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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를 한참.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말리카는 내 말을 곱씹었다.
“아미르…… 아미르라고요.”
들려오는 목소리는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애틋하기 그지없는 손끝이 아랫배를 감싸 안았다. 아마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 간단한 동작에서 말리카가 그간 쌓아 올린 고난의 날과 고통의 시간이 읽히는 것만 같았다.
“이제 와서…….”
쓸쓸한 미소가 아름다운 얼굴에 가득 번져 나갔다.
…나야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또 비교적 어리니까 아이 얘기만 나오면 기겁을 하곤 했지만 말리카는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애가 타고 가슴 아픈 존재가 아이이지 않을까.
말리카라는 자리는 둘째 치고, 두 사람은 함께한 지 이십 년이 다 되어가는 금슬 좋은 부부니까. 자신을 닮고 사랑하는 남편을 닮은 아이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까? 아들이든 딸이든 간에.
한순간, 언제나 아름답고 고고했던 말리카가 무척이나 처량한 사람처럼 보였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군요.”
“말리카께서는 왜 저를 이그드라실이라고 부르세요?”
그래서 나는 불쑥 물어야 했다. 무슨 의미냐는 듯 말리카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제가 이그드라실에 꽃을 피워서요? 말리크의 머…… 머리카락을 자라게 해서요?”
…후자는 언제 생각해도 창피한 일이었다. 덕분에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게 아니면 언니를 되살려서요?”
그건 내가 일으킨 가장 큰 기적이었을 것이다. 광신도 하비에르와 다르게 말리카는 그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글쎄요. 그 모든 게 이유가 되기는 하지요.”
말리카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만 신화를 제 눈앞에서 목격한 순간부터 프리드린은 이그드라실이었어요. 믿고 따르던 이야기가 눈앞에서 펼쳐졌는데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요.”
“하지만 제가 말리카께 제안드린 일 정도를 하지 못한다면, 이그드라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걸요.”
있는 허세, 없는 허세를 다 부리는 내 허리가 떨려왔다. 의자에 앉아있기에 망정이지 자리에 서 있었으면 말리카가 내 모습을 보고 비웃었을 터였다.
어쨌든 얼굴만큼은 멀쩡했던 난 말리카를 바라보며 최대한 상냥하게 눈을 휘었다.
“그러니까 그건 제가 이루어드릴게요. 제가 말씀드린 두 가지 조건을 들어주시기만 한다면요.”
“…….”
말리카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려왔다. 어차피 지금 말리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 * *
나는 밤이 다 되어서야 저택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정시에 칼처럼 출퇴근하는 릴은 나보다 먼저 저택에 돌아와서 침실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날 발견한 그는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뭐야, 너 언제…….”
말을 다 마치지 못한 릴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한탄을 토해내는 건 덤이었다.
“하, 이거 정말 익숙하지 않네.”
“네? 뭐가요?”
“널 파악하지 못하는 거.”
…내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그 말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그드라실의 드리아스가 말했던 것처럼, 이그드라실이 잠들어 있는 사이 힘이 약해진다는…… 그 영향을 받은 게 아니었을까.
문뜩 예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언제는 썩 유쾌한 일은 아니라면서요.”
“그랬지. 근데 사람은 있다 없어야 소중한 걸 깨닫는다고 하잖아.”
릴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멀뚱멀뚱 서 있는 내 모습을 구석구석 살펴보다 중얼거렸다.
“지금 내가 그 짝이거든.”
“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릴이 나와 시선을 맞대었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에 얼굴이 뚫릴 것만 같았다.
“왜, 왜 그렇게 봐요?”
“널 느낄 수 없다는 게 이렇게 불편한 일인 줄은 몰랐어.”
짙은 한숨을 푹 내쉰 릴이 말머리를 돌렸다.
“아무튼 말리카는 잘 만나고 왔어?”
“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나는 말리카와 있던 짤막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렇게 말리카께 말씀드리고 왔어요.”
“우리 다람쥐, 이제 혼자서도 잘하네.”
짤막한 칭찬을 한 릴은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의 손에 바짝 밀착한 난 집사 손에 안긴 고양이처럼 갸르릉거렸다.
“같이 안 가길 잘한 것 같아.”
…그건 너무 당연한 소리였다. 같이 갔으면 첫 번째 조건은 꺼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부득불 릴을 떨어뜨려 놓고 혼자 다녀온 거였다.
릴이 말리카와 레브아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면 정말 피바람이 불겠지. 이건 꼭 지켜야 할 비밀이었다. 릴을 위해서라도.
“그래서 말리카는 뭐라고 해?”
“당연히 수락하시긴 하셨는데요…….”
내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만에 하나, 말리카가 무사히 아이를 낳은 이후 태도가 돌변할지도 모른다는 걸 염두에 두고 작은 협박거리를 하나 남겨둬서.
다른 건 아니고, 내가 준 선물이니 얼마든지 빼앗아 갈 수 있다고 했다. 무, 물론 저 빼앗아 가는 일이 정말 가능한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아요.”
“우리도 믿을 구석은 있어야지.”
“그건 알지만요…….”
물론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른 게 인간이라고 했다. 아미르가 무사히 태어난 이후, 말리카가 약속을 지킬 거라는 보장이 없기는 하니까.
“그래도.”
나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여야 했다. 늘 현실과 마음은 괴리가 존재하는 법이다.
“말리카가 얼마나 아이를 원했는지 알게 되니까 죄책감이 좀…….”
“넌?”
릴은 조용히 웃으며 물어왔다.
정말 뜬금없는 한마디였다. 눈을 멀뚱멀뚱 뜬 나는 릴을 올려다보았다.
“네?”
“넌 원하지 않아?”
부드럽게 가라앉은 음성이 물어왔다. 미끄러진 손이 내 뺨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익숙한 남자의 온기에 묘한 설렘이 피어올랐다. 저 온기가 내게 무엇을 주는지 잘 아는 터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뭘요?”
“아이.”
열감이 있는 푸른 눈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릴이 무엇을 원하는지 빤히 알 수 있었다.
다만 그의 눈에 비친 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항상 그렇듯 손짓, 발짓하며 부정을 표현해야 했다.
“우, 우, 우, 우리가 벌써부터 그런 이야기를 할 시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오오……. 아, 아직 신혼이잖아요!”
이 시간을 충분히 즐기고! 당연히 아이는 조금 늦게!
물론 릴을 닮은 아이면 정말 예쁘겠지? 성격은 나를 닮아야 세상을 무난하게 잘 살아가겠지만.
달콤한 상상이 가슴 속에 피어올랐다.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었다.
“미안.”
하지만 이윽고 들려오는 말에 순간적으로 귀를 의심했다.
……이건 내가 아는 릴의 반응이 아니었다. 내가 저러면 ‘그런가?’를 시작으로 더 짓궂게 놀려야 릴 아닌가?
아니, 물론 내가 놀림당하는 걸 즐기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저 반응은 뭔가 이상했다.
덕분에 제대로 당황한 나는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네?”
“좀 혼란스러워서…….”
“뭐, 뭐가요?”
대답하지 않은 릴의 손이 스르륵 멀어졌다. 그저 릴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금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내 시선을 피하듯 몸을 옆으로 돌렸다.
……이게 무슨 상황이래?
* * *
혼자 눈을 뜬 다음 날 아침은 쓸쓸했다. 나는 텅 빈 자리를 보며 멍청하게 눈을 깜빡여야 했다.
“이게…… 뭐야?”
사이가 가까워진 이후에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도리어 아침에 일어난 내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등청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나가던 사람이었는데. 인사도 안 하고 사라졌어?
그날 저녁, 릴은 다크서클이 복숭아뼈까지 내려온 상태로 귀가했다. 왕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지, 이른 저녁 베개를 베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아침에는 또다시 사라져버렸다. 인사조차 없이. 밤에는 나와 몇 마디 대화도 없이 잠만 자기 일쑤였다.
그런 이상한 상황이 며칠이나 계속되자, 나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뭔가 이상한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내 머릿속에 두 가지 말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카림도 마찬가지랍니다. 본격적으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면 라비아를 버리고 다른 가문을 찾을 거랍니다. 세린은 레반을 지지하니까요.’
말리카가 속삭였던 신뢰에 대한 것.
…말리크와 말리카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니까 릴이 혹시 다른 마음을 먹은 건가? 하는 의심이 순간 나를 찾아왔다.
‘난 너희가 어디에 있든 간에, 너희를 느낄 수 있으니까. 늘 너희와 함께하고 있는데 어떻게 애정을 가지지 않을 수가 있겠어?’
또 하나는 이그드라실의 드리아스가 했던 애정에 대한 말.
릴은 이제 내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동안은…… 나를 느낄 수 있으니까 내게 애정을 가진 거야?
‘이젠 아닌 거고?’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