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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은 꽃다발을 품에 한 아름 안은 내 모습을 보며 눈부시게 웃어 보였다.
“휴, 잘 어울려서 다행이야.”
“……깜빡할 게 따로 있지.”
어이가 없던 나는 입술을 벙긋거리며 중얼거렸다. 내 말을 가뿐하게 무시한 릴의 입에서 느끼한 소리가 잘도 이어졌다.
“옷걸이가 예뻐서 그런가?”
“정말 못 들어주겠네.”
그 말에 언니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언니가 남에게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다고 할 군번이 아닌 것 같다.
아니, 그러나저러나 형부와는 더 깨가 쏟아지는 닭살 커플이면서 왜 저런담?
“그럼 조금 이따 보자.”
분명 언니의 투덜거림을 들었을 텐데, 릴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 뺨에 짧은 입맞춤을 남긴 채 유유자적하게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을 뿐이었다.
언니는 어느덧 말리크 옆에 자연스레 선 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오늘도, 어김없이 굳건한 형제애를 자랑했다.
말리크의 옆에 찰싹 붙어 있는 말리카도 온화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릴도 그런 말리카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정말 놀라운 변화였다.
“……쥐새끼야.”
하지만 그 모습을 보던 언니는 걱정스럽게 한마디 했다.
“응?”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응? 갑자기 뭐가?”
“아니, 카림께서…….”
언니의 목소리가 은밀해졌다. 혹시나 누군가 들을까 겁을 내는 것처럼.
“이제 아미르가 태어나면 완전히……. 기회가 물 건너간 거 아니냐고. 신전에서도 나설 수가 없을 텐데.”
“신전은 제발 가만히 있어 주면 좋겠어. 그리고 물 건너가는 걸 바라는 거야. 릴이나 나나 조용히 살고 싶으니까.”
데스테리언에서 유유자적하게 살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게르드에 있는 지금, 나 혼자 보내는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다. 데스테리언으로 돌아가면 적어도 릴이 나와 놀아줄 시간이 생기지 않을까?
그곳에서는 아주 지긋지긋하게 붙어 있을 것 같다. 물론 한동안 데스테리언으로 가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말리카가 무사히 아이를 낳고 키우는, 그 몇 년은 게르드에서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거 아닌가. 릴은 말단 재상으로, 나는 낮에 혼자 땅을 파면서……. 흑흑.
언니는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욕심 좀 가지면 안 되니? 너도, 카림도.”
“언니야.”
나는 제법 진지하게 언니를 불러야 했다.
“왜 그렇게 불러? 안 어울리게.”
“있잖아. 언니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난 아직도 언니가 역병에 걸렸다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를 잊을 수가 없거든?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 나 그때 정말 슬펐단 말이야.”
그 시간을 절대로 알 수가 없는 언니가 미간을 모았다.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나나 릴이 욕심을 내면 저런 일이 또 생길 테니까.”
이 대꾸에 나를 보는 언니의 눈이 제법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그때 했던 생각을 하나하나 늘어놓아야 했다.
“내가 오펠에 내려가지만 않았다면, 가서 심심하다고 언니를 부르지만 않았다면, 릴과 결혼하지만 않았다면, 애초에 말리카의 시녀로 들어가지만 않았어도……. 정말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했다고.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단 말이야.”
그리고 이렇게 무사히, 언니와 다시 얘기를 나눌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이거야말로 최고의 기적이었다.
“근데 그런 상황을 또 겪으라고? 난 못 해. 절대로.”
게다가 이번에는 또 누가 다칠지 알 수가 없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자면 릴이 될 수도, 내가 될 수도 있겠지.
“……우리 쥐새끼.”
언니는 짐짓 감동을 받은 듯 중얼거렸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덧붙인다.
“네가 이 언니를 그렇게까지 생각해주는 줄은 몰랐네, 몰랐어.”
“감동이지? 내가 최고지? 사랑스럽지?”
“요게.”
내 넉살에 언니가 주먹을 들어 올렸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자 언니는 한숨을 푹 내쉴 뿐이었다.
“……어휴. 머리가 망가지니까 쥐어박을 수도 없고. 오늘만 참아야겠어.”
“헤헤헤.”
괜히 소리 내어 웃었을 때 시녀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저, 이그드라실이시여? 준비가 끝났대요. 이제 입장하실 때예요.”
“아, 네!”
그 말에 대기실에서 벗어나, 식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불어오는 바람에 꽃향기가 아득하게 번져 나갔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화려하게 꾸며진 식장의 단상에 예식을 주관하는 말리크가 서 있었다. 그 앞에서 릴이 나를 기다렸다.
정말 정적이고 경건하기 그지없는 분위기였다. 덕분에 괜히 바짝 긴장한 나는 달달 떨면서 릴을 향해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짤막한 길, 근 일 년 동안 있었던 일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처음 만난 날. 그가 무섭기만 했던 순간들. 날 위로해주던 그 비 오는 밤, 행복했던 순간, 눈물 나던 날. 내가 행했던 기적, 이그드라실의 일, 그리고 지금.
지나간 일 년은 정말 길게만 느껴졌다. 내 인생에서 경험한 수많은 사건이 저 일 년 새에 전부 존재했다.
멀지 않은 과거를 떠올리며 한 걸음 더 그에게 다가가는 순간. 드레스 자락을 밟은 내 몸이 비틀거렸다.
“어, 엄마야!”
비명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꽈다당,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대로 꼴사납게 바닥으로 고꾸라진 나는 울상을 지어야 했다.
릴이 조금 전에 안겨주었던 부케가 저 멀리 날아갔다. 허공에 분분히 흐트러진 꽃다발은 꽃비가 되어 화려한 식장에 쏟아졌다. 그와 함께 순백의 드레스 자락이 어지럽게 펄럭거리는 모습이 꽤나 장관이었을 것이다.
‘아…….’
이, 이게 무슨 꼴이야!
“…….”
이도 저도 하지 못한 나는,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몸을 부들부들 떨어야만 했다. 아, 창피해서 미쳐버릴 것 같아.
“하하하…….”
그때 문뜩, 장례식처럼 경건하기 그지없던 장소에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대체 누가 웃는 것이요?
고개를 바짝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에 내게 걸어오고 있는 릴과, 상석에서 웃음을 터뜨린 말리크가 보였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는군.”
그 나지막한 중얼거림과 함께 하객들 사이에서도 웃음이 번져 나갔다. 쥐 죽은 듯 고요했던 장소에 순식간에 활기가 돋아났다.
……덕분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나는 고개를 푹 숙여야 했지만 말이다. 미쳐버리겠다, 창피해서!
그런 내 앞에 그림자가 졌다. 릴은 아무렇지 않게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덕분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세상에 자랑하게 된 나는 그의 목에 일단 매달렸다. 최대한 얼굴을 숨기려고 애를 쓰면서.
“오늘 같은 날에도 손이 참 많이 간다니까.”
“……안 그래도 창피하니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왜.”
그대로 뒤돌아 말리크를 향해 걸어가던 릴이 중얼거렸다.
“이래서 네가 좋은 거야.”
“대체 어디가…….”
“손 갈 곳이 많아서?”
날 내려다본 릴의 눈이 예쁘게도 휘었다.
“한눈을 팔 수 없게 만들잖아, 네가.”
“…….”
아, 네. 이것도 한눈을 팔 수 없는 거긴 하죠. 여러 의미로.
세상천지 저런 걸로 한눈을 못 팔겠다는 말을 듣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다. 그것도 남편에게.
창피함에 한숨만 푹푹 내쉴 적, 단상에 다가간 릴이 말리크 앞에 나를 내려놓았다. 우리 두 사람을 흡족하게 바라본 말리크의 기나긴 축사가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앞으로 왕실 식구로서 의무를 다하고, 사랑과 존경으로 남편과 아내를 아끼고, 위로는 이그드라실을 섬기고, 아래는 신민을 사랑하며…….”
뻔하디 뻔한 말은 길게도 이어졌다. 하지만 기분이 오묘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가슴이 일렁거려서 슬쩍 눈알을 굴렸다. 가까이에 앉아 있는 가족들이 보였다.
가장 좋은 자리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시던 어머니와 아버지는, 말리크의 말이 길게 이어질수록 슬쩍 눈물을 훔쳤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내가 시집을 간다는 게 실감이 났다. 덕분에 그분들에게도 이 식이 묘한 의미로 다가온 게 틀림없었다.
‘…….’
만감이 교차했다. 최근 들어 제대로 된 이야기 한마디 할 수 없게 된 가족이었다.
가족들과 좁힐 수 없는 거리는 생겼지만, 그래도 혈연은 혈연이구나…… 싶은 게 있었다. 몸과 마음의 거리는 있을지라도 서로를 생각하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겠지.
제법 길게 느껴지는 축사가 끝이 났다. 이어지는 맹세의 입맞춤 속에서, 익숙한 그의 온기를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그드라실과 연관된 일은 내가 죽는 날까지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릴과 늘 함께일 테니까. 혼자서는 감당하지 못할 무게여도, 그와 둘이서 나눌 수 있는 것일 테니까.
앞으로 남은 세월은 잘 살아갈 수 있겠지. 당신과 나, 둘이서.
@ZP 타싸X요게X공금갠소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