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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그드라실께서…….”
말을 멈춘 말리카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험한 말이 튀어나오면 딱 어울릴 법한 모습이어서, 날 얼어붙게 했다.
“그 후광을 등에 업고 절 모함하시나요?”
“그, 그럴 리가요.”
“그러면 제가 레브아에게 해가 되는 일을 했다는 말씀을, 어쩌면 이렇게 쉽게 하실 수가 있으실까요?”
상냥한 어조의 압박이 이어졌다. 에, 에라, 모르겠다. 나는 눈을 딱 감고 내뱉었다.
“이건 말리크께서 제게 말씀해주신 일이에요.”
“…….”
순간 할 말을 잃은 말리카는 입술을 수차례 떨었다.
이, 이거 진짜 맞거든요?
릴에게는 굉장히 미안하지만, 릴이 말했을 때에는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말리카가 레브아를 아프게 한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하물며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기도 하고, 내가 아는 말리카는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원한이 있는 사람의 눈에는 선행조차 악행으로 보이는 법이었다.
하지만 말리크가 나서서 증언하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말리크는 말리카에게 불리한 이야기를 함부로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말리카의 품격이 떨어지면 말리크의 품위도 함께 손상된다. 무엇보다 이런 일은 남의 귀에 들어가면 당장 쫓겨나서 목이 잘릴 죄일지도 모른다.
제법 시간이 지난 후에야 말리카는 말이란 걸 만들어냈다.
“……레반이?”
그것도 겨우 한마디였다. 자신은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다고 부정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충격을 삼킨 듯 말리카의 시선이 조각났다. 우아하게 쓰고 있던 가면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가련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레브아는 릴의 어머니지만, 말리카가 레브아를 병들게 했다는 것도 진실이지만. 내게 심적으로 가까운 사람은 레브아보다는 말리카였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나쁜 짓을 저지른 게 분명하지만 말리카를 마냥 미워할 수는 없었다. 말리카가 내게 베푼 은혜도 적지는 않았으니까.
“네. 그러니까 이건 레브아와 릴뿐만 아니라 말리카를 위해서도, 반드시 하셔야 해요.”
말리카가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붙잡았다. 깊은숨을 고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와 같은 얼굴이 된 말리카는 담담하게 다시 물었다.
“레반이 이그드라실께 뭐라고 했죠?”
“레브아를 아프게 하는 분이 말리카시라고요.”
이마에 닿았던 손이 툭, 테이블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잠시 생각에 잠긴 눈을 한 말리카가 이내 중얼거렸다.
“프리드린은.”
날 부르는 호칭이 바뀌었다.
“제 곁에 일 년을 머무셨지요. 일 년은 참 짧은 시간이에요. 그래도…… 정말 많은 것을 보셨을 거예요. 왕궁이란 그런 곳이니까.”
솔직히 짧다고 표현하면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지만, 시간에 비해 많은 것을 보긴 했다.
영지에서 되게 앓고 있던 내게 왕실의 일은 떠다니는 소문일 뿐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직접 본 것들은 복잡하고, 충격적이고, 잔인한 것들의 연속이었다.
말리카가 릴을 극심하게 경계한다는 것도 그때 알았고, 계승과 연관된 문제가 마냥 들려오던 이야기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
미친개로 유명한 카림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말리카가 그것 때문에 골치 아파 하고 있다는 것도 그때 내가 직접 목격한 일들이었다.
…물론 릴은 끼어들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일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지만.
“그러면 제 곁에 머무셨을 때, 제가 언제까지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셨나요?”
“참다니요?”
“제가 모든 일을 가만히 두고 지켜보다가 카림께 모든 것을 넘겨야 했나요?”
사실 그때 당시에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제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텐데도 그렇게 해야 했을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말리카가 필사적인 이유는 이 정쟁에서 패하면 자신의 목이 떨어질 것이기 때문일 터였다.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다들 살기 위해 발버둥 치지.
‘어, 어라?’
근데 이거 반대로 생각하면, 말리카가 이기면 나와 릴과 레브아의 목이 차례대로 떨어지는 거 아닌가? 무, 물론 말리크가 릴의 편이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리카가 비틀린 미소를 덧그렸다.
“그것도 레반의 숨겨둔 자식에게요.”
“그, 그건 말리크께서도, 레브아께서도 아니라고 하신 일이에요.”
“그 말을 믿으시나요?”
나는 그저 말리카를 빤히 응시했다. 긍정의 의미를 바로 알아들은 말리카는 피식, 하고 비웃음을 터뜨렸다.
“항상 생각하지만 프리드린은…… 정말 천진난만한 분이세요.”
…부드럽게 돌려 말했지만 썩 기분 좋은 내용은 아니었다. 말리카는 나를 가르치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잘못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답니다. 잘못을 끊임없이 회피하고 부정하죠. 아니라고 우기다 보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게 되는 법이니까요. 어차피 진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억울하고 필사적인 당사자뿐이고요.”
결론적으로 말리카는 그……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믿고 있다는 거였다.
물론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은 아니었다. 나도 그놈의…… 청설모 꿈을 꿨을 때쯤 저런 일이 벌어졌다면 소문을 믿을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무엇보다 형제인 릴과 말리크는 닮을 수밖에 없었고. 말리크는 릴을 아들처럼 생각한다고 말하고, 실제로 그렇게 키우기도 했고.
…정황상 의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말리크에 대한 신뢰가 그렇게 없으세요?”
“신뢰라고요?”
말리카는 무척 우스운 말을 들은 것처럼 되물었다.
“프리드린이 순진하게 신뢰를 들먹이실 줄은 몰랐네요.”
순진하다니.
아니, 물론 내가 잘 속고, 맨날 놀림당하고…… 그런 면이 있긴 하지만 순진하단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정말 순진했다면 지금 여기 와서 이러고 있지도 않았다고!
“프리드린, 말리크와 말리카는 일반적인 부부와 거리가 멀답니다. 레반이 아무리 절 예쁘게 여겨도 그뿐. 마음이 바뀌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말리카로 세우겠죠.”
그 금슬 좋은 부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삭막한 말이었다. 덕분에 깨달았다.
말리카도 말리크의 속을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더 릴을 경계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릴이나, 말리카나. 둘 모두 정말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는 싸움이었구나.
……안 끼고 싶다. 흑흑. 이러다 새우 등 터질지도 모른다.
“카림도 마찬가지랍니다.”
그 뜬금없는 소리에 멍청하게 되물었다.
“……네?”
“본격적으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면 라비아를 버리고 다른 가문을 찾을 거랍니다. 세린은 레반을 지지하니까요.”
합리적인 추론이긴 했다. 그래서 더 기분이 나빠지는 말이었다. 원래 맞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더 상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나도 조금 심술을 부렸다.
“아름다운 말리카.”
“네, 말씀하세요.”
“조금 전, 말리크께서 조만간 릴을 후계자로 공표하겠다고 말씀하셨거든요.”
내 말에 말리카의 두 눈이 진동했다. 평정을 잃은 말리카는 다급하게 되물었다.
“……뭐라고요?”
“릴은 거절했지만 준비하고 있으라고 엄포를 놓으셨어요.”
“…….”
말리카는 또다시 할 말을 잃은 듯했다.
“하지만 저희는 조용히 살고 싶어요. 릴은 후계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거든요. 저도 그러기를 바라요. 릴이 프레이르의 말리크가 된다뇨, 나라 망해요.”
마지막 말은 진심이었다. 말리크는 릴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했지만…… 릴의 취미 특기는 직무 유기 아니냐고.
시키는 일은 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잘하는 것도 마음이 내킬 때나지. 국정을 돌보지 않는 희대의 폭군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말리카께서 더 이상 릴과 반목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말리카가 하, 하고 기막힌 웃음을 내비쳤다.
“지금 제게…… 그 말을 믿으라고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물론 나도 그냥 들으면 절대 믿지 못할 말이긴 하다.
“그래서 두 번째 조건이 나오는 거예요. 말리카께서 말리크를 좀 말려주세요.”
“프리드린, 난 레반을 말릴 수 없어요. 이미 결정을 내리고 공표까지 하겠다는 거면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듣지 않을 테니까.”
“아뇨, 말리실 수 있어요. 아름다운 말리카께서 간절하게 원하시는 걸 이루시면요.”
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은 정말 딱 하나뿐이었으니까.
말리카가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그래서.”
확인하듯이 묻는 목소리가 떨려왔다.
“프리드린이 볼 때 내가 간절하게 원하는 게 뭘까요?”
“아이요.”
반신반의하는 능력이긴 했지만…… 이그드라실이 된다고 했으니까 할 수 있겠지. 안 되면 내가 신전의 이그드라실을 불살라버리고 말 테다.
“제가 아미르를 가질 수 있게 해드릴게요.”
말리카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