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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111화 (1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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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랬냐니!

순간적으로 뒷목을 잡고 싶은 발언이었다. 누구는 심각해서 미칠 것 같았는데, 땅을 파다가 언니 앞에서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며 추태나 보였는데!

정작 이 사태를 만든 본인은 자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는 거 아니냐고!

릴은 통통한 내 뺨을 손끝으로 툭, 툭 퉁기며 말을 이었다.

“미안, 미안. 요즘 정말 너무 정신이 없어서……. 브렌델에 있을 때 같아.”

나를 향해 생긋 눈을 휜 릴은 정말…… 묘하게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긴 했다. 다크서클이 시커멓게 내려앉아 있었다.

브렌델에 있을 때 같다고. 브렌델에 있을 때는, 내가 언니를 되살린 덕에 정말 정신없이 바빴던 시기긴 했다. 릴의 얼굴조차 보는 게 힘들었을 정도였다.

다만 저 말이 릴의 입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에 신빙성이 조금 떨어진다는 게 문제였다.

일과는 아득하게 떨어져 있는 사람이 저게 지금 무슨 소리람? 적어도 이 게르드에서는 말이다.

“당신…… 직무 유기 하는 거 아니었어요?”

당연히,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물음에 릴이 확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아서라. 다시 그랬다가 이번에는 어디로 쫓겨날지 알고. 너 떼놓고 전국 다 돌아다니리?”

“모르는 척 철판 깔고 쫓아가면 되는데.”

이번처럼 말이다. 내가 생각해도 무척이나 뻔뻔했던 짓이었다.

어쨌든 릴을 걱정스럽게 올려다보던 나는 한마디 덧붙여야 했다.

“그러다 말리크께 코 꿰이면 어쩌려고요?”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말리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하긴, 말리크가 나서서 후계자가 어쩌고…… 하는 순간 말리카가 나서서 정말 난리를 칠 터였다. 가뜩이나 조만간 아이를 가진다면 말리카의 발언권은 어마어마해지겠지.

이어 릴은 나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익숙한 품에 자연스럽게 폭 안겨들자, 릴은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우리 다람쥐, 서운했어?”

“……흥.”

아닌 척 콧방귀를 뀌었지만, 릴은 다 안다는 듯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서운하다 못해 절망해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 아, 언니가 또 한동안 날 놀려먹겠다.

뒤늦게 저 현실을 깨달은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정말 바빠서 그런 거 맞아요?”

“응. 궁에 있으면 그냥 그대로 쓰러지고 싶을 지경이거든. 근데 그럴 수가 없잖아.”

릴은 지겹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를 조금 더 강하게 끌어안더니, 내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내 향을 맡듯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형님이 쪼아대지, 재상들이 난리를 치지……. 있잖아, 프리드린. 세린 재상이 원래 그렇게 잔소리가 많은 사람이야?”

“할아버지요? 뭐…….”

우리 할아버지, 잔소리가 많긴…… 하시지.

내 말에서 생략된 이야기를 읽은 듯, 릴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지간히 끔찍했던 듯.

…할아버지의 잔소리 지옥은 당해본 사람만 안다. 사람을 진실로 때리는 데에는 아주 도가 트신 분이셨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릴에게 잔소리를 한다는 건 나름대로 긍정적인 상황인 거 아닌가? 릴을 이그드라실의 무엇…… 이라기보다는 왕실의 카림으로 보시는 것일 테니까.

“집에 돌아가면 네가 곁에 있으니까 긴장이 탁 풀리잖아. 천국이 따로 없었어.”

릴은 부드러운 어조로 속삭였다. 그러니까 긴장이 풀려서 그냥 푹 쉬었다는 소리잖아?

물론 내가 그동안 느껴 온 것은 저 말과는 조금 달랐다.

내 곁이 천국이었다는 사람이, 말도 안 하고 스킨십도 안 하고……. 평소와 태도가 너무 달랐잖아!

입술을 비죽 내민 나는 툴툴거렸다.

“……내가 안 느껴진다면서요.”

“응?”

“당신, 그렇게 말했던 그날 이후부터 이상했다고요.”

정확하게 말하면 혼란스럽다고 읊조리며 뒤돌아 누운 그때부터!

“내가 어떤 생각을 해야만 했는지 알아요? 그 와중에 그놈의 고양이는 사람이 느껴져서 애정을 가진다는 소리나 하고!”

이어진 말에 내가 울며불며 난리를 친 이유를 알았던 듯 릴이 아, 하고 한탄을 토해냈다.

“그래서 싫어졌냐고 물어본 거였어?”

…뭔가 창피함이 몰려들어서 대답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했다.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던 릴은 천천히, 세심하게 단어를 골랐다.

“그게 썩…… 중요한 건 아닌데.”

“그럼 그땐 왜 그랬어요?”

“혼란스러운 건 사실이었어. 잠깐이었지만. 물론 불편해진 것도 맞고.”

그 말에 나는 잠시 멈칫거렸다. 자신의 품 안에서 내가 바르작거리자, 릴은 조금 더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그 품 안에서 한없는 안도와 위안을 느꼈다. 와, 정말 이건 중증이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불편해요?”

“응.”

“뭐가요?”

“그동안은 네가 어디서나 느껴지니까.”

릴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지금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듯했다.

“생각해봐, 너라는 사람의 모든 것이 계속해서 전달되는데 신경 쓰이고 눈에 밟히는 게 당연하잖아. 가만히 있어도 네가 기쁜지 슬픈지 화가 나는지…… 다 알 수가 있었거든.”

…그건 괜히 등골이 서늘해지는 발언이었다.

릴은 내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다는 거 아닌가? 엄마야, 그러니까 그가 내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잖아!

“근데 그게 느껴지지 않으니까 뭐 하나를 해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순간적으로 구분이 안 가더라.”

릴이 나를 흘끗 바라보는 것 같았다. 마차의 움직임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나지막한 한숨을 내쉰 그는 굉장히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예전에는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바로 알 수 있어서 더 신나게 놀릴 수가 있었는데.”

“…….”

…이, 이 나쁜 놈아! 정말 나 놀려먹는 재미로 살지!

“어, 언제는 얼굴에 생각이 다 보인다면서요.”

그리고 나는 늘 그렇듯 본전도 찾지 못할 말을 내뱉었다.

“생각은 다 보이지. 지금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투명하게 읽히긴 하는데.”

릴이 씨익,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사악하게 웃고 있었을 것이다. 날 어떻게 놀려먹을지 궁리하면서.

“그게 감정을 말해주는 건 아니잖아?”

이어서 엄청난 말이 튀어나왔다.

“그동안 넌 입으로는 싫다고 해도 심정적으로는 좋아했어.”

뭐, 뭐라고요?

순간 귀를 의심한 나는 한 박자 늦게 되물어야 했다.

“……네?”

“그거 알아?”

“뭐, 뭘요?”

“내가 놀려먹을 때 너 되게 즐거워했다?”

입을 떡 벌릴 발언이었다. 어눌하기 그지없는 말이 입 밖으로 흘렀다.

“뭐, 뭐예요? 내, 내, 내가 뭘 즐거워해요?”

“내가 너 놀리면 즐거워서 견딜 수 없어 하던데.”

아니, 이 인간이?

“내, 내가 언제요!”

“분명히 좋아했어.”

“나 그런 변태 아니거든요!”

“변태라고 한 적은 없는데. 네가 원한다면 변태로 인정을…….”

…그 말에는 참지 못하고 손을 날려야 했다. 그의 팔뚝을 때리는 내 손이 신명 나게 움직였다. 찰싹, 찰싹. 찰진 마찰음은 덤이었다.

“내, 내가 지금 좋아하는 걸로 보이냐고요!”

“재밌어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

내가?

이게?

이거야말로 내가 그랬나? 라는 말이 튀어나와야 할 상황이다. 대체 어딜 봐서 좋아하고, 재미있어하냐고!

기막힌 나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릴은 습관처럼 자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젠 싫어할까 봐 놀려먹지도 못하겠어.”

아, 그건 대환영이다. 제발 놀려먹지 좀 말라고! 좋아한 적 없어! 언니랑 둘이 쌍으로 그럴 때에는 엄청 괴로웠단 말이야!

잠시만. 그럼 그날 아이 얘기에 돌아누웠던 것도 같은 맥락인가?

그동안은 자신이 놀리면 내가 즐기는 줄 알고, 더 신나게 놀린 거고. 이번에는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쯤에서 그만둔 거고?

‘와, 순 엉터리 능력 아니냐고!’

“그리고 해야지.”

갑작스러운 말이 이어졌다. 날 또 놀려먹겠다는 말로 들려서, 곧장 볼멘소리를 내야 했다.

“하긴 뭘 해요!”

“결혼식.”

하지만 이어진 것은 채찍에 이은 아주 달콤한 당근이었다.

…내 귀가 팔랑거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상냥한 목소리가 이어서 들렸다.

“하고 싶다며?”

“생각해본다면서요. 생각 끝났어요?”

“당연히. 아내님이 원하는데 해야지.”

“어, 언제요?”

“이왕이면 빠르게?”

아주 만족스러운 답에 내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물론 내 반짝이는 시선을 보지 못했을 그는 나를 더 바짝 끌어당겼을 뿐이다.

진담처럼 들리는 농담이 이어졌다.

“일단 식장으로 끌고 들어가서 거절 따위는 못 하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그전에 장인 장모님께 가서 울고불고 할까 봐 안 되겠어.”

…릴의 손이 여전히 축축한 내 뺨을 스쳤다. 아하하, 아주 합당한 추론이네. 이 기묘한 냉전이 더 이어졌다면 정말 부모님께 쫓아가서 통곡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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