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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린. 그동안 일하랴, 결혼식 준비하랴……. 나 정말 바빴다?”
우는 척하며 내뱉은 말은 엄살인지, 진심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다만 못된 손은 슬금슬금, 내 가냘픈 허리를 타고 올라올 뿐이었다.
이윽고 평소와 같은, 느끼한 말이 이어졌다.
“이렇게 착한 남편에게 상은 없어?”
“어, 없어요.”
솔직히 뭘 줘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다만 내 말을 뭐라고 받아들인 것이었을까. 다른 때였으면 날 놀리고 보았을 그는 꼬투리를 잡지 않았다.
“없다니, 아쉽네.”
그런데 릴의 태도가 묘하게 아쉬운 이유는…….
…이어지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속으로 비명을 질러야 했다.
‘으아아악!’
난 그의 괴롭힘을 즐긴 적 없다고!
“어때.”
릴은 자연스럽게 말머리를 돌렸다.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던 나는 겨우 대답했다.
“네, 네?”
“이제 오해는 풀렸지?”
부드러운 음성으로 다정하게도 속삭이는 것에 나는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릴은 조금 더 나를 바짝 끌어당겼다. 나지막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그래도 기쁘다.”
“네? 뭐가 기뻐요?”
“날 신경 쓰고 있는 게.”
뭐라고 대꾸해줄 말이 없었다. 이제는 너무…… 신경 써서 문제였지.
처음 만났을 때에도 릴을 신경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잔뜩 곤두선 신경은 그때와 지금이 전혀 다르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릴도 이걸 명확하게 알 터였다.
다만 묘한 부끄러움이 몰려온 나는 릴의 가슴팍을 슬쩍 밀어내며 중얼거렸다.
“그, 그럼 신경 쓰지 안 써요? 남편이잖아.”
“너, 이제야 나를 남편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거 아니야?”
내 말에 반박하는 그는 아마 짓궂게 웃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툴툴거렸다.
“이제야 인정하다뇨. 내가 그동안 당신을 어떻게 여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남편의 탈을 쓴 나쁜 놈 정도?”
웃음기 서린 대꾸에, 그간 속으로 릴을 나쁜 놈이라고 욕해대던 게 떠올랐다. 발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나는 또다시 속으로 비명을 질러야 했다.
‘……엄마야!’
세상에, 그걸 전부 다 알고 있었다는 거 아니야?
릴이 그동안 날 신나게 놀려댄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건 단순히 반응이 재미있는 걸 넘어섰다. 나였어도 밤을 새워 놀려댔겠다!
나는 일단 입술을 비죽 내밀고 보았다.
“아, 알면 잘 좀 하지. 그러면 더 빨리, 마음을 다해서 좋은 남편이라고 받아들였을 거 아니에요.”
“어라, 섭섭하게. 아내님께 나만큼 잘하는 남편이 어디 있다고.”
…예쁜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있을 릴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상상이 갔다. 이번에는 놀려먹을 거리를 찾은 모양이다.
허리를 타고 올라오던 못된 손이 자연스럽게 풍만한 살덩이를 틀어쥐었다.
아, 아니, 이 인간이! 벌건 대낮…… 은 아니지만. 이런 곳에서!
엉큼하기 그지없는 행동과 다르게 그는 평온하게도 말을 이었다.
“늦었지만 결혼식도 하겠다고 하잖아. 네가 원하니까.”
“그건 원래 해야 하는 거였잖아요.”
나는 릴의 손목을 일단 움켜쥐고 보았다. 자연스레 옛일을 입에 얹는 건 덤이었다.
“말리크께서도 우리 부모님과 상의해서 날 잡겠다고 하셨었고요. 어쩌다 보니 얼렁뚱땅 넘어간 거면서.”
“어쩌다 보니 얼렁뚱땅 넘어간 게 아닌데.”
릴은 평온하게도 대꾸했다. 그 목소리가 얄밉게 들린 건 당연한 일이다.
“네가 사고 친 덕에 물 건너간 거지.”
“……사고요?”
“오펠에 내려갈 일만 없었어도 형님께서 정말 화려하게 준비해 주셨을걸?”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완전히 앗아가는 소리였다.
그러게나 말이다. 나 그때 사고 쳤었지. 엉엉, 결국 내 잘못으로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멀리 돌아오게 된 건가?
“그리고 정말 미안한 소리 하나 해야 할 거 같은데.”
잠시 말을 멈춘 릴이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렇게까지 화려하게는 못 할 거야. 적당히 구색 맞추는 정도로 해야 해.”
“화려한 건 안 바라요. 적당히 구색 맞추는 정도가 어디예요.”
무엇보다 릴이 생각하는 ‘적당히 구색 맞추는 정도’는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화려할 게 당연했다. 태생이 왕족인 그의 금전 감각은 나와는 전혀 다른 곳에 있으니까.
아니, 금전 감각은 둘째 치더라도 카림의 결혼식을 대충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왕실의 위엄이 있지, ‘적당히 구색 맞추는 정도’는 웬만한 귀족의 결혼식보다 화려할 터였다.
아, 결혼식이라니. 가슴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며칠 내내 우울했던 마음이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난 참, 여러모로 단순한 사람이었다.
* * *
말리카의 임신 소식을 들은 건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도 오랜만에 저택까지 뛰어온 언니 덕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리니, 얘, 리니!”
턱까지 닿은 숨을 헐떡이는 언니의 눈썹이 휘날리는 것만 같았다. 날 보는 언니의 황금빛 눈이 희번득했다.
그 살벌한 기세에 반쯤 얼어붙은 나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엄마야, 언니의 눈에서 뭔가 광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다.
“왜 그래, 언니?”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말리카가 임신했다고!”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언니와 다르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말리카에게 큰소리 빵빵 치고 왔는데 아무 일도 없었으면 그거야말로 큰일이니까.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묘한 자부심도 차올랐다.
‘나…… 생각 외로 대단한 사람이었네?’
그토록 오랫동안 불가능했던 일을 한 번에 해결하고. 도리어 현실감이 없었던 다른 일들보다 더욱 크게 다가오는 기적이었다.
이러다가 언젠가, 사람들이 나를 떠받드는 거에 익숙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다소 평온하고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언니가 발을 동동 굴렀다.
“이걸 어쩌면 좋아!”
다급해 보이는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응? 그게 왜?”
순식간에 내게 다가온 언니가 내 어깨를 덥석 움켜쥐었다.
“말리카께 자식이 생기면 카림을 가만히 두시겠니? 응? 너 이렇게 얌전하게 있을 때가 아니야. 지금부터 한 사람이라도 더 네 편으로 만들어서 말리카가 아무 일도 못 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언니를 빤히 올려다본 나는 한 차례 눈을 깜빡였다.
“언니, 아직도 릴이 말리크가 되길 바라?”
물론 아직도라고 말하기에는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긴 했지만. 내 태도가 답답했던 듯 언니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때렸다.
“지금 그게 문제니? 응? 그게 문제냐고!”
“그럼? 뭐 다른 중요한 일이 있어?”
“갑자기 바보가 됐니? 말리크고 자시고, 카림이 죽으면 너도 끝이라고!”
상냥하고 다정하고 친절하기까지 한 우리 언니는 내 걱정을 하고 있었다. 뭐, 저게 일반적이고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다만 언니의 마음에 감동이 밀려온 나는, 눈시울에 눈물이 핑 감돌았다.
“언니…… 지금 내 걱정 하는 거야?”
“…….”
내 태도가 기막혔던 듯 언니가 나를 보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할 말은 많지만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던 모양이다.
“아무 걱정 안 해도 돼. 말리카가 아이를 가진 건 다 내 덕이란 말이야.”
“……뭐?”
나를 가리키는 언니의 손가락이 파들파들 떨려왔다. 언니는 반쯤 혼이 나간 얼굴이었다.
“너…… 일 저지른 거니? 그런 거야?”
이게 일을 저지른 건가?
…아무래도 언니가 오해하기 너무 좋은 상황인 것 같았다. 때문에 빠른 설명을 덧붙여야 했다.
“저, 언니? 릴과 상의해서 한 거야! 그러니까 언니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말리카와 약속…… 이라고 하긴 뭐하고, 거래를 했단 말이야.”
“거래? 말리카를 어떻게 믿고 거래를 해?”
두 주먹을 꾹 움켜쥔 언니는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아미르라도 태어나면? 거래를 했다고 그걸 지킨다는 보장이…….”
“애초에 아미르를 가지게 해주겠다고 했는데…….”
“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소리에 언니가 빽 소리를 질렀다. 화들짝 놀란 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까, 깜짝이야. 놀랐잖아!”
“넌 바보니? 멍청이야? 대체 말리카의 뭘 믿고 아미르를 가지게 해주겠다고 해! 카림도 그렇고!”
“아니, 그게……. 말리카도 어렵게 가진 아이잖아.”
나는 소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없었으면 애초에 가질 일도 없었을 거다.
이어서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 생각에도 양심이 쿡쿡 아파오는 협박을 한 전적이 있어서.
“나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 어렵게 가진 아이가 없어질 거라고 덧붙였을 뿐인데…….”
언니가 입을 떡 벌렸다. 그 상태 그대로, 어렵게도 말을 만들어냈다.
“얘가…… 얘가…….”
부정확한 발음이 흘렀다.
“저런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우리 프리드린이 어디 갔지……?”
……그래도 내가 생각이란 건 하고 살았다고, 칭찬 아닌 칭찬을 할 줄 알았던 언니의 반응이 조금 많이 의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