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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충격을 받은 듯, 언니는 가엾게도 온몸을 오들오들 떨기까지 했다. 언니의 저런 반응은 하늘에 맹세코, 정말 처음 보는 일이었다.
덕분에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언니……. 물론 내가 생각해도 많이 잔인한 소리긴 하지만…….”
우물쭈물, 말도 제대로 마칠 수가 없었다.
저기, 언니? 무엇보다 소심한 내가 진짜로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냐고. 말뿐인 협박…… 은 아니지, 릴이 있으니까.
말리카는 아마, 릴이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지 나보다 더 잘 알지 않을까. 때문에 저 협박 아닌 협박이 유효한 거고.
…그리고 말리카는 언제나 떠안고 있는 폭탄이 있었다. 레브아의 일. 그건 알려지는 순간 정말 파국이다.
“릴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도 살 구멍은 만들어놔야 할 거 아냐.”
내 소심한 변명에 언니는, 정말 어울리지 않게도 말을 더듬었다.
“살 구멍…… 그래…….”
“어, 언니도 걱정하고 있잖아. 그럴 일이 없게 해야지.”
“응, 알았어…….”
허탈한 음성으로 대답한 언니는,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 되었다. 이윽고 언니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방을 벗어나 어딘가 먼 곳으로 터덜터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괘, 괜찮겠지?
언니도 이것저것 생각을 할 시간이 필요하긴 할 테니까. 이럴 때에는 괜히 쫓아가서 이 얘기, 저 얘기 늘어놓는 것보다는 혼자 두는 편이 나을 듯했다.
그렇게 나도 혼자서 쓸쓸하고 외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언니가 물고 온 소식의 주인공, 말리카가 직접 이곳에 행차했다.
시녀도 끼지 않고, 혼자 납신 말리카는 능숙하게 내게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바닥에 붙였다. 그 인사에 어깨 위에 부담이 팍팍 올라온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그드라실의 영광을.”
“귀하신 곳에 누추한…….”
나오는 대로 중얼거리던 나는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아니, 이게 아니고! 반대잖아!
“아름다운 말리카.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이 어쩐 일로 오셨어요?”
“전해드려야 할 소식이 있어서요.”
자리에서 일어선 말리카는 아름다운 눈을 곱게도 눈을 휘었다. 저거야말로 깜짝 놀랄 일이다.
“그렇다고 지, 직접 오셨어요?”
내가 어깨를 들썩이자 말리카는 우아하게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항상 그렇듯 품위 넘치고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그드라실께서 약속하신 대로 좋은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게 되었답니다.”
“아, 기쁜 이야기라면 저도 조금 전에 전해 들었어요. 축하드려요.”
내 선선한 속삭임에 말리카는 슬쩍 고개를 숙였다. 왜인지 모르게 뺨이 붉은 듯했다.
“정말로…… 이루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속사정이 더 있는 듯했다. 문득 예전에 페라엘 샤리프스가 대놓고 경고하고 갔던 게 생각났다. 혹시 의원에게 좋지 않은 말이라도 들었던 건 아니었을까.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말리카는 수줍게도 말을 이었다.
“그간…… 이그드라실께서 일으킨 기적을 보았어도 마음으로 와닿지 않는 게 있었어요. 하지만 직접 경험하니 이제야 피부로 느껴지는 게 있답니다.”
이 말에는 조금 경악해야 했다. 나를 바라보는 말리카의 시선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엄마야. 이그드라실이여, 이건 좀 역효과 같은데요?
“그게 아주 크군요. 신기한 일이지요, 다른 마음이 생긴다는 게.”
릴이 저런 말을 했다면 ‘내가 좀 신성해요.’라고 대꾸라도 했을 텐데, 말리카니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다만 지금 이 상황에서 궁금한 게 하나 있었던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네, 말씀하시지요.”
“말리크께서는 뭐라고 하셔요?”
여차하면 릴을 위해 말리카를 쫓아내겠다고까지 했던 말리크였다. 말리카에게 자식이 생긴다면 저건 불가능한 일이 되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나와 말리카, 그리고 릴까지 작당해서 말리크의 뒤통수를 때린 게 되는 거 아닌가?
말리카가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말리카의 양 뺨에 홍조가 돋았다.
“정말 기뻐했답니다. 레반의 그런 얼굴을 저조차 처음 봤을 정도예요.”
거짓말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뭐…… 당사자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솔직히 저도…… 조금 의외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일이었답니다. 레반은 늘 아이 문제에 관해서는 냉담했거든요.”
“냉담하시다뇨?”
“레반은 항상, 카림이 있으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말하곤 했지요. 그게 얼마나…….”
중얼거리던 말리카가 말을 멈추었다. 내게 말할 법한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뭐, 나도 두 사람의 사정을 자세히 알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간에 말리크가 저런 태도를 보이니까, 말리카가 릴에게 더 날을 세웠구나 싶었다. 이어 말리카는 곧은 눈을 들어 올렸다.
“이그드라실께서 주신 선물이니, 이그드라실께서 지켜주실 거라고 믿어도 되겠는지요?”
이번 발언이 협박처럼 들리는 이유는 왜였을까. 나도 말리카와 시선을 맞대며 속삭였다. 물론 소심한 내 허리가 가늘게 떨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약속만 지켜주신다면요.”
“아이만 무사히 태어나고 자란다면 뭐든 못 할까요. 더한 약속도 기꺼이 해야지요.”
말리카는 떨리는 손으로 소중하게 아랫배를 끌어안았다. 그런 말리카가 무척이나 가녀려 보였다.
…아무래도 말리카가 내 취향의 미인인 게 틀림없다. 말리카가 저러면 마음이 스르륵 움직이는 게.
‘릴이…… 이 사실을 알면 기겁하겠지?’
둘은 앙숙이니까 말이다.
앞으로의 일이 약간 걱정되긴 하는데 뭐, 괜찮겠지. 릴과 말리카가 사이가 좋아질 날이 올까? 아무래도…… 으음.
말리카가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이제는 정말 신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겠지요.”
그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나는 또 한 가지를 깨달아야 했다.
내가 항상 우러러보았던 말리카도 프레이르를 살아가는 신민 중 하나였단 걸. 이그드라실을 신봉하는.
* * *
그렇게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듯했다.
다만 나는, 내 발로 왕실 중앙 신전을 찾아갔다. 말리카의 태도에 걸리는 게 있어서.
여전히 꽃비가 은은히 흩날리는 세계수의 근처에서 이그드라실의 고양이가 나를 반겼다.
― 왜 왔어?
……아니, 나를 반긴다기보다는 툭 내던지는 소리였다.
나는 대답 대신, 나무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이그드라실을 바라보았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도 살랑거리는 도백색 머리카락이 여전히 신비로워 보였다.
정말…… 자고 있구나. 평온하게.
내 말에 고양이는 또다시 툭, 시비를 걸듯 내뱉었다.
― 이시스 보러 왔구나?
“네, 뭐…….”
― 봐. 잘 자고 있잖아.
고양이가 이그드라실에게 턱짓을 했다.
― 내가 깨우지 않는 한 내내 잘 자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너희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너희들이나 잘 살면 돼.
나는 멍하니 이그드라실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러게나 말이다, 누가 온 것도 모르고 정말 곤히 잘 자고 있네. 아무 걱정하지 말고 우리끼리 잘 살라고……. 나와 릴, 둘이서.
나는 고양이의 말을 되씹다가 속삭였다.
“조금…… 싱숭생숭해서요.”
― 뭐가?
“제가 이그드라실 소리를 듣는 게요…….”
이그드라실에게 한 대 얻어맞은 전적이 있던 나는, 이그드라실에게 썩 좋은 감정이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 새근새근 자고 있는 이그드라실은 하염없이 바라보게 되는 마성이 있었다.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하는 저 이그드라실은 외모부터 신처럼 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우리가 섬겨야만 하는 신. 압도당한 채 우러러봐야 할 것만 같은.
그런데 내가 어쩌다가…… 저런 존재와 같은 취급을 받게 된 걸까. 인생 참…… 알 수가 없다니까.
― 넌 참, 쓸데없는 생각이 많구나. 릴하고는 전혀 달라.
고양이가 혀를 찼다. 그것도 참 묘한 느낌이었다.
……이제는 고양이에게까지. 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묘하게 파괴되는 것만 같다.
― 얘야.
“네에.”
― 한 가지 생각해볼까. 네가 이그드라실이라고 불리든 아니든 간에. 네가 네가 아닌 건 아니잖아?
“그건 그런데요…….”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괴리감이 저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이 저를 내가 아니라고 보는걸요.”
언니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하다못해 부모님까지. 지금까지 내내, 은연중에 나를 자신의 눈 밑으로 취급하고 있던 말리카도 오늘 그걸 인정했다.
그 사실이 꽤나 씁쓸했다.
― 그게 중요해?
고양이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 너희는 그래도 둘이잖아. 그냥 그 싸가지 없는 놈하고, 너하고 둘만 좋으면 되는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