗어서 내 목을 만졌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손이었다.

“라고 생각한 적도 몇 번 있었지.”

밀어낼 수 없었다. 마주한 눈동자가 속박처럼 옭아매어 조각상처럼 굳어 버린 채 그만을 바라봐야 했다.

손가락이 느릿하게 목덜미를 훑고서는 떨어졌다. 그의 손길이 닿았던 부분에 한기가 번졌다.

길이 길게 이어진 것 같았다.

“네가 부르지 않는 이상 만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번만은 다른 바람으로 날 부르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어.”

황궁에서, 드래곤에게서, 반복되는 운명으로부터.

남자는 내가 그것들로부터 직접 벗어나길 바랐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의 나약함이 독이 되지 않도록 너만을 바라보고, 네가 주는 음식만을 먹고, 네가 뱉은 날숨을 마시면서 힘을 키웠던 것이 옳은 선택이었나 봐.”

어느 순간부터 매일 찾아오던 모험가 손님. 그는 항상 내가 만든 음식에만 손을 댔다. 조금 이상한 손님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유 없는 행동은 처음부터 없었다.

“신은 전능한 존재인데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했으면 그만한 힘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요?”

“과연 믿음을 잃은 신을 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는 지금 신으로 태어나 신으로 죽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태생이 악마였던 것과 신이었던 것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이 세상에 위대한 존재는 단 하나뿐이라고 교육받았기 때문인지 나는 차갑게 일갈하게 되었다.

“악마가 믿음을 얻어서 신이라고 불리더라도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죠. 결국 당신이 제게 한 얘기는 말장난이었네요.”

“말장난이 아니야. 처음부터 악마라고 불린 적 없어.”

신은 유일무이하다.

고아원에 간 순간부터 진리처럼 새겨진 그 사실 탓에 남자를 악마라고 단정 짓고, 그가 스스로를 칭한 표현이 모순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악마라고 불린 적이 없다는 말을 듣게 되니 남자가 내게 거짓을 고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의 신이 있기 전에 수많은 악마가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며 인간의 순수한 욕망을 먹고 살아왔다고 한다. 그들은 인간에게 금기를 가르치며 끝내 절망에 빠뜨리게 하는 탐욕스러운 존재였다.

말 그대로 절대 악이었다.

그리하여 전쟁이 끝난 후, 나는 그동안 거짓된 신을 믿고 숭상해 왔다는 걸 배워야 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우리의 신이 바뀌었다는 걸.

많은 이들이 ‘악’이라 낙인찍힌 자신의 믿음을 버려야만 했다.

믿음을 잃은 신은 무엇이 되는 것일까. 인간들의 전쟁 이후 수많은 신들은 마치 이 폐허처럼 스러졌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신이라고 불리지 않았다.

“나의 사제여.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거야. 모든 믿음을 잃은 지금, 나의 존재의 의의는 오로지 너지.”

이제는 악마라고 불리게 된 존재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만 듣고 있자면 내가 그의 신실한 종이었던 것 같지만 나는 그렇게 맹목적인 신념을 가진 적 없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러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전 누구도 믿지 않았어요. 사제라는 호칭은 부담스러워요.”

“아니, 넌 날 알고 있어.”

“…….”

“아직 모든 걸 되찾지 못했지만, 내 상징을 잊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남자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눈을 내리깔더니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단순히 입을 맞추는 것뿐인데 신성한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경건했다.

남자의 입술이 닿은 곳에는 쓸리고, 긁힌 상처가 나 있었다.

생채기가 가득하여 볼품없었다. 그러나 남자가 입술을 떼자마자 깔끔해진 피부를 볼 수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상처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깨끗했다.

“이 세상에서 오직 너만이 날 기억하고 있는걸.”

남자가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어째서인지 또다시 두통을 느끼게 되어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남자에게 잡혀 있는 손 또한 슬쩍 빼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큰 은혜를 입게 되었네요. 제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무엇이든 드릴게요.”

“너를 달라고 한다면 널 내게 줄 건가?”

“……당장은 힘들 것 같아요.”

어찌 되었건 시간을 되돌린 대가로 가져간 것은 육신의 건강이었다. 이번에도 건강을 가져가거나 스스로를 악마라고 칭했으니 으레 전설 속의 악마들이 그렇듯 수명을 요구할 줄 알았다.

수명 또한 내 삶이긴 하지만 나 자체를 달라고 하는 건 의미가 살짝 다르게 느껴져서 당황하고 말았다.

“당장 힘들다는 말은 나중에는 괜찮다는 의미네?”

“여기서 죽을 수 없으니까요.”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긴 하나 전쟁해서 패배하고, 제국에 흡수되었으니 결국 이곳도 황제의 손바닥 안이었다.

“죽게 되어도 여기서 죽을 생각은 없어요. 그러니 떠날 거예요. 이 땅을.”

국외로 떠나겠다는 계획은 여전했다.

지금쯤 남자가 사라진 나를 추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겨우 끊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굴레는 샬롯이 아닌 내가 엘릭시아를 갖고 있는 한 그대로였다.

한가롭게 앉아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나아갔다. 그리고 삐끗한 발목 때문에 고꾸라졌다.

잠시 앉아 있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몸이 중심을 잃고 앞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또다시 바닥에 주저앉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은발 남자가 넘어지는 나를 붙잡아 주었다.

“너를 달라는 말은 농담이야.”

“…….”

“이런 식으로 소유할 생각이었다면 이미 예전에 너의 무덤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가졌겠지.”

“그게 무슨…….”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았다.

뒤죽박죽 엉켜 버린 기억이 제멋대로 떠올랐다. 어린아이가 엉망으로 물감을 쏟아부은 것처럼 일부는 지워진 기억이었다.

홀로 신음을 삼키고 있자 머리 위로 남자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더는 쓰러지지 않을 힘을 줄게.”

고개를 들어서 남자를 올려다봤다.

어느 정도 두통이 가시고, 남자의 왼쪽 눈 밑에 새겨진 눈물점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나와 계약하자.”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다정했다. 하지만 거기에 현혹되지 않았다.

“저는 무엇을 드리면 되나요?”

그와의 관계에 있어서 기본은 등가 교환이었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어야 했다.

시간을 되돌린 것만 해도 그러했다. 내가 대가를 치렀기 때문에 소원을 들어준 것이었다.

여기까지 날 옮겨 준 것에 대한 대가는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빚이나 다름없었다. 당장이 아니더라도 그는 내게 대가를 요구할 것이고, 나는 들어줄 수밖에 없을 거였다.

덥석 수락부터 하지 않고 묻자 남자는 웃었다.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보물을 전부 모으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얘기.”

“기억할 수밖에 없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었다.

단순 농담으로 여겼는데 농담이 아니었던 듯, 남자는 그 얘기를 다시 꺼냈다.

“그 보물을 모두 찾는 거야.”

“그게 대가인가요?”

“그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에 대한 대가는 육신이었다.

그건 이해할 수 있는 대가였지만 이번에 요구하는 대가는 조금 달랐다.

“어째서요? 그것을 모두 모으면 결국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했잖아요. 당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저를 이용하려는 건가요?”

남자가 말하는 보물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할지 예측이 불가능했지만, 적어도 미약하지는 않으리라. 대가라고 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서로 갖고 있는 걸 주고받는 행위였다.

힘을 준다는 걸 빌미로 삼아 날 이용하려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경계하자 남자가 살며시 내 팔목을 잡았다.

“널 이용하겠다는 생각은 한 적 없어. 오히려 이용하기보다 기꺼이 이용당해 주겠지.”

“그러면 어째서 보물을 찾으라고 하는 거죠?”

“내가 도와준다고 해도 지금의 너는 홀로 서기에 너무 연약하고, 무력해. 이 상태로는 갈망을 채우기는커녕…….”

“…….”

“네가 먼저 부서지겠지.”

불현듯, 남자가 팔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단숨에 강한 힘이 가해지고, 예고 없이 덮쳐진 고통 탓에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악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야. 너희가 신이라고 믿는 드래곤보다 긴 세월을 살았지.”

일그러진 내 얼굴을 남자는 무미건조하게 내려다봤다.

“필요하게 될 거야.”

말을 끝마친 그는 내 손을 들어 올려서 아릿한 통증을 호소하는 손목에 입을 맞추었다. 어찌나 강한 힘으로 붙잡은 건지 손목에는 빨갛게 손자국이 나 있었다.

그의 입술이 닿자, 통증은 가셨지만 자국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맞춤으로 상처를 지워 낸 남자였다. 갑자기 능력이 퇴화할 리 없으니 일부러 손자국을 남겨 둔 것이라는 걸 깨닫고 그를 밀어내어 품에서 벗어났다.

홀로 서 있는 게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다시 쓰러지지 않았다.

“이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섣불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내가 제안을 거절하자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위화감이 느껴져서 뒷걸음질을 치려는데 그 짧은 순간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단숨에 인상이 변했다.

“그래, 당장은 새 신발이 필요한 것 같네.”

“예?”

“새 신발을 신는 김에 옷도 같이 갈아입도록 하자. 기껏 집에 왔는데 흙투성이잖아.”

그는 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내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 실제로 볼품없는 꼴인 건 맞는 터라 나는 남자가 무슨 짓을 하는지 지켜봤다.

조각상 쪽으로 걸어간 그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것을 발로 걷어찼다.

“…….”

비록 반쯤 무너지긴 했으나 석상은 석상이었다.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조각상은 남자의 발길질 한 번에 완벽하게 산산조각이 났다.

“원래는 더 고상한 방법이 있는데 세월이 세월인지라 고장 났어.”

조각상이 있던 자리에 깊은 어둠이 나를 반겼다. 사람 한 명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구멍이었다. 나는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직시했다.

어릴 적, 마을 사람들의 얼굴보다 더 자주 봤던 조각상에 이런 비밀 장소가 숨겨져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머물 곳이 이곳뿐이어서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지만, 조각상은 그냥 조각상일 뿐이었다.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는 탓에 구멍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빛 한 점 새어 들어가지 못하는 순수한 어둠을 내려다보았다. 꼭 악몽 같았다.

남자는 거리낌 없이 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환한 길을 걷듯이 거침없었다.

나는 따라가지 않고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남자가 반쯤 들어갔을 때 나를 돌아봤다.

“경계할 것 없어. 그동안 발견되지 않았을 뿐, 집의 일부라는 사실은 변치 않으니까.”

나는 그를 따라 수상한 구멍에 들어가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갑자기 신발을 준다는 것도 수상했다.

그런데 남자는 다른 오해를 하는 것 같았다.

“아, 인간에게는 너무 어두운가?”

내가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말하기 전에 남자가 엄지와 중지를 맞부딪쳤다. ‘딱’ 소리와 함께 구멍 안이 밝아졌다.

구멍 안에는 계단이 있었다. 밝아졌어도 얼마나 내려가야 바닥을 밟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길고 긴 계단과 벽의 양옆에 횃불이 밝혀져 있었다.

“가자, 네게 선물을 줄게.”

“당신을 따라가는 것으로 대가를 치르는 건가요?”

“선물을 주는 걸 대가라고 치다니. 악마가 보기에도 불공정한 계약인걸.”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모르는 계단이었다.

날 속이고 위험한 곳으로 이끌 수도 있는데 ‘선물’이라는 말에 마냥 좋다고 졸졸 따라갈 수 없었다. 내가 잔뜩 경계하자 남자는 나를 달래듯 다정하게 속삭였다.

“오랜만에 집을 방문한 기념으로 그냥 주는 거야. 잠옷 바람으로 바깥을 돌아다니고픈 마음은 없잖아.”

어둠 속에서는 티가 잘 나지 않았지만 밝은 곳에서 본다면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게 한눈에 드러날 것이었다. 게다가 겉옷에는 나뭇잎이 붙고, 흙이 묻은 것도 모자라서 타인의 피가 엉겨 붙고 있었다.

누가 봐도 수상한 차림새였다.

“악마는 거짓말을 할지언정 거짓 약속은 하지 않아.”

올곧게 날 쳐다보는 그 눈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앞장섰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갔다.

다리가 성하지 않아서 절뚝거리면서 조심스레 계단을 하나씩 밟고 있는데 고이 접힌 우산이 내게 건네졌다.

“지팡이 대용으로 써.”

혹여나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 의심 어린 눈길로 남자를 보았다. 내 생각이 표정에서 그대로 드러난 건지 남자는 짧게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네 것이야.”

“제 것이라니요?”

뒤늦게 우산을 자세히 봤다.

흔한 검은 우산이었다. 흔하기 때문에 눈에 익기도 했다.

“네게는 돌려받지 못한 것이 있잖아.”

비가 내리던 날, 이름 모를 손님에게 빌려주었던 우산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지금 남자가 건네주는 것과 똑같았다.

“설마 그날 일찍 돌아갔던 이유가 우산 때문이었나요?”

“그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홀딱 젖은 채로 있었을 테니까.”

황제를 만난 직후 마주쳤던 남자가 환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도 그는 이것과 같은 우산을 들고 있었다.

“결국 네가 비를 맞게 되어서 마음이 아프지만 앞으로 내가 있으니 그럴 일 없을 거야.”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진 남자의 눈을 바라보다가 우산을 받았다.

“감사해요.”

“천만에.”

우산을 지지대 삼아서 넘어지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도 끝은 있었다.

마지막 계단에서 내려오자 무언가 발에 치였다.

아래를 내려다본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인간의 머리뼈였다.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건지 곳곳에 뼈가 나뒹굴었다. 심지어 벽에도 해골이 박혀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지.”

남자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묻어 나왔다.

나는 해골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물었다.

“이곳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요?”

“카타콤.”

“…….”

“한때 날 믿었던 자들을 위한 지하 무덤이야.”

너울거리는 붉은 불빛에 반사된 해골은 꺼멓게 뚫린 구멍으로 날 직시하는 듯했다. 빛이 닿지 않은 곳에 더 많은 뼈가 쌓여 있었다.

그 수를 대충 세어 봐서는 몇 명일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홀린 듯이 해골을 쳐다보던 나는 다시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주의하지 않으면 아까처럼 뼈를 밟게 되었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남자를 따라서 안쪽으로 들어가자 제단이 있었다.

위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았다. 살짝 다른 점이 있다면 제단만 있을 뿐, 조각상은 없었다.

조각상이 있을 자리에는 벽면에 그의 상징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세월의 흐름으로 인해 부분 부분이 닳았지만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선명한 흔적이었다.

“주인 잃은 물건이 많아.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으나 애석하게도 긴 시간 동안 자고 있었지.”

남자는 제단 근처에 있던 커다란 상자를 열었다. 얼핏 봐도 오래되어서 제대로 열 수는 있을까 걱정이 됐는데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상자는 새것처럼 잘 열렸다.

“오랜 기다림이 헛된 바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할 때야.”

남자의 어깨 너머를 보니 상자 안에는 다양한 잡동사니가 들어 있었다.

상자보다는 벽면에 걸려 있는 검이나 메이스, 활 같은 무기에 더 시선이 가서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충 보아도 무기들은 녹이 잔뜩 슬어서 과일이나 썰 수 있을까 싶었다.

“누군가 금화를 두고 갔네.”

무기를 살펴보고 있는데 남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금빛 물체를 던졌다.

황급히 손을 뻗자 그것이 깔끔하게 내 손에 들어왔다.

내가 잘 잡은 게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훤히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금화가 던져졌다.

“가져.”

“하지만…….”

“몇천 년이 지나도 인간이 영원토록 갈구하는 것이 두 가지 있지.”

나는 손바닥을 펴서 금화를 내려다봤다.

무기는 녹이 슬어서 형편없건만 금화만큼은 불빛 아래에 반짝이고 있었다.

“불사와 황금.”

“…….”

“갖고 있으면 도움이 될 거야.”

“이것도 그냥 주는 선물인가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나는 열심히 주머니를 뒤집어 봐야 먼지만 나오는 신세였다. 금화를 제대로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이내 말끔히 지워 버렸다.

남자의 말대로 갖고 있으면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실이 될 것은 없었다.

주먹을 쥐었다. 손안에 있는 차가운 금화의 감촉이 느껴졌다.

내가 금화를 가져가는 것을 확인한 남자는 상자를 뒤적거렸다. 그의 뒷모습을 힐끔 보다가 무기를 꺼내 보았다. 혹여나 쓸 만한 것이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깃들어 있었다.

몇몇 개의 검은 아예 검집에서 빼낼 수도 없었고, 그 외에 다른 무기는 예상대로 녹이 슬어서 쓸 수 없었다.

활은 활시위를 한 번 손으로 튕기자 뚝 하고 끊어져 버렸다. 쓸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는 무기를 제자리에 도로 갖다 두었다.

여기 있는 무기를 쓸 바에 근처 마을로 내려가서 곡괭이를 훔치는 것이 나았다. 곡괭이라면 적어도 날은 잘 들어갈 테니까.

결국 단순 위협용으로 단도 하나를 챙겼다.

그러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곱게 접힌 옷 한 벌을 내게 내밀었다.

“입어 봐.”

치맛단이 긴 수수한 드레스였다. 지금 입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아서 곧바로 옷을 갈아입으려고 하는데 시선이 따끔하게 나를 찔렀다.

눈길을 옮겨서 근원지를 보았다.

남자가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뒤돌아 주실래요?”

“아, 미안. 깜빡했어.”

남자가 뒤돌아 서 있는 걸 확인하고 겉옷을 벗었다.

의심은 완벽히 떨쳐 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다가 힐끔 뒤를 흘겨보니 여전히 돌아선 채였다.

괜히 그를 의식하면서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다 갈아입었어요.”

녹이 슨 무기와 달리 옷은 새것처럼 깔끔했다. 좀이 든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원래부터 내 옷이었던 것처럼 몸에 딱 맞아서 신기해하고 있는데 맞은편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거창한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적막감에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잠에서 깬 듯 화들짝 놀라고서는 성큼 내게 다가왔다.

“예쁘다.”

괜히 낯간지러워지는 목소리였다. 홀린 듯이 중얼거린 남자는 옷 갈아입으면서 살짝 부스스해진 내 머리칼을 정리해 주고서는 베일을 씌워 주었다.

“항상 예뻤지만 지금은 더 예뻐.”

“……감사해요.”

순수하게 터져 나오는 예쁘다는 칭찬이 낯설기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시선을 다른 곳에 두게 되었다.

“신발은 이걸 신자.”

남자가 이번에는 검은 구두를 흔들었다. 신발까지는 괜찮다고 하려다가 한쪽 발이 맨발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창문에서 떨어졌을 때 벗겨진 건지 한쪽만 휑했다. 고통으로 인해 내가 맨발이라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신발을 편히 신기 위해 제단에 앉았다.

한쪽 신발을 벗고, 구두를 달라는 의미에서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다르게 남자는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내가 해 줄게.”

“아뇨, 괜찮아요.”

남자의 호의를 거절했으나 그는 이미 내 발목을 잡았다.

우연하게도 남자의 손이 상처를 스친 탓에 방심한 사이에 낮은 신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았지만 주위가 너무 적요하여 분명 들었을 거다.

반사적인 반응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남자는 내 발을 들어서 상처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짧은 시간 동안 여기저기 긁히고 까져서 엉망이 된 발등을.

“그러고 보니 아직 대가를 받지 못했지.”

나를 달라고 한 건 농담이라고 했다.

그 뒤로 남자가 정확한 대가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부채를 안고 있는 상태였다.

“네 피를 줘.”

남자의 숨결이 발등에 닿았다.

“네게 바라는 대가야.”

한숨 같은 속삭임이 귓가를 울렸다.

곧이어 입술이 상처에 포개어졌다.

내 발등에 가볍게 입을 맞춘 남자는 고개를 들어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거면 되나요?”

“응.”

“그것으로 만족한다면 가져가세요.”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가 다시 상처에 입을 맞추었다. 피를 원한다고 말했듯, 아까처럼 입만 맞추지 않았다.

남자가 혀로 상처를 핥는 것이 느껴졌다.

따끔하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프면 아프기만 해야 하는데 미묘한 감각이 같이 피어올랐다.

“윽.”

남자는 느릿하지만 게걸스럽게 상처를 탐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딱지도 나지 않은, 여린 부위였다.

입술을 꾹 다물었으나 자꾸 신음이 새어 나왔다.

갖은 고문에도 찍소리 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남자가 상처 부위를 핥았을 뿐인데 살짝살짝 목울대를 타고 흐르는 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

밀어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당장이라도 남자의 어깨를 잡아 밀어낼 듯이 손이 움찔거렸다.

“살짝 깨물 거야. 따끔할 테니 긴장 풀어.”

드디어 내 발등에서 입을 떼고 고개를 든 남자가 말했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남자는 지금과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날 도와주기 위해 피를 요구했지만, 지금은 그 대가를 받기 위해 피를 요구하고 있었다.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를 핥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남자가 다시 내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곧장 깨물 줄 알고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입술은 길을 만들 듯이 살금살금 위로 올라왔다.

누군가 간지러움을 태우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두 눈을 감게 되었다. 시야가 차단되니 남자의 입술 감촉이 적나라하게 느껴져, 감은 눈을 다시 뜨려는 순간 발목이 깨물렸다.

남자가 말한 대로 따끔했다.

송곳으로 찌른 것 같았다.

그가 모험가였을 때 손가락을 물렸던 기억이 겹쳐졌다.

동시에 입 밖으로 나오려는 신음을 삼키며 눈을 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해골과 눈이 마주쳤다. 심연 같은 깊은 어둠을 마주하자 한기가 등골을 타고 흘렀다.

망자는 내게 어떤 말을 속삭이는 듯했다. 가만히 그 속삭임을 듣고 있자니 한 가지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저를 하나밖에 남지 않은 사제라고 부르셨죠.”

내 발목을 핥던 남자가 멈칫했다.

나는 그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불빛 탓에 붉은 기가 섞여서 옅은 적발로도 보이는 남자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토록 많은 이들이 모두 죽어서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건, 당신이 믿음을 배반했다는 증거 아닌가요?”

그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를 멋대로 사제 취급하는 건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나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존재하지 않으니 믿음이라고 부를 수 없는 얄팍함이 통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남자를 믿는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를 믿었던 이들은 존재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들을 모두 잃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특히 눈앞에서 살아 숨 쉬는 신만큼 믿음을 갖기 쉬운 특수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현재 이 나라의 황제가 그러지 않았던가. 전능하다고 믿었던 존재의 비참한 말로를 직접 목도하게 된 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어떤 위대한 존재라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은 막지 못해. 태양이 뜨면 결국 지게 돼 있듯, 불변의 법칙이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남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내가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그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온화하다는 것이었다.

“모두 너의 잘못이라 생각되어 바로잡고 싶다고 하였지.”

어떤 심정으로 시간을 되돌렸냐는 물음에 내가 했던 대답이었다.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물끄러미 남자를 보았다.

“잘못을 되돌릴 기회가 필요한 건 비단 인간뿐만이 아니야.”

남자는 발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서는 더는 피를 취하지 않고 구두를 신겨 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어쩐지 침울해 보였으나 내가 해 줄 수 있는 위로는 없었다.

“통증은 살짝 남아 있겠지만 멀쩡히 걸을 수 있을 거야.”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만히 그 손을 바라보다가 알아서 일어섰다. 그의 도움을 노골적으로 거절했지만 남자는 불쾌해하기는커녕 재미있다는 듯이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던 통증이 뇌리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손에 우산은 없었으나 더 이상 비틀거리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따라오던 통증은 사라져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남자가 ‘내 말대로지?’라는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입을 맞췄을 뿐인데 손등에 있던 상처가 깔끔하게 사라진 것처럼 그와 똑같은 짓을 벌인 듯했다.

그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한다면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내 차림새를 살펴봤다.

“저…….”

문득 어떤 생각이 들어서 신중하게 운을 띄웠다.

“옷은 이것밖에 없는 건가요?”

“마음에 안 들어?”

“아뇨, 그보다는 불편할 것 같아서요.”

치맛단이 길어서 이동할 때 거치적거릴 것 같았다.

한가롭게 거리를 돌아다닐 요량으로 입고 있다면 상관없지만, 앞으로 가야 할 길이 험했다.

이미 괜찮은 옷을 무상으로 받았는데 더한 것을 내놓으라고 생떼를 쓰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 같아서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혹시 다른 옷이 있다면 보고 싶어요.”

내 요청에 남자는 상자에서 다른 옷을 꺼내 주었다. 기다란 검정 케이프는 평상복과 미묘하게 다른 느낌을 주는 복식이었다.

입고 거리를 돌아다녀도 그다지 위화감이 들지 않을 정도였지만 그보다 격식을 차린 자리가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꼼꼼히 살펴보니 마물 사냥꾼이 입는 제복과 비슷한 디자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것이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아서 옷을 갈아입고 지하 무덤에서 나왔다.

옷과 금화를 얻은 것도 모자라서 발이 깨끗하게 나았으니 대가 없이 받기에는 과분한 선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대가를 바라고 주는 선물이 아니라고 못을 박아 뒀기 때문에 내가 그에게 한 건 감사의 인사뿐이었다.

무수히 많은 시선을 등지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다시 지면을 밟게 되자마자 남자는 한쪽 무릎을 꿇어서 구멍에 손을 대었다.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리자 커다랗게 뚫려 있던 구멍이 사라졌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무너진 조각상의 파편만이 본인이 어딘가에는 우뚝 서 있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야.”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한쪽 손을 바닥에 짚은 채로 눈을 감았다.

영원한 안식.

망자들의 신은 그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선물을 건네주고 있었다.

짧은 묵념이 끝나고,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우산을 펼쳐서 구멍이 있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신전에는 이제 지붕조차 없었다. 한때 영광을 누렸을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은 흉측한 구조물이 되어 곧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꼴이었다.

남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대답했다.

“금화 값이에요.”

내 말을 듣고서는 남자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그 얼굴을 못 본 척, 눈을 감은 나는 짧게 묵념을 하고는 그곳을 벗어났다.

바깥은, 먼동이 희붐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이 나라를 벗어날 거예요.”

“가서 무엇을 하려고?”

입을 꾹 다물었다.

무엇을 한다는 구체적인 목적은 없었다.

오로지 도망쳐야 한다는 사명 같은 압박감만이 나를 무겁게 짓누를 뿐.

“계속 도망만 칠 건가?”

“그럴 수밖에 없어요.”

“지금 떠나면 지난 반년처럼 숨어 살게 되겠지. 반복되는 삶이야. 넌 숨고, 드래곤은 결국 널 찾아내고.”

“…….”

“이 나라가 아니라고 해서 널 찾지 못할 것 같아?”

“……찾지 못하도록 할 거예요.”

이전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서 철저하게 내 몸을 숨길 생각이었다. 다신 그와 만나지 않도록 숨 쉬는 것마저 계산적으로 행동하여 내 존재를 은폐할 것이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만이 내게 남은 유일한 방법이었다.

“널 찾지 못했다 하더라도 너는 평생 쫓기며 살아갈 텐데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일은 없어.”

그의 말이 옳았다.

끊어 내지 않는 이상 바뀌는 건 없었다.

다섯 번이나 맞이했던 비참한 최후가 차례대로 떠올랐다.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며 계속해서 시간을 되돌렸고, 몸도 마음도 닳고 있는 걸 외면하며 앞만 바라보고 달렸다. 그리고 모든 걸 내려놓은 지금, 나는 폐허 위에 서 있었다.

얼마나 더 달려가야 자유로워질지 알 수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길이 존재하는지 또한 의문이었다.

의문과 의문이 쌓여서 불안감을 만들어 냈다.

또다시 이전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옅은 불안감은 내 목을 옥죄고 있었다.

“다시 한번 더 말할게.”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그 얼굴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내게 속삭였다.

“더는 쓰러지지 않을 힘을 줄 테니 나와 계약하자.”

“…….”

“부서지기 전에 부서뜨리는 거야.”

남자가 다시 한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남자의 커다란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제껏 그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가 그를 가장 필요로 할 때 나타났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보물을 전부 모으라고 하셨죠. 정확히 몇 개를 찾아야 하나요?”

“72개.”

“너무 많아요.”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그걸 다 찾고 있을 시간은 제게 없어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72개나 되는 보물을 찾고 있을 여유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계약은 하지 않겠어요.”

남자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날 빤히 쳐다봤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투명한 붉은 눈동자에 거울처럼 내가 반사된 것이 언뜻 보였다.

“드래곤의 사명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아?”

“아니요.”

“정말?”

“네.”

황제는 내게 자신의 사명만 알게 되면 모두 이해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사명을 짊어진 건 황제였지 내가 아니었다.

그에게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뛰쳐나온 것은 나였다. 이제 와서 타인의 입을 통해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 궁금해할 리 없었다.

“대신…….”

악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자 드래곤보다 긴 세월을 살았다고 했다. 그런 존재가 사명에 대해 알고 있다면 황족의 다른 비밀 또한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내겐 하루라도 빨리 알아내야 할 진실이 따로 있었다.

“드래곤의 심장을 꺼내거나 없앨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얘기해 주세요.”

드래곤의 심장을 내가 갖고 있는 한 추적은 계속될 거였다. 반복되는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남자의 말대로 그 근본을 없애야 했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황제가 내게서 드래곤의 심장을 거두어 가 원래 주인이어야 할 샬롯에게 넘기는 거였다. 그러나 그걸 할 수 없는 것처럼 그는 끝까지 날 기만하려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없애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지난 삶과 지금의 삶에 있어 바뀐 건 내가 엘릭시아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뿐이기 때문에 드래곤의 심장만 사라진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 믿었다.

“드래곤의 심장?”

내 말에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드래곤의 심장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은 반응이라 공식적인 명칭을 알려 주었다.

“엘릭시아요.”

“아, 현자의 돌. 너희는 그걸 드래곤의 심장이라고 부르던가.”

“두 가지 이름이 있죠.”

보통 ‘드래곤의 심장’이나 ‘엘릭시아’라고 부르지 ‘현자의 돌’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남자가 말하는 명칭은 처음 듣는 낯선 종류의 것이었다.

“어쨌든 그것을 꺼내거나 없앨 방법을 아시나요?”

남자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정확히 내 왼쪽 가슴을 보았다.

심장이 있는 곳이었다.

“지금 네가 현자의 돌을 갖고 있었지.”

“네.”

“그걸 없애면 너만 힘들어질 거야. 어쩌면 반작용으로 인해 다신 걸을 수 없는 몸이 될 수 있지.”

각혈이나 기절이 어찌나 빈번했는지 일일이 놀라기도 귀찮을 만큼 연약한 몸이었다. 엘릭시아를 받고 나서야 그나마 평범하다 부를 상태가 되었다.

효력이 계속 가리라는 긍정적인 생각은 애초에 품지도 않았다.

모든 일에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도 알고 싶어?”

“그 정도는 각오했어요.”

처음부터 원치 않는 힘이었다. 남자가 억지로 쥐여 준 이 힘이 지금 날 서 있게 만든다 하여도 반가울 리 없었다.

이 힘으로 인해 영원히 쫓기는 신세가 되었으니 더더욱.

“각오만으로는 안 돼.”

“제가 약하기 때문에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남자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없나요?”

“안타깝게도.”

한 자리 수도 아닌 72개라는 숫자가 너무 크게만 느껴졌다. 그 때문에 내가 머뭇거리자 남자는 더 이상 내게 강요하지 않았다.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말해. 기다림은 내게 있어서 큰 문제가 아니니.”

카타콤에 들어가기 전에 남자에게 잡혔던 손목을 내려다봤다.

붉은 자국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가 내민 손을 잡지도 않았건만 아직까지 그에게 잡혀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대충 방향을 가늠했다.

당장의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나의 죄를 기억 하고 있는 이 땅을 벗어나는 거였다.

옆에서 어떤 제안을 하든 계획은 수정되지 않았다.

이번 삶의 끝은 어떨까.

이전보다 더 나아질 수 있을까.

내가 있을 곳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그 끝에 다다를 때까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현재는 계속 반복되었지만 미래는 항상 성에가 낀 겨울날의 유리창처럼 불투명했다.

느릿하게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지평선 위로 태양이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새로운 날의 시작이었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어루만져 주었다.

나는 나부끼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그리고 쏟아지는 여명을 맞이하며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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